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공연업계에서 구독 경제의 싹이 움트고 있다. 아직은 영화, 드라마 등 다른 콘텐츠 산업에 비해 규모가 미약하지만 팬데믹으로 공연장을 찾는 대신에 다양한 방식으로 공연을 즐기려는 팬들이 늘고 있다. 이에 공연계에서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오디오, 텍스트 등 여러 형태로 구독 경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OTT 플랫폼 ‘레드컬튼’은 국내 첫 ‘공연 전문 OTT’를 표방하고 나섰다. 극장 상영작, 소극장 공연, 낭독극 등을 월 9900원에 무제한 감상할 수 있다. 한 배역을 여러 배우가 연기하는 작품의 경우 각각의 배우가 출연하는 회차의 영상을 제공한다. 연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현재 공연 티켓북 애플리케이션 ‘PL@Y’의 유료 회원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연극 ‘그날이 오면’ ‘의자 고치는 여인’ 등 총 23편의 작품이 올라와 있다. 이상진 레드컬튼 대표는 “서비스 이용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1000명 이상의 유료 구독자를 확보하면 정식으로 론칭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인기작이 아니더라도 숨어 있는 명작을 발굴하는 창구도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기아트센터는 국내 공공극장 중 처음으로 OTT에 공연 콘텐츠 배급을 시작했다. 왓챠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구독자는 올해 2월 경기아트센터에서 공연한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다룬 창작 뮤지컬 ‘유월’을 감상할 수 있다. 8월 공연 예정인 창작 뮤지컬 ‘금악’도 해당 OTT에서 서비스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금지된 악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임선미 경기아트센터 홍보팀장은 “무대에 오프라인 공연을 올리는 것이 최우선이지만 콘텐츠 전달 범위를 넓히는 도전이 필요했다. OTT 플랫폼에서도 차별화한 콘텐츠를 필요로 하기에 우수한 공연 콘텐츠에 관심이 크다”고 했다. 공연계에 구독 서비스가 전무했던 건 아니다. 특히 지난해부터 비대면 공연이 이어지면서 공연예술인들이 소규모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하며 오디오, 텍스트 등으로 구독 실험을 해왔다. 극작가 동인 ‘괄호’는 자신들이 쓴 희곡을 오디오 드라마 형태로 제작해 웹에 공개하는 프로젝트 ‘듣는 희곡: 괄호에 귀대면’을 지난해부터 선보여 왔다. 5회 듣는 희곡 서비스를 받는 비용은 5만 원. 구독자는 150여 명이다. 희곡 메일링 서비스 ‘계간(季刊) 괄호’도 이들이 시작한 구독 실험이다. 서울 대학로의 연극인들이 모여 연극 부흥과 예술 대중화를 위해 만든 ‘플롯 레터’는 매주 2회 1400명에게 공연·전시 분야 소식을 무료로 전한다. 시장 규모가 크지 않은 국내 공연 시장에서 구독 실험은 실효성에 의문이 따른다. 마니아 고객 확보는 기본이고 꾸준히 대상을 확장할 만한 매력 요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병성 공연평론가는 “미국의 ‘브로드웨이HD’, 유럽연합(EU)의 ‘오페라비전’ 같은 공연 OTT 서비스는 수십만 원짜리 공연 티켓을 사는 대신 집에서 싼 가격에 공연을 볼 수 있는 큰 이점이 있다”며 “고정적으로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해 배급하고, 일반인까지 매력을 느낄 만한 요인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국내 대표적인 연극·공연예술도시로 꼽히는 경남 밀양시에서 제21회 밀양공연예술축제가 펼쳐진다. 23일부터 8월 7일까지 밀양아리나(옛 밀양연극촌)와 밀양아트센터극장 일대에서 우수작품전, 차세대 연출가전, 주목할 만한 신진 연출가전, 대학극전, 가족극전 등 총 50여 편의 연극과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총 71개 단체가 105회 공연을 앞둔 대규모 축제다. 개막에 앞서 22일 전야제 공연으로 악단광칠의 ‘인생 꽃 같네’가 무대를 장식한다. 국악기와 전통소리로 빚은 밴드 음악으로 현대적 굿판을 벌일 예정이다. 개막작으로는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툇마루가 있는 집’이 선정됐다. 주인공이 오래전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을 맞아 어릴 적부터 청년기까지 살던 옛집을 찾아 과거와 마주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짚고, 과거와의 화해를 모색한다. 우수작품전에서는 국내 대표 연출가들의 무대를 감상할 수 있다. 박근형의 ‘코스모스: 여명의 하코다테’를 비롯해 김낙형의 ‘붉은 매미’, 이성열의 ‘서교동에서 죽다’ 등이 공연된다. 아울러 서지혜의 ‘아일랜드’, 김태수의 ‘세자매’, 최용훈의 ‘믿을지 모르겠지만’, 최원석의 ‘불멸의 여자’도 무대에 오른다. 가족극전에서는 극단 더베프의 ‘괴물 연을 그리다’, 극단 필통의 ‘끝나지 않은 전쟁’, 허둥극단의 코미디 연극 ‘바라바라’ 등이 공연된다. ‘괴물 연을 그리다’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배리어프리 공연이다. 폐막작으로는 극단 하땅세의 윤시중 연출이 맡은 ‘시간을 칠하는 사람들’이 공연된다. 축제의 상징적 공간인 밀양 성벽극장에서 공연하는 작품은 5·18민주화운동의 현장인 옛 전남도청을 배경으로 도청 건물의 벽을 하얗게 칠해야만 하는 아버지와 이를 형형색색으로 칠하는 아들을 통해 비극 속 평범한 개인의 삶을 조명한다. 폐막 주제 공연에선 전훈 연출가의 ‘시라노’도 만날 수 있다. 올해 ‘윤대성희곡상’을 받은 두 편의 작품 ‘17번’과 ‘두껍아 두껍아’를 비롯해 윤대성 극작가의 대표작 ‘출발’과 ‘신화 1900’을 재해석한 작품도 공연할 예정이다. 축제 총예술감독을 맡은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20년 이상 우수작을 발굴하며 실험과 파격을 선보인 축제의 전통을 올해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코미디 프로그램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개그계 ‘호(好)시절’. 방송사마다 공채 개그맨을 뽑고, 이들이 내뱉은 콩트 속 대사는 금세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코미디는 ‘리얼 버라이어티’나 ‘예능’에 밀려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누군가는 “개그계의 암흑기”라며 좌절하고 혹자는 “코미디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며 한탄했다. 심형래 최양락 김형곤과 함께 ‘개그 4대 천왕’이라 불리며 숱한 유행어를 만들어낸 임하룡(69)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콩트 코미디 프로그램이 사라졌다고 해서 코미디가 없어진 게 아니죠. 예능에서도 웃기고, 연기하면서도 웃기고, 요새는 유튜브에서 더 잘 웃기고…. 세상 곳곳에 코미디가 스며든 거지. 웃음은 늘 필요하잖아요?” 평생 웃음을 좇으며 살아온 임하룡이 세상 이곳저곳에 스며든 웃음의 귀재들을 찾기 위해 나섰다. 그는 콘텐츠 제작·엔터테인먼트 기업인 케이스타즈플랫폼이 주관하는 한국 스탠드업 코미디 오디션 ‘제1회 황금마우스’의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코미디언은 물론이고 성인이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대국민 오디션이다. 1일 서울 강남구의 한 식당에서 만난 임하룡은 “짜여진 연기만 잘하면 되는 시대는 지났다. 직접 대본을 쓰고 자체 연출 및 편집도 하는 다재다능한 후배도 많고, 개그맨보다 웃긴 일반인은 더 많다. 개그맨이 살기가 나날이 더 어려워진다”며 웃었다. 이어 “신인 등용문 역할을 하던 프로그램이 사라져 조금은 허탈해도 방송 코미디 프로그램 체제에서 능력을 뽐낼 수 없던 이들이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점은 기쁘다”고 했다. ‘황금마우스’는 개그맨 박준형이 MC 겸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배우 김정태, 개그콘서트 작가 장종원, 구독자 120만 명을 보유한 개그 유튜브 채널 ‘낄낄상회’의 장윤석 임종혁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 4월 초부터 온라인으로 진행된 영상 예선, 본선을 통해 선발된 15개 팀은 결선(6일∼8월 8일)을 거쳐 8월 15일 최종 6개 팀이 선발돼 상금을 받는다. ‘황금마우스’ 유튜브 채널을 통해 결선 전 과정을 방송한다. 빨간 양말을 신은 채 밟던 ‘다이아몬드 스텝’, “이 나이에 내가 하리?” “일주일만 젊었어도” “쑥스럽구만” 등 유행어를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 임하룡. 그가 ‘봉숭아 학당’ 선생님을 맡았을 때는 주역 이창훈 오재미를 비롯해 신예 김용만 유재석 남희석이 활약한 전성기로 평가된다. 그는 “개그를 평생 해왔지만 태생적 한계를 가진 어려운 장르”라고 했다. “이 사람이 오늘 부른 노래를 내일 다른 사람이 불러도 사람들은 재밌어해요. 그런데 이미 결말을 알아 버린 개그를 다른 사람이 한다면 과연 볼까요? 늘 새로운 걸 찾는 게 개그맨의 숙명이죠.”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는 “분야는 달라도 웃음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여느 개그맨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뮤지컬 ‘요셉’에 출연했고 영화 드라마로 활동 폭을 넓혔다. 2005년 출연한 영화 ‘웰컴 투 동막골’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도 거머쥐었다. 그는 “개그맨이 다른 일을 하면 옛날엔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어디서든 웃기는 역할은 자신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제가 걸어간 길이 아주 틀리진 않은 것 같아요. 문세윤 박희진 안선영 등 조언을 구했던 많은 후배들이 여러 분야에서 제 몫을 하니까요.” 그는 지금도 새로운 것에 도전 중이다. 어렸을 적 화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살려 꾸준히 전시회를 연다. “요즘 개그맨 후배 하준수는 캐리커처로도 사람을 웃기는데 그게 정말 부럽다”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도 재치와 웃음은 빠지지 않는 포인트다. “이왕 태어났는데 즐겁게 살다 가야죠. 