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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가뭄과 한파로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 브라질의 작황이 악화하면서 국제 커피콩 시세가 급등하고 있다. 세계적 기상이변이 부른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가격 상승) 현상인데 성인 1인당 연간 350잔 넘는 커피를 마시는 한국인들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머잖아 기후변화 걱정 없이 품질 좋은 ‘한국산 커피’를 마시게 될지 모른다. 지구 반대편과 생육조건을 똑같이 만들어주는 스마트 팜 기술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2019년부터 경북 포항에서 커피 재배에 도전해온 김일곤 씨(54)는 조만간 1000평짜리 스마트 팜 시설을 지어 커피나무 2000그루를 심기로 했다. 토질만 맞으면 커피 생장에 필요한 열대고원 기후는 자동온실 등 농업기술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강원도 일부 지역에선 커피 재배가 이뤄지고 있다. 경북 김천시에서 멕시코 고추 할라페뇨를, 전남 영광군에선 열대과일 애플망고를 키우는 등 기후, 계절의 한계를 뛰어넘는 첨단 농업이 확대되고 있다. ▷농업 분야에서 창업하는 창농(創農)에 미래를 건 청년들도 많아지고 있다. 작년에만 20, 30대 1362가구가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재광 일산쌀농업회사법인 대표(33) 같은 청년농부들은 사람 없이 움직이는 자율주행 트랙터로 경기 고양시 논에 모내기를 하고, 드론을 조종해 농약을 친다. 고령화와 농촌인구 감소로 외국인 근로자 없이 농사짓기 힘든 현실을 스마트 농법으로 극복한 것이다. 스마트 팜 농장을 모바일 기술로 연결하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스마트폰을 조작해 갑작스러운 날씨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 청년 농민은 땅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서울 서초구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옛 지하상가는 올해 ‘메트로 농장’으로 탈바꿈했다. 스마트 팜 솔루션업체 넥스트온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밑에서 3, 4주간 키운 샐러드 채소들을 백화점 식품관, 프랜차이즈 카페에 공급하고 있다. 교육, 문화시설이 부족해 농촌에 가서 살기 꺼리는 사람들 대신 농업이 도심으로 찾아온 셈이다. 올여름 뜨거운 날씨로 야채 수급에 차질이 빚어진 뒤 유통업체들은 스마트 팜 농장을 신선한 채소 공급원으로 주목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사회적 거리 두기로 도시의 삶이 팍팍해질수록 목가적 농촌생활을 꿈꾸는 이들은 늘어난다. 하지만 첨단기술로 업그레이드된 농업은 이미 이런 전원생활 수준을 크게 뛰어넘었다. 컨테이너 안에 딸기 재배시설을 집약한 ‘딸기 컨테이너 팜’ 기술을 동남아시아에 수출한 스마트팜 업체 퍼밋엔 대기업, 벤처캐피털의 투자가 몰린다. 매년 5%씩 커가는 스마트 팜 산업은 한국 경제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성장하고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캘리포니아 드리밍’과 ‘몽중인(夢中人)’은 1994년 개봉한 영화 ‘중경삼림’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에 실려 한국인들에게 유명해진 노래다.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은 특유의 몽환적 연출과 ‘꿈’을 소재로 한 노래들로 1997년 반환을 앞둔 홍콩 청년들의 불안감을 표현했다. 이 노래들이 중국의 노래방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중국 정부가 공산당에 대한 충성을 방해하는 노래의 ‘블랙리스트’를 10월 1일부터 도입하기 때문이다. ▷노래방 금지곡 지정의 계기는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에서 발생한 접대 술자리 성추행 사건이다. 회식 문화를 바꾼다며 중국 정부는 ‘음주를 동반한 회식’을 금지하는 한편 중국의 통일과 주권, 영토 보전, 민족 단결을 해치는 노래, 미신을 퍼뜨리는 노래, 음란 도박 폭력 마약과 관련된 노래를 퇴출하기로 했다. 이와 별도로 청소년의 과소비를 부추긴다는 지적을 받던 ‘아이돌 숭배 문화’도 당국의 표적이 돼 팬클럽 계정 4000여 개가 폐쇄됐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은 7월 1일 이후 중국에선 ‘홍색규제’ 도입이 일상이 됐다. 기념일 전날 중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미국의 뉴욕증시에 상장해 ‘괘씸죄’에 걸린 디디추싱이 신호탄이었다. 점유율 80%로 ‘중국의 우버’로 불리던 디디추싱의 앱은 당국의 지시로 중국 내 모든 앱 장터에서 삭제됐고 주가는 폭락했다. 중국판 ‘배달의 민족’ 메이퇀뎬핑은 모든 배달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라는 지시 때문에 수익성이 악화됐다. ‘게임은 정신적 아편’이란 당국의 비판에 1위 게임업체 텐센트는 청소년의 게임 이용 시간을 축소했다. ▷지난달 23일엔 ‘사교육과의 전쟁’이 선포됐다. 정규 교과목을 가르치는 교육기업의 설립이 금지됐고 기존 업체는 비영리기관으로 전환해야 한다. 140조 원 규모의 중국 사교육 시장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한국만큼 교육열이 높은 중국 중산층 학부모들은 불법 고액 가정교사를 구하느라 바쁘다고 한다. 사립학교의 비싼 교육비가 사회적 위화감, 출산율 저하 등 부작용을 낳는다는 이유로 베이징시는 14개 사립 초중고교 운영권을 강제로 거둬들였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권력 연장 여부가 결정될 내년 10월 20차 당 대회까지 공산당에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규제와 통제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전방위 규제로 중국 기업들의 가치는 1조 달러(약 1180조 원) 이상 증발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중국 당국의 규제 리스크가 명확해질 때까지 중국에 대한 투자를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빽빽이 쌓인 나무 블록을 허물지 않고 하나씩 제거하는 ‘젠가 게임’처럼 서서히, 요령껏 위험을 줄이며 중국에서 발을 빼는 방법을 우리도 고민해야 할 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여야 어느 대선주자와 맞붙어도 지지 않을 언쟁(言爭)능력을 갖췄다. 잇따른 ‘기본 시리즈’ 공약 발표나 대선주자 간 토론에서도 이런 능력이 드러난다. 특히 전문가들도 잘 사용하지 않는 경제용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게 특징이다. “뭔가 이상한데…” 하는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 적지 않은데 바로 콕 집어 평하기가 쉽지 않다. 보편적 어의(語義)와 다르거나 다른 사실, 분석에 근거한 ‘이재명식 경제용어’여서 본뜻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용어들인데 사실관계, 전후맥락을 이해하려면 별도의 해설이 필요하다. ▽승수효과=기본소득 도입 필요성을 강조할 때마다 이 지사는 작년 5월 전 국민 재난지원금 효과를 예로 들면서 “승수효과가 통계학적으로 증명됐다”고 한다. 정부나 지자체가 푼 재정이 돌고 돌면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총효과, 즉 ‘재정승수’가 높다는 의미다. 이 지사 싱크탱크인 경기연구원이 재난지원금 100만 원으로 그 1.85배인 185만 원의 소비효과가 나타났다고 분석한 게 근거로 보인다. 반면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분석한 소비효과는 0.26∼0.36배로 효과는 26만∼36만 원이었다. 중산층 이상이 원래 하려던 소비를 재난지원금으로 대신 쓰고, 자기 돈은 저축한 게 가장 큰 원인이다. 국민에게 정부가 돈을 바로 쏴주는 ‘이전지출’의 경우 한국은행이 추산한 재정승수는 0.22배 수준으로 KDI 분석에 가깝다. ‘효과가 증명됐다’는 이 지사 주장은 정설이 아니다. ▽수요주도성장=이 지사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대비해 자신의 경제정책을 ‘수요주도성장’이라고 설명한다. 현금 나눠 주기의 수요창출효과가 뿌린 돈보다 크다고 봐서 기본소득을 ‘분배정책인 동시에 경제, 성장정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KDI 등의 분석대로 재정승수가 1.0배에 크게 못 미치면 기본소득을 성장정책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반대로 이 지사 생각이 맞는다면 다른 경제정책은 필요가 없다. 