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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사이코 패밀리’라고 부르는 가족이 있다. 철자는 우리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르다. ‘psycho’ 대신 ‘psykoh’를 쓴다. 고직한 선교사(67) 가족의 성(Koh)을 딴 것. 그의 큰 아들 하영 씨(40)는 27년, 작은 아들 하림 씨(38)는 19년째 조울증을 앓고 있다. 하림 씨의 첫 증상이 나타났을 때 하영 씨가 블로그를 개설하며 ‘psykoh’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이코 형제가 아니라 ‘가족’인 이유는 고 선교사 부부도 젊은 시절 각각 신경증과 경조증을 앓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까지 조울증 진단을 받은 뒤 고 선교사는 “완전히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혼자서 끙끙 앓거나 숨기기보단 주위에 솔직하게 말하는 길을 택했다.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한 2018년 두 형제는 ‘조우네 마음약국’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그들은 입원과 치료, 회복까지 자신들의 투병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구독자는 5000명을 향해 간다. ‘조우’는 조울증에서 따 온 형의 방송용 이름이다. 자신들의 ‘평범한’ 삶이 조울증 환자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삼부자를 지난해 말 서울 강남구 옛 사랑의 교회에서 만났다. ● 우울감과 우울증은 다르다 하영 씨는 4번, 하림 씨는 13번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첫 입원은 2003년이었다. 동생의 조울증 진단에 충격을 받은 하영 씨의 조증이 심해지자 가족은 입원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고 선교사는 그 때를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며칠 밤을 울면서 잠을 설쳤다. 조울증은 온 가족이 함께 겪는다. 조증일 땐 본인보다 가족이 더 힘들다. 자제력이 없어지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한다. 하영 씨는 “분노조절이 힘들고, 금전적인 사고를 치기도 한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망상에 빠져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간 우울증 시기는 본인이 더 힘들 때다. 두 아들을 20년 넘게 지켜본 고 선교사는 우울감과 우울증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울감이 찬 바다로 들어가면서 물이 차다는 것 정도는 느끼는 정도라면, 우울증은 물이 찬 것조차 모르고 깊은 웅덩이로 빠져드는 것 같다.” 두 아들의 위험 신호는 달랐다. 하영 씨가 밀물처럼 스며들었다면, 하림 씨는 쓰나미처럼 갑자기 덮쳤다. 하영 씨는 수면장애, 식욕장애 등 전조 증상을 한동안 겪은 뒤 조울증 진단을 받았다. 하림 씨는 2003년 종교적 망상으로 갑자기 조증이 왔다. 가족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질환을 앓고 있던 형이 동생의 발병을 먼저 알아챘다. 고 선교사는 ‘DUP(정신증 미치료 기간·Duration of Untreated Psychosis)’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발병 후 치료까지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거나, 발병 전 불특정하게 증상들이 나타나는 전구기에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 선교사는 “조울증 환자들 상당수가 DUP가 길다고 한다. 가족들의 섬세한 관찰과 질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누구나, 한번쯤 위기가 온다.”삼부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 그나마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블루’를 겪으면서 “누구나 한번쯤 정신건강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인식이 조금씩 생기고 있어서다. 정신건강에 관심이 높아지면 가족이나 친구의 이상 증상을 빨리 발견할 수 있다. 조울증 등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신질환을 앓는 가족이 생기면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냐’고 탓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우울증은 자기 의지로 나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정확한 진단과, 약물·심리 치료가 필수다. 많은 사람들이 심폐소생술을 배우듯이, 이상 증세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안다면 가족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하영 씨) 세 사람은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것이 걱정된다고 했다. 인간의 뇌에도 긴장과 이완이 반복돼야 하는데, 탈출구 없는 스트레스가 1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것. 특히 하림 씨는 그 위험성을 더 잘 안다. 하림 씨는 발병 전 1년 동안 하루 20시간 넘게 드럼 연습에 몰두했다. 좋아하는 것, 소질 있는 분야를 처음 만났다는 기쁨에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하림 씨는 “마치 발화점까지 열이 올랐는데 알아차리지 못해 불이 난 것 같았다. 과부하가 걸린 줄도 몰랐다”고 했다. ● “스스로 약 끊는 건 위험”유튜브에는 두 형제뿐 아니라 아내들도 출연한다. 이들은 형제의 가장 큰 버팀목이다. 재밌는 것은 이들이 겹사돈이라는 점. 자매 중 동생인 하영 씨의 부인은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있다. 2019년부터는 카카오톡에 상담 채널도 열어 현재 약 800명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대략 3분의 1은 조울증을 앓는 당사자이고, 3분의 2는 주로 가족들이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다. 고 선교사는 주로 환자 부모의 얘기를 들어 준다. 자살을 생각한 환자를 구한 적도 있다. 어느 날 한 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카카오톡 친구로만 등록돼 있어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마침 그 환자가 얼마 전에 택배로 감사 선물을 보낸 게 떠올랐다. 송장에 적힌 주소를 경찰에 알린 뒤, 직접 전화를 걸어 상대를 진정시켜 사고를 막았다. 상담에서 자주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약 처방과 관련된 것이다. 조울증 환자들 중엔 증상이 나아지는 것 같거나 부작용이 나타나 스스로 약을 끊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림 씨가 13번이나 입원한 것도 부작용을 못 견딘 탓이다. 하림 씨는 부작용으로 수전증이 생겼다. 1년 동안 상태가 호전돼 스스로 약을 끊은 적도 있다. 그러다 손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 수개월을 입원했다. 하영 씨는 “우울증이 지속되다가 조증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있는데, 그 때 약을 끊은 경우가 많다”며 “약을 끊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약을 처방한 의사 뿐”이라고 절대 스스로 투약 여부를 결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 치료만큼 중요한 ‘자립’하영 씨에게 유튜브와 상담을 시작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인생의 3분의 2를 조울증을 앓았다. 이 경험을 외면하면 아팠던 과거가 다 쓸모없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형제는 지난해 국립중앙의료원의 ‘동료지원가’ 과정도 수료했다. 자신의 회복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회복을 돕는 역할이다. 삼부자는 지역사회에 정신질환자를 위한 체계적인 돌봄 시스템이나 자립 프로그램이 부족한 것을 아쉬워했다. 한국의 정신건강 지원은 입원 병동 등 물리적 치료에 치우쳐 있고, 퇴원 후 지원 프로그램은 수요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조울증은 재발이 잦다. 재발을 피하려면 사회로 나와 유대감을 형성해 안정된 상태를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 선교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예전엔 ‘약이 치료다’ ‘자유가 치료다’라고 강조했는데, 요즘에는 ‘월급이 치료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해요.” 일을 하고 관계를 맺으며 ‘지지그룹’을 만들면 안정된 상태를 더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림 씨는 음악적 재능을 이용해 환자들의 치유를 돕는 게 목표다. ‘온리 원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이미 60여 차례 공연을 해 왔다. 주로 고 선교사의 지인이 관객이다. 단 한 사람(가족)을 초대해 곡을 만들고, 무대를 꾸민다. 이 활동을 전국의 입원 병동을 찾아 공연을 해보고 싶다. 고 선교사는 “두 아들의 증상이 언제 재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울증이 완치됐다는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 비대면일지라도 서로 연대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 활동의 의미를 하영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조울증을 앓고 있는 내가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키우는 것을 보고 조울증 환자의 부모님들이 큰 감동을 받는 걸 봤다. 나의 ‘평범함’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경기 오산시에서 김장율 씨가 운영하는 중국집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가게를 찾는 손님이 뚝 끊겼다. 배달 주문에 의존하고 있지만 늘어나는 배달 수수료가 큰 부담이었다. 민간 배달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하면 수수료가 음식값의 10%가 넘었다. 김 씨의 부담을 크게 줄여준 것은 지난해 12월 1일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경기도 공공배달앱 ‘배달특급’이다. 배달특급은 높은 배달 수수료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을 위해 경기도 산하 경기도주식회사가 민관협력을 통해 개발한 앱이다. 배달특급은 배달 수수료 부담을 크게 낮췄다. 기존 배달앱의 수수료가 6∼15%에 달하는 반면, 배달특급은 수수료가 1%다. 김 씨는 “수수료가 민간 배달앱보다 훨씬 저렴해 자영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며 “기존 배달앱 중 한 곳은 계약을 해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주로 오프라인에서 사용하던 지역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배달특급 이용 고객은 15%의 할인 혜택을 받는다. 경기도주식회사에 따르면 첫 3주 동안 지역화폐 사용률은 62.6%였다. 화성시에서 활어회 전문점을 운영하는 김동욱 씨는 “공공 배달앱과 지역화폐를 사용하는 손님이 늘어나면서 소상공인뿐 아니라 지역 경제 전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초 기대보다 고객들의 호응도 크다. 출시 3주 만에 총 거래액은 20억 원을 돌파했다. 앱 가입 회원은 약 10만 명, 가맹점도 5700여 개로 늘었다. 배달특급은 현재 경기도 31개 시군 중 화성 오산 파주시에서 운영 중이다. 경기도주식회사는 올해 경기도 내 27개 시군으로 운영을 확대할 계획이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해 온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강원도 최남단인 영월군까지 확산되면서 방역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백두대간을 타고 경북과 충북 등 인근 지역으로 확산될 우려도 커졌다. 5일 ASF 중앙사고수습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28일 영월군에서 발견된 멧돼지 폐사체에서 ASF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이어 1일에도 인근 야산에서 ASF에 감염된 멧돼지 6마리가 발견됐다. 기존 발생지역에서 8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ASF 발생 지역은 경기 파주시·연천군, 강원 철원군·화천군 등 11개 시군으로 늘었다. 축산당국은 추가 감염을 막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발생지점 반경 10km 내 양돈농장은 매일 집중 소독을 실시하고 있다. 영월군 및 인접한 12개 시군에는 ASF 위험주의보가 발령됐다. 12개 시군의 양돈농장은 178곳에 이른다. 방역당국은 해당 농장 진입로와 주변 도로를 방역차량 64대를 동원해 매일 소독하고, 양돈농장으로는 축산차량이 진입할 수 없도록 했다. 환경부를 중심으로 감염 가능성이 있는 멧돼지 수색도 강화했다. 발생지점 주변으로 약 16km의 차단 울타리를 설치하고, 반경 약 10km 범위에 있는 영월군 4개면, 강원 원주시 신림면, 충북 제천시 송학면의 멧돼지 이동 통로에 포획 덫을 설치했다. 멧돼지는 총기 등에 놀라 달아나면 50km 이상 이동할 수 있다. 방역당국은 전국 6066개 양돈농장에도 방역조치를 강화해줄 것을 당부했다. 전국 사육두수의 31%를 차지하는 돼지 밀집사육 시·군 10곳은 바이러스가 확산될 경우 큰 피해가 우려된다. 경기도 남부의 이천시·안성시도 밀집사육 지역이다. ASF는 멧돼지 접촉에 의한 감염이 많지만, 사람이나 차량 등이 매개가 돼 전파될 수도 있다. 산에 올랐다가 멧돼지나 멧돼지 폐사체를 발견하면 직접 접촉해서는 안 되고, 최소 5일 동안은 양돈농가 방문을 자제해야 한다. 입산 후에는 신발, 옷을 즉시 세탁하는 것이 좋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지난해 12월 국회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상한을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탄력근로제는 일정 기간 내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법정 근로시간(주 52시간)을 넘기지 않으면 주당 근로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제도다. 