한번 가면 다시 오겠어요? 즐겁게 살다 가야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통통 튀면서도 풍성한 선율이 귀를 즐겁게 한다. 섬세하게 변주되는 서사 위에 21세기 말에나 나타날 법한 로봇들의 잔망스러운 연기가 더해지니 작품은 대학로 ‘신(新)고전’으로 거듭났다. 올해 네 번째 시즌을 맞아 6월 22일 막을 올린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미국, 일본에 이어 중국 진출도 앞두고 있다. 해외에서는 ‘한국 대표 창작 뮤지컬’이라는 타이틀로 불린다. 원작이 없는 이 순수 창작물을 참신한 소재와 음악으로 무장시킨 이들이 궁금해진다. 주인공은 극작과 작사를 맡은 박천휴(38) 그리고 극작과 작곡을 맡은 미국 출신의 윌 애런슨(40). 대학로에서 ‘윌&휴 콤비’로 불린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 이야기를, 미국 뉴욕에서 가장 한국적인 뮤지컬을 만든 비결을 최근 서면 인터뷰를 통해 들어봤다. 현재 뉴욕에 머물며 창작에 몰두하는 두 사람은 “5년 전 한국에서 시작한 ‘어쩌면 해피엔딩’ 첫 공연 날 객석 2층 구석에 앉아 마음을 졸이다가 관객이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서로 쳐다보며 안도한 때가 떠오른다”며 “저희에게 가장 큰 칭찬은 여전히 관객의 눈물”이라고 답했다. 대학로에서 진행 중인 공연을 점검하면서 중국 상하이에서 개막을 앞둔 라이선스 공연, 미국 공연 그리고 신작 ‘일 테노레(il tenore)’도 챙기느라 꽤 바쁘게 팬데믹 기간을 나고 있다. 둘이 처음 만나 콤비로 거듭난 건 뉴욕대에서다. 한국에서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박천휴는 가요 작사가로 활동하다가 돌연 미술을 공부하러 뉴욕행을 택했다. 하버드대와 독일에서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던 애런슨은 “이야기를 하는 듯한” 뮤지컬 음악 장르에 빠져 뉴욕을 찾았다. 고전을 좋아했던 둘은 금세 의기투합했다. 첫 산물은 영화 원작의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였다. 애런슨은 “작품의 서정적 음악이 한국에서 호평을 받고 나니 원작이 없는 작품도 욕심이 생겼다. 우리의 감정과 가치관을 가장 솔직하고 꾸밈없이 드러낸 게 ‘어쩌면 해피엔딩’”이라고 밝혔다. 브릿팝 밴드 ‘블러’의 데이먼 알반의 솔로 데뷔곡 ‘에브리데이 로봇’에서 두 사람은 작품 모티브를 얻었다. ‘인간 모습을 한 로봇의 사랑’을 떠올리며 극을 썼다. 박천휴는 “작품을 쓸 때 주변 인간관계서 이별, 죽음 같은 상실을 겪었다. 상실할지 모르는 아픔을 알면서도 결국 마음을 여는 행위가 사랑이란 걸 깨달았다”고 했다. 작품의 로봇들 역시 서로를 잃을지 모르는 위험을 알고도 마음을 열어 사랑의 감정을 싹틔운다. 웬만한 한국어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한국에 애정이 많은 애런슨은 “원룸, 작은 아파트가 많은 서울의 ‘은둔형 외톨이’를 생각하며 헬퍼봇을 떠올렸다”고 했다. “작은 공간에 누군가를 들이고 마음을 나누는 게 어떤 의미인지 묻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타지에서도 이들의 대학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여전하다. 두 사람은 “흥행작을 몇십 년씩 ‘오픈런’으로 지속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는 아쉽지만 매년 수많은 창작 뮤지컬이 쏟아지는 한국이 놀랍다. 앞으로 우리도 공감에 초점을 맞춘 좋은 작품을 또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9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1관, 4만4000∼6만6000원, 14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앤서니 홉킨스, 톰 히들스턴, 레이프 파인스, 로저 무어….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공통점은? 모두 영국왕립연극학교(RADA)에서 연기를 갈고닦았다. “입학 후 선배 톰 히들스턴, 레이프 파인스의 연기를 보고 전율했다”는 남윤호(본명 유대식·37)는 2017년 한국인 최초로 RADA에 합격해 당시 큰 화제였다. 그 후로 4년. 누군가의 기억 속엔 연극 ‘에쿠우스’의 주인공 ‘알렌’으로, 다른 누군가에겐 배우인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아들로 남아 있던 남윤호가 연극 ‘코리올라누스’로 돌아왔다.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비극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그는 주인공 코리올라누스를 연기한다. 다음 달 공연을 앞두고 24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배신, 음모, 복수 코드를 비롯해 정치극의 요소가 가득한 작품이다. 잿빛 무대에서 ‘누아르 버전’의 셰익스피어 작품을 연기할 생각에 설렌다”고 했다. 이어 “예전 같으면 저를 보는 시선을 신경 쓰느라 부담이 심했을 것이다. 지금은 배우 남윤호를 무대에 어떻게 제대로 세울지 고민한다”고 답했다. 연극 코리올라누스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셰익스피어가 극화한 작품이다. 로마 영웅이었던 장군 코리올라누스는 호민관의 반대로 집정관에 추대되지 못하고 쫓겨난다. 이후 적과 힘을 합쳐 자신을 내친 조국과 싸우다 파멸로 치닫는다. 셰익스피어 대가로 불리는 양정웅 연출가가 작품을 맡았다. 남 배우는 제작진과 상의해 영국에서부터 길러온 머리와 수염을 유지하며 분장에 활용하기로 했다. 군인다움, 남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는 “장발 코리올라누스는 아마도 세계 최초일 것”이라며 웃었다. 적국의 장군 ‘오피디어스’ 역할의 김도완 배우와는 2012년 함께 데뷔하며 숱하게 호흡을 맞춘 각별한 사이. 극에서 둘은 적에서 동지가 되는 애증관계다. 남 배우는 “격투 장면도 있지만, 극에서는 두 인물이 몸보다는 말로 대적하는 ‘말의 액션’을 주목해 달라”고 했다. 2017년 한창 대학로에서 활약하던 그는 영국으로 떠난 뒤 2020년 연극 ‘언베리드(Unburied)’로 두 번째 데뷔를 맞았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는 그는 팬데믹으로 한국행을 택했다. 귀국 후 달라진 점 하나. 그는 연습실에서 무조건 검은색 옷만 고집한다. “영국에서 한 스승이 ‘옷에 색이나 무늬가 있으면 온전한 너를 볼 수 없다’고 했어요. 장점이든 단점이든 제 진짜 모습을 잘 드러내야 연기도 발전한다고 생각해요.” 오랜만에 국내 무대에 서지만 결코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연극을 대하는 태도다. 데뷔 후 늘 ‘지독하다’는 소릴 듣고 자란 그다. “대선배, 명배우를 보면 저보다 훨씬 지독하게 몰두해요. 그토록 지독한 배우(아버지)가 저희 집에도 계시거든요. 하하.” 7월 3∼15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4만·6만 원. 16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올해 상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꼽힌 뮤지컬 ‘비틀쥬스’가 최근 개막일을 두 번이나 연기했다. 당초 이달 18일 공연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두 차례 연기한 끝에 다음 달 6일 첫 막을 올린다. CJ ENM은 “국내 초연작을 한국 상황에 맞게 각색하는 과정에서 여러 변수가 발생한다. 이에 대비해 준비 기간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주된 연기 사유는 장면 전환에 쓰는 자동화 장치 오류다. 다음 달 6일 개막 예정이던 국내 창작 초연 뮤지컬 ‘박열’도 14일로 개막일을 한 차례 미뤘다.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는 “완성도 높은 무대를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올해 3월에는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의 제작사 쇼노트가 예매된 일부 객석 표를 취소했다. 무대 구조 변경 및 배우 동선상 일부 좌석을 운영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쇼노트는 사과했지만 “공연 당일 취소를 통보받았다”며 항의하는 관객도 있었다. 여러 작품이 개막일을 미루거나 공연 진행에 차질을 빚으면서 공연계의 무리한 제작 관행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해외 라이선스 작품의 경우 팬데믹으로 인해 지난해 준비 과정에서부터 큰 차질을 빚게 된 점도 있다. 하지만 짧은 리허설 일정, 공연장 대관 기간에 끼워 맞춰 작품을 급하게 올리는 관행은 문제로 지적된다. 공연계 제작환경 전반을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공연의 기술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조명, 음향, 무대 전환, 특수효과 등을 점검하는 전 과정인 ‘테크 리허설’ 기간을 짧게 두는 건 고질적인 문제다. 2, 3일 밤샘 작업을 거쳐 이를 급하게 마치는 공연도 많다. 해외 라이선스 작품은 통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충분한 기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작사는 공연 기간은 최대한 길게 확보하면서 대관료 부담은 줄이기 위해 실제 무대에서 합을 맞추는 과정은 최대한 짧게 잡는다. 장경진 공연칼럼니스트는 “이런 관행이 효율성은 좋을지 몰라도 안전성, 정교함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해외에서는 기술적 문제를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프리뷰’ 기간을 둔다. 공연을 정식 오픈하지 않는 대신 저렴한 가격에 관객에게 티켓을 제공한다. 짧게는 1∼2주, 길게는 6개월까지 이어진다. 반면 국내에선 프리뷰 기간이 2, 3일 정도로 짧고 할인티켓을 판매하는 데 그친다. 이 때문에 개막 후 작품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이 계속되는 경우가 잦다. ‘공연 기간이 끝날 때쯤 봐야 완성도가 높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온다. 