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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부를까 가까이는 부를 만한 이웃이 없고 멀리 있는 벗은 올 수가 없는데…/지난밤에는 열기에 떠 줄곧 헛소리를 친 듯한데 무슨 말을 했을까/앓을 때에야 새삼스레 혼자임을 느끼는가 성할 때에도 늘 혼자인 것을/또 열이 오르네 사지에는 보오얗게 토우(土雨)가 내리고 가슴은 마냥 가파른 고갯길/이러다가 육신은 죽어가는 것이겠지…/바하를 듣고 싶다 그중에도 ‘톡카타와 후우가’ D단조를….’법정 스님(1932∼2010)이 1965년 불교신문에 실은 시 ‘병상에서’의 일부다. 스님은 산문으로 필명을 얻었지만 시재(詩才) 역시 뛰어났다. 어느 날 찾아온 육신의 고통, 그 이상의 수행자의 외로움, 가슴 한구석에 삭혀둔 낭만까지 물씬 풍긴다. 무소유의 삶에 말과 글 빚조차 저어했던 스님의 생전 일거수일투족.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 가는 길을 더 아쉬워했다. 청빈의 삶과 사람들에게 사색의 시간을 준 글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 없으리라. 그러나 절집 일부의 세평에서는 다른 말도 있었다.깔끔하고 괴팍하다, 고고한 것이 지나쳐 외골수다, 아는 것 많으나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일부의 사실도 있고 시샘도 있을지 모른다. 스님의 법명을 훼손하려는 게 아니라 그 삶을 더 잘 보기 위해 옮긴 것이니 이해를 바란다. 스님은 주지나 총무원 소임과는 거리가 먼 체질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다. 스님이 총무원 소임을 맡은 적이 있다. 한나절이나 될까. 1960년대 초반 경산 스님이 총무부장, 내가 교무국장을 하던 시절 스님은 문화국장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사무실의 옴짝달싹 못하게 붙은 책상 하며 주변의 소란을 못마땅해 하더니 “못 하겠다”며 훌쩍 가버렸다. 그걸로 끝이었다.그처럼 법정 스님은 번잡한 일은 질색이었지만 글과 공부를 만나면 빛이 났다. 우리 불교사에서 한글 경전시대를 개척한 운허 스님(1892∼1980)을 도와 역경 편찬에 공을 들였다. 1970년대 불교신문 논설위원과 주필을 지내던 스님은 말 그대로 펜촉처럼 날카로웠다. 젊은 스님들이 ‘주지병(病)’ ‘대학병(病)’에 걸렸다거나 베트남 파병을 비판하는 등 스님 글이 필화(筆禍)로 갈 조짐이 보이면 주변 스님들이 이를 무마하느라 진땀을 흘렸다.스님이 세속 나이로 세 살 위지만, 비슷한 시기에 출가해 도반으로 지냈다. 출가 초기에는 선학원과 선방, 사찰에서 이따금 마주쳤지만 살면서 점점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다. “월주 스님이 전두환을 지지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라는 법정 스님의 말을 전해 듣기는 했다. “법정 스님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제 전화도 없다”는 강원용 목사의 푸념도 기억난다. 강 목사가 국정자문회의에 참여한 이후 연락이 끊긴 모양이다. 생전 전화와 담을 쌓고 지낸 스님은 1994년 내가 총무원장이 되자 전화를 했다. 축하한다는 짧은 전화였다. 스님과 다시 조우한 것은 1997년 12월 요정이었던 서울 성북동의 대원각이 길상사로 다시 태어나는 개원 법회 때였다. 김수환 추기경도 참석했고 나는 총무원장 자격으로 갔다. 길상사가 도심 사찰로 포교와 문화의 중심지가 돼 달라고 당부했다. 스님과 나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이 법회의 인연을 끝으로 스님은 길상사 법회와 글쓰기 외에는 산중에 은거하며 수행했다. 나는 1998년 총무원장 선거 뒤 종단 개혁보다는 사회봉사와 자비행을 통한 ‘깨달음의 사회화’에 나섰다.2010년 3월 11일 스님이 입적한 날, 나는 지구촌공생회 활동을 위해 미얀마에 머무르고 있었다. KBS 라디오의 요청으로 스님의 삶에 대해 15분간 이야기를 했다.스님의 꼿꼿한 면을 굳이 들춘 것은 길상사 주지와 회주 자리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차마 내치지 못한 것은 인연과 원력 탓이다. 한동안 스님 상좌들이 서로 낯 붉히는 일이 있었다. 되새길 만한 일화가 있다. 부처님 시기에도 제자들의 다툼은 있었다. 이에 실망한 부처님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자 신도는 물론이고 시주도 줄어 생활이 어렵게 됐다. 제자들은 반성하고 다시 무릎을 조아렸다.길상사가 길상사인 것은 법정 스님의 그림자 때문이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스님의 뜻인가를 잘 새겨야 한다. 스님, 차 한잔 나누며 과거지사를 얘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⑦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10·27법난부터 백담사행까지 불교계와 실로 얄궂은 인연을 맺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납니다.}

‘목사님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는 가르침을 근거로 불교야말로 생태계 파괴와 빈곤 등 생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성경 자구(字句)에 구애되지 않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안목을 가진 목자였습니다.’강원용 목사(1917∼2006)가 8월 17일 타계한 뒤 며칠 지나 내가 불교신문에 쓴 추모글 일부다.강 목사와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나 셋 중 강 목사는 실제 나이가 가장 많았고, 큰형 같은 존재였다. 각자 하나의 종교를 대표하기에 언제나 서로 깍듯하게 존칭을 썼지만 분위기를 전하자면 그랬다. 추기경이 과묵하고 속 깊은 스타일이라면, 강 목사는 연락도 자주 하고 소통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대화의 선구자’, 이처럼 강 목사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도 없다. 달변과 다변, 그리고 자리를 끌어가는 데 능숙했다. 청담 스님과 가깝게 지낸 강 목사는 한 번 오면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가곤 했다. 1965년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설립한 뒤 종교와 지역, 정파 간 대화를 위해 평생 노력했다. 청담 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있던 1960년대 후반 불교도대회에서 강 목사가 축사를 했다. 여러 종교가 함께 시대와 역사를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종교 간 연합 행사나 교류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강 목사처럼 말하고 행동하려면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강 목사의 정치적 활동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 정권 시절의 국정자문회의 참여도 그중 하나다. 강 목사가 오랫동안 시무한 경동교회에 다니던 황영시 장군이 찾아와 자문회의 참여를 권유했다. 훗날 강 목사는 “DJ(김대중)와 정동년을 살려 달라”는 자신의 조건을 수락하기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노태우 정부 때에는 국무총리 설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김 추기경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없었지만 강 목사는 정치적 욕구가 있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강 목사의 기여와 희생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에서도 사회적 구원이 필요하다고 믿은 강 목사의 신앙관에서는 사회, 정치적 참여가 자연스러웠다는 뜻이다.신학은 물론 역사와 정치에도 해박했던 강 목사는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광복 직후 정치 지도자의 노선을 긍정적으로 자주 언급했다. 특히 여운형의 경우 15세 때부터 심취했다고 말하기에 내가 “결국 실패한 지도자가 아니냐”고 반박하기도 했다.그가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무기는 대화였다.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고 ‘제3의 지대’에 서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그가 마련한 장(場)에는 종교와 지역, 계층을 뛰어넘어 많은 이들이 모일 수 있었다. 대화 하나로 권력을 견제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강 목사의 정신은 불교의 중도(中道)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다른 종교와 종교인을 바꾸려는 개종주의자가 아니라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한 동반자였다.2006년 6월, 내가 대표로 있던 지구촌공생회 행사가 있어 연락했더니 강 목사는 여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왔다. 그때 강 목사는 “스님께서 제가 주최하는 행사에 자주 오셔서 (몸이) 불편하지만 왔습니다.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1995년 총무원장으로 부처님오신날 행사의 봉행위원장을 하면서도 잠시 틈을 내 크리스챤아카데미 창립 30주년 행사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 대화가 끝이었다. 강 목사는 자신의 죽음을 예측이라도 한 듯 2개월 뒤 세상을 떴다.올 6월 가톨릭의 김수환추기경연구소, 불교의 맑고향기롭게, 개신교의 대화문화아카데미(옛 크리스챤아카데미)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해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강 목사는 개신교의 사명이 ‘세상의 개신교화(化)’가 아니라 ‘인간화’에 있다고 믿었다. 