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신석호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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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석호 전무입니다.

kyle@donga.com

취재분야

2025-11-19~2025-12-19
사회일반55%
문화 일반13%
문학/출판13%
남북한 관계7%
미담3%
지방뉴스3%
인사일반3%
정치일반3%
  • 北“쌀 50만t-비료 30만t 주면 상봉 정례화”

    남북한은 27일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이틀째 적십자회담을 열었지만 아무런 합의도 보지 못한 채 다음 달 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이날 “북측은 남측이 어제 제기한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를 비롯한 이산가족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해 ‘남측이 쌀과 비료를 제공하고 금강산관광을 재개하면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는 주장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북측은 26일 회담에서 당초 알려진 것보다 많은 쌀 50만 t과 비료 30만 t의 지원을 남측에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남측 김용현 수석대표는 “이런 대규모 지원은 적십자사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당국에서 검토할 사안”이라고 대응했다고 밝혔다. 남측은 또 금강산관광도 북측의 성의 있는 태도가 선행돼야 재개될 수 있으며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은 별개의 문제라고 반박했다. 북측 최성익 단장은 27일 오전 전체회의에서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은 기회가 언제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대한적십자사) 유종하 총재의 임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좋은 안을 가져왔으리라 생각한다”며 거듭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고 회담 관계자는 전했다. 남측은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와 생사 및 주소 확인, 서신 교환, 80세 이상 고령 이산가족들의 고향 방문, 국군포로 및 납북자 생사 확인 등을 논의하기 위해 다음 달 25일 차기 회담을 열자고 제의했고 북측은 이를 받아들였다.개성=공동취재단}

    • 201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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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성 적십자회담 첫날 北, 구체적 요구사항 제시

    북한이 26일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 첫날 이산가종 상봉 정례화의 대가로 금강산관광 재개와 쌀과 비료 등 정부 차원의 대북 지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 대표단의 최성익 단장은 이날 오전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열린 회담에서 기조발언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금강산면회소 등 남측 시설들을 정상 운영할 수 있는 조치들이 선행돼야 한다”며 “금강산관광 재개 업무와 관련한 당국 간 실무회담이 시급히 개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회담 관계자가 전했다. 이 관계자는 “북측은 오후 회담에서 자신들이 제기하는 인도적 협력사업이 상봉 정례화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과거와 달리 요구사항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고 전했다. 북측은 이날 쌀 30만 t과 그보다 작은 규모의 비료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남북 정상회담 논의가 결렬된 이후 여권 정치인들을 통해 남측에 쌀과 비료 각각 30만 t의 지원을 요구했었다. 북측은 ‘상봉 정례화’라는 남측의 표현 대신 ‘상봉 정상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설과 추석 등 명절을 기본으로 1년에 3, 4차례 각각 100명 규모로 하고 화상 상봉과 영상편지 교환사업도 병행하자”고 제안했다. 또 북측은 중단된 판문점 적십자 채널 복원을 위해서도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남측 단장인 김용현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은 내년 3월부터 남북 각각 100가족 규모로 매월 한 차례씩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정례적인 상봉 행사를 갖자고 요구했다. 또 이미 한 차례 상봉한 이산가족의 경우 남북 50가족씩 매월 재상봉 행사를 갖자고 제안했다. 또 남측은 이산가족의 전면적 생사 확인을 위해 12월부터 매월 남북 5000명씩 생사 및 주소확인 사업을 벌이고 80세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내년 4월부터 고향방문 사업을 진행하자고 촉구했다. 또 북한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면적인 생사 확인을 요구했다.개성공동취재단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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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정청 수뇌 7인 회동… 세종시 기획단 내달 설치

    정부와 한나라당은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에서 당정청 수뇌부 회동을 갖고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돼 있는 세종시 설치 특별법을 이번 정기국회 회기 내에 처리하기로 했다. 또 당정청은 특별법의 국회 통과 이전이라도 11월에 총리실에 ‘세종시 이전 기획단’(가칭)을 만들어 세종시 이전 준비를 서두르기로 했다고 임채민 총리실장이 전했다. 세종시 이전 기획단은 정부청사가 세종시로 이전하게 될 과천시의 문제도 다룰 예정이라고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전했다. 이날 회동에는 안 대표와 이재오 특임장관, 임 총리실장 외에 김무성 원내대표, 고흥길 정책위의장, 백용호 대통령정책실장, 정진석 정무수석비서관이 참석했다. 김황식 총리와 임태희 대통령실장은 불참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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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 이산상봉 명단 100명씩 교환… 재회앞둔 기막힌 사연들

