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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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칼럼51%
문학/출판17%
역사10%
미국/북미7%
국제일반3%
중동3%
국제정세3%
문화 일반3%
대통령3%
  • [책의 향기]1945년, 미국은 왜 중국의 공산화를 막지 못했나

    보통 적의 적은 친구다. 하지만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친구가 여럿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친한 친구라도 셋이서 여행을 떠나면 한 명은 소외되기 일쑤인 것처럼 말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중국 대륙의 정세도 그랬다. 여기서 애매한(?) 친구들은 2차 대전 내내 공동의 적 일본과 맞서 싸운 중국 공산당과 소비에트 정부다. 이 책은 일제의 패색이 짙었던 1945년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소비에트 정부를 상대로 복잡한 체스를 두어야 했던 미국의 행보를 구체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중국사를 전공하고 중국 특파원을 지낸 저자는 1945년 당시 미중소의 움직임이 이후 수십 년에 걸친 미중 갈등의 뿌리가 됐다고 주장한다. 2차 대전 직후 미국에 불어닥친 매카시즘 광풍은 대중 외교정책에서 이데올로그들의 득세를 가져왔다. 실리적이고 균형적인 대중 정책이 힘들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셈이다. 가장 생생한 사례가 패트릭 헐리 주중 대사와 수하 외교관들의 갈등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헐리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찼던 인물이다. 반면 주중 대사관에 파견됐던 국무부 소속 외교관들은 중국어에 능통하고 공산당 인사들과 자주 접촉한 중국통이었다. 이들은 일본을 빨리 격퇴하려면 중국 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공산당에도 군사물자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해 헐리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결국 헐리의 강력한 견제로 이들은 모두 중국을 떠나야 했고, 중국 공산당의 미국 불신은 커졌다. 하지만 저자는 이 부분에서 국무부 비둘기파의 상황 인식에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들이 마오쩌둥과 공산당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통 외교 전문가들은 공산당이 국민당에 공민권 존중을 요구한 바로 그 순간에도 반대파를 탄압하고 있었던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시기 미국이 중국 공산당을 철저히 봉쇄하고 국민당에 대한 지원을 더 늘렸다면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을까. 저자는 사회주의 혁명사상에 심취한 마오쩌둥이 권좌에 머문 한 미국의 노력은 결국 무위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봤다. 특히 1945년 8월 미국의 요청에 의한 소련의 만주 침공은 마오쩌둥이 스탈린과 연합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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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광국사탑 사자상 국립문화재硏에 조속 인도”

    국립중앙박물관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사진)의 일부 부재인 사자상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빠른 시일 안에 넘기겠다”고 17일 밝혔다. 박물관 측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관리권 및 사자상 이관 시기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사자상에 대한 보존처리가 완료된 상태인 만큼 연구소가 원하면 다음 달이라도 인도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사자상은 지금껏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 2010년 8월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수장고 안에 사자상이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파악했다. 박물관은 2013년 사자상을 세척 처리하는 과정에서 3차원(3D) 스캔 이미지를 통해 지광국사탑과 사자상이 한 세트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그러나 해체 보수를 맡은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사자상 발견 사실을 알리지 않아 지난해 10월에야 연구소가 관련 사실을 파악하게 됐다. 문화재계에서는 박물관과 연구소가 문화재 관리 정보를 제때 공유하지 않은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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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보존과학실 일반에 첫 공개

    국립고궁박물관이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收藏庫)와 보존과학실을 일반에 처음 공개한다. 국립박물관이 핵심시설인 수장고를 공개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 최종덕 고궁박물관장은 “박물관의 심장인 수장고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국민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 유물 보호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만 개방하기로 했다”고 16일 밝혔다. 이에 따라 박물관은 이달과 8, 9, 12월 총 4회에 걸쳐 40명의 관람객에 한해 수장고와 보존과학실을 70분간 공개한다. 현재 고궁박물관은 총 18개 수장고에 4만5000여 점의 왕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박물관은 이 중 사무동 지하 1층에 있는 수장고 한 곳만 공개할 예정이다. 이 수장고에는 보물로 지정된 영조어진 등 국가지정문화재 6점을 포함해 왕실 의궤와 그림 등 유물 460여 점이 보관돼 있다. 수장고는 종이와 나무, 금속 등 유물의 재질에 따라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첨단시설이 갖춰져 있다. 유물 도난을 막기 위한 보안장치도 마련돼 있다. 총 4회에 걸쳐 진행될 이 행사는 회당 10명만 관람이 가능하며, 고궁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는다. △3, 9월은 성인을 대상으로 △8, 12월은 중학생 이상을 대상으로 한다. 02-3701-7683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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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전 붓과 삭도… 한반도 문자문명 시대를 알리다

