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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김윤신(88)이 스물여덟 살이던 1963년. 6남매 중 막내인 그는 바로 위 오빠에게 프랑스로 유학을 가겠다고 말했다. 오빠는 동생에게 “결혼은 안 하겠다는 얘기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여동생에게 오빠는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네가 늙어도 조카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호랑이굴에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것만 명심하면 좋겠다.” 그렇게 떠난 동생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아르헨티나, 멕시코, 브라질을 누비며 평생을 작가로 살았다.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인 그를 조명하는 첫 국공립미술관 개인전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서울 관악구 미술관에서 22일 그를 만났다.● 교수직 버리고 남미로 떠나다 김윤신은 1960년대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뒤 상명대 조소과 교수로도 일했지만, 49세가 되던 1984년 교수직을 버리고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주변에서 만류할까 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르헨티나로 떠난 조카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작정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전시를 열게 도와달라”고 한 뒤 1년 만에 정말로 전시를 열었고, 현지에서 주목을 받으며 작가 생활을 이어갔다. “제가 떠난 걸 1년 만에 알게 된 오빠가 난리가 났어요. ‘학교에서도 널 찾는데, 이렇게 말없이 떠날 수 있냐’고요. 군인이었던 오빠는 ‘내 밑에 수천 명이 있지만 누구에게도 배신을 당한 적이 없는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배신했다’며 굉장히 서운해하셨죠.” 그러나 김윤신은 아르헨티나의 드넓은 지평선과 커다란 나무에 반한 상태였다. “교수가 아니라 미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먹고살 고민은 안 했어요. 내 일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죠.”● 타코와 맥주로 버틴 멕시코 남미에서 그는 자유롭게 다양한 재료를 탐구했다. 1988∼1991년 멕시코 테칼리 마을에서 ‘오닉스’(줄무늬 있는 석회암)를, 2001∼2002년에는 브라질 솔레다지 마을에서 준보석을 재료로 석조각을 했다. 테칼리 마을은 비도 잘 오지 않는 척박한 환경에 먹을 것마저 부족했다. “강냉이를 갈아 전처럼 부친 뒤 연한 선인장 이파리와 풋고추를 넣은 타코와 캔맥주로 끼니를 때웠죠.” 남미에서 최근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전기톱을 들고 조각을 한다. 나무 조각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린 최근의 연작을 ‘김윤신만의 장르’로 보여주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그 옛날에 어떻게 결혼을 포기하고 예술가의 길을 택했느냐고 묻자 “전쟁을 겪으며 든 생각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인 그는 열세 살이던 1948년, 사라졌던 오빠가 중국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38선을 넘었다. “6·25전쟁이 나자 거리에는 시체가 가득했고,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각 외엔 없었어요. 나라를 위해 죽음도 각오했던 오빠를 보며 나도 신념을 갖고 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김윤신의 작품은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서로 다른 것이 하나이며 같은 것이 또 둘로 나눠지듯 세상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의미를 담는다. 지금도 생생한 전쟁의 고통, 지구 반대편 낯선 땅 남미 등 너무나도 다른 것들을 껴안고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예술이라는 듯이. 이번 전시에는 석판화와 석조각, 목조각 등 작품 70여 점이 소개된다. 5월 7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조각가 김윤신(88)이 스물여덟 살이던 1963년. 6남매 중 막내딸인 그는 오빠에게 프랑스로 유학을 가겠다고 말한다. 오빠는 동생에게 “결혼은 안하겠다는 얘기냐”고 했다. 그렇다는 여동생에게 오빠는 두 가지를 말해주었다.“네가 늙어도 조카들에게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 호랑이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것. 두 가지만 명심하면 좋겠다.” 그렇게 떠난 동생은 프랑스는 물론 아르헨티나, 멕시코, 브라질을 누비며 평생을 작가로 살았다. 한국의 1세대 여성 조각가인 그를 조명하는 첫 국공립미술관 개인전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22일 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교수직 버리고 남미로 떠나다 김윤신은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1960년대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뒤 상명대 조소과 교수도 역임했지만 50살이던 그 해 교수직을 버리고 떠났다. 주변에서 만류할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났다는 그는 처음에는 아르헨티나로 떠난 조카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작정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전시를 열게 도와달라”고 말한 뒤 1년 만에 정말로 전시를 열었고, 현지에서 주목을 받으며 작가 생활을 이어갔다.“1년 뒤 오빠가 알고 난리가 났어요. ‘학교에서도 널 찾는데 이렇게 말없이 떠날 수 있냐’고요. 군인이었던 오빠는, ‘내 밑에 수천 명이 있지만 누구에게도 배반을 당한 적이 없는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배반했다’며 굉장히 서운해 하셨죠.” 그러나 그는 아르헨티나의 드넓은 지평선과 커다란 나무에 반한 상태였다.“교수가 아니라 미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먹고 살 고민은 안했어요. 내 일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죠.”● 타코와 맥주로 버틴 멕시코 남미에서 그는 자유롭게 다양한 재료를 탐구했다. 1988~1991년에는 멕시코 테칼리 마을에서 ‘오닉스’를, 2001~2002년은 브라질 솔레다데 마을에서 준보석을 재료로 석조각을 했다. 테칼리 마을은 비도 잘 오지 않는 척박한 환경에 먹을 것이 부족했다.“강냉이를 갈아 전처럼 부친 뒤 연한 선인장 이파리와 풋고추를 넣은 타코와 캔맥주로 끼니를 때웠죠.” 그런 남미에서 최근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전기톱을 들고 조각을 한다. 나무 조각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린 최근의 연작들을 ‘김윤신 만의 장르’로 보여주고 싶다는 포부도 이야기했다.‘그 옛날 어떻게 결혼을 포기하고 예술가의 길을 택했느냐’는 질문에는 “나는 전쟁을 많이 겪었다”고 답했다. 원산 출신인 그는 13살이던 1948년, 사라졌던 오빠가 중국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와 38선을 넘었다.“전쟁이 일어났을 때 거리에 시체가 가득했고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각 외엔 없었어요. 나라를 위해 죽음도 감수했던 오빠를 보며 나도 신념을 갖고 살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런 김윤신의 작품은 ‘합이합일 분이분일’, 서로 다른 것이 하나이며 같은 것이 또 둘로 나눠지듯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를 담는다. 지금도 생생한 전쟁의 고통, 지구 반대편 낯선 땅 남미 등 너무나도 다른 것들을 껴안고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예술이라는 듯 말이다. 이번 전시에는 석판화 석조각 목조각 등 작품 70여 점이 소개된다. 5월 7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러분 안녕하세요,오늘은 제가 전시를 취재하러 갔다가 만난 두 컬렉터의 놀라운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지난주 목요일 오전, 성곡미술관에서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린다고 해 찾아갔습니다. 원계홍은 생소한 작가였기에, ‘그림이 어떤지 보러 갈까?’하는 생각이었죠.그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1978년 55세 나이가 되어서야 첫 개인전을 가졌지만, 2년 뒤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으며. 세상과 잘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런 작가의 작품을 33년 만에 다시 관객과 만나게 해 준 것은 두 컬렉터, 김태섭 전 서울장신대 학장과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이었습니다.원 화백의 그림이 빛을 보기까지는 세 번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이 그림은 함부로 흩어지면 안 되겠다”첫 번째 만남은 1984년 인사동 공창화랑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은 “좋은 전시가 있다”는 지인의 추천으로 원계홍 화백의 유작 전시를 가게 됩니다.“첫날 가서 본 뒤로 일주일 내내 매일 그림을 보러 갔죠. 하루하루 지날수록 눈이 더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고, ‘이 분은 함부로 흩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윤 회장은 큰마음을 먹고 원 화백의 부인을 찾아갑니다. “경제가 허락되는 대로 그림을 다 사겠다. 나중에 원계홍 미술관을 짓자”고 제안했죠. 당시 원 화백의 부인은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그림을 내놓긴 했지만, 남편의 흔적을 내놓아야 하는지 많이 망설였다고 합니다.결국 윤 회장이 세 차례 정도 제안을 했지만 끝내 원 화백의 부인은 고사했습니다. 윤 회장은 원 화백의 그림 10여 점을 소장하는 데 그쳤죠.그러나 크라운제과 대표이사를 하던 시절이어서 그의 작품으로 달력도 만들었습니다. 