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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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칼럼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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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선화공주는 무왕 옆에 묻혔다?

    《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중 하나로 여겨지는 선화공주와 서동(훗날 백제 무왕)의 사랑은 과연 실재했는가. 역사학계의 오랜 미스터리를 풀 열쇠 하나가 발견됐다. 무왕이 한때 사비에서 천도를 계획했던 전북 익산 쌍릉에서다. 새로 밝혀진 목관 장식 유물을 통해 쌍릉에 무왕과 나란히 잠든 여인은 2009년 미륵사지 서석탑 사리봉안기 기록에 등장하는 사택왕후가 아님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쌍릉 소왕묘의 주인은 누굴까. 학계는 이번 발견으로 설화 속 인물로 전락할 뻔한 선화공주가 다시 역사의 무대로 올라올 수 있게 됐다고 평가한다. 》옛날에 ‘마를 캐는 아이(薯童·서동)’라고 불린 소년이 있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던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서라벌로 향한다. 첫눈에 반한 그는 공주를 아내로 맞겠다고 결심하고 꾀를 하나 낸다. ‘선화공주는 남몰래 밤마다 서동을 만난다’는 가사의 ‘서동요(薯童謠)’를 아이들이 부르도록 한 것. 딸을 오해한 진평왕은 공주를 귀양 보냈고, 궁 밖에서 기다리던 서동은 그녀를 유혹한다. 신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서동은 훗날 백제 30대 무왕(?∼641)이 된다. 삼국유사와 향가인 서동요가 전하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뛰어넘은 이 러브 스토리는 사실일까. 역사학계의 오랜 수수께끼를 풀 흥미로운 단서 하나가 나왔다. 선화공주가 실제 존재했으며 무왕과 나란히 익산 쌍릉(雙陵)에 묻혀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2009년 미륵사지 서석탑의 사리봉안기 발견으로 선화공주가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역사학계의 다수설을 뒤집는 내용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출처가 알려지지 않은 금동 유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익산 쌍릉의 하나인 소왕묘(왕비가 묻힌,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왕릉)에서 출토된 ‘금동 밑동쇠’(金銅製座金具·목관 뚜껑과 측판에 붙는 널꾸미개를 고정시켜 주는 장신구)라는 사실을 최근 밝혀냈다. 일제강점기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과 당시 작성된 유물 목록을 확인한 결과다. 이병호 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이 밑동쇠와 딱 들어맞는 소왕묘 출토 ‘금동 널꾸미개’(金銅製棺裝飾·목관의 뚜껑과 측판을 연결해주는 장신구)를 찾아냈으며, 이것이 무왕이 묻힌 대왕묘의 널꾸미개에 비해 문양과 제작기법에서 시기적으로 더 앞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왕비가 묻힌 소왕묘가 무왕의 대왕묘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이는 무왕과 함께 쌍릉에 묻힌 왕비가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사택(沙宅)왕후가 아님을 방증한다. 왕후가 왕보다 나중에 죽었는데 묘가 먼저 만들어질 순 없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택왕후는 무왕보다 1년 뒤인 서기 642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학예관은 “쌍릉 소왕묘는 사택왕후의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소왕묘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 학예관은 ‘백제 사비기 익산 개발시기와 그 배경’ 논문에서 소왕묘에서 나온 금동 밑동쇠가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인근의 백제 왕릉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부부묘 형태다. 고려사 지리지와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익산 쌍릉에 묻힌 인물이 무왕과 왕후라고 적혀 있다. 이 학예관은 “7세기 전반에 죽은 인물로 무왕의 또 다른 왕비였던 선화공주가 묻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관련 문헌이나 유물에 적시된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이외에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의 미륵사지 서(西)석탑의 사리봉안기와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화공주가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백제와 신라가 전투를 벌이던 당시 상황에서 백제가 신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논리도 한몫했다. 그러나 선화공주가 실존했다고 보는 학자들은 미륵사가 ‘3탑 3금당’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사찰이었고, 사택왕후의 발원을 담은 사리봉안기가 미륵사의 서쪽 석탑에서만 나온 사실을 주목한다. 이미 사라졌지만 지금까지 흔적이 남아 있는 미륵사지 중앙 목탑에 선화공주의 발원 기록이 적힌 사리봉안기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조선시대와 달리 주자성리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왕이 정비(正妃)를 여러 명 거느릴 수 있었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고려 태조 왕건은 정비만 6명을 뒀다”며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모두 무왕의 정비였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와 관련해선 오히려 전시를 맞아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왕실이 혼인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노 교수는 “정략적으로 선화공주를 왕비로 들였을 개연성이 크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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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산서원, 인문학으로 살린 ‘21세기 서당’… 동서양 고전 섭렵한 리더 육성

    아산서원은 ‘21세기형 서원’으로 불리는 독특한 청년 교육기관이다. 철학과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동서양 고전을 섭렵한 리더를 길러내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아산정책연구원과 아산나눔재단이 2012년 8월 공동으로 설립했다. 조선시대 서원 교육방식에 영국 옥스퍼드대의 철학·정치·경제학(PPE) 교육과정을 접목해 깊이 있는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국제 감각까지 갖춘 제너럴리스트를 육성하겠다는 것. 아산서원은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매년 60명을 선발하는데 처음 5개월 동안은 서원 내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인문학 교육을 받게 된다. 수업은 모두 토론식으로 진행된다. 이후 미국 워싱턴과 중국 베이징의 유명 싱크탱크에서 5개월간 인턴십을 경험한다.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과 브루킹스 연구소 등이 인턴십 지원 리스트에 올라 있다. 해외 인턴은 기본적인 자료조사는 물론이고 학술대회 참석까지 다양한 직무를 체험할 수 있다. 교육에 필요한 숙식비와 항공료, 인턴십 체재비 등 일체의 비용을 서원에서 지원한다. 구체적인 커리큘럼은 △철학(동양·서양 정치사상) △정치(국제정치와 정치일반) △경제(국제 정치경제) 등 인문학을 기반으로 영어와 인성교육, 봉사활동, 문화체험, 스포츠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된다. 또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수사학’ ‘천자문과 격몽요결’ ‘조선왕조실록’ ‘열림과 닫힘’ ‘영화로 읽는 동아시아 문화’ ‘건축의 공간사회학’ 등 독특한 과목을 추가로 개설했다. 탄탄한 교육과정만큼 학사관리도 엄격하다. 과목별 시험에서 2과목 이상 낙제하면 서원을 떠나야 한다. 과제 분량도 만만치 않아 원생들 사이에서는 대학입시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푸념도 나온다. 졸업생들은 인문학 강연 행사인 ‘아산서원 인문학 로드쇼’와 지역사회 청소년과 지식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인 ‘아산서원 청소년 인문학 교실’ 활동을 통해 봉사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김석근 아산서원 부원장은 “현실과 괴리된 인문학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살아 숨쉬는 인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산서원은 8기생 모집에 앞서 5월 15일 입학설명회를 열 예정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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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가 작사가, 안창호냐 윤치호냐

