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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소녀 시리는 누군가의 제삿날 엄마를 따라 산자락 좁다란 동굴로 간다. 어머니는 10여 년 전 일을 두런두런 말하기 시작한다. 토벌에 참가했던 외삼촌이 숨진 여인의 품에 안긴 채 살아있던 어린아이를 데려왔다고. 나무도장을 손에 꼭 쥐고 있던 그 아이는 시리였다. 제주4·3사건을 서정적 그림과 절제된 문체로 담아낸 그림책이다. 저자(56)를 서울 종로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꽃할머니’(2015년)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말 잇기 놀이인 제주도의 꼬리따기 노래를 모아 재해석한 ‘시리동동 거미동동’(2003년)을 내면서 제주와 인연을 맺었다. 실화인 ‘빌레못굴의 학살’을 바탕으로 한 책을 내기 위해 저자는 3년간 취재했다. 제주4·3평화재단, 우당도서관, 탐라도서관을 뒤졌다. 권영옥 도서출판 장천 대표를 비롯해 30명이 넘는 관련 전문가와 관계자들에게 자문을 받았다. 북촌초등학교 교지도 확인하며 제주의 정서를 이해했다. 엄마가 시리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날을 당초 시리의 생일날에서 시리 생모의 제삿날로 바꾼 것도 이유가 있다. “제주는 생일보다는 제사를 중요시하더라고요. 배를 타다 혹은 물질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다 보니 제사를 정성껏 올리며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기원하는 문화가 강했어요.” 철저한 고증을 통해 다큐멘터리 못지않게 당시 풍경을 정확하게 그려냈다. 광복 후 제주로 사람들이 돌아올 때 타고 온 관부연락선은 물론이고 당시 입었던 옷, 보따리 등도 세세하게 확인했다. 경찰과 국방경비대의 복장이 비슷하지만 모자에 붙은 마크가 다른 점도 반영했다. ‘빌레못굴의 학살’에서는 일곱 달 아기가 숨지지만 저자는 아이가 살아남아 토벌군의 누나가 데려가 키우는 것으로 바꾸었다. 감정적인 표현은 자제하고 이념 대립으로 비칠 수 있는 단어도 가급적 쓰지 않으려 애썼다. 피도 푸른색과 갈색으로 그렸다. 끔찍했던 현실을 완곡하고 담담하게 표현해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시리게 만든다. 그리고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의 잔인함보다는 냉전 시대에 국가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구조에 주목했어요. 사람들을 총살할 때 비켜 쏜 군인도 있었다고 해요. 그 사람이 갖고 있었던 건 인간에 대한 희망 아닐까요.” 책은 제주4·3평화기념관에 헌정됐다. “아이들에게 이념 대립보다는 평화의 섬으로 제주가 기억되길 바랍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조정해 나가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고 함께 답을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한 번 들어도 귓가에 여운이 남는 선율, 춤추는 듯한 조명, 그리고 화려한 군무. 프랑스 뮤지컬의 강점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뮤지컬 ‘아마데우스’의 아시아 첫 내한 공연이 열리고 있다. ‘모차르트, 오페라 락’이라는 제목으로 2012년 국내에서 라이선스 공연으로 선보였다. 모차르트 역할을 맡은 미켈란젤로 로콩테(43)와 살리에리 역의 로랑 방(41)을 26일 공연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다. 이탈리아 출신인 로콩테와 프랑스인 로랑 방은 친구 사이로, 같은 무대에 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로콩테가 로랑 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뮤지컬 ‘알라딘’에서 지니 역을 하는 걸 보며 ‘살리에리 역을 소화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완벽한 살리에리가 됐어요. 배역을 몸에 흡수하는 배우예요.” 얼굴이 빨개진 로랑 방이 손뼉 치고 웃으며 쑥쓰러움을 표현했다. “미켈레(로콩테의 애칭)는 모차르트 그 자체예요. 피아노, 드럼, 기타를 연주하고 조각, 시 쓰기, 작곡까지 하죠. 이런 모습이 배역에 그대로 녹아든 것 같아요.” 로콩테는 모차르트를 방탕한 천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한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연기한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언론이 없었기 때문에 소문이 진실로 여겨지면서 과장된 측면이 많을 거예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곧바로 알리지 않아요. 알로이지아에게 청혼을 하죠. 미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저는 모차르트가 진짜 남자가 된 후 아버지를 만나려 했다고 생각해요.” 로콩테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영적인 느낌을 받는단다. “그의 음악은 우주의 소리예요. (휘파람으로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아리아를 불며)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멜로디예요.” 로랑 방은 살리에리의 복합적인 심리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모차르트를 라이벌로 여기지만 증오하지는 않아요. 다만 자신에게는 천재적인 재능이 없음을 알고 좌절할 뿐이죠. 모차르트와 우정을 나누는 것도 그래서 가능한 거고요. 단단해 보이지만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함께 표현하고 싶어요.” 로랑 방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는 강한 노래와 잘 어울린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어린 왕자’로 아시아 공연을 했던 로랑 방은 중국과 일본, 대만 팬이 많다. 이날도 대극장에는 여기저기서 중국어, 일본어가 들렸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코스프레를 하고 오는 일본 팬도 있을 정도다. 로콩테는 자유롭게 무대를 누비다가 점점 죽음에 짓눌리는 모차르트를 물 흐르듯 연기한다. 극 중 어머니,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연달아 죽음을 접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공연할 때마다 몸 안에서 죽음을 느껴요. 모차르트와 이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나를 새겨주오’라는 노래를 녹음할 때는 열이 38도까지 올라간 적도 있어요.” 로랑 방은 커튼콜 때 ‘악의 교향곡’을 또렷한 우리말로 불러 뜨거운 환호를 받고 있다. 그는 한국 배우가 부른 노래를 인터넷에서 찾아 발음을 받아 적고 한국어 교사까지 구했다. 요즘도 매일 발음 연습을 한다. “손짓 하나하나까지 기억해주는 팬들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져요. 