윤 회장은 “몇천 부를 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음 해 또 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언젠가는 장안평 고미술상가에서 원 화백의 그림을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프레임도 없이 수백 점 그림이 엘피판처럼 쌓여있는데 그 사이에 원 화백 그림이 있었어요. 그때 느낌이 참 슬펐습니다.”이 말을 하면서 윤 회장은 잠시 울컥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답니다.집구경 하려다 그림의 포로가 되다두 번째 만남은 1989년 봄 부암동입니다. 이때 김태섭 전 교수는 세검정에서 약속이 있었는데, 시간이 남아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리가 아파 복덕방에 잠시 들렀는데 주인의 권유로 집을 보러 가게 됩니다.“집 사러 온 게 아니라고 했는데, 안 사도 괜찮으니 주인이 구경만 하라고 해 따라갔죠. 그래서 지금 자하손만두 근처의 집에 갔는데 사모님은 마루에 앉아 계시고, 방문을 열었는데 문간방에 작품이 한가득 쌓여 있더라구요.”그림을 봐도 되냐고 허락을 받은 김 전 교수는 ‘여태까지 본 것과 전혀 다른 그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화가였지만, 그는 “집보다 그림이 훨씬 좋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그림이 인화된 사진을 2~3일 보고 다시 돌려달라며 건네주었다고 합니다.그는 집으로 돌아와 밤새 사진을 살펴봅니다. 보고 또 봐도 너무 좋은 그림이었고, 고민 끝에 집과 그림 약 200점을 모두 인수하기로 합니다. 당시 아파트 두 채 가격. 잔금을 마련하는 데 2년 넘게 걸렸고, 경제 상황도 어려워져 한동안 고생했답니다.그런데 1990년엔 공간화랑에서 ‘원계홍 10주기 추모전’까지 열었죠. 김 전 교수는 “그분 작품에 눈이 멀어 포로가 됐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지금도 부암동 집에 살고 있는 김 전 교수는 “방 네 칸짜리 집에서 한두 칸은 그림 차지였다”며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대학교 갈 때까지는 앞집 방 세 칸을 빌려 공부방으로 썼다”고 말하며 웃었습니다.그리고 지금까지 그림을 지켜온 데에는 원 화백의 부인과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부탁이 큰 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미국 영주권자였던 사모님은 한국에 오면 저희 집에서 가족처럼 지냈어요. 이경성 전 관장은 ‘작품은 팔지 말고 잘 갖고 있는 게 좋겠다’고 했죠. 그분들의 말씀으로 견뎠습니다.”오로지 그림을 매개로 연결된 사람들세 번째 만남은 약 10여년 전 온라인 공간에서 이뤄졌습니다.원 화백에 대한 애정을 꾸준히 갖고 있었던 윤영주 회장은 가끔씩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봤다고 합니다. 아무리 검색해도 아무 내용이 없다가 어느 날 원계홍의 작품 사진과 글을 발견합니다.반가운 마음에 윤 회장은 댓글을 달았습니다.‘제가 작품을 좀 가지고 있고, 저는 원 화백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를 아셨나요?’그러자 김 전 교수의 따님이 윤 회장에게 연락을 했고, 윤 회장은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 화백의 유작을 그가 모두 넘겨받았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됐죠.그러다 최근 김 전 교수가 ‘100주년이 되었는데 뭐 좀 해드려야죠’라고 했고, 윤 회장도 “그렇다면 한 번 뜻을 세워봅시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원 화백의 그림을 한 자리에 모아 33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그런데 두 분이 만나기 전 또 한 번 연결이 있었답니다.김 전 교수님은 1989년 원 화백의 작품을 인수하기로 결정한 뒤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는 놀라며 “아니 무슨 그림이길래?”라고 물었죠. 그러나 이름도 생소한 작가였기에 김 교수는 말없이 사진 몇 장을 보여주었답니다. 그러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아, 이거 크라운제과 달력에서 본 그림인데. 그때 내가 인상 깊게 봤어.”김 전 교수는 ‘이때 이미 윤 회장이 만든 달력의 덕을 봤다’며 웃었습니다.이 전시에서 제 마음에 와닿은 것은 그림을 매개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연결될 수 있고, 그중 많은 경우는 이해관계가 차지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름 모를 작가가 남긴 작품에 대한 사랑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됐다는 이야기가 참 따스하게 다가왔습니다.생전 원 화백은 사람들과 교류를 꺼리며 작품만 했고, 때때로 이것이 가족들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했답니다.그러나 그 작품이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심지어 누군가는 ‘그림의 포로가 되었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죠. 또 전혀 모르던 사람을 ‘감동’이라는 연결고리로 끈끈하게 맺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 힘은 ‘이 작품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또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의지로까지 이어졌고요.이렇게 무작위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움직이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구나,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저도 기뻤습니다.여러분도 전시장에서 그러한 힘을 직접 한 번 만나보세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뉴스레터 구독 신청 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구독자 의견(지난주 광주비엔날레 이숙경 감독 인터뷰에 관한 의견입니다)■ 현대 미술 작가와 깊은 연을 나누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숙경 감독님의 말씀 중 ‘세상을 떠나려고 미술을 하지 말자. 미술이 마치 다른 세상의 일인 것처럼 대하지 말자는 거죠. 예술이 돈 있는 사람들이 시간이 남아서 하는게 아니잖아요.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라는 구절이 맘에 와닿습니다. 가장 왕성하게 세상과 소통해야 할 대다수 작가가 자의든 타의든 단절에 가까운 작업 활동을 합니다. 빛을 볼 날을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는, 레지던시 한 번 입주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작가 분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생기길 바랍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작가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도 조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사실 저 말이 가장 마음 깊게 다가왔는데 역시 미술에 애정을 가진 분들은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나봅니다. 오늘 원계홍 화백의 이야기도 남다르게 보셨을 것 같아요. 작가들의 현실도 기회가 되면 꼭 다뤄보겠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갤러리나 뮤지엄에서는 보기 힘든 과감한 큐레이션의 전시와 메시지에 충실한 작품을 볼수 있어서 좋아해요(고준환)☞ 그렇죠! 사실 요즘은 비엔날레도 상업화가 되어서 그나마 기댈 곳이 뮤지엄인가 싶을 때도 있긴 합니다만 비엔날레에게 보통 기대하는 바는 말씀하신 부분인듯합니다.■ 들어는 봤지만 뭘 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건 전혀 없었어요. 인터뷰 내용처럼 아트 페어나 비엔날레 등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게 딱 제 얘기네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예술 생태계에 대한 뉴스레터도 받아보고 싶습니다! 이 외에 감동받은 포인트가 하나 있었는데요, 세상을 떠나려고 미술을 하지 말라 세상과 미술이 다른 것이 아니다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서 예술을 하는 게 아니지 않냐는 말씀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너무 좋네요.☞ 역시 같은 부분에서 감동 받으셨군요!! 기쁩니다. 그리고 예술 생태계에 관한 내용도 좋은 기회에 꼭 다뤄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척 봐서 좋은 게 현대미술은 아니에요… ☞ 공감의 의견인가요 ㅎㅎ 사실 저는 약간의 경험과 열린 마음만 있다면 현대미술이 오히려 과거의 것보다 더 척봐도 좋은 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오늘 글을 읽으며 기대감에 벅차오릅니다. 앞으로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실지. 이번에는 꼭 내려가서 볼 생각이예요. ‘유약어수’. 지금 시대와 사회에 흐르고 스며들면 좋겠다 느끼기에 더욱 기다려집니다.(felix) ☞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소식들 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대미술은 맥락을 봐야할 때가 많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전시를 볼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중주의적인 작품만 전시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작품들이 담고 있는 심오하고 깊은 문제를 희석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부터 미술이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말씀에 특히 공감이 갑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는 비엔날레의 성공을 기원합니다.■과거 관람한 좋은 기억이 떠올라요김민기자 kimmin@donga.com}