세금을 걷었다가 나눠주기만 해도 경제가 성장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적 없는 성장방식이다. 미래 세대가 나랏빚 갚느라 소비를 줄여 발생할 장래의 부작용도 고려에서 빠져 있다. ▽교정과세=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이 지사는 ‘교정과세’인 국토보유세를 도입하고 걷은 돈은 기본소득으로 전 국민에게 나눠 준다고 했다. 교정과세는 전문가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용어다. 담배 술 도박같이 사회에 해악이 있는 소비에 물리는 ‘죄악세(Sin Tax)’나 환경오염을 억제하기 위해 물리는 휘발유세 등 ‘피구세(稅)’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된다. 과도한 부동산 보유를 징벌적 세금을 물려 교정(矯正)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뜻이다. 이 밖에 기본주택 100만 채 재원으로 제시한 ‘현대 금융기법’, 기본소득 지불수단으로 강조하는 ‘소멸성 지역화폐’ 등 이재명식 용어가 계속 늘어나는데 하나하나가 논란거리다. 최근엔 ‘오리너구리’가 추가됐다. “복지와 성장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며 오리와 너구리 양쪽 속성을 가진 오리너구리에 기본소득을 비유한 것이다. 날개 달린 박쥐가 조류가 아니듯 오리너구리도 포유류일 뿐이지만 정치 수사(修辭)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이 지사가 ‘네거티브 휴전’을 선언하고 정책대결에 집중하기로 했다면 “앞으로도 그냥 포퓰리즘을 하겠다”며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대신 국민과 전문가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정책들을 상식에 기초한 보편언어로 설명하고 타당성을 검증받아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896년 9월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내러갠셋파크 경마장 출발선에 전기차 2대, 가솔린차 5대가 나란히 섰다. 총성과 함께 차들은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결승선에 먼저 도착한 차는 리커(Riker) 전기차 회사의 삼륜차였다. 무거운 납축전지와 모터로 움직이는 전기차가 초기 가솔린 엔진 자동차를 앞섰던 것이다. 125년 전 이 경주는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를 꺾은 가장 오래된 레이스로 기록됐다. ▷이달 5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제너럴모터스, 포드, 스텔란티스 등 미국 3대 자동차사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자동차 산업의 미래는 전기차다. 되돌릴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2030년부터 미국에서 팔리는 신차의 절반을 친환경차로 채우도록 하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20세기 초입에 반짝 인기를 끌다가 1908년 선보인 포드 ‘T모델’ 등 싸고 성능 좋은 가솔린차에 밀려 사라졌던 전기차가 확실한 대세로 떠올랐다. ▷지구 전역에서 나타나는 이상기후가 내연기관차 시대의 종언을 재촉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30년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1990년보다 55% 줄이는 계획을 6월 말 발표하면서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 판매를 전면 금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메르세데스벤츠는 2030년까지 모든 차종을 전기차로 바꾸기로 했고, 폭스바겐그룹과 BMW도 2030년까지 신차 중 전기차를 절반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연일 이런 소식을 듣다 보니 차를 바꾸거나, 처음 장만하는 사람이라면 전기차, 가솔린·디젤차, 하이브리드차 등을 놓고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내연기관차를 샀다가 머잖아 바꿔야 하거나,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비칠까 걱정이다. 하지만 국내 전기차 구매자 중 40, 50대 고소득층이 많은 걸 보면 아직 청년 등에게 전기차 가격은 다소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최소 15∼20년 정도는 내연기관차와 전기차가 공존할 것으로 예상되고, 전기차 가격을 좌우하는 배터리 가격도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돼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주요국에 친환경차만 수출하는 시점을 2040년으로 잡아둔 현대차·기아는 다소 급해졌다. 올해 1∼7월 현대차·기아가 미국에서 판 친환경차가 작년 동기의 약 3배로 늘어나는 등 흐름은 좋다. 연내에 현대차의 전용 전기차 모델 ‘아이오닉5’, 내년엔 기아 ‘EV6’가 수출되기 시작하면 상승세는 더 가팔라질 것이다. 그보다는 전기차가 불러올 산업구조 변화가 문제다. 엔진차에 비해 전기차는 부품 수, 생산 인력이 30% 이상 줄고 자율주행 기능 등에 대한 투자는 훨씬 많이 필요하다. 내연기관차 시대의 향수에 빠져 있다간 닥쳐오는 전기차 시대의 파도를 넘기 어려울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시간을 드리겠다. 사는 집이 아닌 건 파시라.” 문재인 정부 첫해인 2017년 8월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방침을 밝히는 김현미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 후 집값이 계속 오르자 정부는 매년 양도세제를 뜯어고쳤다. 지난해 초부터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양도세 상담을 포기한 세무사, 즉 ‘양포세’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당론으로 정한 소득세법 개정안은 ‘징벌적 양도세제’의 결정판이다. 지금까지 다주택자가 여분의 집을 처분하고 남긴 한 채는 집을 산 시점부터 장기 보유·거주 특별공제를 받을 수 있었지만 2023년 1월 1일부터는 다 팔고 1주택자가 된 시점부터 기간을 계산한다. 이번에도 남은 1년 5개월 동안 “사는 집 아닌 건 팔라”는 뜻이다. ▷양도세 개편의 불똥은 ‘1가구 1주택자’에게도 튀었다. 법 개정 이후 집을 사는 1주택자는 나중에 집을 팔 때 차익 규모에 따라 장기보유특별공제 폭이 달라진다. 5억 원 이하, 5억∼10억 원, 10억∼15억 원, 15억 원 초과 등 시세차익이 커지면 최대 공제 폭이 40∼10%로 차등 적용된다. ‘똘똘한 한 채’로 올린 높은 시세차익도 환수할 불로소득으로 본 것이다. ▷4년 내내 다주택자를 표적 삼던 양도세가 1주택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건 여당 내 ‘부동산 정치’의 산물이다. 4·7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뒤 양도세 과세 대상을 실거래가 ‘9억 원 초과’에서 ‘12억 원 초과’로 완화하려던 민주당 지도부가 ‘부자 감세’에 반대하는 당내 강경파를 달래기 위해 다주택자와 ‘고가 1주택자’의 양도세 부담을 늘리는 쪽으로 타협했다. 부동산 거래세 완화란 취지는 실종되고 세금폭탄만 남았다. ▷양도세제는 더 난해해졌다. 1주택자만 봐도 거주·보유 기간에 따라 2019년 8가지였던 양도세율 경우의 수가 급증해 이번에 법이 개정되면 189가지로 늘어난다. 다주택자는 보유 주택 채수 및 지역, 처분 시기 등이 추가돼 경우의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효율성, 명확성, 적은 납세자 협력비용 등 좋은 세금의 원칙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양포세만 더 늘어나게 생겼다. ▷어느 나라건 청년층과 서민, 취업·교육 등의 이유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빌릴 집이 필요하고, 그 대부분을 다주택자, 부동산 업체가 공급한다. 모두가 1주택자가 되기도 어렵지만 된다 해도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약될 수밖에 없다. 이미 높은 양도세에도 집을 안 판 사람 다수는 양도세가 더 강화돼도 집을 내놓기보다 버티거나 증여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다주택자=악, 1가구 1주택=선’이란 여권의 인식이 초유의 ‘복잡계 세금’을 만들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청계천이 자연하천이면 복개를 했을 것이고, 시청 앞이 광장이면 없애고 도로를 넓혔을 사람이죠.” 