    안창호냐, 윤치호냐. 애국가 작사가를 둘러싸고 오랜 기간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공방이 31일 흥사단 주최 토론회에서도 재연될 것으로 전망된다. 흥사단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애국가 작사자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발표회를 이날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개최한다. 이 자리에는 윤치호 작사설과 안창호 작사설, 공동 작사설이 모두 다뤄지게 된다. 안창호설을 주장하고 있는 안용환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애국창가집 무궁화가에 나오는 ‘오백년’ ‘천만세(인)’ 단어가 1898년 1월 협성회보 창간호 논설문에도 등장하는 점에 주목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무궁화가는 애국가의 원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 교수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는 협성회보를 만든 배재학당 일에 깊이 관여했으며 논설문도 직접 썼다는 것이다. 또 애국창가집에서 도산이 작사한 ‘권학가’ 제목 밑에 ‘무궁화가와 한 곡조’라는 주석이 달린 점과 ‘권학가’ ‘학도가’에 쓰인 어구가 ‘무궁화가’에 등장하는 점 등을 들어 도산이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치호설 쪽은 1908년 윤치호가 펴낸 ‘찬미가’에 현재의 애국가 가사와 비슷한 ‘무궁화가’가 들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앞쪽이 뜯겨 나가 작성연도 등이 불확실한 애국창가집과 달리 찬미가는 작자와 연도가 명확히 기재돼 있다는 것이다. 또 미국 에모리대에 보관되어 있는 애국가 가사지에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적혀 있다는 사실도 내세우고 있다. 일각에서는 애국가가 특정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집단 창작의 결과물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 토론회에서는 안 교수를 비롯해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준혁 한신대 교수, 윤정경 애국가 연구가가 주제발표를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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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日관계 꽁꽁 언 지금 전향적 접근 더욱 필요

    “일본 고고학계가 한반도와 만주에서 군부의 도움으로 약탈적 발굴을 하고 있다는 게 수시간에 걸친 수업의 골자였습니다.”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일본 스루가다이대 명예교수는 1945년 4월 도쿄대 문학부 입학 직후 들었던 고고학 강의의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털어놨다. 당시 충격은 아라이 교수가 한국 문화재 반환 운동에 적극 나서는 계기가 됐다. 현재 ‘한국·조선 문화재 반환문제 연락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아라이 교수는 국회 증언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2011년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이끌어 낸 주역이다. 그는 “올해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당시 체결한 문화재 반환 협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71)가 최근 펴낸 ‘한일 교류 2천년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나남·사진)에는 아라이 교수를 비롯해 한일관계의 접점에 있는 일본 지식인 23명의 생생한 육성이 담겨 있다. 아시아연구기금 프로젝트의 하나로 정 교수는 2년간 한일 양국을 오가며 전직 주한 일본대사, 케이팝 전도사, 역사학자, 문화 교류 인사 등을 인터뷰했다. 그는 “양국 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상황에서 한일 교류 관련 책을 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우려도 있었으나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미래지향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비록 일제 강점기를 겪었지만 역대 한일관계에서는 선린 교류의 역사가 더 길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제마을’로 불리는 일본 규슈 미야자키 현 난고(南鄕) 촌. 이곳에는 백제왕을 신으로 모신 미카도(神門)신사가 있고 백제왕을 기리는 마을축제 ‘시와스마쓰리(師走祭り)’가 1300년 동안 매년 열려 왔다. 정 교수가 지난해 이 축제 현장에서 만난 하라다 스미오(原田須美雄) 전 난고 촌 기획관광과장은 “인구 2000명의 산골 마을인 이곳이 백제마을을 관광자원화하면서 충남 부여와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들이 상호 방문하는 등 한일 교류 활동이 활발하다”며 “마을 사람들은 아베 신조 총리가 어째서 잘못된 역사인식을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 책은 양국의 역사를 되새기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한일관계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공생할 방안을 모색했다. 고바야시 요시아키(小林良彰) 게이오대 교수는 “수년 전까지 대부분의 일본 방송에서 매일 볼 수 있었던 한국 드라마와 가수들이 사라지고 있다”며 “국가 간 관계 악화가 민간 교류의 축소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주한 일본대사를 지낸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일본국제교류기금 고문은 “위성 발사나 해저터널, 해양목장 건설처럼 양국이 함께 참여할 커다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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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고고학계가 한반도-만주서 약탈적 발굴” 강의 충격에…