    “배 속에 있던 아들이 60년 만에 나를 찾는다니 정말 좋아서 잠이 안 와. 아이들을 만나면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먼저 간 아내와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아.” 이산가족 남측 상봉단으로 다음 달 3∼5일 금강산에 가 북측에 있는 아들(60)을 만날 김재명 씨(91·부산 해운대구 중동)는 20일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자식들을 추모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씨는 1951년 1·4후퇴 때 고향인 함경남도 풍산군 마을 청년들과 함께 “하루만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가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다. 그는 당시 두고 온 어머니와 여동생 2명, 임신 중인 아내와 2남 1녀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있는 막내딸과 복중(腹中)에 있던 아들을 이번에 만나게 됐다. 장남 김광운 씨(64)와 손자를 만나기로 한 한신옥 씨(90·여·경기 의정부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딸 노안나 씨(54)는 “어머니는 평소 맏아들만 생각하면 자꾸 울음이 나와 아들 생각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며 “이젠 마음껏 울기도 하신다”고 전했다. 노 씨는 “어머니는 체중이 30kg밖에 안 나가지만 언젠가는 아들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평소 기체조와 등산 등을 통해 열심히 건강을 유지해 오셨다”고 말했다. 평안남도에서 남편과 양복점을 운영하던 한 씨 부부는 6·25전쟁이 터지자 두 아들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황해도 근처에서 장남의 손을 잡은 남편과 차남을 업은 한 씨가 길을 잃으면서 헤어지게 됐다. 남편은 한동안 아내를 찾아 헤매다 다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고 10여 년 전 건강이 나빠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에 사는 한자옥 씨(83)도 전쟁 당시 부인 박모 씨(80)의 배 속에 있던 딸(59) 부부를 만날 수 있게 됐다. 한 씨는 충북 영동 부근에서 국군에 생포돼 남측 생활을 시작했고 전쟁이 끝난 뒤 새 가정을 꾸렸다. 박 씨는 한 씨와의 상봉을 거절했다. 한 씨는 “자기는 나를 기다렸는데 나는 새장가를 간 것이 못마땅했는지 알 수 없지만 섭섭하다”며 “어떻게 지냈는지 딸에게 물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남북 측은 이날 100명씩의 이산가족 상봉단 명단을 교환했다. 남측 최고령자는 김부랑 씨(97·여)로 북에 두고 온 딸과 외손자를 만난다. 남측 상봉단은 모두 70세 이상으로 80대가 52명으로 가장 많고 90세 이상은 21명이다. 남자가 73명, 여자는 27명이다. 북측 상봉단 100명은 남측 상봉단에 앞서 이달 30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남측 가족들을 만난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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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인민해방군, 연내 평양 주둔?

    중국 인민해방군이 이르면 올해 평양 외곽 순안에 전투병력을 파견해 주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베이징(北京)의 북한 소식통이 19일 전했다. 인민해방군이 북한에 진입하면 6·25전쟁이 끝난 후 1950년대에 한반도에서 병력이 철수한 후 50여 년 만에 처음이다.이 소식통은 인민해방군의 평양 주둔은 명목상으로는 북한군 현대화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파견 병력 규모는 2, 3개 퇀(團·한국의 연대급으로 병력은 2000∼3000명)으로 최소 수천 명에 이를 것이라고 전했다. 병력을 지휘할 일부 중국군 장교들에 대해 북한은 조선어와 지리 풍습 등에 대한 교육을 중국에서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인민해방군의 평양 주둔 목적이 군 현대화 지원이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공식 선포된 3남 김정은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아직은 김 위원장이 건재하지만 김 위원장의 사망 등 혼란이 발생했을 때 김정은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군을 활용하려 한다는 것. 중국군의 한반도 진입은 한반도 및 동북아 안보 지형에도 큰 영향을 미칠 사안이자 김 위원장의 대중 외교노선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은 중국으로부터 정치 경제 외교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두 차례 핵실험을 하는 등 자주를 강조하며 뻣뻣한 자세를 보여 왔다. 하지만 후계체제 안정을 위해서 “믿을 것은 중국밖에 없다”고 판단했으며 중국군의 개입까지 요청했을 수도 있다고 대북 소식통은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자주와 선군정치를 강조해 온 북한에서 중국군의 주둔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28일 개최된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가 당초 일정보다 20일가량 늦춰진 것도 권력구조 개편 과정에서 군부의 위상과 영향력이 줄어들어 군부가 반발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또 인민해방군의 북한 진주가 확인될 경우 미국과 일본 등으로부터의 반발도 예상된다.한국 정부 당국자들도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청와대 당국자는 “3대 세습에 대한 주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은데 사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외교부 당국자도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면서 자주를 강조해 왔다”며 “북한은 중국에 의존하지만 불신감도 커 중국 군대의 주둔을 받아들이거나 자원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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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첫 논평 삭제했다가 더 심한 욕

    북한이 14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사망에 독설을 퍼부었다. 10일 황 전 비서가 사망한 이후 닷새 만에 북한 당국이 처음으로 내놓은 공식 논평이다. 북한 노동당 산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이날 오후 3시경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배신자의 운명’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고 황 전 비서의 사망은 “하늘이 내린 저주”라고 비난했다. 논평은 고인을 ‘황가 놈’이라고 부르며 “유례없는 고난의 시절 당과 제도를 등지고 혈(피)붙이까지 다 버린 채 일신의 향락과 안일을 찾아 남쪽으로 뺑소니쳤던 자에게 하늘이 내린 저주”라고 비방했다.이 사이트는 이 글을 20분 만에 내린 뒤 오후 8시경에 ‘천벌을 받은 인간추물의 비참한 종말’이라고 제목을 바꿔 훨씬 비난 강도가 센 글을 다시 올렸다. 특히 황 전 비서가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일에 숨진 것을 겨냥해 “평양에서의 우렁찬 발걸음 소리, 폭풍 같은 만세환호성에 복통이 터지고 심장발작을 일으켜 황천객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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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 황장엽 14일 영결식]끝내 안나타난 탈북동지 김덕홍