이명박(MB) 전 서울시장이 박근혜 의원과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쟁을 벌이던 2007년 재정경제부의 한 고위관료는 MB를 이렇게 평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뭐든 했을 사람’이란 뜻이다. 서울시장 MB는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밀어붙이는 추진력 때문에 말도, 탈도 많았지만 눈에 확 띄는 결과물을 만들어내 “일할 줄 아는 시장”으로 평가받았다. 요즘 표현으로 ‘정치 효능감’ 갑(甲)이었던 것이다. 이 성과를 발판으로 MB는 대통령이 됐다. 역시 효능감을 앞세워 대권에 도전하고 있는 인물이 이재명 경기도지사다. 대선 출마 선언문에서 이 지사는 “정치적 후광, 조직, 돈, 연고 아무것도 없는 저를 응원하는 것은 성남시와 경기도를 이끌며 만들어낸 작은 성과와 효능감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자기에게 투표한 성남시민, 경기도민 중에 ‘뽑길 잘했다’고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이 지사와 MB는 이미지가 많이 겹친다. 어려운 집 7남매 중 다섯째인 MB는 야간 상고를 졸업하고 시장의 청소부로 일하며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녔다. 똑같이 가난한 집 7남매 중 다섯째인 이 지사는 청소년기에 소년공으로 일했고 검정고시를 거쳐 중앙대 법대를 졸업했다. MB가 현대건설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월급쟁이 신화라면 이 지사는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일하다가 경기지사가 된 성공한 정치인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효능감(sense of self-efficacy)’이 높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자기 효능감이 강한 사람은 똑같이 어려운 과제를 만나도 남보다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 게 특징이다. 이달 초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토론회에서 “세출 조정 등으로 (기본소득에 필요한) 50조 원을 만드는 건 무협지 수준 이야기”라는 박용진 의원의 비판을 “(박 의원) 본인은 못 해도 저는 할 수 있다”고 받아치는 모습에서 이 지사의 자기 효능감을 확인할 수 있다. 납세자에게 정책 효과를 체감하게 만드는 능력은 정치인에게 강점이다. 하지만 효능감이 높다고 꼭 좋은 정책은 아니다. MB의 청계천 복원은 당시 ‘인공하천’이란 혹평을 받았다. 시청 앞 잔디광장에도 교통 혼잡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둘 다 서울시민의 사랑을 받는다. 대통령 MB의 뉴타운 정책, 보금자리주택은 건설업체 배만 불린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서울 아파트 값을 끌어내렸다. 지금도 공격이 이어지는 4대강 사업은 최소한 홍수 피해를 크게 줄였고, 주변 농민들이 현 정부의 보 해체에 반발할 정도로 효능감이 지속되고 있다. 반면 이 지사의 정책 효능감은 주로 현금복지에서 비롯됐다. 청년, 농민에 이어 예술인에게까지 분기마다 나눠준다는 경기도 기본소득이 대표적이다. 작년 총선 직전 여당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 드라이브를 건 것도 이 지사였고 기본소득을 이젠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효능감을 ‘즉각’ 높인다는 점에선 현금 살포를 넘어설 정책은 없다. 이로 인해 나랏빚이 급증하고, 미래세대 세금 부담이 커지는 데 대해 이 지사가 걱정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수입과 지출을 맞추고 장기적으로 득 되는 일에만 투자하는 기업인 출신과 재정자립도 최상위권 성남시, 경기도 지자체장 출신이란 차이일 수 있다. 이 지사는 최근 2차 추경을 통한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에 기획재정부가 반대하자 “민생에 필요한 것은 과감한 날치기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하긴 이런 생각을 갖고 거대 여당의 지원을 받는 대통령이 된다면 나라의 미래야 어찌 되건 국민의 효능감 높이는 데 쓸 돈은 얼마든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2011년 4월 농심은 신라면의 2배 가격인 ‘신라면블랙’을 내놨다. 프리미엄급 라면의 첫 등장이었는데 곧바로 음모론에 휩싸였다. ‘조만간 신라면 생산을 중단하고 비싼 신라면블랙만 남겨 라면값을 올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무근’이란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론이 악화되자 농심은 신라면블랙 판매를 중단했다가 1년 2개월이 지난 뒤에야 생산을 재개했다. 신라면은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라면값은 이렇게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민감한 사안이다. ▷삼양식품 고 전중윤 명예회장이 일본에서 라면 기술을 도입해 1963년 9월 15일 처음 내놓은 삼양라면은 한 봉지에 10원이었다. 담배 한 갑이 25원, 다방커피 한 잔이 35원 하던 시절이었다. 올해 한 대형마트에서 5개들이 ‘삼양라면 오리지널’ 기획상품이 2780원에 팔렸다. 봉지당 560원 정도로 58년간 56배가 됐다. 그사이 담뱃값이 180배, 커피값이 100배 이상 올랐으니 많이 올랐다고 볼 수는 없다. 역대 정부가 서민 식품인 라면을 물가관리 품목에 넣어 가격 상승을 억제한 결과다. ▷라면업계 2위 오뚜기가 다음 달부터 진라면, 스낵면 등의 가격을 평균 11.9% 올린다. 2008년 4월 이후 13년 4개월 만의 인상이다. 밀가루 국제 가격이 1년 전보다 30%, 면을 튀길 때 쓰는 팜유가 70% 이상 올라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게 업체 측의 설명이다. 그동안 임금, 물류비도 많이 올랐다. 2016년 12월 이후 값을 동결한 업계 1위 농심, 2017년 5월 이후 동결한 3위 삼양식품도 가격을 올릴 가능성이 있다. ▷코로나19 발생 후 각국의 식량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고, 수송까지 어려워졌는데 올해 들어 억눌린 소비가 폭발하면서 ‘애그플레이션(농업·agriculture+인플레이션)’이 심화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5월 세계 식량가격지수(FFPI)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40% 급등했다. 6월에 조금 안정세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5.4% 급등하자 미국의 식료품점들이 설탕, 냉동육을 사재기한다는 소식이 나온다. ▷작년 ‘집콕’, 재택근무에 힘입어 내수, 수출에서 사상 최고 실적을 거둔 한국 라면업계는 올 들어 집 밖 활동이 늘면서 판매가 줄고 원재료값은 폭등해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 해도 라면을 제일 많이 먹는 20대 청년 1인 가구, 홀몸노인의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할 때 라면값 인상은 우울한 소식이다. 라면에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 주는 계란값은 1년 전의 갑절이고, 대파값도 70% 오른 상태다. 한국인의 솔 푸드인 ‘파 송송 계란 탁’ 라면 한 그릇의 부담마저 커지고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고용연장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검토를 시작할 때가 됐다.” 작년 2월 문재인 대통령이 고용노동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한 말이다. 앞서 2019년 10월 노인의 날에 대통령은 “어르신들이 더 오래 종사하실 수 있도록 정년을 늘려가겠다”고 했다. 맥락은 같은데 ‘정년연장’이란 용어가 4개월여 만에 ‘고용연장’으로 바뀌었다. ▷60세 정년을 시행한 지 4년밖에 안 됐는데 정년을 또 늘리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경제계는 반발했다. “청년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란 비판까지 쏟아지자 이재갑 당시 고용부 장관은 “고용연장과 정년연장은 다른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법을 고쳐 정년을 높이고 의무로 적용하는 게 정년연장이라면 고용연장은 기업의 자발적 참여 등을 통해 고용을 연장하는 더 포괄적 개념이라고 정부는 설명했다. ▷이달 중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고용연장 대책을 내놓는다. 내년에 노사, 민정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꾸려 논의를 시작해 고용연장 로드맵을 만드는 게 주요 내용이다. 