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박중현 논설위원

논설위원실

구독 49

추천

안녕하세요. 박중현 논설위원입니다.

sanjuck@donga.com

취재분야

2025-11-26~2025-12-26
칼럼100%
  • [오늘과 내일/박중현]노벨을 라이트 형제로 바꾼 순발력 발휘할 때

    “노벨이 9·11테러를 설계했다. 이런 황당한 소리가 국민의힘에서 나오고 있다.” 작년 10월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는 “이 (대장동 개발) 설계는 제가 한 것”이라는 과거 자신의 발언을 근거로 제기되는 의혹에 이렇게 반박했다. “노벨이 화약 발명 설계를 했다고 해서 알카에다의 9·11테러를 설계한 것이 될 수는 없다”고도 했다. 4일 뒤 그는 같은 주장을 펴면서 표현을 조금 바꿨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설계가 알카에다의 9·11테러 설계가 될 수 없다.” 주변에서 ‘9·11은 사실 비행기 충돌 테러’라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미세한 리스크까지 빠르게 대처하는 그의 순발력과 학습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제1야당 대표다. 첫 정기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그는 기본소득 공약을 확장한 ‘기본사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소득하위 70% 노인에게 주는 월 30만 원 기초연금을 모든 노인으로 확대하고, 금액도 40만 원으로 올리는 방안도 밀어붙이고 있다. 사실상 65세 이상 노인 대상의 기본소득이다. 대통령은 되지 못했어도 169석 거대야당 대표로서 대선 공약을 현실화하는 모양새다. 윤석열 대통령도 기초연금 인상을 공약했지만 취임 후 재정부담 때문에 국민연금 개혁과 연계한 단계적 인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문제는 그가 기본소득 공약을 내놓던 1년 전과 경제환경이 크게 달라졌다는 거다. 3·9대선 직전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유가, 식량 가격이 폭등했다. 코로나19 이후 풀린 과잉 유동성까지 겹쳐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미국은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리고 있다. ‘킹 달러’로 인해 자국 화폐 가치가 떨어지자 대다수 나라들이 금리를 높여 환율, 수입물가 상승을 막으려는 ‘역(逆)환율 전쟁’에 뛰어들었다. 경제위기에 대해 급증하는 불안감이 약한 고리를 뚫고 터져 나온 게 영국 파운드화 폭락 사태다.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가 파격적 감세안을 내놓자 글로벌 금융시장은 경기를 일으켰다. 준(準)기축통화인 파운드화 가치는 사상 최저로 떨어지고, 영국 국채금리는 폭등했다. 윤석열 정부의 법인세, 소득세 감세안을 ‘초부자 감세’로 규정해 저지하겠다고 공언한 민주당은 망가진 영국 감세안에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감세가 아니었다. 국가채무비율 100%가 넘는 만성 적자국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5년간 73조 원 감세, 98조 원 보조금으로 돈을 풀겠다고 하자 급등한 국가부도 리스크에 금융시장이 반응한 게 사태의 본질이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까지 예고하고 있다. “국가채무비율 100%가 넘으면 문제가 생기나”라고 했던 이 대표는 지금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기본소득 공약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길 바란다. 한국은 영국보다 채무비율이 낮지만 증가 속도는 선진국 중 1등이고, 기축통화국도 아니다. 수출주도형 국가에서 무역수지는 계속 적자인데, 매년 수십조 원 적자국채를 찍어서라도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나눠준다는 계획을 발표한다면 ‘한국 원화 폭락 사태’를 피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아니어도 이 대표는 거대야당을 움직여 단독으로 정책을 구현할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노인 기본소득’인 기초연금 인상은 위험성이 더 크다. 국제 금융계의 눈으로 보면 한국 경제에 충격을 주는 정책을 추진하는 주체가 여당이든 야당이든 차이가 없다. 작은 리스크에도 민감한 이 대표가 특유의 순발력을 발휘해 기초연금 인상 방침을 재고하길 기대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0-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박중현]착한 정책들의 비정한 결말

