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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하다가 총상을 입은 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북한 병사에게서 기생충 수십 마리가 나온 데 이어 이 병사가 B형 간염, 폐렴, 패혈증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회복 여부에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B형 간염은 B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간의 염증성 질환이다. 이로 인해 귀순 병사의 간 효소 수치가 매우 높은 상황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귀순 병사의 높은 간 수치가 B형 간염 탓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전반적인 영양실조에 다량의 출혈로 인한 대량 수혈이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초기 수술 시 의료진 20여 명은 귀순 병사가 B형 간염에 걸린 사실을 모르고 투입된 만큼 의료진의 건강 검진도 필요한 실정이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한광협 소화기내과 교수는 “기생충 감염으로 영양부족이 나타났을 테고, 출혈이 심하면 간에 일시적인 허혈성 장기 손상이 오는 만큼 이로 인한 간 수치 증가 가능성이 높다”며 “B형 간염 치료보다 환자의 상태를 최대한 안정시키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환자에게 온 폐렴도 계속 지켜봐야 한다. 일단 총상으로 생긴 일시적인 폐렴인 데다 젊기 때문에 회복력이 높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기대하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호흡기내과 김승준 교수는 “많은 수혈을 받다 보면 폐 손상으로 폐부종 및 폐렴 증상이 오기 쉽다”며 “항생제를 적절히 투여하고 수액을 조절하면 폐렴 치료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개 폐렴은 1, 2주 정도 지나면 몸의 상태에 따라 회복 여부가 결정된다. 귀순 병사가 앓고 있는 패혈증은 회복 여부의 핵심 관건이다. 패혈증은 세균에 감염돼 발열, 빠른 맥박, 호흡수 증가, 백혈구 수 증가 또는 감소 등 전신에 걸쳐 염증 반응이 나타나는 상태이다. 패혈증이 악화돼 쇼크가 일어나면 치사율이 30%까지 치솟는다. 최근 가수 최시원 씨의 개에게 물려 갑자기 사망한 한일관 대표 김모 씨의 사망 원인이 패혈증이었다. 귀순 병사가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관계자는 “이미 급한 불은 끈 상황이기 때문에 패혈증으로 인한 쇼크가 올 가능성은 낮다”면서 “하지만 언제든 상태가 악화될 수 있는 만큼 계속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손상 부위를 한꺼번에 수술하지 않고 출혈 감염 등 생명과 관련된 부위를 우선 수술하는 이른바 ‘대미지 컨트롤(damage control)’ 순서상 귀순 병사의 기생충 감염 치료는 시급한 상태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1, 2차 수술 때 이은 혈관과 내장이 얼마나 빨리 회복될지,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떼고 자발 호흡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전망했다.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는 경계가 한층 삼엄해졌다. 19일 지상 1층과 지하 1층의 출입구는 보안 인가를 받은 사람만 접근할 수 있도록 문이 잠겨 있었다. 외상센터 내 중환자실로 통하는 길목은 군인으로 보이는 사복 차림의 경호원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병원 관계자는 “미군도 검문을 받은 뒤 들어가야 한다”며 “귀순 병사의 병상 옆은 군과 국가정보원 소속 경호원이 항상 지키고 있다”고 전했다. 귀순 병사의 주치의인 아주대병원 이국종 외과 교수는 22일경 환자 상태에 대해 공식 브리핑을 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19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 교수는 병사 개인정보 노출 논란에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귀순 병사가) B형 간염 감염자임에도 변과 기생충을 그대로 만져야 했다”며 “그런데도 일부에선 ‘환자 정보를 공개했다’ ‘환자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비판을 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사전에 (관계 당국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공개한 것인데도 욕을 먹으니 욕먹을 팔자인가 보다”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의료계에선 귀순 병사를 치료한 아주대병원처럼 권역외상센터를 늘리고 의료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된다. 권역외상센터는 외상외과, 신경외과, 응급의학과 등으로 구성된 전문 외상팀이 항시 대기하다가 생명이 위독한 외상환자를 빠르게 집중 치료하는 시스템이다. 현재 운영 중인 외상센터는 전국에 9곳뿐이어서 중증 외상환자가 일반 응급실을 찾았다가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쳐 숨지는 일이 적지 않다.수원=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조건희 기자}

“급체인가….” 최근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자주 쓰려 별 생각 없이 동네 의원을 찾은 양모 씨(43)는 ‘큰 병원에 가보라’는 주치의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서둘러 옮긴 응급실에서 내린 진단은 급성심근경색증(심장 발작). 평소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던 양 씨로서는 뜻밖이었다. 의료진이 제때 막힌 혈관을 뚫은 덕에 큰 화는 피할 수 있었다. 나흘 후 퇴원한 양 씨는 “고기보다 야채를 많이 먹고 꾸준히 운동하라는 조언을 흘려 넘길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추운 날씨에 바람 잘 날 없는 뇌심혈관 심장은 크게 3개의 심장혈관(관상동맥)을 통해 산소와 영양분을 받고 활동하는데, 이 중 하나라도 막히면 심장 근육의 조직이나 세포가 죽는다. 이것이 급성심근경색증이다. 혈전(피가 굳은 덩어리)이 혈관을 완전히 막지는 않았지만 혈액의 흐름을 방해하는 경우엔 협심증이 생긴다. 최근처럼 급격히 기온이 낮아지면 급성심근경색증과 협심증의 위험이 높아진다. 심장내과 전문의들은 그 이유를 ‘피가 끈적끈적해지는 탓’이라고 표현한다. 낮은 기온 탓에 혈액의 응집력이 높아지고 고혈압 등 지병이 악화되면 급성심근경색증의 위험이 더 높아진다는 뜻이다. 평소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기름진 식단을 피하면 혈관 안쪽 벽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만, 찬 바람이 급성심근경색증의 예기치 않은 도화선이 되는 경우가 있다. 혈관이 막혔을 때 생기는 증상은 병변이 뇌일 때 더욱 심각해진다. 뇌혈관이 막혀 혈액과 산소가 공급되지 못해 생기는 허혈성 뇌중풍(뇌경색·단일 질환 중 사망원인 1위)이 대표적이다. 뇌는 몸속 산소의 30%가량을 소모하고 혈관도 빼곡히 들어차있기 때문에 치매 등 뇌 질환을 앓는 환자들은 뇌경색의 위험도 더 높아진다. 포항 지진과 같은 재난 발생 시 재난 후 스트레스로 인한 뇌심혈관 질환 위험이 특히 높아진다. 서울대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뇌심혈관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결과, 피해 지역 반경 50km 내에 거주한 사람의 급성심근경색증 발병률이 34%, 뇌중풍은 42% 증가했다고 밝혔다. 1995년 한신(阪神)·아와지(淡路) 대지진 당시 인근 지역 고혈압 환자의 혈압이 평균 11mmHg 증가했다. 신상도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급성심근경색증은 진도가 높은 지역에서 발생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심장발작 멈춰라” 응급실 안에 또 응급실 급성 뇌심혈관 질환의 핵심은 빠른 치료다. 가슴 통증 등 증상이 처음 나타난 후 3시간 내 병원으로 옮겨 막힌 혈관을 뚫어야 생존율이 높아진다. 급성심근경색의 경우 6시간을 넘기면 숨질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지고 회복하더라도 폐 부종 등 합병증에 시달릴 수 있다. 