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남기고… 시대의 지성 잠들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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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기호학 대가 伊 움베르토 에코 1932~2016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소설 ‘장미의 이름’ 중 마지막 구절)

21세기를 산 위대한 르네상스인이 영원한 이름을 아로새기고 세상을 떠났다.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기호학자, 철학자, 비평가였던 움베르토 에코(사진)가 19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자택에서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1932년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고인은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 8개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언어 천재이자 기호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었다. 그는 1980년 출간한 ‘장미의 이름’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 작품은 14세기 초반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영국인 수도사 윌리엄이 밝혀내는 과정을 그린 추리소설이다. 윌리엄과 주변 인물을 통해 종교재판 등 중세사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 소설은 40여 개국에 걸쳐 총 2000만 부 이상이 팔렸고 1989년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한국기호학회장을 지낸 김성도 고려대 교수(언어학)는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추리 과정까지 소설 곳곳에 기호학 원리들이 녹아 있다”며 “에코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 기호학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고인이 1988년 발표한 두 번째 소설 ‘푸코의 진자’도 추리소설 기법으로 독자의 흥미를 끄는 동시에 기호학의 정수를 담아낸 작품으로 손꼽힌다. 주인공인 세 명의 출판 편집자들이 입수한 암호 메시지를 푸는 과정은 독자의 지적 유희를 만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로마교황청이 “신성모독으로 가득 찬 쓰레기”라고 혹평했지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뛰어난 글솜씨로 필명을 떨쳤지만 정작 고인은 “소설은 내게 주말에 하는 아르바이트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본업인 철학, 기호학 연구에 대한 애정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레비스트로스, 롤랑 바르트 등과 함께 1969년 세계기호학회를 창립하면서 기호학의 학문적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말년에는 미디어와 현실 정치에 대한 비평에 나섰다. 지난해 발표한 일곱 번째 소설 ‘창간준비호’는 사실을 왜곡하는 언론을 겨냥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국내 출판사 열린책들에 의해 한글로 번역 중이며 올 6월 국내에서도 출간된다.

생전 고인과 알고 지낸 동료 학자들에게 그는 쾌활하고 소탈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세계기호학회를 통해 10여 차례 고인과 접촉한 김 교수는 “1996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고인이 중간 휴식시간에 피리 연주를 들려준 추억이 있다”며 “다른 대학자들과 달리 인간적으로 다가가기가 편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탈리아 볼로냐대에서 1997년 고인에게 지도를 받은 김운찬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강의 도중 휴식시간에 학생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면서 격의 없이 소통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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