지혜원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리허설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관행을 구조적으로 점검하고 개막 후 발생할 문제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짧은 공연 기간, 대관료 부담, 영세한 공연계 사정이 얽혀 국내에서는 프리뷰 기간을 운영하기 쉽지 않기에 위험할 정도로 빠듯하게 진행하는 제작 방식은 국내 공연업계의 고질적 문제가 됐다”며 “공연장이 함께 장기 공연을 기획하는 방식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제20회 서울변방연극제’가 30일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서울 서대문구 신촌문화발전소 등 4곳에서 펼쳐진다. 이 연극제는 변방의 관점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올해 주제는 ‘리컬렉션(RECOLLECTION·기억)’. 총 9개 팀이 참여해 기억에 대한 다채로운 연극 실험을 선보일 예정이다. 개막작은 ‘재주는 곰이 부리고’(30일∼다음 달 3일)로 선정됐다. 서커스에 출연하는 동물의 파업과 안식을 다룬 작품이다. 현대미술작가 장지아의 ‘커넥션스’(30일∼다음 달 10일)는 연극제 참여 극단 구성원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가는 프로젝트다. 서로 인사하는 행위를 통해 신체적 거리감을 표현한다. ‘혐오연극’(다음 달 9∼10일)은 다양한 양태의 사회적 혐오를 다뤘다. 이 밖에 퀴어 연극이 대중 장르로 자리매김한 2030년대 국내 연극계를 가상의 배경으로 하는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다음 달 1∼2일), 2016년 일본에서 발생한 사가미하라 장애인 시설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요정의 문제’(다음 달 3, 4일)도 공연된다. ‘재난일기_어느 연극제작자의 죽음’(다음 달 6, 7일)은 배우 홍사빈이 직접 겪은 비극의 기록을 인공지능(AI) 스피커를 활용해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퍼포먼스다. 이경성 서울변방연극제 예술감독은 “팬데믹은 멈춤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며 “이번 연극제를 통해 관객들이 주관적으로 현재를 돌아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요새 광고업계에서는 “광고 건너뛰기 버튼 좀 없어지면 좋겠다”는 푸념이 종종 나온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광고가 뜨면 약 5초만 기다렸다가 재빨리 넘기는 시청자들이 많아서다. 온라인 광고를 만드는 이들에게 시청자들의 광고 체류 시간은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 보는 광고를 만드는 제작사가 있다. ‘광고계의 봉준호’로 통하는 신우석 감독(39·사진)이 세운 ‘돌고래유괴단’이다. 이 회사 광고만 따로 검색해 보는 팬덤이 생길 정도. B급 유머가 넘치는 광고에서는 유명 스타들도 여지없이 ‘무너지는’ 장면이 연출된다. 유쾌한 서사에 녹아든 스타들의 모습에 시청자는 쉴 새 없이 웃게 된다. 단순한 제품 홍보를 넘어 광고에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게 신 감독의 지론이다. 최근 각종 방송 출연 섭외를 마다하고 제작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를 만나러 서울 강남구 돌고래유괴단 사무실로 찾아갔다. 신 감독은 “광고주가 원하는 메시지만 담아 주야장천 얘기하면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 그동안 해보지 않은 웃음을 매일 시도한다”고 강조했다. 게임, 카메라, 의류, 쇼핑몰 등 여러 업종의 광고를 연출한 그는 지난달 ‘2021 P4G 서울 정상회의’ 공익광고를 제작했다. 광고주는 청와대. 그는 “난생처음 청와대에서 연락을 받아 신기했다. 환경 광고라 얘기할 게 많겠다는 생각에 작업에 들어갔다”고 했다. 시나리오 수정은 안 된다는 그의 요청도 ‘쿨 하게’ 받아들여졌다고. 이 광고를 본 시청자들은 “B급인 척하는 S급 광고사”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돌고래유괴단에 광고 제안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 중 제작으로 이어지는 건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광고주가 거액을 제시해도 ‘시나리오와 연출 재량권을 보장받지 못하면 절대 맡지 않는다’는 그의 철칙 때문이다. 신 감독의 광고가 각광을 받는 요인은 반전과 코미디다. 짧게는 5분, 길게는 10분을 조금 넘는 길이의 유튜브 광고에서 그의 시나리오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메인 모델인 배우 이병헌이 갑자기 총에 맞아 죽어버린다. 카메라 광고에서 배우 김선호는 바닷가에서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다가 어촌 주민들에게 둘러싸인다. 축구선수 안정환은 한 광고에서 여러 번 죽기도 했다. 지난해 선보인 게임 그랑사가 광고에서는 신구 조여정 유아인 등 유명 배우 10여 명이 초등학생으로 등장해 화제가 됐다.() 신 감독은 “완벽한 만큼 무너뜨릴 여지가 많은 유재석, 김연아 씨가 광고모델로 탐이 난다”며 웃었다. 웃음에만 치중하면 본래 목적이 흐려질 수 있지 않으냐는 우려에 대해선 기우라고 잘라 말했다. “대부분 광고는 그냥 잊혀져요. 웃음이 유일하게 오래 남는다고 믿습니다.” 매년 ‘공개처형’이라는 제목으로 내는 돌고래유괴단의 공개채용 공고도 인터넷 밈으로 돌 정도로 화제다. ‘광고주 자제분’ 혹은 ‘FIFA(축구게임) 고수’ 등의 우대조건이 붙었다. 그는 “2007년 6명으로 시작한 회사 직원이 현재 20명 정도다. 낄낄대며 재미난 얘기를 풀어놓다 보면 웃긴 발상이 나온다. 팀워크와 유대를 중시한다”고 말했다. 장·단편 영화와 드라마도 준비 중인 그는 “내 것이라는 만족감이 드는 작품 하나만 만들면 몇 살이든 미련 없이 은퇴할 것이다. 단, 축구 ‘덕후’로서 나이키 광고는 꼭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상실은 창작의 원천이 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소도시 레딩에서 일자리와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던 이들의 모습은 미국 극작가 린 노티지의 눈에 들어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인 그는 신자유주의에 희생된 레딩 노동자들의 삶을 작품에 녹여냈다. 그가 2017년 집필한 희곡 ‘SWEAT 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호평을 받고 지난해 온라인 공연에 이어 18일부터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고 있다. 국내 초연. 그는 콩고 여성들이 겪은 학대에 대해 쓴 희곡 ‘Ruined’(2007년)에 이어 이 작품으로 두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2019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노동의 상실을 말하는 이 작품은 안경모가 연출하고, 배우 박상원 강명주 송인성이 출연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먼 얘기 같지만 노사갈등과 실업 같은 보편적 이슈를 다뤄 무겁게 다가온다. 극은 미국 러스트벨트(미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 일대 공업지대)의 쇠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 레딩의 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마을 공동체가 매일같이 축제를 벌이고, 사교의 장으로 삼던 곳이다. 고된 노동에서 잠시나마 해방돼 노동자들에게 안식을 주던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극이 전개되면서 이곳은 노동자들의 다툼으로 황폐하고 폭력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한 가족인 줄 알았던 이웃들은 노동자와 관리자로 나뉘면서 유대감에 균열이 생긴다. 그간 묵혀왔던 인종 갈등도 함께 폭발한다. 이들이 겪는 모든 갈등의 근원에 신자유주의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 무대 위 스크린에 방송 뉴스 화면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노동조합을 결성해 사측과 격렬히 투쟁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노조가 말을 듣지 않으면 사주는 값싼 노동력을 찾아 공장을 옮기면 그만이다. 노동의 상실과 함께 표류하던 사람들은 어떤 결말을 맞을까. 작품 마지막에서는 대를 이어가며 갈등하던 젊은이 3명이 바에 모인다. 이전과 같은 폭력과 광기는 사라졌지만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열린 결말이지만 원작자와 안경모 연출가는 ‘그럼에도 우린 연대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 같다. 다음 달 18일까지, 2만∼5만 원. 14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드라마 ‘미생’이 순한 맛 판타지라면 ‘좋좋소’는 매운맛 백신이다.” 철저한 현실 고증을 토대로 중소기업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주는 웹드라마 ‘좋좋소(좋소 좋소 좋소기업)’에 대한 시청자 반응이다. 이 콘텐츠를 다큐멘터리라 부르는 이도 있다. “보고 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올지 모른다. 중소기업에 들어갈 생각이 있다면 백신을 맞듯 꼭 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OTT 플랫폼 왓챠와 유튜브 채널 ‘이과장’을 통해 공개된 웹드라마 ‘좋좋소’ 시즌 3의 인기가 뜨겁다. ‘이과장’에서 1월 실험적으로 선보인 작품은 시즌 1, 2의 인기에 힘입어 왓챠가 시즌 3부터 공동 제작자로 나섰다. 5일부터 공개된 시즌 3의 5개 에피소드는 22일 기준 유튜브 평균 조회 수 100만 회를 넘겼다. 23일에는 시즌 1, 2의 대본집도 출간된다. 이 드라마가 가진 힘은 뭘까.○철저한 현실 고증, 고발 ‘좋좋소’의 저력은 현실 고증에서 나온다. ‘좋소기업’은 중소기업을 비꼬는 단어 ‘×소기업’에서 비롯된 말. 중소기업 ‘정승 네트워크’에 취업한 29세 사회초년생 주인공 조충범을 통해 청년 취업난부터 취업 후 펼쳐지는 난관을 주로 다룬다. 일부 열악한 중소기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니 자연스레 문제적 노동 환경에 대한 고발도 따라온다. 면접마다 고배를 마시던 주인공은 “당장 면접 보러 올 수 있냐”는 전화를 받는다. 사장은 면접에서 자기 자랑만 늘어놓더니 대뜸 “노래 한번 해보라”고 주문한다. 