뇌경색을 방치하면 손상된 뇌 세포가 살아나지 않아 지체장애에 빠질 수 있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은 지난달 30일 20억 원을 들여 응급진료센터 내에 ‘응급심혈관중재술실’을 설치했다. 응급실 내에 심혈관조영술 장비를 설치하고 심장내과 전문의를 상주시켜 환자가 스텐트 삽입 및 풍선 확장술을 받기까지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다. 기존엔 응급진료센터를 찾은 환자가 시술을 받으려면 150m가량 떨어진 심장혈관병원으로 옮겨야 했고, 그 과정에서 환자가 숨진 일도 있었다. 하지만 14일 출근길에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으로 지하철역 앞에서 쓰러진 황모 씨(44)는 오전 11시 23분경 세브란스병원 응급진료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중재술실로 옮겨져 11시 50분경 곧장 스텐트 삽입 및 풍선 확장술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아산병원은 지난해 5월 119구급대와 함께 ‘뇌졸중 응급 진료 시스템’을 만들어 환자가 병원에 도착한 뒤 막힌 혈관을 뚫기까지 걸리는 평균 시간을 46분에서 20분으로 단축시켰다. 119 구급대원이 뇌졸중(뇌중풍) 의심 환자를 발견하면 곧장 서울아산병원 뇌졸중센터 의료진과 연락할 수 있는 24시간 전용 핫라인을 만든 뒤, 뇌졸중 환자의 혈전용해술 시행률은 종전 9.8%에서 15.8%로 높아졌고, 뇌출혈 등 합병증 발병률은 12.6%에서 2.1%로 줄었다. 고려대 안암병원은 실신하거나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하면 당직의가 해당 환자의 심전도 결과를 스마트폰으로 심혈관센터의 전문의에게 전송한다. 급성심근경색증 진단과 시술 결정을 앞당기기 위해서다. 전상범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혈관이 막히면 1분당 뇌세포 190만 개가 죽고, 한 번 손상된 뇌세포는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며 “갑자기 말이 어눌해지거나 한쪽 팔다리에 힘이 빠지는 등 뇌졸중 증상을 보이면 곧장 혈전제거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귀순한 북한 병사 A 씨가 기생충뿐 아니라 B형 간염, 폐렴까지 앓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북한 내 감염병 실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북한 내 감염병 실태를 감시하기 위한 예산은 한 해 3000만 원 수준에 불과해, 통일 이후 ‘아웃브레이크(감염병 대유행)’ 사태에 대처할 수 있겠냐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질병관리본부(KCDC)의 ‘북한이탈주민 건강관리사업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탈북자 중 A 씨처럼 B형 간염을 앓는 사람의 비율은 남성은 12.4%, 여성은 10.4% 수준이다. 국내 B형 간염 유병률(남성 3.6%, 여성 2.7%)보다 각각 3.4배, 3.8배로 높다. 북한에서 결핵에 새로 걸린 환자는 2010년 인구 10만 명당 432명에서 2015년 561명으로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결핵 발생률이 가장 높은 한국(인구 10만 명당 80명)의 7배나 된다. 귀순 병사가 앓는 폐렴은 총에 맞아 생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만성 폐렴은 북한에서 흔한 질병이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북한에서 숨지는 1∼5세 영유아는 한 해 1만여 명으로, 폐렴은 이들의 사망 원인 중 약 14%를 차지한다. 한국에선 2014년부터 영유아 및 65세 이상 노인의 폐렴구균 예방접종을 무료로 지원해 환자가 줄고 있다. 북한에서 흔한 기생충 감염도 한국에선 농작물 관리를 강화하며 줄고 있다. 1971년 84.3%에 달했던 장내 기생충 감염률은 2012년 2.6%로 낮아졌다. 현재 보건당국은 중국 옌볜(延邊) 등에 ‘해외 거점 실험실’을 설치하고 북한 내 감염병 환자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가 2014∼2015년 조선족자치주 옌지(延吉)시 등 8곳 주민 734명을 조사한 결과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쥐를 통해 감염되는 신증후군출혈열 바이러스 감염자는 64명(8.7%)이었다. 국내에선 전체 인구의 0.001%에 해당하는 500여 명이 환자로 신고된 것과 대조적이다. 신증후군출혈열은 치료하지 않으면 치사율이 15%에 이른다. 하지만 해외거점 실험실을 통한 북한 감염병 감시 예산은 몽골, 베트남, 필리핀 사무소 등을 통틀어 연간 1억여 원에 불과하다. 이 중 중국 지역에 할당된 예산은 3000만 원이 채 안 된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예산과 인력 부족은 물론이고 중국의 폐쇄적인 생물자원(병원체 등) 반출 제한 탓에 깊이 있는 연구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김영훈 고려대 의대 통일보건의학협동과정 교수는 “감염병으로 인한 북한 주민의 조기 사망률은 한국인의 4.7배다. 인적 교류에 대비해 남북 통합 질병관리본부를 만들어 감염병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여기 ○○○ 선생님 있나요?” 지난달 경기의 한 학원으로 서류 봉투를 든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친 강사 A 씨(20대 후반)는 숨이 턱 막혔다. 그 중년 여성은 올해 초 A 씨를 성폭행한 혐의(강간)로 기소된 남성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수강생이 보는 앞에서 “합의서에 서명해 달라”고 압박하던 이 중년 여성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퇴거명령 불이행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자 그제야 교실에서 나갔다. A 씨는 “지옥 같았던 피해의 순간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고 호소했다. A 씨처럼 성폭력 사건 후에 가해자 등으로부터 2차 피해에 시달려 정신적 고통을 겪는 피해자가 적잖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영기 장형윤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팀은 2014년 이후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를 찾은 17세 이상 성폭력(성폭행 및 강제추행) 피해자 105명을 6개월씩 추적 조사한 결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위험 점수(51점 만점)가 정신건강의학과 치료가 필요한 수준(20점 이상)이었던 이들이 전체 105명 중 70명이었다고 12일 밝혔다. 이들 중 47명은 6개월 지난 후에도 PTSD 위험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수사와 재판이 끝나지 않은 피해자의 고통이 컸다. 피해자 중 1심까지 종료된 17명의 평균 PTSD 위험 점수는 사건 직후 평균 23.3점에서 재판 후 11.8점으로 대폭 줄었다. 반면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인 피해자는 위험 점수의 감소 폭이 3.3점에 불과했다. 스스로 느끼는 신체적 건강 상태도 재판 종료 피해자는 10점 만점에 9.1점이었지만, 재판 진행 중 피해자는 5.7점 수준이었다. 연구팀은 피해자가 수사와 재판이 길어질수록 가해자 측의 집요한 합의 요구에 시달릴 위험이 높아질 뿐 아니라 반복되는 조사와 증언 과정에서도 큰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지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한 30대 여성은 “경찰이 조사 중 ‘당신이 그렇게 (가해자) 앞에서 붙어 다니니까, 쉬워 보이니까 당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피해 사실을 모르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수시로 형사로부터 전화를 받아야 했다는 피해자도 있다. 경찰은 △2차 피해를 초래하는 발언을 피하고 △추가 조사 시엔 미리 협의한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피해조사 매뉴얼’을 두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가해자 측의 접근을 막을 제도가 미흡하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한 성폭행 피해 여성은 “가해자의 가족이 집으로 찾아와 합의 요구서를 편지함에 두고 갔는데, 경찰에 신고했더니 ‘직접적인 위협이 없어서 달리 조치할 게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장형윤 교수는 “성폭력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혼란과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수 있는 ‘인권 보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장면1. 