우리 사회에 그 언제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화해의 씨앗을 심었다”고.강 목사는 사랑과 자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이를 실천한 분이었다. 자문(自問)해 본다. 왜 요즘은 그런 분이 드물까.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⑥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맑고 향기로운 무소유의 삶이지만 젊은 시절 펜촉처럼 날카로웠던 법정 스님을 회고합니다.}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의 ‘바보 사랑’은 하심(下心·자신을 낮춤)으로 옮길 수 있다. 스스로 끊임없이 낮추지 않으면 그런 경계 없는 사랑이 불가능하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조차 품에 안으려고 했던 분이다.2009년 2월 16일 서울 영화사에서 추기경 선종 소식을 접하고 한달음에 명동성당으로 달려갔다. 아직 시신이 도착하지 않아 1시간 반을 기다린 뒤 조문했다. 가는 길 내내 여러 상념에 빠졌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황망했다. 깊은 허탈감이 밀려왔다. 1971년 청담 스님 열반 때 조문 온 추기경을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만난 뒤 40년 가깝게 알고 지냈다. 그때 나는 총무원 교무부장이었다. 앞서 세상을 뜬 강원용 목사(1917∼2006)와 추기경, 그리고 나는 종교가 달랐지만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삼각형 같은 관계였다. 외환위기와 노사갈등, 공명선거, 민족화해와 국민통합을 위한 노력…. 세상이 필요로 하는 요구에 맞춰 2인3각이 아니라, 3인4각으로 숱한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한 사람이라도 빠졌다면 너무도 허전하고 외로웠을 것이다.추기경은 열세 살 연상으로 띠 동갑도 넘었지만 나를 부르는 호칭은 언제나 ‘총무원장 스님’ ‘송월주 스님’이었다.추기경을 만날 때마다 사심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떠올렸다. 1997년 ‘외채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 때의 일이다. 추기경이 금 십자가를 갖고 왔다. “십자가면 신앙의 상징인데…”라고 하자 추기경은 “예수님은 몸도 십자가에 바쳤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죠”라며 특유의 미소를 보였다.김 추기경의 삶에는 파격적 행보가 허다했다. 1997년 서울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했고, 2000년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유림의 상징인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심산상(心山賞)을 수상한 뒤 묘소를 참배했다. 2002년에는 서울 북한산 도선사에서 열린 청담 스님 탄생 100주년 기념 법회에 참석해 축하인사를 했고, 달라이 라마 방한 준비위원회 고문을 맡기도 했다. 김창숙 선생 묘소 참배 뒤 열린 종교인 모임에서 그의 참배가 화제가 되자 추기경은 대수롭지 않게 “민족지도자인데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한 종교의 틀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2000년대 이후 추기경을 둘러싼 일부의 비판과 오해가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다. 내가 지켜본 추기경은 그 누구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건국정신을 몸과 마음으로 지켜온 분이다. 그 정신대로 되지 않으니까 반독재운동에 나서고, 성당도 빌려 준 것이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추기경이 변했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추기경은 생전 좌나 우로 치우지지 않고 중도(中道)를 걸었고, 누구 한쪽의 편이 아니라 국민화합의 큰 그림을 그렸다. 추기경이 변했다기보다는 세상이 바뀌었고, 그가 변했다고 하는 사람들 자신이 변한 것이다.일부에선 ‘북한보다 미국이 더 위협적이라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는 추기경의 발언에 딴죽을 걸기도 했다. 그 뒤 종교인 모임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다. 한 참석자가 그 딴죽에 동조하는 말을 했지만 추기경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추기경은 말수가 적었다. 몇 차례 권해야 운을 뗐다. 삶의 모든 모습에서 품위를 지켰다. 강 목사와 추기경, 셋이서 사진을 찍을 때면 추기경은 언제나 강 목사의 연배가 높다고 자리를 양보했다. 2008년 나는 청와대에 친필 서한을 보냈다. 추기경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 대화합을 위해 큰 업적을 세운 나라의 큰 어른인 만큼 만약 타계하면 국민장에 준하는 사회장으로 모시도록 배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을 거쳐 의견이 모였지만 결국 서울대교구장으로 치러졌다. 당시의 편지는 내 마음이었다.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짝을 이뤄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지혜를 이 땅 위에서 행동으로 실천한다. 추기경의 삶도 불교적으로 보면 끝없는 보현행 아니었겠는가. 천주교는 물론 한국사회 전체가 그분에게 큰 빚을 졌다.평소 종단을 대표한다는 격식 때문에 언제나 추기경님, 송월주 스님으로 서로를 불렀지만, 추기경이 선종한 그날만은 ‘형님’ ‘바보 형님’ 이런 말이 내 마음속에 들어 있었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⑤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종교와 종교, 계층과 사회 속 대화를 위해 살아온 강원용 목사를 회고합니다.}

5월 가톨릭 성인(聖人)의 전 단계인 복자(福者) 반열에 오른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사진)의 혈액과 머리카락 등 유해 일부가 국내에 들어와 공개되고 있다.가톨릭 수도회인 천주교 사도회(팔로티회) 한국 지부에 따르면 경기 성남시 분당 본원에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머리카락 일부가, 강원 홍천군 남면 양덕원의 ‘하느님 자비의 피정의 집’에는 혈액이 올해 7월부터 안치돼 있다. 머리카락과 혈액은 각각 교황청과 요한 바오로 2세의 비서였던 폴란드 크라쿠프대교구장인 스타니스와프 지비시 추기경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팔로티회는 유해와 함께 ‘이것이 진정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라는 증명을 담은 서류도 받아왔다고 밝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2005년 선종한 뒤 가톨릭 사상 최단기간에 복자 반열에 올랐다. 양덕원 수련원장인 안동억 신부는 4일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임 당시 한국을 두 차례나 방문했을 정도로 한국 사랑이 각별했다”며 “이번 유해 공개가 보편적 사랑을 위해 헌신한 교황의 뜻을 기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방한 당시 한국 가톨릭 순교자 103위를 위한 시성식을 집전했다. 교황청 밖에서 최초로 열린 시성식이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1980년 10월 27일 새벽 아침 공양을 하고 있었다. 한 떼의 군인들이 우르르 군화를 신은 채 들어왔다. 합동수사단으로 끌고 가 가사장삼을 벗기고 죄수용 군복을 입혔다. 25일간 구금한 채 구타는 물론 각목으로 오금 치기, 손가락 사이에 볼펜 넣고 죄기 등 온갖 가혹행위를 했다. 육두문자와 함께 수시로 뺨을 때렸다. 내가 그래도 수행을 해왔고 스님인데…. 몸도 괴로웠지만 더 고통스러운 것은 정신적인 모멸감이었다.”당시 서울 도선사 주지였던 혜성 스님(73)의 말이다. 스님은 청담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있을 때 함께 종단 일을 맡기도 했던 오랜 도반이다.혜성 스님의 ‘혐의’는 17억5000만 원의 재산 축적과 요정 운영이었다. 돈은 청담고등학교와 도선사, 복지법인의 보육원과 양로원의 시세평가 총액이었다. 요정은 청담고를 인수하면서 함께 딸려 온 미군클럽으로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과정에 있었다. 스님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장기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정신적인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법난 당시 총무원과 전국 교구 본사에서 100여 명의 스님과 재가 불자 50여 명이 연행됐다. 종정을 지낸 서옹 스님, 전 총무원장 월하 스님, 불국사 주지 월산 스님, 동화사 주지 서운 스님, 직지사 주지 녹원 스님, 은해사 주지 의현 스님, 조계사 주지 혜법 스님, 고운사 주지 도우 스님, 법주사 주지 이두 스님, 강화전등사 주지 월탄 스님, 상원사 주지 삼보 스님, 낙산사 주지 원철 스님, 대각사 주지 경우 스님, 불교신문 편집국장 향봉 스님, 총무원 사회부장 자신 스님, 감찰부장 법달 스님….이렇게 길게 언급할 수밖에 없다. 생각 같아서는 모든 분의 이름을 쓰고 싶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법난 자체가 조계종에 대한 치밀한 공격이자 모욕이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나를 포함한 총무원 간부뿐 아니라 원로와 본사 주지 대부분을 잡아들여 사실상 종단을 정지시켰다.지선, 중원 등 30∼40여 명의 스님은 경기 남양주 흥국사로 끌려갔다. 