    작년 12월 퇴임 직전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지지율은 70%가 넘었다. 16년간 장기집권하면서 “남자도 총리 될 수 있나요”라는 농담을 낳을 정도로 국민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다. 노동개혁을 통해 독일의 경제 체질을 바꿨고, 남유럽 재정위기 등 국제 정세의 고비마다 대외적으로 강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9개월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높은 평가는 급속히 퇴색했다. 그가 추진했던 러시아 천연가스(LNG) 의존 정책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치명적 실책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독일 내의 탈원전, 친환경 여론을 의식해 원전을 멈춰 세우는 ‘착한 정책’을 펴면서 대신 싼 천연가스라는 푸틴의 사탕 발린 독약을 삼켰던 것이다. 독일의 전기요금은 1년 새 10배 올랐고, 겨울나기에 대비해 독일인들은 장작을 사 모으고 있다. 선한 선택처럼 보이던 정부의 정책이 시간이 흘러 명백한 실수로 드러나거나, 국민을 기만한 것으로 확인되는 일은 한국에서 더 흔하다. 지난 정부의 무모한 탈원전 정책 탓에 붕괴됐던 원전산업은 정권교체로 그나마 기사회생의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뒷감당을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인 여러 선한 정책들의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년 1월 신년사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드디어 어두운 터널의 끝이 보인다”면서 전 국민 코로나 백신 무료접종을 약속했다. 선진국들은 화이자, 모더나 백신을 속속 확보하는데 한국은 백신이 언제 수입될지조차 몰라 원성이 커지자 선심부터 쓴 것이다. 물론 코로나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발생 후 2년 반 동안 백신 접종, 검사, 치료에 들어간 비용은 총 7조6000억 원으로 이 중 75%를 건강보험공단이 부담한 것으로 최근 집계됐다. 비용의 4분의 3이 근로자, 기업이 낸 건강보험료에서 나간 것이다. 나머지 4분의 1도 세금이어서 ‘무료’란 말은 애당초 어불성설이었다. 경증환자의 초음파·MRI 검사비까지 지원해 건보기금을 부실화한 ‘문재인 케어’와 함께 내년 건보료율이 처음 7%를 넘기도록 만든 원인이다. 지난 정부가 작년 7월 법정 최고금리를 20%로 내릴 때 전문가들은 좋은 의도와 달리 대부업체의 저신용자 대출을 위축시켜 불법 사금융 피해를 늘릴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문 정부는 정책을 강행했다. 올해 들어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기준금리를 끌어올리면서 조달금리가 급등하자 대부업체들은 신용등급이 낮고 담보가 없는 이들에 대한 대출부터 멈췄다. 3년 전 대학 강사의 고용 안정을 보장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으로 재정 부담이 커진 대학들은 전임 교원들의 강의를 늘리는 대신 시간강사의 고용을 줄였다. 제도권에서 대출을 거부당한 저신용자 십수만 명은 불법 사채의 수렁으로 내몰리고 있다. 건강보험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리던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은 절망에 빠졌다. 대학에서 강의하던 많은 시간강사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무책임하게 착한 척하는 정책의 슬픈 결과다. 구조개혁에는 시동도 못 걸고 낮은 지지율의 늪에 빠진 윤석열 대통령은 요즘 민생과 ‘약자 복지’를 강조하며 연일 착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정부가 확대한 지역화폐, 공공일자리 등 착한 정책 재원이 깎인 내년 정부 예산안을 놓고 “참 비정한 예산안”이라고 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도 여전히 착한 정책에 집착하는 정치인들에게 최근 작고한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이 남긴 금언을 곱씹어 보길 권한다. “작은 선함(小善)은 큰 악(大惡)과 닮았고, 큰 선함(大善)은 비정(非情)과 닮아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9-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이재명의 민주당’이 답해야 할 질문들[오늘과 내일/박중현]