짙은 방향제 냄새와 대소변 찌든 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7일 경기의 한 요양병원 입원실. 중증 치매와 당뇨병을 앓고 있는 A 씨(72)가 산소공급기를 단 채 가늘게 호흡하고 있었다. 다른 환자 5명은 초점 풀린 눈으로 천장을 보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이들 중 4명은 임종이 다가와도 연명의료를 시도하지 않겠다는 ‘소생술 포기서(DNR·Do Not Resuscitate)’를 제출했지만 스스로 서명한 이는 한 명도 없다. 요양병원 관계자는 “가족이 ‘환자에겐 알리지 말라’며 대신 서명하는 일이 태반”이라고 귀띔했다. #장면2.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한 말기 암 환자 정현례 씨(45·여)는 스스로 연명의료를 포기하기로 했다. 약에 취해 숨을 거두느니 또렷한 정신으로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DNR를 작성할 땐 가족, 주치의와 둘러앉아 어떤 연명의료를 포기할지 세세히 따졌다. 그의 곁을 지키는 딸 유준영 씨(23)는 “최근처럼 엄마와 깊은 대화를 오래 나눈 적이 없다”며 “마지막 사진을 예쁘게 남겨드리기 위해 화장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2월 4일 시행될 연명의료결정법 제1조에는 “임종을 앞둔 환자의 자기결정을 존중해 존엄과 가치를 보호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정 씨처럼 이 법의 취지에 맞게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환자는 대형병원에 입원한 극소수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가족과 의료진이 연명의료 논의를 금기시하는 탓에 요양병원 및 요양원에 입원한 대다수는 A 씨처럼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김승희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사망자 21만716명 중 숨지기 전 한 달 내에 요양병원에 입원했던 환자는 5만9852명이었다. 여기에 전국 요양원 입소자가 16만8356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게 잡아도 한 해 6만 명 이상이 요양기관에서 임종한다는 게 의료계의 분석이다. 연명의료결정법상 환자가 거부할 수 있는 시술은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4가지뿐이다. 하지만 실제 요양병원에선 이보다 광범위한 연명의료 중단 사례가 나온다. 기관지에 가래가 쌓여 호흡이 곤란해진 경우 식도 아래를 절개해 노폐물을 빨아들이면 살 수 있지만, 환자가 75세 이상 고령이라면 이런 시술을 선택하는 가족이 10명 중 2명꼴도 안 된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하실 환자이니 고통을 주지 말자’는 게 가족의 판단이다. 하지만 이런 연명의료 포기는 내년 2월부턴 연명의료결정법 위반에 해당해 최고 징역 3년에 처해질 수 있다. 반면 환자가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아도 가족의 고집이 앞서는 사례도 여전히 많다. 요양원도 사정이 낫지 않다. 요양원에는 의사가 상주하지 않고 촉탁의사가 월 2회 방문해 진료하기 때문에 사실상 당직 간호사가 임종기를 판단한다. 법률상으로는 주치의 1명과 전문의 1명이 함께 판정해야 한다. 서울의 한 요양원장은 “법대로 하려면 임종기 환자를 무조건 응급실로 보내야 하는데, 만약 이송 중 돌아가시면 그게 과연 존엄한 죽음인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런 관행 탓에 2015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평가한 한국의 ‘죽음의 질’은 40개국 중 32위에 머물렀다. 인구 10만 명당 호스피스 병상 수가 한국의 2배인 영국(1위)이나 내년부터 만성 통증환자가 영양급식까지 포기할 수 있도록 결정권을 강화하는 대만(14위)에 비하면 ‘존엄한 마지막’에 대한 인식이 걸음마 수준이다. 국가호스피스연명의료위원회에 참여하는 한 교수는 “요양병원 종사자에게 연명의료결정법의 취지를 적극 교육하고 건강보험에 ‘임종돌봄’ 수가를 따로 만들어 임종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조건희 becom@donga.com·김호경 기자}
앞으로 말기 판정을 받지 않은 환자도 주치의와 함께 연명의료계획서를 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환자가 중단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시술의 종류가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4가지뿐 아니라 체외막산소공급(에크모) 등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가호스피스연명의료위원회는 8일 전체회의를 열어 의료 현실이나 법의 기본 취지와 동떨어진 연명의료결정법 내용의 수정을 요청하기로 의결했다. 이 위원회는 호스피스와 연명의료의 시행 계획을 심의하는 기구로, 의료·법조·윤리학계 전문가와 환자단체 대표 등 15명으로 구성돼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내년 2월 4일 전면 시행된다. 가장 주목할 대목은 연명의료계획서의 작성 시기를 앞당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기존 법상으로는 적극적으로 치료해도 근원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말기’ 환자로 판정받아야 연명의료계획서를 쓸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엔 이미 환자가 의식을 잃어 스스로 계획서를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위원회는 ‘수개월 내에 임종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태’의 환자도 계획서를 쓸 수 있어야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다며 법 개정을 권고했다. 또 위원회는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의 대상이 되는 시술의 범위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시술’로 넓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술이 발달해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신기술이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 중단할 수 있는 연명의료를 심폐소생술 등 4가지로만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이날 위원회의 최대 쟁점은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임종기’를 판정할 때 반드시 의사 2명이 참여하도록 한 현 조항을 완화할지 여부였다. 의료계는 “의사가 1명뿐인 병·의원에선 환자의 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완화를 주장했고, 환자단체는 “민감한 판정이므로 이 조항을 유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위원회는 이미 말기 판정을 받아 전국 호스피스 전문기관 63곳에 머무르는 환자에 한해 의사 1명이 판정할 수 있도록 임종기 판단 절차를 완화하기로 했다. 복지부는 이날 의결 내용을 반영한 개정안을 조만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8일 오전 7시경, 청와대 경내. 문재인 대통령과 일행을 태운 헬기가 이륙했다. 목적지는 경기 파주시 인근 비무장지대(DMZ).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단독 정상회담에서 함께 DMZ를 방문하기로 전격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용 헬기인 ‘마린원’으로 따로 이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을 태운 헬기는 DMZ 인근 지역에 다다르기 전 안개가 짙어 더 이상 비행하지 못하고 인근 부대에 착륙한 것으로 알려졌다. 착륙 후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송영무 국방부 장관 등 참모진은 노상(路上) 긴급회의를 갖고 “트럼프 대통령이 날씨 때문에 오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에 문 대통령 일행은 헬기에서 내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준비해둔 관용차 편으로 DMZ로 이동해 오전 9시까지 트럼프 대통령 일행을 기다렸다. 