노래로 그 사람의 추진력을 볼 수 있다는 게 사장의 주장이다. 마지못해 노래를 부른 조충범은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얼떨결에 일을 시작하지만 잡일과 갑질을 버티지 못해 도망친다. 하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어 돌아온다. 인성 나쁜 차장, 무능력한 과장, 회사에 관심 없는 대리, 회사에서 게임만 하는 사장 조카이자 이사가 동료들이다. 이야기마다 ‘중소기업 그 자체’라는 게 시청자의 증언이다. 유튜버 ‘이과장’과 ‘곽튜브’ 등이 겪은 일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짠 게 주효했다. 댓글에는 “첫 출근 날, 귀가 후 보다 울었다”거나 “금요일 퇴근 10분 전 두 시간 회의는 똑같다” “과장은 있어도 거짓은 없다” “진짜 나쁜 놈은 무능력한 사장” 등 자기 일처럼 여기는 이들이 넘쳐난다.○뉴페이스들의 등장 “실제 회사원인가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출연진은 현실감과 몰입도를 극대화했다. 주인공 조충범 역은 부산 출신 연극배우 남현우가 맡았다. 강성훈 김경민 김태영 진아진 등도 공연·방송·영화에서 조연, 단역으로 활약한 배우들이다. 이문식은 중소기업 전문 유튜브 크리에이터, 조정우는 싱어송라이터 출신이다. 낯선 인물의 실감 나는 연기에 “누가 진짜 배우고, 진짜 직원이냐”고 묻는 댓글도 있다. 총감독도 새롭다. 여행 유튜브 채널 ‘빠니보틀’ 운영자 박재한의 첫 드라마 도전이다. 재미 삼아 직접 대본을 썼고 제작비도 모았다. 그도 중소기업 재직 경험이 있다. 업무 시작 전 단체 체조 장면은 박 감독이 직접 겪은 일화다.○기승전결 No, 시간 구애 No 극은 철저히 유튜브 문법을 따랐다. 쉽게 말해 기승전결이 없다. 이전 화 줄거리를 몰라도 다음 화 감상에 무리가 없다. 에피소드마다 개별적인 사건이나 중소기업 특징을 다루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조회 수(202만 회)를 기록한 ‘좋소기업 엘리트’ 편에선 중소기업 회식 문화가 나온다. 다음 화에서는 야근 문화나 업무 인수인계 과정이 그려지는 식이다. 시즌 1∼3에서 공개한 20개 에피소드의 길이는 전부 10분 내외다. 4화의 경우 7분 40초다.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은 OTT를 통해 확장판을 별도 감상하도록 유도했다. 직장인 강현구 씨(34)는 “에피소드 순서 상관없이 출퇴근 중에 짧게 시청할 수 있어 좋다. 중소기업 직원뿐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모두 공감할 얘기”라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드라마 ‘미생’이 순한 맛 판타지라면 ‘좋좋소’는 매운 맛 백신이다.” 철저한 현실고증을 바탕으로 중소기업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주는 웹드라마 ‘좋좋소(좋소 좋소 좋소기업)’에 대한 시청자 반응이다. 중소기업 근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콘텐츠를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정도다. “좋좋소를 보고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올지 모른다. 중소기업 근무 계획이 있다면 백신을 맞듯 꼭 봐야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OTT 플랫폼 왓챠와 유튜브 채널 ‘이과장’을 통해 공개된 웹드라마 ‘좋좋소’ 시즌3의 인기가 뜨겁다. 2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5일 첫 공개된 드라마는 22일 현재 5개 에피소드마다 평균 조회수가 100만 회를 넘겼다. ‘좋소기업’은 중소기업을 비꼬는 단어 ‘X소기업’에서 비롯된 말. 구독자 약 43만 명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 ‘이과장’에서 1월부터 실험적으로 선보인 이 드라마는 시즌1·2의 인기에 힘입어 왓챠가 시즌3부터 공동 제작자로 나섰다. 23일에는 주요서점에서 시즌1·2의 대본집도 출간된다. 이 드라마가 가진 힘은 뭘까. ○철저한 현실 고증과 고발‘좋좋소’가 가진 저력은 현실 고증에서 나온다. 무역업 중소기업인 ‘정승 네트워크’에 취업한 29세 사회초년생 조충범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첫 사회생활에서 겪는 모습을 담았다. 청년들의 애잔한 취업난부터 취업 후에도 펼쳐지는 난관이 주요 소재다. 일부 열악한 중소기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니 자연스레 문제적 노동환경에 대한 고발도 따라온다. 대기업 면접에서 고배를 마신 주인공은 대뜸 “당장 면접 보러올 수 있냐”는 전화 한 통을 받고 달려간다. 면접 자리서 사장은 자기 자랑 일색의 ‘돈 주고도 못 듣는 성공신화’를 늘어놓더니 대뜸 “노래 한 번 해보라”고 주문한다. 거래처 접대 시 노래 부를 일도 잦은 데다, 노래는 곧 사람의 추진력을 볼 수 있는 덕목이라는 게 사장의 주장이다. 마지못해 노래를 기가 막히게 뽑은 조충범은 그 자리서 합격.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얼떨결에 일을 시작한 조충범은 잡일과 갑질에 시달리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친다. 하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어 결국 돌아온다. 일은 잘하지만 인성이 나쁜 차장, 무능력한 과장, 회사에 관심없는 대리, 사장의 조카이자 회사에서 게임만 하는 이사가 그의 동료들이다. 회사 복지는 냉장고, 전자레인지, 컵라면, 믹스커피가 전부. 신입 직원이 쓸 컴퓨터도 따로 없다. 시즌3에서는 정승 네트워크가 신사업을 구상하는 내용과 회사를 박차고 나간 차장이 경쟁 업체를 차려 회사와 갈등하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 사무실을 빼다 박은 듯한 세트에서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중소기업 그 자체’라는 게 시청자들의 증언이다. 유튜버 ‘이과장’과 ‘곽튜브’ 등이 중소기업에서 겪은 일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구성한 게 주효했다. 때문에 댓글창에는 PTSD를 호소하는 이들로 넘쳐난다. “디자인 회사 첫 출근날, 귀가 후 좋좋소 보고 울었다”거나 “4대 보험 가입은 먼 나라 얘기다” “퇴근 10분 전 회의 두 시간은 정말 똑같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약간의 과장은 있어도 거짓은 없다”거나 드라마에 이입해 “진짜 나쁜 놈은 인성 나쁜 차장보다 무능력한 사장이다”는 비판도 볼 수 있다.○뉴페이스들의 등장 “실제 회사원인가요?”대중에게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배우들의 등장은 현실감과 몰입도를 극대화했다. 주인공 조충범 역은 부산에서 주로 활동하던 연극배우 남현우가 맡았다. 강성훈(정필돈 사장) 김경민(백진상 차장) 김태영(이미나 대리) 진아진(이예영 사원) 등도 공연·방송·영화 등에서 조연, 단역으로 활약한 배우들이다. 다들 연기 내공이 만만치 않다. 이문식(이 과장)은 중소기업 근무 경험을 살려 현재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이며, 조정우(정 이사)는 싱어송라이터 출신이다. 낯선 인물의 실감 나는 연기에 “누가 진짜 배우고, 진짜 직원인지 알려달라”고 묻거나 “실제 회사에서 직원들이 재미로 찍은 콘텐츠냐”고 묻는 댓글도 있었다. 드라마의 총감독도 새롭다. 여행 유튜브 채널 ‘빠니보틀’을 운영하는 박재한이 연출을 맡았다. 여행 콘텐츠로 구독자 65만 명을 보유한 그에게 드라마 첫 도전이었다. 팬데믹으로 주력 콘텐츠인 여행 콘텐츠 제작에 차질이 생기자 재미삼아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직접 대본을 쓰고 동료들과 제작비도 모았다. 그도 중소기업 재직 경험이 있다. 업무 시작 전 음악에 맞춰 단체로 체조를 하는 장면은 박 감독이 직접 겪은 일화다.○기승전결 No, 시간 구애 No 극은 철저히 유튜브 문법을 따랐다. 쉽게 말해 기승전결이 없다. 이전 화에서 펼쳐진 줄거리를 잘 모르더라도 다음 화 감상에 큰 무리가 없다. 각 에피소드마다 개별적인 사건 혹은 중소기업의 특징적 문화를 다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리즈 중 가장 많은 조회수(202만 회)를 기록한 ‘좋소기업 엘리트’ 편에선 중소기업의 회식문화가 나온다. 다음 화에서는 야근문화나 업무 인수인계 과정이 그려지는 식이다. 시즌 1~3에서 공개된 에피소드 20개의 길이는 전부 10분 내외다. 숏폼 트렌드를 따랐다. 가장 짧은 4화의 경우 고작 7분 40초다.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은 OTT 등에서 확장판을 별도 감상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출퇴근길에 좋좋소를 시청한다는 직장인 강현구 씨(34)는 “에피소드 순서를 굳이 따지지 않고 출퇴근 시간에 짧고 편하게 시청할 수 있다”며 “기존 오피스물에 임시완이나 수지 등이 등장하는 것부터 비현실적이다. 좋좋소는 중소기업뿐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모두 공감할 작품”이라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아니, 한국 사람인데 왜 일본 춤을 춰요?” 2009년 일본으로 건너가 부토(舞踏)를 배우기 시작한 양종예(46)가 무대에 설 때마다 마주하는 질문이다. 예술에 국경은 없다지만, 일본 색이 짙은 춤을 추는 그는 주변의 비아냥거리는 시선과 싸워야 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인 부토 무용수를 마냥 신기해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런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떻게 객석에 감동을 전할지 오로지 집중할 뿐. 그의 춤을 보는 관객도 시각을 조금 달리해보면 어떨까. 한국인 양종예가 아닌 춤의 여정을 떠난 ‘지구인’ 양종예로. 양종예는 11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팬데믹으로 집에 갇혀 있는 상황이 길어져 답답했다. 오랜만에 무대에 서니 슬슬 몸하고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했다. 5월 말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자가격리를 마치고 최근 작품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의 유명 부토 무용단 다이라쿠다칸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며 부토 무용수로 이름을 알린 양종예는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봄의 제전’을 24, 25일 공연한다. 