이른바 ‘불교판 삼청교육대’다. 육체적 고통은 세속의 삼청교육대에 비해 덜했다지만 강제적인 기도와 참선, 정신교육이 이어졌다. 수행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그해 23일의 불법 수사를 받고 나온 뒤 12월 흥국사를 찾아갔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서로 얼굴을 마주해도 참담한 마음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불교계 전체가 겪는 환란이다. 극복하자”고만 했다.불교계는 당시 법난으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명예가 실추됐고 수백만의 신도가 떠났다. 1978년 문공부가 발표한 1977년 기준 국내 종교 교세 현황에 따르면 불교 인구는 1290만 명이었다. 그러나 1982년 자료에는 750만 명으로 무려 540만 명이 줄었다.불교계의 진상 규명 요구를 외면하던 정부는 1988년 12월 당시 강영훈 국무총리가 “1980년 불교계 정화사건이 잘못됐다”며 유감의 뜻을 밝혔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불교 정화와 스님으로 위장한 불량배 일소’라는 1980년 수사 결과와는 달리 법난의 주요 원인으로 신군부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대통령 추대 지지를 거부한 조계종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나는 지난달 12일 ‘10·27 법난피해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피해신고 및 명예회복 신청서를 제출했다. 개인뿐 아니라 조계종, 나아가 불교계 전체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다.노태우 전 대통령은 최근 발간한 회고록에서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고 있던 자신이 정화(淨化)를 지시한 책임자라고 고백했다. 개인적으로 불교 신자인 데다 부패가 심해 정화가 필요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칭찬 받을 일을 의욕이 앞서다 보니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 참 낯이 두껍다. ‘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이라.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멸하고 무상하다. 불제자의 한 사람으로 개인의 과오를 용서한다. 그러나 그것과 법난의 전 과정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정당한 보상과는 다른 문제다. 그래서 법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④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바보 형님’, ‘보현보살 같았다’는 김수환 추기경을 회고합니다}

“스님은 불교계의 전두환 장군 같은 영웅입니다.”1980년 4월 총무원장에 당선된 뒤 인사하러 온 문화공보부 고위관리가 제 딴에 치켜세워 준다며 내뱉은 말이다. 그러나 나의 종단 대표 등록은 내부 소송 등을 이유로 계속 반려됐다. 여러 곳에 공을 들였지만 허사였다. ‘송월주는 반골(反骨)이다. 그래서 위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평가만 확인했다.악연(惡緣)도 인연이다. 오히려 좋은 인연보다 모질고 질겨 끊기도, 잊기도 힘들다. 문공부 관리에 이어 종단을 출입하던 보안사 직원이 찾아왔다. 그는 ‘총무원장 송월주’ 이름으로 ‘구국 영웅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합니다’라는 성명을 내라고 부탁했다. 각계에서 이런 지지성명이 쏟아질 때였다. 그것이 시류였고 시대를 살아가는 처세였다. 노골적으로 싫다고 할 수 없어 “정교(政敎) 분리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랬더니 다시 찾아와 내 이름을 뺀 총무원 명의는 어떠냐고 했고, 다시 1999년 총무원장이 된 사회부장 정대 스님을 통해 또 요구해왔다. 그래도 자주 개혁을 표방하는 제17대 총무원의 이름을 팔 수는 없었다.돌이켜 보면 조계사의 번지수를 딴 ‘45계획’과 이를 실행한 법난의 그림자는 5·18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짙어졌다. 총무원장 취임 20여 일 만에 광주가 일어났다. 계엄의 재갈이 물린 언론은 불순세력이 폭동을 조장한다는 보도를 앵무새처럼 읊었다.광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종단 직할의 본, 말사 주지와 신행단체 등에서 100여 명이 참여해 성금을 모았다. 5월 24일 선발대 격으로 ‘소요사태 진상조사 선무단’을 보냈다.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조계사를 관할하던 종로경찰서장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위에서 못 가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안 가는 게 좋습니다.”나의 입장은 달라질 게 없었다.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시민 쪽 희생자와 군인 등 모두를 위로하기 위해서 가겠다.” 6월 3일 교무부장 스님을 포함해 6명이 서울에서 전남 장성까지 기차로 내려간 뒤 다시 차량으로 광주로 갔다. 중앙 종단 책임자로는 첫 방문이었다. 건물에는 총알 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화약 냄새가 확 풍겼다. 오전 11시 광주 관음사에서 ‘광주사태 희생자 영가(靈駕)’라는 위패를 모시고 법회를 거행하고, 부상자들이 있던 전남대병원과 군 병원을 찾았다. 49재 때 다시 광주를 찾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양쪽 유족이 함께 참석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의 조언도 있고 해서 포기했다.당시 실력자로 부상한 이철희, 장영자 씨 부부와의 ‘용두관음’에 얽힌 사연도 있다. 나를 전두환 장군에 비유한 그 관리가 9월경 방문했다.“장영자 씨가 모시고 있는 용두관음 불상이 있는데, 그 불상을 모시고 여의도광장에서 스님 수천 명과 신도 100만 명이 모이는 호국기도회를 했으면 합니다. 이철희 씨가 대회위원장을 맡고, 경비 5억 원은 그쪽에서 부담합니다. 아마 대표 등록 문제도 풀릴 겁니다.”말이 호국기도회지 전두환 장군을 위한 이, 장 부부의 충성극이 뻔했다. 그래서 “이철희는 신도회장도 아니고, 대회를 한다면 최재구 신도회장이나 내가 해야 한다”며 거절했다.법난 직전 총무원을 찾은 이환의 전 MBC 사장의 경고도 기억난다. 그는 “직원들을 광주에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취재를 시켜 사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됐다. 스님은 아직 (무사해) 다행이다”라며 걱정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법난이 터졌다.권력이 몇 차례 내민 손을 잡았으면 법난을 피할 수 있었을까? 여러 번 생각했지만 대답은 ‘아니다’였다. 사냥개가 쓸모없게 되면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역사가 보여주는 권력의 생리다. 이 이치를 모르지는 않았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은, 아무리 총칼로 일어선 무뢰배라 해도 1700년 역사의 불교를 송두리째 흔드는 법난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씨와의 인연은 후에 다시 얘기하겠다.1980년 외로운 광주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불교, 나아가 종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③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30여 명의 스님이 경기 남양주시 흥국사로 끌려간 ‘불교판 삼청교육대’를 비롯해 아직 끝나지 않은 법난의 상처를 얘기합니다.}

1980년 10월 27일, 나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대 총무원장이자 서울 안암동 개운사 주지로 있었다. 아침 공양을 끝낸 무렵이었다. 검은 지프차 3, 4대가 개운사 부근에 보였다. 총무원으로 출근하려고 나서자 사복 차림을 한 7, 8명이 “보안사에서 왔다. 총무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조사할 게 있어 모시러 왔다”며 짧게 답했다. 이들은 총무원에 도착하자 사람들을 모아달라고 했다. 종단 간부 스님과 직원 20여 명이 4층 총무원장실에 모였다. 이번에도 다시 조사 때문에 모시고 간다고 말한 뒤 나를 지프차에 태웠다.오전 10시경, 지프차는 보기에도 음습한 건물로 향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악명 높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었다. 가사 장삼을 벗고 내의 위에 푸른색 미결수복을 입었다. 보안사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라 걱정은 됐지만 떳떳하기에 잠깐 조사받고 나온다고 믿었다.그러나 조사는 장장 23일이나 이어졌다. 인적사항 확인과 종단 분규가 왜 일어났냐는, 같은 질문이 반복됐다. 4, 5명이 수사를 맡았는데 그중 장모, 김모라는 2명이 주로 물었다. 5일이 지나자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종로경찰서와 성북경찰서, 전북 김제 등 내 흔적이 있는 곳에서 올라온 정보를 캐물었다. 인적사항과 재산, 지역 여론, 사상까지 질문은 다양했다.조금 익숙해지자 수사관들 입에서 새로운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여기, 스님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여럿 왔어요.” “스님, 이 방에서 김종필 김재규 정승화가 조사 받았어요. 옆방에는 이후락이 있었고….”자랑인지, 위협인지, 이런 말들이었다. 대부분 스님이라는 호칭을 썼지만 한두 사람은 ‘자네’라며 말을 놓기도 했다. 