목소리만으로도 감동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로랑 방) “다양한 장르에 도전해 제 속에 있는 더 많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로콩테) 4월 24일까지, 6만∼16만 원. 02-541-6236 ▶공연 Tip!개막 초 ‘프리뷰’를 잡아라 뮤지컬을 저렴한 가격에 가장 먼저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주로 뮤지컬 마니아층이 애용하는 ‘프리뷰 기간 할인’을 통해서다. 공연 기획사들은 개막 초기 3∼7일을 프리뷰 기간으로 정하고, 이 기간에 티켓을 구매하는 관객들에겐 할인 혜택을 준다. 기획사 입장에선 관객의 초기 반응을 살피며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장점이 있고, 관객 입장에선 저렴한 가격에 공연을 즐길 수 있다. 29일 정식 개막한 뮤지컬 ‘마타하리’는 개막 전 25일부터 27일까지 총 5회의 프리뷰 공연에 한해 전 등급 30%의 ‘통 큰 할인’을 진행했다. 4월 12일 아시아 초연하는 ‘뉴시즈’ 역시 프리뷰 할인에 나선다. 12∼14일 공연에 한해 30% 할인에 나서는 것. 1인 4장까지 할인받을 수 있다. 4월 1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리는 뮤지컬 ‘삼총사’도 프리뷰 할인에 동참한다. 22일 개막한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도 4월 10일 공연까지 티켓가의 40%를 할인해준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나 또 임신했어. … 그 인간, 수술하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어.나 두 번이나 중절했다고. … 내가 무슨 암탉이야. 달걀만 낳는 암탉이냐고!”기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신세 한탄하는 올케를 연기했다.오디오북 제작업체인 오디언(서울 은평구)의 스튜디오에서 22일 이은조 작가의 소설 ‘수박’ 낭독에 도전한 것. 정성용 PD는 계속 “다시”를 외치며 말했다. 》“별로 화난 것 같지가 않아요. 딱딱하고 책 읽는 것 같아요.” 듣는 책인 오디오북은 30, 40대 직장인이 출퇴근할 때 주로 이용한다. 어린이와 오래 책을 보기 힘든 고연령층도 애용한다. 여준호 예스24 e북 팀장은 “남성은 자기계발서, 여성은 소설과 자녀용 동화를 많이 구입한다”고 했다. 국내 오디오북 시장은 연간 100억 원 규모로 추산되는데,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오디오북 제작 1위인 오디언이 만든 물량은 2006년 100여 권에서 지난해 1000여 권으로 늘었다. 한만재 오디언 기획팀 과장은 “오디오북은 북미와 유럽에서 도서시장의 1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기자는 채널A에서 2년 가까이 근무하며 리포트를 만든 경험이 있다. ‘오디오북 낭독도 귀에 쏙쏙 들어오게 또박또박 읽으면 된다’는 가설을 세웠다. 낭독은 보통 성우가 한다. 미국에서는 제러미 아이언스, 조디 포스터 등 유명 배우가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2012년 배우 이보영이 ‘노인과 바다’를 낭독해 수익금 일부를 기부했다. 소설은 주인공의 성별에 따라 남녀 성우를 정한다. 등장인물이 많으면 4, 5명이 투입된다. 역사물은 남성이, 에세이는 여성이 주로 맡는다. 300쪽짜리 책을 낭독하면 10시간쯤 걸리기 때문에 대본작가가 2∼3시간 분량으로 줄인다. 원래 문장을 살리면서도 핵심 내용이 잘 담기도록 추려 내는 게 중요하다. 정 PD는 “기왕 하는 거 난도가 높은 소설을 해보라”며 ‘수박’을 권했다. 가슴에 멍울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집으로, ‘수박’ 편은 여기저기서 치이지만 꾹꾹 누른 채 버티는 여주인공 난주를 그렸다. ‘수박’ 편은 1시간 분량이어서 원문 그대로 낭독했다. 집에서 여러 번 연습하고 녹음해서 들으며 교정했지만 연기는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대학 교양 연극 수업에서 조별 연극을 할 때 ‘행인1’을 해 본 게 전부인 기자에게 연기의 벽은 에베레스트 산만큼 높게 느껴졌다. 결국 유경선 성우가 긴급 투입됐다. “화를 내다 넋두리하는 식으로 해보세요. 이렇게요.” 시범을 보이는 그를 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순식간에 감정을 저렇게 잡다니. 과연 프로였다. 10번 이상 NG를 낸 끝에 겨우 OK 사인을 받았다. 내레이션을 할 때도 “발음은 정확한데 너무 딱딱하다. 힘을 빼고 편안하게 하라”는 조언을 연거푸 받았다. 고비는 또 찾아왔다. 난주의 엄마가 전화해 푸념을 늘어놓은 후 중국 여행 경비를 은근히 요구하는 대목이었다. “너무 빠르다. 랩 하는 것 같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약사, 노파, 남편, 과일가게 주인까지…. 정 PD가 녹음한 것을 들려주자 ‘발연기’에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3시간 가까이 걸려서야 녹음이 끝났다. 성우가 하면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NG 부분을 잘라내고 효과음과 음악을 넣는 등 편집을 거쳐야 오디오북이 완성된다. 목이 따갑고 빨리 눕고만 싶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소설을 낭독하려면 ‘DJ+배우’가 돼야 하고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는 ‘DJ’가 돼야 한다는 것을. 가설은 무너졌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요즘처럼 어려운 때가 없었다.” 출판사 대표들의 입에서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말이다. 출판계는 추락하고만 있는 걸까. ‘출판의 미래’(장은수·오르트) 저자는 영미권으로 눈을 돌리면 출판계가 차츰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랜덤하우스와 펭귄출판사가 합병해 탄생한 펭귄랜덤하우스처럼 출판사들은 몸집을 불려 언어, 지역에 상관없이 독자를 공략하고 있다. 컬러링북인 ‘비밀의 정원’이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단일 상품이 동시에 유행하는 흐름도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독자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골라주는 큐레이션을 원하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출판 산업의 본질을 종이책이 아닌 ‘읽기’로 생각하면 전자책처럼 다양한 그릇에 콘텐츠를 담아 볼 수 있다. 변화의 소용돌이에서는 두려움이 커진다. 그러나 멀리서 비추는 희미한 불빛 하나만 있어도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이 반가운 이유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안네는 뛰어난 소녀였습니다. 제 팬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캐나다 팝스타 저스틴 비버가 2013년 안네 프랑크의 집을 방문한 후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미국 힙합스타 카녜이 웨스트는 “저는 카녜이 웨스트란 이름이 스티브 잡스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인터넷, 다운타운, 패션, 문화의 스티브죠.” 