올해부터 50∼299인 사업장까지 확대되는 주 52시간 근로제의 보완책이다. 에어컨 생산처럼 특정 시기에 일감이 몰리는 사업장이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준 것이다. 탄력근로제를 포함한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는 사업장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서 ‘근로자 대표’의 중요성도 커졌다. 근로자 대표는 사측이 탄력근로제를 도입할 때 서면합의 대상으로 근로기준법에 명시돼 있다. 근로시간뿐 아니라 경영상 해고, 유급휴가 대체, 파견근로자 사용, 임금피크제 실시 등 주요 근로조건 변경 시 전체 근로자를 대표해 사측과 협의나 합의할 권한을 지닌다. 근로자 대표가 명시된 노동관계법은 7개, 해당 조항은 36개에 이른다. 문제는 근로자 대표의 선출 방법과 권한 등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근로기준법상에는 ‘근로자 과반으로 조직된 노조’ ‘노조가 없을 경우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로 명시할 뿐 세부 규정이 없다. 이 때문에 사업주가 임의로 근로자 대표를 지정해 사측에 유리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사례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는 근로자대표의 선출과 임기, 지위 등을 담은 노사정 합의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현장에 적용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노사 간 이견이 큰 쟁점들은 합의문에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 급변하는 근로 형태 및 고용관계에 대처하려면 정부와 국회가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업장 90%는 근로자 대표 불명확 지난해 7월 이마트 노동자 1100여 명은 회사를 상대로 600억 원대 체불임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공휴일에 근무한 직원에게 대체휴일을 부여하고 휴일가산수당을 지급하지 않으려면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를 해야 하는데 근로자 대표 선출 과정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근로자 과반의 의사로 선출되지 않은 근로자 대표는 권한이 없으니 서면 합의는 무효라는 주장이다. 근로자대표제의 허점을 이용하는 사례는 빈번하게 발생한다. 유통회사에 다니는 권모 씨(31)는 최근 자신의 연차가 거의 소진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회사는 권 씨가 국경일을 포함한 ‘빨간 날’에 쉰 것을 연차를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취업규칙이나 근로계약에도 그런 내용이 없었지만 회사는 근로자 대표와 맺은 공휴일 연차 대체 서면 합의를 근거로 댔다. 알고 보니 사측이 추천한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이 이 같은 합의를 한 것이다. 탄력근로제 도입 과정에서도 당사자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2018년 한국노동연구원이 2436개 사업체를 대상으로 진행한 ‘근로제도 실태조사’에서 탄력근로제 도입 사업체의 57.7%는 노사 합의가 생략된 것으로 조사됐다. 12.8%는 근로자 개별 합의, 10.6%는 노사협의회 근로자 위원 합의를 거쳤다. 과반수 노조나 근로자 대표와 합의한 경우는 약 16%에 불과했다. 노조가 없는 영세 사업장일수록 이런 관행은 흔히 발생한다. 지난해 기준 국내 노조 조직률은 12.5%로 전년 대비 0.7%포인트 올랐다. 이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이 일부 정규직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민간부문 노조 조직률은 10%에 불과하다. 사업장 규모별로는 30∼99명 1.7%, 30명 미만은 0.1%에 그쳤다. 소규모 사업장일수록 근로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창구가 마땅치 않다는 의미다.○ 처벌 조항, 상설화… 노사 이견 커 지난해 10월 발표된 경사노위 합의안은 유명무실해진 근로자대표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노사정이 머리를 맞댄 결과다. 합의안은 과반수 노조가 있는 경우 해당 노조의 근로자 대표 지위를 인정했다. 노사협의회만 있을 땐 근로자가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선출한 근로자위원이 ‘근로자위원 회의’를 구성해 근로자 대표 역할을 하도록 했다. 과반수 노조나 노사협의회가 없으면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대표를 선출한다. 근로자 대표로 활동하는 시간은 근로시간으로 인정하고 사측이 근로자 대표 활동에 불이익을 주지 못하도록 했다. 합의안은 노사정이 근로자 대표의 역할과 권한에 큰 틀의 합의를 이뤘다는 데 큰 의미가 있지만 향후 입법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2019년 12월부터 약 10개월 동안 진행된 위원회 회의록에는 노사의 의견차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사용자 개입을 금지하려면 처벌 조항이 있어야 한다” “상설 조직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노동계 위원) “사용자 처벌, 근로자 대표의 경영 참가 등은 반대한다” “현장에선 또 다른 조직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한다.”(경영계 위원) 이는 근로자 대표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노사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노동계는 근로자대표제를 직원의 이익을 대변할 사측과의 협상 창구로 여긴다. 자유로운 근로자 대표 활동을 보장할 보완장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유정엽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2본부장은 “사측의 개입이나 방해를 정부가 근로감독하고 과태료 및 행정처분 등 제재 조항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경영계는 근로자 대표를 근로조건 등 변경 시 근로자 의견 청취를 위한 통로 정도로 생각한다. 이준희 한국경영자총협회 노사관계법제팀장은 “근로자대표제는 근로자의 뜻을 관철하는 조직이 아니라 근로자 동의가 필요한 부문에서 작동하는 수동적 제도”라고 강조했다. 당초 상반기로 전망된 법제화 시기도 더 늦춰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합의문에서 명시하지 않은 구체적인 근로자대표 선출 단위, 대상 등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 직군이나 사업장별로 개별 이슈가 있을 때 전체 근로자 대표가 사측과 합의나 협의를 하는 게 적절하냐는 것이다. 특히 유연근무제는 일을 몰아서 해야 하는 특정 직군에만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탄력근로제를 도입할 때 전체 근로자 대표와 합의하느냐, 해당 직군 근로자 대표를 따로 뽑아 합의하느냐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박소민 노무법인 와이즈 대표노무사는 “경사노위 합의안만으로는 과반수 노조가 아닌 소수 노조나 비노조원의 목소리가 소외될 우려도 있다”며 “근로자 대표의 자격이나 선거권이 부여되는 범주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개별 사업장 자율로 할 경우 또 다른 노노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 고용환경 변화, 노사 합의로 탄력적 대응해야 1997년 도입된 근로자대표제는 명과 암이 있다. 경영상 해고 등 근로자들의 불이익을 막기 위한 견제장치의 성격도 있었지만 근무시간 유연화 등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이용된 측면도 있다. 근로자대표제를 정착시키는 것은 이런 폐해를 막고 근로자의 진짜 대표가 누구인지 명확히 한다는 의미다. 직원 과반수가 가입한 노조가 있다면 비교적 간단한 문제이지만 복수 노조가 있거나 노조가 없는 경우엔 근로자 대표가 누구인지 애매하다. 노조가 없는, 약 90%에 이르는 중소·영세 사업장은 사측이 요구하는 근로조건 변경에 끌려 다니기 일쑤였다. 특히 한국은 근로자 대표가 각 법 조항마다 난립해 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대표가 있고,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근참법)에는 노사협의회와 그에 소속된 근로자위원이 있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때 동의 주체가 되는 과반수 노동조합 등도 근로자 대표 역할을 한다. 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근로자 대표의 종류는 많지만 실질적인 대표는 없는 셈”이라며 “법적 지위와 권한이 명확하지 않아 오히려 근로자 이익이 충실히 대변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궁극적으로는 근로자대표 시스템을 노조와 노사협의회(근로자대표)로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노동법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운영하는 종업원대표제가 그 예다. 전문가들은 근로자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기업의 리스크로 생각하는 사용자 측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고용 및 근로환경이 급변하면서 사업장 노사의 발 빠른 대처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외교 분쟁이나 팬데믹처럼 기업의 외부 리스크가 커질수록 노사의 협력은 더 중요해진다”며 “근로자대표제는 더 이상 근로자의 이익만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min@donga.com}

차형준 포스텍(포항공대) 화학공학과 교수 연구팀은 2010년부터 홍합의 끈끈한 접착 성분을 추출해 인체에 활용하는 생체접착제 개발을 시작했다. 연구 결과 홍합 추출물은 생분해성 물질이어서 안전한 데다 세포 조직 재생 효과도 탁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 10월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인체 적용 시험을 위한 임상시험계획 승인을 신청한 상태다. 제품이 출시되면 2026년엔 국내외에서 5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연구팀은 기대하고 있다. 전 세계 생체접착제 시장 규모는 약 2조7000억 원(2019년 기준) 정도다. 해양생물에서 추출한 천연물질을 의약품으로 활용하는 해양 바이오 시장이 주목받고 있다. 이미 다양한 물질이 발굴된 육지 생물에 비해 해양생물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해양 천연물질 신약은 7개에 불과하다. 해양생물은 약 33만 종으로 전체 생물 종류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향후 해양생물에서 새로운 소재를 찾아낼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 초부터 해양생물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기존에는 건강기능성식품 위주였다면 최근에는 의료기기, 신약 등 바이오 헬스 분야 전반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정원교 부경대 의공학과 교수 연구팀은 감태에서 추출한 플로로타닌이 기도협착증을 억제하는 효능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존에는 미토마이신 C라는 항암제를 처방했는데 구토, 설사를 하거나 면역기능이 저하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식용으로 쓰이는 감태는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데다 혈관이나 기도 폐색을 막아주는 다양한 의료기기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립암센터 최용두 박사 연구팀은 한국광기술원과 함께 미역 등 갈조류 추출물을 활용해 암 수술용 형광표지자를 개발했다. 복강경 수술 시 형광표지자로 종양의 위치를 표시하는데 갈조류 추출물은 잉크를 주입하는 기존 방식보다 체내 흡수가 덜 되고 잘 번지지 않아 종양 위치 추적에 유리하다. 연구팀은 임상 시험을 거쳐 4년 내 상용화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지역균형 뉴딜의 성공을 위해서는 거점 국립대의 역량 강화와 활용이 필수적이다.”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실에서 열린 ‘지역균형 뉴딜 성공을 위한 대학과 행정 역할’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한목소리로 이같이 말했다. 거점 국립대를 대표해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송석언 제주대 총장(거점 국립대 협의회장), 김헌영 강원대 총장, 김동원 전북대 총장은 K뉴딜의 핵심인 지역균형 뉴딜의 성공을 위해서는 대학이 곧 성장 동력이라는 인식과 함께 규제 철폐와 과감한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영교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은 “‘지역의 혁신은 지역 국립대학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확실히 지역주민에게 체감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것은 대학이 성장 동력임을 천명한 것”이라며 “입법을 통해 대학의 역할을 극대화시키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학들의 혁신 노력과 함께 지방자지단체장들이 대학을 바라보는 인식을 전환할 것을 주문했다. 이날 토론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절차를 철저히 준수한 가운데 진행했다.―지역균형 뉴딜에서 대학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서 위원장=지방 분권과 지역 균형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한국의 성장 동력은 결국 지역 발전에서 나온다. 지역 대학이 뿌리가 돼 인재를 양성하고, 지역에서 취업 후 터전을 잡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지역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김동원 총장=매년 발표되는 국가경쟁력과 대학경쟁력 순위를 보면 대학이 늘 뒤에 있다. 대학의 역할이 그만큼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해외에선 낙후된 지역을 대학이 중심이 돼 일으킨 사례가 많다. 독일은 통일 후 동서독 지역격차 문제가 심각했다. 그 때 세운 전략이 9개 주요 대학(TU9)을 거점으로 지역 발전을 도모한 것이었다. 