한국에서 1인 가구를 이야기하면 홀로 사는 청년이나 노인을 흔히 떠올린다. 1인 가구를 말할 때 잘 언급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비혼 중년 여성이다. 20년째 혼자 살아온 저자는 자신을 향한 여러 단편적인 시선에 의문을 갖는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결핍의 인생이라거나, 외롭고 힘들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는 단언이다. 정말 중년 비혼자의 삶은 미완성이고 외로울까. 저자는 40, 50대 비혼 여성 19명을 만나 그들의 삶을 조명했다. ‘이상한 정상 가족’(2017년·동아시아)을 통해 우리 사회 아동 인권과 가족 정책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며 문제점을 파헤쳤던 저자가 중년 비혼 여성에게 돋보기를 들이댔다. 중년 1인 가구는 생각보다 훨씬 많다. 2020년 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1인 가구의 37%가 중년이다. 또 20대의 52.9%, 30대의 52.7%가 앞으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중년 1인 가구는 더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국내 1인 가구 정책과 담론이 ‘청년은 미혼, 중년은 이혼, 노년은 사별’로 요약된다고 지적하며 관점의 스펙트럼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 비혼 중년의 삶 속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모습이 펼쳐진다. ‘혼자 살면 외롭다’고 흔히 얘기하지만 저자가 만난 비혼 여성들은 외로움을 심각한 문제로 꼽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생각은 국내 1인 가구 담론과 대책이 고독사 예방 관점에서 펼쳐지면서 퍼진 과장된 두려움이라고 분석한다. 인터뷰한 중년 비혼 여성 상당수는 이웃과 친밀한 커뮤니티가 형성된 곳에 살거나, 친구와 함께 집을 마련하고, 대안적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살기도 했다. 현재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고,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아플 땐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 두길 바라는 사람도 있다. 결혼한 삶이 다 행복하거나 성숙한 것이 아니듯 솔로의 삶도 천차만별이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벨라 드파울르는 결혼이 비혼보다 이상적이라 생각하고, 비혼자에게 편견을 갖는 것을 ‘싱글리즘’이라고 명명했다. 혼자 사는 이들이 증가하는 건 세계적 현상이며 제도 역시 이에 맞춰 변해야 할 때임을 저자는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보여준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조각가 유영교(1946~2006)의 회고전 ‘구도(求道)’가 서울 중구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26일까지 열린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조선 후기 국가 공식 참형장이었던 서소문밖 네거리에 열린 문화공간이다. 이에 맞춰 작가가 남긴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 37점을 한 자리에 모았다.‘천신과 싸우는 야곱’처럼 성경 속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도 있는가 하면, 부처의 이야기를 담은 ‘열반’ 시리즈 등도 선보인다. 부조 작품 ‘부처의 깨달음과 바오로의 회심’에는 한 쪽에는 부처의 반 쪽 얼굴이, 다른 쪽에는 눈부신 빛에 얼굴을 가리는 사람이 새겨져 있다. 유영교 작가의 부인인 이은기 목원대 미술교육과 명예교수는 “천신과 싸우는 야곱은 종교 미술에서는 자주 그려지지 않는 주제”라며 “작가가 성경이나 불경을 읽고 스스로 주제를 선택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말년에는 자연석에 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진 ‘샘’ 연작, 청계천 복원 기념으로 설치된 빨간색 야외 조각 ‘에어 조이’ 등 키네틱 조각을 선보이기도 했다. ‘샘’은 전시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지하 기획소강당으로 내려가면 볼 수 있다. ‘샘’ 연작은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생전인 2000년대 초반에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 정원에 돌바닥과 어우러지도록 설치한 바 있다. 전시는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내가 죽고 나면, 내 작품들은 고물덩어리가 되지 않을까?’ 이는 많은 예술가가 갖는 불안 중 하나가 아닐까. 작품은 한 끗 차이로 예술이 되거나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곤 한다. 작가가 남긴 건 소장가, 큐레이터, 평론가와 미술사가에 의해 사회 속으로 들어올 때 비로소 작품이 된다.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에서 16일 개막한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원계홍 화백(1923∼1980)의 작품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두 소장가, 김태섭 전 서울장신대 학장과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 덕분이었다. 전시장에서 17일 만난 김 전 학장은 1989년 부동산중개소의 소개로 간 서울 종로구 부암동 원 화백의 집에서 우연히 작품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원 화백의 작품을 처음 봤지만 한눈에 반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거금을 들여 집과 작품을 사들였다. 그는 “작품에 눈이 멀어 포로가 됐던 것 같다”며 “1991년에야 잔금을 치렀고 한때 경제 상황이 어려워져 한동안 고생했다”고 말했다. 그가 넘겨받은 작품은 약 200점으로, 작품의 가격은 당시 아파트 두 채 가격과 맞먹었다. 윤 회장은 1984년 크라운제과 대표 시절 처음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원 화백의 그림을 접했다. 그도 작품 전체를 인수하고 싶었지만 당시 원 화백의 부인이 남편의 흔적을 보내길 망설였다. 윤 회장은 이후 서울 동대문구 장안평 고미술상가에서 원 화백의 그림을 발견하기도 했다. “프레임도 없이 그림 수백 점이 LP판처럼 쌓여 있는데, 그 사이에 원 화백의 그림이 있어 참 슬펐습니다.” 이후 생각날 때마다 원 화백에 대해 검색해 보던 윤 회장은 약 10년 전 네이버 블로그에서 김 전 학장의 글을 발견했다. 윤 회장이 ‘제가 작품을 좀 가지고 있고 원 화백을 존경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아셨냐’고 댓글을 달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전시장에는 윤 회장이 소장한 16점, 김 전 학장이 소장한 65점을 비롯해 원 화백의 작품 100여 점과 기록을 볼 수 있다. 폴 세잔의 영향을 받은 정갈한 정물화와 풍경화가 주를 이룬다. 이수균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은 “원 화백은 미술 이론서를 탐독하고 자신감도 넘쳤지만 세상과 교류하지 않았던 작가”라며 “먼지처럼 흩어질 뻔한 운명을 소장가들이 잡아준 것”이라고 했다. 5월 21일까지. 5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내가 죽고 나면 작품들이 고물 덩어리가 되는 건 아닌가?’ 모든 예술가가 갖는 불안 중 하나는 이런 생각일 것이다. 예술가가 남긴 것은 한 끗 차이로 예술이 되거나,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고 만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작품을 알아봐주는 타인이다. 작품을 소장하는 컬렉터, 전시를 여는 큐레이터, 글을 쓰는 평론가와 미술사가에 의해 사회 속으로 들어올 때 작가가 남긴 것은 비로소 작품이 된다. 16일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에서 개막한 전시,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의 주인공 원계홍(1923~1980)은 생소한 작가다. 1940년대 도쿄 주오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화가의 길을 걸었고, 1978년 55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첫 개인전을 열었지만 1980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그가 남긴 작품들 100여 점이 33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은 두 소장가, 김태섭 윤영주 덕분이었다. ● 산책하다 만난 작품에 사로잡히다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김태섭 씨는 1989년 봄 산책을 하다 부동산 주인의 소개로 간 원 화백의 부암동 집에서 우연히 작품들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한 방 가득 작품이 있었는데 지금껏 본 것과 달랐어요. 집을 보러 간 건데, ‘집보다 그림이 훨씬 좋네’라고 했죠. 들어본 적 없는 화가였지만, 고민 끝에 집과 작품을 인수했습니다.” 이후 1990년에도 공간화랑에서 ‘원계홍 10주기 추모전’을 열었던 그는 “그분 작품에 눈이 멀어 포로가 됐던 것 같다”며 “이 때에도 잔금을 마련하지 못해 1년 후에야 치렀고 경제 상황도 불균형해져 한동안 고생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넘겨받은 작품은 약 200점, 당시 아파트 두 채 가격에 인수했다. 지금도 부암동 집에 살고 있는 김 씨는 “방 네 칸짜리 집에서 한 두 칸은 그림차지였다”며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대학교 갈 때까지는 앞집 방 세 칸을 빌려 공부방으로 썼다”고 말하며 웃었다. 김 씨는 원 화백의 부인과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부탁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미국 영주권자였던 사모님은 한국에 오면 저희 집에서 가족처럼 지냈어요. 이경성 전 관장은 ‘작품은 팔지 말고 잘 갖고 있는 게 좋겠다’고 했죠. 그 분들의 말씀으로 견뎠습니다.” ● 고미술상가 그림 더미에서 발견하기도 원 화백의 작품에 반한 또 다른 컬렉터는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이다. 윤 회장은 1984년 크라운제과 대표 시절 처음 인사동에서 원 화백의 그림을 접했다. 그도 작품을 사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원 화백의 부인이 남편의 흔적을 보내길 망설였다. 윤 회장은 장안평 고미술상가에서 그림을 발견하기도 했다.“프레임도 없이 수백 점 그림이 엘피판처럼 쌓여있는데 그 사이에 원 화백 그림이 있었어요. 그 때 느낌이 참 슬펐습니다.” 이후 생각날 때마다 원계홍을 검색해보던 윤 회장은 약 10년 전 쯤 네이버 블로그에서 김 씨의 글을 발견했다. ‘제가 작품을 좀 가지고 있고 원 화백을 존경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아셨냐’고 댓글을 달아 두 사람이 연결됐다.“김태섭씨의 따님이 전화를 주셔서 받자마자 찾아뵈었죠. 교수님이 유작을 다 받은 걸 그 때 알게 됐고 그 후로도 잘 알고 지냈는데, 최근 100주년 전시를 열자고 하셨어요.” 전시장에서는 윤 회장 소장 16점, 김 씨 소장 65점을 비롯한 작품 100여 점과 기록을 볼 수 있다. 폴 세잔의 영향을 받은 정갈한 정물과 풍경화가 주를 이룬다. 이수균 학예실장은 “미술 이론서를 굉장히 많이 읽고 자신감도 가졌지만 세상과 교류하지 않았던 작가”라며 “먼지처럼 흩어져 고물가게에서 마주칠 뻔한 운명을 소장가가 잡아준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5월 21일까지. 5000원.김민기자 kimmin@donga.com}