이쯤 되면 병이다 싶다. 도널드 트럼프는 트럼프 모기지, 트럼프 골프, 트럼프 대학까지, 소유한 모든 것에 자기 이름을 붙인다. 자기애의 ‘끝판왕’이다. 저자는 나르시시즘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분석한다.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에는 인정, 관심, 보상에 대한 마르지 않는 샘이 자리한다. 성욕도 강해 자신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자손도 많이 낳는 편이다. 무리한 합병으로 주가가 반 토막 나고 직원 3만 명을 해고하고서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은 칼리 피오리나 HP 전 최고경영자(CEO)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다. 그는 오히려 “합병은 좋은 아이디어였고 수십억 달러나 절감했다”고 강변했다. 미디어와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달하면서 정치인, 연예인, 기업인은 물론이고 일반인까지 앞다퉈 “날 좀 봐 줘요”라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나르시시즘은 이들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유효하다. 히틀러, 사담 후세인처럼 재앙을 초래한 인물의 심리에도 나르시시즘이 깔려 있다. 풍부한 사례를 읽다 보면 술자리에서 유명인의 뒷담화를 듣는 기분이다. 멋진 연기를 보여주는 숀 펜과 러셀 크로는 사진기자에게 주먹을 날리거나 호텔 직원에게 전화기를 던지는 남자들이었다! 앨릭 볼드윈은 카메라만 꺼지면 신경질을 부리기 일쑤란다. 여성 보좌관이 있어도 홀딱 벗은 채로 돌아다니고, 기자회견에서 소변을 보며 대화하는 린든 존슨 미국 전 대통령의 엽기적인 행동에는 입이 떡 벌어진다. 이 모든 게 나르시시즘 때문이란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애인이라면 헤어지는 게 좋다고 저자는 조언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하거나 더 매력적인 상대를 발견하는 즉시 떠날 것이므로.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일에도 거리낌 없는 상사를 뒀다면 주변에 자신의 업적을 미리 알리는 게 좋다. 그래도 안 되면 회사를 옮기는 게 낫단다. 헌데 한 번 상사가 영원한 상사는 아닌 법인데 직장을 그만두는 게 옳을까 고개가 갸웃해진다. 관심에 목마른 이라면 책을 보면서 자신이 애교 수준의 나르시시스트인지, 자기 외에는 아무도 안중에 없는지, 혹은 즐거움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악’의 단계에까지 와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축에 속하는 사람은 도대체 왜들 저러고 사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해낸 일에 뿌듯해지고,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감탄하더라도 너무 놀랄 필요는 없다. 과하지만 않다면 나르시시즘은 인생을 즐기고 기쁨을 맛보게 하는 요소가 되니까. 중요한 건 절제다. 책 뒤에는 자기애 성격 검사(NPI)가 실려 있다. 원제는 ‘The Narcissist next door’.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파리 남자들이 편안함 대신 우아함을 추구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패션저널리스트 이자벨 토마의 책 ‘유아 소 프렌치 맨!’은 지난 몇 년간 겉모습에 무심한 듯했던 파리 남자들이 타이트한 트위드 재킷을 선호하고 캐시미어나 이집트 면사로 만든 옷에 감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디자이너 옷과 중저가 브랜드의 옷을 섞어 입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이들은 또 재킷은 짧게, 바지통은 좁게 만들어 남성미를 강조한 정장을 입는다. 자주, 빨강, 초록, 노랑, 파란색 정장도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30대 남성들은 넥타이 대신 다양한 소재로 만든 화려한 스카프를 애용한다. 예전에는 모직이나 캐시미어로 된 회색이나 적갈색 목도리를 둘렀다. 요즘은 저지, 실크, 얇은 니트 등 부드럽고 얇은 소재를 사용해 강렬한 색상으로 염색하거나 화려한 무늬를 넣은 스카프가 사랑받고 있다. 구두코를 장식하는 것도 유행이다. 구두코에 그림을 그려 놓은 제품이 주목받고, 구두코를 반짝반짝하게 윤을 내는 건 필수가 됐다. 마지막으로 패션을 완성하는 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매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안녕하세요?”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를 검은색 핀으로 묶은 그가 또렷한 한국말로 인사하며 악수를 청했다. 아멜리 노통브(49)였다. 파리 알뱅 미셸 출판사에서 17일(현지 시간) 만난 그는 검은색 치마와 재킷을 입고 있어 화장기 없는 얼굴이 더 하얗게 보였다. 이어 유창한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빠가 한국에서 근무했고 삼촌이 6·25전쟁에 참전했어요. 한국 식당에서 김치를 자주, 많이 먹는답니다.” 1층 로비를 지나자마자 왼쪽에 있는 사무실로 안내했다. 두 평(6.6m²)이나 될까. 책상 하나, 의자 두 개, 전화기 한 대가 전부였다. 편지와 서류, 각국어로 번역된 책이 위태롭게, 사람 키 높이만큼 여러 줄로 쌓여 있었다. 벨기에인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일본 중국 미국 라오스 등에서 자랐다. 글은 프랑스어로 쓴다. 1992년 ‘살인자의 건강법’으로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른 그는 ‘시간의 옷’으로 공쿠르상 후보에 올랐다. ‘두려움과 떨림’은 프랑스 학술원 소설 대상을 받았다. 속도감 있는 대화체에 잔인함과 냉소, 유머가 어우러진 작품은 45개 언어로 번역돼 모두 1600만 부가 판매됐다. 매년 책을 낼 정도로 글쓰기광이다. “매일 오전 4시부터 오후 1시까지 써요. 지금까지 85편을 썼는데 24편만 출간됐어요.” 그 비결을 물었다. “글쓰기는 극한 스포츠와 같아요. 운동선수가 하루 쉬면 근육이 달라지듯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다음 날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요. 작가의 역할은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찾게 도와주는 것이기에 글쓰기는 제게 부여된 ‘의무’예요.” 체력은 타고났단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당시 벨기에 지역 사람을 ‘거대한 바바리아인’이라고 불렀는데 진짜 딱 맞는 표현이에요.(웃음) 나이가 들수록 기운이 떨어지는 게 두렵지만 현실은 직시해야죠.” 그는 오후 1시부터 밤 12시까지는 연인과 지낸다. 인터뷰 중 연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오전에는 터프하게, 오후에는 달콤하게, 매일 두 가지 인생을 산다”며 깔깔 웃었다. 때마침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화제였다. 