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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고문과 숙청, 살인을 일삼던 독재자. 어머니는 부패한 ‘사치의 여왕’.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의 집안 내력은 그의 정치 인생을 가로막을 거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잘 몰라도 부인 이멜다의 방에서 발견됐다는 3000켤레의 구두 이야기는 안 들어본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가 9일 필리핀 대선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뒀다. ▷‘봉봉’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마르코스 주니어는 대선 캠페인에서 줄곧 선두를 달려왔다. 60% 가까운 지지율을 확보하며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과의 격차를 두 배 이상 벌렸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인 사라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삼아 ‘현재와 미래 권력의 결합’을 과시했다. 당선이 공식 확정되면 인권탄압과 독재로 쫓겨났던 마르코스 일가가 36년 만에 다시 권력을 쥐게 되는 것이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하와이 망명 중 사망했지만, 올해 93세 이멜다는 아들과 함께 대통령궁에 복귀하게 된다. ▷혜성처럼 갑작스러운 등장도 아니었다. 1986년 부모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던 봉봉 마르코스는 5년 만에 필리핀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35세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주지사, 상원의원을 거치며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부모의 죄에 대해 “당시 너무 어렸고 상황을 몰랐다”며 책임을 부인해왔다. 틱톡 같은 소셜미디어에는 마르코스 일가의 범죄가 정적에 의해 부풀려진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콘텐츠가 넘쳐난다. 과거 흑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층 표심을 겨냥한 것들이다. ▷명망가 집안을 유독 선호하는 필리핀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도 이번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7600개 섬으로 이뤄진, 80개가 넘는 언어가 사용되는 나라에서 정치는 늘 소수 족벌 엘리트 정치가문들의 전유물이었다.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 땅을 얻어 부를 축적한 400여 개의 크고 작은 가문이 그들이다. 정치적 결속력을 갖기 어려운 필리핀인들을 향해 선거 때면 이른바 ‘3G(Guns, Goons, Gold)’가 동원된 적도 많았다. 총, 깡패, 황금의 세 가지로 표심을 위협하거나 매수한다는 의미다. ▷36년 전 마르코스 일가를 몰아냈던 필리핀의 ‘피플 파워’ 혁명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반(反)독재 시위 도미노에도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랜 경기침체와 빈곤, 정치 혼란에 필리핀인들도 지쳐가는 걸까. ‘스트롱맨’으로 포장된 권위주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가 정치판에 스며들고, 민주화의 성과는 그에 밀려 빛이 바래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다. 낙태 금지는 독재적 시스템으로 가는 첫 단계다.”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지난해 12월 언론 인터뷰에서 낙태 금지를 비판하며 한 말이다. 태아의 심장 박동이 감지되는 임신 6주부터 낙태를 금지한 텍사스주의 ‘심장박동법’ 시행을 막아달라는 소송을 연방대법원이 기각한 직후였다. ▷점점 보수화되는 대법원과 달리 미국의 여론은 낙태 허용을 지지하는 쪽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답변은 54%로 뒤집어야 한다(28%)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임신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 선고 후 50년 가까이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해 온 최후의 보루였다. 그런데 이 판결마저 곧 폐기된다니 미국이 발칵 뒤집힐 만하다. ▷낙태는 미국의 보수와 진보가 가장 치열하게 맞붙어 온 논쟁거리다. 보건, 의료 정책을 뛰어넘는 정치적 문화적 이슈다. 2일 유출돼 버린 대법원의 낙태 판결 초안은 당장 11월 중간선거를 뒤흔들 판이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낙태권 사수 혹은 폐기를 위한 캠페인에 선거자금을 쏟아부을 것이라고 한다. 대법원장이 “최종 결정이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맹폭한 결정이 바뀌기는 어려워 보인다. 118개의 주석이 달린 98쪽짜리 판결문 초안에 이미 9명의 대법관 중 5명이 동의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이미 예고돼 왔다.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지명했을 때 가장 관심을 모은 것도 이 판결의 번복 여부였다. 스스로를 ‘생명 찬성(pro-life)론자’라 부르는 기독교 복음주의자와 가톨릭 신자들의 낙태 반대 목소리가 다시 커지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백악관 브리핑에서는 “가톨릭 신자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왜 낙태를 지지하느냐”고 묻는 기자와 “(남성인 당신은) 임신해 본 적도, 선택의 기로에 서 본 적도 없지 않냐”는 대변인 간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르면 다음 주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선고되자마자 50개주 가운데 최소 26개주는 즉시 낙태 금지를 강화하는 법 개정에 나설 것이라고 미 언론들은 전한다. 이에 맞서 온몸에 ‘당신 것이 아니다(not your body)’라고 써 붙인 여성과 낙태 찬성론자들은 또다시 거리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최악 수준인 정치 양극화와 사회 분열이 더 심화될 것이라는 탄식이 나온다. 그 충돌의 파장이 3년째 낙태죄 관련 입법 공백이 지속되는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미국이 실행한 대외 정책 가운데 가장 훌륭한 프로그램이다.” 안병만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금을 두고 했던 말이다. 그 자신이 풀브라이트 장학생이었던 안 전 장관은 재임 시 ‘한국형 풀브라이트 사업’을 추진할 정도로 이를 높이 평가했다. 한국에서는 한승수 전 총리와 조순 권오기 이기준 김동연 전 부총리,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 정정길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100여 명의 주요 인사 이름이 ‘동문 저명인사’ 명단에 올라 있다. ▷김인철 교육부총리 후보자가 본인뿐 아니라 부인과 아들, 딸까지 가족 4명이 전부 이 장학금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풀브라이트’라는 이름은 갑자기 동네북 신세가 되는 분위기다. 선발 과정의 공정성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김 후보자 측의 거짓 해명까지 문제가 되면서 그를 향한 사퇴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의 명성과 신뢰까지 금이 가게 될 판이다. ▷엉겹결에 한국의 정치 검증판에 소환됐지만, 풀브라이트는 로즈 장학금과 함께 글로벌 장학금의 양대 축으로 불리는 권위 있는 장학 프로그램이다. 1946년 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 미 상원의원이 창립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건을 위한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외국에 공매한 대금을 문화, 교육 교류에 쓸 수 있도록 하는 ‘풀브라이트법’을 만들어 재원을 조달했다. 장학생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 61명과 퓰리처상 수상자 89명, 총리 혹은 대통령 40명이 배출됐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은 재정, 운영에 미국 국무부 공공외교과가 관여한다. 미국에 대한 이해와 호감을 높이는 외교 프로그램으로서의 성격도 있다는 의미다. 이런 취지에 맞게 미국에 가본 적이 없거나 미국 문화에 노출되지 않았던 학생이 선발 우선권을 갖는다. 미국 생활 경험이 있는 경우, 심지어 20년 전 유아기 시절의 경험이라도 있는 지원자는 후순위로 밀리기 십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2, 3차례 미국 생활을 한 김 후보자의 아들과 딸은 장학금을 따냈다. 미 측 인사들도 뒤늦게 이 결과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들이 2년간 지원받는 학비와 생활비는 합쳐서 최대 15만 달러 가까이 된다. 가정 형편이 실력보다 앞설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능력이 비슷하다면 더 절실하고, 더 필요한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가는 게 장학금이다. 김 후보자의 가족과 측근들의 ‘끼리끼리’ 나눠 먹기로 인해 유학을 꿈꾸던 어느 가난한 청년의 날개가 꺾였던 것은 아닐까. 사회 지도층의 절제를 찾아보기 어려우니 국내는 물론 전 세계 160개국의 풀브라이트 장학생들 앞에서도 참 민망한 일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오늘은 BTS 병역과 인플레이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25일 오후 7시 윤희숙 전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이 스튜디오로 꾸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한 사무실에서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자 댓글들이 주르륵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에 실시간으로 응답하고, 그래프와 도표를 보여주며 1시간 반 가까이 단독으로 방송을 끌어가는 윤 전 의원은 베테랑 유튜버처럼 보였다.