국내 초연작이다. 제11회 대한민국발레축제 기간 중 열리는 ‘한국을 빛내는 해외 무용스타 초청공연’의 일환으로 이번 무대가 마련됐다. 부토는 일본 전통예술인 ‘가부키’, ‘노’와 서양 현대무용이 만나며 탄생한 무용 장르다. 현재 원산지인 일본보다는 유럽, 미국, 남미 등에서 더 주목받고 있다. 1960년대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어지러운 정세 속 급격한 서양문화 수입에 저항하여 정체성을 찾으려는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일종의 예술운동이자 철학이다. 그가 선보일 공연은 러시아의 전설적 발레리노인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약 100년 전 선보였던 발레 ‘봄의 제전’을 부토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온몸에 금칠을 한 채 홀로 무대에 올라 특수 제작한 금빛 천, 소품을 활용해 전위적이고 정제된 몸짓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공연을 위해 일본 무용단에서 특수 제작한 소품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며 기뻐했다. 그는 이번 공연의 특징을 “에로티시즘, 그로테스크, 난센스”라는 세 단어로 정의했다. “봄을 앞두고 연 제사에서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제물로 선택된 소녀가 신들린 듯 춤추다 쓰러지는 모습을 마치 샤먼처럼 표현하려고요. 소녀가 정말 죽었는지 아니면 신과 영접한 건지는 여러분이 판단해 주세요.” 그는 부토를 공부한 지 12년이 됐는데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했다. 이해하려면 끝이 없다고 한다. 무용수 한 명이 각자 하나의 계파를 구성한다는 ‘일인일파(一人一派)’와 ‘나를 지우고 나를 드러낸다’는 구절이 부토를 설명하는 대표적 문구다. 정형화된 스타일보다는 무용수 개인이 자신의 육체를 마주하고 재인식하는 과정을 목표로 삼는다. 그는 “약 50년 동안 다양하게 확산한 부토는 지금도 변화 중이다. 엄밀히 말해 저는 부토가 아니라 ‘양종예 부토’를 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4년 경성대 무용학과에 수석 입학한 그는 한국무용을 전공하다 우연히 접한 부토 공연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2014년 부토를 배운 뒤 처음 한국 무대에 섰던 때를 잊지 못한다. “부토에 대해 전혀 모르던 한 소년이 공연 후 저를 찾아와 사진 촬영을 원했어요. 일본의 낯선 춤을 추고 있다는 제 마음속의 불안, 편견은 그때부터 사라졌습니다. 현대무용은 그저 감동을 전하면 되는 거니까요.”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제가 말했죠? 한국 배우들은 무대에서 세계 최고의 가수들이라고.”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곡가’로 불리는 프랭크 와일드혼(63·미국)이 말했다. ‘지킬앤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을 비롯해 ‘몬테크리스토’ ‘웃는 남자’ ‘데스노트’ ‘엑스칼리버’ 속 멜로디가 그에게서 탄생했다.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드라큘라’는 그에게 특히 의미 있다. 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그는 10일 본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팬데믹 중 각별한 친구도 잃고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창작에 몰입하고 있다. 제 작품 중 팬데믹으로 공연이 취소될 때 가장 마지막까지 공연했고, 1년 뒤 가장 빨리 공연을 재개한 것도 드라큘라다.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01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처음 공연한 드라큘라는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아일랜드 소설가 브램 스토커가 1987년 내놓은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2014년 국내에서 첫선을 보였다. 400년간 한 여자를 사랑하는 드라큘라의 이야기가 와일드혼의 선율에 어우러졌다. 한국에서는 네 번째 공연할 만큼 사랑받고 있다. 그의 곡은 서정적이고 서글프다. 한(恨)의 정서가 묻어 있다. 음역대가 넓어 배우가 소화하기에 만만찮다. 드라큘라 역은 절규하고 그로테스크한 몸짓과 발걸음 연기도 곁들여야 해 난도가 높다. 그는 “세계적으로 이 역을 할 배우를 찾는 게 쉽지 않지만 김준수 전동석 신성록 등 실력파 배우들에겐 큰 문제가 없었다”며 “저는 그저 ‘열정을 쏟아내라’는 주문만 했을 뿐”이라며 웃었다. 서정적 선율의 비결에 대해 묻자 그는 가족사를 꺼냈다. “루마니아계 아버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망쳐야 했고 러시아계 어머니 가족 역시 핍박을 받아 슬픔을 안고 살아요. 하지만 비극 속에서도 낙관주의, 유머를 보이는 게 바로 동유럽의 정서고, 그게 내 피 안에 있어요.”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미군 참전용사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는 그는 직접 만난 한국 배우, 제작진들이 솔직하고 영혼이 깨어있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그는 “한국 역사를 잘 모르지만 제 가족사와 어딘가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한편 ‘드라큘라 장인’으로 통하는 김준수 배우는 14일 화상 인터뷰에서 “와일드혼이 쓴 ‘Loving you keeps me alive’라는 곡을 듣자마자 이 작품을 꼭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와일드혼은 “2014년 당시 20대로는 세계에서 처음 드라큘라를 맡았던 김준수는 제 동생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군 시절에도, 지금도 안부를 주고받는 12년 지기”라고 했다. 이어 “저는 여전히 배울 게 많은 학생이다. 클래식, 컨트리, 록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제 멜로디를 쓰고 싶다”고 했다. 8월 1일까지,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7만∼15만 원. 14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최고의 음악가이자 이야기꾼이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려고 저승까지 간 사랑꾼이기도 하다. 음악으로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의 마음마저 움직인 그는 아내를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하지만 지상 문턱에서 아내를 보고 싶은 마음에 뒤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어겨 아내를 영영 잃고 만다. 매력적 서사를 담은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극작가이자 싱어송라이터 아나이스 미첼(40·여·미국)도 오르페우스를 닮았다. 흥과 서정성이 넘치는 독특한 음색으로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는 2010년 발표한 포크송 앨범 ‘하데스타운’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평론가들은 새롭게 떠오른 음유시인에 환호하며 그를 밥 딜런, 레너드 코언과 견주었다. 앨범에 담긴 이야기와 음악은 뮤지컬로 각색하기도 제격이었다. 미첼은 줄거리를 따라 미로로 들어가듯 대본을 썼고 곡은 뮤지컬에 맞게 편곡됐다. 극을 현대화해 주인공 오르페우스는 클럽에서 일하는 가난한 웨이터로 그렸다. 2019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 뮤지컬은 토니상 최우수작품상과 연출상, 음악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었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이 올 8월 한국 무대에 오른다. 세계 첫 라이선스 공연(원작자로부터 판권을 사들여 우리말로 공연하는 것)이다.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아나이스 미첼은 “하데스타운은 먼 옛날의 신화라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한다. 팬데믹으로 힘든 시기,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돌아보고 사랑과 연대를 생각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하데스타운의 대표곡 ‘Wait for Me’의 악상이 떠오른 건 우연이었다. 어린 시절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좋아한 그는 이 곡의 멜로디와 가사가 운전 중 불현듯 떠올랐다고 했다. 그는 “지하세계의 규칙에 맞서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돌처럼 딱딱한 심장마저 아름다운 노래로 감동시키는 모습이 좋았다. 모든 예술가들은 이런 감성에 공감할 것”이라고 했다. 뮤지컬 작업은 스타 연출가 레이철 차브킨(미국)과 만난 후 본격화됐다. 차브킨은 최근 국내에서도 호평을 받은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을 연출했다. 브로드웨이에서 흔치 않은 여성 작곡가, 여성 연출가의 ‘케미’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는 “열정과 패기로 가득 찬 차브킨 덕에 작품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뿐 아니라 프로듀서를 비롯해 제작진에 여성이 많았다. 미첼은 “여성만으로 팀을 꾸리려고 한 건 아니다. 역할에 맞는 최고의 인물을 찾았는데 대부분 여성이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이 때문인지 페르세포네, 에우리디케 등 여성 캐릭터들은 주체적 인물로 재창조됐다. 미첼은 “신화 속 여성들은 피해자로만 그려진다”며 “페르세포네는 단점이 있지만 즐거움을 추구하는 여왕으로, 에우리디케는 강한 생존자로 표현했다. 