알파고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화 분야까지 인공지능이 점령한 데 경악했어요. 나는 ‘기계치’라 휴대전화도 없고 컴퓨터 대신 손으로 쓰는걸요.” 이어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기계가 넘볼 수 없는 지혜, 직관력, 인간미 등 인간만의 특성을 공고히 하려면 신문과 책을 꾸준히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연처럼 직원이 문을 열고 신문을 건넸다. 하반기 국내에 출간될 예정인 ‘페트로니’는 작가를 꿈꾸던 페트로니라는 여성을 1997년 만나 나눈 우정과 질투를 그렸다. ‘푸른 수염’을 통해 샴페인을 예찬했던 그에게 페트로니는 샴페인 친구였다. “샴페인은 진심을 나눌 친구와 꼭 함께 마셔야 해요. 파리지앵은 늘 화가 나 있고, 공격적이라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데 페트로니가 다가왔죠.” 그는 아직 한국에 온 적이 없다. 지난달 브뤼셀도서전에서 그를 봤다는 한국 팬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노통브를 봤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썼다. 이를 알려주자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어머나!”를 연발했다. “핑계 같지만 정말 바빠요. 프랑스를 포함해 세계 46개 출판사와 일해요. (또 전화가 왔지만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 죽기 전에 한국에 꼭 갈게요. 약속해요!”:: 아멜리 노통브는… ::―1967년 일본 고베 출생―벨기에인, 프랑스에서 활동―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1992년) 발표―‘적의 화장법’, ‘시간의 옷’(공쿠르상 후보), ‘두려움과 떨림’(프랑스 학술원 소설 대상), ‘오후 네 시’(파리 프르미에르상) 등 매년 한 작품씩 발표―45개 언어로 번역, 1600만 부 판매파리=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담담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함께 후보에 오르게 돼 기뻤고요.” 파리도서전이 열린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18일(현지 시간) 만난 소설가 한강 씨(46)는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리는 맨부커상 후보에 한국인 최초로 오른 소감을 묻자 돌아온 답이었다. 후보작은 ‘채식주의자’. 어릴 적 자신을 문 개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본 여성이 육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어 간다고 여기는 내용이다.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 씨(77)의 반응을 묻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재차 물었지만 끝내 웃음으로 답을 피했다. 그러고는 번역자에게 공을 돌렸다. 번역을 맡은 영국인 데버러 스미스는 자발적으로 ‘채식주의자’의 20쪽을 번역해 영국 유명 출판사인 포르토벨로에 보냈다. 작품성을 알아본 출판사가 그 후 한 씨와 출간 계약을 맺었다. “문학은 언어의 장벽을 넘을 수 없잖아요. 번역이 그 장벽을 넘게 해주죠. 번역 작업을 지켜볼 때마다 경이로워요.” 프랑스의 대표 서점인 ‘지베르 조제프’에서 한국 작가 책 가운데 ‘채식주의자’가 가장 많이 판매된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처음 듣는 얘기예요. 놀라워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극단의 상황까지 몰고 가는 건데, 프랑스 독자들은 일종의 우화로 여기는 것 같아요.” ‘바람이 분다, 가라’ ‘소년이 온다’도 프랑스어로 번역됐다. 이날 한 시간 동안 진행된 사인회에는 독자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졌다. 한 프랑스 여성은 “잡지에 실린 한국문학 기사를 통해 ‘채식주의자’를 알게 됐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 호기심이 생겼다”며 사인을 받았다. 아내에게 선물하겠다며 책을 산 남성도 있었다. 한 씨는 올해 6월 시, 에세이가 결합된 형식의 새 소설을 출간한다. 제목은 미정. “삶과 죽음, 도시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 속에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이 있고요. 2014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4개월 동안 머물렀는데요, 소설에는 바르샤바와 서울이 교차하며 등장해요.” 새 소설은 내년에 영국에서도 선보인다. 지난해 발표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의 2, 3부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까지 완성할 예정이다. “하루하루 글을 쓸 때마다 이 글을 완성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써요. 지금은 다음 달에 마감하는 계간지 원고를 무사히 쓰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웃음)파리=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등이 머물며 글을 썼던 곳이다. 영화 ‘비포선셋’, ‘미드나잇 인 파리’에도 나왔다. 16일(현지 시간) 희귀본 코너에 들어서자 영문판 ‘이방인’이 보였다. 가격만 물었을 뿐인데 직원은 벌떡 일어나 유리문을 열고 책을 꺼내 빛바래 누런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기며 “850유로(약 112만 원)”라고 답했다. ‘동물농장’은 3000유로(약 396만 원)란다. 서점을 나서자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이곳 2층 벽에 쓴 유명한 글귀가 그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이방인을 홀대하지 마라.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 수 있으니.” 책을 사면 셰익스피어 얼굴 도장을 찍어주는 곳, 작은 침대를 여기저기 놓아 마음껏 머물게 만드는 곳. 책이 어떤 보석보다 더 빛날 수 있음을, 자석보다 더 강하게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음을 이곳은 증명하고 있었다. 파리=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케이팝,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한국 책 판매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제일 많이 팔리고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도 반응이 좋습니다.” 프랑스 대표 서점인 ‘지베르 조제프’의 리샤르 뒤부아 총괄지배인은 최근 케이북의 약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파리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16일(현지 시간) 열린 2016 파리도서전 개막식에서는 한국 책에 대한 프랑스인의 높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올해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아 한국은 처음 주빈국으로 초청됐다. 