여러분 안녕하세요,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해 열리지 못했던 제14회 광주비엔날레가 한 달 뒤인 4월 7일 드디어 개막합니다.이번 비엔날레의 예술총감독은 2019년 테이트모던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의 큐레이터이자, 테이트 최초의 아시아인 큐레이터로 15년 넘게 일해 온 이숙경 테이트모던 국제미술 수석 큐레이터입니다.이숙경 감독은 2006년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광주비엔날레를 맡은 한국인 감독으로도 큰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전시를 위해 3월 6일 입국한 이숙경 감독을 10일 만났습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 어떻게 펼쳐질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시죠.부드럽게 스며드는 예술의 힘이번 광주비엔날레의 구성을 보면, 비엔날레가 열리는 광주의 ‘저항 정신’을 지역적 맥락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들의 공통된 것으로 확장해서 보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입니다.이숙경 감독에게 이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습니다.김민(김): 전시의 구성이 총 4가지 주제, ‘은은한 광륜’, ‘조상의 목소리’, ‘일시적 주권’, ‘행성의 시간들’로 되어 있어요. ‘은은한 광륜’에서 광주의 저항과 연대의식을 모티프로 삼은 작품으로 시작해 점점 그것을 근대주의, 탈식민주의, 생태와 환경 등 더 큰 주제로 확장하는 느낌이었습니다.이숙경(이): 정확해요. 구체적인 소재에서 시작해 보편적으로 나아가는 구성이죠. 전시에 참여하는 모든 작가들은 자신의 특수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개인적 경험이거나, 자신의 커뮤니티에 관한 것이거나, 젠더에 관한 이야기도 되죠.자신에게 중요한 부분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풀어낸다면 그것이 전 지구적 시선(planetary vision)으로도 맞닿을 수 있다고 봤어요.김: 그런데 전체 주제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즉 ‘유약어수’(柔弱於水)로 도덕경의 한 구절에서 가져오셨어요.이: 작가뿐 아니라 큐레이터인 저도 뒤에 숨지 말고 내 경험을 더 적극적으로 끌어오자고 생각했어요. 이번 코로나19로 영국 전역이 록다운(이동 제한) 되었을 때 동양 고전을 읽었거든요. 제가 유교적인 집안에서 자랐는데 어릴 적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너무 꼿꼿하게만 해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말들이 동양의 오랜 지적 전통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았고, 결국 이번 전시의 주제로 그것이 이어졌어요.김: 왜 하필 그 구절이었나요?이: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멈추고 전부 고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예술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람이 죽는데 이게 다 무슨 의미냐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러나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물처럼 부드럽고 여린 것이 바위를 뚫듯이 예술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유약어수’는 결국 권력에 관한 이야기예요. 물은 비유일 뿐, 부드럽고 여린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다른 곳에 스며들잖아요. 예술도 그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바꿔 놓거나, 감동을 주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게 한다는 거죠.김: 너무 좋은데요. 저도 사실은 예술이 뭔가 예쁘고 반짝이고 사치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흔한 것 같아 가끔 답답할 때가 있었거든요.이: 그래서 그 작품 얼마야? 몇억이라고? 이런 이야기들이 흔하죠(웃음). 그러나 예술은 삶에 대한 이야기고 결국 사람이 만드는 거잖아요. 소통의 욕구도 있구요. 예술의 본질인 내적 성찰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죠.김: 그런 접근이 오히려 폼 잡지 말고, 어깨에 힘주지 말고 예술을 바라보자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이: 세상을 떠나려고 미술을 하지 말자. 미술이 마치 다른 세상의 일인 것처럼 대하지 말자는 거죠. 예술이 돈 있는 사람들이 시간이 남아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한국 미술의 가능성김: 참여 작가 명단에 한국 작가도 여럿 보이는데, 전체의 17% 정도로 구성되었다구요.이: 네. 꾸준히 자기 작업을 해 온 분들이고, 아주 젊은 작가가 아니에요. 그 이유는 젊은 작가는 아직 기회가 많다고 봤고, 국제전에서 많이 보여주지 못한 작가는 누구일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런 분들을 찾다 보니 홍이현숙, 장지아, 엄정순, 김기라, 오석근 같은 작가가 나온 거죠.한국 미술의 결이 이렇게 넓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한국의 비엔날레를 왔는데 맨날 밖에서 보던 작가가 있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외국 감독이 오면 언어 장벽 때문에 소개되기 어려웠던 국내 작가도 있고, 제가 이번에 처음 만난 분도 많습니다. 그래서 작가분들이 “왜 저에게 오셨냐”고 깜짝 놀라곤 하셨어요.김: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니, ‘한국 미술의 매력’이 뭐라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이: 굉장히 가능성이 많죠. 우선 미술 인구가 많아 작가층이 두텁고 좋은 시스템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을 갖고 있어요. 다만 아트마켓인 아트페어나 비엔날레의 차이를 아직 모르는 분이 많은 것처럼 예술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아요. 공공 영역과 시장 영역의 구분이 잘 정리가 되면 좋겠어요. 인프라는 잘 되어 있거든요.김: 미술관이 많다는 말씀이죠?이: 네 충분한 예산과 인력이 뒷받침이 된다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잘 될 가능성이 많을 것 같습니다. 광주비엔날레도 해외에선 유명하거든요. 제가 감독이 되고 정말 많은 축하를 받았어요. 이렇게 있는 것을 잘 지키고 더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현대미술의 종합선물세트이: 저도 세계의 많은 비엔날레를 보러 다니는 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작가 연구를 하기 위해서예요. 비엔날레는 짧은 시간에 작은 공간에서 무지하게 많은 작가를 볼 수 있는 기회예요. 일종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죠.김: 다만 일반적으로는 비엔날레가 어렵다거나 난해하다고 느끼는 인식도 있죠.이: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냥 척 봐서 좋은 게 현대미술은 아니에요. 맥락을 봐야 할 때가 많고, 그것을 위해 캡션은 물론 영상부터 도록까지 많은 보조 자료를 준비해두었어요.더 많은 사람들이 전시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대중주의적인 작품만 전시할 수는 없죠. 중요한 것은 작품들이 담고 있는 심오하고 깊은 문제를 희석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김: 그럼에도 편하게 볼 수 있는 전시를 만들려고 고민도 하셨다고요.이: 의자도 많이 놓았고, 작품 해설도 가능한 최대한 쉽게 쓰려고 노력했어요. 작가에겐 사람들이 자기 작업을 이해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작가가 쉽게 말하진 못하더라도 큐레이터는 쉽게 얘기를 해줘야죠. 균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요.김: 이번에 한국에 꽤 오래 머물게 되시겠어요.이: 6주간 머물게 되는데 25년 만에 가장 길게 머무는 거예요. 비엔날레 전시관이 큰 5개의 공간으로 이뤄졌는데, 테이트모던의 보일러하우스와 비슷한 크기로 매우 큰 규모예요. 또 전시가 개막하고 난 다음에는 7, 8일 테이트 리서치센터와 공동 주관으로 심포지움을 엽니다.물론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휴식을 취하듯 좋은 그림을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한 작품도 많아요. 베티 머플러라는 작가의 작품도 아주 멋진 추상화예요. 또 기존 전시 동선을 바꿔서 광장에서 바로 올 수 있도록 웰컴 센터를 만들었거든요. ‘그냥 부담 없이 들어와서 아무거나 보고 가세요’라는 느낌을 주려고 했습니다.1996년 첫 광주비엔날레가 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 관객까지 전시를 보러 오신 걸 보고 감동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런 열린 마음을 가진 관객분들에게 잘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전시를 만들고 있습니다.-이숙경 감독은 이날 서울에서 만났는데요. 전시 준비 기간에 해야 할 작업이 많아 ‘서울로 오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며 떠났습니다. 비엔날레가 개막하면 또 전시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뉴스레터 구독 신청 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구독자 의견지난주 ‘데이비드 치퍼필드’에 관해 다룬 뉴스레터를 보고 보내주신 구독자 의견을 소개합니다.■ 제 개인적 느낌은 치퍼필드가 겸손한 디자인에 능한 건축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 아모레퍼시픽 건물은 (…) 자세히 뜯어보면 거대한 매스가 수직 루버로 분절된 듯 개방감 있게 표현한 시각적 즐거움은 색다른 묘미로 다가오면서 ‘볼수록, 자세히 보아야 예쁜’ 건물이라는 걸 수 년이 지나면서 느끼고 있네요.이에 반해 여의도 파크1 건물은 재미있게도 누가 짓는지 별 관심도 없었는데 생기고 난 후, 보면서 ‘특이하네!’ 하면서 누가 지었지, 궁금해하던 중, 80을 바라보는 엄마가 ‘어머 이거 파리에서 본 퐁피두 건물 같아, 그 건축가가 지은 거 아니니’ 하셨을 때야 찾아보니 정말 그 건축가가 맞는 걸 보고 저 자신도 깜짝 놀랐답니다.(…)치퍼필드의 수상은 묵묵히 성실히 건축이라는 본분을 다하는 건축가의 길에 프리츠커 상이라는 끝이 있다는 걸 알려준 거 같아 괜히 뿌듯하네요. 