신화 속 인물을 다른 색으로 묘사하는 재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나와 레이철이 브로드웨이에서 활약하는 상징적 여성이 됐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작품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포크와 재즈 선율로 빚은 그리스 신화’다. 그는 “뮤지컬은 결국 음악으로 각색된 이야기다. 하데스타운에서도 음악의 마법이 깨지지 않는 마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르페우스 역은 조형균 박강현 시우민이 맡고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케엔 김환희 김수하가 낙점됐다. 하데스는 지현준 양준모 김우형이,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김선영 박혜나가 연기한다. 최재림 강홍석은 헤르메스를 맡았다. 8월 24일부터 내년 2월 27일까지.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7만∼15만 원. 8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최고의 음악가이자 이야기꾼이다. 아폴론 신으로부터 선물 받은 리라를 그가 연주하고 노래하면 초목과 짐승들도 감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최고의 사랑꾼이기도 하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저승에 제 발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마저 음악으로 감동시킨 그는 아내를 데려오는데 성공하지만, 지상 문턱 바로 앞에서 아내를 보고픈 맘을 참지 못한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깬 그는 결국 홀로 돌아와야 했다. 이 매력적인 서사로 만든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극작가이자 싱어송라이터 아나이스 미첼(40·미국)도 오르페우스를 닮았다. 흥이 넘치는 독특한 음색으로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는 2010년 내놓은 동명의 포크송 앨범 ‘하데스타운’으로 먼저 대성공을 거뒀다. 평론가들은 새롭게 떠오른 이 음유시인에 환호하며 밥 딜런, 레너드 코헨과 견주었다. 앨범이 담은 이야기와 음악은 뮤지컬로 각색하기에도 제격이었다. 미첼은 직접 대본을 썼고 뮤지컬에 맞게 편곡한 그의 앨범 속 트랙은 무대서 되살아났다. 주인공 오르페우스는 클럽에서 일하는 가난한 웨이터로 현대적으로 각색됐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2019년 브로드웨이서 정식 개막한지 3개월 만에 토니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연출상, 음악상 등 총 8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 대작이 올해 8월 한국에 찾아온다. 세계 최초 라이센스 공연이다. 공연을 앞두고 ‘인간계 오르페우스’인 아나이스 미첼을 서면을 통해 만났다. 그는 “하데스타운은 먼 옛날 신화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한다”며 “팬데믹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돌아보고, 작품을 통해 사랑과 연대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처음 신화 속 이야기에 맞는 음악을 떠올린 건 우연한 계기였다. 어린 시절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좋아했던 그는 대표곡 ‘Wait for Me’의 멜로디와 가사가 운전 중 머릿속에 불현듯 떠올랐다. “‘정해진 규칙은 바꿀 수 없다’며 지하 세계 규칙에 맞서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는 그는 “같은 음악가로서 아름다운 곡으로 돌처럼 딱딱한 심장마저 감동시키는 오르페우스가 매력적이다. 아마 모든 예술가들은 이 감성에 공감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 작업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2010년 명반 ‘하데스타운’이 탄생했다. 본격적으로 무대화를 추진한 건 스타 연출가 레이첼 차브킨과 만나고 나서부터다. 차브킨은 최근 한국서 호평 받은 ‘그레이트 코맷’의 연출가이기도 하다. 브로드웨이에서 흔치 않은 여성 연출가와 여성 극작·작곡가의 만남은 그야말로 합이 좋았다. 그는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차브킨 덕분에 작품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브로드웨이 작품과 달리 제작진에는 프로듀서를 비롯해 여성이 많은 편다. 미첼은 이에 대해서도 “여성으로만 팀을 꾸리려고 했던 건 아니다. 제작진을 꾸릴 때 각자 역할에 맞는 최고의 사람을 찾았는데 대부분 여성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는 극의 내용에도 반영됐다. 페르세포네, 에우리디케 같은 여성 캐릭터가 주체성을 갖는다. 미첼은 “신화 속 많은 여성들은 주체성이 없이 기본적으로 피해자로 그려진다”며 “페르세포네는 단점이 있지만 즐거움을 추구하는 여왕으로, 에우리디케는 강한 생존자로 표현했다. 신화 속 인물을 다른 색으로 표현하는 재미가 었었다”고 했다. 이어 “저와 레이첼이 브로드웨이서 활약하는 상징적 여성상이 됐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작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포크와 재즈 선율로 빚은 그리스 신화’다.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로 ‘레미제라블’을 꼽은 그는 “뮤지컬은 결국 음악으로 각색된 이야기다. 하데스타운에서도 음악의 마법이 깨지지 않는 마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국 무대서 이 마법을 부릴 배우들은 ‘역대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오르페우스 역은 조형균 박강현 시우민이 맡으며,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케엔 김환희 김수하가 낙점됐다. 하데스는 지현준 양준모 김우형이,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김선영 박혜나가 맡는다. 최재림 강홍석은 헤르메스를 연기한다. 8월 24일부터 내년 2월 27일까지.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7만~15만 원, 8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메리테(Meritez·자격 있어)!” “메리테!” 발레리나 박세은(32)이 10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BOP)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마치고 난 뒤 최고 등급 무용수인 ‘에투알’로 지명되자 동료들이 외쳤다. BOP는 영국 로열발레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와 함께 세계 3대 발레단 중 하나로 꼽힌다. 352년 발레단 역사에서 아시아인이 수석무용수가 된 건 처음이다. 이름이 호명된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박세은은 알렉산더 니프 파리오페라 총감독과 오렐리 뒤퐁 BOP 예술감독에게 차례로 달려갔다. 박세은을 끌어안은 뒤퐁 예술감독은 그의 귀에 대고 “당신은 자격이 있어요(부 메리테·Vous meritez)”라고 했다. 감정을 꾹꾹 눌러왔던 박세은의 눈물샘이 그제야 터졌다. 뒤퐁 예술감독은 “1년 반 전부터 널 승급시키고 싶었는데 파업, 팬데믹으로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이날 박세은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메리테’였다. 줄리엣을 연기한 그와 좋은 호흡을 선보였던 로미오 역의 폴 마크를 비롯한 동료들은 “메리테(자격이 있다)”라고 외치며 축하했다. “다른 표현보다 ‘넌 자격이 있다’는 말이 어찌나 가슴에 와 닿던지….” 박세은은 12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오디션을 보러 프랑스에 온 순간부터 모든 무대, 그간의 마음고생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털어놨다. 프랑스인도 자국 ‘발레의 심장’에서 떠오른 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르피가로, 프랑스국제라디오방송(RFI) 등은 박세은을 “준비된, 항상 준비된 무용수”라고 평했다. 라틴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처음 2012년 BOP의 에투알이 된 무용수 루드밀라 파글리에로(아르헨티나)와 비교하며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기사를 보니 이제 좀 실감난다. 승급 날엔 오랜만에 선 무대를 잘 마쳤다는 뿌듯함이 훨씬 컸다”고 했다. “에투알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고 했지만 새롭게 주어진 ‘특권’을 듣고는 기뻐했다. “무용수는 평생 마음 졸이며 선택만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면담에서 앞으로 1년간 공연 계획, 출연할 작품에 대해 다 설명해줬어요. 심지어 제가 어떤 역할을 원하고, 잘할 자신이 있는지까지 묻더라고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대우가 낯설었어요.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랄까요.” 박세은은 16일(현지 시간)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 다시 선다. 에투알이 된 후 첫 공연이다. 그는 두 달 동안 코가 헐 정도로 매주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으며 연습했다. 박세은은 “절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리베라시옹’이 강한 작품”이라며 “심장을 뛰게 할 정도로 감정을 쏟아붓고 있다. 무용수가 아니라 배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박세은은 에투알로 지명된 순간 처음을 떠올렸다. 10년 전 몸을 쭉 펴고 스트레칭도 할 수 없던 작은 호텔방에서 오디션을 준비했다. 1, 2등만 합격하는 오디션에서 3등을 했다. ‘내년에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발레 DVD를 잔뜩 가방에 챙겨 넣었다. 프랑스를 떠나려던 날, “1년 계약을 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에투알 박세은’의 시작이었다. 