트럼프 대통령도 마린원을 타고 오전 7시 43분경 용산 미군 기지를 출발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 등을 태운 VH-60Ns 기종의 마린원 2대는 물론이고 수행원과 취재진, 경호 인력을 태운 치누크 헬기 3대가 동원됐다. 백악관에 따르면 트럼프 일행은 약 18분을 날아가 목적지로부터 5분 이내 거리까지 도달했지만 악천후를 만나 기수를 용산으로 되돌려야 했다. 주변 헬기를 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안개가 낀 악천후가 원인이었다고 백악관은 밝혔다. AP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일행은 DMZ 인근 1마일(약 1.6km)까지 접근했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군과 비밀경호국은 착륙하는 게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용산으로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DMZ 방문을 단념하지 않고 전용차량인 ‘캐딜락원’에서 1시간 가까이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다 오전 9시경 최종 방문을 포기했다. 국회 연설, 중국 방문 등 차후 일정을 고려해서다. 박수현 대변인은 청와대로 돌아온 후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 측이 10분 간격으로 3, 4번 전화를 해 현지 날씨가 어떤지 묻는 등 DMZ 방문 의지를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파주 인근은 안개와 황사가 겹쳐 시정(視程·목표물을 뚜렷하게 식별할 수 있는 거리)이 0.87km에 불과했다. 전날 같은 시간대(18.48km)의 20분의 1 수준이다. 전날 밤 중부지방에 비가 내려 공기가 습한 상태에서 기압골의 영향으로 찬 공기가 유입됐고 8일 아침 기온이 10.5도까지 내려가면서 대기 중에 수증기가 응결해 안개가 생긴 데 따른 것이다. 여기에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에서 불어온 황사로 미세먼지(PM10) 농도가 m³당 118μg(마이크로그램·1μg은 100만 분의 1g)으로 ‘나쁨’ 수준이었던 것도 영향을 끼쳤다. 청와대 관계자는 “시계(視界)가 25m밖에 안 돼 트럼프 대통령이 DMZ에 갔더라도 제대로 북한 지역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정상의 DMZ 방문은 문 대통령의 제안으로 계획됐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미국 대통령이 DMZ 상황을 직접 살펴보는 게 대북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다. 문 대통령은 전날 단독 정상회담에서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DMZ를 방문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고민 중인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며 조언을 구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DMZ 상황을 보는 게 좋겠다. 나도 동행하겠다”고 하면서 방문이 성사됐다.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DMZ 방문 불발에 대해 “한미 정상이 DMZ에 가려 했다는 사안의 본질에 주목해야 한다. 이 자체가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세균 국회의장 및 여야 지도부와의 사전 면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 온 이틀 간 좋았다. 오늘 아침에 DMZ에 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음에 꼭 가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미국 대통령 단독으로 DMZ를 찾은 것은 로널드 레이건(1983년 11월 14일), 빌 클린턴(1993년 7월 11일), 조지 W 부시(2002년 2월 20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2012년 3월 25일) 등 네 차례다. 하지만 한미 정상이 함께 방문한 적은 없다.유근형 noel@donga.com·조건희 기자}

머리뼈를 열자 무수한 뇌혈관이 드러났다. 1mm의 오차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뇌출혈 수술. 하지만 메스를 쥔 허준 명지성모병원 의무원장(44·신경외과 전문의)은 자꾸 눈물이 나와 시야가 흐려졌다. 뇌출혈 환자 수천 명을 보아온 그의 직관이 ‘이 환자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자는 9월 28일 결국 뇌사에 빠졌다. 이 환자는 허 원장의 장모 김연임 씨(71)였다. 김 씨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은퇴 후 여러 봉사활동을 했다. 퇴직금과 용돈을 모아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지만 가족들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몇 해 전 김 씨는 치매와 함께 뇌혈관이 약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준이(허 원장)와 인이(손자) 이름은 까먹으면 안 되지”라며 재활치료에 전념했다. 그렇기에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김 씨의 뇌사에 더욱 망연자실했다. 인공호흡기를 단 채 병실에 누운 김 씨의 곁을 지키던 허 원장의 아내 정현주 씨(44)는 김 씨가 10여 년 전 장기 기증을 서약한 사실을 떠올렸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을 통해 장기 기증을 희망한 사람은 뇌사에 빠지면 안구(각막), 간, 콩팥, 심장, 췌장 등 9개의 장기를 기증할 수 있다. 다만 유가족이 반대하면 고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장기 기증은 이뤄지지 않는다. 당시 김 씨의 가족은 화장(火葬)해 달라는 고인의 당부조차 지킬 엄두가 나지 않아 장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김 씨가 장기 기증을 서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지막 소원만큼은 들어드리자”며 마음을 모았다. 고령인 김 씨의 장기가 기증에 적합한지가 문제였지만 이식 수술을 맡은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은 ‘간과 콩팥이 건강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 덕에 김 씨는 40, 50대 환자에게 콩팥을 1개씩 나눠줄 수 있었다. 간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부산의 한 70대 환자에게 이식됐다. 이식 환자 3명은 모두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쳐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은 간소한 장례식을 원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빈소를 차리지 않고 부의금도 사양했다. 그렇게 조용한 장례식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입관식에 김 씨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는 한 목사가 찾아와 “고인 덕에 신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이 계단을 올라온 분은 4칼로리를 소모해 건강수명이 2분 늘었습니다.” 6일 서울 종로구의 한 빌딩 계단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행인 중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사람은 10명 중 2명꼴도 되지 않았다. 대다수는 바로 옆 에스컬레이터를 택했다. 회사원 김재희 씨(32·여)는 “늘어난 뱃살을 생각하면 걸어볼까 싶다가도 막상 계단 앞에 서면 귀찮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한국인은 지난해에도 ‘건강’에서 ‘비만’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질병관리본부는 지난해 국민 1만 명을 상대로 ‘국민건강영양조사’를 실시한 결과 19세 이상 성인 중 몸무게(kg)를 키(m)의 제곱으로 나눈 체질량지수(BMI)가 25 이상인 비만 환자는 34.8%였다고 6일 밝혔다. 이 조사를 처음 실시한 1998년 비만 환자는 26%였다. 20년 만에 약 8%포인트 늘었다. 