현재 62세인 국민연금 수령 개시 연령이 2023년 63세, 2028년 64세, 2033년에 65세로 높아지면서 한국 은퇴자는 최장 5년의 ‘소득 보릿고개’를 겪어야 한다. 숙련공 은퇴로 중소기업의 인력난도 가중되고 있어 정년연장의 필요성이 큰 건 사실이다. ▷거대 여당의 지원을 받는 정부가 곧바로 법을 고쳐 정년을 연장하지 않는 건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2030세대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괜찮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800만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은퇴가 늦어지면 기업들은 인건비 부담 때문에 청년 신입 채용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올해 65세에서 70세로 정년을 높인 일본을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65세를 넘기는 직원들에게 기업들이 재고용, 취업 알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할 기회를 제공하도록 하되 위반해도 처벌하지 않는다. 그래도 기업들이 은퇴자를 적극 고용하는 건 인력난이 심각한 데다 연공서열식 호봉제에서 직무성과급제로 임금 체계를 바꿨기 때문이다. 업무 강도, 중요도 등에 따라 고령자 임금을 크게 낮출 수 있어 인건비 부담이 크지 않은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60세 정년을 법제화하면서 노동계로부터 직무성과급제 도입 약속을 끌어내지 못한 걸 많은 노동 전문가들이 아쉬워한다. 그래서 현 정부가 고용연장을 추진한다면 임금 유연성을 높이는 방안을 협상 테이블에 반드시 함께 올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런 반대급부도 없이 강성노조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대책을 내놓는다면 노사갈등을 부추길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일자리를 86세대에 뺏긴다는 청년층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2019년 7월 1일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해 반도체,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종의 수출 규제 조치를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관련 일본 기업들이 배상해야 한다고 한국 대법원이 판결한 데 대한 보복이 분명했다. 반도체 기업들 발등엔 불이 떨어졌고,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됐다. ▷한 달 뒤 일본 정부는 한국을 수출관리 우대조치 대상국인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법령까지 의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해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일본산 소재·부품을 대체할 국산기술 개발과 수입처 확보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육성은 현 정부 산업정책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2년이 지난 지금 일본 수출 규제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다’는 게 중론이다. 반도체 세척에 쓰이는 고순도 불화수소는 솔브레인, SK머티리얼즈 등 국내 기업이 양산을 시작해 2년 전 40%가 넘던 일본산 비중이 13%로 뚝 떨어졌다. 미세회로를 그릴 때 쓰이는 포토레지스트,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여전히 일본산을 80% 이상 쓰지만 비중이 조금씩 줄고 있고, 한국 기업들의 기술 개발에도 속도가 붙었다. 자국 기업들의 피해가 커진 데다 반도체 주요 생산국인 한국 시장을 놓칠까 봐 일본 정부가 규제를 엄격히 적용하지 않은 것도 피해가 적은 이유 중 하나다. ▷악영향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훨씬 컸다. 불매운동 타깃이 된 유니클로의 한국 매장 수는 2년 전 190개에서 138개로 줄었고, 작년 아사히맥주 한국 매출은 전년 대비 72% 감소했다. 한국 수입차 시장에선 미국차가 일본차를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일본을 찾은 한국 관광객 수는 2019년 7월 56만2000명에서 작년 1월 31만 명으로 줄었다가 코로나19 이후 전무한 상태다. 두 나라를 오가는 상품, 사람이 모두 줄면서 작년 한일 교역 규모는 136조 엔(약 1387조 원)으로 관계 악화 전인 2018년보다 20.6%나 위축됐다. ▷일본 소재·부품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대기업 중심 압축성장이 낳은 한국 경제의 고질병이었다. 하지만 올해 1∼4월 소재·부품 수입액 중 일본산은 15.0%로 2001년 이후 가장 낮아지는 등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소재·부품산업에 대한 지속적 투자와 관심은 중요하지만 수출의 힘으로 경제 규모 10위에 오른 한국이 ‘수입 대체 국산화’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게다가 미중 간 경제 패권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까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한국 경제의 도약을 위해서라도 일본과의 경제 협력관계 복원을 언제까지나 미룰 순 없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4년여를 갈고닦은 여권의 ‘갈라치기’ 기술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집값, 보유세 폭등으로 4·7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자 더불어민주당은 올해 공시가 상위 3.7%인 1주택자 종합부동산세 부과대상을 ‘상위 2%’로 줄이기로 했다. ‘부유세가 보편세가 돼버렸다’는 비판 여론에 떠밀려 세제를 정상화하면서도 ‘2 대 98’의 유리한 정치구도를 만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시가 9억 원이던 기준을 그냥 11억∼12억 원으로 높이면 2%와 과세대상이 비슷할 뿐 아니라 납세자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행정력 낭비도 줄일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특정비율 과세’라는 신기술까지 동원해 많이 가진 자와 나머지를 선명히 구분했다. 현 정권의 갈라치기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작년 7월 말 여권이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사작전 치르듯 도입한 ‘임대차3법’은 집주인과 세입자 간 대립과 갈등을 극대화하고 있다. 집주인들은 세입자의 계약갱신요구권 행사를 피할 방법을 찾아 법률상담을 받으러 다니고, 세입자들은 집주인들이 ‘직접 들어와 살겠다’면서 집을 비우라고 할까 봐 가슴을 졸인다. 외교 분야에선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서 비롯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제한에 대응해 이순신 장군, 죽창가까지 동원해가며 ‘친일’ ‘반일’ 구도를 뚜렷이 했다. 갈라치기 정책 중에서 압권은 최저임금 인상이었다. 2018년, 2019년 2년간 최저임금이 30% 가까이 오르자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직원 월급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명색만 ‘사장님’일 뿐 수입은 월급쟁이만도 못한 편의점주, 카페 주인들이 알바 봉급 떼먹는 악덕 자본가로 몰려 ‘존재론적’ 고민을 하게 됐다. 최근 광주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한 카페 주인은 “진짜 서민의 삶을 ‘1’도 모르는 패션 좌파들이 ‘시급 1만 원도 못 줄 것 같으면 장사 접어라’는 소리를 거침없이 하더라”며 쌓인 울분을 토해냈다. 그렇다면 갈라치기의 상대편에 선 알바, 종업원들이라도 행복해졌어야 했다. 하지만 몇 년 사이 일하던 편의점 카페 식당에서 해고되고 수십, 수백 대 1 경쟁을 뚫고 얻는 일자리도 주휴수당 없는 주 15시간 미만짜리다 보니 구직자들에게도 드디어 ‘현타(현실자각 타임)’가 왔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최근 조사에서 구직자 48.1%는 ‘내년 최저임금을 동결해야 한다’고 답했고, 15.7%는 ‘인하해야 한다’고 했다. 10명 중 6명이 넘는 구직자가 최저임금 상승이 자기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최저임금처럼 갈라치기의 문제점이 한 정부 임기 안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건 오히려 드문 일이다. 5년 단임제 정부의 실패한 정책은 흔히 다음 정부 초기에 악영향이 발현된다. 