공식 행사는 17일부터 나흘간 열리는데도, 16일 주빈국관을 찾는 프랑스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 20대 여성은 한국 고전소설인 ‘수궁가’의 앞뒤 표지에 그려진 한국화를 한참 살펴봤다. 50대 여성 두 명도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 정유정의 ‘7년의 밤’을 각각 집어 들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개막식에 참석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주빈국관을 방문해 “한국과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열고 협력을 공고히 하기로 박근혜 대통령과 협의했다”며 “한국이 파리도서전의 주빈국으로 참여한 것은 양국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이어 올랑드 대통령은 방명록에 ‘문화를 향해 같은 열정을 나누는 프랑스와 한국의 독자들에게’라는 글을 남겼다. 함께 주빈국관을 찾은 오드레 아줄레 프랑스 문화장관은 “한국어를 배우려는 프랑스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한국 작품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 많은 책이 번역돼 소개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파리도서전에는 황석영 이승우 한강 정유정 이수지 한성옥 윤석남 등 한국 작가 30명이 초청됐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그린 문정희 시인의 시집 ‘찬밥을 먹던 사람’은 프랑스의 문학 채널에서 특집으로 소개했다. 문 작가는 “조금 전 출판사 부스에 갔는데 프랑스에서 시집이 800권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미소 지었다. 한국 만화에 대한 열기는 특히 뜨겁다. ‘나쁜 친구’의 작가인 만화가 앙꼬 씨는 “한국의 전형적 집과 풍경을 사람들이 매우 흥미로워했다”고 전했다. ‘러브 이즈’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래’의 만화가 퍼엉 씨는 “댓글 중에 ‘나를 스토킹하는 거 아니냐’는 글도 있다.(웃음) 캐릭터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평범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데 채색이 안 된 스케치 같은 작품에 독자들이 자기 이야기라고 여기며 스며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석영 작가는 “프랑스 출판사에서 ‘장길산’ ‘한씨연대기’를 만화로 만들기로 계약했다”고 밝혔다. 아동도서관에는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작품 130종이 전시됐다. 한국 그림책에는 삶에 대한 모성적 본능이 많이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영수 대한출판문화협회장은 “파리도서전을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한 한국 출판의 진면목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기회로 삼겠다”고 말했다.파리=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익숙한 대상의 낯선 면모를 접할 때가 가끔 있다. 그때의 신선함은 강렬하게 각인된다. ‘심청전’ ‘홍길동전’ ‘허생전’…. 동화책으로, 문학 수업에서 자주 접했기에 줄거리는 물론이고 인물과 의미까지 다 파악했다고 자신했던 작품들이다. 이 책은 이런 생각에 펀치를 날린다. 대학 새내기의 교양입문서로 유명했던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비롯해 ‘맑스주의와 근대성’ ‘철학의 모험’ 등을 쓴 저자는 고전소설을 레고 다루듯 조각조각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심청은 효녀였을까. 저자는 “아니다”고 말한다. ‘효(孝)’라는 절대적인 명령에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복종함으로써 명령의 황당함을 온몸으로 항의했다는 것. 용궁에서 살아났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순간 명령에 복종하던 심청은 죽었기 때문이다. 새로 태어난 심청은 자신이 따랐던 효가 맹목적인 효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홍길동은 체제에 철저히 순응한 인물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병조판서까지 올랐지만 신분제를 철폐하지 않았다. 율도국을 세우고 왕이 됨으로써 신분제 사회의 정점에 선다. 홍길동이 원한 건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할 수 있는 지위일 뿐 이를 불가능하게 한 제도를 혁파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유에 천착했던 저자의 특기는 허생과 놀부에 대한 분석에서 여지없이 발휘된다. 인간은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더 많은 걸 손에 쥐려 아등바등한다. 돈은 이런 욕망을 가속화시켰다. “쌀이 많이 있다 한들 너 주자고 노적을 헐며 … 큰 농우가 네 필이니 너 주자고 소를 굶기랴”며 흥부를 내쫓는 놀부의 말은 이를 또렷하게 드러낸다. 허생이 은화 50만 냥을 바다에 쏟아버린 건 재앙의 원천이 되는 돈의 속성을 꿰뚫어본 것이다. 고전소설 사이사이에 녹아든 철학적 분석은 샐러드에 골고루 버무려진 드레싱 같다. 고전소설을 디테일하게 뜯어보는 재미도 적잖다. 연극, 드라마, 영화 등의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창작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자라면서 자주 듣던 말이다.(결혼한 여성들은 ‘어른’ 대신 ‘여자’라고 바꿔 남편에게 말하기도 한다.) 어릴 때는 고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있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옛글 나들이’(한희철 지음·꽃자리)는 우리 속담 197개를 정리했다. ‘어머니는 살아서는 서푼이고 죽으면 만 냥이다’는 눈물겹다. 자식들 챙기느라 정작 자신은 돌보지 못한 어머니가 철없던 시절에는 초라하게 보이지만 어머니가 떠난 후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분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이요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다’는 걱정 없는 사람은 없다는 걸 절묘한 운율로 표현했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는 비우는 삶을 강조한다. 오랜 세월의 경험과 생각이 곰삭은 말은 정겹고 포근하다. 다가온 봄처럼.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나이 들어서 돈 있고 건강하면 최고, 돈 없어도 건강하거나 아파도 돈 있으면 보통, 돈 없는데 아프기까지 하면 최악.” 은퇴 후 삶을 평가한 말이다. 