    1997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탈북 공작을 담당했던 권영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부장 등이 1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조문에 맞춰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빈소를 찾아 조문한 것으로 13일 확인됐다.황 전 비서의 측근들에 따르면 권 전 부장은 12일 오전 김 전 대통령과 같은 시간에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김 전 대통령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권 전 부장은 1994∼1998년 안기부장으로 일하면서 각종 대북 공작을 총지휘했다. 황 전 비서의 탈북은 김 전 대통령의 임기 말에 성사된 쾌거였지만 그해 대선을 앞둔 ‘북풍’ 공작이 아니냐는 논란도 거셌다.권 전 부장의 지휘를 받아 실무를 담당했던 이병기 전 안기부 2차장과 그가 이끌었던 공작팀도 이날 오후 빈소에 들러 육개장으로 함께 저녁을 하고 헤어졌다. 권 전 부장도 이 자리에 합석할 예정이었으나 개인 사정이 생겨 안기부 공작팀 전체 회합은 성사되지 못했다.당시 황 전 비서와 함께 탈북했던 김덕홍 전 탈북자동지회장은 장례위원회 고문이면서도 13일 오후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당초 12일 오후 또는 13일 오전 조문할 예정이었다. 김 전 회장은 2002년 미국 방문 문제로 의견충돌을 겪은 뒤 황 전 비서와 소원해졌다. 그는 2009년 5월 한 세미나에서 “황 전 비서가 아직도 주체사상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비난하기도 했다.한편 황 전 비서를 그림자처럼 수행했던 경찰 경호팀 요원들은 10일 황 전 비서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경호하고 있다. 북한의 암살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특공무술 유단자 등으로 엄선된 이들은 시종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빈소를 지키던 한 탈북자는 “경호팀이 첫날에는 정신없이 사태 수습에 주력했지만 이틀째인 11일부터는 황 전 비서를 떠나보낸 것에 대한 황망한 심정이 얼굴에 가득하다”고 말했다.군인 출신 탈북자들로 구성된 북한인민해방전선(북민전)도 10일 밤부터 10명씩 조를 짜 빈소를 지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북한의 정권수립 기념일인 지난달 9일 발족한 이 단체는 인민군 대위 출신인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대표를 맡고 군인 출신 탈북자 200여 명이 회원이다. 김 대표는 “발인과 하관식에 회원 대부분이 참가해 경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 201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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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 황장엽 14일 영결식]“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가나/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가나/정든 산천과 갈라진 겨레는/또 어떻게 하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북한민주화위원장)가 2년 전에 지은 유작(遺作) 시가 13일 공개됐다. 이 시는 황 전 비서가 85세를 시작하는 2008년 새해 첫날 완성한 것으로 북한 민주화라는 염원을 달성하지 못한 가운데 육신이 늙어 가고 있음을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이 세상 하직할 영이별 시간이라고/값없는(가치 없는) 시절과 헤어짐은/아까울 것 없건만…’ 특히 ‘지평선에 보이는 검은 구름이/다가오는구나/영원한 밤의 사절이/찾아오는구나/…/때는 늦었고 남은 건/마지막 순간뿐’이라는 구절은 다가오는 육체적 죽음을 언급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시는 ‘여한 없이 최선 다해 받들고 가자//삶을 안겨준 조국의 거룩한 뜻 되새기며’라고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으로 끝난다. 이 시는 그가 2008년 1월 1일 지인들에게 개인적으로 공개한 것이다. ‘이별’이라는 제목은 황 전 비서가 이사장으로 있던 민주주의정치철학연구소 서정수 총괄담당 이사가 붙였다. 서 이사는 “2008년 4월 23일 황 전 비서가 ‘서 박사 여기 지난번 시 한 수 써 본 것 있소. 혹시 고칠 것 있으면 고쳐보시오’라며 시를 줬다”면서 “시를 읽어본 뒤 ‘왜 가신다는 표현을 쓰셨습니까? 가실 때는 가시더라도 김정일이 죽는 것 보신 후에 돌아가셔야지요’라고 했더니 웃으며 별 말이 없었다”고 전했다. 황 전 비서는 생전에도 종종 시를 썼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2006년에 개정된 ‘황장엽 회고록’(시대정신)에는 그가 1969년 4월 25일 평양 모란봉에서 지은 ‘영원한 봄’이라는 시가 나온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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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장엽 사망]구심점 잃은 탈북자 사회 집단지도체제로?

    탈북자 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북한민주화위원장을 맡아온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10일 사망함에 따라 앞으로 국내 탈북자 사회를 누가 대신 이끌게 될지 주목된다.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는 이달 말이면 2만 명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황 전 비서는 북한에서의 직책과 연령(87세) 면에서 다른 탈북자들을 압도했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탈북자 사회의 지도자이자 북한 민주화운동의 지휘부 역할을 했다. 당장은 그의 위치를 대신할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없기 때문에 다수의 탈북자가 지도그룹을 형성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황 전 비서의 ‘유일지도체제’가 저물고 당분간 다수의 ‘집단지도체제’가 이어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이는 황 전 비서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장례와 관련된 중요한 결정은 황 전 비서의 측근들로 구성된 ‘10인 위원회’가 그의 수양딸 김숙향 씨(68)와 상의해 내리고 있다. 10인 가운데 탈북자로 황 전 비서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 겸 탈북자동지회장,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있다. 수양딸 김 씨 옆에서 조문객을 맞는 상주 역할도 엘리트 탈북자 출신 측근들이 돌아가며 하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탈북자 출신 박사 1호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과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소장, 현성일 장철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등이, 북한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인물로는 안혁 강철환 북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 고영환 통일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허광일 통일을준비하는탈북자협회 회장 등이 거의 매일 밤 고인의 빈소를 지켰다. 황 전 비서와 함께 탈북해 귀순한 김덕홍 전 탈북자동지회장(72)은 고령인 데다 2001년 미국 방문을 둘러싼 이견으로 황 전 비서와 사이가 나빠진 뒤 탈북자단체 활동에 크게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탈북자 사회는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북한민주화위원회를 비롯해 각종 탈북자단체가 300개를 넘을 정도로 분열돼 있기 때문에 탈북자들을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조직체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김성민 대표는 “모든 탈북자가 김정일 세습 반대 투쟁에 하나로 뭉쳐 헌신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안찬일 소장도 “북한의 개혁개방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탈북자 2000명을 규합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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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석호]해외 유학파 ‘김정은 대장’의 앞날