이들은 총무원장을 사퇴하고 그 업무를 후임자에게 넘기라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종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강제 연행된 뒤 13일째인 11월 8일, 가사 장삼을 내줬다. 총무원에 도착하자 개운사 주지와 총무원장 직을 사퇴하고 모든 권한을 후임자 탄성 스님에게 넘긴다는 서류가 준비돼 있었다. 보안사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장을 찍었다. 탄성 스님은 한 스승(금오 스님) 아래서 공부한 사형(師兄)이다. 사형은 “인연이 이렇게 돼 일을 맡게 됐다”고만 했다. 피차 두말이 필요 없었다.벼룩도 낯짝이 있던지 보안사 직원들이 짧게 인사할 기회를 줬다. 3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종단을 잘 지키라”고 했다. 스님과 종무원, 불자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건강 지키시라’고 했다.다시 서빙고로 돌아온 뒤 수사관들은 “재산이나 여자 문제, 범법 행위, 이런 게 없네요”라고 했다. “그럼 (총무원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건 안 된다. 드러난 잘못은 없지만 분쟁의 한편에 섰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모든 것이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신군부의 합동수사단은 10·27 법난 이전부터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종단 지도부를 와해하려 했다. 법난 다음 날인 28일 합수단 실무대책반장인 전창열 중령과 몇몇 스님이 만났고, 11월 5일에는 정화중흥회의가 마비된 종단 업무를 대신한다고 나섰다. 강압에 의해 모든 권한을 넘겼지만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상부에서 아직 나가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은사께 받은 ‘이 뭣꼬’라는 화두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23일째인 11월 18일 조사 내용을 발설하지 않고, 향후 2년간 모든 공직을 맡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다. 신군부의 이른바 불교정화 작전명은 ‘45계획’이었다. 조계사 주소인 서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를 딴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 따라 27일 조계종 스님과 불교계 인사 153명이 연행됐고, 사흘 뒤인 30일에는 군경 합동 병력 3만2000여 명이 전국 사찰 및 암자 등 5700여 곳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그해 4월 26일 총무원장에 취임한 뒤 자주 개혁을 앞세운 조계종의 봄은 6개월여 만에 어이없이 그렇게 끝났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두 차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며 한국 현대 불교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송월주(宋月珠·76) 스님 회고록을 연재한다. 신군부에 의한 10·27 불교 법난(法難)의 비화를 시작으로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청담·성철 스님 등 종교인들과 역대 대통령 등 스님이 만난 사람들과의 사연, 50여 년에 걸친 불교계 개혁의 격랑을 담는다.》“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토각귀모(兎角龜毛), 불교에서 이른바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을 비유하는 말이다. 7월 회고록 때문에 서울 아차산 기슭의 영화사를 찾았을 때 송월주 스님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짧게 옮겼다. 한국 현대 불교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스님은 무엇을 좇은 것인가, 출가 뒤 불제자로 보낸 57년의 세월은 헛된 것이란 말인가.거칠게 표현하면, 스님 삶의 8할 이상은 적막한 산사가 아니라 왁자지껄한 저잣거리를 닮은 현장에서 쓰였다. 1954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961년 26세 때 금산사 주지가 됐다. 본사 주지로는 최연소 주지였고, 지금도 바뀌지 않은 기록이다.스님은 1950∼60년대 비구와 대처승의 대립으로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불교사 격랑의 한복판에 줄곧 서 있었다. 정치권력에 의한 불교계 최대 수난인 1980년 10·27 법난(法難) 때에는 종단 행정의 책임자인 총무원장 직을 맡고 있었다. 그날 오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연행된 스님은 가사와 장삼 대신 푸른 수인복을 입고 23일간 조사를 받은 뒤 원장 직에서 물러났다. 조계종 종권을 둘러싼 갈등 끝에 폭력 사태가 벌어져 사회적 지탄을 받았던 1994, 98년 종단 사태 때에는 갈등의 한 축이기도 했다.조선왕조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가 근간의 하나로 여겼다. 이에 따라 수행을 위주로 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사찰 운영을 담당하는 사판승(事判僧)으로 스님들을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 광복 이후 식민지 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청담, 성철, 금오 스님 등 고승들이 정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이판사판’의 경계는 흐려졌다.불교 정화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출가한 송월주 스님은 이른바 사판의 세계에서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1998년 총무원장 선거에서 3선 여부를 둘러싼 시비 끝에 후보를 사퇴한 스님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깨달음의 사회화’에 나섰다. 수행과 불교계 개혁의 현장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웃, 사회와 나누기 위한 것이었다.2000년대 들어 스님은 이제 고인이 된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와 함께 종교인의 화합과 사회적 나눔 활동의 상징이 됐다. 160cm가 조금 넘는 단구에 둥그런 테 안경을 낀 스님은 한때 80여 개가 넘는 직함을 가졌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와 공명선거실천시민연합 상임 공동대표,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공동위원장을 지냈고 2004년부터 지구촌공생회 대표로 활동의 영역을 지구촌으로 넓혔다.스님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는 또 다른 그릇은 ‘사람’이다. 은사인 금오 스님을 비롯해 불교계의 큰 봉우리였던 탄허, 청담, 성철 스님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서옹, 서암, 월하, 혜암 스님 등 역대 종정스님, 고산, 법장, 정대, 지관 스님 등 총무원장들과는 불교개혁 과정에서 같은 배를 타거나 불가피하게 갈등을 벌였다. 스님의 상좌인 도법 스님을 비롯해 청화, 지선, 수경, 명진 스님 등 1990년대 들어 부상한 후배 스님그룹들과의 만남도 있었다.스님의 행보는 불교계뿐 아니라 10여 차례 이상 만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최고 권력자를 비롯해 시인 고은, 소설가 조정래, 국악인 안숙선 씨 등 이념과 분야를 뛰어넘었다.“불법은 세간(世間·속세)에 있고 깨달음은 세간을 떠나 있지 않으니, 세간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면 그것은 마치 토끼 뿔을 구함과 같다.” 스님이 즐겨 쓰는 법어다. 남들은 깨달음을 찾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지만 세상에서 토끼의 뿔을 찾아다닌 스님의 변이다. 후회도 없다고 했다. 한 번도 자신의 키가 작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는 스님은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신의 법을 구해왔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송월주 스님 행장(금산사·영화사 회주)△1935년 전북 정읍 출생△1954년 법주사에서 금오 스님 계사로 사미계 수지△1956년 화엄사에서 금오 스님 계사로 비구계 수지△1961∼71년 금산사 주지△1966∼81년 대한불교 조계종 2∼7대 중앙종회의원△1968∼74년 학교법인 동국학원(동국대) 이사△1978년 조계종 제5대 중앙종회의장△1980년 4∼11월 조계종 제17대 총무원장△1988년 10·27법난 진상규명추진위원회 대표△1990∼95년 공명선거실천시민연합 상임공동대표△1994∼98년 조계종 제28대 총무원장△1998∼2003년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공동위원장△2004년∼ 지구촌공생회 대표}