    “일본 고고학계가 한반도와 만주에서 군부의 도움으로 약탈적 발굴을 하고 있다는 게 수 시간에 걸친 수업의 골자였습니다.”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일본 스루가다이대 명예교수는 1945년 4월 도쿄대 문학부 입학 직후 들었던 고고학 강의의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털어놨다. 당시 충격은 아라이 교수가 한국 문화재 반환 운동에 적극 나서는 계기가 됐다. 현재 ‘한국·조선 문화재 반환문제 연락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아라이 교수는 국회 증언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2011년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그는 “올해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당시 체결한 문화재 반환 협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71)가 최근 펴낸 ‘한일 교류 2천년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나남)에는 아라이 교수를 이 같은 얘기를 비롯해 한일관계의 접점에 있는 일본 지식인 23명의 생생한 육성이 담겨있다. 아시아연구기금의 프로젝트의 하나로 정 교수는 2년간 한일 양국을 오가며 전직 주한 일본대사, 케이팝 전도사, 역사학자, 문화교류 인사 등을 인터뷰했다. 그는 “양국 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상황에서 한일 교류 관련 책을 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우려도 있었으나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미래지향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비록 일제강점기를 겪었지만 역대 한일관계에서 선린 교류의 역사가 더 길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제마을’로 불리는 일본 규슈 미야자키현의 난고손(南鄕村). 이곳에는 백제왕을 신으로 모신 미카도 신사(神門神社)가 있고 백제왕을 기리는 마을축제인 ‘시와스마쓰리(師走祭り)’는 1300년 동안 매년 열려왔다. 정 교수가 지난해 이 축제 현장에서 만난 하라다 스미오(原田須美雄) 전 난고손 기획관광과장은 “인구 2000명의 산골 마을인 이곳이 백제마을을 관광자원화하면서 충남 부여와 자매 결연을 맺고 학생끼리 상호 방문하는 등 한일교류를 활발히 해왔다”며 “마을 사람들은 아베 총리가 어째서 잘못된 역사인식을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 책은 양국의 역사를 되새기는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한일관계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공생할 방안을 모색했다. 고바야시 요시아키(小林良彰) 게이오대 교수는 “수년 전까지 대부분의 일본 방송에서 매일 볼 수 있었던 한국 드라마와 가수들이 사라지고 있다”며 “국가간 관계악화가 민간 교류의 축소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주한 일본대사를 지낸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일본국제교류기금 고문은 “위성발사나 해저터널·해양목장 건설처럼 양국이 함께 참여할 커다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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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등 백탑파, 그들도 결국 주자학에 충실했다

    최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탑골에서 부는 바람’ 특별전에서 한 동영상이 눈길을 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형성한 이른바 ‘백탑파’의 멤버였던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등이 교유하는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이들은 양반과 중인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한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밀랍으로 매화 만드는 놀이를 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용후생(利用厚生)과 북학(北學)의 정신을 공유한 이들의 학문적 교류가 더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런데 실제로도 이들은 속 깊은 얘기를 나눈 벗이었을까. 성리학적 질서를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을까. 조선 후기 지식의 유통과정을 다룬 저서 ‘독서와 지식의 풍경’은 이런 의문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정조와 실학자들의 저작을 살펴보면 이들도 다른 지식인처럼 주자성리학을 정점으로 한 사상체계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저자 배우성 서울시립대 교수(사진)의 설명이기도 하다. ―조선 실학자들도 신분의 장벽을 완전히 뛰어넘지 못한 건가. “백탑파의 교유는 다른 지식인 커뮤니티에 비해 진보적이었지만, 사회적 장벽을 완전히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박지원은 양반과 다른 신분층의 관계에 대해 ‘등위에 구애돼 서로 교류하면서도 감히 벗으로 사귀지는 못한다’고 썼다. 박지원 등 노론 벌열가 양반들이 중인 출신 지식인을 ‘도를 함께하는 벗’으로 여겼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들을 다만 시인으로 대우했을 뿐이다.” ―조선 후기 지성사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본 것은 아닌가. “서양 근대화의 관점에서 당시 지성사를 보면 그렇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시각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본다.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은 정조를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주자성리학을 정점으로 한 지식의 위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정조는 주자성리학 중에도 사변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사회적 실천이나 경세적 측면에 중점을 뒀다.” ―문체반정 때 정조의 행동을 보면 보수적인 학자로 비치는데…. “역사학자들은 정조를 탕평·개혁군주로 보고, 문학 전공자들은 문체반정을 거론하며 자유로운 글쓰기를 탄압했던 군주로 본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문체반정 때 양반과 중인에 대한 정조의 문책 강도가 동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조가 양반과 서얼에게 기대한 사회적인 책임이 달랐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찾으려는 것은 억지인가. “역사학자들이 현재의 로망을 과거에 비춰보려는 성향이 있는데 나는 이를 반대한다. 예컨대 조선 때는 국가가 인쇄출판을 독점하다 보니 서점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책이 활발하게 유통되지 못했다. 근대 서양과 비교하면 경직된 출판문화에 대한 아쉬움이 나올 수 있다. 책은 민간을 통해 다양하게 인쇄돼 불특정 다수에게 유통돼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당시의 책의 사회적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줄 수 없다. 정조가 ‘고금도서집성’과 같은 서책의 열람 범위를 제한한 데서 알 수 있듯 조선 후기 지식의 탐구는 주자성리학을 정점으로 한 정학(正學)의 부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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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삭·핵꿀잼·금사빠녀…국립국어원이 발표한 2014 신어 뜻은?

    “방금 올린 글 ‘광삭’해주세요.” “요즘 저 영화 ‘핵꿀잼’이던데.” 요즘 인터넷 블로그와 채팅창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말들이다. 광삭은 ‘빛의 속도로 삭제’의 줄인 것이고, 핵꿀잼은 ‘꿀잼(꿀 재미)’을 더 강조한 것으로 ‘매우 재밌다’는 뜻이 된다. 국립국어원은 이들 단어를 포함해 2013년 7월~지난해 6월까지 대중매체에 새로 등장한 신어(新語) 334개를 조사해 25일 발표했다. 신어는 표준어와는 관계가 없지만 세태를 엿볼 수 있다. 이번 ‘2014년 신어 자료집’에는 ‘금사빠녀’(금방 사랑에 빠지는 여자), ‘꼬돌남’(꼬시고 싶은 돌아온 싱글 남자),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를 줄여 이르는 말로 언변이 뛰어나고 지적인 매력이 있는 남자), ‘심멎’(심장이 멎을 만큼 멋지거나 아름답다) 등 다양한 말이 포함됐다. 특정한 행동 양상을 보이는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키는 어휘가 27%(92개)나 됐다. 예를 들어 소비성향과 관련해 ‘모루밍족’(오프라인 매장에서 제품을 살펴본 뒤 모바일 쇼핑으로 구매하는 사람)과 ‘출퇴근 쇼핑족’(출퇴근하면서 스마트폰 등으로 쇼핑하는 사람)이 눈길을 끈다. 사회, 경제적 문제를 반영한 신어로는 ‘오포 세대’(생활고로 인해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 세대), ‘앵그리맘’(자녀교육 문제 등에 분노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여성) 등이 대표적이다. 경기불황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을 반영한 신어들도 꽤 있었다. ‘임금 절벽’(물가는 지속적으로 오르는 반면 임금은 인상되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현상), ‘주거 절벽’(급격하게 오른 주거비용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 ‘디 공포’(디플레이션 공포를 줄인 말) 등이 그렇다. 신어 자료집은 국립국어원 홈페이지(www.korean.go.kr)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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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릉 신덕왕후 재실 복원 공개