옛 동독 지역의 드레스덴대에는 국가연구소 10여 곳이 설립됐고, 최근엔 가장 주목받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지방의 거점 국립대들조차 학령인구 급감, 학생 수도권 유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송 총장=거점 국립대의 위기는 곧 지방의 위기다. 국립대에 적용되는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 재정 지원, 교육·연구 인력 충원 등과 관련된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등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현행법상 지자체가 학교에 연구소를 세우는 것도 쉽지 않다. 건물을 학교에 기부채납하도록 돼 있어서다. 학교가 땅을 제공하고, 지자체가 건물을 세우면 ‘윈윈 효과’가 있는데 법이 가로막고 있다. ▽김헌영 총장=대학 밖 건물에서 수업을 못 하도록 하는 이동수업 규제도 완화해야 한다. 지방대가 서울에서 강의해 학생 모으는 것을 막으려고 만든 규제다. 최소한 같은 광역지자체 안에서는 이동수업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도내 대학들이 공동캠퍼스 등을 운영해 다양한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다. 강원대와 삼척시가 4년 전부터 추진 중인 도계 대학도시가 지체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이동수업 규제 때문이다.―정부가 10월에 발표한 75조 원 규모의 지역균형 뉴딜 사업에 대학의 역할이 빠져 있어 아쉽다는 지적들이 많다. ▽김헌영 총장=대학에 대한 투자가 없으면 지역균형 뉴딜을 포함한 K뉴딜에 대응하기 어렵다. 거점 국립대는 각 지역의 성장과 관련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이 역량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끄집어낼 것인지가 중요하다. 지역균형 뉴딜 성공의 열쇠는 대학의 활용에 달려 있다. 아울러 지역균형 뉴딜이 또 다른 불균형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수도권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단순 경쟁시키면 낙후된 지역은 더 소외받을 가능성이 높다.―지역 대학 육성의 핵심은 재정 지원 확대다. 가장 시급한 부문을 꼽자면… ▽김동원 총장=지방재정법은 지자체가 국가시설에 투자할 수 없도록 돼 있다. 대학이 국비 예산을 따왔을 때 매칭 펀드 조성만 가능하다. 이렇다 보니 대학 내 제대로 된 연구소 운영도 힘들다. 한 해 수십억 원의 운영비가 필요한데, 거의 대학 스스로 조달해야 한다. 세계적 수준의 연구소가 나올 수 없다. 대학이 연구거점이 되는 해외에선 지자체와 대학이 법인 형태의 연구소를 만든다. 대학은 20대의 젊은 두뇌가 끊이지 않고 공급되는 곳이다. 재정 투입의 각종 규제에서 벗어나야 이 인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송 총장=예산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도 공무원들이 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엄격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단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지자체가 대학을 지원할 때 포괄적 지원을 금지하는 것도 아쉽다. 목적사업 안에서만 예산을 쓸 수 있다. 대학에 재정 활용의 재량권을 주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서 위원장=지방자치법이 통과되면서 재정 집행권이 지역으로 많이 분산됐다. 그런 돈이 대학과 함께 지역 균형을 이끌어내는 마중물로 쓰여야 한다. 중앙 정부나 각 지자체에서 예산 활용을 적극적으로 할 부분이 없는지 살펴보겠다.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면 동료 의원들과 입법으로 뒷받침하겠다. 2016년 발의한 뒤 폐기된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도 재발의해서 대학들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하도록 노력하겠다.―지자체·대학 협력기반 지역혁신 사업(RIS)은 지역균형 발전의 원동력이 될 사업이다. 교육부는 사업 확대를 원하지만 예산부처에선 사업을 축소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김동원 총장=낙후된 지역일수록 필요한 사업이다. 올해 첫 선정된 3개 지역(광주-전남, 충북, 경남) 외 기회의 문을 더 넓혀야 한다. 이미 선정된 지역만 10년간 지원을 유지하고 추가 선정을 안 한다면 불균형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김헌영 총장=RIS는 대학 소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역 내에서도 작은 대학들은 규모를 줄이는 대신 강점이 있는 분야로 특성화시키고, 대학끼리 연계해 공통 수업을 개발할 수 있다. ▽서 위원장=영국은 2013년부터 지역대학과 기업의 산학협력을 돕는 대학기업촉진지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도 RIS를 통해 대학의 혁신을 지역의 혁신으로 이어가야 한다. 정부가 대학과 지역을 연계한 창의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만큼 긍정적인 효과가 나도록 노력하겠다.―거점 국립대가 발전하려면 총장의 역할이 막중하다. 예산 활용과 인사권에 제약이 많아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송 총장=대학의 자율을 많이 얘기하지만 총장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정년퇴임하는 교수가 있으면 다른 과 교수 채용을 위해 잠시 비워 둘 수도 있다. 그런데 대학 평가에 교원 충원율이 반영되니 이마저도 쉽지 않다. 할당된 교원 정원을 융통성 있게 활용하도록 제도가 뒷받침해줘야 한다. ▽김헌영 총장=예산도 마찬가지다. 국립대 교원의 인건비는 당연히 정부 몫이다. 그런데 지금은 등록금의 일부를 떼 인건비로 쓴다. 그만큼 수업에 들어가는 투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등록금으로 급여를 주는 교원만이라도 각 학교가 자율적으로 채용할 수 있다면 교육의 질을 더 높일 수 있다. ―지역 인재 30%를 의무적으로 채용해야 하는 ‘지역인재 할당 의무제’를 지키는 공공기관을 찾기 힘들다. 어떤 개선점이 필요할까. ▽김동원 총장=현재 30% 할당제로는 한계가 있다. 수도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 인재에게도 정원의 20%를 추가로 할당해야 한다. 가령 전북의 국민연금공단에 강원 학생이, 강원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전북 학생도 들어갈 수 있게끔 문이 열려야 한다. ▽김헌영 총장=30%라는 기준도 맹점이 있다. 전문직과 경력직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들을 제외하고 나니 실제 채용 가능 인원은 정원의 10% 수준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공공기관은 책임감을 갖고 지역 인재를 우대해야 한다. 대학도 그에 맞는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지역 거점 대학 중심으로 지역균형 뉴딜 전략을 짜야 한다. ▽서 위원장=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공공기관의 지역 인재 채용을 늘리고 공무원 지방 할당제 비율을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역차별 논란이 없는 지역인재 할당제가 되도록 국가균형발전위원회와 함께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진행=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정리=박성민 기자 min@donga.com}

#1. 7년째 가사도우미로 일해 온 송모 씨(59·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 일하는 집이 8곳에서 5곳으로 줄었다. 고객들이 감염을 우려해 외부인 출입을 꺼리거나, 지출을 줄이려고 서비스 이용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몇 달째 손에 쥔 돈은 월 100만 원을 넘지 못했다. 신용불량자인 삼십대 아들까지 돌봐야 하는 송 씨는 생계가 막막하다. 송 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생활비도 모자라는 판에 병원에 다닐 엄두가 안 난다”고 말했다. #2. 가사도우미 허모 씨(55)는 최근 고객의 요청으로 원목 식탁을 옮기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허리를 굽히기 힘들만큼 통증이 심하지만 꾹 참고 일을 나간다. 신용카드로 돌려 막고 있는 빚을 갚으려면 하루도 쉴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3차 유행이 시작되면서 서비스이용을 중단하는 가정도 늘었다. 허씨는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집에서 1시간 반 걸리는 곳도 마다않고 다닌다. 코로나19 사태로 타격을 많이 받은 업종 가운데 하나가 가사서비스 분야다. 대면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일자리가 급감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는다. 가사서비스 종사자의 주 연령층이 50대 이상 여성(93%)으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데 익숙지 않아서다. 자영업자나 청년일자리 문제만큼 주목받지 못하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가사서비스를 주요 직업군이나 산업 분야로 여기지 않는 사회적 인식도 한 몫 했다. ● 코로나19로 수입 43% 감소 올 6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가사근로자 29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코로나19 이후 이들의 월 평균 수입은 112만 원에서 64만 원으로 약 43% 급감했다. 74%는 방문 가정이 줄었다고 답했다. 가사서비스 플랫폼인 행복한돌봄 사회적협동조합 안창숙 이사장은 “자녀들이 등교를 안 하고 재택근무가 확산되면서 가사서비스 이용을 중단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정부가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등 고용 취약계층에 지급한 긴급고용안정지원금도 가사근로자에겐 큰 도움이 안 됐다. 한국가사노동자협회가 지난달 회원 113명에게 물었더니 12명(10.6%)만 지원금을 받았다고 답했다. 미지급자 중 31.3%는 소득 감소 기준에 미달이었고, 22.9%는 소득 감소를 증명하지 못했다. 가사근로자들은 급여를 현금으로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6.7%는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지 몰라 신청조자 하지 못했다. 가사근로자는 정부 대책 대상에서 제외되기 일쑤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4일 재가 돌봄서비스 노동자와 방과 후 강사 등 9만여 명에게 50만 원을 지원하는 ‘필수노동자 보호·지원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서도 가사근로자는 제외됐다. 최영미 한국가사노동자협회 대표는 “가사근로자는 비공식 통계로 약 40만 명에 이른다”며 “중장년 여성 비중이 높은 가사근로자의 고용 안전망이 흔들리면 여성의 노후 빈곤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 “집안일은 ‘노동’ 아니다”…67년 전 인식 그대로 엄밀히 따지면 한국에서 가사서비스 종사자는 법적 근로자가 아니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 11조(적용범위)에 ‘가사 사용인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후 이 조항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집에서 하는 일은 ‘노동’으로 보지 않는 사고가 60년이 넘도록 바뀌지 않은 셈이다. 이 때문에 가사근로자들은 4대 보험에 가입이 안 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고, 다쳐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한다. 가사근로자의 약 53%는 국민연금 미가입자다. 제대로 된 근로계약서 한 장 없이 일하다보니 처우도 열악하다. 휴게 시간도 불명확해 근무 시간 내내 일을 놓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연차 휴가 등 기본적인 근로자의 권리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국내에서 가사근로자의 처우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대 국회부터 관련법은 꾸준히 발의돼 왔다. 가사근로자를 사회보험 대상으로 포함시키고 최저임금법, 근로기준법 등을 적용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2011년 국제노동기구(ILO)는 ‘가사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고, 정부도 이에 발맞춰 2017년 직접 법안을 발의하는 등 필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관련법은 아직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근로시간이나 최저임금 등 굵직한 이슈에 밀려 해당 상임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에서 늘 후순위로 밀린 탓이다. 가사근로자 지원법은 경영계에서도 통과를 바라는, 노사간 이견이 없는 분야다. 가사서비스 관련 벤처 등 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가사서비스 시장 규모는 연간 약 8조 원 규모로 추산된다. ● 해외에선 가사근로자 ‘노동권’ 인정이 대세 해외에서는 가사서비스를 산업과 복지 측면에서 중요한 분야로 여긴다. 일본과 홍콩은 노동관계법에 가사근로자를 포함하고 있다. 미국은 2010년 가사근로자의 지위를 인정하는 특별법을 제정했다. 오바마 정부는 저소득층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민간시장을 활성화시켰다. 유럽은 대개 정부 주도로 가사서비스 시장을 관리한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가사서비스 바우처를 발급하고 이용금액의 30~50%를 세액공제 해준다. 기업이 바우처를 구입해 직원 복지를 위해 제공할 수도 있다. 1973년 4월 2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가정부도 직업인’ 기사. 본문에는 “서울시 120만여 가구 중 입주가정부를 두고 있는 집이 24만6000가구가 넘는다”고 돼 있다. 가사근로자의 수요 증가 및 이들의 전문성, 처우 등 당시에도 사회적 이슈였다. 동아일보 DB가사근로자는 과거 ‘식모’, ‘파출부’ 등으로 불렸다. 1966년 YWCA가 직업교육을 하면서 하나의 직업군으로 육성됐다. 