    “이 연구관, 창원 다호리 유적에 도굴이 심하다는데 직접 가서 조사해 보시오.” 1988년 1월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이건무 학예연구관(전 국립중앙박물관장·현 도광문화포럼 대표)에게 현장조사를 지시했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 고분군은 도굴꾼들 사이에서 ‘실습장’으로 통할 정도로 유물 도난이 빈번했다. 1980년대 국가 사적 발굴을 주도한 박물관이 묵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건무는 이영훈(현 국립중앙박물관장), 윤광진(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신대곤(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학예연구사와 함께 다호리로 향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야트막한 구릉 곳곳에 원삼국시대 고분을 파헤친 도굴갱 40∼50개가 줄지어 있었다. 생각보다 극심한 도굴 피해에 이건무는 다급해졌다. 한겨울 대기에 노출된 유구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급격한 손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팀원들과 하루 내내 전체 고분에 대한 현황 파악을 마친 뒤 이 중 구덩이가 제법 큰 1호분 발굴에 그달 21일 착수했다. ‘뭔가 있어 보인다’는 그의 직감은 곧 ‘월척’으로 이어졌다. 도굴꾼이 깔아놓은 볏단을 치우자 약 2m 깊이의 도굴갱 아래로 너비 0.8m, 길이 2.4m의 통나무 목관 상판이 드러나 있었다. 목관 내 유물을 빼내기 위해 도굴꾼들이 상판 일부를 깨뜨려 놓았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였다. 발굴팀은 목관을 빨리 수습하기로 하고 주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구덩이 안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진흙탕이 돼 바가지로 물을 퍼내야 했다. 겨울에 물을 퍼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이것은 축복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어어, 목관 밑에 뭔가 있다!” 목관에 체인을 감아 도르래로 들어올리자 바닥에 박혀 있던 동경(銅鏡) 조각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발굴팀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 대나무 바구니가 박힌 조그마한 구덩이가 있었다. 부장품을 따로 묻은 구덩이 ‘요갱(腰坑)’이었다. 요갱 안에는 △철검, 꺾창, 쇠도끼, 낫 등 철기와 △칼집, 활, 화살, 두(豆), 부채, 붓 등 칠기(漆器) △동검, 동경 등 청동기 등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원삼국시대 변한의 목관과 칠기가 부식되지 않고 20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물 덕분이었다. 매장 직후 물이 뒤섞인 진흙이 목관을 덮어 외부 공기를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무가 꼽는 다호리 유적 최고의 유물은 뭘까. 그는 주저 없이 붓과 삭도(削刀·목간에 잘못 쓴 글씨를 깎아내는 지우개)를 들었다. 완형으로 처음 출토된 통나무형 목관도 학술적 의미가 상당하지만, 부장된 붓과 삭도의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얘기다. 고고학계는 다호리 유적의 붓과 삭도를 기원전 1세기경 한반도에서 문자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본다. 이건무의 회고. “당시 한 일본학자가 옻칠용 붓이라며 의미를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쪽 자료를 검토해 보니 다호리와 마찬가지로 붓과 삭도, 천평(天枰·저울)이 한 세트로 출토된 사실이 확인됐어요. 마치 지금의 영수증처럼 천평으로 물건을 단 뒤 매매 기록을 죽간(竹簡)에 붓으로 기록한 흔적인 겁니다.” 이와 관련해 다호리 1호분에서는 무덤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대표적 위세품인 한나라 오수전(五銖錢)이 함께 나왔다. 기원전 1세기 변한의 풍부한 철기를 매개로 중국, 왜와 교역을 벌여 부를 쌓은 이 지역 수장이 묻혔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시됐다. 28년 만에 다호리 발굴현장을 다시 찾은 그에게 혹여 아쉬움으로 남는 게 있는지 물었다. 그는 푯말 하나 없이 잡초만 무성한 1호분 자리를 한참 바라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시 겨울인 데다 추가 도굴이 걱정돼 서두른 감이 있어요. 경찰에 유구 보호를 요청하고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서 발굴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땐 발굴팀원들이 돌아가면서 밤에 고분 주변을 순찰할 정도로 도굴 우려가 컸어요. 지금이라면 가설 덧집을 세우고 실측도 꼼꼼히 하면서 진행했을 겁니다. 그리고 발굴종합보고서를 2012년에야 뒤늦게 발간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창원=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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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유교 왕궁안 고려 불탑의 ‘고향 찾기’

    14일 찾은 창경궁 정전(正殿·임금이 정사를 보던 중심 전각) 뒤편 환경전(歡慶殿). 돌계단 앞 10시 방향으로 불탑이 서 있다. 환경전은 1484년(성종 15년)에 건립된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거주하는 전각). 불탑 1층 탑신에 새겨진 부처님 좌상이 정확히 환경전을 향하고 있었다. 환경전을 찾는 관람객이라면 이 탑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과연 유교가 국시인 조선에서 왕의 침전 앞에 불탑을 세워놓고 감상했을까. 무언가 이상하다. 불탑의 이름은 ‘창경궁오층석탑’. 일제강점기에 어디선가 옮겨진 고려시대 석탑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조사에서 창경궁오층석탑이 충청지역 사찰에서 건립된 사리탑(舍利塔)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제강점기 전국 사찰에서 마구 옮겨진 고려 석탑의 ‘제자리 찾기’와 관련해 파장이 예상된다. 문화재계에서는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이 탑이 세워진 원래 위치를 찾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서울 강남의 대형 사찰인 봉은사는 수년 전부터 석탑을 자신들의 경내로 이전할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하고 있다. 23일 열릴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회에서 석탑 이전 여부가 논의될 예정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기초 학술연구 자료: 창경궁오층석탑’에 따르면 석탑은 1936년경 지금의 자리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조선왕실이 제작한 동궐도(東闕圖)에 표시되지 않은 석탑이 1936년 이후 작성된 근대건축도면집에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순종을 위로하고 인민의 지식을 계발한다”는 이유로 1908년 창경궁 전각들을 허물고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을 세웠다. 이 창경궁 공원화는 조선왕조의 권위를 훼손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이때 일제는 일종의 관상용으로 전국에 산재한 고려 석탑을 궁궐로 가져왔으며, 일부는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현재 고려 석탑 상당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에 옮겨져 있다. 연구소는 창경궁오층석탑이 고려 중기 충청지역 사찰에 의해 사리탑으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석탑 부재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동일한 ‘반상 흑운모화강섬록암’인 것으로 조사됐고 △사방불(四方佛·사면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닌 탑신 한 면에만 불상을 새긴 고려 석탑은 충남 예산군 석곡리 석탑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게 근거다. 1936년 이후 근대건축도면에 이 탑의 명칭이 사리탑으로 적혀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최근 해체 및 보수가 결정된 경복궁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도 일제가 무단으로 옮긴 고려 석탑이다. 이 탑도 보수를 마친 뒤 어느 곳에 설치할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지광국사탑은 건립지가 원주 법천사 터임을 기록으로 전하지만, 이곳은 폐사지(절터만 남은 곳)여서 제대로 된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강원 원주시는 본래 위치가 법천사 터가 명확한 만큼 석탑을 제자리로 옮겨야 한다는 입장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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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임정, 음력 10월3일 건국절 지정 1945년 광복때까지 매년 기념식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국절을 제정해 매년 기념식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아 건국을 기념한 것이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사학)는 “1919∼1926년 발행된 독립신문에서 임시정부가 음력 10월 3일 개천절을 건국절로 기념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7일 밝혔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1896년 창간한 신문이 아닌, 상하이 임시정부가 1919년 창간한 기관지를 말한다. 임시정부의 행적을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1차 사료라는 평가다. 3·1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19년 11월 27일자 독립신문 2면 머리기사 제목은 ‘태황조(太皇祖) 성탄 및 건국기원절 축하식’이다. 개천절을 태황조(단군)가 태어난 날로 기념한 동시에 건국절로 축하한 것이다. 실제 기사에는 “지난 11월 24일(음력 10월 3일)은 우리 태황조 성탄절이요 또 건국기념일이라 국무원 주최로 모처에 회집하여 국무총리 이동휘 씨 사회로 축하식을 거행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밖에 독립신문 1922년 11월 30일자 ‘건국기원절 축하’라는 제목의 기사를 비롯해 △1923년 12월 5일자 ‘건국기원 경축식’ △1926년 11월 18일자 ‘음력 10월 3일 건국기원절’ 기사 등이 확인됐다. 음력 10월 3일을 건국절로 정하고 광복 전까지 꾸준히 기념식을 거행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건국절 기념은 입법 절차를 거친 사실도 확인됐다. 임시의정원(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기관) 회의록 등에 따르면 1919년 12월 1일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3월 1일과 10월 3일을 국경일로 제정하자”고 의결했다. 이어 이듬해 2월 23일 열린 임시의정원 제7차 회의에 ‘국경일 결정에 관한 의안 의결’ 안건이 상정됐다. 여기서 10월 3일 국경일의 명칭을 토론하면서 ‘건국기원절’ ‘건국기원일’ ‘개천절’ 등 다양한 의견이 제기됐다. 결국 임시정부는 1922년 ‘대한민국 4년 역서(曆書)’를 펴내면서 국경일을 △3월 1일 독립선언일 △4월 11일 헌법선포일 △11월 21일(음력 10월 3일) 개천절로 표기했다.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썼지만, 실제 기념행사에는 건국절을 병기했다. 한 교수는 “비록 국권을 빼앗겼지만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 왔다는 점을 중시한 것”이라며 “고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여러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을 뿐 민족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됐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해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실질적으로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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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돌, 터미네이터에 맞선 존 코너 같아”