의무임대 기간을 ‘2+2년’으로 늘린 임대차보호법 부작용은 내년 8월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양국 정상이 회담 일정조차 잡지 못할 정도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국내 ‘친일’ ‘반일’ 프레임의 극복은 다음 정부 몫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갈라치기는 피지배층의 분열을 조장해 단합된 힘으로 지배 세력에 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할통치(divide and rule)’의 일종이다. 고대 로마, 중국이 이민족 지배를 위해 자주 쓴 통치 기술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한 사회, 경제 공동체 안에서 갈라치기가 횡행하고 있다. 당장은 내게 득이 되고, ‘땅 산 사촌’만 힘들지 몰라도 종국엔 너나없이 손해를 보게 된다. 국민 스스로 각성해 대항하지 않으면 권력자들은 갈라치기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미국 상원이 8일(현지 시간) 찬성 68표, 반대 32표로 통과시킨 ‘미국 혁신·경쟁법’이 올해 4월 발의될 때 붙었던 원래 이름은 ‘끝없는 변경법(Endless Frontier Act)’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7월, 미국이 전후에도 과학 최강국 자리를 지키기 위한 전략을 제시한 버니바 부시의 보고서 ‘과학, 끝없는 변경’에서 따왔다. 부시는 레이더, 페니실린, 원자탄 개발에 참여해 전쟁 승리에 기여한 미국 과학연구개발국(OSRD) 총책임자이자 ‘과학영웅’이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 토드 영 공화당 의원이 공동 발의한 법안은 향후 5년간 2500억 달러(약 279조 원)를 산업기술 분야에 투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초당적 지지를 받고 있어 하원 통과가 유력하다. 영 의원은 이날 “미래 세대가 새로운 ‘변경’을 바라볼 때 (중국의) 붉은 깃발이 꽂혀 있을 것인가. 우린 오늘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는 21세기에도 승리하기 위한 경쟁을 하고 있고, 이제 출발의 총성이 울렸다”며 환영했다. 인공지능(AI), 양자 컴퓨팅 등 신기술 연구개발에 1000억 달러(약 111조6000억 원), 반도체 제조능력 확대에 520억 달러(약 58조 원) 등을 투입하도록 한 법안은 바이든의 대중(對中) 견제 전략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8일 백악관이 공개한 ‘공급망 회복력 구축과 미국 제조업 활성화, 광범위한 성장 촉진’이란 제목의 250쪽 보고서에 중국은 458차례 등장했다. 100일 전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제약 등 4개 분야에서 안정적 공급망을 확보할 방안을 만들라는 바이든의 행정명령으로 만들어진 보고서다. 기술·경제 분야에서 펼쳐질 미중 신(新)냉전의 작전지도인 셈이다. ▷보고서는 ‘한국’을 74번 거론했다. 80여 차례씩 등장한 일본, 대만보다 적지만 동맹국이자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인 한국은 중국을 배제하고 글로벌 공급망을 새로 짜려는 미국에 빼놓을 수 없는 파트너다. ‘삼성’ ‘LG’ 등 한국 기업 이름도 50번 넘게 나왔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44조 원 들여 미국에 반도체, 배터리 공장 등을 짓기로 약속한 데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다. ▷바이든 정부의 강공에 중국은 역습을 준비 중이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반(反)외국 제재법’ 통과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구체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중국을 부당하게 대우한 국가와 해당국 기업에 보복 수단을 마련하는 법안이라고 한다. 철저한 대비와 냉철한 판단이 없으면 한국이 한순간에 경제 전쟁의 파고에 휩쓸릴 수 있는 상황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지난달 말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대표 간담회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탈원전 정책 폐기를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고의 순방, 최고의 회담”이라고 대통령이 자평한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원전 협력을 약속한 만큼 정책기조가 바뀔 가능성이 생겼다고 본 것이다. 대통령의 답은 짧고 드라이했다. “현황을 파악해보도록 하겠다.” “할 말 없는 상황이 됐다”고 대통령이 직접 실패를 인정한 부동산정책을 빼고 큰 문제가 드러난 정책에 대해서도 현 정부는 사과하거나 물러선 적이 거의 없다. 대표적인 게 탈원전이다. 고리 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대통령이 ‘탈핵 시대’를 선포한 게 취임 다음 달인 2017년 6월이다. 당시 탈원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1368명이 사망했다”고 한 대통령의 발언은 완전한 착오여서 일본 정부의 항의를 받았다. 첫 단추부터 엉성하게 끼워진 탈원전 정책은 4년 내내 이어져 왔다. 7000억 원 들여 보수한 원전을 멈춰 세우고, 공사 중이던 원전사업을 중단시키고, 건설이 끝난 원전은 허가를 내주지 않는 일이 계속됐다. 하지만 4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반(反)원전주의자라도 탈원전이 정말 맞는 길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수많은 변수가 발생했다.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에 막대한 돈이 투입됐지만 한국 기후조건의 한계로 효율과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친환경 에너지 확대가 산림과 자연경관을 훼손하는 역설적 상황도 벌어졌다. 가장 큰 변화는 해외에서 시작됐다. 세계적 기후변화 대응의 목표가 ‘탈(脫)탄소’로 집중되면서 탄소배출이 없는 원전의 가치가 재조명된 것이다. 대다수 선진국들이 원전 건설 재개, 확대를 검토하고 있고, 큰 사고를 겪은 일본마저 원전 재가동에 시동을 걸고 있다. “탄소배출 없는 에너지원은 원전뿐”이라고 믿는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은 안전성이 높고, 폐기물을 현저히 줄이는 차세대소형원전(SMR)을 미국 내에 건설하는 계획을 내놨다. 여권에서도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이 SMR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양국이 원전사업 공동 참여를 포함해 해외 원전 시장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포함되는 일이 발생했다. 탄소중립 달성에 원전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본 조 바이든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1979년 스리마일 원전사고 이후 원전 건설을 중단한 미국으로선 세계 원전시장을 주도하는 러시아,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이란 파트너가 필요했던 것이다. 탈원전을 신념으로 삼아온 이들은 충격을 받았겠지만 에너지 전문가들은 드디어 정부의 탈원전 옹고집을 깰 기회가 왔다며 반겼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최근 열린 ‘P4G 서울 정상회의’는 현 정부가 자연스럽게 탈원전 정책을 수정할 최적의 기회였다. 하지만 대통령 발언이나 선언문에서 ‘원전’이란 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탈원전 기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제는 거론조차 하기 싫은 모양이다. 위험을 만난 타조가 땅에 머리를 묻는다는 속설에서 나온 ‘오스트리치즘(ostrichism·현실 외면)’이란 말만큼 원전을 대하는 현 정부의 태도를 잘 나타내는 표현도 없을 것 같다.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사건에서 드러나듯 무리한 탈원전은 머잖아 철저히 재평가될 것이다. 눈 감고, 귀 막는 시간을 늘린다 해도 진실을 마주할 시점만 조금 늦춰질 뿐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00년간 자료를 봐도 집값이 지금처럼 높은 적은 없었다. 