    젊은 시절 외국에 나가 공부하는 것은 개인의 지적인 성장을 이루고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는 좋은 기회다. 그러나 잠시 모국을 비운 공백은 향후 성공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해외 유학생이 나중에 모국을 이끄는 정치지도자가 될 경우에 말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기용된 일부 해외 유학파 엘리트들이 국민 정서와 거리가 있는 정책과 발언을 내놓아 빈축을 산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등 한반도 변혁의 시기를 해외에서 보냈던 이들은 역사가 각인한 집단적인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기억의 공백’을 감수해야 한다. 지난달 열린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북한의 3대 세습 후계자로 얼굴을 내민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도 어린 시절 해외 유학의 경험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소지가 다분하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에 따르면 김정은은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 스위스 베른에 체류하면서 고교 저학년까지를 이수했다. 그가 북한을 떠난 1996년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아버지가 만든 ‘수령경제’의 누적된 폐해에 홍수 등 자연재해가 겹쳐 발생한 ‘고난의 행군’ 경제난의 한복판이었다. 10일 작고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생전 “1995년 50만 명, 1996년 100만 명, 1997년 100만 명 등이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굶어 죽어가는 주민들을 뒤로하고 관광의 나라에서 6년을 지내고 온 후계자는 당장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먼저 통치 능력의 문제다. 그는 주민 대부분이 가족과 친구가 굶어 죽어 가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본 집단적 충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주민들이 왜 공장과 기업소에 가지 않고 자본주의적 ‘황색 바람’이 부는 시장에서 생계를 유지하는지 이해 못할 수도 있다. 통치당하는 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까. 다음은 후계자로서의 정당성 문제다. 북한 주민들은 국가적 위기의 시기에 혼자 외유를 즐긴 그를 진정한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유학 시절 7개 외국어를 배우는 등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쌓았다고 아무리 선전해도 온 국민이 함께 사선을 넘은 ‘고난의 행군’ 대열에서 혼자 이탈한 전력이 세탁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은 “김정은이 어려서 개방된 서구사회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기반이 든든해지면 북한을 좀 더 열린사회로 이끌고 갈 수 있다”고 기대했다.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도 1920년부터 1926년까지 프랑스에 유학했다. 황 전 비서도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에서 공부했다. 둘은 그곳에서 공산주의를 배웠지만 당시 접한 서구적 합리성 덕분에 끝까지는 안 갔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이끌었고 황 전 비서는 인간중심철학을 위해 한국행을 택했다. 김정은이 능력과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보다 좋은 지도자가 되려면 주민들에게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무엇보다 주민들을 잘 먹여야 하고 그러려면 대외관계를 개선해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 스위스 학교에서 해외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잘 지냈던 경험을 최대한 살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신석호 정치부 차장 kyle@donga.com}

    • 201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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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독 20주년… 동독 구체제 마지막 총리 모드로 인터뷰

    “1986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 김정일이 공개된 상태였어요. 최근 김정은의 등장을 보면서 김정일이 꼭꼭 숨겨놓았던 막내아들을 꺼내놓은 느낌이 들어요. 북한 군부가 김정은을 후계자로 받아들일지, 성공적으로 승계가 될지 의심스럽군요.” 4일(현지 시간)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만난 한스 모드로 전 동독 총리(82·사진)는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그는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 동독 총리로 재직하면서 통일을 막으려 했던 동독 구체제(1990년 3월 자유총선거 실시 이전)의 마지막 총리로 불린다. 그는 통일 이후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좌파정당 결성에 참여하고 지금도 원로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북한의 비대한 군대 조직도 후계 문제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후계자는 당에서 나왔지 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며 “북한 군대의 경제적 역할과 정치적 비중은 그 어떤 나라보다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 노동당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김정일로 권력이 넘어갈 때처럼 김정은 등장 이후 북한에 일어날 변화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전임 지도자로서 현재의 북한에 어떤 조언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북한에) 조언을 할 수도 없고 (북한이) 조언을 듣지도 않을 것”이라며 “북한 정권은 외부의 조언에 거부감을 나타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통일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할 중국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6년 김일성 주석이 동독을 방문했을 당시 드레스덴 당 책임자로 영접을 맡았던 일을 회상했다. “당시 김 주석은 엄청나게 긴 기차에 모든 필요한 물품을 싣고 왔어요. 또 정권 내 모든 거물급 인사들이 동행했지요. 그래서 동독 공산당 간부들이 ‘평양에 남은 김정일이 안전하도록 반대파까지 다 데리고 왔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죠.” 그는 “김 주석이 아침에 산책을 할 때 모든 수행자가 수첩을 들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다 받아 적었던 것도 기억난다”며 “당시 산악지대를 방문한 김 주석에게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요청해 같은 해 북한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고 회고했다. 대부분의 독일 당국자와 시민들이 통일 20주년을 맞아 통일의 긍정적인 성과를 이야기했지만 모드로 전 총리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통일 이후 동독지역 출신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높은 실업률 등을 조목조목 언급하며 “희망보다는 실망이 크다”고 토로했다.베를린=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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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장엽 사망]황 씨, 평소 후학들에 덕담

    “매주 목요일 후학들과의 철학 공부가 끝난 뒤 선생님께서 ‘당신들이 앞으로 철학과 인생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선생님께서는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네’라고 하셨습니다.”10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87)의 빈소에 급히 달려온 한 제자는 7일 황 전 비서와의 마지막 대화를 회고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황 전 비서는 이어 “먼저 자기를 사랑해야 가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제자는 “선생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라는 것도 남을 해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해 가족과 사회, 국가가 사랑으로 충만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11일 새벽까지 빈소를 지킨 측근들은 “열심히 공부해 장차 큰사람이 되라”는 황 전 비서의 덕담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측근은 “황 전 비서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후학들에게 입버릇처럼 ‘사람이 처음부터 훌륭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큰 꿈을 정하고 노력한 사람만이 그렇게 될 수 있다. 큰 꿈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해왔다”고 회고했다.황 전 비서는 지난달 30일 대북 단파라디오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를 통해 “개인이 죽어도 집단은 죽지 않는다. 나무의 뿌리가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역설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개인보다 민족에의 헌신을 요구한 것이라고 한 측근은 설명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동영상=故 황장엽 빈소, 조문행렬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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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장엽 사망]황장엽씨, 2009년 7월 본보에 2만자 분량 ‘회고록’ 보내와