해고되는 순간 중산층에서 추락하는 한국에서 노후는 공포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노후파산: 장수의 악몽’(NHK스페셜제작팀 지음·김정환 옮김·다산북스)은 큰 걱정 없이 노후를 맞을 것으로 믿은 일본 노인들의 참담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착실히 회사를 다녔고, 집도 있으며 예금과 연금도 준비했지만 노후에 파산은 막지 못했다. 몸이 아프거나, 부양해야 할 부모가 있거나 자녀가 취업을 못해 기대는 등 당초 계획에서 한 가지 요소만 어긋나도 파산에 빠졌다. “오래 살면 예금도 바닥날 테니 그 전에 죽어버렸으면 좋겠네요”라는 절규가 강 건너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공포는 일상에서 천천히 옥죄어 올 때 가장 치명적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5년 전 3월 11일, 동일본을 덮친 쓰나미는 모든 것을 쓸어갔다. 남은 건 일본 사회의 벌거벗겨진 몸뚱이였다. 두 책은 그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다시…’는 정주하 사진작가가 2011년 11월부터 피해 지역을 촬영한 작품을 후쿠시마, 도쿄, 오키나와 등 일본 여섯 곳에서 순회전시를 하며 서경식 도쿄케이자이대 교수를 비롯한 한일 지식인, 일본 시민들과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사진전은 2012년 서울에서도 열렸다. 전시회 제목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일제에 신음했던 이상화의 시에서 따왔다. 식민지 조선에서, 후쿠시마 일대에서 개인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후쿠시마에서 80km 떨어진 료젠 산의 단풍은 찬란하다. 미야기 현 남부 지역의 감나무는 빨갛게 익은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매년 그랬듯이. 하지만 오색 낙엽을 밟아서도, 감을 먹어서도 안 된다. 방사능에 오염돼 있기 때문이다. 오염된 흙을 파란색 비닐로 덮어놓은 조선학교는 일본학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절반의 보상금만을 겨우 손에 쥘 수 있었다. 식민지배, 후쿠시마 원전사고,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 모두는 대제국이 되기 위해 폭주했던 일본이 초래한 결과라는 점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부국강병을 앞세운 일본은 아시아를 침략했고, 패망 후 산업화를 위해 원자력 에너지를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군사대국을 향한 열망이 반영돼 있다. ‘죽은…’은 동일본 대지진 후 일본 사회에 빠르게 퍼져 나가는 균열에 주목한다. 가족과 집을 잃은 사람, 보상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 고향을 떠난 사람과 떠날 수 없는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았다. 가족을 잃은 사람 중에는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잊으려 한다. 한 스님은 말한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심장이 멈출 때,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때.” 많은 피해자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모순의 덩어리는 커져만 간다. 피해 지역인 아오모리 현은 역병을 몰아내는 네부타 축제를 유지하기 위해 가해자인 도호쿠전력의 지원을 받고 있다. 바다 건너도 다르지 않다. 독일은 원자력발전소를 순차적으로 모두 없애겠다고 발표했지만, 부족한 전력은 프랑스에서 수입한다. 그 에너지는 원자력발전으로 만든다. 키우던 채소를 뽑아 건네는 일도, 이를 받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 돼 버렸지만 더 편하고, 물질적으로 더 잘살길 원하는 인간의 욕망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도 마찬가지다. 주변 국가에 준 고통에 대해, 전 세계를 오염시킨 방사능 재해에 대해 침묵한다. 오직 자신이 입은 피해만을 호소할 뿐이다. 대지진은 어쩔 수 없는 재앙이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인간이 초래한,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참사다. 학생 78명 가운데 4명만 살아남은 오카와 소학교의 교정에는 아이들이 손 글씨로 쓴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세계가 전부 행복해지지 않으면 개인의 행복은 얻을 수 없다.” 행복의 실현은 ‘더 많이, 더 빨리, 더 편하게’를 지향하는 삶의 방식에 물음을 던지는 데서 시작한다. 에너지에 삶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얼마만큼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가.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몸과 마음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우리는 어려서부터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젊음은 오직 너만이 가지고 있는 보물이다. 그런데 왜 이 보물을 써먹지도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거냐?”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해 주는 듯하다. 앞 문장은 혜민 스님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수오서재)에, 뒤 문장은 취업준비 요령을 소개한 ‘본부장이 말한다: 네가 지난 면접에 떨어진 이유를 말해주마’(시담)의 일부다. 구어체가 출판계를 지배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에세이, 자기계발 등 분야에서 ‘말하듯 글쓰기’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위로하듯, 논쟁하듯 때로 독설을 퍼붓듯 구어체의 형태도 방식도 다양하다. ‘완벽하지…’와 ‘인성이 실력이다’(조벽 지음·해냄)는 바로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쓴 것이 특징이다. 혜민 스님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과 칼럼 등을 엮었고, 조벽 교수는 강의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와 실제 마주하며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말하는 방법을 그대로 글로 옮겼다. 최장기 베스트셀러 1위 기록을 세운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는 철학자와 청년이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구성돼 희곡이나 영화 시나리오를 보는 것 같다.