    조선 태조의 두 번째 부인으로 ‘개국 왕비’로도 알려진 신덕왕후(1356∼1396)가 묻힌 서울 성북구 정릉(貞陵)의 재실(齋室·사진)이 복원됐다. 재실은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정릉은 본래 현 중구 정동에 화려하게 지어졌으나 태조의 첫 부인 신의왕후(1337∼1391)의 아들인 이방원(태종)이 즉위하면서 1409년 도성 밖으로 축소 이장됐다. 이후 정릉은 폐허처럼 방치됐다가 현종 10년(1669년)에 정비됐다. 문화재청은 1960년대 초반 훼손된 정릉 재실을 3년에 걸쳐 복원하고 25일 기념행사를 통해 일반에 공개한다고 23일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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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자기-칠기-부채 속에 들어간 다양한 동물들

    화정박물관(서울 종로구 평창8길)은 28일부터 12월 31일까지 ‘동물원(動物園)’ 특별전을 개최한다. 다양한 동물을 묘사한 도자기와 칠기, 복식, 부채 등 명(明)·청(淸) 시대 중국 작품 80점을 선보인다. 동물은 인류 생존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일찍부터 예술의 소재로 다뤄졌다. 회화의 시작인 바위그림, 동굴벽화는 물론 옥기(玉器) 청동기와 같은 예기(禮器)에서도 용, 사슴,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이 표현돼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동물들이 주로 활동하는 생태 환경을 중심으로 땅과 하늘, 물의 공간으로 나눠 전시를 구성했다. 그림과 그릇에 표현된 동물의 모습을 살펴보는 동시에 이들의 의미가 어떤 형태로 구체화됐는지 보여 준다. 김기창의 ‘말’, 장우성의 ‘고양이’, 양기훈의 ‘노안도’ 등 동물을 주제로 한 한국 근현대 회화 작품 22점도 전시된다. 02-2075-0123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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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삐뚤빼뚤 즉흥적 자유분방함… 그게 바로 한국인 DNA의 장난기!

    이 책은 문화재를 담당하고 있는 기자가 평소 품었던 의문을 풀 새로운 단서 하나를 던져줬다. 2013년 7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신라 금관총의 ‘둥근 고리 큰칼(環頭大刀·환두대도)’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사지왕(이斯智王)’ 명문에 얽힌 비밀이다. 이달부터 중앙박물관이 금관총 재발굴에 들어갔지만 아직 무덤 주인의 이름은 고사하고 성별조차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사지왕 명문이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다. 칼집 끝 금속 부분에 휘갈겨 새겨진 네 글자를 처음 본 순간 솔직히 ‘애들 장난인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전체적으로 글씨체가 삐뚤빼뚤하고 뭐 하나 균형 잡힌 게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엄선된 인물이 정성을 다해 썼을 것이고 왕이나 후손 또는 그 측근으로부터 검수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사지왕 명문뿐 아니라 경북 포항 중성리 신라비, 영일 냉수리 신라비 등에 적힌 고(古) 신라(통일신라 이전) 시대 글씨체도 모두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자유롭고 천진난만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컨대 이사지왕 명문의 기우뚱하고 들쭉날쭉한 필체는 필적학 관점에서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으며 소박한 성품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중성리 신라비 역시 어떻게 새길 것인지 미리 계획하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돌의 요철을 피해가며 즉흥적으로 써내려가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오롯이 담겨있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중국의 ‘손추생등조상기(孫秋生等造像記)’는 엄정한 격식과 꾸밈을 갖춘 정서체로 적혀 있어 신라의 자유로운 글씨체와 대조를 이룬다. 저자는 이 차이를 고조선부터 신라 법흥왕 이전까지 유지된 한민족 고유의 문화적 DNA인 ‘네오테니(neoteny·어린이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한다. 네오테니란 성장해서도 어린시절의 특성을 유지, 발전시키는 것으로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며 호기심과 장난기가 가득한 기질 등으로 정의된다. 예컨대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끈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이런 네오테니의 문화적 속성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미국 인류학자 리처드 퓨얼은 “지구상에서 동아시아 사람들이 가장 네오테닉하고 그중에서도 한국인들이 가장 네오테닉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조선부터 내려온 한민족의 독특한 문화 속성은 중국식 연호와 이름, 복장, 율령의 사용 등 급격한 중국화를 추진한 신라 법흥왕 때부터 일정 부분 맥이 끊겼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특히 중국 고전을 읊는 것이 필수가 된 고려시대부터는 글씨체가 중국을 따라 경직화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밖에 백범 김구의 서체와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씨체가 유사하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두 글씨체 모두 전체적으로 정사각형을 이루면서 글씨에 힘이 넘치고 필선이 부드러우며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것. 필적학 이론으로 보면 용기가 있고 꾸밈이 없는 천진한 성품을 반영한 글씨라는 분석이다. 이 책은 이른바 ‘필적 고고학’을 개척하겠다는 포부가 담긴 흥미로운 책이다. 미국필적학회(AHAF)와 영국필적학자협회(BIG) 회원이기도 한 저자는 21년간 검사로 일하면서 사람의 내면과 글씨의 상관관계를 연구해 왔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서체를 비교 분석한 ‘필적은 말한다: 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2009년)을 펴내기도 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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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살 드러낸 천년 王城… 30cm 팠을뿐인데 토기-기와 쏟아져