특히 지난해 40대 남성 비만율은 49%로 절반에 육박했다. 가장 큰 문제는 식습관. 하루에 섭취하는 에너지에서 지방의 비중은 2010년 18.8%에서 지난해 22.4%로 늘었다. 같은 양을 먹어도 근육 형성과 노폐물 배출에 도움을 주는 단백질이나 칼륨 섭취는 줄었다는 얘기다. 아침식사를 챙겨 먹는 비율은 같은 기간 76.6%에서 70.4%로 줄어든 반면 ‘월 1회 이상 음주한다’는 사람은 60.5%에서 61.9%로 늘었다. 특히 여성 음주율이 43.3%에서 48.9%로 증가했다. 비만 환자 대다수는 살이 찐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만 인지율은 2001년 70.2%에서 지난해 84.4%까지 올랐다. 하지만 실천은 별개였다. 비만 환자 중 체중을 줄이려고 노력한 사람의 비율은 2010년 60.7%에서 지난해 오히려 58.8%로 줄었다. 하루 30분 이상 걷는다는 사람은 같은 기간 41.1%에서 39.6%로, 일주일에 1시간이라도 땀날 정도로 운동한다는 응답은 2014년 58.3%에서 2년 만에 49.4%로 뚝 떨어졌다. 운동을 하지 않는 이유로 미세먼지가 많거나 운동할 공간이 부족한 점을 들었다. 하지만 서울의 m³당 연평균 미세먼지(PM10) 농도는 2010년 49μg(마이크로그램·1μg은 100만분의 1g), 지난해 48μg으로 큰 변화가 없다. 이 기간에 전국 공공체육시설은 1만5179곳에서 2만2662곳으로 늘었다. 전문가들은 ‘비만 내성’을 진짜 원인으로 꼽는다. 2000년대 초중반엔 의료계를 중심으로 비만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져 다이어트 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도 효과가 크지 않자 운동 대신 검증되지 않은 ‘다이어트 약’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 문창진 건보공단 비만대책위원장(차의과대 일반대학원장)은 “정부의 비만 예방 예산은 금연 예산에 비하면 쥐꼬리 수준”이라며 “TV에선 쉴 새 없이 ‘먹방’(먹는 방송)이 나와 식욕을 자극한다. ‘비만 안전국’의 지위가 흔들리게 됐다”고 말했다. 장애인용 엘리베이터, 무빙 에스컬레이터 등 보행 편의를 높이기 위한 시설이 오히려 운동량을 줄여 건강을 해치는 ‘편의의 역설’ 현상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지하철 1∼8호선의 엘리베이터는 2010년 723대에서 올해 790대로, 에스컬레이터는 1437대에서 1649대로 늘었다. 그 결과 성인병은 증가했다. 30세 이상 고혈압 유병률은 2010년 26.8%에서 지난해 29.1%로, 당뇨병 유병률은 9.6%에서 11.3%로 높아졌다. 심근경색이나 뇌혈전증 등 뇌·심장 돌연사의 주요 원인인 고콜레스테롤혈증은 60대 여성 중 47.3%에게서 나타났다. 정부는 이르면 다음 달 초 ‘비만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범부처 차원의 대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임숙영 보건복지부 건강증진과장은 “동네 의원이나 보건소 등 지역사회에서 식생활을 관리해주고 신체 활동을 늘리는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월급이 400만 원인 회사원의 노인장기요양보험료가 내년부터 월 1000원 인상된다. 소득 하위 50% 가구는 노인요양원 이용료 부담을 월 10만 원 정도 덜고, 치매 노인 환자라면 누구나 방문 간호 서비스를 무료로 받을 수 있게 된다. 보건복지부는 이 같은 내용을 6일 4차 장기요양위원회에서 의결했다. 장기요양보험은 치매나 뇌중풍(뇌졸중) 등으로 거동이 어려운 65세 이상이 요양원에 머물거나 방문 서비스를 받을 때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다. 장기요양보험료율은 2010년 건강보험료의 6.55%로 책정된 뒤 변동이 없었지만, 내년엔 7.38%로 0.83%포인트 인상한다. 월급이 400만 원인 회사원은 내년 건강보험료율(6.24%)에 따라 장기요양보험료 본인 부담분(절반은 사업장 부담)이 9210원이 된다. 올해(8174원)보다 1036원 정도 늘어난 것이다. 정부는 치매 환자를 위한 ‘인지지원등급’을 신설한다. 기존엔 치매가 있어도 신체 기능이 떨어지지 않으면 지원을 받을 수 없었지만, 내년부턴 경증 치매 환자도 등급 판정을 받은 뒤 첫 2개월간 최대 4차례 방문 간호 서비스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그동안 기준 중위소득(소득 순으로 줄을 세웠을 때 정가운데)의 50% 이하(올해 4인 가구 기준 월 소득 223만 원) 수급자에게만 적용된 본인부담금 경감 혜택은 중위소득 100%(월 소득 447만 원)로 확대한다. 새로 혜택을 받는 수급자는 9만4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예를 들어 장기요양 3등급 환자가 요양원에 입소하면 월 부담이 기존 30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10만 원 정도 줄어든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최근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깜짝 초겨울’이 찾아오면서 급성심근경색증 등 심혈관 질환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배우 김주혁 씨가 교통사고로 숨지기 전 가슴 부분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했다는 뉴스가 전해진 뒤 “심장 발작이 오면 강하게 기침하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미리 예방하고 빨리 응급실을 찾는 것이 최선이다. 신경과 및 심장내과 전문의들에게서 심혈관 질환의 대표적 증상과 대처법을 들어봤다. 혈관은 추위를 심하게 탄다. 급격한 기온 변화는 동맥 혈관을 수축시키고, 혈압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찬바람 탓에 혈액의 응집력까지 커지면 혈전(혈관 속에서 피가 굳어진 덩어리)이 혈액의 흐름을 차단할 위험이 높아진다. 산소를 온몸에 날라야 할 혈액이 심장과 뇌에 도달하지 못하고 멈추면 급성심근경색증이나 뇌중풍(뇌졸중)이 생긴다. 몇 분 만에 심장 근육과 뇌세포가 손상돼 빠르게 의식을 잃는다. 이런 위험은 혈관 탄력이 떨어지는 50대 이후 높아진다. 원래 고혈압을 앓던 환자는 혈압이 급작스럽게 변할 가능성이 더 크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급성심근경색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 60만4576명 중 40대는 5만5863명이었지만 50대는 12만4175명, 60대는 12만1190명이었다. 미국에선 급성심근경색증 등 심혈관 질환으로 갑자기 사망하는 사람이 전체 인구 10만 명당 40명 수준이다. 국내엔 아직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학계는 미국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고 있다. 급성심근경색증의 대표적 증상은 가슴 전체를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이다. 흔히 호흡 곤란과 식은땀, 구역질을 동반한다. 특히 통증이 20분가량 이어지거나 등이나 팔, 턱까지 통증이 번지면 즉시 병원으로 가야 한다. 증상이 처음 나타난 지 1시간 내에 혈전을 녹이는 약물을 투여하고 풍선으로 막힌 혈관을 뚫어 주는 ‘관동맥 풍선확장술’을 시행하면 사망 위험을 절반 이하로 낮출 수 있다. 심혈관 질환을 막으려면 평소에 정기적으로 심장 초음파, 심전도, 혈압 등을 검사해 이상 징후를 예측하는 게 좋다. 술과 담배는 독(毒)이다. 추운 날엔 새벽 운동이나 등산을 삼가고, 50대 이상은 외출 시 모자를 쓰는 등 보온에 신경을 써 갑작스러운 체온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퍼진 ‘기침 심폐소생술’이라는 응급요법은 이미 오래전 의료계에서 폐기했다. 기침을 강하게 반복해 심장에 압력을 가하라는 취지인데, 실제론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기침을 하기 위해 숨을 참다가 증상이 오히려 악화할 공산이 크다. 기침 심폐소생술의 출처로 소개된 미국심장학회는 2010년 “기침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즉시 주변에 도움을 청하라”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유성욱 고려대 안암병원 신경과 교수는 “고혈압 등 위험 인자를 가진 40대 이상이라면 심혈관 질환 예방을 위해 소금은 적게 먹고, 칼륨이 많이 든 채소 등을 주로 섭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부모를 가족이 부양해야 한다는 인식이 20년도 채 안 돼 3분의 1로 줄었다. 김유경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가족정책연구팀장(연구위원)은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를 분석한 결과, “부모 부양을 누가 담당할 것이냐”라는 물음에 ‘가족’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1998년 89.9%였다가 지난해 30.6%로 떨어졌다고 3일 밝혔다. 반면 ‘사회 책임’이라는 응답 비율은 같은 기간 2%에서 51%로 높아졌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응답도 8.1%에서 18.7%로 높아졌다. 특히 가족 중 ‘장남이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응답은 22.4%에서 1.7%로 떨어진 반면 ‘아들 딸 구분 없이 모든 자녀에게 책임이 있다’는 응답은 15%에서 22.1%로 올랐다. 김 연구위원은 “전통적 효(孝)를 기반으로 하는 가족주의가 약해진 반면 국가와 사회가 노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크게 증가해 주된 가치관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했다.조건희기자 becom@donga.com}