    《 동아일보는 지난해 7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에게 지난 삶을 회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보다는 철학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주체사상의 변질과 인간중심철학의 출현’이라는 제목의 글을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으로 보내왔다. 당시 이 글은 지면 사정상 실리지 못했다. 그가 보낸 글을 요약해 공개한다. 일부는 지난해 9월 발간된 저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시대정신)에 실렸다. 》나는 1958년 1월 당시 김일성의 이론서기라는 직책으로 조선노동당 서기실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 1997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로 일할 때까지 근 40년 동안 북한에서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지만 내적인 본직은 시종일관 당의 지도사상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북한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이 변질되는 과정을 목도했다. 또 독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평생 철학자로 살아온 나에게 철학은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나의 철학은 인간중심철학이다. 인간중심철학은 가장 보편적인 원리에 의거해 인류의 운명 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학문이다. 인간의 운명이란 인간이 생존하고 발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며 더 잘살 것을 희망한다. 더 잘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이 개척돼 가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모든 활동과 실천의 종국 목적인 인간 운명 개척의 요구에 이바지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인간중심철학의 출발점이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만들다 이 철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철학에 심취한 학창 시절을 거쳐 중앙당 서기실의 이론서기로 일하게 되면서 나의 철학 인생은 주체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서기실은 1958년 김일성이 처음으로 “주체는 조선혁명이다”라는 명제를 제기했던 연설(1955년 12월 28일 선전 일꾼들에게 한 연설)을 정리해 발표했다.1959년부터 중-소 이념논쟁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나는 중-소 간의 논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권력욕이 강하며 권력을 위해서는 사상이나 이론의 정당성에 관계없이 그것을 저들의 이익에 맞게 해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날이 갈수록 논쟁이 격화되자 김일성은 “우리도 주체를 더욱 튼튼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두 대국 간의 대립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천리마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선전했으며 경제 문화 건설에도 자주적인 노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81개국 공산당 회의 결과를 김일이 국제전화로 보고하자 “우리가 백두산에 다시 들어가 감자를 캐먹으면서 유격투쟁을 할지언정 소련의 대국주의 압력에는 절대로 굴하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때의 주체사상은 큰 나라들을 무조건 숭배하고 자기 나라를 깔보는 사대주의와 큰 나라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교조주의를 반대하면서 구체적인 실정에 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구체적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창조적 입장과 함께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자주의 입장을 지키는 것을 주체사상의 기본 요구의 하나로 덧붙이게 됐다. 1963년 최용건의 아프리카 방문을 계기로 나는 주체사상을 군중노선에 기초해 체계화했다.이런 과정을 통해 1960년 전반까지 김일성에 의해 정립된 주체사상의 기본내용은 한마디로 스탈린주의를 민족주의와 결부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탈린 개인숭배 대신 그 자리를 좀 더 봉건화된 김일성 개인숭배가 차지하게 됐으며 스탈린주의 간판 대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주체사상의 간판을 내걸고 김일성 독재가 실시된 것이다.○ 김정일과 수령 절대주의 사상의 출현이 당시 김정일은 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에 들어와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면서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당시 제2인자의 자리에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김정일과 김영주의 권력 쟁탈전은 김일성 개인숭배의 정도를 누가 더욱 높여 김일성으로부터 후계자의 자격을 인정받느냐는 경쟁이었다.김영주는 김일성에게 충실했고 정치적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지키려는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자기의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고 이런 면에서 머리가 빨리 돌고 무자비했다. 김일성이 김영주를 버리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한 것은 그의 가장 큰 과오라고 할 수 있다.1967년 (김일성이 유일사상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이른바 5·25 교시를 계기로 김영주와의 권력 투쟁에서 김정일의 승리는 확정적인 것이 됐고 스탈린주의 독재의 테두리에 있던 김일성 독재는 수령절대주의 독재로 전환됐다. 수령절대주의는 김정일이 창안해낸 전대미문의 반인민적 독재사상이라 할 수 있다.수령이 공산당원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사상이론과 영도예술을 소유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공산당의 이익을 대표해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독재를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령이 공산당과 노동계급에 생명을 준 어버이이기 때문에 독재정권의 모체가 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어느 나라 공산당에서도 생각할 수 없었던 최악의 독재사상으로서 결국 봉건적 세습제까지 부활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일성 자체의 변질김정일이 김일성의 업적을 과장해 투쟁 역사를 위조하고 개인숭배를 제도화·생활화하도록 강요하면서 김일성도 부정적 방향으로 급속히 변질되기 시작했다.그는 자기가 타고난 인민의 지도자인 것처럼 자고자대(自高自大)했으며 모든 것을 김정일에게 맡기고 국가사업에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자기를 과신한 나머지 공인된 국제관계와 관련된 역사마저 부정하고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이 중국 진시황보다 200년이나 뒤떨어져 건국했다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며 역사학자들에게 동명왕이 진시황보다 먼저 건국한 것으로 고치라고 하는 등 역사를 다시 썼다.세습제가 공산주의 운동에서 허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김정일의 사람됨이 인민의 지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명백했으나 김일성은 자기 고집대로 세습적으로 국가 정권을 물려줌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엄중한 과오를 범하는 데까지 이르게 됐다.○ 계급주의에서 인간본위 사상으로1960년 모스크바 81개국 공산당 회의에 참가해 1개월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지켜보면서 나는 수령 숭배와 수령 독재의 뿌리가 바로 계급적 본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계급주의 사상과 결부돼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것은 내가 계급주의적 입장을 버리고 자유롭게 살며 발전할 것을 바라는 삶의 요구를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하는 인간본위적 입장에 서게 하는 사상적 전환의 계기가 됐다.이후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푸는 데 결사적 각오로 달라붙었다. 나는 여기서 내가 왜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을 생존을 위한 방법론으로만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의 발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스스로 심각하게 비판하게 됐다.나는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이 인간 본성의 발현밖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나의 사상은 인간의 사회적 운동의 특징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운동의 주체인 인간 존재의 특징에 대한 인식으로 전진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사상 발전에서 일대 전환이었으며 바로 이것이 인간중심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나의 사상은 인간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이 높아진다는 것은 세계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데로 더욱 전진하게 됐고 드디어 세계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끝없이 발전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종국적인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한국에서 꽃피운 인간중심철학내가 1997년 2월 북한을 나온 이유는 오로지 김정일 독재체제를 타도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철학자인 나는 북한을 민주화할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북한 인민들이 올바른 사상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한국에 가면 내 필생의 산물인 인간중심철학을 체계화해 널리 알릴 생각이었다.나는 철학이란 이론적 정치이고 정치란 실천적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온 이후 지금까지 북한의 처참한 실상을 널리 알리고 북한 민주화 투쟁을 위한 다양한 조직들을 만들어 운영하는 한편 인간중심철학을 체계화하는 작업에 몰두해 왔다. 또 다양한 형태의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북한 김정일 체제를 비판하고 북한 민주화 및 개혁개방, 남북문제 해결 방안 등을 제시했다.정리=신석호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동영상=故 황장엽 빈소, 조문행렬 이어져}