부친의 땅 투기 의혹에 책임을 지겠다며 국회의원직을 던진 지 8개월. 그는 이제 동영상을 만들고 책을 쓰고 강연을 다닌다. 시각이 다양해지고 관점이 넓어졌다고 자평한다. 그만큼 현안 비판은 더 매서워졌다. ‘포퓰리즘 파이터’ ‘정책 저격수’로 불려온 그다. 그런 윤 전 의원이 보는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은 어떨까.그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에서의 무리한 정책 시행으로 많은 문제들이 생겼다”면서도 “기계적으로 되돌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부터 일각에서 ‘문 정부 정책만 아니면 된다’(ABM·Anything But Moon)는 말이 나오는 것을 의식한 듯했다. 그는 “경제, 사회 상황이 그에 맞춰 변해 온 만큼 ‘지금 단계에서의 최선’을 찾아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새 정부도 결국 또 다른 탈레반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다음은 일문일답.》“공인에 대해서는 더 엄격해야” ―유튜브 방송 같은 대외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 같다. “윤희숙TV는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시작했는데 당시 ‘여의도의 기적’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재미없는 TV가 어떻게 1년 만에 구독자 수를 10만 명으로 늘렸냐는 거다(웃음). 여의도를 떠난 이후에는 오히려 더 넓어진 소통의 기회가 됐다. 날것 그대로의 댓글도 많이 받는다.” ―부친의 땅 투기 의혹이 제기됐을 때 ‘책임정치’와 ‘공정’을 이야기하며 국회의원직을 던졌다. 새 정부 장관 후보자들의 의혹은 어떻게 보나. “결국 메시지의 문제다. 당시 나는 국회의원으로서 죽더라도 그 방법으로 내가 던져온 메시지들을 살릴 수 있다고 봤다. 지금도 그 선택에 전혀 후회가 없다. 위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스스로 절제하는 부분이 있어야 된다. 그런 게 별로 없어 보이는 몇 분이 계신다. 공인에게는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돼야 하며, 그 사회적 기준은 더 명확해야 한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사람을 찾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반성 또한 있어야 한다.”“변화 감안해 ‘현재의 최선’을” ―정책적 측면에서도 공정의 가치가 흔들린 사례가 적잖았다. 특히 경제, 노동 정책에서 새 정부가 대대적인 방향 전환을 예고하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편’을 챙기려는 패거리 정치를 위해서 정책을 써먹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자원화를 위해 정책 비틀기를 했다. 욕먹을 짓이다. 새 정부는 이런 마인드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다만 잘못된 정책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보다 지금 단계에서의 최선을 찾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 상황이 변했고 국민의 삶도 바뀐 측면이 있다. 주 52시간만 해도 화이트칼라들은 좋아한다. 관건은 제도를 어떻게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운영하느냐 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같은 정책은 더 이상 추진되지 않을까. “어느 사회나 비정규직도 필요하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다는 것 자체가 이 정책이 얼마나 정치화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 정규직 시켜 줄게’ 식의 접근은 결과적으로 정규직으로의 이동 통로를 끊어버리게 된다. 정규직 고용 시 부담이 크니까 기업들이 차라리 기계를 써버리는 거지. ‘정규직화의 역설’이 아니라 그냥 당연한 결과다. 물론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비 비정규직 비중이 높고,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도 큰 것은 문제다. 이 격차를 실질적으로 줄이는 게 관건이다.” ―부동산 분야는 어떤가. 정권 교체의 원인이 될 만큼 파장이 큰 정책인데…. “국민들이 정말 화났던 이유는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정책 실패 자체라기보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을 나쁜 의도로 썼다는 것이었다. 왜 부동산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국민을 갈라치기 하는 수단으로 써먹었느냐는 거다. 그렇다고 이를 전부 되돌리기만 하는 것 또한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새 정부마저 또 다른 탈레반이 돼버리는 결과다. 금리가 오르고 있고, 시장도 그때와는 달라졌다. 중요한 건 지금의 상황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하는 것. 장기적인 공급 계획에 대해 국민에게 믿음을 주고, 이후 숨고르기를 하면서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 ―코로나19 여파에 글로벌 인플레이션까지 심해지고 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모두가 굉장히 어려운 시기다. 돈이 전 세계적으로 많이 풀렸고, 공급망이 엉망이 됐는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터졌다. 이럴 때에는 위기를 버텨줄 경제 체질이 중요한데 이게 문재인 정부에서 너무 나빠졌다. 상황을 뚫고 나가려면 굉장히 유능한 정책 그룹이 필요하다. 또 공약에서 지금 당장 급하지 않은 것은 미뤄야 한다. 소요 재원이 300조 원대에 가까운 공약을 지금 다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을 국민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새 정부는 핵심 정책 중 하나로 연금 개혁을 내걸었다. 임기 내에 가능할까. “연금 재정은 구멍 날 정도로 방만하게 운영돼 왔기 때문에 이제는 반대로 조이는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좋아할 수가 없는 개혁이다. 그럼에도 왜 해야 하는지, 안 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에 대해 국민에게 설명하고 소통하는 게 먼저다. 문재인 대통령처럼 ‘국민들이 싫어하니까 (논의) 끝’이라는 식으로는 영원히 못 한다. 소득 대체율이나 보험료, 연금개시 연령 같은 숫자는 결국 테크니컬(기술적)한 이야기다. 공감대가 이뤄지고 나면 이후부터는 전문가들이 그 원칙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계산해내면 된다. 숫자 계산은 금방이다.” ―강한 저항이 예상된다. 과거 시도들이 정치에 발목 잡히는 사례도 많지 않았나. “‘천천히 서두른다’는 말이 있다. 시급하지만 사람들에게 소화할 시간을 줘야 한다. 전문가와 언론을 통한 공론화 과정이 중요하다. 국정추진 동력이 센 정권 초반에 시작해도 3년은 걸릴 거다. 세대 간 갈등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제도가 무너짐으로써 사회 응집력이 받게 될 상처 자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국회 움직임은 어떻게 보는지. ‘검수완박’ 법안을 놓고 여야 모두 비판에 직면해 있다. “공적 방법을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정치가 어디까지 망가졌는지를 보여준다. (국회의원) 본인 또는 특정인을 보호하기 위해 무리한 사안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게 아닌가. 솔직히 ‘검수완박’ 입법 과정에서 우리 정치의 가장 암적인 존재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문제의 여러 급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급에 있는 사람들이 검은 먼지처럼 뭉쳐서 드러날 때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털어내면 우리 정치가 조금은 좋아지지 않을까 했던 거다. 그런데 그 기대를 국민의힘이 (중재안 합의로) 날려버렸다. 이 먼지들이 휙 흩어져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정책전문가 아닌 정치인’ 각성” ―새 정부의 총리, 부총리 등 요직에 관료 출신들이 임명됐다. 관료 출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관료의 특성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이들 중에도 진취적인 분들이 있다. 이런 진취적인 인사들을 관료적 시스템에다 갖다 놓으면 관료처럼 돼버리는 게 문제다. 핵심은 이들이 활동할 시스템의 운영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약속대로 청와대 중심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절제시키고, 각 부처 장관이 소신껏 비전을 펼칠 수 있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윤 전 의원은 윤 당선인이 지난해 대선 행보에 나서면서 가장 먼저 접촉한 정책 전문가였다. 대선 캠프에 합류해 정책 구상에 힘을 보탠 그를 놓고 항간에서는 입각설이 돌기도 했지만, 정작 윤 전 의원은 인수위나 내각 명단 어디에도 아직까지 이름이 없다. “쓴소리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정치라는 것을 국회나 행정부에 입각해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나 스스로 이제는 정책 전문가가 아닌 정치인이라는 각성을 오히려 국회를 떠나면서 하게 됐다”며 “한국 정치의 대안을 보여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나만의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윤희숙 전 미래통합당 의원은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를 거쳐 제21대 국회의원(서울 서초갑)에 당선됐다. 2020년 임대차 3법의 국회 통과 직후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시작하는 ‘5분 연설’을 통해 문제점을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문제점을 짚은 책 ‘정책의 배신’에 이어 ‘정치의 배신’을 썼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짙은 남색의 파일 위에 찍힌 금색의 북한 국무위원장 휘장.