    이번 주말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의 결과는 확대명(확실히 대표는 이재명)으로 굳어졌다. 대선 후보 시절이던 작년 11월 “민주당이라는 큰 그릇 속에 갇혀 가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민주당의 이재명이 아니라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만들어가겠다”고 했던 말이 대통령이 아닌 거대야당 대표가 됨으로써 실현되는 셈이다. 대선에 진 후보가 반년이 채 안 돼 당 대표가 되다 보니 새 정부 출범 100일을 넘긴 지금도 그의 대선공약은 유권자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예전의 낙선 후보들이 외유하거나, 한동안 침잠해 시야에서 사라진 사이 국민의 기억이 깨끗이 리셋된 것과 다른 점이다. 대표 경선의 관심이 친명, 비명의 충돌에 집중되면서 ‘이재명의 민주당’이 어떤 정책 색채를 띨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 의원이 토론회 등에서 현 정부 경제정책을 비판한 발언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선 전후로 급변한 나라 안팎 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진 국민의 눈높이와 이 의원의 시각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감지된다.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춘다는 윤석열 정부 세제개편에 대해 이 의원은 “부자들에 대한 감세” “슈퍼 리치, 초대(超大)기업에 대한 감세”라고 비판했다. 9월 국회에서 민주당과 정부·여당이 정면으로 부딪칠 사안이다. 문재인 정부가 올린 한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21.2%보다 높다. 한국보다 세율이 낮은 미국 대만 일본 등은 반도체, 배터리 산업을 유치, 육성하기 위해 세금 감면, 보조금 등 온갖 지원책을 쏟아붓고 있다. 치열한 글로벌 경제 전쟁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의 기업관과 이 의원의 기업을 보는 눈에는 메우기 힘든 격차가 있다. “고학력, 고소득자, 소위 부자라고 하는 분들은 우리(민주당) 지지자가 더 많다”는 논란의 발언을 보면 본심이 뭔지 더 헷갈린다. 15년 전 정해진 세율 때문에 인플레이션 시기에 저절로 세금이 늘어 중산층 실질소득이 줄고 있는데 이걸 조정하는 걸 부자감세라고 한다. 대선 때 완화를 약속했던 종합부동산세에 대해서도 민주당의 태도는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이 의원이 강조한 “부자들을 존중하는 사회”, “진보적 대중정당”은 무슨 뜻일까. 한편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정책기조를 반영했던 ‘소득주도 성장’, ‘1가구 1주택’이란 당헌의 표현을 바꾸기로 했다. 일단 멈췄지만 그 과정에서 이 의원의 대표공약이던 ‘기본소득’을 새로 넣자는 의견이 만만찮았다. 기본소득은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며 국민에게 한 차례 심판을 받은 공약이다. 되살릴 의지가 남아 있다면 이 의원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재정과 관련해선 “국가채무비율이 100% 넘으면 문제가 생기나”라고 하던 생각을 이 의원이 바꿨다는 징후가 없다. 그보다는 감세로 세수가 줄면 지역화폐, 공공 일자리에 쓸 돈이 줄어들 걸 걱정하고 있다. 이미 한국의 나랏빚은 1000조 원을 넘었고, 재정을 방만히 운영한 신흥국들은 경제파탄을 염려하는 상황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 정부의 막대한 경기부양책이 야기할 인플레 효과를 자신이 과소평가했다고 공개 사과했다. 미국의 긴축, 계속되는 무역수지 적자로 1300원 선을 넘은 원-달러 환율을 보면서 이 의원은 여전히 “우리나라도 기축통화국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할까. ‘누가 되든 반드시 추진하자’고 대선 후보들이 약속했던 연금개혁에 대한 이 의원의 생각이 뭔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돼 있는가.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8-2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박중현]정치로 까먹은 점수, 정책으로 메울 순 없다