그리고 이분의 건축은 뭔가 사러 깊다는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만약 그랬을 때의 포근함 따스함보다는 시크한, 세련된 미니멀 스타일을 구사하지만 사려 깊은 츤데레 같은 묘한 느낌이 있어 지속적으로 이분이 건축가로서 러브콜을 받는 게 아닐까 싶어요.☞ 치퍼필드의 건축에 대한 자세하고 깊은 감상을 보내주셨어요. 저보다 더 애정을 담고 봐주신 것 같아 독자 의견으로 꼭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사려 깊은 츤데레 같은 묘한 느낌’, 정말 공감되네요! 흥미로운 의견 감사합니다.■ 사진으로 본 그의 건축물들이 과거와 현재의 조우, 주변 환경과 건축의 조화 등을 보여주는 것 같고,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존재감 있는 모습입니다. 단절이 아닌 이어짐, 연결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감동적이고요. “수백만 번의 기술적, 미학적, 정치적 선택이 이어졌다” 는 말이 그의 사려 깊음을 드러냅니다. 공간에서 무엇을 살려야 할지, 없애야 할지 고민했다는 게, 과연 건축가답습니다.■ 남아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따듯한 마음이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발자국 물러서면 보이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가까이에선 화려한 건축물에 비해 눈에 덜 띄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풍경과 자연스레 섞이는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자전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남은 자들에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그저 운이 나빴던 거라기엔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작가에게 남아 있는 건 아버지가 차고 있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시계의 행적과 심박 수 데이터뿐이다. 김희천 작가(34)는 영상 작품 ‘바벨’(2015년)에서 GPS 시계 속 데이터를 통해 아버지의 마지막을 추적했다. 이 작품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과 아트선재센터에서 각각 2018, 2019년 개인전을 열고 국내외 비엔날레에 참가했다. 최근엔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최종 수상자로 선정됐다. 서울 마포구 작업실에서 13일 그를 만났다. 게임을 연상케 하는 작품 ‘바벨’은 컴퓨터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희천은 “누군가에겐 모니터로 애도한다는 게 끔찍하고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남은 게 그것밖에 없다는 느낌이었다”며 “애도보다 그냥 데이터를 보는 걸 멈출 수 없었고, 2015년 전시 공간 ‘반지하 B½F’에 작품을 내며 그 경험을 담게 됐다”고 말했다. 결과물은 간단한 해결책이든, 어려운 문제든 자판을 두들겨 검색부터 하고 보는 요즘 세대의 자화상이 됐다. 죽음에 관한 복잡한 질문 앞에서도 이들은 숫자와 데이터로 답을 찾으려 한다. 에르메스상 심사위원단은 “디지털이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의 자아 인식을 주제로 놀라운 작업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김희천은 “또래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우리 세대는 미술관 대신 PC방에서 문화활동을 했다는 걸 알았고, 이때부터 도대체 스크린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바벨’ 이후 그의 작업은 레이싱 게임, 인터넷 방송,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소재로 변주됐다. 개인적 경험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다. “글보다 직접 경험해서 아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그래야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되지 않거든요. 경험은 관객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연결고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경원 전준호 작가가 이정재 임수정 등 유명 배우가 출연한 고화질의 화면으로 눈길을 잡는 스타일이라면, 김희천은 드라마틱한 서사와 문학적 대사로 관객을 붙잡는다. 미술 전시에서 영상 작품은 집중하기 쉬운 장르는 아니지만, 그는 “관객이 작품을 다 보고 난 뒤 (영상 재생이) 끝난 것을 아쉬워하길 바란다”고 했다. 김 작가의 수상 기념전은 2024년 하반기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릴 예정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자전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산 사람에게 던진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그저 운이 나빴던 거라기엔 너무 가혹한 결말 아닌가? 그러나 남겨진 확실한 건 아버지가 차고 있던 GPS 시계의 행적과 심박 수 데이터뿐이다. 김희천 작가(34)는 영상 작품 ‘바벨’(2015)에서 GPS 시계 속 데이터를 통해 아버지의 마지막을 추적했다. 이 작품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2018), 아트선재센터(2019)에서 개인전을 열고 국내외 비엔날레에 다수 참가했으며, 최근에는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최종 수상자로 선정됐다. 13일 서울 마포구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모니터로 애도하는 아버지의 죽음 작품 ‘바벨’에는 구글 지도와 3D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서울의 모습이 나와 게임을 연상케 한다. 화면 속 마우스 포인터는 무언가를 간절히 움켜쥐듯 주먹 모양으로 꼼지락거리기도 해 컴퓨터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하다. 김희천은 “누군가에겐 모니터로 애도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남은 게 그것 밖에 없다는 느낌이었다”고 했다.“아버지가 남긴 가장 자세한 게 데이터였어요. 당시에는 애도보다 그냥 데이터를 보는 걸 멈출 수 없었어요. 그러다 또래 작가들이 만든 신생 공간 ‘반지하 B½F’에 작품을 내면서 그 경험을 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가볍게 영상을 만들려 했지만, 제작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살이 붙었다. 결과물은 간단한 해결책이든, 어려운 문제든 학교 숙제부터 병원에 가야할 증상까지 자판을 두들겨 검색부터 하고 보며, 직접 묻지는 못해 ‘전화 공포증’에 시달리기도 하는 80년대 이후 출생 세대의 자화상이 됐다. 죽음에 관한 복잡한 질문 앞에서도 이들은 숫자와 데이터로 답을 찾으려고 한다. 에르메스상 심사위원단은 “디지털이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의 자아 인식을 이슈로 다뤄 놀라운 작업을 보여줬다”고 평했다.“강정석 작가가 만든 비디오 스크리닝 프로그램 ‘비디오 릴레이 탄산’에서 다른 또래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우리가 정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구나, 해외 청소년들이 미술관 등에서 문화활동을 할 때 우리는 PC방에 다녔구나 싶었어요. 또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핸드폰만 보고 있기에 도대체 ‘스크린’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됐죠.”● 난해한 영상 대신 서사로 몰입감 살려‘바벨’ 이후 그의 작업은 레이싱 게임, 인터넷 방송,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소재로 변주됐다. 김희천 만의 독특한 포인트는 개인적 경험이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라는 점이다. “글에서 읽은 것보다 직접 경험해서 아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그래야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되지 않고 관객이 작품에 몰입하는 연결 고리가 된다고 생각해요.” 문경원·전준호 작가가 유명 배우가 출연한 고화질의 화면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면, 김희천은 드라마틱한 서사와 문학적 대사로 관객을 붙잡는다. 사실 영상 작품은 미술 전시에서 관객에게 선호되진 않는다. 다양한 작품이 걸린 곳 오랜 시간 한 작품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그는 “관객이 작품을 다 보고 끝난 것을 아쉬워하길 바란다”고 했다. 김 작가의 수상 기념전은 2024년 하반기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선보일 예정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화가 최혜인의 개인전 ‘해빙’이 서울 서대문구 아트레온갤러리에서 17일부터 4월 6일까지 열린다. 쌀 콩 감자 등 곡식이나 토마토 양파 브로콜리 등 채소를 소재로 생명성을 탐구한 작품 18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식재료가 지겹고 익숙한 가사 노동에서 빠져나오는 출구이자, 작업의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신작인 ‘가시와 구멍’은 오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오이를 “물컹하지만 뾰족한 가시를 품고 있어 다듬다가 찔리기도 하는 성깔 있는 채소”라고 표현한 작가는 수분이 가득한 오이를 건조한 사막 같은 배경에 배치했다. 씨가 꽉 찬 파프리카를 그린 ‘잉태하다’, 만개한 브로콜리를 표현한 ‘팽창하다’ 등 작품도 볼 수 있다.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폐암 진단을 통보받은)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요.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이걸 다 어떻게 하라고 나에게 이런 형벌을 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주 서귀포시에 건립되는 ‘박서보미술관’(가칭)의 기공식에 14일 참여한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92)이 말했다. 그는 지난달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암 투병 사실을 공개한 후 이날 처음 공개석상에 나선 그는 휠체어를 탄 채 간간이 기침을 하긴 했지만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 박서보미술관은 올해 상반기 문을 여는 JW 메리어트 제주 리조트&스파 내 부지에 들어설 예정이다. 