    “존 코너, 이세돌이 인류를 구했다.” “드디어 기계를 이겼다. 이세돌이 인류 멸망을 지연시켰다.” “터미네이터의 시대는 없다.” 13일 이세돌 9단의 승전보가 전해지자 누리꾼들은 영화 ‘터미네이터’의 등장인물인 존 코너에 이 9단을 빗대 ‘인류 승리’의 기쁨을 표시했다. 알파고는 존 코너의 적이자 인공지능(AI) 시스템인 스카이넷에 비유됐다. 영화에서 존 코너는 인류 생존을 위해 스카이넷에 맞서 싸우는 저항군 지도자로 그려진다. 스카이넷은 본래 군사 방어를 위해 개발됐지만 자기학습 기능을 통해 어느 순간 자아를 인지하게 된다. 정부는 스카이넷의 위험성을 뒤늦게 파악하고 없애려 하지만 이를 알아챈 스카이넷은 인간을 적으로 규정하고 핵전쟁을 일으킨다. 클라우드 컴퓨팅 기법으로 1200여 대의 컴퓨터와 연결된 AI 시스템 알파고는 얼핏 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컴퓨터 시스템을 장악한 스카이넷을 연상시킨다. 반면 인간을 대표한 이 9단은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알파고에 맞섰다. 앞서 이번 대국 전까지 누리꾼들은 알파고의 파죽지세에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여기에 “100년 내 인류가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에 종속되고 결국 멸망당할 것”이라는 영국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주장까지 알려지면서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한 누리꾼은 ‘터미네이터의 등장이 머지않았다’는 제목의 글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 터미네이터에게 지배를 받는 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라고 썼다. 이 밖에 “알파고가 언젠가 스카이넷이 될 날이 올 것” “알파고가 스카이넷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섬뜩하다”는 내용의 글도 잇달아 올라왔다. 구글이 사명을 스카이넷으로 바꾼다는 패러디도 등장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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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여성에 자유가 없다면 평화는 오지 않는다”

    장강명 씨의 소설 ‘댓글부대’에서 인터넷 여론공작을 벌이는 팀-알렙은 진보 성향의 여성 사이트 ‘줌다카페’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지시를 내리는 쪽은 재계 인사와 정보기관원으로 구성된 정체불명의 조직 ‘합포회’이다. 줌다카페는 이들이 공격한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에 비해 훨씬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어 와해시키기가 쉽지 않다. 젊은 기혼여성들이 다이어트 팁을 주고받기 위해 만든 사이트를 합포회가 공격한 이유는 뭘까. 작품에는 ‘광우병 시위 때 유모차 부대를 보낸 곳’이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모성을 투쟁의 방편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합포회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 보수 꼰대 남자들로 구성된 합포회가 실존한다면 아마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저자도 공격 대상으로 삼았을지 모르겠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20세기 초반 영국에서 ‘전투적 여성참정권 운동(서프러제트)’을 이끈 대표적인 페미니스트다. 역사는 그의 헌신으로 1928년 영국에서 21세 이상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이 허용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프러제트는 가두시위는 물론이고 유리창 깨기, 방화, 단식투쟁 등 폭력적 저항까지 포함한 것이어서 당시 영국 정부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팽크허스트의 자서전인 이 책은 그가 법률가의 아내로서의 안정적 삶을 포기하고 서프러제트에 나선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가운데 특히 빈민구호소에서 겪은 경험은 저자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시 어린 하녀를 임신시킨 남성들은 20파운드만 지불하고 ‘아기 농부’라고 불린 업자에게 신생아를 떠넘겼다. 아기 농부들은 정부의 감독 사각지대에서 돈만 챙기고 아이들을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어린 나이에 임신한 소녀들은 빈민구호소를 전전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여성, 아동착취의 현장에서 저자는 여성 참정권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사람들은 주로 당사자인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서프러제트를 일시 중단한 팽크허스트는 당시 이렇게 썼다. “인간이라는 가족의 절반인 여성이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진정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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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종의 마지막 거처 ‘영월부 관아’ 사적 지정