    ‘장관들이 국민이 감탄할 정책을 쏟아내 분위기를 확 바꿔줬으면….’ 지난달 20일 윤석열 대통령이 “스타 장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안 보인다는 말이 나와도 좋다”고 했을 때 속내는 이런 것 아니었을까. 새 정부의 진심이 담긴 정책이 국민 관심사로 떠올라 도어스테핑, 인사 논란, 여당 내홍으로 깎아먹은 점수를 만회하길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을 전후해 벌어진 일들은 그런 바람과 많이 달랐다. 대표적 사안이 지난달 14일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채무조정 지원 방안이다. 신용 낮은 청년채무자의 대출이자를 최대 절반까지 깎아주고, 3년간 원금 상환도 미뤄주는 프로그램이 특히 논란이 됐다. 금융위로선 과거 카드사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그랬듯 어차피 한 번은 치르고 넘어가야 할 대규모 채무조정이고, 정부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는 2030세대의 마음을 돌리는 데 도움도 된다는 심산으로 서둘러 이 방안을 내놨을 것이다. 문제는 청년들마저 “빚을 내 주식, 가상화폐에 투자해서 날린 돈을 왜 세금으로 메워 주냐”며 반발한 것이다. ‘공정’에 한없이 민감한 청년들의 정서를 읽지 못해 생긴 실책이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가 선수들 동의도 없이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추진하다가 청년층의 반발에 부딪쳐 허둥대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금융위, 금융감독원, 검찰이 함께 내놓은 공매도 대책도 뒷말이 많다. 코로나19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공매도를 통제한 나라는 한국뿐이고, 앞으로 증시에 더 많은 외국 자금을 끌어들이려면 공매도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게 시장의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도전 중인 이재명 의원이 공매도를 싫어하는 개미투자자를 의식한 듯 “한시적 공매도 금지”를 옹호한 며칠 뒤 정부 대책이 나왔다. 공매도 전면 금지가 아닌 건 다행이지만 검찰이 불법 공매도를 응징한다는 발표는 ‘검찰 공화국’ 이미지를 더 강화했다. 최근엔 교육부가 취학 연령을 만 5세로 1년 앞당기겠다고 발표했다가 학부모, 교육계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에 부딪혀 나흘 만에 발을 빼는 일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 초기 초등학교 조기 입학 방안을 불쑥 꺼냈다가 물러섰던 일의 판박이다. 대통령실이 각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국민제안을 모아 정책화하겠다고 했다가 클릭 수 조작 등이 감지됐다는 이유로 취소한 것 역시 어이없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보름 사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해당 부처들로부터 대통령이 직접 보고받고 관심을 표한 사안들인데 대체로 공론화 과정이 부족했고, 어느 지점에서 반발이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가 허점을 찔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부 캐비닛에 묵혀 있던 정책을 급히 꺼낸 듯 정책 소비자의 급변하는 정서와 시류를 읽지 못하는 공무원 특유의 ‘정책 감수성’ 부족이 느껴진다. 정부의 ‘정치 성적’과 ‘정책 성적’은 비슷해야 정상이지만 한국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소득주도성장, 부동산 정책 실패에도 40%대 지지율을 끝까지 지킨 문재인 정부가 증거다. 극단으로 갈라진 좌우 진영, 세대 간 의견 차이가 원인일 것이다. 국민들도 ‘밥 먹는 배 따로, 빵 먹는 배 따로’ 식으로 정치와 정책을 별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 빠르게 가” 식으로 공무원들을 채근하면 ‘정책 사고’가 반복돼 정부의 신뢰만 하락한다. 임기 안에 반드시 결과를 내야 할 노동 연금 교육 재정 등 큰 개혁의 동력도 약화될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8-0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일자리 풍년, 기이한 불황[횡설수설/박중현]