매일같이 코를 골면 성인병 위험이 배 이상으로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강대희 교수팀은 2009~2013년 한국인 코호트에 등록된 성인 7만2885명을 조사한 결과 1주일에 6일 넘게 코를 고는 남성의 대사증후군 위험이 코를 전혀 골지 않는 남성의 2.1배였다고 3일 밝혔다. 코를 고는 여성의 대사증후군 위험은 1.5배였다. 대사증후군은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비만 등 성인병 위험 요인이 한꺼번에 높아지는 상태를 말한다. 특히 코를 자주 고는 사람의 복부비만 위험은 남성 2.6배, 여성 2.9배였다. 고중성지방혈증(남성 1.6배, 여성 1.3배)과 낮은 고밀도콜레스테롤혈증(남성 1.2배, 여성 1.2배), 고혈압(남성 1.6배, 여성 1.3배)과 당뇨병(남성 1.3배, 여성 1.3배) 위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구팀은 코골이가 심해 수면무호흡증으로 이어지면 고혈압, 부정맥, 당뇨병, 뇌졸중 등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또, 수면장애가 교감신경을 활성화해 인슐린 저항성을 증가시키거나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를 유도해 심혈관계를 직접 자극할 가능성도 있다는 게 강 교수의 설명이다. 이번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환경연구 및 공중보건 국제저널’ 최근호에 실렸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는 다문화가족 자녀 수가 올해 처음으로 결혼이주민 수를 앞지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문화 2세대’ 사회의 도래다. 31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국내 다문화가족에서 태어난 출생아는 2008년 1만3443명에서 2015년 1만9729명으로 늘었다. 연평균 898명씩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같은 기간 결혼 이주민은 연간 3만6629명에서 2만2462명으로 연평균 2023명씩 줄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서 연말이나 늦어도 내년 초 다문화 인구의 자체적인 증가폭이 결혼이주 증가폭을 앞설 것으로 보인다. 2021년에는 국내에 체류하는 전체 결혼이주민보다 이들의 자녀 수가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문화 2세대의 특징은 언어 능력이 뛰어나고 향학열이 높다는 점이다. 여가부가 2015년 8∼24세 다문화 자녀 8만 명을 조사한 결과 외국어를 평균 이상으로 잘한다는 응답이 44.5%였다. 78.2%는 대학 진학을 희망했다. 하지만 다문화사회 변화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다문화 학생의 영재교육을 지원하는 교육부의 ‘글로벌브릿지’ 사업 예산은 올해 15억2000만 원에서 내년 12억 원으로 오히려 줄었다. 전문가들은 1981년부터 다문화 인구가 많은 지역의 공교육기관을 대상으로 재정 지원을 늘리는 ‘우선교육지대’ 정책을 시행해온 프랑스처럼 다문화 영재 양성책을 늘려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최현미 평택대 사회복지학과 교수(한국다문화가족학회 상임이사)는 “다문화 인재가 비(非)다문화가정의 아이들과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다문화 지원책을 보완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31일 오후 국회 본청 601호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실 스크린에 카카오톡 대화 캡쳐 화면이 떴다. 복지위 국정감사 증인석에 앉아 화면을 보던 이안소영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이 당혹스러운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캡쳐 화면은 이안 처장이 10월 17일 ‘생리대 위해성 논란’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전 또 다른 증인인 김만구 강원대 환경융합학부 교수에게 건넨 ‘예상 문답’이었다. 여성환경연대가 생리대 위해성 실험을 맡은 김 교수에게 답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자유한국당 김승희 의원이 공개한 카카오톡 대화 내용에 따르면 이안 처장은 10월 15일 오후 2시경 김 교수에게 “(17일 국감에서 나올) 예상 질문”이라며 엑셀 파일을 보냈다. 엑셀 파일에는 이 처장 측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예상 문답 4건이 적혀 있었다. 생리대의 휘발성유기화합물(VOCs) 검출 실험을 맡은 이유를 물으면 ‘여성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다른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로서 여성환경연대를 돕고 싶었다’고 답변하라는 내용 등이다. 실험의 의미를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으면 ‘이번 조사는 기초 예비조사로 책임 당국인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이 자료를 활용해 제대로 전수 조사하고 여성 건강 대책을 마련할 거라고 기대했다’고 답변하면 된다는 내용도 담겼다. ‘핵심 답변’ 옆에는 ‘자세한 내용(교수님 준비)’이라는 제목의 빈칸도 마련돼 있었다. 김 교수는 엑셀 파일을 받은 다음날 이안 처장에게 “저는 있는 그대로 소신껏 답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김 의원은 이안 처장에게 “국감에 출석하는 증인이 다른 증인의 답변을 정해서 알려주는 행위가 타당하냐”고 물었다. 이안 처장은 “(국감 출석은) 생소한 절차라서 의논하고 싶었다. (사전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날 카톡 대화 내용을 국회에 제출한 당사자가 바로 김 교수 본인이라는 사실이다. 김 교수는 일부 복지위 위원들에게 이안 처장과의 대화 내용을 제공하며 “공개해 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3월부터 생리대 실험 진행뿐 아니라 결과 발표 기자회견까지 줄곧 여성환경연대와 함께 해온 김 교수가 사적인 대화 내용을 공개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각에선 김 교수와 여성환경연대의 관계가 틀어진 것 아니냐는 뒷말도 나온다. 이안 처장은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김 교수와 최근 자주 연락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불만을 제기하거나 설전을 벌인 적은 없다”고 했다. 반면 김 교수는 “나는 모든 걸 공개하는 사람이다. 때가 되면 얘기하겠다”고 말했다. 향후 ‘진실 공방’을 예고한 셈이다. 이에 앞서 식약처는 김 교수와 여성환경연대 발표 이후 ‘발암물질 함유 생리대’ 논란이 거세지자 국내 생리대 666종을 수거해 VOC 전수 조사에 나섰다. 이어 9월 “생리대를 하루 7.5개씩, 한 달에 7일간, 평생 사용하더라도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고 결론 내리면서 “김 교수의 시험 결과는 다른 연구자의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이에 김 교수는 “식약처 결과는 대국민 사기”라며 반발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러시아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파나마료브 다니엘 씨(22)는 어릴 적 옥탑방에 사는 형편이라 학원에 갈 엄두를 못 냈다. 