    《 ‘신라 파사왕 22년(101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고 불렀다. 그 둘레가 1023보(약 1.9km)에 달했다.’ (삼국사기) ‘왕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했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문헌으로만 전하던 천년 왕성(王城)의 역사가 우리 앞에 처음 속살을 드러냈다. 18일 문화재청이 공개한 경주 월성 시굴(試掘) 현장은 30cm 깊이로 파헤친 흙구덩이 사이로 1000년 전 주춧돌(초석·礎石)과 적심(積心·초석 아래 돌로 쌓은 기초 부분)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2월 시작된 시굴을 통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의 건물터 6곳과 담장터 12곳, 기와, 그릇, 등잔, 벼루 등을 발견했다. 본격 발굴에 앞서 ‘트렌치(시굴갱)’라는 얕은 갱도만 파는 단계인 만큼 관심이 쏠리는 정전(正殿) 등 핵심 전각(殿閣)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건물터 내 주춧돌이나 기단 대부분은 한눈에 봐도 거의 다듬지 않은 원석 상태였다. 5호 건물지에서만 동그란 주춧돌과 기다란 장대석 기단이 발견됐다. 함께 현장을 둘러본 강순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왕궁의 전각에는 잘 다듬은 주춧돌과 장대석 기단이 들어가기 마련”이라며 “토층을 더 깊게 파야 전각 터가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발굴팀은 8년 전 지하 레이더 탐사결과를 바탕으로 이번 시굴이 진행된 석빙고 부근에 정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더 서쪽지역에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발굴팀 관계자는 “통일신라 이후 왕경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각의 중심축이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길이 28m, 폭 7.1m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3호 건물지)가 눈길을 끈다. 이곳은 적심 사이의 거리도 2m나 된다. 근처에서는 이 건물터와 평행선을 그리는 담장과 ‘ㄱ’자 모양의 배수로도 함께 발견됐다. 전체적으로 한 변이 훨씬 길쭉한 모양을 감안할 때 ‘회랑(回廊)’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박윤정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서민 주거지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회랑형 건물터는 이곳이 왕궁이었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말했다. 신라와 가야에서 제사용으로 쓰인 고배(高杯·굽다리 접시)를 비롯해 병, 등잔, 벼루, 막새기와, 귀면기와,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 등 신라시대 유물도 함께 출토됐다. 특히 일부 평기와에는 ‘習部(습부)’나 ‘漢(한)’과 같은 왕경을 구성한 6부(部) 명칭이 새겨져 있었다. 마립간 시대 이전 신라 6부의 부족장은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기와에서는 제작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의봉사년(儀鳳四年·서기 679년) 개토(皆土)’라고 적힌 명문도 함께 발견됐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문화재위원회 보고를 거쳐 다음 달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갈 예정이다.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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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살 드러낸 ‘천년 왕성’…경주 월성서 신라유물 대거 발굴

    ‘신라 파사왕 22년(101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고 불렀다. 그 둘레가 1023보(약 1.9㎞)에 달했다’ (삼국사기) ‘왕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했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문헌으로만 전하던 천년 왕성(王城)의 역사가 우리 앞에 처음 속살을 드러냈다. 18일 문화재청이 공개한 경주 월성 시굴(試掘) 현장은 30㎝ 깊이로 파헤친 흙구덩이 사이로 1000년 전 주춧돌(礎石·초석)과 적심(積心·초석 아래 돌로 쌓은 기초 부분)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2월 시작된 시굴을 통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의 건물터 6곳과 담장터 12곳, 기와, 그릇, 등잔, 벼루 등을 발견했다. 본격 발굴에 앞서 ‘트렌치(시굴갱)’라는 얕은 갱도만 파는 단계인 만큼 관심이 쏠리는 정전(正殿) 등 핵심 전각(殿閣)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건물터 내 주춧돌이나 기단 대부분은 한눈에 봐도 거의 다듬지 않은 원석 상태였다. 5호 건물지에서만 동그란 주춧돌과 기다란 장대석 기단이 발견됐다. 함께 현장을 둘러본 강순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왕궁의 전각에는 잘 다듬은 주춧돌과 장대석 기단이 들어가기 마련”이라며 “토층을 더 깊게 파야 전각 터가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발굴팀은 8년 전 지하 레이더 탐사결과를 바탕으로 이번 시굴이 진행된 C구역의 석빙고 부근에 정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번 시굴을 계기로 C구역의 서쪽에 있는 A구역 쪽에 정전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발굴팀 관계자는 “통일신라 이후 왕경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각의 중심축이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길이 28m, 폭 7.1m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3호 건물지)가 눈길을 끈다. 이곳은 적심 사이의 거리도 2m나 된다. 근처에서는 이 건물터와 평행선을 그리는 담장과 ‘ㄱ’자 모양의 배수로도 함께 발견됐다. 전체적으로 한 변이 훨씬 길쭉한 모양을 감안할 때 ‘회랑(回廊)’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박윤정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서민 주거지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회랑형 건물터는 이곳이 왕궁이었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말했다. 신라와 가야에서 제사용으로 쓰인 고배(高杯·굽다리 접시)를 비롯해 병, 등잔, 벼루, 막새기와, 귀면기와,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 등 신라시대 유물도 함께 출토됐다. 특히 일부 평기와에는 ‘習部(습부)’나 ‘漢(한)’과 같은 왕경을 구성한 6부(部) 명칭이 새겨져 있었다. 마립간 시대 이전 신라 6부의 부족장은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기와에는 제작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의봉사년(儀鳳四年·서기 679년) 개토(皆土)’라고 적힌 명문도 함께 발견됐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문화재위원회 보고를 거쳐 다음달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갈 예정이다.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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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조선 사회경제사 ‘비밀의 문’ 활짝