    “매달 40만 개 일자리가 창출되는 지금은 경기침체가 아니다.”(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물가를 잡으려면 5% 이상 실업률이 5년은 이어져야 한다.”(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 최근 미국 전현직 재무장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기침체(recession) 논쟁의 핵심 쟁점은 일자리다. 각각 조 바이든, 빌 클린턴의 민주당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맡은 둘은 같은 ‘신케인스 학파’로 경제를 보는 시각이 같은데도 이 부분에선 한 치 양보 없이 대립 중이다. ▷2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1분기에 이어 마이너스로 나타나자 논란은 더 치열해졌다. 통상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경기침체로 보지만 바이든 정부와 옐런 장관은 실업률을 근거로 부인하고 있다. 미국 실업률은 지난달까지 넉 달 연속 3.6%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4% 미만 실업률은 이직 준비자의 마찰적 실업만 존재하는 완전고용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 경기침체를 공식 판정하는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12차례 경기침체에서 매번 실업률은 6% 이상으로 오르고 근로자 임금은 하락했다. 반면 지금은 기업이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임금이 오르는데 침체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이 기이한 현상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고용이 충만한 경기하강(jobful downturn)’이라고 표현했다. ▷수수께끼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코로나19 이후 풀린 유동성 때문에 저축, 자산가치가 늘어난 미국인이 일을 덜 한다는 설, 베이비부머들이 인생관을 바꿔 서둘러 퇴직해 근로자가 부족하다는 분석, 긴축 속도가 너무 빨라 실물경기와 시차가 생겼다는 설명 등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용 없는 성장’의 정반대지만 ‘고용과 성장이 따로 논다’는 면에선 유사한 현상이란 해석도 있다. ▷한국도 사정이 비슷하다. 식당, 카페들은 종업원을 못 구해 영업시간을 줄이고, 알바 중개 플랫폼에는 ‘사람을 찾아 달라’는 주문만 쌓이고 있다. 중소기업 생산직, 알바 일자리는 MZ세대 눈높이에 맞지 않고, 원할 때 필요한 만큼 일할 수 있는 배달 일자리 등이 늘어난 게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 정부가 만든 세금알바 등도 경기와 실업률의 괴리를 키웠다. ▷경기침체냐 아니냐, 침체 강도는 깊을까 얕을까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건 저성장과 일자리 호황은 동시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계를 골라 내놓으며 경제 현실을 호도해온 과거 정부들의 행태를 고려하면 일자리가 넘쳐나는 경기침체에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8-0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박중현]칩4 동맹

    “8월까지 ‘칩4(Chip4) 동맹’ 참여 여부를 확정해 알려 달라.” 지난달 말 미국 조 바이든 정부는 한국 정부에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다. 칩4는 올해 3월 미국이 한국 대만 일본에 제안한 반도체 동맹이다. 작년 초 “21세기엔 반도체가 편자의 못”이라며 중국을 뺀 반도체 공급망 재편 의지를 밝힌 바이든 대통령이 이제 마감시간을 정해 한국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칩4 동맹은 미국이 추진하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전략의 산물이다. 설계 장비 생산 등 반도체 산업의 전 영역을 국경 안에 두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우방, 동맹국과 연합해 반도체 공급망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동맹이 완성되면 미국으로선 중요한 대중 견제 시스템을 확보하게 된다. ▷미국은 휴대전화, PC의 두뇌 역할을 하는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인텔 퀄컴 엔비디아 등 최고의 설계업체들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설계만 하고 생산은 해외 파운드리 업체에 맡긴다는 점이다. 파운드리 분야 1, 2위는 대만 TSMC(54%)와 삼성전자(16%)로 대만, 한국을 합한 비중이 80%다. 기억장치로 쓰이는 메모리 반도체에선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이 압도적이다. ▷설계, 생산에서 존재감이 없는 일본이 낀 이유는 장비산업의 큰손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장비 시장은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와 램리서치, 일본 도쿄일렉트론, 네덜란드 ASML 등 4개 업체가 7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장비 판매를 중단하면 대만, 한국 반도체 기업은 생산을 멈출 수밖에 없다. 미국 한국 대만 일본 등 4개국이 연합하면 석유업계에서 OPEC가 갖는 것 같은 영향력을 반도체 산업에서 발휘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 참여 시 중국의 반발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를 경험한 한국 기업들로선 반도체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중국 반응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립도 70%를 달성한다는 ‘반도체 굴기’를 추진하고 있는데 아직 30%에 못 미쳤다. SMIC 등 파운드리가 약진한다고 하지만 시스템반도체 점유율은 10% 수준이다. ▷대만, 일본은 이미 칩4 동맹 참여 의사를 밝혔지만 한국은 장고 중이다. 4개국이 함께 움직이면 중국도 한국만 표적 삼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미국의 ‘기술’과 중국의 ‘시장’ 중 하나를 굳이 골라야 한다면 기술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시장을 잃으면 다른 데서 개척할 수 있지만 첨단기술에서 단절되면 산업 경쟁력 자체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에 어려운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7-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박중현]‘국뽕’은 값이 비싸다