2005년 동아무용콩쿠르 금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박세은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2006년 미국 IBC(잭슨 콩쿠르) 금상 없는 은상, 2007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 1위, 2010년 불가리아 바르나 콩쿠르 금상까지 세계 4대 발레 콩쿠르 가운데 세 곳을 휩쓸었다. 2018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 무용수상을 받았다. 이번 작품이 끝나면 그는 9월 시즌 개막작 준비에 돌입한다. “새 에투알을 관객에게 먼저 선보이고 싶다”는 BOP의 배려로 그는 클래식 발레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에튀드’의 첫 무대에 오른다. 매년 발레단 무용수 전원이 행진하는 퍼포먼스 공연에서는 왕관을 쓰고 걸을 예정이다. 10일 박세은의 연기를 본 한 러시아 소녀는 페이스북에 커튼콜 영상을 올리며 “제 인생 최고의 줄리엣”이라고 썼다. “제 진짜 목표는 소녀에게 그랬듯이 예술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저는 감동을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박세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메리테(Meritez)!” “메리테(Meritez)!” 발레리나 박세은(32·사진)이 1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BOP)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마치고 난 직후. 그는 무대 위에서 최고 등급 무용수인 ‘에투알’로 지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름이 호명된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박세은은 알렉산더 니프 파리 오페라 총감독과 오렐리 뒤퐁 BOP 예술감독에게 차례로 달려가 고마움을 표했다. 특히 박세은을 따뜻하게 끌어안은 뒤퐁 예술감독은 그의 귀에 대고 “당신은 자격이 있어요(부 메리테·Vous meritez)”라고 말했다. 꾹꾹 감정을 눌러왔던 박세은의 눈물샘도 그제야 터져버렸다. 뒤퐁 예술감독은 “1년 반 전부터 너를 정말 승급시키고 싶었는데 파업, 팬데믹 으로 기다렸어야만 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이날 박세은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메리테’였다. 공연에서 ‘로미오’ 역할을 맡아 그녀와 좋은 호흡을 선보였던 동료 무용수 폴 마크를 비롯한 발레단 동료들은 하나 같이 박세은에게 “메리테”를 외치며 격하게 축하했다. 무대에서 펄쩍펄쩍 점프하며 박세은의 승급을 축하하는 이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별 얘기가 아닌데 ‘넌 자격이 있다’는 말이 어찌나 가슴에 와 닿던지….” 에투알 승급 발표 이후 박세은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10년 전 처음 오디션을 보기 위해 프랑스에 왔던 순간부터 제 모든 무대, 그간의 마음고생이 다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털어놨다. BOP는 영국 로열 발레단, 미국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와 함께 세계 3대 발레단 중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승급과 서열 관리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났다. 352년 발레단 역사에서 아시아인이 수석무용수가 된 건 최초다. 발레에 관심 많은 프랑스인들도 자국 ‘발레의 심장’에서 새로 떠오른 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르 피가로,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RFI 등 주요 프랑스 언론도 박세은을 “준비된, 항상 준비된 무용수”라고 평하며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 최초로 2012년 BOP의 에투알이 된 무용수 루드밀라 파글리에로와 비견하며 의의를 설명했다. “여러 언론에서 기사 나는 걸 보니 사실 이제야 좀 실감나요. 승급 당일에는 무대를 잘 마치고 관객 앞에 섰다는 뿌듯함이 훨씬 컸거든요. 팬데믹으로 워낙 오랜만에 선 무대잖아요. 그래도 귀가 후엔 남편과 친구들과 함께 샴페인 한 병을 나눠 같이 마셨어요.” 그는 “돌이켜 보니 저만 눈치가 진짜 없었던 것 같다”며 “공연 전부터 동료들이 제가 에투알이 확정된 것처럼 꽃다발도 준비하고 축하해줬는데 정작 저는 ‘이러다 승급 안 되면 어떡하려고 저러나’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속으로 생각했다”며 웃었다. “에투알이 됐다고 해서 제 춤이든, 뭐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그녀도 새롭게 주어진 특권에 대해선 진심으로 기뻐했다. “무용수는 평생 마음 졸이며 예술감독, 안무가의 선택을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승급 후 면담에서 앞으로 1년 간 시즌 계획, 제가 출연할 작품에 대해 다 설명해줬어요. 심지어 제가 어떤 역할을 더 좋아하는지, 잘 해낼 자신이 있는지도 조심스레 묻더라고요. 맨날 주어진 것만 하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대우에 진짜 낯설었어요. 수평적으로 저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박세은은 16일(현지시간) 에투알이 된 후 처음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 다시 선다. 그간 발레 ‘오네긴’을 ‘최애작’으로 꼽아왔던 그는 두 달 동안 코가 헐어버릴 정도로 매주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으며 ‘로미오와 줄리엣’ 연습에 임했다. 박세은은 “표현, 연기를 절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리베라시옹’이 강해 저를 많이 열리게 만든 작품”이라며 “매번 심장을 뛰게 할 정도로 감정을 쏟아 붓는다. 무용수가 아니라 배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정상에 선 순간에 처음을 떠올렸다. 10년 전 프랑스 파리의 한 주택가 인근 작은 호텔을 잡고 오디션을 준비했다. 웬만한 화장실보다도 작은 방이라 몸을 쭉 펴고 스트레칭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과정이 너무 행복했단다. “이곳에서 춤추고 싶다는 확신이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1, 2등만 합격하는 오디션에서 그는 3등을 했다. ‘내년에 꼭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발레단의 공연 DVD만 잔뜩 가방에 챙겨 넣었다. 프랑스를 떠나려던 날. 갑자기 그에게 “1년 계약을 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이 ‘에투알 박세은’의 시작이었다. 박세은은 “사실 저를 좋게 본 네덜란드의 한 발레단에서 이미 제의를 받은 상태였어요. 상황이 바뀌어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가게 돼 미안하다. 네덜란드에 못 갈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직접 안무가가 있는 곳으로 기차를 타고 찾아갔다”고 했다. e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전해도 될 법했지만 박세은은 죄송스런 마음에 직접 찾아가 인사를 전했다. 그 안무가는 당시 박세은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다. 박세은은 “사람 인연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같다”며 “2년 뒤 파리 오페라 승진시험 심사위원으로 그 분이 오셨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며 웃었다. 2005년 박세은은 동아일보가 주최한 동아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던 그는 “제가 살면서 처음 섰던 큰 무대이자 가장 기억에 남는 콩쿠르다. 너무너무 떨렸던 기억이 가득한데 상까지 타서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회”라고 했다. 이때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세은은 2007년 로잔 콩쿠르 1위 등 주요 발레 콩쿠르를 휩쓸기 시작했다. 박세은이라는 새 별이 파리에 뜬 날은 그간 하늘을 지키던 다른 별이 내려오는 날이기도 했다. BOP는 그간 에투알로 활약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엘레오노라 아바냐또의 영예로운 은퇴식을 열었다. 박세은은 “엘레오노라는 제가 무용계 최고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할 수 있게 심사해준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이어 “5년은 더 활약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지금도 정말 아름다운 에투알이다. 예술을 뿜어내는 능력이 워낙 탁월해 은퇴하기엔 아깝다”고 했다. 이어 “에투알이 되어 홀로 무대 중앙에서 인사를 하는 건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그녀만큼 관객에 감동을 주는 에투알이 되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다”고 덧붙였다.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끝나면 그는 9월 2021-2022 시즌 개막작 준비에 돌입할 예정이다. “새 에투알을 관객들에게 가장 먼저 선보이고 싶다”는 BOP의 배려로 그는 ‘Etudes’의 개막작 오프닝 무대에 오른다. 엄청난 영예다. 또 시즌 오프닝 첫 무대에서 발레단 무용수 전원이 함께 행진하는 퍼포먼스도 선보일 예정이다. 그녀는 이 행사서 왕관을 쓰고 걷는다. “저도 이 행사는 정말 기대된다”며 기뻐했다. 에투알 지명 후 그녀는 귀가 길에 부모님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소식을 접한 부모님이 통화 중 바로 눈물을 쏟자 “지금 친구들이랑 같이 있는데 스피커폰이야”라고 말하자 부모님도 “아 그래?”