    “어물전(魚物廛) 상인들이 아룁니다. 우리는 예부터 종로대로 옆에서 300여 년을 아무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난전 무리들이 집단을 이뤄 골목 곳곳에서 난매(亂賣·자유로운 상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비변사는 형세상 갑자기 난전을 폐지할 수는 없다면서 어물 생산량의 4분의 3은 저희가, 4분의 1은 신전(新廛·난전)이 취급하도록 했습니다. 또 요역(요役·세금)은 3분의 1은 저희가, 3분의 2를 난전이 부담토록 했습니다. 이에 난전 상인들이 부당하다며 민원을 제기하고 있으나 이미 결정된 대로 시행하옵소서.” 조선 숙종 41년(1715년) 한 어물전 상인이 육의전과 도량형, 물가를 관장하던 평시서(平市署)에 올린 청원서다. 조선 후기 시장이 확대되면서 육의전 독점체제가 점차 허물어지고 있는 과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이 청원서는 일본 교토(京都)대가 소장한 가와이(河合) 문고의 ‘시민등록(市民謄錄)’에서 최근 발견됐다. 시민등록은 평시서의 업무기록을 모은 문서다. 조선경제사 연구에 필수자료로 꼽히는데 현재 국내에는 없고 가와이 문고에만 남아 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일본 교토대 부속도서관과 가와이 문고에 대한 공동 조사와 인터넷 공개에 최근 합의했다. 고려대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다음 달부터 2018년까지 4년에 걸쳐 고서 300∼400종, 고문서 2000여 점의 원문 이미지를 인터넷에 순차적으로 올릴 예정이다. 가와이 문고는 일본인 조선 사학자인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1873∼1918) 박사가 일제강점기 수집한 조선시대 고문헌 자료들이다. 가와이 박사는 1898년 도쿄제국대를 졸업하고 1907년 동양협회전문학교(현 다쿠쇼쿠대) 경성분교장으로 서울에 왔다. 그는 당시 조선 경제사를 연구하면서 관련 고문서를 모은 뒤 교토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혁혁(奕奕)하도다. 세종이시여! (중략) 성음과 음률이 배합돼 글자를 만들고 종성(終聲)으로 조화를 이뤄 질서 있게 조직됐다. 닭과 개의 울음소리를 모두 형용할 수 있고 부녀자들과 백성들도 열흘이면 깨칠 수 있다.’ 가와이 문고에는 18세기 초반 명곡 최석정(1646∼1715)이 쓴 ‘경세훈민정음(經世訓民正音)’도 들어 있다. 15세기 간행된 훈민정음해례 이후 가장 앞서는 훈민정음 연구서로 국내외를 통틀어 오직 한 권뿐이다. 당시 주자 성리학을 신봉한 노론계 학자들은 중화사상에 입각해 우리 한자음을 중국어 원음에 가깝게 교정하려고 했다. 이에 최석정은 “조선의 한자음(東音·동음)이 오랑캐의 잦은 외침으로 변질된 중국음보다 중화에 더 가깝다”며 “훈민정음이 이상적인 정음(正音)을 복원하는 데 탁월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박영민 고려대 교수는 “그동안 18세기 최고(最古) 연구서로 분류됐던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1750년)보다 40년가량 앞서는 책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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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상운]역사 속에 잊혀진 항일투쟁

    한국인 유학생들이 일본에 맞서 러시아의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사실이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에 의해 최근 밝혀졌다. 동아일보가 지난달 28일 이를 1면으로 단독 보도하자, 일각에서는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해석이 가능해졌다며 크게 반겼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제국이 그저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다는 기존 시각을 되짚어 볼 계기가 됐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러시아나 중국에서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투사들의 면면을 속속들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최 연구위원이 러시아 국립역사문서보관소를 드나들며 기밀자료를 끈질기게 파고든 끝에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오운석과 구덕선, 현홍근 등 러시아 유학생 9명의 이름과 파견지를 알아냈지만 구체적인 행적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이들이 한반도와 만주, 러시아 접경지대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며 러일전쟁 무렵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한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러시아에 비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 중국 내 항일투쟁도 적지 않은 부분이 안갯속에 있다. 이 중 한시준 단국대 교수가 푸단대와 함께 진행하는 ‘한중 공동 항일투쟁사’ 연구는 최 연구위원의 성과 못지않게 드라마틱한 부분이 많다. 특히 한인 청년들이 중국 비행학교에서 조종사 교육을 받고 중국 공군으로 참전해 일본과 싸운 기록이 그렇다. 예컨대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 장군은 중국 보정항공학교를 나와 중일전쟁 당시 난창(南昌) 공군기지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또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은 윈난(雲南)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전투기를 몰았다. 이 밖에 장성철과 이영무, 김은제, 김원영 등이 창공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몇몇 유명 인사를 제외하고 상당수 한인 조종사의 구체적인 신원과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학계에서는 러시아어나 중국어로 적힌 1차 사료에 접근하기 쉽지 않은 데다 그동안 중국, 러시아와의 공동 항쟁사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고 말한다. 6·25전쟁과 냉전을 거치면서 구(舊) 사회주의권과 협업의 역사를 깊이 있게 파고들기는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중국이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국으로 부상하는 등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역사왜곡을 일삼는 일본에 대항해 한국과 중국, 러시아가 연대할 수 있는 역사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중국 시진핑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항일전쟁과 광복 7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제의한 데 이어 러시아 정부가 5월 전승 70주년 기념행사에 박 대통령을 초청해 눈길을 끈다. 이는 역사적 경험이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한반도를 넘어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에서 일제와 싸운 독립투사들의 삶을 조명하는 것은 광복 70주년을 맞은 후손들의 의무다.김상운 문화부 기자 sukim@donga.com}

    • 20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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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유배지 통해 보는 역사의 아이러니

    미국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은 ‘철부지의 해외 여행기’(1869년)에서 이탈리아 폼페이를 둘러보고 “정적에 묻힌 죽은 자의 도시를 거닌다는 것,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폐허가 된 거리를 어슬렁댄다는 것은 기묘하고 멋스러운 유희일 수 있다”고 적었다. 조선시대 남해 유배지로 떠나는 여행도 어떻게 보면 이렇듯 기묘한 유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볼 때 한없이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는 한려수도가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회한에 젖은 눈물의 바다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 남해 곳곳을 유랑하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생하게 포착했다. 이를테면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유배를 떠난 경남 남해군 노도(櫓島)를 찾았을 때 이야기가 그렇다. 이틀 동안 낫질을 해가며 겨우 찾아낸 김만중의 조그마한 비석을 보면서 저자는 김만중의 숙적 류명현을 떠올린다. 숙종 때 이조판서까지 오른 류명현은 남인의 우두머리 허적과 윤휴를 탄핵한 김만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도 유배를 당해 결국 이 섬에서 눈을 감았다. 김만중이 세상을 떠나고 9년이 지난 뒤였다. 조정에서 오랜 세월 싸우던 두 사람이 결국은 머나먼 남해의 외딴섬에 함께 묻힌 것이다. 저자는 “한양 세도가의 한평생의 영화와 몰락이 여기 한 개의 돌덩이로 남았다. 이틀에 걸쳐 그토록 헤매었던 것은 한 개의 돌멩이였다. 나는 돌멩이를 한 번 만져보고는 우물가 동백 그늘로 들어갔다”고 적었다. 그러나 유배지가 비극의 장소만은 아니었다. 김만중의 걸작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등은 모두 유배지에서 태어났다. 저자는 “유배는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물러남과 돌아감, 멈춤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와 함께 13년 동안 남해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수십 수의 한시를 남긴 자암 김구와 유배지 일대를 기행하며 ‘남해문견록’을 쓴 류의양 등을 통해 조선시대 ‘유배 문학’을 조명했다. 고려 말기 이 땅에 성리학을 도입한 학자 백이정이 귀양을 떠난 난포도 다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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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비들의 발자취 따라 유랑…유배지 통해 보는 역사의 아이러니