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첫 친서의 포장은 고급스러웠다. 2018년 2월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문 대통령에게 직접 건넨 친서를 당시 청와대는 공개하지 않았다. 비밀문서라는 김 위원장의 친서는 막상 미국이 먼저 공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같은 해 7월 트위터에 원문을 올리면서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로 시작하는 친서의 내용과 형식이 알려졌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남북한 정상 간 친서 교환은 끊길 듯 끊이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21일 보낸 친서는 14번째이자 문 대통령의 퇴임 전 마지막 편지가 된다. 조선중앙통신은 “깊은 신뢰심의 표시”라고 했다. 북한이 최근까지도 남한을 향해 전술핵 사용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느닷없는 살가움의 표시다. 문 대통령을 향해 ‘삶은 소대가리’, ‘겁먹은 개’ 등의 표현을 써가며 비난했던 북한이지만 마무리는 잘하고 싶었던 것일까. ▷직접 쓴 편지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강하다. 정상 간의 ‘친서 외교’는 말할 것도 없다. 김 위원장은 대외활동에 친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문 대통령뿐 아니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도 수차례 편지를 썼다. 트럼프는 김 위원장의 편지를 “아름다운 예술품”이라고 불렀다.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친서를 꺼내드는가 하면, 오벌오피스를 찾는 손님이 있을 때면 봐달라는 듯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놨다. 대통령기록물법 위반임에도 퇴임 이후 27통의 ‘러브 레터’를 사저로 옮겨 보관하려 했다. ▷김 위원장의 친서는 북-미, 남북 관계가 악화하고 있는 시점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정상 간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끈은 놓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브로맨스’를 과시했던 트럼프에게 공을 많이 들였다. 해리 해리스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북측으로부터 친서를 받으러 비밀리에 판문점까지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나 친서 전달 20번째가 넘어가면서는 백악관 팀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실질적 내용 없이 사탕발림이나 아부성 수사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아첨의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친서들은 쌓였지만 북한이 협상장에 나오거나 비핵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올해만 이미 13차례 미사일을 발사했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레드라인까지 넘어버렸다. 풍계리 핵실험장에서는 7차 핵실험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정상 간 친분이 실질적인 진전으로 연결된 것은 끝내 없었다. 사적인 관계 과시에 그치는 친서는 영혼 없는 안부 편지처럼 공허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마스크 의무화 조치가 해제됐습니다. 원한다면 지금 곧바로 벗으십시오.” 미국 알래스카에어 여객기에서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가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승객들은 마스크를 흔들거나 머리 위로 던지면서 환호했다. 승무원이 “마스크를∼ 벗어∼버려요”라고 노래하며 좌석마다 마스크를 수거한 비행기도 있었다. 18일 정부의 대중교통 마스크 착용 의무화 조치를 무효화하는 플로리다주 연방법원의 판결과 이에 따른 교통안전청(TSA)의 후속 조치가 나온 직후였다. ▷마스크는 코로나19 방역의 핵심이자 최후의 보루로 여겨진다. 미국의 경우 이미 대부분의 장소에서 실내외 마스크 착용 지침이 완화돼 있는데도 이번 판결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환영과 찬성만큼 반대와 우려도 쏟아졌다. 59페이지에 이르는 판결문에서부터 판사의 신상과 얼굴 사진까지 인터넷에 도배가 됐다. 그만큼 마스크가 갖는 상징성이 크다는 의미다. 한국은 5월 초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대한 정부 결정이 나올 예정. 정부는 곧 전문가 의견수렴을 시작한다. ▷바이러스가 소멸돼서 마스크를 벗는 건 아니다. 마스크 규정이 풀리면 확진자가 다시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스위스와 영국에서는 항공사의 기내 마스크 의무화 폐지 후 승무원과 조종사들의 잇단 확진으로 모두 600여 편의 항공편이 취소됐다. 오스트리아는 지난달 마스크 규정을 해제했다가 18일 만에 “시기상조였다”며 결정을 뒤집기도 했다. 전파력이 큰 XE 변이 바이러스에 이어 XL, XM 등이 계속 출몰하고 있다. 마스크 의무화 해제 판결이 나온 미국조차 뉴욕 등지에서는 오미크론 재확산 추세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항소를 검토 중이다. ▷그래도 이제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내에 많아지는 듯하다. 한 인터넷 투표에서는 ‘실외 마스크 의무화를 해제해야 한다’는 답변이 78%였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마스크를 벗게 해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색조 화장품 시장이 들썩거리고 피부과와 성형외과 예약이 늘어나는 등 ‘노 마스크’ 일상을 준비하는 움직임도 벌써부터 분주하다. ▷전문가들은 마스크 의무화 해제에는 아직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쪽이다. 인수위원회도 어제 코로나19 브리핑을 열고 “섣불리 방역을 해제하지 않도록 정부에 당부드린다”고 했다. 마스크 의무화의 해제 여부와 시점은 철저히 보건의료와 국민 안전의 관점에서 과학이 결정할 일이다. 규정과는 별개로 스스로 마스크 착용을 지속하는 것은 그보다도 한 차원 높은 결정일 터다. 나와 이웃을 코로나19에서 지키는 것은 물론 감기, 독감 등 다른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데에도 마스크는 유용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지난해 말 나이지리아의 한 대형 쓰레기처리장. 대형 덤프트럭이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구덩이 속으로 박스 수백 개를 쏟아부었다. 터져 버린 박스 속에는 코로나19 백신이 가득했다. 선진국에서 공여는 받았는데 유통기한이 지나 못 쓰게 된 100여만 회 분량이었다. 사람을 살린다는 백신들이 한순간에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는 장면은 씁쓸하고도 충격적이었다. 백신 접종률이 고작 5%대에도 못 미치는 저개발 국가로서는 더더욱 분통 터지는 매몰 현장이었을 것이다. ▷이유나 방식은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폐기되는 백신이 급증하고 있다. 현재까지 누적 폐기량이 233만 회를 넘어섰다. 1회당 대략 20달러로 계산하면 550억 원이 넘는 분량이다. 앞으로 폐기될 처지에 놓인 백신 예약 물량은 더 많다. 올해 국내에 도입될 분량은 1억2600만 회. 쌓여 있는 재고까지 합치면 1억4000만 회분이 넘는데 맞을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불과 7, 8개월여 전 백신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최소잔여형(LDS) 주사기를 구하고, 너도나도 접종 예약 ‘광클릭’을 해댔던 때와 비교하면 때 이른 격세지감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하기에는 변수도 적지 않았다. 치명률은 낮고 전파력은 높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팬데믹 국면을 바꿔 놓을 것으로 예상하기 어려웠다고 당국자들은 항변한다. 기존의 백신으로는 계속 진화하는 변이 바이러스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스라엘에서 최근 나온 연구에 따르면 60세 이상에 대한 4차 접종 효과는 불과 8주에 그친다. 백신 부작용 우려도 예상보다 컸다. 그 탓에 5∼11세 접종률은 0.7%에 머물고 있다. ▷그래도 정부가 더 정교하게 수급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팬데믹 초기 백신을 제때 구하지 못해 혼쭐이 난 정부가 뒤늦게 계약에 나서면서 예상 물량을 지나치게 잡아버린 측면이 있다. 확진자 폭증 시점에 방역 지침을 되레 완화한 것도 백신을 애물단지로 만들어 버린 셈이 됐다. 항체가 생긴 1470만 명의 확진자들은 이제 추가 접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국내에서는 처치 곤란 신세가 됐지만 그렇다고 백신의 가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는 백신 접종률이 20% 미만인 저개발국이 44개국에 이른다. 백신 저장 시설과 운송, 의료인력 부족 문제가 있긴 하지만, 공여 백신의 유통기한이 두 달 반 정도만 돼도 접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들 국가에 국내 예약 분량을 공여하는 방안을 찾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타이밍을 놓쳤다간 소중한 생명을 위해 백신을 나누는 일이 ‘쓸모없어지니 떠넘긴다’는 식으로 폄훼될지 모른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지금까지 우리가 본 그 어떤 코로나19보다 전염성이 강할 가능성이 있는 변이 바이러스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달 말 보고서에서 코로나19의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 ‘XE’에 대해 이런 분석과 함께 경보를 발령했다. 스텔스 오미크론보다도 전파력이 10%가량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만간 코로나19가 종식될 것이라는 일각의 전망에 찬물을 끼얹는 순간이었다. ▷1월 중순 영국에서 처음 발견된 XE 변이는 ‘오미크론’ 변이와 그 하위 변이인 ‘스텔스 오미크론’이 합쳐진 혼합형 변이다. 