    얼마 전부터 서울 지하철이 다른 나라, 특히 일본 지하철보다 얼마나 훌륭한지 소개하는 영상을 유튜브가 추천하기 시작했다. 각국 지하철을 타본 서구 여행객들이 “한국 지하철의 쉬운 환승, 쾌적성, 저렴한 가격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이 다가가면 자동으로 작동해 전기를 절약하는 에스컬레이터가 놀라웠다”는 식이다. 나 자신도 몰랐던 ‘국뽕 취향’을 구글 알고리즘에 들킨 것 같아 좀 민망해진다. 교통카드 한 장으로 여러 지하철 노선과 버스를 갈아탈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한 한국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경쟁력이 높다. 운영 주체가 여럿이라 환승이 복잡하고 값도 비싼 일본, 낡아서 냉난방도 잘 안되는 미국, 유럽의 지하철과 비교하면 감탄이 나올 만하다. 문제는 이런 국뽕 콘텐츠들이 숨겨진 비용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7년째 요금이 묶인 서울 지하철은 매년 1조 원씩 적자를 낸다. 준공영제 버스 역시 연간 수천억 원 적자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지만 요금 인상, 노인 무임승차 혜택 축소 등 인기 없는 정책에 총대를 메는 정치인은 드물다. 어쩌다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국 최고”라고 칭찬하고, 유튜버들은 그런 모습을 콘텐츠로 만들어 돈을 벌지만 누적되는 적자는 결국 국민이 언젠가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그래도 외국인의 칭찬에 유독 약한 한국인들 사이에서 국뽕 콘텐츠는 인기가 높다. 부정적 감정, 경쟁심을 느끼는 나라와 비교한 콘텐츠는 카타르시스가 배가된다. 어깨 으쓱한 기분에 그치면 다행이지만 정부의 정책이나 정치가 이런 감정에 편승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불만을 품은 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 수출을 규제한 2019년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은 ‘죽창가’를 소환했고,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은 거북선 횟집을 찾았다. 일본 의류점 고객에게 유튜버들은 카메라를 들이댔고, 청소년들은 일본 필기구를 내버리는 영상을 올렸다. 반일감정을 자극해 ‘토착왜구’를 공격하는 건 정치적으로 손해 보지 않는 게임이었다. 이때 시작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자립 3년의 성과는 아직 결론 내기 어렵다. 일부 품목은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다른 많은 소재, 부품의 대일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그나마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형 고객을 놓칠 수 없었던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공장을 지은 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부랴부랴 수입처를 다변화하고, 대체품을 개발하는 데 기업들이 얼마를 썼는지는 집계된 적이 없다. 만만찮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대상이 중국으로 급선회했다. 중국을 빼고 자유민주 진영 국가끼리 글로벌 공급망을 짜려는 미국 움직임에 한국은 적극 동참하기로 했다.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중국을 통한 수출호황 시대는 끝났고, 중국을 떠나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대중 수출·수입 의존을 줄여야 한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쉽지 않아 문제다. 당장 식자재 가격이 오르자 ‘알몸배추 파동’ 후 줄었던 중국산 김치 수입이 사상 최대로 늘었다. 중국 폭죽 수입이 어려워지자 독립기념일 불꽃놀이 행사가 곳곳에서 취소된 미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가 둘인데 중국과 한국이고, 중국을 우습게 보는 나라는 딱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한국’이란 말이 있다. 국민 80%가 중국에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어 정치적 유혹도 있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국뽕의 비용을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7-1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박중현]‘주 52시간 근로’ 숨통 트기