강제력은 없었지만 당시 YWCA 자료에는 △하루 8시간 노동 △연 1주일 휴가 △연 200% 상여금 및 퇴직금 등 시대를 앞서간 근로 조건들이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들의 처우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앞으로 여성의 경제 활동이 늘어나면 가사서비스 시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은영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산업경영학부 교수는 “인구 고령화로 가정 돌봄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가사서비스는 아이 돌봄, 노인 돌봄 등과 결합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하루빨리 제도가 정비돼 가사근로자들이 직업인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1974년 출시돼 반세기 가까이 소비자의 사랑을 받아온 오리온 초코파이가 현지 입맛에 특화된 제품으로 해외시장을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초코파이 글로벌 매출은 4000억 원을 넘어 14%(이하 전년 동기 대비) 증가했다. 나라별로 선호하는 맛과 식감, 색깔 등을 고려해 만든 다양한 신제품이 현지에서 인기를 끌었다. 오리온에 따르면 중국, 베트남, 러시아 등 전 세계 60여 국가에서 판매 중인 초코파이는 18개 종류다. 초코파이는 40년 가까이 오리지널 맛 한 가지만 판매하던 전통을 깨고 각국의 문화, 식습관, 소비자 취향을 반영한 신제품을 개발했다. 오리온 측은 “국내를 벗어나 ‘글로벌 파이로드’를 개척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인기가 가장 뜨거운 곳은 러시아다. 러시아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총 9가지의 초코파이가 판매되고 있다. 현지인에게 친숙한 잼을 사용한 제품들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직접 농사지은 베리로 잼을 만들어 먹는 것을 즐기는 러시아 국민의 식습관에 착안해 지난해부터 라즈베리, 체리, 망고, 애플시나몬, 크랜베리 초코파이 등을 잇달아 선보였다. 러시아의 올 1∼11월 누적매출은 32% 증가해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 신제품의 매출 비중이 전체의 약 30%를 차지한다. 오리온은 2022년까지 러시아 트베리 지역에 새 공장을 건설해 현지 생산량을 늘릴 계획이다. 공장이 완공되면 연간 생산량 10억 개를 돌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식감에 큰 변화를 준 ‘찰 초코파이’와 화이트초콜릿을 함유한 ‘화이트딸기 초코파이’가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달까지 올해 누적 매출은 15% 올랐다. 2016년에는 차를 즐기는 중국인의 입맛에 맞춘 ‘초코파이 마차’를 출시해 시장 점유율을 크게 높인 바 있다. 진한 초콜릿 맛을 선호하는 베트남에선 2017년 출시한 ‘초코파이 다크’가 주력 제품이다. 봄 한정판으로 출시한 ‘초코파이 복숭아’도 젊은층에서 큰 인기를 끌어 현재 뗏(Tet·베트남 설 명절) 시즌 선물용으로 판매 중이다. 베트남의 연간 초코파이 판매량은 약 6억 개. 현지에선 제사상에도 오를 만큼 인기가 많다. 한국에서도 젊은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춘 신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매출은 9% 이상 올랐다. 2017년부터 출시한 봄 한정판 제품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인증샷을 올리는 소비자들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 11월 출시한 ‘찰 초코파이’는 떡을 첨가해 식감을 크게 바꿨다. 출시 두 달 만에 누적 판매량 1000만 개를 돌파했다. 올 8월 선보인 노란 빛깔의 바나나 화이트 크림을 두른 ‘초코파이 바나나’는 10, 20대의 인기 디저트로 각광받고 있다. SNS에는 “겉과 속이 모두 완벽한 바나나 파이다”, “정말 어렵게 구했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오리온 관계자는 “맛은 물론이고 식감과 모양까지 국가별로 다양한 변신을 시도한 것이 초코파이가 47년 동안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온 이유”라며 “지속적인 혁신으로 초코파이 브랜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말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아동성범죄자 조두순의 출소(12일)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부의 강력범죄자에 대한 출소 후 관리 체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12년의 형기를 마치면서 법적 처벌은 끝났지만 조두순을 포함한 강력범죄자들의 재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특히 범죄자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경우 사후 관리는 더욱 중요하다. 실제로 2018년 기준 정신질환 범죄자의 재범률은 64.9%로 일반 범죄자(44.9%)보다 훨씬 높다. 조두순은 정신질환 판정을 받지 않았지만 심각한 반사회적인 성향과 성도착증 증세를 보였다. 조두순은 2017년부터 2년 동안 심리치료를, 출소 전엔 150시간의 집중 치료를 받았다. 출소하더라도 앞으로 7년 동안 전자발찌를 부착하고, 전담 보호관찰관의 1대1 밀착감시를 받아야만 한다. 문제는 조두순만큼 관심과 관리를 받지 못하는 다른 출소자들이다. 전문가들은 치료감호나 보호관찰 종료 후 사회로 복귀하는 정신질환 범죄자들의 상당수가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우려한다. 재범 가능성을 크게 낮추지 못한 채 사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주무부처인 법무부(관리대상자·범죄자)와 보건복지부(정신질환자)가 ‘핑퐁게임’을 하며 관리 책임을 떠넘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 매년 정신질환 강력범죄 600여 건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검거된 정신질환 범죄자는 7763명으로 전년(7244명) 대비 7.2% 늘었다. 살인, 성폭력, 강도 등을 포함한 강력범죄자는 600명이고, 이 중 성범죄자는 384명에 달했다. 수치만 보고 정신질환자를 범죄 고위험군으로 낙인찍을 순 없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0.151%로, 전체 인구 범죄율 1.43%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강력 범죄만 따져도 정신질환자는 0.055%, 전체는 0.294%로 6배가량 차이가 난다. 통계만 보면 정신질환자가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은 훨씬 낮다는 의미다. 문제는 범죄를 저지른 정신질환자의 사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데다, 재범을 막는 시스템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중대 범죄를 저질렀거나 치료 및 관리가 필요한 정신질환 범죄자는 치료감호소에 수용되거나 출소 후 보호관찰을 받아야 한다. 치료감호소를 나온 뒤에는 지역 정신건강보건센터(이하 정신센터)에 등록하고, 상담과 진료, 사회복귀 훈련을 받을 수 있다. 올 8월 법무부는 치료감호 없이 보호관찰 명령만 받은 출소자도 정신센터 등록대상으로 포함시키는 내용의 ‘보호관찰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하지만 정신센터 등록은 강제 조항이 아니다. 복지부에 따르면 2016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정신센터 등록대상 범죄자 658명 중 320명(48.6%)만 등록했을 뿐이다. 절반 이상은 별다른 조치 없이 사회로 복귀했다. 이상민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치료감호나 보호관찰이 종료됐을 때 재범 위험이 얼마나 줄었는지 더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며 “현재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 지역 정신센터로는 관리 역부족 정신센터에 등록된 이후도 문제다. 전국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정신센터는 241곳. 조현병부터 우울증, 중독, 자살 위험군까지 지역 주민들의 다양한 정신건강 문제를 관리한다. 사례관리 담당자 1인당 보통 60~100명을 맡는다. 기존 대상자를 관리하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정신질환 범죄자까지 맡는 건 과도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치료감호나 보호관찰을 받을 정도면 사후관리가 필수인 강력범죄자일 가능성이 높다. 센터 직원 90% 이상이 여성인데, 성범죄 전과자를 개별상담하거나 자택을 방문하는 일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김유라 수원시 성인정신건강복지센터 팀장은 “센터 직원들이 성범죄에까지 전문가일 수는 없다”며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출소자까지 센터에서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보호관찰 대상자 관리가 힘들어 직장을 옮기는 경우도 있다. 한 정신센터 관계자는 “사례관리자가 지나친 관심을 보이거나 센터에 갑자기 찾아오는 등의 돌발 행동을 보여 센터를 관두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수도권의 한 정신센터에서는 보호관찰 대상자가 일반 사례관리자를 대상으로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전준희 정신건강복지센터협회장은 “중독, 자살 등 새로운 정신건강 이슈가 생길 때마다 지역 정신센터가 업무를 떠맡는데, 범죄자 관리는 직원의 안전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보호관찰소와 정신센터 사이에 강력범죄 재발이 우려되는 출소자를 관리하는 별도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걸음마 수준 ‘치료 사법’ 해외에서는 정신질환 범죄자를 정부와 사법기관, 지역사회가 함께 적극 관리한다. 인력과 시설을 더 투입해서라도 추가 범죄를 막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20~30년 전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이른바 ‘치료 사법(Therapeutic jurisprudence)’이다. 이화여대 산학협력단이 지난해 법무부에 제출한 용역보고서 ‘외국의 정신질환범죄자 관리 및 의료복지체계’에서는 미국 뉴욕주의 사례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처벌할 때부터 지역사회 적응 가능성을 키우는 것이 이 제도의 핵심이다.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1997년 플로리다주에서 시작돼 전국 350여 곳으로 확대된 ‘정신보건법원’이다. 유죄를 인정한 정신질환자를 석방한 뒤 지역 정신보건기관에서 치료하는 제도다. 판사가 정신질환의 호전 여부, 재범 가능성 등을 판단해 사건을 종료하거나 프로그램 연장을 결정한다. 주로 경범죄를 저지른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했지만 최근에는 더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신청을 받고 있다. 법 집행이 끝난 뒤엔 지역사회 보건기관이 사후 관리를 맡는다. 정신건강 및 약물남용 상담, 구직훈련 등을 받을 수 있다. 기관 직원 1명당 담당하는 일반 정신질환자가 30명가량인데, 정신질환 범죄자의 경우 직원 1명이 10명을 맡아 더 집중적으로 관리한다.한국은 치료 사법의 역사도 짧고 인력과 시설도 부족하다. 현재 운영 중인 곳은 공주치료감호소와 부곡법무병원이 전부다. 지난해 말 기준 수용자는 1012명. 범죄 유형별로는 살인이 336명(33.2%)으로 가장 많았고, 성폭력 184명(18.2%), 폭력 140명(13.8%), 방화 74명(7.3%) 등이다. 문제는 치료감호소가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국립법무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의 의사 정원은 15명이지만 현원은 8.5명(전문의는 1명, 전문의가 아닌 의사는 0.5명으로 계산)에 불과하다. 정신과 의사 1명이 담당하는 수용자는 121명에 이른다. 적절한 치료와 관리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엔 법원이 각종 중독이나 정신질환, 치매 등을 앓는 범죄자를 격리시키는 대신 치료를 병행하도록 판결을 내리는 사례도 적잖다. 하지만 ‘범죄자에게 지나치게 온정을 베푸는 것 아니냐’는 반대 여론이 커 적극적인 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문가들은 형기를 마친 정신질환자의 지역사회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이런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의 치료를 위해 세금을 쓰고, 인력을 투입하는 것이 더 큰 사회적 손실을 줄이는 방법이라는 의미다. 안성훈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아닌 이상 다수의 정신질환 범죄자들은 결국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돼 있다”며 “이들을 격리시키는 것뿐 아니라 재범 가능성을 낮춰 사회로 돌려보내는 것도 국가의 의무”라고 강조했다.박성민기자 min@donga.com}