    ‘달 밝은 밤에 두견새 두런거릴 때/시름 못 잊어 누대에 머리 기대니/울음소리 하도 슬퍼서 나 괴롭구나’ 조선 제6대 임금 단종(1441∼1457년)이 목숨을 잃기 직전 읊었던 시 ‘자규사(子規詞)’다. 자규(두견새)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자신의 처지를 빗댔다. 단종이 자규사를 읊었던 강원 영월군 ‘영월부 관아(寧越府 官衙)’ 내 누각은 자규루(子規樓)라고 이름 붙여졌다. 17세 청년 단종은 1457년 사약을 받기 직전 자규루에 자주 올라 회한을 토했다. 문화재청이 영월부 관아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4호로 8일 지정했다. 이곳은 조선 시대 영월부를 관할하던 행정관청으로, 단종이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곳이다. 현재 영월부 관아에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객사(客舍)와 자규루가 남아 있다. 1396년(태조 5년) 건립돼 1791년(정조 15년) 중수된 객사는 서익헌(西翼軒)과 중앙 정청(正廳), 동익헌(東翼軒)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관풍헌에서 단종이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단종은 1457년 6월 영월 청령포로 유배됐으나, 홍수가 나서 거처를 영월부 관아로 옮겼다. 문화재청은 “영월부 관아는 조선 후기 중수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단종의 애달픈 삶을 간직한 역사적 장소라는 점에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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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대중의 ‘혁신’이 번영의 원천”

    토마 피케티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낄 것이다. 저자(83)는 피케티와 장하성 등 소득균형과 공동체적 대응을 강조하는 경제학자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월가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염증으로 최근 ‘21세기 자본’류(類)의 책이 쏟아지고 있는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셈이다. 좌파 시각을 가진 독자들은 서문만 보고 “웬 ×아이 같은 저자냐”고 윽박지를 수도 있겠지만, 상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펠프스는 경제학 원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필립스 곡선(완전고용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는 가설)에 대해 ‘기대심리’를 끌어들여 비판한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세계적 석학이다. 펠프스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키워드는 ‘혁신’이다. 한두 명이 아닌 대중(원제가 ‘mass flourishing’인 이유다)이 각각의 삶에서 고군분투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생산성을 높이려고 시도할 때 경제가 발전하고 분배 정의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에게 혁신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적’이다. 심지어 그것이 요즘 각국의 핵심 정책 목표인 복지국가 모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안일한 복지 지출과 이로 인한 재정 적자는 혁신을 저해하고 경제를 멍들게 한다는 논리다. 이런 관점에서 펠프스는 최근 미국 정치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럽식 코퍼러티즘(Corporatism·조합주의)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노사정 대타협으로 포장돼 있는 코퍼러티즘은 실상 정실주의와 도덕적 해이로 점철돼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노조 등 이익단체에 휘둘려 시장에서 경쟁을 가로막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코포러티즘에 의해 정부와 대기업 노조가 서로 결탁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업의 등장을 지체시키고 생산성을 둔화시켰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펠프스는 자본에 대해서도 칼을 겨눈다. 그에 따르면 각국에서 많은 특수이익 법안이 대중은 잘 알아차리기 힘든 형태(이를 테면 세금 감면이나 면제, 예외 조항 등)로 존재한다. 이 법안의 지원을 받는 대기업들은 시장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함으로서 새로운 참여자들의 시장 진입과 혁신을 가로막게 된다. 펠프스는 미국과 유럽의 현대 자본주의가 1980, 90년대부터 심각한 침체일로를 걷고 있다고 본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1970년대까지 누렸던 혁신과 대중의 높은 직무 만족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가 제시하는 답안은 간단하다. 엄청난 혁신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18, 19세기 유럽의 근대 경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시대를 단순히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기술 도약의 시기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이 시기 대중이 상상력과 모험심으로 끊임없이 혁신을 일군 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데 주목한다. 다음은 저자의 주장. “태도와 신념이야말로 근대 경제가 지닌 역동성의 원천이다. 자생적 혁신을 이끄는 개인주의와 상상력, 분별력, 자기표현을 보호하면서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주로 문화의 역할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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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달간 맞춘 토기 조각… 몽촌토성의 비밀을 밝히다

    1989년 1월 서울대 중앙도서관 6층 박물관. 몽촌토성에서 발굴한 토기 조각을 하나씩 붙여 나가던 박순발 조교(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토기 가운데 귀가 네 개나 달린 묘한 토기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까지 학계에 보고된 바 없는 특이한 형태였다. 박순발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여느 백제 토기와 다른 유형임을 직감했다. 몇 해 전 일본에서 복사한 중국 랴오닝(遼寧)대의 ‘국내성 발굴 보고서’(1984년 발간) 사진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허둥지둥 보고서를 찾아본 그는 무릎을 쳤다. 여기 실린 고구려 토기 사진과 몽촌토성 출토품의 기형(器形)이 서로 닮았던 것. 올림픽공원 건설을 계기로 진행된 몽촌토성 발굴에서 고구려 토기인 ‘네 귀 달린 긴 목 항아리(광구장경사이호·廣口長頸四耳壺)’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박순발은 망외의 소득을 거뒀다. 1977년 서울 광진구 구의동 유적에서 출토된 항아리도 광구장경사이호라는 사실이 12년 만에 밝혀진 것이다. 한때 백제 고분으로 알려진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의 군사시설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몽촌토성과 더불어 한강 유역의 패권을 둘러싼 백제와 고구려의 대결 양상을 생생하게 보여준 현장이었던 셈이다. 백제왕성 터인 몽촌토성에 고구려 토기가 묻혀 있으리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사실 1988년 6월 토기 편을 현장에서 발굴한 박순발조차 조각만 봐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 서른한 살 석사과정의 고고학도로 그해 몽촌토성 발굴에 나섰던 박순발의 회고. “토기와 기와 조각 수천 개를 전수조사해서 하나씩 복원해 나갔습니다. 서울대 고고학과 학부생 10명을 불러놓고 석 달간 박물관에서 먹고 자면서 퍼즐을 맞춰 나갔죠. 인고의 시간이었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박순발은 1988년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한기가 올라오는 박물관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아놓고 후배들과 합숙에 들어갔다. 발굴보고서 제출 시한이 1988년 12월로 임박했지만 그의 성격상 일부 유물만 조사하고 넘어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학부 2∼4학년생이던 성정용(현 충북대 교수) 최종택(고려대 교수) 임상택(부산대 교수) 김장석(서울대 교수) 등을 모아놓고 토기 실측과 복원, 촬영, 현상 등을 한꺼번에 진행했다. 사진 현상은 박물관 화장실을 개조한 암실을 이용했다. 고분이 아닌 건물터 발굴 현장에서 토기 편을 모두 실측하고 복원한 것은 1980년대에는 극히 드물었다. 복원은커녕 측량도 하지 않은 토기 편이 박물관 수장고에 굴러다니는 게 다반사였다. 박순발의 집요한 전수조사 방식은 서울대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면서 체득한 나름의 원칙이었다. 출토품을 모조리 조사하고 복원해 계통대로 유형을 분류해 내야만 직성이 풀렸다. 1985년 경기 용인 서리 고려백자 가마터를 발굴하면서 도자기 편을 정리해 보고서를 낼 때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박순발은 토기에 대한 실측과 복원에 그치지 않고 형태별로 세부적인 통계작업까지 병행했다. 1980년대 국내 고고학계에서 구체적인 숫자를 접목해 토기의 양식과 제조 시기를 정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는 특히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전문도기(錢文陶器·동전 무늬를 새긴 도기)가 3세기 중국 동오(東吳) 지역 등에서 제작됐다는 점에 착안해 몽촌토성이 3세기 후반 건립됐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현재 몽촌토성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지만 박순발의 주장이 다수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고학계는 박순발의 최대 강점을 폭넓은 공부에서 찾는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고고학)는 “박 교수는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대금구)이 중국 동진에서 넘어온 사실을 규명했다”며 “고급 사치품인 중국 동진 자기(磁器) 출토품과 더불어 왕성으로서 몽촌토성의 위상을 밝혀냈다”고 평가했다. 그래도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는 따르는 법. 1980년대 몽촌토성 발굴에서 아쉬웠던 점을 묻자 박순발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유구가 복잡하게 중복된 동남지구에서 땅을 파서 만든 수혈(竪穴) 유구만 찾느라고 도로나 마당같이 지상에 조성된 유구를 놓친 게 안타까워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왕궁 터를 찾을 땐 이걸 꼭 유념했으면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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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전 편지 속에 담긴 애틋한 ‘母女之情’