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의 대화를 담은 ‘설전: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책읽는섬)는 두 스님의 대화가 담긴 녹취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본부장이…’의 저자 정민우 알리안츠생명 본부장은 현실을 직시하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그는 “강남 출신이 4대 그룹 직원 중에 많은 건 자격지심이 별로 없어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는 것”이라며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은 사고 칠 확률이 높은 만큼 네 일을 해내며 당당해지라”고 일갈한다. ‘커리어코치 정철상의 따뜻한 독설’(라이온북스)은 직설적인 조언과 함께 위로를 덧붙인다. 구어체 글쓰기가 확산되는 것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책을 선호하는 경향과 무관치 않다. 트렌드를 반영한 책을 재빨리 선보일 수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박신애 해냄출판사 기획편집팀장은 “유명 강사의 강연 내용을 풀어 정리하면 짧게는 6개월 안에 책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구어체 글쓰기는 말의 시대에서 문자의 시대를 거쳐 영상의 시대로 바뀌는 흐름을 반영한다는 분석도 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대화가 주인 영상의 시대에 소설도 대화의 비중이 크게 늘고 있고 현재 베스트셀러 가운데 구어체가 아닌 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내용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구어를 구사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최근 1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소설가인 것으로 나타났다. 교보문고는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소설 분야 누적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개미’ ‘뇌’ ‘나무’ 등 베르베르의 책이 가장 많이 팔렸다고 2일 밝혔다. 이어 무라카미 하루키와 히가시노 게이고가 2, 3위를 차지했다. ‘7년 후’, ‘센트럴 파크’ 등을 쓴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는 4위였다. 한국 작가로는 신경숙이 5위에 올랐고, 김진명(6위) 공지영(7위)이 뒤를 이었다. 파울루 코엘류, 조정래, 조앤 롤링 순으로 8∼10위를 차지했다. 1981년부터 35년간 연간 소설 베스트셀러 20위를 분석한 결과 모두 700개 작품이 목록에 올랐다. 가장 많은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는 이문열이었다. ‘젊은날의 초상’, ‘사람의 아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 13종이 23차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위는 하루키로, ‘상실의 시대’ ‘1Q84’ 등 7종이 21차례 베스트셀러 목록에 포함됐다. 3위는 코엘류였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회사원 정민우 씨(43)는 지난해 여름휴가 때 오페라 페스티벌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와 브레겐츠에서 ‘노르마’ ‘피델리오’ ‘투란도트’ ‘호프만 이야기’를 관람했다. 오페라 팬인 그가 해마다 오페라 페스티벌을 찾기 시작한 건 2013년부터. ‘오페라 에센스55’(시공사)와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21세기북스)을 읽은 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 씨는 “지휘자를 슈퍼스타로 추앙할 정도로 클래식 음악이 문화의 정수(精髓)로 자리 잡은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책을 읽고 길을 떠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오페라, 역사, 도자기, 건축, 도서관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룬 책이 여행을 권하는 촉매제이자 길잡이가 되고 있다. 여행 수요가 급증하면서 단순한 관광보다는 한발 더 깊숙이 문화를 체험하려는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다. 김아라 씨(24·여)는 지난해 8월 나폴레옹의 발자취를 따라 프랑스 파리, 벨기에 브뤼셀, 영국 런던을 2주간 다녀왔다. 여행 전, 유럽의 역사를 다룬 ‘송동훈의 그랜드투어 서유럽편’(김영사)을 읽었다. 신세계그룹이 인문학 부흥을 위해 2014년부터 청년들을 대상으로 매년 운영하는 ‘지식향연’ 프로그램 중 하나로, 송동훈 작가도 동행했다. 서유럽 국가 대부분을 이미 다녀왔던 김 씨는 “파리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서 나폴레옹의 무덤을 보고 워털루 전쟁 기념관을 찬찬히 보니 같은 유럽인데도 이전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며 “리더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서유럽편, 동유럽편, 지중해편까지 3권으로 구성된 ‘송동훈…’은 2007년부터 순차적으로 출간된 후 지금까지 4만8000권이 팔렸다. 마이센, 헤렌드 등 유명 도자기의 세계를 담은 ‘유럽도자기여행 동유럽편’(도도)에 나온 루트를 따라 여행하는 상품도 나왔다. 4월 29일 떠나는 링켄리브 여행사 상품으로, 조용준 작가도 함께 간다. 2014년 나온 이 책은 5000권이, 시리즈로 나온 북유럽편은 3000권이 판매됐다. 서유럽편도 최근 나왔다. 도자기 전문 작가인 조 씨는 “책에 나온 곳을 여행하고 싶다며 어떤 코스가 좋을지 문의하는 사람이 많다”며 “도자기 여행을 위해 적금을 붓고 있다는 자매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를 타고 마쓰야마 성, 구마모토 현립 장식고분관 등 유명 건축물을 둘러본 ‘자전거 건축 여행’(차현호 지음·앨리스)에 나온 코스대로 자유 여행을 하기도 한다. ‘유럽의 아날로그 책 공간’(백창화 지음·이야기나무), ‘유럽도서관에서 길을 묻다’(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서울모임 지음·우리교육)를 보고 도서관을 찾아 세계를 누비는 이들도 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지만 순도 높은 정보가 제대로 정리된 건 결국 책”이라며 “전문적 문화 여행을 위한 플랫폼으로서 책의 역할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채널A 메인 뉴스인 ‘채널A 종합뉴스’가 29일부터 매일 오후 7시 20분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른 메인 뉴스’로 시청자들을 만난다. 메인 뉴스 시간대를 평일 오후 9시 40분에서 대폭 앞당긴 것은 퇴근 직후 뉴스를 보는 시청자의 생활 패턴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뉴스 진행도 역동적으로 바뀐다. 현장에서 생방송으로 직접 전달하는 뉴스를 늘리고 기자가 스튜디오에 출연해 뉴스를 심층 분석하는 ‘현장 A 파일’ 코너를 신설한다. 진행자인 박상규 보도본부 부본부장과 김설혜 사회부 기자가 대형 스크린과 뉴스 진행석을 오가며 활기차게 뉴스를 진행한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 코스타상은 2015년 수상작으로 프란세스 하딘지의 ‘거짓말을 먹는 나무’(The Lie Tree)를 최근 선정했다. 