영국에서 630여 건이 보고된 데 이어 대만, 태국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도 속속 사례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머지않아 XE 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오미크론의 경우 지난해 11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처음 발병한 지 닷새 만에 한국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 ▷이런 변이가 어쩌다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바이러스는 지금도 스파이크 단백질의 염기서열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변이를 일으키고 있다. 코로나19의 경우 이론적으로 가능한 변이 개수가 무려 80경 개. 2020년 1월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그리스어 알파벳 순서로 이름 붙인 알파(α), 베타(β), 감마(γ), 델타(δ)를 거쳐 오미크론(ο)까지 변이가 거듭돼 왔다. 전파력과 치명률, 중증도가 높아 따로 모니터링 대상으로 분류된 변이들이다. 에타(η), 카파(κ) 등 우세종이 되지 못한 채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가버린 변이들도 있었다. ▷바이러스의 구조학적 특성이 바뀌지 않는 하위 변이의 조합들은 셀 수도 없다. 유럽에서는 XE 외에 델타와 오미크론 변이가 합쳐진 XD와 XF, 일명 ‘델타크론’도 번지기 시작했다. XE의 경우 치명률이나 중증도가 오미크론과 비슷하게 낮다지만, 강력한 전파 위력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 정부는 “방역 전략이 달라질 정도의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감소세로 돌아선 듯했던 확진자가 다시 늘어나는 ‘쌍봉형’ 그래프 전개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변이는 바이러스가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온 힘이다. 모습을 바꿔가며 인간의 면역력을 회피하게 해온 생존이자 진화의 방식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변이를 설명하는 웹사이트 페이지에 ‘변이는 일어난다’는 제목을 붙여 놨다. 피해갈 수 없는 상수(常數)라는 의미다. 코로나19도 얼마나 더 많은 변이가 나올지 알 수 없다. 올해 여름쯤 오미크론 다음인 ‘파이(π)’가 출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마지막 알파벳인 ‘오메가(ω)’까지 안 가면 다행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미적분 하냐?” 수학 좀 한다는 중학생들이 서로의 선행학습 진도를 확인할 때 으스대듯 묻는 질문이다.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이 ‘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불렀다는 미적분은 수학 레벨이 높아졌음을 확인하는 대표 과목으로 여겨진다. 반면 수학을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고등수학의 문턱이기도 하다. 문·이과 통합형 수학능력시험에서는 문과생들을 기죽이는 선택 과목 중 하나다. ▷올해 수능도 문·이과 통합형으로 치러진다. 융합형 인재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지난해에 처음 실시한 이후 2년째 이어지는 것. 문·이과 구분 없이 실시한 지난해 시험에서는 수학을 잘하는 이과생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이과생들이 주로 선택하는 ‘기하’나 ‘미적분’의 표준점수가 문과생들이 응시하는 ‘확률과 통계’보다 높았다. 수학 조정점수를 높게 받은 이과생이 상위권 대학의 인문계 학과를 교차지원하면서 문과생을 밀어내는 ‘문과 침공’ 현상이 두드러졌다. ▷교육당국은 이런 문·이과 유불리 현상에 대해 “완전히 극복되긴 어렵다”고 했다. 올해도 ‘문과 침공’이 반복될 가능성을 막을 길이 없다는 말이다. 문과생들은 울상이다. 가뜩이나 ‘문송’(문과여서 죄송합니다) 분위기를 절감하고 있는데 이제는 취업에 앞서 입시에서까지 이중의 설움을 겪게 됐다. 정치학자를 꿈꾸던 문과 우등생이 막판에 이과로 갈아타는 등 진로를 바꿨다는 소식에 교사들은 한숨을 쉰다. “수학만이 살길”이라는 학생과 학부모의 수요에 맞춰 신도시에는 줄줄이 새 학원들이 들어서고 있다. ▷문과생들은 “한쪽에만 유리하도록 돼 있는 입시제도는 부당한 특혜”라며 반발하고 있다. 수학 등 선택과목의 조정점수 산출 공식이 잘못됐다며 소송 절차를 알아보는 학부모들도 나왔다. ‘문과 침공’이 이과생들에게도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학 간판을 높여서 다는 대신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 공부를 감내해야 한다. 자연계열로 전과하거나 반수를 결심한 대학생들은 결국 올해 하반기부터 다시 재수학원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공계 침공자들에게 밀려 이미 재수의 길을 걷고 있는 문과생들이 있는 그곳이다. 양쪽 모두에게 낭비다. ▷과학·기술·엔지니어링·수학을 뜻하는 이른바 스템(STEM) 분야의 육성이 이미 몇 년 전부터 지속돼온 세계적 흐름인 것은 맞다.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첨단기술 개발 경쟁은 수학적인 사고와 과학 역량을 요구한다. 이런 판 위에서 인문학을 읊조리고 있는 게 한가한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수학, 과학 점수만 능력인가. 창의적 사고와 문학적 감성,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문계의 강자들은 정보기술(IT)기업에도 똑같이 필요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과 발작적 기침, 호흡 곤란, 어지럼증. 매년 초여름이 되면 국내 주요 병원의 응급실에는 이런 증세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밀려 들어온다. 대기 중 오존 농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시기다. 오존의 독성이 천식이나 만성기관지염 같은 호흡기질환 환자들의 약해진 폐 세포를 공격하는 것이다. 호흡 곤란에 심장마비까지 오면서 그대로 숨을 거두는 안타까운 상황도 발생한다. ▷최근 10년간 오존 노출에 따른 국내 초과사망이 2배로 늘어났다는 분석이 나왔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오존 농도의 상승으로 인한 초과사망자는 2010년 1248명에서 2019년 2890명으로 증가했다. ‘초과사망’은 특정 기간에 통상적으로 예상되는 수를 넘어서는 사망을 뜻한다. 통계적 개념이다. 오존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예상 평균치보다 훨씬 더 늘어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국내 오존 농도는 평균 35.8ppb에서 45ppb로 높아졌다. ▷산소 원자 3개가 결합한 오존은 강력한 독성 때문에 ‘침묵의 살인자’ 혹은 ‘보이지 않는 킬러’로 불린다. 폐뿐 아니라 뇌 같은 다른 장기에도 병을 일으키고, 선천성 기형 발생 위험도를 높이는 오염물질이다. 지난해 영국이 주도한 국제공동팀의 연구에서는 오존 농도가 0.2% 상승할 때마다 연간 6000명이 넘는 추가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오존은 신체뿐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 위협한다. 오존 농도가 높은 지역에 사는 청소년들은 우울증을 겪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우리나라는 오존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가장 빨리 늘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사망자 수는 100만 명당 15.9명으로 아직 낮은 수준이지만, 증가율은 OECD 35개국 중 가장 높다. 오존은 질소산화물 같은 오염물질이 햇빛과 만나 광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생성된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많은 대도시의 오존 농도가 높다 보니 서울, 부산 같은 도시에서는 수시로 ‘오존 비상령’이 떨어진다. 해외에서도 도시 거주자 5명 중 4명이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을 넘어서는 농도의 오존에 노출돼 있다고 한다. ▷이제 곧 햇볕이 강해지는 계절이 온다. 오존 농도를 알려주는 전광판이 새빨개지는 날이 많아질 것이다. 마스크로도 못 막는 오존의 공격은 폭염과 함께 몰려오니 더 괴롭다. 오존주의보 체크, 야외 활동 및 과격한 운동 자제, 수분 보충 같은 대처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오존을 발생시키는 오염물질을 줄이는 게 해법일 것이다. 대기오염을 악화시키는 기후변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내 목숨을 위해서라도 환경론자가 되라는 게 지구의 호소이자 경고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3년간 백악관 앞을 지나다닌 횟수가 100번은 넘은 것 같다. 대단한 일도 아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사무실을 오가거나 점심을 먹으러 갈 때 지나다닌 길이 그 길이었을 뿐이다. 백악관 바로 옆으로 미국인들은 출퇴근을 하고 조깅과 산책을 하며 무심히 지나다닌다. 가깝고 익숙한 장소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용산으로 집무실 이전 계획을 밝히면서 모델로 든 것이 백악관이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이 위치한 웨스트윙이 모델이라고 한다.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도 그가 기자회견에서 직접 언급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과정에 해외 특정 국가의 모델이 이렇게 여러 번 언급되는 일도 드물다. 그만큼 백악관의 접근성과 개방성을 본뜨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리적 거리와 동선이 소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다. 기자들만 해도 백악관 웨스트윙 1층에 위치한 브리핑룸의 위치 덕을 많이 본다. 주변을 서성거리다 보면 고위 당국자들과 마주치게 된다. 즉석 기자간담회가 수시로 열린다. 