상상마당 부산의 5층 청년창업 지원 공간에는 오래된 검정고무신 한 켤레가 전시돼 있다. 신발 산업의 메카인 부산의 보생고무산업에서 만든 제품이다. 보생고무산업은 1960년대 ‘타이야표(타이어표) 고무신’으로 유명했던 회사다. 검정고무신을 전시해둔 건 상상마당 부산의 위치가 보생고무산업 본사가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기술 개발로 국가 주축 산업을 일궜던 선배 기업인들의 창업가 정신을 잊지 말자는 뜻도 담고 있다. 신발과 부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60년대 주요 신발 회사 8곳 중 6곳이 부산에 모여 있었다. 1962년 미국에 장화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달러를 벌어들이는 효자 노릇을 했다. 고무신에 이어 운동화까지 히트를 치면서 부산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1990년 부산 신발 기업의 수출 규모는 약 43억 달러(약 4조6633억 원)로 정점을 찍었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에 의존했던 신발 산업은 이후 부침을 겪었다. 자체 브랜드의 경쟁력이 문제였다. 비록 예전만큼 주목받지는 못해도 부산의 신발 제작 노하우와 기술력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상상마당 부산 2층에 위치한 신발 편집숍 ‘파도블(PADOBLE)’은 인지도가 떨어져 판로 확보가 어려운 부산의 중소 신발 기업들에 고객과 만날 기회를 제공한다. 파도블에는 부산의 중소 신발 브랜드 20곳이 입점해 있다. 단순히 신발 판매에만 그치지 않고 고객이 각자의 개성에 따라 신발을 디자인할 수도 있다. 즉석에서 작가들이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주는 서비스다. 자신의 신발을 직접 디자인해 보는 ‘원 데이 클래스’도 운영된다. 이상민 KT&G 상상마당 파트장은 “상상마당 부산은 기획 단계부터 지역과의 상생을 고려해 공간을 구성했다”며 “지역 산업, 관객, 소비자와 함께하는 공간으로 키워 나가겠다”고 말했다.부산=박성민 기자 min@donga.com}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김병준 씨(22)는 3년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김 씨가 세상과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로 그리는 대다수 발달장애인 작가들과 달리 김 씨의 작품은 역사, 시사 등 사회적 이슈가 주요 소재다. 지난달 말 부산 중구 ‘KT&G 상상마당 부산’ 전시관에서 만난 김 씨는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소방관이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등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 씨와 같은 장애인들은 문화 네트워크가 부족해 관객과 만날 기회가 많지 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최근 전시 기회는 더 줄어들었다. KT&G 복지재단이 올 11월부터 주최한 장애인 작가 전시회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는 이런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 작가들이 관객과 소통하고 사회 참여 기회를 넓히는 무대다. 작가 선정에서 기초생활수급자를 우대하고, 선정된 작가들에게는 창작지원금(300만 원)을 지급한다. KT&G가 제작하는 내년도 달력에도 출품작들이 실린다. ○ 청년창업가 지원하는 ‘스타트업 허브’ 올 9월 개관한 ‘상상마당 부산’은 지역의 문화·예술·창업 허브 역할을 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서울 홍대, 강원 춘천 등에 이은 5번째 공간이다. 지상 13층, 연면적 2만 m² 크기로 현재 운영 중인 상상마당 중 최대 규모다. 부산의 최대 상권 중 하나인 서면에 자리하고 있다. 개관 후 두 달여 만에 7만 명이 방문할 만큼 2030 세대들의 호응은 뜨겁다. 기존의 상상마당이 전시, 공연 등 문화예술공간 위주였다면, 상상마당 부산은 청년창업가와 1인 미디어 제작자, 소상공인 지원을 통해 지역과의 상생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곳이 6층의 청년창업 지원 공간이다. 물류 플랫폼, 지역 콘텐츠 제작 등 각양각색의 스타트업 7곳이 둥지를 틀었다. 언뜻 보면 일반 공유 오피스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단순히 사무실을 빌려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투자자 연결, 법무 지원 등 스타트업의 성장을 위한 액셀러레이터(창업기획자) 역할도 한다. 입주 두 달 만에 투자 유치금은 약 50억 원에 이른다. 입주사 지원을 총괄하는 쿨리지코너인베스트먼트의 강민석 수석심사역은 “지역에서도 규모 있는 스타트업을 키워 내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입주사들의 만족도도 높다. 소규모로 시작하는 스타트업은 초기에는 사무 공간을 찾는 게 어렵지 않고, 비용 부담도 적다. 하지만 기업 규모가 커지면 임차료 등 유지비 부담이 커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은 상황이 다르다. 물류 스타트업 샌디의 염상준 공동대표는 “공유 오피스의 절반 이하 가격에 사무실을 쓸 수 있는 데다 투자자 소개도 받을 수 있어 굳이 서울로 이전하지 않아도 될 만큼 환경이 훌륭하다”고 말했다. ○ 문화 허브에서 지역 상생 거점으로 2층 디자인 스퀘어는 부산을 소재로 하는 상품이나 지역 신진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곳이다. 기존 상점과 달리 제작자와의 상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판매가 부진한 제품에 대해선 기성 디자이너 등과 협업해 고객의 외면을 받은 이유, 개선점 등을 알려주는 식이다. 지역 디자인 산업 생태계가 유지되고 성장하도록 디딤돌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최근 수요가 급증한 1인 미디어 제작자들을 위한 스튜디오도 마련돼 있다. 촬영과 편집, 실시간 방송까지 가능하다. 1층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지역 독립서점 등과 연계해 계절별로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열고 있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5개의 회의실은 각종 모임이나 스터디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다. 전국 상상마당의 연간 방문객은 지난해 기준 연간 180만 명에 이른다. 지역 상권이 성장하는 효과도 뒤따랐다. 백복인 KT&G 사장은 “상상마당 부산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지역 청년들과 소통하는 허브로 키워 나가겠다”고 말했다.부산=박성민 기자 min@donga.com}

지난달 26일 자택에서 직접 혈압을 잰 이모 씨(93)는 수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수축기 혈압이 209mmHg까지 올라 정상범위(120mmHg)를 한참 벗어났기 때문이다. 평소 고혈압을 앓고 있던 이 씨는 혈압이 일시적으로 높아진 것으로 여겨 병원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수치가 이 씨가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을 통해 보건소 담당 직원에게 자동으로 전달됐다. 전날 측정값(170mmHg)도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담당 간호사는 이 씨에게 전화를 걸어 곧바로 내원하도록 안내했다. 3일 동안 약 처방을 받은 뒤에야 이 씨의 혈압은 평소 수준으로 돌아갔다. 이 씨가 이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보건복지부가 지난달부터 시작한 ‘비대면 건강관리 서비스’ 덕분이다. 기존의 65세 이상 노인 대상 방문 건강관리 서비스를 비대면으로 전환한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 자택 방문에 제약이 생긴 점을 고려했다. 혈압 혈당 활동량 체중 등 건강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다. 전국 24개 보건소에서 시범사업을 시작했고, 이 씨가 거주하는 경기 평택시 평택보건소에서도 현재 100명이 서비스를 이용 중이다. ○ 코로나가 불 지핀 ‘비대면 의료’ 코로나19 사태 이후 의료 현장의 바뀐 풍경 중 하나는 이 같은 ‘비대면 의료’의 활성화다. 비대면 의료는 원격수술 및 모니터링 등을 포함한 ‘원격의료’와 인공지능(AI) 등 질병 예방을 위한 소프트웨어 제품을 뜻하는 ‘디지털 치료제’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현행 의료법상 국내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대상으로 원격으로 진단이나 처방을 하는 것은 불법이다. 의료진 간 협진만 가능하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원격의료의 빗장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정부는 올 2월 전화 상담과 처방을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병원 내 감염 위험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복지부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전화 상담은 총 103만9571건, 진료비 청구액은 약 130억 원에 이른다. 올 2월 대구경북 지역 무증상·경증 코로나19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개설된 생활치료센터에서도 원격의료가 도입됐다. 환자의 체온, 혈압 등 생체 신호가 주요 병원으로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의료진이 부족한 상황에서 환자 접촉을 최소화하면서도 의료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서울대병원도 경북 생활치료센터에 모니터를 설치해 원격 화상진료를 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강원도의 원격의료 시범사업 참여 병원은 지난해 1곳에서 올해 8곳으로 늘었다. 김광준 세브란스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의료기기의 발달로 병원에서만 할 수 있었던 검사가 자택에서도 가능해졌다”며 “고령 환자와 만성질환자 증가로 원격의료 도입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 원격의료 규제 완화 추세 원격의료를 먼저 도입한 해외에서도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의료 서비스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 일본은 올 4월부터 온라인과 전화를 통한 복약 지도가 가능해졌다. 기존에는 첫 진료 때는 의사와 꼭 만나야 했지만, 현재는 초진부터 원격의료가 가능하다. 미국은 의료인이 부족한 지역에서만 원격의료 보험(메디케어)을 적용하던 것을 모든 지역으로 확대했다. 급여 대상 항목도 80여 개를 추가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원격의료 도입까지 갈 길이 멀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2000년 첫 시범사업 시작 후에도 개원의 중심의 대한의사협회(의협)의 반발로 도입은 번번이 무산됐다. 오진 가능성이 우려되고, 상급 병원에 환자가 쏠려 동네 병의원이 고사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오히려 규제가 강화돼 서비스가 중단된 경우도 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은 2011년부터 해외 원격 화상진료를 해 왔지만 2017년 서비스를 중단했다. 원격진료에 제약이 없던 해외 환자에 대해서도 규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의료계에서도 원격의료 도입을 더 늦출 수 없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 정세영 분당서울대병원 디지털헬스케어 연구사업부 교수는 “비디오 가게가 망하고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는 시대가 됐듯이, 원격의료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며 “다만 1차 의료기관을 위한 대책 마련과 의료 사고 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등 정책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특허 출원부터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 발표, 연간 10억 원의 비용 절감까지. 대학의 석박사급 연구 인력과 기업이 머리를 맞대 이뤄낸 성과들이다. 기업이 실제 현장 노하우와 그동안 쌓아온 데이터를 제공하자 학생들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현장에 바로 적용될 만한 기술을 선보였다. 혁신 동력이 부족한 기업엔 자극이, 학생들은 그간 배운 이론을 산업 현장에 적용해 보는 기회가 됐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일 ‘제1회 산학 프로젝트 챌린지’에서 선정된 20개 수상 팀을 발표했다. 전국 190개 기업과 54개 대학의 대학원생들이 총 215개 프로젝트를 출품했다. 100개 팀이 본선에 올라 시제품 제작과 애로기술 해결, 특허 출원 여부 등을 심사해 최종 20개 팀을 선발했다. 장관상을 받은 포스텍(포항공대) 알바트로스 팀은 ‘프로세스 마이닝’ 기술을 적용해 포스코 후판 제품 공정의 부하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프로세스 마이닝은 기업 정보 시스템에 기록된 데이터를 분석해 프로세스를 단축시키거나 문제점을 찾아내는 빅데이터 및 인공지능(AI) 기술이다. 포스코 측은 이 기술을 기반으로 생산 계획을 최적화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프로젝트를 이끈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석사 2년 차 박신념 씨(27)는 “직접 현장을 방문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며 “우리가 만든 AI 기술이 산업 현장에서 바로 적용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실생활에 밀접한 기술들도 눈길을 끌었다. 인하대 A.Eye 팀은 기업의 주변인식 시스템과 딥러닝 기술을 이용해 사람의 행동만으로 차량 트렁크를 자동으로 열리게 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 렌즈의 왜곡을 보정하는 기술을 개발해 SCI급 논문을 발표했다. 충남대 CNU On·Fire팀은 선박화재 진압을 도울 수 있는 자율형 초동진압 소화체계를 개발해 특허까지 출원했다. 산학협력이 취업으로 이어지는 성과도 있었다. 명지대 대기만성 팀은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체임버 안의 공정상태를 직접 진단하는 기기를 개발했다. 김재환 씨(전자공학과 석박사 통합과정 3년)는 “기업과 꾸준히 소통하면서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며 “팀원의 취업뿐 아니라 해외 학술지 논문 게재 등 실력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산학협력은 실험실과 기업, 이론과 현장의 괴리를 메우는 기회가 된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이병영 한밭대 교수는 “기업과 대학의 교류는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혁신 인재를 키우고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위즈코어의 황규순 이사는 “타성에 젖은 기업들은 관행을 바꾸기가 어려운데, 학생들과 협업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산업부는 1995년부터 신산업 및 주력산업 분야 인재 양성을 위해 ‘산업혁신 인재성장 지원산업’을 추진 중이다. 올해는 34개 산업 분야 대학원생 3000여 명을 지원했다. 산업부 강경성 산업정책실장은 “4차 산업혁명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으로 글로벌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며 “미래 신산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혁신 인재 발굴에 적극 나서겠다”고 말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사법부가 현대의학의 상식마저 무시했다.”(서홍관 국립암센터 금연지원센터장) “10년 전 판결보다도 인식이 후퇴했다.”(배금자 변호사·국내 첫 담배소송 대리인)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이 국내외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20일 패소하자 보건의료계에선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의학적으로 이견이 없는 흡연과 암 발생의 연관성마저 재판부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흡연은 개인의 선택이고, 그 피해의 책임도 본인에게 있다’는 인식도 여전했다. 