    “아쉽게 떠나던 그날, 비 내리는 중에도 염려됐는데 잘 갔다니 다행이다. 갑작스레 만나서 보고 싶던 정도 나누지 못했는데 차는 어이 그리 빨리 가니. 창을 붙들고 보려고 해도 안 보이더라. 나중에 얼굴만 보았다. 너만 괜찮으면 좋다.”(1946년 편지) 해가 갈수록 엄마에게 더 의지가 되는 건 아들보다 딸이라고 했던가. 자신의 생일에 갑자기 친정을 찾은 딸에게 건넨 엄마의 편지에 애틋함이 묻어난다. 일제강점기 양반가에서 태어난 딸에게 70년 전 보낸 어머니의 편지가 공개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최근 발행한 웹진에서 2년 전 100세를 맞은 이석희 여사에게서 입수한 편지글을 소개했다. 이 여사는 조선말기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애국지사 이범세 선생(1874∼1940)의 딸이다. 편지의 엄마는 온통 셋째를 임신한 딸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뿐이다. “회충은 없어졌느냐. 비자가 특효약이긴 하나 독하니 먹지는 말아라. 대신 배에 헝겊이라도 대서 바람 안 들도록 주의하거라. 가족들 모두 여전하고, 아이들은 건강하냐. 먼데 다니지 말고 무엇이든지 이고 다니지 말아라. 배급 쌀도 돈 들여서라도 사람 불러서 들게 해라. 허투루 듣지 말아라.” 이 여사는 편지와 함께 어머니에게 받은 버선본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버선본은 버선을 만들기 위해 모양을 뜬 종이로, 일종의 밑그림 역할을 한다. 이 여사의 어머니는 딸의 집에 찾아와 버선본을 손수 만들어놓고 갔다. 박혜령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양말이 없던 시절 온 가족의 버선을 짓는 건 엄마들의 몫이었다”며 “기증된 버선본에는 가족의 건강을 비는 모친의 글씨가 곱게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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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달간 맞춘 토기 조각… 몽촌토성의 비밀을 밝히다

    1989년 1월 서울대 중앙도서관 6층 박물관. 몽촌토성에서 발굴한 토기 조각을 하나씩 붙여 나가던 박순발 조교(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토기 가운데 귀가 네 개나 달린 묘한 토기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까지 학계에 보고된 바 없는 특이한 형태였다. 박순발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여느 백제 토기와 다른 유형임을 직감했다. 몇 해 전 일본에서 복사한 중국 랴오닝(遼寧)대의 ‘국내성 발굴 보고서’(1984년 발간) 사진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허둥지둥 보고서를 찾아본 그는 무릎을 쳤다. 여기 실린 고구려 토기 사진과 몽촌토성 출토품의 기형(器形)이 서로 닮았던 것. 올림픽공원 건설을 계기로 진행된 몽촌토성 발굴에서 고구려 토기인 ‘네 귀 달린 긴 목 항아리(광구장경사이호·廣口長頸四耳壺)’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박순발은 망외의 소득을 거뒀다. 1977년 서울 광진구 구의동 유적에서 출토된 항아리도 광구장경사이호라는 사실이 12년 만에 밝혀진 것이다. 한때 백제 고분으로 알려진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의 군사시설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몽촌토성과 더불어 한강 유역의 패권을 둘러싼 백제와 고구려의 대결 양상을 생생하게 보여준 현장이었던 셈이다. 백제왕성 터인 몽촌토성에 고구려 토기가 묻혀 있으리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사실 1988년 6월 토기 편을 현장에서 발굴한 박순발조차 조각만 봐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 서른한 살 석사과정의 고고학도로 그해 몽촌토성 발굴에 나섰던 박순발의 회고. “토기와 기와 조각 수천 개를 전수조사해서 하나씩 복원해 나갔습니다. 서울대 고고학과 학부생 10명을 불러놓고 석 달간 박물관에서 먹고 자면서 퍼즐을 맞춰 나갔죠. 인고의 시간이었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박순발은 1988년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한기가 올라오는 박물관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아놓고 후배들과 합숙에 들어갔다. 발굴보고서 제출 시한이 1988년 12월로 임박했지만 그의 성격상 일부 유물만 조사하고 넘어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학부 2∼4학년생이던 성정용(현 충북대 교수) 최종택(고려대 교수) 임상택(부산대 교수) 김장석(서울대 교수) 등을 모아놓고 토기 실측과 복원, 촬영, 현상 등을 한꺼번에 진행했다. 사진 현상은 박물관 화장실을 개조한 암실을 이용했다. 고분이 아닌 건물터 발굴 현장에서 토기 편을 모두 실측하고 복원한 것은 1980년대에는 극히 드물었다. 복원은커녕 측량도 하지 않은 토기 편이 박물관 수장고에 굴러다니는 게 다반사였다. 박순발의 집요한 전수조사 방식은 서울대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면서 체득한 나름의 원칙이었다. 출토품을 모조리 조사하고 복원해 계통대로 유형을 분류해 내야만 직성이 풀렸다. 1985년 경기 용인 서리 고려백자 가마터를 발굴하면서 도자기 편을 정리해 보고서를 낼 때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박순발은 토기에 대한 실측과 복원에 그치지 않고 형태별로 세부적인 통계작업까지 병행했다. 1980년대 국내 고고학계에서 구체적인 숫자를 접목해 토기의 양식과 제조 시기를 정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는 특히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전문도기(錢文陶器·동전 무늬를 새긴 도기)가 3세기 중국 동오(東吳) 지역 등에서 제작됐다는 점에 착안해 몽촌토성이 3세기 후반 건립됐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현재 몽촌토성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지만 박순발의 주장이 다수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고학계는 박순발의 최대 강점을 폭넓은 공부에서 찾는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고고학)는 “박 교수는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대금구)이 중국 동진에서 넘어온 사실을 규명했다”며 “고급 사치품인 중국 동진 자기(磁器) 출토품과 더불어 왕성으로서 몽촌토성의 위상을 밝혀냈다”고 평가했다. 그래도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는 따르는 법. 1980년대 몽촌토성 발굴에서 아쉬웠던 점을 묻자 박순발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유구가 복잡하게 중복된 동남지구에서 땅을 파서 만든 수혈(竪穴) 유구만 찾느라고 도로나 마당같이 지상에 조성된 유구를 놓친 게 안타까워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왕궁 터를 찾을 땐 이걸 꼭 유념했으면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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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도교와 3·1운동]잊고있었던, 몰랐었던… 3·1운동의 가치-의미 되새긴다