총건축면적 1만1571㎡(전시관 900㎡)에 지상 1층, 지하 2층 규모다. 기공식을 계기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 화백은 그간의 소회를 밝혔다. 그는 “체념하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다”며 “암을 친구로 모시고 함께 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 시작한 작업을 위해 항암 치료도 받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치료는 슬슬 봐가면서 해 나가고…. 3개월에 한 번씩 내 몸 상태를 검진받자고 생각했어요. 암을 치료하게 되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못 하기 때문이죠.” 그가 새로 시작한 작업은 외국 신문과 한지를 포개어 붙인 뒤 그 위에 유화 물감으로 드로잉하는 일이다. 1970년대 후반 선보였던 연작을 현재 상황에 맞춰 새롭게 작업하고 있는 것. 그는 “일상에서 다른 것을 잊고 그림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폐암 진단을 받고 2∼3일은 흔들렸는데, 지금은 암에 걸렸다는 생각도 다 잊어버렸어요. (진단받기 전과 지금을 비교할 때) 전혀 변한 것이 없습니다.” 박서보미술관은 자연광이 지하 전시실까지 닿을 수 있는 성큰(sunken) 구조를 도입했다. 스페인 테네리페섬 출신의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72)가 설계를 맡았다. 미술관은 2024년 여름에 완공될 예정이다. 박 화백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찾아 그림을 보고 난 뒤 마음속 응어리들을 풀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 그림이 대중을 치유하길 원합니다. 그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입니다. 나를 비워야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습니다. 서양 미술은 자기의 생각만 잔뜩 토해내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 폭력을 가하거든요. 난 그런 예술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신(修身)의 도구가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관은 박 화백이 사재를 출연해 2019년 세운 기지재단에서 운영한다. 기지재단은 현재 미술관의 정식 명칭과 운영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개관과 함께 상설 및 기획 전시 교육 행사를 선보일 계획이다. 올해 새로 설립한 박서보장학재단과 연계해 인재 양성 프로그램도 마련한다.제주=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009년 3월 독일 베를린의 어느 박물관. 텅 빈 건물인 이곳에 베를린 시민들이 입장하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섰습니다. 가을에 정식으로 개관하기에 내부에 있어야 할 유물들은 아직 설치되지 않은 상태. 이 박물관은 고대 이집트의 유명한 작품 ‘네페르티티의 흉상’을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 베를린 신박물관입니다. 신박물관이 있는 지역은 19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소장품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베를린의 ‘박물관 섬’입니다. 박물관 섬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신박물관은 왜 텅 비어 있고, 베를린 시민들은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 박물관이 전쟁으로 무너지고 수십 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막 복원을 마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박물관을 복원하는 일을 맡은 이는 8일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70)였습니다.새롭게 거듭난 아픈 역사 베를린 박물관 섬은 구박물관이 1828년 처음 건축된 후 100여 년 지나 1930년 완성된 곳으로, 5개 박물관이 한곳에 모여 있는 지역입니다. 19세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야심찬 프로젝트로 시작됐지만, 모든 건물이 세워진 지 9년 만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박물관들은 문을 닫게 됩니다. 그중 신박물관은 1943년과 1945년 베를린에 가해진 공습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는 동독이 점령하면서 6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고 합니다. 독일 시민들에게 신박물관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공간이었죠. 이곳을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1993∼1997년 3단계에 걸친 국제 공모 끝에 치퍼필드가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공간을 다시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끄러운 역사이니 건물을 부숴야 할까요, 아니면 있는 그대로 보존해 그 역사를 기억하도록 해야 할까요. 프로젝트를 맡은 치퍼필드는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남아 있는 역사 중 일부를 보존하되, 완전히 부서진 곳은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절충안을 선택했습니다. 이를테면 총탄을 맞은 흔적이 있는 기둥은 그대로 복원해 고통스러운 역사를 드러냈습니다. 사라진 공간을 다시 만들 때에는 재활용 벽돌이나 과거의 건물에 사용됐던 것과 비슷한 소재를 선택하되, 현대적인 미니멀리즘 방식을 적절히 섞었죠. 치퍼필드는 이 과정을 “수백만 번의 기술적, 미학적, 정치적 선택이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것은 살리고 없애야 할지를 이 건물이 속한 도시와 역사적 맥락을 함께 고려하며 오랜 시간 고민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1998년부터 2009년까지 11년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복원 작업은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로부터 “유럽 문화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때를 계기로 치퍼필드는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었습니다.드러나지 않는 것의 가치이번 프리츠커상의 수상자 선정이 독특했던 것은 치퍼필드가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건축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CNN은 “비정형적 형태의 프랭크 게리, 굽이치는 곡선의 자하 하디드, 콘크리트의 질감을 살린 안도 다다오 등 대표적 스타일이 있었던 기존 수상자와 정반대되는 건축가를 선정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프리츠커상 심사위원회는 “재능 있는 건축가는 때때로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리기도 한다”며 “세계 여러 도시에 있는 치퍼필드의 건축은 보자마자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없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치퍼필드가 그만큼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건축이 있는 환경과 맥락을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디자인의 배경으로는 치퍼필드가 자란 환경과 경력을 쌓아온 이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영국 잉글랜드 남부 데번의 농촌에서 자란 그는 수의사가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술과 체육 외에는 공부에 소질이 없었고, 대학을 가지 못해 킹스턴 아트스쿨에 진학했다가 영국의 권위 있는 건축전문학교 AA에서 공부하게 됩니다. 그 후 저명한 건축가인 리처드 로저스, 노먼 포스터 아래에서 일했지만 그의 첫 프로젝트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1985년 패션 디자이너 미야케 잇세이의 매장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면서 눈에 띄어 일본으로 건너가 건축 일에도 손을 뻗었습니다.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도 프로젝트를 맡게 됐죠. 고국인 영국에서 인정받은 것은 그 뒤였습니다. 치퍼필드는 인터뷰에서 스스로 타고난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고, 외국에서 일을 시작하며 다양한 문화들의 차이를 깨닫게 됐다고 합니다. 덕분에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주어진 환경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됐다고도 하죠.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를 비롯해 지금은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의 현재 최대 관심사는 기후 변화와 사회적 불평등이라고 합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새롭고 반짝이고 화려한 것을 모두가 원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 프리츠커상 심사위원회가 오래된 것을 부수지 않고 되살리고, 스스로를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 건축가를 선정한 것은, 잠시 멈춰서 정말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돌아보자는 의도는 아니었을까요?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하시면 이메일로 먼저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2006년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예술총감독의 손에서 열린다. 주인공은 국제 미술계에서 20여 년간 활동해 온 이숙경 영국 테이트모던 국제미술 수석큐레이터(54·사진). 이 감독이 제14회 광주비엔날레에 펼쳐낼 주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도덕경의 한 구절 ‘유약어수(柔弱於水)’에서 출발했다. 비엔날레 개막(4월 7일)을 한 달 앞두고 10일 이 감독을 만났다. ● “부드럽지만 강한 예술의 힘 보여줄 것” 7월 9일까지 열리는 광주비엔날레는 비엔날레 전시관은 물론이고 국립광주박물관, 무각사, 호랑가시나무 등 광주의 5개 전시 공간에서 펼쳐진다. 세계 각국에서 작가 79명이 참여하며 이 중 40여 명이 신작을 선보인다. 