투자자들 사이에 거친 서부개척 시대와 같은 사고(思考)가 나타나고 있다.”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그제 미국 CNBC와의 인터뷰에서 부동산, 주식, 가상화폐 시장에서 발생하는 거품을 경고했다. 미국 주택가격 지표인 ‘케이스-실러 지수’ 고안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2013년)의 말이라 예사롭지 않다. ▷그는 현재 상황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소유권 사회(ownership society) 정책’을 펴던 2000년대 초와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집이 있어야 책임의식이 커진다’며 저소득층의 주택 구입을 장려했다. 대출이 쉬워지자 너나 할 것 없이 집을 사들였고 주택 경기는 과열됐다. 결국 2008년 부실 주택대출 문제에서 비롯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미국 주택가격은 지난 1년 새 10% 이상 급등했고 케이스-실러 지수는 올해 2월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코로나19 발생 직후 전문가들의 전망과 반대다. 파산한 자영업자, 실업자들이 집을 내놓아 집값이 떨어질 것이란 예상과 달리 확장재정, 저금리가 집값을 끌어올렸다. 재택근무 확대로 넓고 안락한 집을 선호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실러 교수가 조지 애컬로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와 쓴 책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의 부제는 ‘인간의 비이성적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다. 실러 교수는 케인스가 대공황 시기 비합리적 경제행동을 설명하는 데 썼던 ‘야성적 충동’이란 말을 원용해 ‘집값이 영원히 오를 것’이란 맹목적 믿음이 자본시장 붕괴로 이어진 글로벌 금융위기의 과정을 설명했다. 자산버블에 있어선 자타가 인정하는 전문가인 셈이다. ▷한국 집값에 대해 그에게 묻는다면 “한국 상황을 잘 모른다. 나는 ‘케첩 경제학자’가 아니다”라며 즉답을 피할 것 같다. 그는 2007년 “미국 주택가격엔 버블은 없다”는 학자의 주장에 대해 “전형적인 케첩 경제학”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케첩 2병 값이 1병의 2배 정도면 합리적’이라는 식으로 드러난 숫자로만 판단할 뿐 경제 시스템 이면에 숨겨진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경제학자를 비꼰 말이다. ▷한국 아파트 값은 미국 이상으로 급등하고 있다. KB국민은행 리브부동산에 따르면 4월 서울의 평균 아파트 매매가는 11억1123만 원으로 1년 전보다 17.7%(1억9665만 원)나 올랐다. 전국의 미분양 아파트 수도 1992년 1월 이후 29년 만에 가장 적어졌다고 한다. 공급 부족이 주요 원인이라곤 해도 과도한 쏠림은 거품을 만들게 마련이다. 주택 거품이 꺼질 시기를 한국도 대비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통장하고 도장이 없어졌어. 누가 훔쳐갔나 봐.”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한 건 4년 전 겨울 아버지 상을 치른 직후였다. 놀라서 퇴근 후 두 분이 살던 집에 가보면 옷장 속 숨겨둔 가방 안에 예금통장이 멀쩡히 들어 있곤 했다. 같은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된 뒤 모시고 병원에 갔다. 치매였다. 병석의 아버지에게만 신경 쓰는 동안 어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던 것이다. 고령사회 한국에 치매환자가 많은 건 당연하지만 어느 자녀에게나 ‘내 부모의 치매’는 처음 겪는 일이다. 이후 의사, 부모 치매를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 치매노인들이 통장과 현금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걸 알게 됐다. 6·25전쟁 이후 밑바닥부터 출발해 경제적으로 힘겨운 시대를 살아낸 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제일 믿을 수 있는 것, 절대 잃어선 안 되는 게 통장과 현금이었다. 한국보다 풍요롭고 집에 현금을 두지 않는 서구 선진국에선 결혼반지, 보석이 없어졌다고 호소하는 치매노인이 많다고 한다. 요즘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들이 청년들에게 뭉텅이 현금을 쥐여주자는 약속을 쏟아내고 있다. 4·7 재·보궐선거에서 이반현상이 뚜렷해진 20대, 특히 ‘이대남’을 어르려는 거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대학 안 가는 청년들에게 해외여행비 1000만 원을 지원해 주는 건 어떤가”라고 제안했고,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제대할 때 사회출발자금 같은 것을 한 3000만 원 장만해 드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출생 때부터 20년간 국가가 적립해 사회초년생이 될 때 1억 원짜리 통장을 만들어주자고 한다. 올해 성년을 맞은 청년이 49만7000여 명. 어림셈만 해봐도 매년 수조∼수십조 원이 필요한 공약들이다. 성년의 날을 맞아 민주당 지도부가 연 간담회에서 청년들은 “더 이상 이런 공약에 속아 표를 주진 않는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좀처럼 믿지 않는 게 정치인들의 속성이다. 선심성 공약일수록 무리해서라도 지키려 하는 게 더 문제다. 다만 공약의 실현을 가로막을 장벽은 높아지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이 현 정부에서 폭증한 나랏빚이다. 빚을 내 돈 쓰는 일이 습관화된 영향으로 내년 말 국가채무는 1000조 원을 넘는다. 최근 취임 4주년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적극적 확장재정”을 강조한 만큼 남은 1년도 흔들림 없이 돈을 풀 것이다. 코로나 위기에서 벗어나면 주겠다는 대통령의 ‘전 국민 위로금’ 약속도 살아 있다. 그런데 경고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의 신용등급을 제일 먼저 떨어뜨렸던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최근 “한국의 국가채무가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이라며 재정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절제된 표현을 쉽게 풀면 “지금처럼 써대다간 머잖아 신용등급이 떨어질 것”이란 경고다. 게다가 미국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긴축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다음 정권을 누가 잡든 지금처럼 재정 털어먹기를 계속하다간 임기 내 경제 파탄을 각오해야 한다. 청년에게 쥐여준다는 돈도 결국 청년들이 평생 세금으로 갚아야 할 빚과 이자만 늘릴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요양원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가끔 만나는 어머니는 갓 고등학생 된 모습까지만 기억하는 손녀가 대학생이란 사실에 매번 놀란다. 그리고 “얘 대학 들어갈 때 등록금 해주려고 모아둔 돈이 있는데…”라고 한다. 끔찍이 챙기던 통장은 장성한 자식을 넘어 손녀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우리 정치인들에겐 기대할 수 없는 걸까.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지난주 미국 물류창고에서 일할 7만5000명 채용 계획을 밝히면서 평균 17달러(약 1만9300원)의 시급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현재 7.25달러인 연방 최저임금을 2025년까지 갑절인 15달러로 올리겠다’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고려할 때 낮지 않은 급여다. 코로나19 백신의 빠른 접종과 경기회복으로 일감이 많아지는데 일하려는 사람이 적다 보니 높은 임금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 구인난의 원인으로 실업수당이 지목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3월 통과시킨 1조9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구제법안’은 실직한 이들에게 기존 실업수당과 별도로 매주 300달러를 9월 초까지 얹어주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평균 387달러의 실업수당을 받던 미국 실업자의 주당 수입은 687달러로 높아졌다. 연봉으로 치면 3만5700달러이고 소득세도 내지 않는 실속 있는 소득이다. ▷최저임금을 받고 평균적인 근로시간을 일한 미국인이 벌 수 있는 연봉은 1만3000달러다. 