    천도교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인류의 새로운 문명적 비전을 제시한다는 목표 아래 다양한 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천지인(天地人), 하늘과 땅과 사람이 조화롭게 공존 공생하는 신문명 비전 제시’를 기본 개념으로 정했다. 우선 천도교는 3·1운동의 의미를 재조명할 수 있는 학술대회를 연다. 3·1운동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 3·1정신의 현대적 가치를 규명하려는 취지다. 한국 중국 일본 학자들이 함께하고 북한 및 재외동포 학자까지 참여하는 국제학술대회도 추진한다. 이와 함께 유적지를 조사하고 미발굴 유적지 현황을 파악해 총람을 발간할 계획이다. 유적지에 기념비나 안내석을 세우는 사업도 포함된다. 단순히 학술적 규명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일반시민과 청소년, 어린이, 교사 등을 대상으로 한 시민강좌도 개최한다. 3·1운동에 대한 문헌 연구 지원사업도 병행한다. 특히 알려지지 않은 해외 미발굴 사료를 수집해 총람으로 간행할 예정이다. 민족대표 33인 등 3·1운동 주요 참여 인사들에 대한 인물사전과 단행본도 함께 발간한다. 특히 미발굴 자료 조사와 관련해선 ‘제2의 손병희, 유관순 찾기’ 사업도 진행한다. 천도교는 3·1운동에 대한 가치공유 사업으로 ‘생명평화 선언문 작성 선포식’을 계획하고 있다. 3·1운동의 근본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생명평화 선언문을 만들고 이를 발표하는 기념식을 따로 개최한다. 선언문 작성 과정을 영상으로 일일이 기록해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독립운동 순례길 조성 및 기념탑 건립 △영상 기념탑 등 디지털 기념사업 △3·1운동 지도 제작 △기념주화 및 우표 발행 등을 추진한다.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평화운동으로 승화할 수 있는 ‘한민족 세계평화대축전’과 세계의 종교인, 학자, 청년이 참여하는 ‘세계종교평화대축전’도 추진한다. 천도교 종단 차원에서 3·1운동과 관련된 비화를 발굴하고 ‘우리가 몰랐던 3·1운동’이라는 제목으로 탐사 다큐멘터리도 만든다. 또 해외 독립운동 상황을 조명한 다큐멘터리와 보통 영웅들을 조명한 다큐 등도 검토하고 있다. 3·1운동의 가치를 대중들이 충분히 공유할 수 있도록 드라마나 뮤지컬, 영화, 연극을 제작하는 사업도 추진한다. 단편영화 제작을 위한 시나리오 공모전이나 대학생, 청소년 연극제도 개최할 예정이다. 천도교는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거점 마련을 위해 ‘종교평화센터’ 건립에 나선다. 여기엔 3·1운동을 비롯해 종교평화와 관련된 국내외 역사 및 인물의 자료를 망라한 ‘3·1 종교평화관’과 세계의 모든 종교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다종교문화관’, 명상과 수행을 체험할 수 있는 ‘수행의 공간’ 등을 만든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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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조, 아끼던 며느리 장례식도 ‘절약’