    미국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은 ‘철부지의 해외 여행기’(1869년)에서 이탈리아 폼페이를 둘러보고 “정적에 묻힌 죽은 자의 도시를 거닌다는 것,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폐허가 된 거리를 어슬렁댄다는 것은 기묘하고 멋스러운 유희일 수 있다”고 적었다. 조선시대 남해 유배지로 떠나는 여행도 어떻게 보면 이렇듯 기묘한 유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볼 때 한없이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는 한려수도가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회한에 젖은 눈물의 바다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 남해 곳곳을 유랑하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생하게 포착했다. 이를테면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유배를 떠난 경남 남해군 노도(櫓島)를 찾았을 때 이야기가 그렇다. 이틀 동안 낫질을 해가며 겨우 찾아낸 김만중의 조그마한 비석을 보면서 저자는 김만중의 숙적 류명현을 떠올린다. 숙종 때 이조판서까지 오른 류명현은 남인의 우두머리 허적과 윤휴를 탄핵한 김만중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자신도 유배를 당해 결국 이 섬에서 눈을 감았다. 김만중이 세상을 떠나고 9년이 지난 뒤였다. 조정에서 오랜 세월 싸우던 두 사람이 결국은 머나먼 남해의 외딴섬에 함께 묻힌 것이다. 저자는 “한양 세도가의 한평생 영화와 몰락이 여기 한 개의 돌덩이로 남았다. 이틀에 걸쳐 그토록 헤매었던 것은 한 개의 돌멩이였다. 나는 돌멩이를 한 번 만져보고는 우물가 동백 그늘로 들어갔다”고 적었다. 그러나 유배지가 비극의 장소만은 아니었다. 김만중의 걸작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등은 모두 유배지에서 태어났다. 저자는 “유배는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물러남과 돌아감, 멈춤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와 함께 13년 동안 남해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수십 수의 한시를 남긴 자암 김구와 일종의 유배지 답사기인 ‘남해문견록’을 쓴 류의양 등을 통해 조선시대 ‘유배 문학’을 조명했다. 고려 말기 이 땅에 성리학을 도입한 학자 백이정이 귀양을 떠난 난포도 다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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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최연식 동국대 교수 “석굴암은 부처, 불국사는 보살 세계 상징”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에 머물며 항상 천궁을 왕래했다(表訓 曾住佛國寺 常往來天宮).’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 대목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의상(625∼702)의 직계 제자인 표훈(表訓)은 751년 불국사가 창건되자 초대 주지를 맡았고 화엄종을 신라불교의 주류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얼핏 하늘에 있는 궁을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표현에서 도술을 부리는 신승(神僧)을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옛 사람들이 즐겨 구전한 한낱 전설에 불과한 것인가. 최연식 동국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표훈의 일승세계론(一乘世界論)과 불국사·석굴암’ 논문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 배경에 대해 표훈의 사상과 연관지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최 교수에 따르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천궁은 석굴암으로 표훈과 그의 제자들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오가는 특별한 수행을 행했다. 또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신라 재상 김대성이 스승으로 숭모한 표훈의 일승세계론을 불국사와 석굴암 건립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앞서 학계에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토함산에 동시에 건립됐음에도 왜 하필 석굴암은 꼭대기에 멀찌감치 떨어뜨려 지었는지가 늘 수수께끼였다. 이와 관련해 석가모니의 설법 중 땅속에서 솟구친 탑에서 다보여래가 나왔다는 내용의 법화경을 들어 다보탑과 석가탑이 법화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학설이 1960년대 나왔다. 이어 밀교 고승이 불국사에 머물렀다는 삼국유사 기록에 주목하거나 화엄경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상적인 불국토)’를 끌어들인 학설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해 남동신 서울대 교수는 석굴암이 도리천(도利天)에 있는 신들의 거처로 석가가 모친을 위해 설법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최 교수는 불국사와 석굴암 건립에서 표훈의 역할에 주목한 고(故) 김상현 동국대 교수의 학설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해인삼매(海印三昧·바다에 천지만물이 비치듯 우주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는 경지)로 표현되는 부처의 깨달음이 보현(부처의 깨달음을 중생에게 전하는 보살)을 통해 중생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다룬 ‘일승세계론’에 초점을 맞췄다. 표훈의 일승세계론에 따르면 △부처가 해인삼매에 들어 깨달음을 얻고(망상해인·忘像海印) △이를 스스로 관조한 뒤(현상해인·現像海印) △중생들에게 전하기 위해 깨달음을 밖으로 드러내고(불외향해인·佛外向海印) △보현보살이 삼매에 들어 이를 받은 뒤(보현입정해인·普賢入定海印) △삼매에서 나와 중생들에게 설법하는 단계(보현출정해인·普賢出定海印)를 거치게 된다. 이 중 부처의 내면세계와 직결되는 망상해인·현상해인·불외향해인은 석굴암, 보현의 영역인 보현입정해인·보현출정해인은 불국사를 각각 상징한다는 것이 최 교수의 설명이다. 최 교수는 “토함산 기슭에 있는 불국사와 달리 석굴암은 일반인(중생)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산꼭대기에 있어 현상 세계와 구분된 근원적인 세계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이어 “석굴암이 다른 일반 사찰과 달리 돌을 쌓아올린 석굴의 형식을 취한 것도 감춰진 진리, 부처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석굴암 본존이 후실(後室) 중앙에서 뒤로 약간 물러나 있는 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찾아온 보현(수행자)을 위한 공간이라는 해석이다. 정병삼 숙명여대 교수는 “불국사, 석굴암의 건립 배경과 관련된 설명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며 “다만 조각이나 건축구조에 대한 연관성이 조금 더 규명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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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융성기 베네치아, 출판시장도 풍성