그렇다고 미국인들이 대통령의 일하는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대통령은 경내 잔디밭에서 뜨고 내리는 전용 헬기를 자주 이용하고, 전용 리무진이 움직일 때는 10여 대의 비밀경호국(SS) 차량이 따라붙는다. 웨스트윙에서 일하는 직원은 비서실장 등 핵심 참모와 보좌관 50여 명. 나머지 실무 직원들은 백악관 바깥의 업무 청사를 쓴다. 백악관이 한국에 알려진 것처럼 활짝 열린 공간은 아니라는 말이다. 백악관을 차지했던 대통령들이 모두 대국민 소통을 잘한 것도 아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1년 만에 ‘불통 대통령’으로 언론의 불만을 샀다. 지난해 말까지 진행한 22회의 언론 인터뷰가 트럼프(92회), 오바마(156회)보다 적었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사나흘에 한 번꼴로 대국민 연설을 했던 그였지만, 막상 껄끄러운 질문이 나오는 자리는 회피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커뮤니케이션 점수는 더 나빴다. 직접 정례브리핑에 나서고, 주요 언론사 기자들의 이름을 모두 외워 호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자화자찬과 일방적 메시지 전달, 궤변에 가까운 해명으로 되레 비판을 키웠다. ‘소통 대통령’이라고 불린 오바마 전 대통령의 스킨십은 정작 백악관 밖에서 이뤄진 게 더 많았다. 그는 수시로 의회를 찾아 반대파 의원들을 설득했고 미 전역을 도는 타운홀 미팅을 통해 국민들과 만났다. TV쇼에도 여러 번 출연했다. 그런 그조차 초임 시절에는 “국민들과 직접 소통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고 털어놨다. 여론을 붙잡으려는 지도자의 노력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윤 당선인이 ‘용산 시대’의 개막을 공식 발표한 만큼 대통령 집무실의 이전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됐다. 여러 논란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두 달 안에 군 시설의 연쇄 이동을 포함한 엄청난 속도전이 진행될 것이다. 최종적인 결과물이 그가 머릿속에 그렸던 ‘한국의 웨스트윙’처럼 나올지 여부는 알 수 없다. 8년간의 건축을 통해 탄생한 백악관의 아름다운 공간이 밋밋한 국방부 청사에서 구현되지 않았다고 볼멘소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의지, 쓴소리도 경청해 반영하겠다는 의지다. 그리고 그 초심을 5년 내내 일관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윤 당선인은 백악관이라는 공간에 앞서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던 미국 대통령들의 소통법부터 다시 한번 들여다보라. 용산 집무실의 안착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러시아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으로 교전이 거세지는 가운데 러시아는 핵전력 강화 태세에 돌입했다. 핵위협 수위를 끌어올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폭주에 맞서 서방은 그의 돈줄을 묶는 고강도 금융제재를 꺼내들었다. 중국에 이은 러시아와의 또 다른 신(新)냉전 초입에서 두 세력 간의 충돌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롭다. 러시아 무력도발의 끝은 어디이며, 이는 국제 안보질서의 판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그 진단과 전망을 듣기 위해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와 백주현 전 카자흐스탄 대사(법무법인 세종 러시아 담당 고문)를 만났다. 두 전문가의 대담은 지난달 28일 동아일보에서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푸틴이 ‘3대 핵전력’ 위협까지 본격화하고 있다. 신 교수=군사적으로는 최대한까지 가보겠다는 메시지다. 압도적인 화력을 집중하는 재래식 공격에서 핵무기로 넘어가는 그 경계를 예측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으로 푸틴이 몰아가고 있다. 백 고문=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할 것인지 여부조차 지금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푸틴은 지금 패를 안 보고 그냥 베팅만 올리는 위험천만한 치킨게임을 하고 있다. 상대방이 내 패를 읽을 수 없게 만드는 ‘미치광이 전략’이다. 푸틴은 러시아에서 가장 똑똑한 엘리트들이 모인다는 옛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으로, 디테일에 강하다. 여러 정상회담에서 지켜본 그는 애매모호하게 말하는 법이 없고 외교적 수사도 절대 쓰지 않는다. 신 교수=글쎄. 푸틴은 사람들이 ‘설마 저 정도까지는 안 할 거야’ 했던 걸 지금 다 하고 있다. 합리적 판단을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다. 러시아 내 전문가들까지 지금 다 ‘멘붕’이다. 푸틴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을 서방 정보기관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푸틴이 세계질서 변경에 대해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게 된다면 그릇된 결정을 하게 될 가능성이 우려된다. ―서방이 ‘금융의 핵 옵션’이라는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러시아 퇴출을 결정했다. 러시아가 제재를 버틸 수 있을까. 신 교수=서방과 러시아 모두 최대치까지 서로를 때리고 있다. 다만 러시아는 에너지와 식량, 국가 존속의 기본이자 핵심 조건이 되는 두 분야에서 자립할 수 있는 나라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가 지난해 개정한 국가안보전략을 보라. 서방과의 협력 관련 언급이 다 사라졌다. 러시아 국민들은 이제 루블화 베이스인 ‘미르 카드’를 쓴다. 인터넷은 ‘루넷’이라고 하는 자체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했다. 국제 제재에 대비해 루블 체제를 꾸준히 강화했고, 내수 기반도 탄탄히 해왔다. 백 고문=제재가 효과를 보기는 쉽지 않다. 러시아는 ‘유럽 당신들도 인플레이션 맛 좀 봐라’ 하는 식이다. 유럽이 버틸 수는 있겠지만 괴로울 거다. 러시아 천연가스 비중이 40%, 독일의 경우 55%나 된다. 더구나 독일은 제조업이 강한 나라인데, 에너지 문제로 취약해지면 강한 쇼크를 겪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강한 항전으로 러시아군이 주춤하고 있다. 신 교수=러시아가 군사행동을 길게 끌 것 같지는 않다. 공군력을 집중해서 중요한 거점들을 끊어 보급로를 차단하고, 수도를 함락시켜 수뇌부를 제거한다는 시나리오는 단기전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인구 4400만 명의 우크라이나가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소수 러시아군이 과연 효과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할 수 있을까. 백 고문=러시아의 상황 오판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번에 보았듯이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 상당수가 우크라이나에 파병할 돈도, 병력도, 장비도 태부족이다. 독일의 탱크가 과거 3000대였는데 지금은 300대까지 쪼그라들었다. 푸틴은 전략적으로 이런 것까지 다 계산하고 침공을 감행한 것일 수도 있다. 신 교수=러시아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까지 3국을 엮는 연합체 구성의 욕심을 부릴 수 있다. 소련 붕괴 후 ‘벨로베스크 협정’에서 슬라브 3국의 신연방을 구성하려던 시도를 재연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으로 남더라도 곳곳이 분쟁지역화할 가능성이 있다. 게릴라전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면서 통제가 어려워지는, 가장 피해야 할 상황이다. ―푸틴은 왜 이렇게까지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나. 신 교수=러시아는 유럽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동쪽으로 자꾸 영향권을 넓히는 서방에 대한 압박도 느껴 왔다. 특히 유럽에서 대서양주의가 득세하면서 나토 중심의 유럽 안보질서가 만들어졌는데, 러시아는 여기서 배제됐다. 미국이 국제질서를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데 대한 반감도 갖고 있다. 불만이 쌓여 가던 러시아로서는 나토의 동진(東進)에 대해 어느 순간 ‘더 이상은 안 돼’ 하는 지점이 생기게 된다. 지정학적 현실주의의 핵심은 강대국 사이의 균형이 매우 중요한데, 이게 깨진 것이다. 백 고문=푸틴의 뒤에는 ‘강한 러시아’를 원하는 민심이 있었다. 근육질의 스트롱맨 푸틴은 강한 러시아의 상징이다. 러시아인들은 서방이 자국에 대한 제재를 푼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서방이 늘 자신들을 사사건건 견제하려고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러시아인들을 보면 ‘피해망상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토는 동진을 멈춰야 하는가. 신 교수=지금 상황에서 무리하게 추진할 필요는 없다.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나토가 팽창적, 침략적이라고 볼 근거가 없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2017년 헌법에 나토 가입을 목표로 명시했고, 아직 회원국은 아니지만 ‘강화된 협상 대상국(EOP)’ 지위를 부여받고 군사적 협력을 강화했다. 흑해에서 나토와 대규모 연합훈련을 했다. 또 한 가지, 나토 가입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분쟁지역을 정리해야 했다. 이를 위해 루간스크, 도네츠크 지역을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여기에 더해서 크림반도까지 되찾겠다고 한 것이 푸틴을 자극했다. 백 고문=러시아로서는 나토의 동진보다 더 기분 나쁜 게 있다. 미국에 대항하는 세력 1등이 아닌 2등이라는 거다. 군사적으로는 아직 러시아가 중국보다 훨씬 세지 않은가. 러시아의 체면이 구겨지면서 소외감이 심했을 거라고 본다. 푸틴은 이제 과거 공산주의 시절 했던 보스 노릇을 다시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신 교수=이것은 옳고 그름,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이익이 침해되는 것에 대한 문제다. 