이 감독은 비엔날레 주제가 “물이 아닌 힘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도덕경에서 ‘유약어수’는 “세상에서 물이 가장 부드럽고 약하지만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구절의 일부다. 이 감독은 “물처럼 부드럽고 여린 태도가 결국은 바위를 뚫듯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의미인데, 누가 누구를 이기는 것이니 결국 권력에 관한 말”이라며 “누군가의 마음에 스며들어 감동을 주고, 때로는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기까지 하는 예술이 바위를 뚫는 힘을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주제는 팬데믹 동안 내적 성찰을 통해 나오게 됐다고 한다. “영국 전역이 록다운(이동 제한)돼 외출할 수 없을 때 그간 못했던 독서를 했죠. 그러다 동양의 고전을 다시 봤고, 저의 지적 뿌리가 그곳에 있음을 깨달았어요. 유교적 집안에서 자랐는데,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꼿꼿하게만 해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 같은 말씀이 오랜 지적 전통에서 나온 것임을 새삼 깨달았죠.”● 개인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것으로 전시의 4가지 소주제는 ‘은은한 광륜’과 ‘조상의 목소리’, ‘일시적 주권’, ‘행성의 시간들’이다. 첫 주제 ‘은은한 광륜’에서는 광주의 정신을 영감의 원천이자 저항과 연대의 모델로 삼은 작품을 선보인다. 이 주제는 근대주의 비판, 탈식민주의, 생태와 환경 등으로 확장되면서 변주된다. 이 감독은 “아주 개인적이고 특수한 이야기에도 세상과 공명하는 보편적인 것이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며 “참여 작가들도 개인적 삶이나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 젠더 등의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풀어내는데, 이런 것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엮어주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홍익대 대학원 재학 중이던 24세 때 최연소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가 됐다. 이후 영국 에섹스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았고, 2007년 테이트 미술관 최초의 동양인 큐레이터가 됐다. 요즘은 테이트 미술관에 다양한 국적의 큐레이터들이 일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6일 입국한 이 감독은 6주간 한국에 머물 예정이다. 그는 “이렇게 오래 한국에 있는 것은 25년 만에 처음”이라며 “어딘가 안심이 되고 안정적인 느낌이고, 광주에 연고는 없지만 특별한 관계가 생겨난 느낌”이라고 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가 처음 열렸을 때 가 봤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전시를 보러 오신 것을 보고 감동받았어요. 이번에도 관객이 많이 오실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시장에 휴식 공간도 충분히 마련했으니, 마음의 안정과 영감을 얻어 가시길 바랍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더 글로리’를 연출한 안길호 PD가 고교 시절 폭력을 휘두른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안 PD는 12일 입장문을 내고 “1996년 필리핀 유학 당시 여자친구가 저로 인해 학교에서 놀림거리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 지우지 못할 상처를 줬다”며 “상처받은 분들께 용서를 구한다”고 밝혔다. 앞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당시 고3이던 안 PD가 교제하던 중2 여학생을 동급생들이 놀리자, 안 PD 등 열댓 명이 나와 친구를 불러내 2시간가량 폭행했다’며 학폭 의혹을 제기한 글이 올라온 바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세계적 미디어 연구 기관인 로이터연구소가 동아일보의 ‘히어로콘텐츠’를 소개하는 기사를 10일(현지 시간)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히어로콘텐츠는 본보의 탐사보도를 담은 디지털 및 지면 콘텐츠다. 로이터연구소는 ‘디지털 프로젝트를 위해 기자들을 수개월간 차출한 신문사’라는 제목으로 이샘물 본보 디지털이노베이션 팀장을 인터뷰했다. 연구소는 “2020년 동아일보는 편집국 기자 일부를 차출해 개발자, 디자이너와 팀을 꾸려 디지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며 “히어로콘텐츠 팀은 마감의 제약을 받지 않고 디지털 탐사보도를 했고, 이는 종이신문 중심의 뉴스룸 문화를 바꾸기 위한 시도”라고 소개했다. 이 팀장은 “히어로콘텐츠는 주제 선정, 마감 시간, 취재 과정에 어떠한 제약도 두지 않고 혁신적인 기사 작성을 최우선에 두고 시작한 프로젝트”라고 했다. 이어 “자극적인 헤드라인 등을 통해 페이지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기자들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통해 각자의 ‘명작’을 만든 경험이 중요하고 의미 있었다”고 덧붙였다. 히어로콘텐츠를 통해 기자들이 일상 업무에서 벗어나 한 가지 주제를 오랫동안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기사의 품질을 높일 수 있었다는 내용도 소개됐다. ‘증발’ ‘환생’ ‘99℃’ ‘공존’ ‘산화’의 5회까지 이어진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 시리즈는 관훈언론상과 노근리평화상, 대통령 표창, 한국디지털저널리즘 어워드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열린 세계뉴스미디어총회(WNMC)에서 성과가 소개되기도 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을 그린 작가 이우영 씨(51)가 별세했다. 12일 인천 강화경찰서에 따르면 전날 오후 7시 반경 인천 강화군 선원면의 한 주택에서 이 씨가 방문을 잠근 채 기척을 보이지 않는다는 가족의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경찰은 소방 당국과 함께 강제로 문을 열고 숨진 이 씨를 발견했다. 경찰은 이 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씨 가족들은 “이 씨가 최근 저작권 소송 문제로 힘들어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다만 유서는 따로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유족 의견에 따라 부검은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씨는 공주대 만화예술학과를 중퇴하고 1992년 만화 검정고무신을 그리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가족 이야기를 다룬 검정고무신은 선풍적 인기를 끌며 2006년까지 14년 동안 연재됐다. 시사 만화를 제외하면 최장기 연재 기록을 세웠고 45권짜리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하지만 이 씨는 2019년경부터 극장판, 애니메이션, 캐릭터 사업 등의 저작권 및 수익 분배 문제를 두고 소송을 이어 왔다. 이 씨는 지난해 1월에도 “극장판 ‘추억의 검정고무신’ 제작사가 원작자이자 그림 작가인 제 허락을 구하지 않았고 저작료도 지급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극장판 제작사 측은 “만화 검정고무신의 글 작가가 극장판 제작에 참여해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 씨는 2020년에는 “불공정 계약에 지쳤다”며 창작 포기 선언까지 했다. 빈소는 인천 강화군 비에스종합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14일 오전이며 장지는 인천가족공원이다. 032-216-4444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을 그린 작가 이우영 씨(51)가 별세했다. 12일 인천 강화경찰서에 따르면 전날 오후 7시 반경 인천 강화군 선원면의 한 주택에서 이 씨가 방문을 잠근 채 기척을 보이지 않는다는 가족의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경찰은 소방 당국과 함께 강제로 문을 열고 숨진 이 씨를 발견했다.경찰은 이 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씨 가족들은 “이 씨가 최근 저작권 소송 문제로 힘들어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다만 유서는 따로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유족 의견에 따라 부검은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이 씨는 공주대 만화예술학과를 중퇴하고 1992년 만화 검정고무신을 그리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가족 이야기를 다룬 검정고무신은 선풍적 인기를 끌며 2006년까지 14년 동안 연재됐다. 시사 만화를 제외하면 최장기 연재 기록을 세웠고 45권짜리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하지만 이 씨는 2019년경부터 극장판, 애니메이션, 캐릭터 사업 등을 놓고 저작권 및 수익 분배 문제를 두고 소송을 이어 왔다.이 씨는 지난해 1월에도 “극장판 ‘추억의 검정고무신’ 제작사가 원작자이자 그림 작가인 제 허락을 구하지 않았고 저작료도 지급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극장판 제작사 측은 “만화 검정고무신의 글 작가가 극장판 제작에 참여해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 씨는 2020년에는 캐릭터 사업을 하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며 민사 소송을 제기했고 “불공정 계약에 지쳤다”며 창작 포기 선언까지 했다.빈소는 인천 강화군 비에스종합병원 장례식장 특1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4일 오전이며 장지는 인천가족공원이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2006년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예술총감독의 손에서 탄생한다. 주인공은 국제 미술계에서 20여 년 간 활동해 온 이숙경 테이트모던 국제미술 수석큐레이터(54)다.이숙경 감독이 제14회 광주비엔날레에 펼쳐낼 주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 ‘유약어수(柔弱於水)’에서 출발했다. 비엔날레 개막을 약 한 달 앞둔 10일 이 감독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 부드럽지만 강한 예술의 힘 보여줄 것그는 이번 전시 주제가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했던 내적 성찰을 통해 나오게 됐다고 설명했다.