성적도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LG와 함께하는 사랑의 다문화학교’에 참여한 뒤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 평소 접하지 못한 대학 교수진의 수업과 대학생 멘토의 조언은 입시 준비에 큰 도움이 됐다. 현재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학생이자 해병대 입대를 앞둔 학군사관후보생(ROTC)인 다니엘 씨는 “러시아에 진출할 연예기획사의 일원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LG는 2011년부터 부모 나라의 현지어와 한국어 등 이중 언어에 소질을 보이고 과학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낸 다문화 청소년에게 2년 동안 한국외국어대, KAIST 교수진의 교육을 받도록 지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제 과학 엑스포 수상자, 명문대 입학생 등 수료생 250명을 배출했고 온라인과정 수강생은 800명이 넘었다. 이 같은 다문화 영재 양성 사업은 지금껏 기업이 주로 담당해 왔지만, 내년부턴 정부의 관련 정책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30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우리 사회에서 지도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고급 인력을 적극 양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다문화 자녀의 대학 진학률이 2012년 53.3%에서 2015년 68.1%로 상승하는 등 향학열이 대단하고, 베트남 등 신흥공업국과의 교류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가부는 ‘다문화 이중 언어 인재 데이터베이스(DB)’ 등록자를 현행 369명에서 1000명 이상으로 대폭 늘릴 예정이다. 교육부도 다문화 학생에게 영재교육을 지원하는 ‘글로벌브릿지’ 사업 참여 대학을 확대한다. 이 같은 내용은 2개월 뒤 국무총리 산하 다문화가족정책위원회를 거쳐 ‘제3차 다문화가족정책 5개년(2018∼2022년) 기본계획’에 반영될 예정이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앞으로 다문화가정을 돕는 데 더욱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수상 소감을 말하던 쑨커후이 씨(40·여)가 심호흡을 한 뒤 우렁차게 소감을 마무리했다. 30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LG와 함께하는 동아 다문화상(賞)’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쑨커후이 씨의 소감은 짧고 강렬했다. 올해 7회를 맞은 ‘LG-동아 다문화상’은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한 다문화가족, 그들을 도운 숨은 공로자를 발굴해 격려하는 상이다. 다문화가족상 우수상을 받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쿠지바예바 지요다 씨(27·여)는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게 쉽지 않은데 이번 상이 큰 위로가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행사엔 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장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이자스민 물방울나눔회 사무총장, 양민정 한국외국어대 다문화교육원장, 김순덕 동아일보 논설주간 등이 참석했다. 남 위원장은 “이젠 ‘다름’이 차별이 아니라 공존으로 이어지는 사회가 돼야 한다”며 “오늘 수상한 분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공존하는 사회로 갈 수 있는 것”이라며 축하했다. 정 장관은 “미래의 소중한 자산인 다문화가족이 성장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대상을 수상한 중국 출신 쑨커후이 씨는 2006년 남편 한종복 씨(45)를 만나 결혼했다. 경기 양평군의 한 폐교에 마련한 신혼집은 겨울이면 코가 얼 정도로 추웠다. 그래도 쑨커후이 씨는 한국에 온 뒤 한 번도 “넌 할 수 없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주변의 한결같은 응원 덕에 2011년부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상담봉사를 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늘었다. 지난해 한국방송통신대에 입학해 중어중문학과에 다니고 있다. 최근 한 씨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지만 쑨커후이 씨는 꿋꿋하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겨낼 수 있다”고 했다. 다문화가족상 우수상을 수상한 노레번 씨(34·여)는 베트남 호찌민대를 졸업했다. 2006년 4월 성희준 씨(43)와 결혼해 진우 군(9), 유진 양(6) 남매를 키우면서 한국어 실력을 갈고닦았다. 2014년 전주대 대학원 행정학과를 수료했고 올해부터 전주대 국제교류원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하며 베트남 유학생들에게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또 다른 우수상 수상자인 지요다 씨는 남편 유의재 씨(31)와 현지의 한국어 학원에서 만났다. 2013년 결혼해 한국에 온 뒤 특기를 살려 다른 다문화가족을 위한 봉사에 뛰어들었다. 아들 기선 군(3)에 이어 한 달 전 둘째 주선 양을 품에 안은 부부는 “최고의 선물”이라며 기뻐했다. 일본 출신 후지와라 마유미 씨(52·여·우수상)는 남편 유태섭 씨(59)가 2008년 지체장애를 얻은 뒤 생계를 도맡았다. 면사무소에서 민원봉사실 복지도우미로 일하며 받은 자활근로 수당으로 아들 승균 씨(20)와 딸 연미 양(18)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특별상을 받은 중국 출신 진호연 군(18)은 아버지 이선남 씨(53) 같은 용접 기술자가 되기 위해 한국폴리텍 다솜고등학교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다. 행사는 다문화가족 어린이로 구성된 ‘레인보우 합창단’의 축하공연으로 마무리됐다. 다문화가족상 대상과 우수상(3명) 수상자에게는 각 500만 원, 특별상 수상자에게는 300만 원의 상금이 주어졌다. 대상 수상자에겐 모국 방문 비용도 지원된다. 공헌상 단체 부문 상금은 1000만 원, 개인상은 500만 원이다.조건희 becom@donga.com·김호경 기자 ● 동아 다문화賞 수상자▽ 가족상―대상: 쑨커후이 씨 가족(경기 양평군·중국 출신)―우수상: 노레번 씨 가족(전북 전주시·베트남 출신), 쿠지바예바 지요다 씨 가족(서울 성북구·우즈베키스탄 출신), 후지와라 마유미 씨 가족(전남 고흥군·일본 출신)▽ 특별상: 진호연 군 가족(충남 천안시·중국 출신)▽ 공헌상 개인 원희영 씨(이주 여성 상담사·베트남 출신), 김영조 씨(다문화가족 방문교육지도사)▽ 공헌상 단체 사회적 기업 샐러드(다문화 극단), GS스포츠 FC서울(다문화 어린이 축구교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초등학교 인근에 거주하는 B 씨(26)는 3년 전 경기 수원시 권선구에서 한 여고생을 강제추행하려다가 검거돼 2015년 7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3월까지만 해도 B 씨와 같은 성범죄자는 출소 후 10년간 PC방이나 학원 등 아동 청소년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에 취업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재범 위험이 높은 성범죄 전과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B 씨는 현재 학원은 물론이고 어린이집이나 청소년쉼터에서도 일할 수 있다. 심지어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개인과외를 하겠다며 지방교육청에 교습자로 등록해도 제재를 받지 않는다.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3월 “죄질과 무관하게 일괄적으로 10년간 취업을 제한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위헌결정을 내려 해당 조항이 효력을 잃었는데도 국회는 법 개정에 나 몰라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29일 법무부와 대법원에 따르면 강간, 추행, 불법촬영(몰래카메라) 등 청소년성보호법 및 성폭력처벌법 위반으로 기소돼 1심에서 벌금형 이상을 선고받은 사람은 2012년 4738명에서 지난해 1만1168명으로 늘었다. 최근 5년간 연평균 성범죄자는 8564명이다. 이들이 종전처럼 10년간 취업제한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현재 8만 명이 넘는 성범죄자가 취업제한 제도의 공백을 틈타 활보하고 있는 셈이다. 