라며 눈물을 뚝 그쳤다고. “지금 제가 있는 것도 평생 저를 위해 헌신하신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10일 박세은의 무대를 지켜본 한 러시아 소녀는 박세은이 눈물 흘리며 기뻐하는 장면을 촬영해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소녀는 “제 인생 최고의 줄리엣”이라는 글을 덧붙였다. 이 얘기를 들은 박세은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제 목표는 사실 에투알이 아니었어요. 타이틀에 욕심을 갖지 않고 춤만 출 수 있으면 됐거든요. 진짜 목표는 그 소녀에게 전한 감동처럼 예술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저는 감동을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요.”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발레리나 박세은(32·사진)이 세계 정상급 발레단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BOP)에서 최고 등급 무용수인 ‘에투알’에 지명됐다. 아시아 출신 무용수로는 처음이다. 35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오페라발레는 세계 3대 발레단으로 꼽힌다. 이 발레단의 무용수들은 카드리유(군무), 코리페(군무 리더), 쉬제(솔리스트), 프르미에 당쇠르(제1무용수), 에투알(최고 무용수)의 5개 등급으로 나뉜다. 2005년 동아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세은은 2007년 로잔 콩쿠르 1위 등 주요 발레 콩쿠르를 휩쓸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무대 위에 홀로 선 배우를 본 적이 있는가. 허공에 대사를 뱉고 혼자 넓은 무대를 오가며 몸짓한다. 온전히 한 명의 힘으로 공연장 공기를 움직이느라 어깨가 무거울 법도 하다. 관객에게도 1인극은 신선한 경험이다. 여러 배우가 함께할 때의 강한 에너지와는 달리 한 명이 뿜어내는 농밀한 힘을 체험할 수 있다. 1인극에서 관객과 배우는 극을 같이 만들어가는 동반자이면서도 러닝타임 내내 묘한 기 싸움을 벌이는 관계가 된다. 공연계에 1인극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정동환의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박상원의 ‘콘트라바쓰’, 차지연의 ‘그라운디드’에 이어 최근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발이 되기’ ‘일리아드’ 등이 관객과 만난다. 얼마 전 막을 내린 4시간이 넘는 1인극 ‘데미안’을 비롯해 성수연 배우가 맡은 국립극단의 SF 연극 ‘액트리스’ 시리즈도 화제였다. 팬데믹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제작 환경과 프로덕션 규모가 점차 축소하는 추세다. 규모가 작아지며 상대적으로 대작보다는 실험적인 극을 펼칠 기회가 늘어났고, 1인극도 그중 하나로 떠올랐다. 1인극에 도전한 배우들의 마음가짐은 어떨까. “텍스트가 1인 연기에 최적화되어 있을 뿐 다른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도 “혼자 더 깊게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1인극에 출연한 배우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27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손상규, 윤나무 배우가 선보이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교통사고로 뇌사 판정을 받은 열아홉 살 청년의 심장이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는 24시간의 기록을 그렸다. 배우는 의사, 유족, 장기이식 수혜자 등 총 16명의 인물을 연기한다. 손상규는 “혼자 관객과 만나는 묘한 기대감과 흥분이 있다”며 “책임과 부담감은 다른 작품과 비슷한데 컨디션 조절에는 훨씬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숱한 1인극을 탄생시킨 서울 중구 삼일로 창고극장에선 13일까지 ‘발이 되기’를 공연한다. 바리데기 설화를 소재로 아동학대, 청년실업 등 사회 문제와 인간 존엄성을 말하는 창작극이다. 극작, 연출, 배우까지 모두 이승우가 맡았다. 그는 “작품 준비 과정부터 무대에 서기까지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공연계가 힘든 요즘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도 반영돼 1인극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작품을 “한바탕의 굿”으로 정의한 그는 “한 굿판에 여러 무당이 참여하지 않듯이 홀로 한풀이를 해보려 한다”고 했다. 황석정 최재웅 김종구가 내레이터이자 배우로 출연하는 1인극 ‘일리아드’는 29일 개막해 9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CJ아지트 대학로에서 공연한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 ‘일리아드’를 각색했다. 트로이전쟁의 마지막 해를 배경으로 아킬레스, 헥토르 등 신화 속 인물들과 전쟁으로 터전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가 단 한 명의 배우에 의해 펼쳐진다. 황석정은 “16개 역할을 하는 게 가능할지 걱정했는데 실제 연습해보니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더 도전하고 싶다. 배우로서 큰 실험이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막을 내린 ‘데미안’은 4시간이 넘게 양종욱이 무대에서 원작 소설 ‘데미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양손프로젝트 대표로 꾸준히 1인극에 참여한 그는 “연극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며 “작품을 온전히 혼자 맡다 보니 개인적인 성향, 연기가 크게 반영되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관객들이 걱정하는 만큼 지치거나 힘들진 않았다”며 “긴 시간 작품을 봐야 하는 관객들에게 더 큰 도전이었다. 배우와 관객이 4시간 공연을 마친 성취감을 함께 느낀다”며 웃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1963년 9월 25일 서울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제1회 현대무용 육완순 발표회’. 서른 살의 앳된 육완순과 무용수들은 맨발에 쫙 달라붙는 타이츠를 입고 무대 위를 구르고 뛰었다. 무용이라면 으레 전통무용을 떠올리던 당시 그는 미국 유학 시절 배운 현대무용을 열정적으로 선보였다. 그야말로 낯선 광경. 평은 둘로 나뉘었다. 누군가는 이 무대를 ‘미친 짓’으로, 다른 이들은 ‘혁신’으로 평가했다. 육완순은 “신세대가 출연했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세계 무용계의 신화 마사 그레이엄과 호세 리몽을 사사한 육완순은 올해 88세. 지금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무용계는 그를 한국의 1세대 현대무용가이자 현대무용의 대모라고 부른다. 12일 열리는 ‘제3회 육완순 무용콩쿠르’를 앞두고 여전히 현역 안무가로 활동 중인 그를 서울 마포구 육완순무용원에서 만났다. 그는 “상금을 많이 주거나 큰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콩쿠르는 아니다. 하지만 무대에서 춤을 선보일 기회가 많지 않은 무용수들의 능력을 뽐낼 장을 마련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콩쿠르를 프랑스 바뇰레 콩쿠르처럼 세계적인 대회로 키우는 게 그의 꿈이다. 육완순에게 올해는 각별하다. 그가 만든 국제현대무용제(MODAFE·모다페)는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그는 자신의 대표작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를 지난달 28일 ‘모다페 뮤지엄-레전드 스테이지’ 무대에 올렸다. 이날 최청자 이숙재 박명숙 등의 공연까지 모두 끝나자 객석에서는 존경을 담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는 “프로그램 구성상 90분짜리 무대를 12분으로 압축하느라 아쉬웠다”면서도 “다섯 살 때 처음 춤을 추던 때나 지금 내 무대를 만들 때나 똑같이 설렌다”고 했다. 무대에 대한 열망을 말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올 초 그는 스승과 제자, 동료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을 묶은 ‘내가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디자인필)를 펴냈다. 책에는 제자들로부터 받은 편지에 그가 보낸 답신이 나온다. “매 페이지마다 눈물을 흘리며 썼다”는 신간에는 문훈숙 안애순 최태지 국수호 등 춤꾼 117명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고백이 담겼다. 육완순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 중 한 명은 미국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1894∼1991)이다. 마사 그레이엄의 무용은 지금도 ‘신화의 창조’라고 불릴 만큼 전설이다. 육완순은 미국에서 2년간 그를 스승으로 모신 데 이어 1990년 내한공연을 성사시켰다. 육완순은 “무용에서 좋은 신체 못지않게 좋은 영혼과 정신을 강조하셨던 분”이라며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 시절 고수했던 엄격한 교습 방식은 그레이엄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자신의 사위이자 가수인 이문세와 만든 합동공연은 무용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애정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육완순은 사위에게 “무용수는 백댄서처럼 왜 가수 뒤에만 서야 하느냐”고 물었고, 결국 무용수들이 무대의 전면에 섰다. 이문세는 무대 뒤편으로 물러나는 대신 단을 높인 곳에서 노래했다. 마음속에 춤을 품기 시작한 다섯 살 때부터 그가 춤과 함께한 세월은 80년이 넘는다. 그가 걸어온 길이 곧 한국 현대무용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를 표현하는 수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육완순은 딱 다섯 글자면 충분하다고 했다. “‘현대무용가’ 육완순. 그거면 족해요.”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