일하지 않아도 그보다 2배가 훌쩍 넘는 수입이 생기다 보니 감염 위험이 남아 있는 일터에 복귀하려는 실업자가 많지 않다. 학교가 정상화되지 않아 자녀를 돌봐야 하는 여성들도 재취업을 늦추고 실업수당을 받는 게 이득이다. “실업수당이 구직 활동을 막는다는 증거가 없다”며 버티던 바이든 대통령도 결국 지난주에 “실업자는 적합한 일자리를 제안받으면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혜택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올해 실업급여 하루 하한액은 6만120원, 월 181만 원으로 최저임금을 받고 하루 8시간, 주 5일 일할 때 받는 182만 원과 불과 1만 원 차이다. 정부가 2019년부터 실업급여 혜택을 대폭 늘린 영향이다. 단기간 일한 뒤 실업급여를 타기 위해 ‘권고사직’시켜 달라고 사업주에게 요구하는 종업원들도 있다고 한다. 5년간 3번 이상 실업수당을 받은 사람이 9만4000여 명이나 된다. 고용보험기금 고갈 위험이 커지자 고용노동부는 수급 횟수가 많아지면 지급액을 줄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직장을 잃고 생계의 위협을 받는 이들을 정부가 지원하는 건 당연하지만 과하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 ‘실업급여 중독’ 현상을 앞서 경험한 독일 프랑스 덴마크 등 선진국들은 정부기관의 취업 제안을 계속 거절하는 실업자에 대해 실업수당 지급 기간을 줄이는 등의 방법으로 일터 복귀를 유도한다. 한국도 코로나19 이후 세금을 퍼부어 만든 일자리, 실업 대책의 부작용을 서둘러 점검할 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데이터가 곧 돈인 정보통신기술(ICT) 시대가 펼쳐지면서 범죄자들에게는 사람보다 데이터가 더 ‘수지맞는’ 인질이 되고 있다. 최근엔 미국 송유관 운영회사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의 전산 시스템을 공격한 해커조직 ‘다크사이드’가 이 회사 데이터를 인질 삼아 몇 시간 만에 500만 달러(약 56억5000만 원)를 챙기고 숨어버렸다. ▷다크사이드가 쓴 수단이 바로 ‘랜섬웨어’다. 몸값이라는 뜻의 랜섬(ransom)과 악성코드(malware)의 합성어인 랜섬웨어는 주로 이메일 등을 통해 공격 대상 기업, 정부기관 임직원 PC에 심어진다. 이들이 시스템에 접속할 때 회사 전산망에 침투해 자기들만 아는 암호를 중요한 데이터에 걸고 사용하지 못하게 한 뒤 “돈을 내면 풀어주겠다”고 협박한다. 억지로 암호를 풀려고 시도하면 데이터를 아예 못 쓰게 망가뜨리기도 한다. ▷사람이건 데이터건 인질이 잡혀 몸값을 요구받는 쪽에선 굴복하지 말자는 ‘주전파(主戰派)’와 타협으로 풀자는 ‘주화파(主和派)’ 사이에 내분이 생긴다. 미국 정부의 기본 원칙은 ‘범죄자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받아들이면 ‘돈이 된다’는 생각에 유사범죄가 폭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 동남부 석유 수요의 45%를 공급하는 콜로니얼은 사회, 경제적 피해가 커질 것을 우려해 몸값을 지불하고 암호해독 키를 받았다. ▷16세기 경쟁국 상선에 대한 해적(海賊)질이 국가산업이던 영국처럼 해킹이 주 수입원인 나라들이 있다. 미 법무부는 올해 2월 북한 인민군 정찰총국 소속 해커 3명을 기소했다. 세계적으로 외화, 가상화폐 13억 달러(약 1조4700억 원)어치를 챙기려고 해킹을 시도해 3억 달러(약 3390억 원)를 실제 벌어들인 혐의다. 러시아, 중국에서도 다수의 ‘키보드 해적단’이 활동하고 있다. 미 정부는 콜로니얼 사건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국제 해커조직의 움직임이 물 만난 고기처럼 활발해졌다. 비대면, 재택, 원격 근무의 확산으로 기업 등의 시스템 틈새가 커져 공격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시장이 급성장함에 따라 수사기관들의 추적을 피해 몸값을 챙기는 일도 이전보다 수월해졌다. ▷한국 배달 대행업체 슈퍼히어로는 14일 새벽 중국발 랜섬웨어 공격을 받아 서버가 다운됐다. 회사 측은 해커에게 비트코인을 주고 35시간 만에 시스템을 복구했지만 3만5000여 개 점포, 1만5000여 명의 배달원이 피해를 봤다. 지난 주말 아일랜드 국가의료 전산시스템도 랜섬웨어 공격을 받아 운영이 중단됐다. 수상한 이메일은 절대 열어 보지 않는 등 각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개인과 기업, 정부기관들이 언제든 인질극의 대상이 되는 시대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2010년 3월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수장으로 복귀하며 던진 화두다. 얼마 뒤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지하층에 만들어진 실험실에 임직원 12명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해 5월 발표된 삼성그룹 ‘5대 신(新)수종 사업’에 바이오·제약이 포함됐고 이듬해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출범했다. ▷당시 삼성그룹 안팎에선 “100년 이상 앞선 세계적 제약회사들을 따라잡긴 어렵다”는 우려가 나왔다. 그래서 택한 1단계 전략이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이었다. CMO는 반도체로 치면 미국의 팹리스(설계전문업체) 의뢰를 받아 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해주는 대만의 TSMC와 같은 비즈니스다. 반도체처럼 공정관리가 생명인 대형 장치산업이어서 삼성의 기량이 충분히 통할 것이란 이 회장의 판단은 적중했다. 현재 삼성바이오는 36만4000L의 생산능력을 갖춘 세계 1위 CMO다. ▷삼성바이오와 미국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 위탁생산 계약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바이오 측은 “확정된 바 없어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공시를 냈지만 이전 비슷한 소문에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정했던 것과 온도 차이가 크다. 이 때문에 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대통령이 백신동맹을 논의한 직후 계약 내용이 공개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mRNA(메신저 리보핵산)를 이용한 모더나의 첨단 백신은 화이자 백신과 함께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된다. 모더나로서도 삼성바이오와 손잡으면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어 유리한 게임이다. 다만 한국에 당장 모더나 백신이 공급되긴 어렵다. 모더나에서 원료를 받아 후반 작업만 한다면 시점이 앞당겨지겠지만 생산설비를 새로 까는 데에만 최소 6개월이 걸린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이미 미국 노바백스 기술을 이전받아 경북 안동 공장에서 6월부터 백신을 생산하기로 했다. 삼성바이오의 계약까지 성사되면 한국이 동아시아의 ‘백신 생산 허브’로 도약할 기회가 된다. 코로나19는 팬데믹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계속 발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만큼 백신 생산 능력을 갖추는 건 국가경쟁력에까지 영향을 미칠 중요한 문제다. ▷선진국에 앞서 한국이 백신을 개발했다면 좋았겠지만 기초역량과 투자 규모의 차이를 고려할 때 금세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바이오산업의 불모지였던 한국이 백신 생산 위탁기지로 주목받는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 경제의 최대 장점인 빠르고 정확한 대량생산 능력이 한국인을 포함한 세계인의 생명을 코로나19로부터 구하길 기대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 1’, 즉 청와대는 현실에선 아무리 높은 값을 치르더라도 개인이 절대 살 수 없는 땅이다. 하지만 가상(假想) 지구인 ‘어스2(Earth2)’에선 땅 주인에게 100m²당 20.935달러(약 2만3500원) 이상 가격을 제안해 잘만 흥정하면 구매할 수 있다. 익명의 이 땅 소유자는 동서로 230m, 남북으로 220m의 청와대 땅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가치는 1만593.11달러(약 1191만6200원)다. ▷어스2는 호주 출신 개발자 셰인 아이작이 만든 가상 부동산 구매 게임이다. 구글 어스 위성사진 지도를 이용해 지구상의 땅을 가로세로 10m짜리 정사각형 ‘타일’로 쪼개 팔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비스를 시작할 때 전 세계 땅 가격은 타일당 0.1달러로 동일한 선에서 출발했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 세계 주요 도시의 땅값은 수백 배로 치솟았다. 