가톨릭 미사 중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The Lord be with you)”라는 사제의 말에 “또한 사제와 함께(And also with you)”라고 답하는 신자들의 답변이 바뀐다. 한국천주교가 어떤 문구를 사용하게 할지는 미정이지만 영문 표현이 “당신(사제)의 성령과 함께”라는 의미인 ‘And with your spirit’으로 바뀜에 따라 한국어 표현도 변경 논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교황청은 영어권 국가에서 사용하는 미사 전례 문구를 다음 달 27일부터 일부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써오던 영어 전례문을 최대한 라틴어 원문에 가깝게 고치기 위한 것이다. 이미 관련 서적들에 대한 교체 및 수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28일 전했다. 아시아권에서는 영어 전례 문구를 번역해 사용해왔기 때문에 당장 변화가 예상된다. 한국내 가톨릭교구들의 협의체인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30일 동아일보의 질의에 “한국에서도 변경할 것인지에 대해 아직 논의한 바 없다”며 “만약 문구를 바꾼다면 주교회의를 통해 결정한다”고 밝혔다. 주교회의 관계자는 “당초 한국어 번역에서 ‘당신의 성령과 함께’가 아니라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정할 때도 일부 이견이 있었지만 한국 교회의 상황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라틴어로만 미사를 진행하도록 한 규정을 폐지한 후 가장 큰 변화인 이번 결정에 대해 “신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반대 의견도 있다.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 10·26 재·보궐선거 하루 뒤인 27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진석 추기경(80·오른쪽)과 ‘엄마를 부탁해’의 신경숙 작가(48)가 만났다. 두 사람은 선거 민심과 문학, 행복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작가의 ‘팬’을 자처하는 추기경은 성경책과 세례명 ‘그레이스’를 선물하는 등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 27일 오전 서울 명동대성당 옆 주교관 추기경 집무실에서 신경숙 작가(48)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진석 추기경(80)과 인사를 나눈 뒤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찾았다. 잠시 뒤 그가 꺼낸 것은 손때가 묻은 성경(聖經)이었다. 신 작가는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추기경께서 보내준 것”이라며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미국판과 영문판을 정 추기경에게 선물했다. 신 작가가 “2년 전 뵈었을 때보다 더 건강해 보여 마음이 놓인다”고 말하자 정 추기경은 “신 작가의 작품이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잘 듣고 있다”고 덕담을 건넸다. 두 사람은 10·26 재·보궐선거를 통해 드러난 민심과 세대갈등, 문학과 종교, 가족과 행복 등 다양한 주제로 1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추기경께서 성경을 보내준 이유가 궁금합니다. ▽신 작가=여러 나라를 다니는 동안 (성경을) 읽고 싶어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께 부탁했는데 추기경께서 직접 글을 쓴 성경을 보내주실 줄 몰랐죠. 해외에서 시차 때문에 새벽에 잠을 못 자는 날이 많았는데 성경을 읽으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정 추기경=하느님이 신경숙 씨를 보살펴 주셔서 내가 선물할 기회를 주신 것 같습니다.(웃음) 정 추기경은 성경의 표지 다음 장에 ‘친애하는 신경숙 씨. 하느님의 훌륭한 도구로 선택되셨음을 축하드리고, 전폭적으로 후원할 것을 약속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썼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신 작가를 위해 ‘그레이스’란 세례명을 선물했다. 정 추기경이 세례명을 선물한 것은 처음이다. ―추기경께서도 연말에 새 책을 출간한다고 들었습니다. ▽정=안전한 금고가 있을까요? 정 추기경이 이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자 좌중에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 제목이 ‘안전한 금고가 있을까?’예요”라고 웃으며 침묵을 깬 것은 신 작가였다. ▽정=독재자들이 재산을 많이 감춰뒀는데, 그 안전한 금고가 아닙니다. 하늘이 안전한 금고죠. ‘하늘에 보화를 쌓아라’, 즉 ‘남을 위해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신=추기경께서 쓴 책이라고는 상상 못할 제목이네요.(웃음) 안 볼 수 없겠는데요. ―시민운동가 출신인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되고 안철수 씨는 대선후보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세대 간의 확연한 의식차를 보여준 선거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정=사람은 다 자기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책임을 안 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투표한 사람들도 자기 투표에 책임을 져야 하고, 정치를 하시는 분들도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갈등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지만, 뽑힌 사람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야 합니다. ▽신=충분히 예측된 투표 결과죠. 시민의식은 굉장히 올라왔는데 정치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정치 쪽만 모른 거죠. ―새 시장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정=사랑은 주고받는 거지 일방통행은 없습니다. 표 받은 만큼 국민에게 보답을 해야 합니다. ▽신=정말 동감입니다. ―암 투병 중인 최인호 작가를 보면서 종교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신=문학과 종교는 서로 통하고 의지하는 관계라고 생각해요. 문학이 제게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문학 속에는 너무나 많은 오류를 지닌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을 저라고 생각해 편하기 때문입니다. 패배자들과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시선을 준다는 의미에서 문학과 종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돈이 아니라 부모에게, 선생님에게,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 인간의 행복입니다. (심지어) 하느님도 세상을 창조한 뒤 자기 작품을 알아주는 이가 없자 당신과 가장 비슷한 사람을 만든 겁니다. 작가도 자신을 알아주는 독자가 없다면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죠. ▽신=문학은 어찌 보면 끊임없는 세상에 대한 질문이고, 종교는 그것에 대한 대답 같습니다. 똑같이 인간을 사랑하고 의미를 부여하다 어느 순간 질문과 대답으로 갈라지는 게 문학과 종교 아닐까 합니다. ―그럼 기자는 어떻습니까. ▽정=창작하고 보도는 다르지 않나요.(웃음) ―신 작가는 최근 ‘엄마를 부탁해’ 일본판 출간 때문에 일본에 다녀왔는데요. ▽신=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인들이 겪고 있는 공황이나 상실감이 컸습니다. 재난 이후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가족’이랍니다. 지진 이후 오히려 결혼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떨어져 살던 부부도 같이 살려고 한답니다. ▽정=재난을 당했을 때 인류애가 발휘된다면 그 재난을 좀 더 쉽게 잘 이겨낼 수가 있겠지요. ―동아미디어그룹의 종합편성TV 채널A가 12월 개국합니다. 어떤 방송이 되기를 바라는지요. ▽정=좋은 소식뿐 아니라 언짢고 보도하기 싫은 뉴스도 있을 겁니다. 어려운 뉴스일수록 희망을 불어넣는 멘트 하나를 더 부탁합니다. ▽신=제 책에 쓴 말을 인용한다면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말을 해드리고 싶어요. 어떤 방송을 하든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기를 바랍니다. ―요즘 무엇을 하실 때 가장 행복합니까. ▽정=요즘 기도할 때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묻습니다. ‘나한테 맡겨라’라는 대답을 들을 때 행복하죠. ▽신=시골(전북 정읍시)에 있는 어머니와 전화 통화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어머니가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추기경께서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묻고 있다니 놀랍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정=6·25전쟁 중에 항상 ‘내가 마지막 날을 살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는데 여전히 그런 자세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시간에 대해 엄격합니다. 저녁에는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나’ 생각하고, 아침에 눈 뜨면 ‘오늘 하루를 더 살게 해 주시는구나’라며 감사해요. 다른 계획보다는 하루, 한 순간을 가장 보람 있게 쓰려고 노력합니다. ▽신=미국에서 푹 쉬려고 했는데 못 쉬고 책 때문에 많은 여행을 했으니 새 작품을 쓰고 싶지요. 내용은 아직 비밀입니다. (정 추기경을) 만나 뵙고 나니 마음속의 빈곳이 채워지는 느낌입니다. 앞으로도 외로운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셨으면 합니다.진행=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정 추기경-신 작가 “병마 떨치고 글 통해 세상에 힘을 주길” ▼암투병 중인 최인호 작가 쾌유기원 메시지최인호 “추기경 격려에 큰 힘 얻어”“최인호 작가는 글을 통해 나에게 큰 힘을 준 일이 많았습니다.”