학원장이나 어린이집 원장 등 시설장은 헌재의 결정과 무관하게 매년 자신의 사업장에서 일하는 직원이 성범죄자인지 관할 경찰서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헌재 결정 이후 이 같은 감시는 느슨해졌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이 여성가족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조회 의무를 어겨 과태료 처분을 받은 시설은 2013년부터 올해 8월까지 총 1239곳이었다. 헌재 선고 전인 2013∼2015년엔 연평균 220곳이었지만 지난해 361곳으로 급격히 늘었다. 반면 성범죄 경력을 숨기거나 확정 판결이 나기 전 취업제한 시설에 들어갔다가 뒤늦게 드러나 해임된 성범죄자의 수는 2013∼2015년 연평균 66명에서 지난해 14명으로 줄었다. 올해는 10명뿐이다. 기관들은 성범죄 여부를 조회하지 않고, 이 때문에 해임된 성범죄자가 줄고 있다는 건 그만큼 성범죄자가 청소년들과 가까이 있다는 의미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취업제한 조항을 보완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판사가 성범죄의 재범 위험성을 개별적으로 판단해 취업제한 여부를 최대 30년 기간 내에서 차등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성범죄자 취업제한의 정당성은 인정되지만 적용 여부와 기간은 개별적,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헌재 판결에 따른 보완책이다. 정부는 위헌 결정 이래 새 법 시행 전까지 성범죄를 저지른 전과자가 취업제한의 사각지대로 숨어들지 못하도록 이들의 관련 시설 취업을 2∼10년의 범위 내에서 제한하도록 특례도 만들었다. 정부안은 올해 3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를 통과해 법제사법위원회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 법안은 7개월째 잠들어 있다. 법사위 제2소위원회가 이 법안을 안건으로 올리지 않고 있어서다. 제2소위원회 소속 일부 위원들은 “헌재가 ‘침해(직업 선택 자유)의 최소성을 어겼다’며 위헌 판결을 했는데, 개정안도 마찬가지”라며 상정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가위원장인 남인순 의원은 “심의가 늦어질수록 우리 아이들이 성범죄자에게 노출될 위험은 커진다”며 신속한 처리를 주장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분유를 들었다 놓기를 여러 번,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지만 굶고 있는 아기를 생각하면 돌아설 수가 없었다. ‘몰래 가방에 넣어 가면 모르지 않을까….’ 스물두 살 대학생이던 남미화 씨(36·여)가 잘못된 선택을 하기 직전, 가게 주인이 말을 건넸다. “연우(첫째 딸 이름) 엄마, 그냥 가져가고 (분윳값은) 다음 달에 줘.” 남 씨는 그날 분유를 아이에게 먹이면서 ‘살림이 피면 꼭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남 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했다. 뇌출혈로 지체장애가 생긴 어머니를 보살펴야 했다. 섬유공장에 취직해 생활비를 벌면서 작가의 꿈을 키워갔다. 뒤늦게 고졸 검정고시를 거쳐 한 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이듬해에 아버지까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생활비 70만 원은 방세를 내고 교통비를 쓰고 나면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역 유지의 자서전을 대필해주는 일을 하면서 그나마 형편이 차츰 나아졌다. 글 솜씨를 인정받아 퇴임 연설을 다듬어 달라고 요청하는 공직자나 단체장이 생겼다. 하지만 4년 전 또 한 번 고비가 찾아왔다. 우울증을 앓던 둘째 언니가 조카와 함께 숨을 끊었다. 그들의 시신을 발견한 게 남 씨였다.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남편이 “항상 낮은 곳을 보며 살자는 초심을 잊지 말자”고 얘기했다. 남 씨는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다른 이의 인생을 글로 옮기다 보면 ‘나도 이렇게 베풀며 살아야지’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 더 미룰 이유가 없었다. 남 씨는 지난해 2월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160만 원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5년간 총 1억 원을 기부할 예정이다. 세 아이를 키우는 동시에 대필 작업을 하다가도 짬이 나면 복지시설을 찾아가 기타 연주 봉사활동을 한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자란 열 살배기 둘째 아들은 최근 돼지저금통을 인근 복지센터에 가져다줬다. 남 씨가 후원하는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이가 어느 날 보내온 100점짜리 성적표를 보고 내 아이의 일처럼 기뻐하는 순간, 그를 괴롭히던 환각이 사라졌다. “주위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면 후원도 봉사도 전혀 힘들지 않아요.” 남 씨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고액후원자 모임 ‘그린노블클럽’ 참여를 희망하는 후원자는 재단 상담센터(1588-1940, www.childfund.or.kr)로 문의하면 된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이 질환은 ‘티킹 타임 봄(시한폭탄)’이다. 미국은 이 질환에 대처하기 위해 이미 암, 심장병,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보다 더 많은 연구 예산을 배정했다. 25일 서울 용산구에서 만난 린지 패러 보스턴대 의대 석좌교수(59·사진)가 경고한 이 질환은 ‘치매’다. 그는 “고령화가 심한 한국 등에서는 정부가 치매 연구에 미리 투자하지 않으면 재앙이 찾아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패러 교수는 미국 알츠하이머병 유전학 컨소시엄(ADGC)의 연구책임자로 조선대 치매국책연구단이 진행 중인 치매 조기 예측 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가 활동 중인 ADGC는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노화연구소가 2008년 설립한 치매 유전자 전담 연구 컨소시엄이다. 의료기관 15곳이 수집한 치매 환자 등 3만여 명의 유전체 정보와 진료기록을 관리해 치매 진단 및 치료 기술을 개발하는 게 목표다. 미 연방정부로부터 매년 500만 달러(약 56억 원) 이상을 지원받는다. 패러 교수는 국내 연구진이 한국인 1000명의 뇌 자기공명영상(MRI) 자료로 개발 중인 진단 소프트웨어에 대해 “흥분된다(excited)”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환자의 인종에 따라 치매의 발병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각각 다른데 ‘맞춤형 치료제’를 개발하려면 해당 유전자를 규명하고 변이 과정을 파악하는 게 필수이기 때문이다. 패러 교수는 “치매 발병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 유전자 변이는 백인보다 동아시아인에게서 10배 이상 자주 발견되기도 한다”며 “조선대와 ADGC가 협력해 서로의 데이터를 대조하면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각국의 치매 연구가 곧 ‘치매 치료 주권’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암시했다. 미국과 유럽은 치매 유전자와 그에 맞춘 치료 기술을 개발할 때 백인 환자의 유전체를 중심에 두기 때문에 한국인 등 동아시아인을 위한 연구는 후순위로 밀린다는 얘기다. 실제로 ADGC는 백인과 히스패닉 인구의 유전자 특성 연구에 집중하다가 최근에야 흑인과 동아시아인의 표본을 확보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다음 달부터 실시할 ‘치매 국가 책임제’가 성공하려면 치료 및 돌봄 인프라뿐 아니라 연구에도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패러 교수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를 졸업한 뒤 인디애나대에서 의학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 후 하버드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보스턴대 의생명유전학과장을 맡고 있다. 그는 ‘네이처’ 등 최상급 학술지에 논문 400여 편을 발표해 치매 분야의 최고 수준 권위자로 꼽힌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