    “목노비(木奴婢)와 목악공(木樂工)을 영구히 쓰지 말라.” 1751년(영조 27년) 효순현빈(孝純賢嬪)의 장례 절차를 기록한 ‘효순현빈예장도감의궤(孝純賢嬪禮葬都監儀軌)’에는 영조의 독특한 전교(傳敎)가 책머리에 등장한다. 효순현빈은 영조의 며느리로, 10세에 요절한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아내다. 목노비와 목악공은 나무를 깎아 만든 부장품으로, 경비를 아끼기 위해 영조가 부장(물품을 무덤에 함께 묻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 세자, 세자비 등의 국장 전 과정을 세세히 기록한 흉례(凶禮)의궤에서 왕이 비용 절감을 지시한 것은 영조가 유일하다. 왕권의 지엄함을 보여주는 조선시대 국장은 다른 어떤 국가행사보다 거창하게 치르는 게 상례였다. 효순현빈에 대한 영조의 관심이 부족해서였을까. 실제는 정반대다. 영조실록에 보면 영조는 “부모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자식이 있으니 자부(子婦)로는 현빈이고, 딸은 화평옹주다”라고 말했다. 특히 현빈이 죽은 뒤 신하들과 시호를 논의할 때 영조는 “한밤중 현빈이 신도 안 신고 내가 좋아한 밤을 직접 삶아온 적이 있다”며 추억에 젖기도 했다. 그렇게 아끼는 며느리였지만, 평소 수라상의 반찬 수를 줄일 정도로 근검절약을 실천한 영조는 공사를 철저히 구분했다.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백성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던 영조가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고 내린 전교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일련의 사연은 2011년 5월 프랑스로부터 환수한 외규장각의궤(外奎章閣儀軌)를 국립중앙박물관이 연구 분석하면서 알 수 있게 됐다. 박물관 측은 ‘외규장각의궤 학술총서3 흉례Ⅰ’을 최근 내놓았다. 박물관 고고역사부를 중심으로 9명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연구 책임을 맡은 이재정 연구관은 “국장 절차를 기술한 흉례의궤는 가례나 빈례 등 다른 국가행사에 비해 분량이 방대하다”며 “외규장각의궤에서 흉례편은 89종 163책으로 전체 내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의궤는 그동안 학계의 관심이 부족해 연구 실적이 부실한 편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당대 사료들과 중복된 내용이 적지 않은 데다 정형화된 서술이 한계로 작용한 것. 이 연구관은 “조선시대 국장에는 최고의 장인과 화원들이 부장품 제작 등에 참여했다”며 “관찬 사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물질사 연구를 위해 의궤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물관은 이달 1일부터 인터넷 홈페이지(uigwe.museum.go.kr)에 외규장각의궤 전문의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를 공개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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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세대, 조선 초기 저술 ‘파른본 삼국유사’ 해설서 발간

    연세대박물관은 ‘파른본 삼국유사 교감’을 최근 발간했다. 수량이 적은 조선시대 초기본으로 고 손보기 연세대 교수가 1980년대 충남 공주시에서 구입한 것이다. 손 교수의 유가족이 2013년 연세대에 기증했으며, 2015년 보물 제1866호로 지정됐다. 파른본은 삼국유사 저본(底本)으로 통용되는 임신본(1512년 간행) 삼국유사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학계는 파른본이 임신본의 오기(誤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보완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삼국유사 조선 초기 간행본은 학산본과 범어사본, 석남본, 니산본, 조종업본, 파른본 등 6종이 있다. 이 중 파른본은 다른 이본(異本)과 달리 왕력(王歷)과 권1, 권2가 빠진 부분 없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후반부인 권3∼5는 파른본에 전하지 않지만 학산본이 권3∼5를 수록하고 있어 조선 초기본으로 삼국유사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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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미의 이름’ 남기고… 시대의 지성 잠들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소설 ‘장미의 이름’ 중 마지막 구절) 21세기를 산 위대한 르네상스인이 영원한 이름을 아로새기고 세상을 떠났다.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기호학자, 철학자, 비평가였던 움베르토 에코(사진)가 19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자택에서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1932년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고인은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 8개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언어 천재이자 기호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었다. 그는 1980년 출간한 ‘장미의 이름’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 작품은 14세기 초반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영국인 수도사 윌리엄이 밝혀내는 과정을 그린 추리소설이다. 윌리엄과 주변 인물을 통해 종교재판 등 중세사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 소설은 40여 개국에 걸쳐 총 2000만 부 이상이 팔렸고 1989년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한국기호학회장을 지낸 김성도 고려대 교수(언어학)는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추리 과정까지 소설 곳곳에 기호학 원리들이 녹아 있다”며 “에코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 기호학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고인이 1988년 발표한 두 번째 소설 ‘푸코의 진자’도 추리소설 기법으로 독자의 흥미를 끄는 동시에 기호학의 정수를 담아낸 작품으로 손꼽힌다. 주인공인 세 명의 출판 편집자들이 입수한 암호 메시지를 푸는 과정은 독자의 지적 유희를 만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로마교황청이 “신성모독으로 가득 찬 쓰레기”라고 혹평했지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뛰어난 글솜씨로 필명을 떨쳤지만 정작 고인은 “소설은 내게 주말에 하는 아르바이트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본업인 철학, 기호학 연구에 대한 애정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레비스트로스, 롤랑 바르트 등과 함께 1969년 세계기호학회를 창립하면서 기호학의 학문적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말년에는 미디어와 현실 정치에 대한 비평에 나섰다. 지난해 발표한 일곱 번째 소설 ‘창간준비호’는 사실을 왜곡하는 언론을 겨냥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국내 출판사 열린책들에 의해 한글로 번역 중이며 올 6월 국내에서도 출간된다. 생전 고인과 알고 지낸 동료 학자들에게 그는 쾌활하고 소탈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세계기호학회를 통해 10여 차례 고인과 접촉한 김 교수는 “1996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고인이 중간 휴식시간에 피리 연주를 들려준 추억이 있다”며 “다른 대학자들과 달리 인간적으로 다가가기가 편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탈리아 볼로냐대에서 1997년 고인에게 지도를 받은 김운찬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강의 도중 휴식시간에 학생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면서 격의 없이 소통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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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여진정벌은 방어戰? 세력확대 위한 토벌