(정진석 추기경) “지난 작품을 쓰시면서 다른 작품을 쓰고 싶다고 하셨으니 또 작품이 나올 겁니다.”(신경숙 작가) 대담 중 정 추기경과 신 작가는 올해 5월 암과 싸우며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출간한 소설가 최인호 씨(66·사진)의 빠른 회복을 기원했다. 가톨릭 세례명이 베드로인 최 작가는 2006년 동아일보를 통해 정 추기경과 특별회견을 했고 부부가 정 추기경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신 작가는 “미국에 있을 때 선생님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책을 좀 보내달라고 해서 읽었다”며 “작가이자 개인으로 가장 나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가장 좋은 쪽으로 자신을 바꿔가는 모습이 무엇보다 아름답다. 건강이 빨리 좋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최근 최 작가와 한 통화에서 “하느님께 모든 걸 맡기면 더 편해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이날 대담에 함께한 허영엽 신부는 최 작가의 요청에 따라 정 추기경과 전화를 연결했다. 최 작가가 나중에 ‘하느님이 쓰시는(사용하시는) 것을 꼭 믿으라’는 추기경의 말이 큰 힘이 된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정 추기경은 “아픈 분이 어디서 그런 글을 쓸 힘이 나올까 한참 생각했다”면서 “재주만 갖고 글을 쓴다면 그런 힘이 안 나온다. 나를 포함해 세상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있는 그 재능을 더 오래 발휘하기 바란다”고 말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스티브 잡스는 죽음을 최대의 발명품이라고 했죠. 그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다른 이들의 삶을 이롭게 하는 보현행(普賢行)을 실천했죠.” 도법 스님은 생전 선(禪)에 심취했던 잡스의 삶을 이렇게 평가한다. 스님은 2004년부터 탁발순례를 하면서 5년간 3만 리를 걸으며 5만 명을 만나기도 했다. 이 책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생명공동체 운동을 벌여온 지난해 10개월간 전북 남원시 실상사에서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주제로 한 강연 내용을 묶은 것이다. ‘칭찬은 부처도 춤추게 한다’ ‘먹었으면 똥이라도 싸라’ ‘부처와 소크라테스는 통했다’ 등 주제별로 화엄경의 원리를 생활 속 사례를 통해 쉽게 설명했다. 책의 제목처럼 스스로의 존귀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망각은 포로상태를 이어지게 한다.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야드바셈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 ‘기억의 산’이라 불리는 그곳에는 600여만 그루의 나무가 있다. 나치에 학살당한 같은 수의 유대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심은 것이다. 21일 찾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새에덴교회(예장 합동교단)는 야드바셈처럼 ‘고난의 기억’을 교회를 밝히는 빛으로 여기고 있다. 신앙적 의미의 고난을 넘어 국내 개신교회에서는 드물게 우리 역사의 고난도 소중하게 기억하며 간직하고 있다.》교회는 2005년부터 청소년을 대상으로 ‘고난의 역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매회 담임목사와 청소년 100여 명이 참여해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과 서울 송파구 삼전도비, 전남 진도 울돌목 등 역사의 영욕이 서려 있는 곳을 답사했다. 지난해 여름방학 때는 중국을 방문해 지린 성 광개토대왕비와 상하이임시정부 옛 청사, 난징 대학살 기념관 등을 방문했다. 체계적인 역사와 신앙 교육을 실시하는 ‘쉐마 비젼 스쿨’도 운영하고 있다. ‘쉐마’는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뜻. 4∼7세를 대상으로 한 키즈 스쿨과 초등학생, 중고교생 대상으로 나뉜다. 유기농 농장과 역사적 명소 등 다양한 분야의 현장을 찾고 직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은 매달 80명을 모집하지만 순식간에 모집정원이 찰 정도로 인기가 높다.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에 갔을 때 여기까지 온 인조대왕이 불쌍하고 얼마나 불안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삼전도비에 누군가 빨간색으로 낙서해 다시 복구하느라 천막을 쳐놓았다. 창피한 역사는 없애야 한다고 그랬다는데 맞는 말 같지만 아닌 것 같다. 어린이들이 다시는 그런 나라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현장 학습 뒤 남긴 한 초등학생의 글이다. 교회가 굳이 고난의 역사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소강석 담임목사(49)는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역사를 잊거나 숨길 때 그 나라와 사회는 곧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맨손과 맨몸, 맨땅에서 일어선 ‘3M 목회자’를 자처한다. 이 교회는 1988년 서울 가락동 지하 공간에서 4명이 모여 창립예배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현재 출석 기준 1만5000여 명의 교회로 성장했다.강좌 만들어 역사의식 심어…청소년은 7년째 역사 탐방 “사회봉사는 초창기 교회가 어려울 때부터 적극적으로 나섰고, 당연하기 때문에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성장했다는 증거’를 대라는 한국 사회의 요구에 교회가 귀 기울이고 답해야 할 때입니다. 신앙적인 면이나 신자 수가 아니라 (신앙에 관계없이) 교회가 사회의 밑거름 역할을 해야 합니다.”(소 목사) 실제 새에덴교회는 지역 주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8층 규모의 교회 공간 곳곳에서 플루트와 바이올린, 영어 회화, 탁구 등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본당조차 지역 주민을 위한 입시설명회 장소로 개방되기도 한다. 큰딸이 키즈스쿨에 다니는 김선희 씨(33)는 “키즈스쿨이나 문화센터의 이용료가 저렴해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면서 “교회가 지역 주민들에게도 열려 벽을 허물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는 2005년부터 매년 봄과 가을에 난타, 웃찾사, 뮤지컬 맘마미아, 윤도현 밴드 등이 출연하는 레인보 페스티벌에 지역 주민을 초청하고 있다. 교회를 찾은 날에도 청소년과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바자가 열렸다. 6·25참전 미군 용사들의 한국 방문을 도와온 소 목사는 2007년 한일 양국의 화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마틴 루서 킹 국제평화상(개인 부문)을 받았다. “요즘 교회가 욕을 먹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할 교회가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탓에 바깥 사회와 소통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입었던 서민의 옷 대신 귀족 옷을 입고 그대로 행동했던 거죠. 이제는 교회의 신앙적 성숙이 사회적 성숙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소강석 목사의 ‘내가 배우고 싶은 목회자’ 故박종삼 목사▼가난하고 외롭던 신학생 시절, 박종삼 목사님은 나를 아들처럼 아껴줬다. 집에서 고깃국을 끓이는 날이면 나를 불러 친아들 몫까지 내 밥그릇에 올려주며 주의 종은 잘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미국으로 떠나면서 저서 앞쪽에 철부지 신학생에게 ‘소강석 목사님 혜존, 부디, 큰 종이 되소서. 작은 종 박종삼 목사 드림’이라고 자필로 써 주기도 했다. 목사님은 신학대인 광신대 총장을 지내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목회를 했다. 이후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분 묘지로 달려가 이런 시를 읊조렸다. ‘당신은 지금 이국 땅/필라의 한 묘지에/쓸쓸하게 누워 계셔도/당신의 혼과 정신은/제 속에 살아 움직이고/엄청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이제 나도 목사님처럼 민족과 역사를 섬기고, 영혼을 사랑하는 목사가 되겠다는 꿈의 꽃씨를 심고 있다.}