물론 의학적 판단과 사법부의 판결은 다를 수 있다. 흡연과 암 발병의 인과관계가 인정되더라도 제조사의 배상 책임은 여러 사실관계를 고려해 종합적으로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서 담배회사의 책임을 단 1%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제 1심이 끝났을 뿐이지만 향후 담배회사의 책임을 덜어주는 면죄부가 될 가능성도 커졌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국내 첫 흡연 피해 소송은 1999년 시작됐다. 그해 9월 한 폐암 환자가 개인소송을, 12월엔 폐암 환자 6명이 집단소송을 냈다. 소송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흡연 피해를 보상받은 사례는 없다. 2014년 대법원이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주면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번 소송은 흡연 피해자 개인이 아니라 건보공단이 “흡연으로 인해 발생한 보험급여 지출 약 533억 원을 손해배상하라”며 KT&G와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를 상대로 2014년 낸 소송이다. 폐암(소세포암·편평세포암)과 후두암(편평세포암)이 발병해 2003∼2013년 건보공단이 진료비를 부담한 가입자 3465명이 대상이다. 하루 한 갑 이상씩 20년 이상 담배를 피운 흡연자들만 추렸다. 재판의 쟁점 중 하나는 ‘건보공단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느냐’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보험급여 지출은) 공단이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고, 담배회사의 행위와 보험급여 지출 사이에 인과관계 인정이 어렵다”며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을 대체로 존중하는 편이다. 물론 주 정부가 나서 소송을 내고 배상 합의까지 이뤄낸 미국 사례도 있다. 하지만 일종의 구상권처럼 흡연 피해자들을 대리해 건보공단이 나섰을 때, 재판부가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암 발병 인과관계 인정 안 돼 “후퇴한 판결” 이번 판결에서 전문가들이 가장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은 흡연과 암 발병의 인과관계조차 재판부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판결문은 “개인의 생활습관, 유전, 주변 환경, 직업적 특성 등 흡연 이외 요인들에 의한 발병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다른 요인들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책임도 원고에게 있다고 했다. 의료계에선 “흡연과 암 발병의 연관성을 얼마나 더 증명해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정금지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논문 ‘흡연이 우리나라 국민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하루 30개비 이상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폐암으로 사망할 위험이 8.9배 높았다. 이는 일반인 27만여 명의 1994∼2013년 흡연 이력과 통계청의 사망원인을 분석한 결과다. 이번 재판에서 인용된 연구에서는 흡연자의 폐암 사망 가능성이 더 크고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재판부는 폐암을 조직 형태에 따라 구분해 위험도를 살폈다. 판결문에는 “비흡연자 대비 흡연자의 상대위험도가 소세포암은 21.7배, 편평세포암 11.7배, 후두암 5.4배, 선암은 2.1배”라고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결국 담배가 암 발병 가능성을 높인다는 사실은 받아들이면서도, ‘인과관계’는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재판부가 의학적 관점을 무시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30년 이상 흡연해 폐암에 걸렸을 때 담배가 폐암 발생에 미치는 위험도를 의학계에서는 90% 이상으로 판단한다. 지선하 연세대 보건대학원 역학건강증진학과 교수는 “역학적으로 질병의 원인을 단 한 가지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번 판결은 흡연 이외엔 다른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아야 인과관계를 인정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번 재판 대상이었던 흡연자들이 걸린 암은 이미 사법부가 흡연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바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2011년 서울고법은 집단소송 환자 중 4명에 대해 “흡연과 발병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소세포암과 편평세포암 등이다. 항소심에서 인과관계를 인정받지 못한 비소세포암과 폐포세포암 환자 2명이 상고해 2014년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은 것이다. 건보공단은 승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인과관계를 인정받은 암에 걸린 환자들만 추려 소송을 냈다. ○ 담배회사 제조·표기 결함엔 ‘면죄부’ 판결문 내용을 종합하면 “암 발병의 책임은 담배회사보다 흡연자에게 더 크다”로 귀결된다. 흡연 소송의 오랜 쟁점 중 하나는 담배회사의 ‘제조물 책임’이다. 담배의 유해성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할 책임이 제조사에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담배회사들이 담배의 유해성을 알고서도 위험을 줄일 노력을 해왔는지, 오히려 각종 물질을 첨가해 중독성을 높였는지 등을 살펴봐야 한다. 그 위험성을 제대로 고지했는가도 고려 대상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재판부는 담배회사에 면죄부를 줬다. 재판부는 “담배 소비자는 안정감 등 니코틴의 약리 효과를 위해 흡연을 하는데 니코틴을 제거하면 효과를 얻을 수 없다”며 “흡연자가 중독되지 않을 정도의 니코틴 수준을 설정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또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경고를 담뱃갑에 표시했다”며 담배회사에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반면 흡연이 암 발병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은 원고 측에 돌렸다. 전문가들은 이는 제조물 책임 소송이나 환경 피해 소송에서 피해자의 인과관계 입증 책임을 완화하는 최근의 경향에도 역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배금자 변호사는 “제품의 어떤 결함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는지는 제조사나 전문가가 아니라면 알 수 없다”며 “흡연자 개인에게 인과관계를 입증하라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강조했다. ○ 해외선 천문학적 배상금 판결 한국보다 흡연 소송의 역사가 긴 해외는 어떨까. 미국은 1954년 흡연 피해자의 첫 소송이 있은 뒤 1998년 첫 배상을 받아내기까지 40년 이상이 걸렸다. 그 사이 진행된 소송만 800여 건에 이른다. ‘담배가 해롭다는 것을 알고서도 흡연을 지속했다면 보상의 책임도 없다’는 담배회사의 논리를 뒤집지 못했다. 다윗(흡연 피해자)과 골리앗(담배회사)의 싸움에서 흐름이 바뀐 건 주 정부가 나서면서부터다. 1994년 미시시피주를 시작으로 1997년에는 50개 주가 흡연 피해 소송에 동참했다. 개인은 흡연 피해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소송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주 정부가 나서자 내부고발자가 나타났다. 담배회사들이 니코틴의 중독성을 알고서도 은폐했다는 고발이 잇따른 것이다. 담배회사에 대한 분노가 들끓으면서 여론도 바뀌기 시작했다. 담배의 유해성을 숨긴 제조사에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결국 담배회사들은 향후 25년 동안 2460억 달러(약 272조 원)를 배상하기로 합의하고 소송을 끝냈다. 그 대신 주 정부는 다시는 흡연 피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았다. 1998년 캐나다 퀘벡주에서 제기된 소송은 2015년 17년 만에 156억 달러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캐나다 집단소송은 현재 진행 중인 국내 소송과 상당히 유사하다. 오히려 흡연자들의 조건은 암 발병과의 연관성을 인정받기에 한국보다 불리했다. 캐나다는 △12갑년(1년 동안 하루 담배 한 갑 이상을 흡연했을 때) 이상 흡연 △폐암 전체, 인후암 중 편평세포암, 폐기종 진단 환자들이 배상을 받았다. ○ “단 10%의 책임이라도 물어야” 담배 소송에서 보건단체나 의료계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금전적인 배상이 아니다. 담배라는 기호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흡연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려져 흡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담배 유해성분 정보가 가장 베일에 싸인 국가 중 하나다. 전 세계 67개 나라가 담배 함유 성분을 정부에 제출하고, 51개 나라는 국민에게도 공개한다. 하지만 한국은 이런 의무가 없다. 담배회사의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담배 규제가 약한 국가에서 흡연 피해의 책임까지 면죄부를 주는 것은 특혜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사법부가 흡연 피해에 대한 제조사의 책임을 물을 때 이런 배경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보공단은 다음 달 11일까지 항소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1심에선 완패했지만, 소송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항소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백유진 대한금연학회장은 “흡연은 중독의 문제이고, 이는 개인의 의지로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오래된 정의”라며 “담배회사가 가향 물질로 중독성을 높이고, 함유 성분을 공개하지 않아 유해성을 은폐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담배회사의 책임을 단 10%라도 인정하는 진일보한 판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min@donga.com}

입양아와 미혼모 지원 사업 등을 하는 동방사회복지회는 2014년 코피노(Kopino·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돌봄 사업을 시작하려다 제동이 걸렸다. 코피노를 위한 어린이집을 세우려고 했지만, 해외에서 이뤄지는 교육사업은 사회복지법인의 사업 범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방사회복지회의 등록 기관인 서울시와 보건복지부에서도 “정관상 어쩔 수 없다. 따로 법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현행법상 비영리 공익법인은 사업별 주무 부처에서 설립 허가와 관리 감독을 받아야 한다. 문화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 복지사업은 복지부 산하에 등록하는 방식이다. 동방사회복지회는 결국 2017년 외교부의 허가를 받아 해외사업을 위한 별도의 사단법인을 만든 후에야 본격적인 코피노 지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업 분야가 다양한 비영리 공익법인들은 이처럼 활동 범위를 넓힐 때마다 별도의 법인을 만들어야 한다. 관리 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김현기 동방사회복지회 평택복지타운 대표는 “비영리 공익법인의 활동 범위는 갈수록 다양해지는 반면 관련법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서 “지원 대상을 넓히거나 모금액을 사용할 때마다 제약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 법무부 산하 공익위, ‘옥상옥’ 우려 비영리 공익법인과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익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부처별로 쪼개진 비영리 공익법인 관리를 일원화해 담당 공무원들의 전문성과 운영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뜻이다. 부처별 중복 회계보고 등 행정적 비효율을 막는 효과도 있다. 문재인 정부도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시민공익위원회’(가칭) 설치를 내세웠다. 정부 출범 후에도 지지부진하던 공익위원회 출범은 지난달 법무부가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장의 반응은 대체로 기대보다 우려가 크다. 개정안이 공익법인의 공정성, 투명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효율적인 운영이나 지원을 위한 기구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공익위원회를 법무부 소관으로 두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익법인들은 법무부 개정안이 옥상옥 규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설립 허가와 취소는 여전히 주무 부처가 맡고, 관리 감독 및 지원은 공익위원회가 맡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익위원회에도 ‘인정 및 인정 취소’ 권한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공익법인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한 공익법인 대표는 “정부 국정과제 중 공익위원회 설치는 ‘반부패 개혁’ 범주에 있었다”며 “지난 정부 때 K스포츠·미르재단 사건을 겪으면서 특혜성 공익법인 설립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익위원회의 인적 구성이 정치적 독립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개정안은 위원장과 상임위원 외에 대통령이 지명하는 고위 공무원 2명, 국회가 추천하는 민간위원 7명 등 11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국회 추천 중 여당 몫을 고려하면 정부의 입김이 작용할 여지가 더 커진 것이다. ○영국 “등록은 쉽게, 관리는 깐깐하게” 전문가들이 제안한 공익위원회는 공익법인의 설립부터 사후 관리까지 일원화한 ‘컨트롤타워’ 형태다. 