    • 20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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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지기 직전까지…황장엽의 덕담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87)는 10일 숨지기 직전까지 가족과 제자들의 건강과 정신적 발전을 기원하는 덕담을 건넸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10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 급히 달려온 한 제자는 7일 황 전 비서와의 마지막 대화를 회고하며 애써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매주 목요일 후학들과의 철학 공부가 끝난 뒤 선생님께서 '당신들이 앞으로 철학과 인생을 완성하기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선생님께서는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네'라고 하셨습니다." 황 전 비서는 이어 "먼저 자기를 사랑해야 가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도 진정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유명한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주장한 핵심 명제다. 이 제자는 "선생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라는 것도 남을 해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해 가족과 사회, 국가가 사랑으로 충만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 전 비서는 또 사망 직전 수양딸 김모 씨에게 "요즘 건강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몸부터 단단히 챙기라"고 걱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김 씨가 빈소에 도착한 지인들에게 "내 걱정을 하시더니 먼저 가셨다"며 애써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김 씨는 10일 오후 늦게까지 빈소를 지키며 장례 문제 등을 상의했다. 11일 새벽까지 빈소를 지킨 측근들은 "열심히 공부해 장차 큰 사람이 되라"는 황 전 비서의 덕담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한 측근은 "황 전 비서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후학들에게 입버릇처럼 '사람이 훌륭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큰 꿈을 정하고 노력한 사람만이 그렇게 될 수 있다. 큰 꿈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해왔다"고 회고했다. 황 전 비서는 지난달 30일 대북 단파라디오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를 통해 "개인이 죽어도 집단은 죽지 않는다. 나무의 뿌리가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역설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개인보다 민족에의 헌신을 요구한 것이라고 한 측근은 설명했다.신석호기자 kyle@donga.com}

    • 201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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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장엽 사망]北 바로알기에 미친 영향

    10일 숨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최고위 탈북자로서 남한 내 북한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1997년 탈북하기 전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북한 최고지도층 인사들과 나눈 대화와 개인적인 경험 등은 가장 권위 있는 북한정보로 남한 연구자들의 연구에 활용됐다. 황 전 비서는 북한 체제를 ‘수령 절대주의 독재체제’라고 개념화했다. 그는 북한 체제가 “(김일성과 김정일 등) 수령의 개인독재를 절대화한 것으로 스탈린식 계급독재에 봉건 가부장 독재를 결합시킨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가장 반동적이며 반인민적인 독재형태”라고 평가했다. 그는 김정일이 확립한 이 체제가 김일성의 스탈린식 독제체제와 세 가지 면에서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첫째, 수령의 개인독재를 강화한 나머지 당과 군대, 국가재산을 모두 개인소유로 전환했다. 둘째, 당의 독재 위에 군사독재를 올려놓고 폭력적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셋째, 민족주의 구호를 내걸고 외부세계의 영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민들에 대한 우매화 정책을 철저히 실시했다. 황 전 비서는 이런 주장을 통해 자신이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김정일 체제를 강력히 비판했다. 황 전 비서는 북한 독재의 경제적 측면을 ‘수령경제’라는 이름으로 설명했다. 수령경제란 김정일이 북한 내 희소자원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당과 군 권력기관과 엘리트들에게 활용권을 부여함으로써 엘리트들을 관리하고 그들에게서 정치자금을 회수받아 자신의 통치에 활용하는 시스템이다. 수령경제 전문가인 정광민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황 전 비서의 증언이 없었다면 북한 수령경제 시스템의 존재와 김정일의 통치자금 운영 방식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며 남한의 북한연구는 아직도 노동신문 등 북한 공식 선전매체에 등장하는 거짓말에 휘둘렸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황 전 비서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독재가 1990년 경제난을 뜻하는 ‘고난의 행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지적하고 아사(餓死)의 참상을 고발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1995년에 당원 5만 명을 포함해 50만 명이 굶어죽었고 1996년 11월 중순까지 또 100만 명이 죽었으며 1997년에도 100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가 전한 북한 내부 정보는 남한의 보수진영에게 북한 비판의 강한 증거와 논리를 제공했다. 이후 한국에 온 고위 탈북자들의 증언이 더해지면서 ‘수령 절대주의 독재체제’는 보수진영의 북한연구 프레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에 대해 일부 진보진영 학자는 “황장엽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북한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황 전 비서가 경험한 북한은 그가 북한을 나온 1997년까지, 김정일이 50대로 젊었을 때의 북한이라는 한계가 명백했다. 한편 황 전 비서는 김정일 아닌 새로운 엘리트들이 권력을 잡은 노동당이 중국의 조언과 지원을 받아 스스로 개혁 개방을 해나가는 점진적인 방식을 주장해 북한의 붕괴와 빠른 통일을 원하는 일부 보수진영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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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체’는 가도 ‘세습’은 남았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87·사진)는 10일 사망하기 9일 전인 1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지난달 말 북한의 3대 세습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대해 “그가 잘해서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 개방을 이끌면 칭찬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황 전 비서는 “벌써부터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것은 이르다. 이제 막 얼굴을 드러냈으니 시간을 가지고 좀 지켜보자”며 평가를 유보한 뒤 “북한의 본질적인 문제(수령 절대주의 독재체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건, 또 다른 누가 후계자가 되건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그의 발언은 1997년 탈북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북한 체제를 강하게 비판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3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김정은에 대해 “그깟 놈 알아서 뭐 하냐. 그깟 녀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말했었다. 그런 황 전 비서가 후계자로서 공개 행보를 갓 시작한 김정은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자제한 것으로 볼 때 그는 김정은에 의한 북한의 변화 가능성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황 전 비서는 1일 오전 11시부터 30분 동안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났다. 지난해 7월 21일 동아일보 방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기자와 처음으로 만난 이래 열 번째 만남이었다. 황 전 비서는 이날 “조만간 김정은에 대해 나의 공식적인 견해를 밝힐 때가 올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북한보다 남한이 더 걱정된다”며 “천안함 폭침사건을 북한이 했다고 믿는 사람이 30%밖에 안 되고 북한에 쌀을 주는 문제로 싸움이나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우려했다. 이어 그는 “북한보다 월등하게 잘사는 남한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상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북한의 민주화와 통일을 향해 전 국민이 사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황 전 비서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이 남한 주민들을 사상적으로 무장하도록 만드는 데 기여해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는 지난해 8월 7일 국내 언론사 가운데 처음으로 동아일보를 방문해 사내 학습조직인 ‘남북한 포럼’ 소속 기자 20여 명을 상대로 특별강연을 했다. 이어 같은 달 19일 동아일보 인터넷 방송 뉴스프로그램인 ‘동아뉴스스테이션’에 출연해 북한 민주화에 관한 생각을 밝힌 바 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동영상=딥포커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인터뷰 (풀영상버전)}