최근 국제 가톨릭계의 ‘진객(珍客)’이 한국을 찾았다. 1988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파문(破門)당했던 성 비오10세회(Society of Saint PIUS X·SSPX) 수장 버나드 필레 주교(53·사진). 이 단체는 1971년 설립 이후 가톨릭 내에서 라틴어 미사를 고수하는 등 전례와 교리에서 보수적인 그룹으로 꼽힌다. 이 단체의 창시자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교황청의 동의 없이 필레 신부 등 4명을 주교로 서품하자 교황청은 이들을 파문했고 2009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이를 철회했다. 올 7월 중국의 한 주교가 교황청의 승인 없이 신부를 주교로 서품해 두 사람 모두 파문됐고, 2006년에는 잠비아 에마뉘엘 밀링고 대주교가 결혼과 주교 서품 문제로 역시 파문된 바 있지만 SSPX처럼 개인이 아닌 가톨릭 단체가 교황청과 대립해 파문당한 것은 드문 일이다. 이 단체는 사제 500여 명이 세계 60여 개국에서 선교와 신학교 운영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성 비오10세회는 서울 충신동 성모무염시태 성당에서 100여 명이 참석해 매주 마지막 일요일 라틴어로 미사를 올리고 있다. 한국 SSPX를 둘러보기 위해 방한한 필레 주교를 23일 귀국에 앞서 만났다. ―지금은 철회됐다지만 파문은 성직자로서 공포 아닌가. “(웃음) 오리의 깃털에 물이 한 방울 떨어진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우리의 신앙적 노력이 올바른 방향이기 때문이다.” ―18년 만의 방한이다. “다시 와서 기쁘다. 한국에는 한 달에 한 주씩 성 비오10세 사제가 방문한다. 사제가 항상 같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는데 아쉽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인사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나. “방문 기간이 짧아 만나지 못했다.” ―로마와의 갈등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 면이 있다. 우선, 우리가 로마의 동의 없이 주교 서품을 시행한 것 때문이다. 두 번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내에 큰 변화를 초래했지만 우리는 이 변화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맞는 자국어 미사와 전례 등을 인정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회의 개방성과 열린 자세가 나쁜 것인가. “물론 교회는 가톨릭을 믿지 않는 사람과도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가톨릭이 단 하나의 참종교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이다.”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교황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 종교 평화를 위한 대회’(27, 28일)가 열린다. 한국 조계종의 원장 스님도 참석하고 있다. “자연적인 인간 차원에서는 다종교 간에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믿음의 차원에서 가톨릭만이 진리라는 것을 감추고 어떻게 일치를 이룰 수 있나?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현재 교황청은 파문은 철회했지만 완전한 일치 이전에 SSPX의 법적 지위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양측은 사제 서품 등 다양한 문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교황의 성향에 따라 SSPX의 입지가 바뀌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들을 파문한 반면 보수적으로 평가받는 베네딕토 16세는 이를 철회했다. ―사제 서품 문제의 결론은…. “지금 로마에서 우리에게 해법을 제시하고 있고 대화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로마의 매우 진보적인 성직자들은 가톨릭교회가 좌파로 가길 원한다. 우리는 이를 참을 수 없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성초 정사(70·사진)가 25일 대한불교진각종 인의회에서 조계종 종정에 해당하는 종단 최고어른인 제11대 총인(總印)에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성초 정사는 종의회 의원과 중앙교육원장, 통리원장, 종의회 의장 등을 지냈다.}

《“스님, 만약 오늘 세상 뜨시면 극락 갈 자신 있습니까?”1980년대 초반 생선도 없는 밥상머리에서 약관의 신학도가 던지는 질문이 가시처럼 날카로웠다. 고희를 넘긴 스님은 기가 찼다. 애당초 ‘싹수가 보여’ 제자로 키워볼까 했는데…. 몇 년 전 학생이 신학대에 진학하려는데 돈이 없다고 하자 등록금 60만 원을 쥐여준 스님이었다. 학생이 입학 뒤 다시 “기숙사비도, 식비도 없어 죽겠다”고 찾아오자 “절밥 먹으며 등하교하라”며 선뜻 방을 내주기도 했다. 그런 학생이 스님에게 전도를 한 것이다. 스님은 “예수를 잘 믿어서 좋은 부처가 돼라”고 받아쳤다. 젊은 신학도는 군 제대 후 스님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서둘러 절을 찾았지만 남은 건 영정 하나뿐이었다. “스님의 법명조차 몰랐는데.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먹이고 재워준 스님마저 전도하려던 혈기 넘치던 신학도는 타종교인이지만 당시 스님이 베풀었던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목회자가 됐다.》 부산 강서구 송정동 세계로교회(예장 고신 교단) 손현보 담임목사(49)의 젊은 시절 얘기다. 이 교회는 부산의 서쪽 끝자락, 경남 창원시와의 경계에 위치한 작은 어촌 마을 한가운데 있다. 1953년 녹산제일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곳은 낙동강 하구 염전지대에 자리한 조그만 교회였다. 40년이 흐른 1993년까지 신도는 20명에 불과했다. 그해 손 목사가 부임한 뒤 신자는 현재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의 ‘말씀’이 좋아서일까. 그는 “난 설교 잘하는 목사는 결코 아니다”라고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세계로교회는 크고 작은 봉사로 이름나 있다. 개안수술이 대표적이다. 매년 약 1000명의 환자가 교회의 도움으로 ‘빛’을 되찾고 있다. “10년 전, 여든을 넘긴 어머니가 갑자기 눈이 안 보인다고 하시더군요. 병원 가서 수술을 했는데 이틀 만에 ‘잘 보인다’며 신기해하셨어요. 그때 ‘이렇게 쉽게 사람들에게 빛을 안겨줄 수 있구나’ 하며 무릎을 쳤죠.”(손 목사) 그해 당장 교회는 지역주민 50여 명의 개안수술 비용을 전액 지원했다. 소문이 퍼져 최근에는 전국 각지에서 문의가 오고 있다. 교회는 이름처럼 사회에 대한 나눔과 도움의 길을 ‘세계로’ 넓혔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매년 모여드는 녹산공단과 농어촌을 낀 협소한 입지가 되레 이를 가능케 했다. ‘지역 내 다문화가정의 베트남 주부가 친정이 너무 그리운데 형편이 어려워 가보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왕복 비행기 삯을 지원했다. 노인들을 위한 보청기 지원과 집수리, 청소 지원도 주요 사업이다. 교인들의 자발적인 봉사가 이런 사회봉사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봉사 ‘아이템’이 마르지 않는 것은 독특한 의결기구가 교회의 중심에 있기 때문. 딱딱한 당회 대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지는 ‘중직자(重職者) 회의’다. 목사와 장로, 집사 등의 부부로 이뤄진 100여 명이 자주 모여 “주위에 도울 만한 사람 또 없을까”라며 의견을 모은다. 의결된 안건은 바로바로 집행된다. 개안수술 건도 손 목사가 여기서 발의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봉사 아이템은 마르지 않아도 돈은 쉽게 말랐다. ‘마당발 봉사’를 위해서는 ‘구두쇠 경영’이 필수다. 교회에 방음재 대신 달걀판을 사다 붙인 것도 그 이유다. 매주 모인 헌금은 그 주 안에 거의 다 쓰고 있다. “돈 남겨봤자 분란만 일어난다”는 것이 손 목사의 지론이다. 방음재용 달걀판이 아니더라도 손 목사는 달걀과 인연이 깊다. 1993년 2월 신학대학원의 마지막 과정으로 경남 함안군의 한센병 환자촌 교회에 머물 때 일이다. 서울과 경기 부천시, 경남 밀양시 등의 교회 몇 곳에서 목사 청빙 요청이 왔지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주말 지나고 월요일에 가장 먼저 연락이 오는 교회로 간다’고 결심했다. 월요일 아침, 그는 달걀 값이 폭락했다는 얘기에 양계 농가를 돕기 위해 직접 달걀을 싸들고 시내 장터로 나섰다. 어려움 끝에 겨우 달걀을 다 팔고 돌아왔다. 이때 세계로교회(당시 녹산제일교회)에서 와 달라는 전화가 왔다. 손 목사는 바로 짐을 꾸려 부산으로 향했다. “달걀을 통해 새 생명이 번성하듯 봉사가 봉사를 낳는 교회를 일구게 되는 전조였나 봅니다. 교회는 이익단체가 아닙니다. 희생을 자원해야 하죠. 여긴 애초에 염전이 있던 땅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게 교회의 소명 아닙니까.”부산=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손현보 목사의 ‘배우고 싶은 목회자’ 윤석전 목사▼작은 교회 헌신적 지원… 섬김의 가르침 깨달아2000년 우리 교회에서 서울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65)를 처음 만났다. 당시 윤 목사는 40여 명의 대규모 찬양단과 함께 장비 일체를 갖고 서울에서 내려왔다. 나흘간 사례금 한 푼 안 받고 열정적인 설교와 찬양으로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나를 더욱 감화시킨 것은 그분의 언행이었다. 서울의 대형교회 목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정반대로 무척 겸손했다. 윤 목사는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미자립 교회 목사들을 돕고 섬기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윤 목사 방문 이후 우리 교회도 많이 바뀌었다. 조건 없는 섬김만이 사람들에게 감동과 진정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 역시 윤 목사의 방문 이후 외부 행사에 참여할 때 일절 사례금을 받지 않고 있다. 말로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가르침이다.}