국가인권위원회처럼 입법·사법·행정부 중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아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보장받는 조직이다. 배원기 홍익대 경영대학원 교수(공인회계사)는 “독립된 기구가 아니라면 최소한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해야 한다”며 “법무부 산하의 공익위원회는 오히려 공익법인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민간의 공익활동을 장려해온 국가들은 독립적인 비영리단체 관리 기구를 두는 곳이 적지 않다. 1858년 설립된 영국의 자선사업감독위원회(Charity Commission)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약 17만 개 단체를 관리한다. 허가제가 아니라 법인 등록이 쉬운 대신에 관리 감독이 깐깐하다. 비리 조사나 은행 계좌 동결 등 준(準)사법기관의 역할도 갖는다. 호주도 2012년 ‘호주 자선 및 비영리 위원회(ACNC)’를 설립해 비영리 부문을 활성화하고 있다. 2018년 기준 국세청 의무공시 대상 공익법인은 9663개, 총 자산 규모는 256조 원에 이른다. 하지만 관리 감독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역할에 제약을 받거나 회계 부정 등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사건도 반복되고 있다. 이일하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이사장은 “국내 비영리 공익법인들은 주무 부처별로 관리 감독과 기부금 행정처리 기준이 모두 달라 비효율적”이라며 “민간의 공익활동을 장려하고, 합리적으로 감독할 수 있는 공익위원회 설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외출 시 마스크 착용이 필수가 되면서, 입에서 풍기는 냄새로 고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입 주위 근육 운동 감소로 인해 구강 내 자정 작용이 줄어들면 입안 세균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롯데제과는 꼼꼼한 칫솔질과 함께 껌 씹기가 입 냄새 제거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껌을 씹어 침 분비가 활성화되면 세균을 줄일 수 있다. 롯데 자일리톨껌은 애플민트향과 쿨링향 등이 함유돼 있어 입안을 상쾌하게 해준다. 또 재석회화 효능이 있는 해초 추출물인 후노란, 인산칼슘 등이 들어 있어 치아 관리에 도움이 된다. ‘자일리톨 프로텍트’에는 프로폴리스 과립이, ‘자일리톨 화이트’에는 화이트젠이 함유돼 있다. 올해 선보인 ‘녹여먹는 자일리톨’은 마스크를 쓴 상태에서 즐길 수 있는 청량 캔디 형태다. 롯데제과 관계자는 “자일리톨이 함유된 천연 당분껌을 씹으면 충치균 감소에 효과를 볼 수 있다”며 “자일리톨 함량이 감미료 중량 대비 50% 이상이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밝혔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김성욱 씨(가명·21)는 올 5월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경기 의정부시의 3평 남짓한 원룸이 그의 첫 보금자리다. 또래에게 독립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성욱 씨에겐 남다르다. 그는 ‘경계선 지능’ 청년이다. 지능지수(IQ) 85 이상은 정상, 70 이하는 지적장애로 분류된다. 경계선 지능은 IQ가 71~84 사이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아닌 그야말로 경계인이다. 홀로 일상생활은 어렵지만 장애인이 받는 돌봄이나 복지 혜택을 기대할 수 없는 사각지대이기도 하다. 지난달 말 찾아간 김 씨의 방은 말끔했다. 책상 위엔 좋아하는 로봇 피규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매일 청소도 잊지 않는다. 혼자 사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재밌다”며 웃어 보였다. “스무 살 때까지는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이젠 집도 있고 식비 걱정을 안 해도 되니 좋아요.” 그는 석 달 전부터 사회적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와플 가게에서 주 4일씩 인턴으로 근무 중이다. 월 60만 원 남짓을 벌어 생활비로 쓰고 저축도 한다. 자립의 첫 발을 떼기까지는 순탄치 않았다. 다른 경계선 지능 아동들이 그렇듯 학교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겠다는 성욱 씨를 아버지는 외면했다. 어머니는 배움이 느린 김 씨에게 지쳐 폭언을 하거나, 때로는 손찌검도 했다. 집을 나온 그는 가족과 연락을 끊고 청소년 쉼터 세 곳을 2년 간 전전했다. 김 씨의 자립을 지원하고 있는 박현동 경기북부청소년자립지원관장은 가출이 아니라 ‘탈출’이라고 했다. “자녀가 경계선 지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들이 많아요. ‘왜 이것도 못하느냐’며 체벌을 하거나 심하면 학대로 이어지죠.” 부모의 포기나 가정불화로 보호시설에 머물다가 퇴소하는 20대 초반 경계선 지능 청년은 매년 300~400명에 이를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김 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다. 아름다운재단과 경기북부청소년자립지원관 이 올해 시작한 ‘청소년 주거복지 지원사업’ 대상(5명)으로 선정돼 보증금과 월세를 지원받고 있다. 생계비와 심리 상담도 받는다. 학교나 가정에서 아무도 알려 준 적 없는 금융 교육도 받고 있다. 주거 지원이 끝나 ‘진짜 자립’을 해야 할 때를 대비해 보증금도 모으는 중이다. ● 인구 12~15%는 ‘느린 학습자’ 경계선 지능은 우리 주변에서 생각보다 흔하게 볼 수 있다. 미국(2010년)은 전체 학생 집단의 약 14%, 영국(2011년)은 12.3%가 경계선 지능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스라엘에선 2013년 징집 대상 16~17세 청소년 약 50만 명을 조사한 결과 15.3%가 경계선 지능 판정을 받았다. 이를 고려하면 한국도 학령기 아동 중 약 80만 명이 경계선 지능으로 추산된다. 30명인 한 학급에서 서너 명은 여기에 속한다는 의미다. 이들의 첫 번째 고비는 학교에서 찾아온다. 경계선 지능은 ‘느린 학습자’로 불린다. 일반 학생들보다 배움이 느려 더 많은 반복 학습이 필요하다. 어렵게 하나를 배워도 응용이 어렵다. 경쟁이 치열한 일반 학교에선 적응을 못하거나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고, 장애 아동 위주인 특수학교는 자리가 부족하거나 이들에게 맞는 교육 과정이 마땅치 않다. 가정과 학교에서 제대로 관리 받지 못한 아이들은 상태가 더 악화되기도 한다. 경계선 지능 청년 지원 프로젝트 ‘더딤(The DIM·The Do It Myself)’에서 활동 중인 서미연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과장은 “맞춤형 지원이 있으면 정상 지능 범주로 발전하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부모에게 방치되거나 학대받는 아이들은 인지 기능이 장애 수준으로 퇴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최근엔 스마트폰을 통해 비대면 관계에 빠져드는 청소년도 늘어나고 있다. 이는 은둔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은둔형 외톨이’ 중에도 경계선 지능 청년이 비중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본다. 배승민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온라인에서 게임 아이템을 사고팔거나 캐릭터를 갖고 놀면서 가족이나 친구에게 못 받는 관심을 대리 충족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과정에서 사기 피해를 입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 스무살이 최대 고비…선제적 지원이 사회적 비용 낮춰 성인이 되면 학교라는 보호막마저 사라진다. 진학과 취업 등 선택지가 다양한 또래들과 달리, 경계선 지능 청년들의 스무 살은 막막하다. 취업 시장에서 이들은 가장 후순위다. 비장애인에게는 업무 능력에서 밀리고, 고용 할당제가 있는 장애인처럼 최소한의 일자리를 보장받지도 못한다. 김남열 씨의 아들(25)은 IQ 83으로 정상 기준에 살짝 못 미친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기는 녹록치 않았다. 어렵게 구한 아르바이트도 2, 3일을 버티지 못했다. 단순 반복 작업은 그럭저럭 해내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워서다. 김 씨는 “실패 경험이 계속 쌓이다 보니 더 자신감을 잃게 됐다. 경계선 지능 아이들이 일반인과 같은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부모의 돌봄을 기대할 수 있는 아이들에 비해 아동보호시설에서 퇴소하는 청소년의 일자리 문제는 더 시급하다. 지난해 한국장애인개발원이 발표한 ‘아동양육시설 퇴소 후 경계선 지능 아동 지원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퇴소 예정 아동의 7%가 경계선 지능 판정을 받았고, 15%는 경계선 지능으로 의심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지원으로 종사자들의 49.1%가 취업이라고 답했고, 원활한 대인관계(20.4%), 주거(12.2%)가 뒤를 이었다. 전문가들은 자립 의지가 있는 경계선 지능 청년들에게 사회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해정 한국장애인개발원 부연구위원은 “일본은 경계선 지능 학생을 장애 아동이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와 같이 특별보호 대상에 포함시켜 직업 교육 등 맞춤형 지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지가 발달한 유럽 선진국들은 경계선 지능을 복지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눈높이 직업 교육을 통해 이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정책의 우선 목표다. 경계선 지능 청소년을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게 이들이 반사회적 성향을 띄거나 노숙인이나 공적 부조 대상이 되는 것을 막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독일의 카리타스 돈보스코 직업교육훈련소는 경계선 지능을 포함한 경증 장애를 가진 16~25세 청소년을 위한 교육 기관이다. 교사 55명이 600여 명의 학생을 돌보는데, 경계선 지능 청소년이 약 20%를 차지한다. 청소, 자동차정비, 요리 등 18가지의 직업군을 실습 위주로 교육한다. 비장애인이 2, 3년 걸리는 교육을 3, 4년에 걸쳐 가르친다. ● “심리적 차상위계층… 인간다운 생활할 권리 보장해야” 국내에는 경계선 지능에 대한 정확한 통계도 없고 관심도 낮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실제 규모에 비해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장애 아동만큼 도움이 시급해 보이지도 않고, 비행 청소년처럼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지도 않으니 정부나 사회가 적극 나서지 않는다는 것. 관련법도 이른바 ‘느린 학습자 지원법’으로 불리는 초·중등교육법 28조가 전부다. 성인을 위한 구체적인 지원 대책은 찾기 힘들다. 경계선 지능 청년을 오래 관찰해 온 전문가들은 이를 ‘역차별’이라고 지적한다.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에서 이들만 유독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현동 관장은 “경계선 지능 아이들은 ‘심리·정서적 차상위계층’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났을 수도, 후천적으로 퇴행했을 수도 있지만 이들 역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경계선 지능 청년들의 자립을 돕는 역할은 각 지역 복지관이나 부모 모임 등을 통해 산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프로그램이 체계화될 수 있도록 입법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전국 아동보호시설의 약 86%는 경계선 지능 아동에 특화된 프로그램이 없다. 서해정 부연구위원은 “IQ가 70이면 장애인으로 등록돼 각종 지원을 받는데 71부터는 혜택을 못 받는다. 장애인 등록이 안 되더라도 교육이나 일자리 측면에서 포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계선 지능 청년들은 성공의 경험을 쌓는 것이, 보호자들은 이들의 자립 가능성을 믿는 것 중요하다. 배승민 교수는 “지적장애 3급도 훈련만 되면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경계선 지능은 자립이 어렵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은 19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환경기업의 수출 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하는 ‘해외 환경시장 진출 포럼 및 상담회’를 개최한다. 국내 환경 기업의 해외 진출 성공 사례를 공유하고,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환경 산업이 유망한 해외시장 진출 전략을 모색하는 자리다. 환경산업기술원에 따르면 환경 분야 수출액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연평균 26.7% 증가했지만 2015∼2018년엔 연평균 0.18%씩 줄었다. 중국 기업들이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동남아 시장을 적극 공략한 영향이 컸다. 지난해에는 한일 무역분쟁과 올해 코로나19 등 교역을 위축시키는 돌발 변수도 잇따랐다. 실제로 환경산업기술원이 올 8, 9월 국내 관련 기업을 설문조사한 결과 81.3%가 ‘수출액 감소 피해가 있다’고 답했다. 해당 기업의 34%는 전년 대비 수출액이 30% 이상 줄었다. 수출이 50% 이상 감소한 기업도 18.7%에 달했다. 중국은 환경산업 분야에서 한국의 강력한 경쟁자인 동시에 주요 수출국이다. 2018년 기준 전체 환경 분야 수출액(약 8조2005억 원)에서 중국의 비중은 18.2%로 가장 높았다. 올해 중국 환경시장 규모는 약 341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는 2024년까지 국내 환경기업 50곳 진출을 목표로 세웠다. 박재현 환경산업기술원 중국사무소장은 “코로나19 이후 환경 위생 분야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의료 폐기물 등 위험물 처리 분야가 새로운 기회를 맞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전략적 요충지다. 올해 환경 산업 규모(추정치)는 약 95억 달러(약 10조5000억 원)에 이른다. 