그러나 러시아가 침공에 나서면서 러시아 입장에서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사라져버렸다. 러시아가 한 번에 다 까먹어버리고, 깨뜨렸다. ―신냉전이 시작된 것인가. 러시아의 행보는 국제 안보질서를 어떻게 바꿔 놓을까. 신 교수=러시아의 침공은 커다란 두 세계 간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항하는 다극적 신세계 질서를 추구한다. 이들과 서방이 부딪히면서 커다란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는 신냉전의 시대다. 동북아 구도도 이제 완전히 바뀔 것이다. ‘신남방 대 신북방’의 대립각을 재연시킬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대러시아 제재 동참에 망설였다. 백 고문=우리 외교의 존재감이 없어졌다. 10대 경제대국이라면서 그에 걸맞은 외교가 아니라 프로토콜(의전)만 하는 수준이다. 외교는 나라의 가치와 이념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같은 가치를 지키기 위해 때로 희생까지 감수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가치에 대한 판단이 보이지를 않는다. 신 교수=제재에 일단 동참하면 못 빠져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정부는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를 보라. 일본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국제사회의 제재가 시작됐을 때 동참했다. 하지만 그 후 아베 신조 총리는 러시아가 주최한 동방경제포럼에 매번 참석했고, 북극 가스전 개발 참여와 경제투자 등을 지속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머뭇거리다가 아무것도 못 했고 무역 규모는 되레 반 토막이 났다. 이런 한국에 러시아도 별로 기대가 없다. 백 고문=‘미련 때문에, 사랑 때문에’라고밖에 해석이 안 된다. 어떤 조치로 인해 남북 관계가 경색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다. 한국적인 정체성에 기반해 우리 외교의 이익을 규정하는 합의의 기반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자강의 힘은 하드파워 외에 우리의 가치, 그 가치를 기반으로 한 외교, 그리고 꾸준한 대외정책의 추진을 통해 얻게 되는 국제사회의 인정과 존경에서 나온다.신범식 서울대 교수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제관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복합안보센터장, 외교부, 국방부 정책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사단법인 유라시아21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유라시아의 도전과 국제관계’ 등의 저서를 냈다.백주현 前 카자흐스탄 대사1985년 외교부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 주소련 한국대사관 창설 등 러시아 관련 업무를 맡았다. 1993년 러시아 외교아카데미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카자흐스탄 대사, 주휴스턴 총영사를 지냈다. 현재 법무법인 세종 러시아 담당 고문을 맡고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아이를 어서 옮겨! 살릴 수 있어!” 의료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구급차를 울렸을 때 소녀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몇 번의 심폐소생술도 소용없었다. 옆에 있던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두 손을 떨면서 흐느꼈다. 끝내 숨을 거둔 6세 소녀의 몸을 덮어줄 것은 피로 얼룩진 그의 분홍색 재킷뿐. 철제 간이침대 위에 드러난 두 발은 너무 작았다.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 소녀의 죽음이 전 세계를 분노와 슬픔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소녀의 마지막을 지켜본 외신의 보도와 사진들은 실시간으로 타전됐다. 울분에 찬 의사들이 “이 사진을, 이 아이의 눈빛을 푸틴에게 보여주시오”라고 비장하게 쏘아붙인 내용까지. 유니콘이 그려진 파자마 차림의 소녀는 엄마 아빠와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유엔의 고위 당국자는 이 사진들을 보고 “위장이 뒤집힌다”고 했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 민간인 102명 중 어린이 희생자는 16명. 수도 키예프에서는 러시아군이 쏜 총에 맞아 10세 여학생이 숨졌다. 어린이 부상자는 45명으로 집계됐지만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키예프 북동부 지역에서는 유치원 근처에 집속탄이 떨어졌다. 100개 넘는 국가가 집속탄금지협약까지 만들어 금지한 치명적 살상무기가 어린이와 민간인의 목숨을 위협한 것이다. ▷무고한 희생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힘은 강력하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는 ‘유니콘 파자마 소녀’의 사진과 함께 “푸틴은 살인자” “전쟁범죄로 처벌하라”는 글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 세계 곳곳의 반전 시위도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2015년 시리아 내전 당시에는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배기 알란 쿠르디의 사진 한 장이 지구촌의 심장에 불을 붙였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이 장악한 카불공항에 홀로 남겨진 채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아기의 사진이 여론을 움직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내 아이, 내 가족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며 총을 집어 들고 있다. 피란길에 오른 한 소년이 울음을 꾹 참으며 “아빠는 군인 영웅들을 돕기 위해 혼자 남았다”고 말하는 인터뷰는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결사항전에 나선 이들의 비장한 표정은 문득 100여 년 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우리의 장삼이사들과도 겹친다. “고통받는 만큼 이겨낸다”며 일제에 맞섰던 17세 소년, 27세 이발사의 결기가 다르지 않다. 3·1운동으로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던 이들은 평범한 일반인과 어린 학생들이었다. 전쟁과 침략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나라의 운명을 바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슬프고도 위대한 아이러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애쓰지 않고도 얻어지는 것을 군대에서는 ‘공짜 치킨’이라고 부릅니다. 트럼프는 러시아에 그런 존재였습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 파견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미군 중령 알렉산더 빈드먼의 평가다. “러시아는 트럼프에게 ‘콤프로마트’(약점 자료를 수집하는 공작)를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2020년 언론 인터뷰에서 냉소했다. 견제 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흠모한 나머지 트럼프가 그의 대리인처럼 굴었다는 것이다. ▷‘스트롱맨’에 대한 트럼프의 열망은 퇴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듯하다. 그는 최근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서 돈바스 지역의 독립을 승인한 푸틴을 “천재적”이라며 추켜올렸다. “얼마나 똑똑한가”라며 “오! 훌륭한 결정”이라고 했다. 푸틴을 ‘독종’이라고 부르면서 “그는 조국을 사랑한다”고 감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을 코앞에 두고 전 세계가 철회를 촉구하는 위기의 순간에 느닷없이 그 결정을 칭찬하고 나선 것이다. ▷4년간의 재임 기간 푸틴을 향한 트럼프의 러브콜은 노골적이었다. 대통령 당선인 시절부터 푸틴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없이 빠져들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 러시아의 2016년 대선 개입 의혹을 뒷받침하는 미 정보기관의 보고는 무시한 채 첫 정상회담에서부터 푸틴에게 공개 면죄부를 주는가 하면, “푸틴이 살인자라고 해도 존경한다”는 취지의 인터뷰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미국 언론은 그런 트럼프를 향해 ‘알랑거린다’, ‘홀딱 빠졌다’, ‘푸틴에게 인정받으려고 안달이 났다’는 식으로 혹평해 왔다. ▷푸틴을 신경 쓰는 이유를 묻는 질문이 나올 때면 트럼프는 “러시아가 핵무기를 가졌지 않느냐”는 식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고 한다. 강한 리더십에 끌리는 본심을 드러내기 싫었던 걸까. 그러나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이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같은 독재, 권위주의 지도자들을 향한 그의 구애는 일관됐다. “그(푸틴)는 나를 좋아한다. 나도 그를 좋아한다. 우리는 잘 지냈고, 나만큼 그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트럼프의 화법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그가 ‘친구’라는 김정은을 향해 수없이 반복했던 같은 문장이다. ▷트럼프는 푸틴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투입한 군대를 놓고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강한 평화유지군”이라며 “(미국) 남부 국경에도 사용할 수 있겠다”는 말도 했다. 재집권할 경우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해 푸틴식의 군사적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견제와 감시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절제된 힘’에 만족 못 하는 지도자는 위험하다. 