지금도 주인 없는 땅을 사거나 욕심나는 땅 주인에게 높은 가격을 제안해 신용카드로 부동산 거래를 할 수 있다. ▷이곳에 땅을 산 투자자들은 어스2가 ‘제2의 비트코인’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2100만 개로 발행량이 제한돼 희소성을 인정받는 비트코인처럼 가상 지구에선 사고팔 수 있는 땅 타일의 수가 5조 개로 한정돼 있어 가격이 더 오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이미 한국인이 산 땅의 가격이 457만6000달러(약 51억4800만 원)나 된다. 709만6000달러(약 79억8400만 원)어치 땅을 산 미국인에 이어 2위다. ▷많은 이들이 가상 지구의 땅에 관심을 갖는 건 게임 개발업체가 앞으로 이곳에 건물과 도시를 세우고, 자원을 채굴하는 등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메타버스’를 만들 것이라고 홍보하기 때문이다. 복제된 지구에 일종의 ‘사이버 식민지’를 건설한다는 구상이다. 비전은 장대하지만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땅을 돈 받고 판다는 점에서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라 할 만하다. 가상 지구가 하나만 만들어지리란 보장도 없고, 업체가 서비스를 중단하면 사 둔 땅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어 게임이 아닌 투자 대상으로 삼기에 대단히 위험해 보인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18년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미래의 빈민촌 청소년들은 가상현실(VR) 기기를 쓰고 ‘이(異)세계’에 접속해 화려하고 모험이 가득한 삶을 즐기며 허름한 현실을 잊는다. 평생 월급을 모아도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렵다는 절망감에 주식, 가상화폐 투자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어스2에 땅을 산다는 말도 나온다. 삶이 각박할수록 더욱 단단히 현실의 땅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994년 새해 첫날 하와이의 작은 섬 라나이의 호텔들은 손님을 받지 않았다. 주변 섬을 오가는 헬리콥터들도 멈췄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멀린다 프렌치와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파파라치들을 피하기 위해 모든 객실, 헬기를 전세 내버린 것이다. 소수의 친구,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리조트 골프코스에서 결혼식이 치러졌다. ▷27년여 지난 4일 빌과 멀린다의 트위터 팔로어들은 새벽에 날아든 문자에 깜짝 놀랐다.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 커플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됐다”는 이혼 고지였다.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둘은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코로나19 퇴치에 나서는 등 이상적 동반자의 전형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한다. ▷멀린다에게 1987년 입사한 MS는 첫 직장이었다. 2년 차 때 사장인 빌과 비밀 데이트를 시작했고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던 중 결혼해 전업주부가 됐다. 하지만 세 자녀를 낳은 뒤 빌과 세계 최대 공익재단을 만들면서 사회활동을 재개해 2016년엔 포보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4위에 올랐다. ▷빌은 MS 지분 1.37%를 포함해 1460억 달러(약 164조 원)의 재산을 갖고 있다. 세계 4위 부자다. ‘동등한 파트너’를 강조해온 만큼 이혼 합의금이 사상 최고액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한 두 사람의 서약이 합의금 결정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관심이다. 지금까진 세계 1위 부자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CEO(57)의 2년 전 이혼 때 부인 매켄지 스콧이 350억 달러(약 39조 원) 상당의 아마존 주식을 받은 게 최고였다. ▷2위 부자인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72)은 1990년대 초 이혼했다가 재혼했다. 3위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50)는 세 번째 부인인 캐나다 출신 가수 그라임스와 살고 있지만 할리우드 여배우들과의 염문이 끊이지 않는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 중에는 2012년 결혼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37)만 이혼 경력이 없다. ▷“빌과 멀린다도 회색이혼(gray divorce) 함정에 빠졌다”는 말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나온다. 미국 전체 이혼율은 떨어지는데 50세 이상만 높아지는 걸 설명하는 용어가 회색이혼이다. 1946∼1965년에 태어나 개인 행복을 중시하는 베이비부머들이 배우자의 부정(不貞)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유로 꼽힌다. 늘어난 수명과 건강 개선도 주요 원인이다. 66, 57세 부부의 결별 사유가 “함께 성장(grow together)할 수 없어서”란 게 의미심장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올해 1월 20일은 세계 증시 역사에 남을 날이었다. ‘로빈후드’로 불리는 미국 개인투자자들은 이날 “주가 하락에 베팅해 돈을 버는 헤지펀드 공매도 세력을 혼내주자”고 의기투합했다. 이들의 집중투자로 20달러 정도이던 비디오게임 유통업체 ‘게임스톱’ 주식이 1주 만에 483달러까지 급등했다. 헤지펀드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고 손을 들었다. 자본시장의 골리앗을 작은 개미들이 쓰러뜨렸다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작년 3월 코로나19로 중단됐던 한국 증시의 공매도가 오늘 재개된다. 공매도는 가격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식을 증권사에서 빌려 시장에서 판 다음 주가가 떨어지면 싼 가격에 같은 주식을 사서 갚음으로써 차익을 남기는 투자기법이다. 작년 초 글로벌 증시가 폭락하자 한국 등 12개국은 추가 하락을 우려해 공매도를 금지했다. 작년 말까지 10개국이 공매도를 다시 허용했고 남은 둘인 한국, 인도네시아 중 한국이 공매도를 먼저 재개한다. ▷‘공매도를 영원히 금지하자’고까지 주장한 동학개미들을 의식해 금융당국은 거래 규모가 크고 충격에 강한 코스피200, 코스닥150 종목만 우선 공매도를 시작했다. 코스피200은 종목 수로 코스피의 22%지만 시가총액으로는 88%나 된다. 일부 종목의 주가 하락은 피할 수 없겠지만 전체 증시의 충격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 전망이다. ▷정보와 자금이 많은 외국인, 기관에만 유리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불리던 공매도 투자판에 개인투자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폭도 넓어졌다. 금융당국은 ‘개인 대주(주식대여)제도’를 고쳐 사전교육을 받은 개인도 공매도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주식을 빌려주는 증권사는 6곳에서 17곳으로, 수백억 원 수준이던 주식대여 규모도 2조4000억 원으로 대폭 늘렸다. ▷1만3000여 명의 동학개미가 이미 사전교육을 받고 ‘출격 준비’를 마쳤다. 신규 공매도 개인투자자는 증권사와 약정을 맺고 담보액을 넣은 뒤 60일간 주식을 빌릴 수 있다. 투자허용 한도는 처음엔 3000만 원이었다가 횟수와 거래금액이 쌓이면 7000만 원으로 늘었다가 이후 2년 더 거래를 계속하면 제한이 없어진다. ▷문제는 가격이 떨어질 것이란 예상과 반대로 빌린 주식 값이 오르면 증권사는 담보금 증액을 요구하고, 이를 못 맞추면 강제로 공매도가 청산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반 주식투자와 달리 공매도는 원금 전부를 날릴 수 있다. ‘투자는 자기책임’이란 금언을 새삼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로빈후드가 끌어올린 게임스톱 주가는 3개월이 지난 지금 최고 때의 36%로 떨어졌지만 미국 헤지펀드들은 1월에만 197억5000만 달러(약 22조 원)의 손해를 봤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