“스님, 손이 너무 커요.” “그래도 팥이 이만큼은 들어가야….” “그럼 모양이 제대로 안 나온다니까요.”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난데없이 ‘국화빵 논쟁’이 벌어졌다. 빵에 들어갈 팥의 양을 둘러싸고 주지 토진 스님(51)과 신도들 사이에 정겨운 입씨름이 벌어진 것. 마침내 스님이 국화빵 틀을 확 뒤집는 시늉을 하면서 “소싯적(고교)에 경남 함양 골짜기에서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붕어빵 좀 구워 봤다”며 출가 이전 경력까지 들먹이자 웃음과 함께 주변이 잠잠해졌다. 스님은 “역시 국화빵은 팥이야”라며 종단에서 카리스마 강하기로 소문난 ‘승소(僧笑)’를 지어 보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에 국화빵 노점이 들어선 것은 21일∼11월 10일 경내에서 열리는 국화축제 ‘시월 국화는 시월에 핀다더라’ 때문. 이 행사에 국화빵이 빠질 수 없다는 것이 스님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100만 송이가 넘는 국화가 코끼리와 하트 등 다양한 형태로 전시된다. 국화꽃은 15t 트럭 11대 분량으로 전남 함평군에서 키운 것이다. 조계사는 무료로 꽃을 전시하는 대신 함평군에서 재배한 농수산물 판매를 위한 직거래 장터를 열기로 했다. 음악회와 실버 예술제, 교리 경진대회, 국화영산재, 어린이미술대회도 연다. 스님은 “요즘 세상살이가 쉽지 않아 고민하는 분이 적지 않다”며 “신앙에 관계없이 많은 분이 조계사를 찾아 국화 향기에 취하고 국화빵도 맛보며 잠시라도 세상 시름을 잊기 바란다”고 말했다. ‘주지스님 표 국화빵’에는 적지 않은 공이 들어갔다. 반죽은 빵 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 인근 인사동 국화빵을 대표한다는 할머니의 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스님은 반죽 비법을 전수받지 못했다며 아쉬운 표정이다. 스님은 대표적인 도심 사찰인 조계사가 시민들에게 좋은 먹거리와 휴식 공간 등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스님의 또 다른 목표는 이른바 ‘소림사 주방장’을 찾는 것. 조계사 구내의 만발식당 메뉴를 어르신들의 건강에 좋은 사찰식 메뉴로 바꾸기 위해서다. 이 식당은 저렴한 가격으로 음식을 제공하고 있어 한 해 15만 명이 찾고 있다. 최근 조계사 앞에 국숫집 승소(僧笑)를 내기도 한 스님은 “전통적인 사찰 요리법에 능통한 7, 8명의 비구니 스님을 만나 연봉 4000만 원 정도를 제시했는데 영입에 실패했다”며 “한국의 소림사 주방장을 찾아 사찰음식의 전통도 지키고 신도들의 건강도 챙기고 싶다”고 말했다. 스님은 평소 ‘10년 백수’를 자처하는 거침없는 언행으로도 유명하다. 그동안 별다른 소임 없이 절밥만 축냈다고 했다. “남의 밥과 돈으로 살아온 ‘10년 백수 행’을 보답하기 위해 팔자에 없는 주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갚아야죠. 그게 절집에 사는 도리 아닙니까. 아직 국화빵 가격을 못 정했는데 말만 잘하면 공짜로도 줍니다.(웃음)”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10·27 법난’ 피해자인 전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영화사 회주·사진)이 이 사건과 관련해 명예회복을 신청했다. 월주 스님은 이날 “12일 ‘10·27 법난피해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피해신고 및 명예회복 신청서를 제출했으며 이번 신청은 개인의 명예회복뿐만 아니라 조계종, 나아가 불교계 전체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10·27 법난은 1980년 신군부가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조계종 스님과 불교 관계자 153명을 강제 연행하고 전국 사찰과 암자 5700여 곳을 일제 수색한 사건이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월주 스님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23일간 죄수복을 입은 채 조사를 받았으며 신군부의 강요로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명우 스님(74·사진)이 17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 전국비구니회관에서 실시된 최초의 직선제 선거에서 제10대 전국비구니회 회장에 선출됐다.}

경기 광명시 하안동 은광교회 담임목사인 이남태 목사(68)는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항상 무릎 꿇는 기도의 본보기를 보여준 분이다. 이 목사는 드러나게 조명을 받고 있지 않지만 누구보다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교회 개척 뒤 37년 동안 세 번이나 화재가 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잘 극복했다. 24시간 교회 문을 개방해 놓고 언제든 누구라도 기도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은광교회의 변함없는 자랑거리다. 이 목사는 요즘에도 열정적으로 선교와 목회를 감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를 그대로 실천하는 목회자다. 기도 중 세계에 1000개 교회를 건축하라는 비전을 갖게 된 뒤 올해 2월까지 이미 25개국에 433개 교회를 세웠다. 은광교회 출신 선교사와 목회자만 200명에 이른다.}

《경기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에 소문난 카페가 있다. 250여 석 규모에 찻값도 저렴해 주부 모임 등 단체 손님이 자주 찾는 명소. 새중앙교회(박중식 담임목사·예장 대신 교단)가 운영하는 카페 ‘로뎀나무’다. “로뎀에서 만나자”는 말은 신자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익숙한 단어가 됐다. 카페가 있는 비전센터에서는 ‘새중앙문화아카데미’가 열린다. 성악과 발레, 외국어, 미술 등 200여 강좌를 개설해 백화점 문화센터를 연상시킨다. 강좌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만 받고 있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수강생의 70%는 신자가 아닌 지역 주민들이다.》 이 교회는 이처럼 예배와 기도뿐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로 유명하다. 중국어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50대 주부는 “나이가 들어가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즐거움을 느낀다”며 “주변에 비판받는 교회들이 많지만 우리 교회는 정말 좋다”고 말했다. 요즘 여러 교회들이 사회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새중앙교회의 활동은 특히 장기적이고 전문적인 점이 특징이다. 1999년 문을 연 새중앙상담센터는 한 주 면접 상담 횟수만 400∼500건이다. 민간 시설로는 최대 규모 수준이다. 교회 내에 20여 개의 상담 공간이 있고 미술과 놀이, 음악 상담실을 따로 설치했다. 전문 상담사 50여 명이 아동과 청소년, 가족 등 여러 영역으로 나눠 상담치료를 담당한다. 장혜희 상담실장은 “아동과 청소년이 주로 센터를 찾지만 최근 중년층 상담이 늘고 있다”며 “먼 지역에서도 치료를 위해 오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새중앙어린이집은 장애아의 교육과 재활을 돕기 위한 공간이다. 12세까지의 아동을 대상으로 치료와 보육, 교육을 진행하며 현재 30여 명이 이곳에서 재활하고 있다. 아이와 함께 이곳을 찾은 한 보호자는 “상담과 치료 때문에 한 주 2, 3번꼴로 교회를 찾는다. 신자가 아닌 데다 교회 안에 있는 시설이라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종교색이 없어 이용하는 데 불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꼭 믿어야 오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 커피도 마시고 좋아하는 강좌도 듣고 상담도 받고, 그러면 좋잖아요. 문턱 없는 교회가 되어야죠.” 교회에서 만난 박중식 담임목사(57)는 늘 하던 일이라 특별히 자랑할 것도 없다고 했다. 15년 전부터 지병으로 몸이 불편해 인터뷰를 사양해온 그는 느리지만 차분하게 교회에 얽힌 사연을 얘기했다. 신학대 시절 평촌의 야산에서 학도호국단 훈련을 받다 이 지역을 선교지로 선택했다. 1983년 10명이 모여 창립 예배를 할 때만 해도 주변은 들판이었다. 신자가 된 뒤 곧 서울로 이주하는 사람도 많았다. 지금은 성인 1만여 명에 학생부만 4000여 명이 출석하고 있다. 박 목사가 투병하면서도 교회를 지키는 모습이 신자들에게 감동을 줬고, 이에 신자들도 늘었다는 것이 교회 안팎의 얘기다. 박 목사도 갑자기 찾아온 병을 ‘교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여긴다고 했다. 교회는 예산의 40%를 선교와 사회구제 비용으로 쓰고 있다. 대형교회로는 파격적인 몫이다. 4000여 석의 본당은 이전에 벽돌공장으로 사용하던 공간을 리모델링했다. 대형교회들이 주로 선택하는 교회 건축 대신 문화센터로 이용되는 비전센터 건축에 많은 비용을 들여 주민들에게 개방했다. “최근 교회들이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집단으로 비쳐 걱정입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서로 배워야죠. 부부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결혼으로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적당한 햇볕에 물도 제때 주고, 잘 관리하는 꽃밭처럼 키워야 합니다.”(박 목사) 새중앙교회는 해외 선교사를 위한 기숙 공간도 운영하고 있다. 교회와 수양관에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재충전을 위한 방 50여 개가 있다. 숙식을 제공하고 선교사를 위한 부부 세미나도 개최한다. 하나님 뜻에 따라 해외에서 헌신하며 선교활동을 하지만 의외로 가정 내에 어려운 문제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고 고생하는 분들을 위한 작은 보답이라는 게 교회 측 설명이다. “교회가 후원하는 비정부기구(NGO) ‘돕는 사람들’에 교회 신자 4000여 명이 가입해 국내외에서 1만 명을 돕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십시일반 방식으로 가면 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 욕 많이 먹는데요, 정신 차리고 성경대로 살면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