    • 201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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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玄 통일 “금강산관광 재개 여건 성숙안돼”

    현인택 통일부 장관(사진)은 3일 북한이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남북 당국 간 회담을 열자고 제의한 것에 “아직은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 관광 재개를 위해서는 관광지구 내 남측 부동산의 일방적인 몰수 및 동결 조치가 철회돼야 하고 천안함 폭침 사태로 생긴 남북관계 여건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 장관은 이날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연방하원의장 주최 독일 통일 2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관광 재개를 위한 남북 당국 간 회담 개최 여부를 당장 검토하지 않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관광 재개 논의를 위해서는 여건의 성숙이 필요하다. 남북관계 전반에서 이 논의가 적절하고 타당한지 검토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에 진정성을 가지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현 장관은 “남북 간의 형편이 다른 상황에서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상호주의를 원할 수는 없다”며 “그러나 남측의 인도적 지원에 대해 북측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로 화답하는 ‘비대칭적 상호주의’로 남북이 새로운 협력의 모델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는 비록 ‘등가(等價)적 주고받기’는 아니더라도 남측의 지원에 북측이 상응하는 조치를 하는 상호주의 원칙이 확립돼야 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현 장관은 이날 독일 정부와 통일 문제와 관련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독일 통일 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인사들과 한국 내 통일 관련 원로들로 ‘한-독 통일원로자문회의’를 발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독일 통일과 통합과정의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정부 간 체계를 구축하고 통일을 대비한 인적 자원을 양성하기 위해 인적 교류를 확대하기로 했다.베를린=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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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통일 20주년 행사… 분단 한국의 북한담당 기자가 본 현장

    3일 오후 독일 브레멘 시 컨벤션센터 1층 강당에서 열린 독일 통일 20주년 기념식은 음악과 합창, 공연과 감사의 말들이 어우러진 한바탕 축제였다. 정오에 맞춰 기념식이 시작되자 흰 옷을 입은 배우들이 흰색 삼각돛배를 타고 식장 여기저기를 이동하는 가운데 웅장하고 경쾌한 관현악단의 연주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한배를 탔다’는 제목의 이 퍼포먼스는 꼭 20년 전인 1990년 10월 3일 미처 준비하지 못한 통일을 맞아 갖은 어려움과 갈등을 극복하고 오늘날 유럽통합의 주역이자 글로벌 외교강국, 경제대국이 된 독일의 8200만 국민이 전 세계에 자신들의 눈부신 성과를 뽐내는 무대처럼 보였다. 옌스 뵈른젠 연방 상원의장 겸 브레멘 주지사는 축사를 통해 “독일 통일 20년은 성공 스토리였다”며 “역사는 만들어가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통일 이후 우리는 모든 독일인에게 교육과 복지 등에서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와 주변국들 사이에서 마땅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이어 등장한 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은 통일에 기여한 모든 사람에게 감사를 표시하면서 “특히 동서독이 하나 되기 위해 변화의 의무를 다한 동독 주민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하루하루의 일상을 바꿔 나가는 고통을 견디고 자유 속에서 새 삶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찬양했다. 그는 “이제 우리는 하나”라며 “중요한 것은 어디서 왔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갈 것이냐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독일 통일을 최종 결정한 ‘2(옛 동독·서독)+4(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조약’에 참여했던 전승 4개국 대표 외에 한국의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독일 정부의 특별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현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독일의 통일은 국가와 민족을 정상화하는 과정이었다”며 “한반도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매우 당연한 책무”라고 강조했다. 현 장관은 독일 연방하원이 이날 밤 베를린에서 개최한 기념행사에도 참석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독일 정부와 의회가 통일 20주년 기념행사에 한국의 통일부 장관을 특별 초청한 것은 같은 분단의 역사를 경험한 국가로서 통일과 통합의 교훈을 공유하고자 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브레멘과 수도 베를린 등 전국에서는 2일부터 조촐한 기념 축제와 행사들이 시작됐다. 브레멘에서는 시내 광장에 분단과 통일을 상기시키는 사진과 글로 꾸며진 베를린장벽 모형을 세워 통일 20주년을 축하했다. 1980년대 독일의 팝스타 니나를 비롯한 인기 가수들이 출연하는 콘서트와 행렬, 그리고 폭죽놀이 등을 곁들인 거리 축제도 열렸다. 베를린에서도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광장에서 축하 공연이 열렸다. 이날 오전 브레멘 시내에서 만난 교민 한경수 씨(59·여)는 “1973년 간호사로 독일에 와 통독 20년의 전 과정을 지켜봤다”며 “통일 초기에 혼란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독 출신 모두 통일하길 잘했다고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동독 지역의 아름다운 도시들이 제 모습을 되찾았고 통독 경제도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과 한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같은 경험을 가진 나라다. 전쟁을 일으킨 패전국 독일은 통일을 이루고 20년의 성과를 노래하고 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속에 동족 간 갈등을 겪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통일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을까. 독일 통일 20년 기념식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커다란 질문을 던졌다.브레멘=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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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 이산상봉 30일∼11월 5일 개최 합의