칼자루를 잘못 쥔 ‘스트롱맨’들이 지구촌을 우악스러운 근육질 정치로 몰아넣고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중국 정책을 회고하던 말년의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슬픈 표정이었다. 중국이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불안과 실망이 배어 있었다. 닉슨의 연설문 작성자가 기록했던 이 한마디는 30년 가까이 지나 미국이 대중 우호 정책의 종식을 선언하는 자리에 다시 소환됐다. “우리는 (중국이 괴물이 돼버린) 그 지점에 와 있다”는 답변의 형식으로. ▷닉슨이 20년간의 냉전을 깨고 극적인 중국 방문을 성사시켜 마오쩌둥 주석을 만난 지 21일로 50주년이 됐다. 1972년 2월 21일, 마오는 바닥까지 책이 가득한 자신의 서재에서 닉슨의 손을 맞잡았다. ‘폴로 1’로 명명된 헨리 키신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비밀스러운 베이징 방문을 통해 극비리에 진행된 물밑 작전의 결과였다. 8일간 이어진 닉슨의 방중 행보는 상하이 공동성명을 이끌어내며 미중 관계의 물꼬를 트는 동시에 고립된 중국을 외교무대로 복귀시켰다. 현대사의 가장 역사적인 장면들로 기록돼 있는 순간이다. ▷닉슨은 당시 ‘중국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포용 전략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10억 인구가 분노에 찬 고립 속에 살아갈 공간은 이 작은 지구상에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2020년, 미국은 닉슨의 대중 포용 정책이 목표했던 중국 내부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이를 폐기하고 만다. 닉슨도서관 앞 연단을 굳이 발표 장소로 선택한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은 중국공산당을 ‘악성 변종(變種)’이라고 맹폭하며 대중 우호 정책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워싱턴에서는 닉슨의 데탕트 정책이 결과적으로 중국을 너무 키워줬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중국은 절대 슈퍼파워가 되지 못할 것”이라던 마오의 대미 유화 발언을 믿는 사람은 이제 없다. 키신저도 ‘중국의 실체를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더 힐)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 행정부와 의회는 군사, 외교, 경제 등 전방위 분야에서 각종 견제 정책과 법안들을 쏟아내고 있다. 양국 우호외교의 상징이었던 판다를 중국으로 돌려보내지 못하도록 막자는 법안까지 발의됐다. ▷미국은 닉슨의 방중 50주년을 함께 기념하려는 중국 측의 은근한 제의도 외면했다. 주요 외교 기념일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국무부의 성명이나 논평은 한 줄도 내놓지 않았다. 미중 갈등은 신흥 강대국이 부상해 강대국과 충돌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의 목전에서 ‘강대국 파워 경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앞으로도 수십 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이 거대한 충돌 속에 한국의 설 자리도 좁아져만 간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2015년 1월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의 다카 본사에 근무하던 한 직원은 ‘라젤 아흐람’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입사지원 이메일을 받았다. 첨부된 이력서 파일을 클릭하는 순간 북한이 심은 악성코드가 침투했다는 사실은 해가 넘도록 아무도 몰랐다. 무려 8100만 달러의 자금이 빠져나가고 난 뒤에야 연방수사국(FBI)이 수사에 착수했다. 악성코드를 심은 이후에도 1년 이상 숨죽이며 준비 작업을 거친 북한 해커들의 주도면밀함에 전문가들은 혀를 내둘렀다. ▷최대 1만 명의 ‘사이버 전사’들을 앞세운 북한의 사이버 범죄는 국제사회의 골칫거리다. 과거 은행 내부 전산망이나 현금자동입출금기 등을 공격하던 것에서 나아가 요즘은 가상화폐를 집중 공격하는 게 특징이다. 2017∼2019년 북한이 아시아 주요국의 가상화폐 거래소를 15차례 해킹해 가로챈 금액은 1억7000만 달러에 달한다. 미국 법무부가 이번에 신설한 국가가상화폐단속국의 주요 해외 타깃도 북한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보, 수사당국은 그동안 북한을 비롯한 해외 해커들의 사이버 범죄를 집중적으로 추적해왔다. 미 국가안보국은 2019년 사이버보안부를 신설하면서 북한을 주요 타깃으로 지목했다. 북한이 가상화폐 해킹으로 정권유지 자금을 마련한다면서 “창조적인 역량을 보인다”고 꼬집기도 했다. 미 재무부는 ‘라자루스’와 ‘블루노로프’, ‘안다리엘’ 등 북한 해킹그룹 3곳을 특별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법무부는 북한의 주요 해커 3명을 공개수배하며 얼굴 사진이 들어간 전단까지 배포했다. ▷미국의 집요한 추적과 감시에도 불구하고 가상화폐를 노린 북한의 사이버 범죄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로 돈줄이 막힌 북한으로서는 해킹을 통한 자금 확보가 절실하다. 군사, 외교 기밀정보 획득 등을 목적으로 한 다른 적성국가와 달리 북한의 해킹이 주로 금융수익을 노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슈퍼노트’나 마약 거래 같은 위험을 무릅쓸 일도 없고, 외교행낭으로 돈다발을 몰래 반입하다 국제적 망신을 당할 일도 없으니 북한으로서는 수지맞는 장사다. ▷이런 북한의 사이버 공격에 한국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2017년 국내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인 ‘빗썸’ 해킹 사건 배후는 북한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가상화폐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는 만큼 피해 규모도 더 커질 수 있다. 미 법무부의 가상화폐 전담부서 책임자로 한국계 최은영 검사가 임명된 것을 놓고 한미 간 수사 공조 강화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키보드를 든 강도’들이 활개 치지 못하도록 법무부와 국정원도 더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어야 할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미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셰릴 필렉스는 47세였던 2007년 구글에 입사지원서를 넣었지만 고배를 마셨다. 2014년까지 3번 더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 채용담당자가 “몇 살인지 알아야 하니 대학원 졸업 날짜를 적어라”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구글을 상대로 한 연령 차별 집단소송에 동참했다. 5년간 법정싸움 끝에 필렉스를 비롯한 원고 227명은 구글로부터 모두 1100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냈다. ▷이런 사례들을 반면교사로 삼는 기업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미국에서는 연령 차별을 이유로 한 수십 건의 대규모 소송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년제를 폐지했고 40대 이상을 위한 ‘고용연령차별금지법(ADEA)’을 만들었지만 때로 무용지물이다. 최근에는 IBM이 나이 든 직원들을 ‘다이노 베이비스(Dinobabies)’로 부르며 “멸종시켜야 한다”고 한 내부 e메일이 공개됐다. 멸종된 공룡(dinosaur)과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를 합친 ‘다이노 베이비’는 퇴출 위기에 놓인 50∼70대를 비하하는 조어다. ▷베이비 부머(1946∼1965년생)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남다르다. 이들 중 53%는 나이 때문에 차별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뒷방 신세가 되는 연령대는 심지어 계속 낮아지는 추세. 아마존 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30세, 페이스북은 29세다. 능력 차이가 문제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나이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차별이다. IBM을 상대로 소송을 낸 직원들은 회사가 “밀레니얼 세대 직원의 숫자가 (젊은 경쟁사들보다) 뒤처지고 있다”고 한 것도 차별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IBM의 직원 평균 연령은 48세다. ▷연령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고령화와 맞물려 한동안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2024년에는 근로자 4명 중 1명은 55세 이상이 된다. “나이가 전부가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낼 모(母)집단이 커진다는 의미다. 영국에서는 89세 할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해고한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2019년 2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받아 화제를 모았다. 1970년대 이미 고령화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경우 고용연장 의무화 제도 등으로 일손 부족의 위기를 넘었다. ▷정년제와 임금피크제 등을 시행하는 한국은 미국 등 서구 국가들과는 노동 환경이나 제도가 다르다. 대기업에서 명예퇴직한 50대 임원이 연령 차별을 받았다며 제기한 소송에서는 패소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나이와 상관없이 성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기본 원칙은 다르지 않다. 유명 광고 문구처럼 ‘나이를 먹어도 늙지는 않는다’는 일할 의욕과 역량을 갖춘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어야 한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지난해 4월 미국 워싱턴의 한 외교안보 싱크탱크가 주최한 화상 세미나에 한국 프로야구단의 유니폼들이 배경으로 등장했다. 