    수상택시를 타고 베네치아로 들어가다 보면 여러 성당 가운데 유독 ‘성 마르코’ 성당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슬람풍이 느껴지는 외관만 보면 여기가 유럽인가 싶을 정도다. 실제로 이슬람 건축물의 단골 소재인 화려한 모자이크가 성당을 뒤덮고 있다. 성 마르코 성당을 마주하면 15, 16세기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우뚝 선 베네치아의 영광을 상상할 수 있다. 당시 유럽에서 인구 15만 명이 넘는 거대도시는 베네치아와 파리, 나폴리 등 세 곳뿐이었다. 베네치아의 출판시장도 이런 세계사적 위치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대표적인 예가 교황이 전 유럽에서 군림하던 이 시기에 베네치아에서 꾸란(이슬람 경전)이 인쇄됐다는 사실이다. 꾸란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키릴어, 세르비아어 등으로 적힌 다양한 종교 서적도 이곳에서 간행됐다. 500년간 소문만 돌다가 1987년 한 수도원 도서관에서 발견된 베네치아산 꾸란은 종교적, 문화적 장벽마저 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기원을 엿보게 한다. 베네치아 출판업자들이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서 대목을 보기 위해 꾸란을 찍어냈기 때문이다. 4차 십자군 전쟁을 유발해 각종 군수물자를 공급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한 베네치아의 과거사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저자는 전성기 베네치아의 문화 융성을 출판시장의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다. 예컨대 유럽에서 금속활자를 처음 만든 곳은 구텐베르크의 독일이었지만 출판시장 규모는 베네치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16세기 초반 유럽에서 출간된 모든 책의 절반가량이 베네치아에서 나왔다. 우리가 흔히 ‘이와나미 문고본’을 떠올리는 포켓용 책인 문고본도 베네치아의 출판업자 알도 마누치오가 처음 만든 것이다. 심지어 역사상 첫 포르노 서적으로 알려진 ‘음란한 소네트’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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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포르노 서적 ‘음란한 소네트’는 ‘여기’서 태어났다

    수상택시를 타고 베네치아로 들어가다 보면 여러 성당 가운데 유독 ‘성 마르코’ 성당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슬람풍이 느껴지는 외관만 보면 여기가 유럽인가 싶을 정도다. 실제로 이슬람 건축물의 단골소재인 화려한 모자이크가 성당을 뒤덮고 있다. 성 마르코 성당을 마주하면 15~16세기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우뚝 선 베네치아의 영광을 상상할 수 있다. 당시 유럽에서 인구 15만 명이 넘는 거대도시는 베네치아와 파리, 나폴리 세 곳뿐이었다. 베네치아의 출판시장도 이런 세계사적 위치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대표적인 예가 교황이 전 유럽에서 군림하던 이 시기에 베네치아에서 코란이 인쇄됐다는 사실이다. 코란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키릴어, 세르비아어 등으로 적힌 다양한 종교 서적도 이곳에서 간행됐다. 500년간 소문만 돌다가 1987년 한 수도원 도서관에서 발견된 베네치아산 코란은 종교적, 문화적 장벽마저 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기원을 엿보게 한다. 베네치아 출판업자들이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서 대목을 보기 위해 코란을 찍어냈기 때문이다. 4차 십자군 전쟁을 유발해 각종 군수물자를 공급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한 베네치아의 과거사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저자는 전성기 베네치아의 문화 융성을 출판시장의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다. 예컨대 유럽에서 금속활자를 처음 만든 곳은 구텐베르크의 독일이었지만 출판시장 규모는 베네치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16세기 초반 유럽에서 출간된 모든 책의 절반가량이 베네치아에서 나왔다. 우리가 흔히 ‘이와나미 문고본’을 떠올리는 포켓용 책인 문고본도 베네치아의 출판업자 알도 마누치오가 처음 만든 것이다. 심지어 역사상 첫 포르노 서적으로 알려진 ‘음란한 소네트’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 201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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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好통]일제 수탈 문화재, 전방위 실태조사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출토된 서봉총 유물 9점이 사라졌다는 4일자 동아일보 A1면 기사가 한 포털 사이트에 소개되자 이날 오전부터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양대(梁帶·머리에 쓸 수 있도록 테두리 안쪽에 십자로 붙여 놓은 금띠)’를 지닌 유일한 신라 금관인 서봉총 금관이 일제강점기 때 인위적으로 훼손된 데 이어 구슬 팔찌 등 주요 유물들이 자취를 감췄다는 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반응이었다. 이 중에는 모로가 히데오 등 일본 도굴꾼들이 불법 반출한 문화재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인 환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발굴된 신라 고분은 왕릉급을 비롯해 소형 고분까지 줄잡아 1000여 기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서봉총을 발굴한 고이즈미 아키오는 1927년 발표한 약식보고서에서 6개월 만에 50기가 넘는 고분을 발굴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서봉총 한 곳만 해도 최소 1년의 발굴 기간이 필요하다는 국립중앙박물관 측 설명을 감안한다면 ‘발굴’보다 ‘약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행태다. 이 때문에 서봉총뿐 아니라 다른 신라 고분들도 유물 훼손이나 불법 반출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문화재계에서는 중앙박물관의 신라 고분 재발굴 사업을 계기로 일제의 문화재 관리에 대한 전방위 실태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응천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유물이 수십만 점에 달하지만 인력이 부족해 아직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다”며 “일제강점기 자료들에 대해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 환수를 위해서라도 이런 실태 파악이 선행돼야 한다. 명확한 기초 자료를 증거로 내놓으면 해당 국가도 문화재 반환 요구를 무작정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로가가 빼돌린 금관총 유물이 포함된 ‘오구라 컬렉션’에 대해서도 상황에 따라 재협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 컬렉션은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당시 개인 재산이라는 이유로 논의에서 빠졌다. 그러나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아들이 1981년 도쿄박물관에 기증하면서 국가 소유가 됐다.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고 우리 문화재의 소중한 원형을 지키려면 지난 과거라도 끝까지 추적하고 규명해야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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