    남북한은 30일부터 다음 달 5일까지 금강산 관광지구 내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양측 각각 100명의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열기로 합의했다. 또 26, 27일 이틀 동안 개성에서 적십자회담을 개최하고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당국 간 회담 재개 문제도 논의키로 했다. 통일부는 1일 “남북은 오늘 개성 자남산 여관에서 제3차 적십자 실무접촉을 갖고 이같이 합의했다”며 “대한적십자사가 오후 7시부터 상봉 신청자 500명을 추첨해 상봉 대상자 선정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상봉 장소는 남측이 요구한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와 금강산 호텔로 결정됐다. 당초 면회소 사용을 위해서는 금강산 관광이 먼저 재개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북측은 “이번 상봉행사만큼은 아무런 조건 없이 금강산 면회소에서 실시한다”고 양보했다. 남측은 이에 앞서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상봉과 관광 문제를 연계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4월 27일 북측이 일방적으로 몰수딱지를 붙인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는 1년 6개월여 만에 일시적으로 정상화되게 됐다. 상봉 인원은 남북 각각 100명이 상대측의 가족을 만나도록 하자는 북측의 의견이 관철됐다. 남측은 100명 이상 대규모 상봉을 하자고 주장했었다. 30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3일 동안은 북측 상봉단이 남측 가족을, 다음 달 3일부터 5일까지 3일 동안은 남측 상봉단이 북측 가족을 각각 만난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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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막오른 김정은 시대]노동당 요직엔 누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3남 김정은의 명실상부한 체제 구축을 위해 움직일 핵심 조직은 어디일까.북한 전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곳은 노동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다. 두 조직은 과거 김 위원장의 후계체제 구축 때도 손발 역할을 했다.노동당의 인사 조직 문제를 담당하는 조직지도부와 체제 선전을 책임지는 선전선동부는 당 비서국 소속으로 노동당의 ‘기본 부서’로 불린다. 김 위원장은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기 한 해 전인 1973년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와 조직지도부장, 선전선동부장 자리를 독차지해 후계체제 구축에 필요한 조직과 인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97년 노동당 총비서가 된 뒤에도 이 두 부서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김정은으로의 권력 세습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이들 두 부서는 조직을 정비했다.○ 조직 장악지난달 28일 당 대표자회에서 박정순 정치국 후보위원(82)이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발탁됐다. 박정순은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겸 당 행정부장 계열로 조직지도부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김 위원장이 사실상 부장을 겸직하고 있는 조직지도부는 당, 군, 정 전체 엘리트의 조직과 인사를 장악하고 있다. 김 위원장 밑에 이용철 이제강 김경옥 등 3명의 제1부부장이 조직지도부를 이끌어왔지만 올해 4월 이용철, 6월 이제강이 잇달아 사망해 김경옥 1명만 남아 있었다.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이제강이 맡았던 당 인사와 조직을 박정순이 맡고, 김경옥은 계속 군을 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김정은과 장성택은 조직지도부에 직함은 없지만 인사와 조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선전선동이번 김정은 얼굴 공개에 이르기까지 3대 세습을 위해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전개된 이미지 선전은 김기남 당 선전담당 비서 겸 선전선동부장(84)의 작품으로 보인다. 선전선동부는 5월에 최익규 부장이 물러난 뒤부터 김 비서가 부장을 겸직하고 있다. 김 비서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김정일과 김일성을 일체화하는 선전 작업을 맡았던 인물로 북한의 체제 선전 및 역사 조작의 대가로 꼽힌다. 김일성종합대와 만경대혁명학원을 나온 김 부자의 최측근 엘리트인 그는 40세 때인 1966년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맡은 이후 평생을 김씨 부자 우상화와 홍보 활동에 몸담았다. 그가 5월 비서와 부장 자리를 모두 차지한 것은 김정은 우상화라는 김 위원장의 특명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조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기남 비서는 선전선동부장이던 1987년 유명한 구호나무 신화를 조작해낸 인물로 김씨 부자 우상화를 위해 북한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1987년 5월 백두산 밀림지역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황해도 구월산에 이르는 지역에서 ‘구호나무’가 발견됐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 나무에는 김일성과 부인 김정숙의 항일활동, 김정일의 출생을 축하하는 구호가 적혀 있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신석호 기자 kyle@donga.com김정일, 3대 세습위해 후계원칙도 깼다▲2010년 9월30일 동아뉴스스테이션}

    • 201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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