다채로운 색깔의 야구복들이 진행자 뒤쪽 벽에 줄줄이 걸렸다. ‘한국 야구와 한미 관계’라는 이례적 주제 선정부터 화면 구성, 진행까지 총괄한 이는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 워싱턴에서 접속한 청중들은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리퍼트 전 대사의 ‘한국 사랑’은 진지하다. 퇴임 후 5년이 지났지만 그는 요즘도 한반도 관련 세미나에 참석할 때마다 한국말로 인사하고, 최신 한국 뉴스들을 소개한다. 두산 베어스의 광팬으로 KBO리그 점수를 실시간 업데이트하면서 치맥을 즐긴다. 두 자녀는 한국이름 ‘세준’, ‘세희’가 새겨진 책가방을 메고 주말 한글학교를 다닌다. 이런 진심 때문일까. 그가 삼성전자 북미 총괄 대외협력팀장(부사장)으로 영입됐다는 소식을 워싱턴과 서울은 모두 반기는 분위기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리퍼트 전 대사를 삼고초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튜브 임원으로 근무해온 그를 영입하기 위해 적잖은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미국 전직 고위인사의 대기업 스카우트가 처음은 아니지만, 활동 분야가 반도체 산업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관심을 끈다. 반도체는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의 핵심으로 떠오른 전략물자. 미국의 관련 정책과 입법 동향을 발 빠르게 파악해 대응하려는 주요국들의 정보전과 로비전, 인재영입전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서로 수출 통제와 제재의 칼을 휘두르는 ‘반도체 전쟁’의 유탄이 언제 어떻게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리퍼트 전 대사 앞에는 많은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미중 간 경쟁 사이에 끼인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기회만큼이나 많은 위기를 떠안아야 한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등은 지난해 미 상무부로부터 대외비로 분류되는 민감한 반도체 수급 자료 제출을 요구받았다. 대만 TSMC 같은 해외 반도체 기업들과의 경쟁도 불붙고 있다. 백악관, 상무부 고위인사들과의 면담 섭외 또한 까다로운 미션이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이재용 부회장의 방미 당시 추진했던 조 바이든 대통령,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의 면담은 끝내 불발됐다.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해외 기업들에 전직 고위인사가 지닌 폭넓은 네트워크는 강력한 자산이다. 리퍼트 전 대사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던 측근으로 민주당 인사들과의 친분이 두텁고 현직 인사들과의 접촉면이 넓다. 펜타곤의 인도태평양 차관보 사무실에는 아직도 전직이었던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경제안보의 시대에 특정 기업을 넘어 양국 간의 경제협력에서 그가 펼칠 더 큰 역할을 기대한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끔찍하게 뒈져버렸으면 좋겠어. 꺼져 창녀야. 멍청한 ××.” 2017년 한 강연장에 선 할리우드 여배우 애슐리 저드의 입에서 저속한 욕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외모와 작품에 대해 자신이 받았던 악성 댓글들이었다. 하나씩 담담히 읊어나가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흔들렸다. 소셜미디어에서 거의 매일 이런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며 그는 울먹였다. 셀럽 피해자가 직접 공개한 대표적인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 사례였다. ▷온라인상 괴롭힘과 따돌림을 뜻하는 사이버 불링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 고질병이다. 최근에는 BJ 잼미와 배구선수 김인혁이 악플의 고통을 호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2019년 가수 설리와 구하라, 2020년 배구선수 고유민의 자살에 이은 또 다른 충격이다. 사이버 불링은 교묘하게 방식을 바꾸며 되레 공격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유명인의 사건, 사고를 자극적으로 짜깁기해 반복 재생하는 ‘사이버 레커’ 동영상의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이 주공격 대상이지만 일반인도 그 집요한 공격을 피해가기 어렵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인터넷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사이버 불링 사례도 많아지는 추세다. 2020년 방송통신위원회 조사에서 성인의 사이버폭력 경험률은 전년보다 11.1%포인트 늘어난 65.8%에 달했다. 지금도 누군가의 모바일폰에서는 ‘떼카’(단체방에서 떼로 욕설), ‘카따’(카카오톡 왕따), ‘방폭’(대화방 초대 후 혼자 남겨두는 따돌림), ‘카톡감옥’(대화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막고 공격)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2020년 이후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10대 청소년의 사이버 불링이 70% 증가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와 있다. ▷사이버 불링은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이나 모욕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의 공격자들을 일일이 찾아내 대응하기도 어려운 데다 가벼운 벌금형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처벌 강화, 인터넷 준(準)실명제 도입 등 내용을 담은 법안 논의는 진전을 보지 못한 채 흐지부지돼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플랫폼에 더 많은 관리 책임을 묻고 있는 해외의 움직임도 국내에서는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 ▷인터넷 공간은 멀쩡한 사람도 익명의 가면 뒤에서 사이버 불링의 유혹에 빠지게 만드는 함정이다. 지난해 한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체의 조사에서는 성인의 69%가 온라인에서 공격적 언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철저한 규제와 시스템 관리만큼 사이버 불링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 제고가 절실하다. 댓글 하나가 치명적인 살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사이버 불링은 죽음을 부르는 범죄가 된다는 인식 말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아, 상당히 도발적이네요!” 4일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을 중계하던 미국 NBC 방송 앵커가 다소 놀란 듯한 어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성화봉을 치켜든 최종 성화 봉송 주자 2명이 성화대를 향해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이 중 한 명이 신장위구르 출신 선수라는 내용이 소개되자 진행자들이 움찔한 것이다. ‘중국이 도발적 선택으로 서방의 올림픽 보이콧을 되받아쳤다’는 내용의 외신 분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중국 서북쪽의 신장위구르는 중국 당국의 인권 유린이 행해지는 핵심 지역으로 지목받아온 곳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대학살(genocide)’이 자행되는 곳이라고 맹렬히 비판해온 곳이자 ‘외교적 보이콧’에 줄줄이 나선 주된 이유다. 그 지역 출신 선수를 중국이 보란 듯이 점화식 주자로 내세우자 ‘스포츠 워싱(sports washing)’의 전형적인 사례라는 분석이 나왔다. 스포츠 정신과 게임 열기를 앞세워 인권 유린 같은 부정적 평판을 세탁하려 한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이미지 포장을 위해 국제 스포츠 행사를 이용하려는 시도는 늘 있어 왔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놓고 국제 인권단체들은 ‘피로 얼룩진 월드컵’이라는 혹평을 서슴지 않는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강제 합병과 반체제 인사 탄압 등을 월드컵의 열기로 감추려 했다며 ‘스포츠 워싱’의 대표 사례로 거론한다. 올해 11월 열리는 카타르 월드컵도 비슷하다. 카타르는 현대판 노예제로 불리는 가혹한 고용계약 시스템 ‘카팔라(kafala)’ 등 인권 문제로 비판받아 온 국가다. 영국 가디언은 “2022년은 베이징에서 시작해 카타르로 끝나는 ‘스포츠 워싱의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논평까지 내놨다. ▷거액이 투입되는 국제적 스포츠 구단 인수나 후원에도 관련 논란이 따라붙는다.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가 3억 파운드(약 4800억 원)를 들여 영국의 프로축구 구단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인수한 것은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살해 사건으로 국제적 비판에 시달린 이후였다. 러시아 부호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2003년 첼시FC를 인수하자 “러시아 정부가 배후에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됐다. ▷선수들의 피땀과 스포츠 정신은 전 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힘이다. 파킨슨병을 앓던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올림픽 성화를 들어올렸을 때의 감동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이런 스포츠 파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결국 얄팍한 눈속임이라는 것을 팬들은 모르지 않는다. 위구르인 성화 주자의 미소만으로 위구르 인권 문제를 가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