아동·청소년 책이 이 상을 수상한 것은 2001년 필립 풀먼의 ‘앰버 스파이글래스’에 이어 두 번째다.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유명 작가 케이트 앳킨슨의 신작 ‘폐허의 신’이나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작가 앤드류 헐리의 ‘로니’와 같은 화제작을 제치고 수상했다는 점에서 더욱 화제가 됐다. 특히 수상 이후 일주일 만에 6000권이 팔렸다. 작품의 배경은 지극히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으로, 열네 살 소녀 페이스가 목사이자 과학자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외딴 섬에 도착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버지가 발표했던 오래된 화석에 대한 연구가 실은 조작이었다는 소문이 퍼지며 학계에서 신뢰를 잃은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섬으로 도망친 것. 빅토리아 시대는 여자에게 사견을 갖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던 보수적인 사회였지만 페이스는 독학으로 라틴어를 깨우칠 만큼 똑똑한 소녀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의문의 사고로 사체로 발견되고, 페이스는 아버지의 죽음에 비밀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일기에서 우연히 거짓말을 먹는 나무에 대한 내용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중국 여행 중 발견한 이 나무는 사람들의 거짓말을 먹고 성장하는 신기한 나무였다. 대중들에게 거짓말이 널리 퍼질수록 나무는 더욱 잘 자라고, 다 자란 나무에 열린 열매를 먹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다른 이의 비밀을 알 수 있다. 페이스는 아버지가 화석 연구를 조작한 이유가 바로 이 나무를 키우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나무를 이용해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찾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 앞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다. 딸이 요조숙녀로 조용하게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 아버지의 연구 결과를 훔쳐내려는 삼촌, 그리고 페이스의 가족을 하루빨리 섬에서 내쫓으려고 하는 섬사람들…. 이들 틈에서 과연 페이스가 아버지의 죽음과 거짓말을 먹고 사는 나무에 대한 비밀을 밝힐 수 있을까? 코스타상의 심사위원장인 제임스 헤네기는 이 책을 수상작으로 결정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내용과 잘 짜여진 구성, 멋진 캐릭터들도 물론 훌륭한 요소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딸이 있는 아버지 독자로서 용기 있는 열 네 살짜리 소녀의 마음을 그렸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느꼈다. 이 책이 영국의 수많은 십대 소녀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책의 수상 소식은 최근 신문 등 미디어에 아동·청소년 책에 대한 지면을 더 할애해달라고 요청해 왔던 영국의 많은 출판사들에게 희소식이 됐다. 어른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나이와 성별이라는 두 가지 편견에 맞서 싸우는 페이스의 모습은 어쩌면 성인 책들이 지배하는 출판계에서 지분을 넓히고자 노력하는 영국 아동·청소년책의 현 상황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다. 런던=안주현 통신원 jahn80@gmail.com}

회사원 정민우 씨(43)는 지난해 여름 휴가 때 오페라 페스티벌로 유명한 잘츠부르크와 브레겐츠에서 ‘노르마’ ‘피델리오’ ‘투란도트’ ‘호프만의 이야기’를 관람했다. 오페라 팬인 그가 해마다 오페라 페스티벌을 찾기 시작한 건 2013년부터. ‘오페라 에센스55’(시공사)와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21세기북스)을 읽은 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 씨는 “지휘자를 슈퍼스타로 추앙할 정도로 클래식 음악이 문화의 정수(精髓)로 자리 잡은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책을 읽고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여행에세이가 아니라 오페라, 역사, 도자기, 건축, 도서관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룬 책이 여행을 권하는 촉매제이자 길잡이가 되고 있다. 여행 수요가 급증하면서 단순한 관광보다는 한 발 더 깊숙이 문화를 체험하려는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다. 김아라 씨(24·여)는 지난해 8월 나폴레옹의 발자취를 따라 파리, 브뤼셀, 런던을 2주간 다녀왔다. 여행 전, 유럽의 역사를 다룬 ‘송동훈의 그랜드투어 서유럽편’(김영사)을 읽었다. 신세계그룹이 인문학 부흥을 위해 2014년부터 청년들을 대상으로 매년 운영하는 ‘지식향연’ 프로그램 중 하나로, 송동훈 작가도 동행했다. 서유럽 국가 대부분을 이미 다녀왔던 김 씨는 “파리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서 나폴레옹의 무덤을 보고 워털루 전쟁 기념관을 찬찬히 보니 같은 유럽인데도 이전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며 “리더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서유럽편, 동유럽편, 지중해편까지 3권으로 구성된 ‘송동훈…’은 2007년부터 순차적으로 출간된 후 지금까지 4만8000권이 팔렸다. 마이슨, 헤렌드 등 유명 도자기의 세계를 담은 ‘유럽도자기여행 동유럽편’(도도)에 나온 루트를 따라 여행하는 상품도 나왔다. 4월 29일 떠나는 링켄리브 여행사 상품으로, 조용준 작가도 함께 한다. 2014년 나온 이 책은 5000권이, 시리즈로 나온 북유럽편은 3000권이 각각 판매됐다. 서유럽편도 최근 나왔다. 도자기 전문 작가인 조 씨는 “책에 나온 곳을 여행하고 싶다며 어떤 코스가 좋을지 문의하는 사람이 많다”며 “도자기 여행을 위해 적금을 붓고 있는다는 자매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를 타고 마쓰야마 성, 구마모토 현립 장식고분관 등 유명 건축물을 둘러본 ‘자전거 건축 여행’(차현호 지음·앨리스)에 나온 코스대로 자유 여행을 하기도 한다. ‘유럽의 아날로그 책 공간’(백창화 지음·이야기나무), ‘유럽도서관에서 길을 묻다’(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서울모임 지음·우리교육)를 보고 도서관을 찾아 세계를 누비는 이들도 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지만 순도가 높은 정보가 제대로 정리된 건 결국 책”이라며 “전문적 문화 여행을 위한 플랫폼으로써 책의 역할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