“영국 전역이 록다운 되어 외출할 수 없을 때 그간 못 본 넷플릭스도 보고, 독서도 했죠. 그러다 동양의 고전을 다시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고 저의 지적 뿌리가 그곳임을 깨달았어요. 유교적인 집안에서 자랐는데,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했던 많은 말씀이 오랜 역사에서 나온 것임을 새삼 알게 됐죠.”이 감독은 한국에서 태어나 홍익대 대학원 재학 시절인 26세 때 최연소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가 됐다. 이후 영국 에섹스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았고, 2007년 테이트 미술관 역사상 최초의 동양인 큐레이터가 됐다. 지금은 테이트 미술관에 다양한 국적의 큐레이터들이 일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드문 일이었다.그는 이번 주제가 “물이 아닌 힘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유약어수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린 태도가 결국은 바위를 뚫듯 가장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의미에요. 결국은 누가 누구를 이기는 것이니 권력에 관한 말이죠. 누군가의 마음에 스며들어 감동을 주고, 때로는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기까지 하는 예술이 바위를 뚫는 힘을 갖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습니다.” ● 개인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것으로4월 7일 개막해 7월 9일까지 열리는 광주비엔날레는 비엔날레 전시관은 물론 국립광주박물관, 무각사, 호랑가시나무 등 광주 전역 5개 전시 공간에서 펼쳐진다. 세계 각국에서 작가79명이 참여했고, 이 중 절반이 넘는 40여 명이 신작을 선보인다.4가지 소주제는 각각 ‘은은한 광륜’, ‘조상의 목소리’, ‘일시적 주권’, ‘행성의 시간들’로 구성된다. 첫 주제는 ‘은은한 광륜’은 광주의 정신을 영감의 원천이자 저항과 연대의 모델로 삼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 주제는 점점 근대주의 비판, 탈식민주의, 생태와 환경 등 더 큰 주제로 확장되면서 뒤이어 변주된다.이 감독은 “아주 개인적이고 특수한 이야기에도 세상과 공명하는 보편적인 것이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참여 작가들도 개인적인 삶이나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 젠더 등의 이야기를 진정성있게 풀어내고 있어요. 이런 것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엮어주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죠.”6일 입국한 그는 6주간 한국에 머물 예정이다. 그는 “25년 만에 이렇게 오래 한국에 있었던 것은 처음”이라며 “무언가 안심되고 안정적인 기분이 들고, 광주에 연고는 없지만 이 장소와 특별한 관계가 생겨난 느낌”이라고 말했다.“1995년 광주비엔날레가 처음 열렸을 때 저도 보러 왔습니다. 당시 전시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 보러 오신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이번에도 한국 관객이 많이 오실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시장에 의자와 휴식 공간도 충분히 마련했으니, 마음의 안정과 영감을 얻어 가시길 바랍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러분 안녕하세요,2009년 3월 독일 베를린의 어느 박물관. 텅 빈 건물인 이곳에 베를린 시민들이 입장하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섰습니다. 가을에 정식으로 개관하기에 내부에 있어야 할 유물들은 아직 설치되지 않은 상태.이 박물관은 고대 이집트의 유명한 작품 ‘네페르티티의 흉상’을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 베를린 신박물관입니다.신박물관이 있는 지역은 19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소장품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베를린의 ‘박물관 섬’입니다. 박물관 섬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신박물관은 왜 텅 비어있고, 베를린 시민들은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던 것일까요?그것은 이 박물관이 전쟁으로 무너지고 수십 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막 복원을 마쳤기 때문이었습니다.이 박물관을 복원하는 일을 맡은 것은 8일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70)였습니다.새롭게 거듭난 아픈 역사베를린 박물관섬은 1828년부터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1930년 조성된 곳으로, 5개 박물관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지역입니다.19세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야심찬 프로젝트로 시작됐지만, 모든 건물이 세워진 지 9년 만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박물관들은 문을 닫게 됩니다. 그 중 신박물관은 1943년과 1945년 베를린에 가해진 공습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는 동독 점령 하에 놓여지면서 60여 년 간 폐허로 방치되었다고 합니다.독일 시민들에게 신박물관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공간이었죠. 이 곳을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1993~1997년 3단계에 걸친 국제 공모 끝에 치퍼필드가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이었습니다.이런 공간을 다시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끄러운 역사이니 건물을 부숴야할까요, 아니면 있는 그대로 보존해 그 역사를 기억하도록 해야 할까요. 프로젝트를 맡은 치퍼필드는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대신 남아있는 역사 중 일부를 보존하되, 완전히 부서진 곳은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절충안을 선택했습니다.이를테면 총탄이 맞은 흔적이 있는 기둥은 그대로 복원해 고통스러운 역사를 드러냈습니다.사라진 공간을 다시 만들 때에는 재활용 벽돌이나 과거의 건물에 사용됐던 것과 비슷한 소재를 선택하되, 현대적인 미니멀리즘 방식을 적절히 섞었죠.치퍼필드는 이 과정을 “수백만 번의 기술적, 미학적, 정치적 선택이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것은 살리고 없애야 할지를 이 건물이 속한 도시와 역사적 맥락을 함께 고려하며 오랜 시간 고민했다는 의미입니다.이렇게 1998년부터 2009년까지 11년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복원 작업은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로부터 “유럽 문화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 때를 계기로 치퍼필드는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었습니다.드러나지 않는 것의 가치이번 프리츠커상의 수상자 선정이 독특했던 것은 치퍼필드가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건축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CNN은 “비정형적 형태의 프랭크 게리, 굽이치는 곡선의 자하 하디드, 콘크리트의 질감을 살린 안도 다다오 등 대표적 스타일이 있었던 기존 수상자와 정 반대되는 건축가를 선정했다”고 보도했습니다.프리츠커상 심사위원회는 “재능 있는 건축가는 때때로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리기도 한다”며 “세계 여러 도시에 있는 치퍼필드의 건축은 보자마자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없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치퍼필드가 그만큼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건축이 있는 환경과 맥락을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이런 디자인의 배경으로는 치퍼필드가 자란 환경과 경력을 쌓아온 이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영국 잉글랜드 남부 데본의 농촌에서 자란 그는 수의사가 꿈이었습니다.그러나 예술과 체육 외에는 공부에 소질이 없었고, 대학을 가지 못해 킹스턴 아트스쿨에 진학했다가 영국의 권위있는 건축전문학교 AA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그 후 저명한 건축가인 리처드 로저스, 노먼 포스터 아래에서 일을 했지만 그의 첫 프로젝트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1985년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매장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면서 눈에 띄어 일본으로 건너가 건축 일에도 손을 뻗었습니다.그 후 독일과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도 프로젝트를 맡게 됐죠. 고국인 영국에서 인정받은 것은 그 뒤였습니다.치퍼필드는 인터뷰에서 스스로 타고난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고, 외국에서 일을 시작하며 다양한 문화들의 차이를 깨닫게 됐다고 합니다.덕분에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주어진 환경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됐다고도 하죠.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를 비롯해 지금은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의 현재 최대 관심사는 기후 변화와 사회적 불평등이라고 합니다.눈길을 사로잡는, 새롭고 반짝이고 화려한 것을 모두가 원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 프리츠커상 심사위원회는 오래된 것을 부수지 않고 되살리고, 스스로를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 건축가를 선정한 것은, 잠시 멈춰서 정말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돌아보자는 의도는 아니었을까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뉴스레터 구독 신청 김민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