    최근 취재 중 만난 중국 교수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들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 중국 정부에 추가 핵실험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4차 핵실험을 기습적으로 벌인 뒤 북측이 외교 관계자를 중국에 보내 사과의 뜻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국제역학 구도상 중국이 결코 자신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한 북한의 기만전술일 수도 있다. 이 교수는 “북한이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의 갈등관계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전쟁과 내란의 역사를 담은 이 책을 읽는 동안 현재의 동북아 정세가 겹쳐 보였다. 특히 조선 초기 세종과 세조가 북벌을 추진하면서 대국 명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 전략도 교묘한 측면이 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자리 잡은 여진족에 대한 세력 확대는 조선과 명나라가 동시에 추구한 외교 목표였다. 자연스레 양국 사이의 갈등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국 초부터 명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강조한 조선이지만, 실질적인 국익 추구는 별개의 문제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433년 4월 세종의 압록강 일대 여진족 정벌이다. 조선은 바로 직전 해 12월 여진족 기마부대 400여 기가 평북 지역을 공격한 데 대한 대응임을 명나라에 알렸다. 그런데 출병 날짜를 개전 1주일 전에야 명나라에 통보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명나라가 지정한 위소(衛所·군사행정구역)에 대한 군사활동을 전개하면서도 조선이 사전 허락을 받을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당시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1만5000명의 대군을 동원한 것도 단순한 방어전 성격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이다. 사전에 여진 세력에 대한 정벌을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신숙주는 정벌군을 출동시키면서 명나라 사신이 부른 여진족 추장 90여 명을 모두 잡아 죽이기도 했다. 세종, 세조를 비롯해 성종, 연산군, 중종, 명종 등도 대외 영향력 확대와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정벌을 꾸준히 추진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4군 6진을 개척해 북방 영토를 늘릴 수 있었다. 명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국익을 극대화한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책은 조선시대 내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틀을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조선 초기인 1467년(세조 13년) 5월 함길도에서 발생한 ‘이시애의 난’에 대한 논고가 그렇다. 저자는 이시애의 난에 대해 지방세력과 중앙관료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무곡(貿穀·다른 지역에서 들여와 판매하는 곡식)과 호패법 시행에 따른 경제적 요인에서도 원인을 찾고 있다. 한명회와 신숙주 등 당시 권력가들이 무곡을 통해 곡식이 귀한 함길도에서 큰돈을 벌면서 이 지역 토호들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양인들을 찾아내 군역을 지우는 호패법 시행도 가별치(투항한 여진족)를 노비처럼 부린 지방 세력에 부담이 됐다. 결국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조정은 이시애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호패법 시행을 유예하는 방식으로 토호들을 달랬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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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EA 지도자대회]WEA 본부, 뉴욕 근교 도버로 이전

    WEA는 최근 본부를 미국 뉴욕 근교의 도버로 이전하고 조직정비에 나서고 있다. WEA는 지난달 15일 세계 기독교 지도자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본부 이전 기념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는 감사예배와 표지석 제막식, 테이프 커팅, 저녁 만찬 등으로 진행됐다. WEA는 2010년부터 미국 뉴욕 주 빙엄턴에 자리 잡은 에반젤리칼센터를 본부로 사용했다. 이번에 이전한 본부는 뉴욕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으며 채플과 기숙사, 사무동, 강의동, 강당, 식당 등 총 8개 건물로 구성돼 있다. WEA 본부는 세계 6억 명의 신자들을 섬기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새 본부는 이웃한 올리벳대의 강의시설을 공유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WEA 연수 및 펠로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선교활동도 지원하게 된다. WEA 총무로 봉직하고 있는 에프레임 텐데로 목사는 감사예배에서 “새로운 본부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며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하고 영적 성장을 지속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새로운 본부는 모든 국가에 복음 동맹을 조직하는 WEA의 목표에 한걸음 더 나아가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텐데로 목사는 리더십 양성과 관련해 “새로운 WEA 본부는 뉴욕 시 인근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세계 지도자들이 훈련을 받기에 매력적인 장소”라며 “앞으로 수많은 차세대 지도자들이 WEA의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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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EA 지도자대회]세계 곳곳서 한평생 헌신한 개신교 지도자 100여 명 한자리에

    29일 개막되는 세계복음연맹(WEA) 세계지도자대회(ILF)에는 세계 각지에서 오랫동안 헌신한 개신교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엔다바 마자바니 목사는 아프리카복음연맹 회장을 거쳐 WEA 국제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그는 현재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로즈뱅크유니언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성경·선교국제대학교(ICBM) 4대 총장으로 취임한 그는 침례교 목사로 교회 개척과 목회에 헌신해왔다. 특히 그는 매스미디어로 사역활동을 확대해 6년간 라디오방송국 대표로도 일했다. 국제성경소사이어티-샌드더라이트(IBS-STL) 이사장이자 아프리카 지역 고문이기도 하다. 마자바니 목사는 사회정의와 교회의 사회적 참여와 관련된 포럼들에 참여해왔다. 남부아프리카기독교지도자성회 이사와 아프리카 감시단 창립이사로 활동하면서 에이즈와 가난, 실업, 가족 위기, 인종차별, 성차별, 폭력 등 사회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는 2남 1녀를 둔 가장으로 특히 가정 사역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의 존 랭로이 경은 WEA 국제이사와 북미이사, 종교자유위원회 위원장 등 다양한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 그는 특히 영국의 사회지도층 인사로 의회 의원과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2005년에는 WEA 사역과 자선사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OBE)을 받기도 했다. WEA 리더십 연구소장인 캐나다의 롭 브린졸프슨 박사도 이번 행사에 참석한다. 그는 볼리비아 선교사로 헌신한 뒤 귀국해 밴쿠버 북서침례대와 리젠트대를 거쳐 트리니티대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인과 함께 국제 WEC 소속으로 스페인 등에서 리더 양성에 중점을 두고 사역했다. 1996년 캐나다로 다시 돌아가 게이트웨이선교훈련센터를 설립해 선교사 양성에 힘쓰고 있다. 브린졸프슨 박사는 ‘인테그랄 미니스트리 트레이닝 디자인’ 편집장을 겸하고 있다. WEA 사무총장으로 봉직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추 목사는 WEA 지도자팀에 소속돼 있다. 그는 WEA의 행정 분야를 총괄하고 있다. 유엔의 새천년개발계획(MDGs) 프로젝트로 진행되고 있는 ‘마이카 챌린지’의 미국 지역 디렉터로도 활동했다. WEA 종교자유위원회 위원장인 가프리 요가라자 박사는 스리랑카 출신이다. 요가라자 박사는 핍박받는 교회들을 대표해 국제기관들과 연대해 종교의 자유를 추진하는 사역에 헌신해 왔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국제 애드버킷으로부터 ‘좋은 사마리아인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05년에는 ‘프로피데상’을 받았다. 그는 WEA 국제종교자유연구소(IIRF) 소장으로 WEA 종교자유위원회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스리랑카복음연맹의 사무총장으로 22년간 일했으며 전 아시아복음연맹 사무총장으로도 활약했다. 기독교 핍박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교계 지도자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 아시아복음연맹(AEA) 사무총장인 리차드 하웰 박사는 아시아복음연맹과 인도복음연맹의 사무총장으로 기독교 단체인 전도폭발의 국제이사다. 그는 다양한 기독교 단체에서 헌신했으며, 알라하바드성경신학교 교수와 총장 등을 지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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