인도네시아는 수자원이 풍부하지만 하수 처리 기술이 부족해 먹는 물 공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억7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배출하는 플라스틱 쓰레기와 고질적인 대기오염 문제도 심각하다. 포럼에서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주요 친환경 정책과 현지 진출 전략이 소개될 예정이다. 또 전문가들에게 해외 진출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이 알아야 할 법률과 관세 문제 등에 대해 일대일 컨설팅을 받을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된다. 포럼은 19일 오후 2시부터 4시 반까지 온라인으로 진행된다. 유튜브에서 기술원 채널을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유제철 환경산업기술원장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국내 기업들의 해외 환경 시장 진출을 위해 온·오프라인 컨설팅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농관원)은 식자재 유통기업 풀무원 푸드머스와 함께 농산물우수관리(GAP·Good Agricultural Practices) 인증 농산물의 유통 활성화를 위해 2일부터 20일까지 전국 1만2000여 개 어린이집에서 ‘GAP 급식주간’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농관원은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2017년부터 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GAP는 농장부터 식탁까지 농산물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생산 수확 유통의 각 단계에서 농약이나 유해 미생물 등이 농산물을 오염시키는 것을 차단하는 제도다. 올해 9월 기준 전국 10만8000여 개 농가가 11만9000ha(약 1190km²)에서 GAP 인증을 도입해 운용하고 있다. 인증 품목은 2006년 첫 시행 당시 45개에서 지난해 말 기준 266개로 확대됐다. 올해는 GAP 인증을 받은 단감 한 상자를 구매하면 한 상자를 추가 증정하는 ‘1+1’ 이벤트도 열린다. 어린이집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GAP 인증 농산물의 안전성도 적극 홍보할 예정이다. 농관원 관계자는 “이 행사를 계기로 안전하고 위생적인 관리로 생산된 GAP 인증 농산물의 소비가 더욱 확대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503명.’ 지난해 국내에서 과로로 숨진 노동자 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는 현실과 괴리가 큰 숫자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는 훨씬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우선 현재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놓는 과로사 통계가 없다는 게 걸림돌이다. 과로사가 의학적으로 규정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한 노동자 중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경우에만 과로사로 판단하는 것도 차이를 키우는 요인이다. 이는 과로와 사망의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데서 비롯됐다.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한 경우 원인이 고혈압 등 기저질환인지, 과도한 업무부담 때문인지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뇌심혈관계 질환 사망자의 산업재해 승인율은 40%(2019년 기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최근 택배노동자 사망 사고가 잇따르면서 과로사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올 들어서만 택배노동자 15명이 과로로 숨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택배 분류 작업까지 떠맡아 하루 14시간씩 근무해야 하는 열악한 업무 환경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사망한 근로자 대다수는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자가 아니었다. 산재 신청을 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이들이 모두 산재로 인정받을지는 불투명하다. 택배노동자를 포함한 특수형태 근로종사자(특수근로자)는 보험료 부담 등을 이유로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을 하는 경우가 적잖다. 실제로 지난해 7월 기준 택배노동자의 산재 가입률은 약 36%에 불과했다. ○ ‘업무시간’에 치우친 과로사 판정 2018년 7월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한국도 ‘과로 사회’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과로사는 오히려 증가 추세다. 산업재해 승인을 받은 뇌심혈관계 질환 사망자는 2016년 300명에서 지난해 503명으로 67.7% 급증했다. 이 기간 산재 승인율이 26%에서 39.1%로 높아진 영향도 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신청 건수도 29.5% 늘었다. 과로 부담이 크게 줄어들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과로사의 산재 승인율이 높아진 것은 2018년부터 정부가 과로사 인정 기준을 완화한 게 컸다. ‘만성 과로’의 경우 기존에는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일 평균 60시간 초과하는 경우 업무와 질병의 연관성이 크다고 봤다. 개정된 고시에서는 기준 시간(52시간)을 추가하고, 업무 부담이 가중될 수 있는 조건을 추가했다. 또 과로 시간을 산출할 때 야간근무는 주간근무 시간의 30%를 가산하도록 했다. 하지만 여전히 산재 보상에서 제외되는 억울한 죽음이 적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과로사 판단 기준이 업무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업무 강도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인색하다는 점이다. 이를 이용해 적잖은 기업들이 “근무 시간이 이렇게 짧은데 어떻게 과로사일 수 있냐”며 사망 원인을 근로자의 기저질환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한양대 산학협력단이 지난해 고용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뇌심혈관계 질환 산재 신청자 중 주당 40∼52시간 근무자(발병 전 12주 기준) 승인율은 22.6%에 그쳤다. 주 52∼60시간일 때는 65%, 60∼80시간일 때는 약 90%가 산재로 인정됐다. 김인아 한양대 의대 작업의학교실 교수는 “근로 시간이 짧다고 반드시 노동 강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며 “택배노동자처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업무 부담을 과로로 인정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 과로사 입증 책임은 유족에게 근무 시간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산재 인정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회사 밖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출퇴근 시간이 명확하지 않아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보험설계사나 영업사원 등이 대표적이다. 정해진 시간 없이 고객을 만나지만 이를 근무 시간으로 인정받기 쉽지 않다. 최근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업무와 집안일 사이의 경계가 애매해진 것도 향후 과로사 산재 인정 과정에서 논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주 52시간을 맞추려 회사에서는 퇴근하고, 업무를 집에서 처리하는 직장인도 산재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출퇴근 기록만으로는 과로 인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수 있어서다. 실제로 2018년∼2019년 6월 직군별 과로사 산재 승인율은 사무직이 22.9%로 서비스(44.0%), 단순노무(41.6%) 등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법무법인 마중 김용준 변호사는 “영세한 사업장일수록 근무 시간 관리가 허술하다”며 “이를 공개할 의무도 없다 보니 과로를 입증할 근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당사자가 죽고 나면 과로를 입증할 의무는 유족의 몫이다. 문제는 입증할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업무 기록이 저장된 컴퓨터를 회사에 반납했거나, 휴대전화도 보관하지 않았을 땐 과로를 증명할 자료조차 확보하기 어렵다. 노무법인 소명 박영일 노무사는 “회사에 증거 제출을 요구해도 분실이나 자료 손상을 이유로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며 “증거 부족으로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유족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 ‘업무 부담’ 판단 기준 세분화돼야 과로사가 산재로 인정받으려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사건의 70%가량은 전체 합의로 승인 여부를 결정하고,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표결로 결정하는 구조다. 하지만 질병판정위원회의 판정 기준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업무 형태와 근로 계약이 복잡해지면서 과로 유발 요인이 다양해졌는데, 이런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질병판정위원회는 산재가 아니라고 판단한 과로사를 유족이 소송을 통해 뒤집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017년 과로로 숨진 택시운전사 A 씨에 대해 질병판정위원회는 오랜 기간 야간근무를 했기에 업무 부담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고지혈증 등 기저질환이 있어 과로가 직접적인 사인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법원은 “야간운전은 주간보다 피로감이 크고, 원고의 업무 형태가 질환을 유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유족 측의 손을 들어줬다. 전국 6개 질병판정위원회의 과로사 산재 승인율 편차가 큰 것도 문제다. 2018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과로사 산재 승인율은 서울이 47.9%로 가장 높았고, 광주는 34.9%로 차이가 컸다. 질병판정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노무사는 “근로복지공단 안에서도 지역별, 성별 승인율 차이가 큰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업무 시간뿐 아니라 업무 강도나 스트레스를 사망의 원인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질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 업무 부담 가중 요인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휴일 부족 △유해한 작업 환경(한랭, 온도 변화, 소음 등) △근무 일정 예측이 어려운 업무 △교대제 △시차가 큰 출장이 잦은 업무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 등이다. 이 기준에만 맞추다 보니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업무 환경은 과로 조건으로 평가하지 않는 경향도 나타난다. 유해 환경 기준을 확대해 폭염이나 미세먼지 발생 등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인아 교수는 “각 직종의 업무 특성에 맞춰 과로 평가 기준을 세분해야 한다”며 “택시운전사는 1시간 미만의 식사 시간을 근로업무 시간에 포함하고, 현재 5시간 이상으로 된 시차 기준도 3, 4시간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과로사 방지법’ 탄력 받을까 과로사는 동아시아 일부 국가에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영어권에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자체가 없다. 기껏해야 ‘워커홀릭(일중독자)’ 정도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일한다는 것이 노동자의 건강권을 중요시하는 서구권에서는 익숙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2년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과로사를 뜻하는 일본어 ‘가로시(karoshi·過勞死)’가 등재되기도 했다. 과로사뿐 아니라 ‘과로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일본은 최근 과로사 방지법을 도입해 근로 환경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근로 시간을 줄이는 노력뿐 아니라 노동권 교육 등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도 여당을 중심으로 과로사 방지법 제정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 택배노동자 등 특수근로자의 적정 업무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경영계 등에선 “근로 시간에 대한 과도한 규제”라며 반발하고 있어 과로사 방지법 도입까지 적잖은 난항이 예상된다. 과로사의 산재 승인율을 높이는 것만큼 과로사 자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노동 시간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 시간은 여전히 세계 최상위권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주당 48시간 이상 근로자’는 45%로 터키(57%)에 이어 2위로 나타났다. 이는 유럽연합(EU) 내 28개국과 미국, 중국 등 41개국을 비교한 결과다. ‘아파도 일한다’가 아니라 ‘아프면 쉰다’가 새로운 근로 기준이 되도록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아파서 쉬어도 최소한의 생계가 유지돼야 과로사까지 내몰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정연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규모가 큰 사업장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유급휴가를 확대하고, 상병수당을 도입해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