    ‘판교 등대’ ‘구로 등대’ ‘오징어잡이 배’. 경기 성남시 분당구나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게임업체 빌딩들은 한때 이렇게 불렸다. 촉박한 게임 출시 일정을 맞추려면 밤샘근무가 예사여서 늘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 7월부터 단계적으로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단축된 뒤 오후 7시면 건물에 불이 꺼진다. 한국 게임업체들이 한 해 내놓는 신작 게임의 수와 출시 속도도 급감했다. ▷어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이란 제목으로 브리핑을 하면서 “주(週) 최대 52시간제의 기본 틀 속에서 운영 방법, 이행 수단을 현실에 맞게 개편하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인 ‘주 52시간 근무제 유연화’에 시동을 걸겠다는 신호다. 지금은 주 단위인 근로시간 규제가 노사 합의를 통해 월 단위로 바뀌고, 1∼3개월로 돼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도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주 52시간제 운영이 유연해지면 기업들은 인력 운용에 다소 숨통이 트이게 된다.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핵심 인력의 업무가 급증하는 반도체 등 첨단산업이나 게임 분야의 기업, 에어컨 생산·설치 등 계절성이 강한 기업들이 특히 반길 만한 변화다. 반면 소규모 게임업체 근로자들은 새로운 게임을 내놓을 때마다 회사에서 숙박하며 일하는 이른바 ‘크런치 모드’가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고 있다. ▷정보기술(IT), 금융 등 연봉이 높은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 개혁안 중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White-collar Exemption)’ 도입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정 연봉 이상 전문직에게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제도로, 미국에선 연봉 13만4004달러(약 1억7400만 원) 이상 근로자는 연장근로 시간에 제한이 없다. 네이버 직원 평균연봉은 작년 1억2915만 원에서 올해 10% 인상됐고, 카카오는 작년 1억7200만 원에서 올해 15%가 올랐다. 미국 기준으로 봐도 상당수 직원이 대상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선진국 중 연간 근로시간이 제일 길어 줄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 등 후발국과 경쟁도 포기할 수 없는 처지다. 중국 노동법상 법정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4시간이지만 많은 중국 기업들이 ‘99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기업들과 경합하려면 일이 몰릴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나중에 그만큼 쉴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1년 단위 총 근로시간 안에서 기업과 근로자가 협의해 근무 형태를 조정하는 일본, 프랑스의 제도를 참고할 만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6-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정권 따라 출렁대는 4대강의 운명 [오늘과 내일/박중현]

    류우익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에게서 ‘한반도 대운하 구상’에 대해 처음 들은 건 2006년 하반기 어느 날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운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집권 후 첫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가 설명한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의 첫인상은 ‘황당하다’는 거였다. 한강과 낙동강을 잇기 위해 조령산맥에 터널을 뚫고, 갑문과 리프트를 이용해 배가 산을 넘도록 한다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막대한 건설 비용만큼의 경제성을 확보하긴 어려워 보였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도 “부산에서 인천까지 배로 화물을 실어 나르는 게 훨씬 효과적”이란 의견을 냈다. 청계천의 성공을 발판으로 대권을 잡은 이 대통령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집권 초 대운하에 드라이브를 걸었다가 광우병 촛불시위로 지지율이 뚝 떨어진 뒤에야 포기하고 수자원 활용 중심의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전환했다. 2009년 말 착공된 4대강 사업은 2년 만에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바닥을 준설하고, 16개 보(洑)를 만들면서 임기 중 마무리됐다. 정권교체 같은 정권연장을 통해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을 곱게 보지 않았다. 단기간에 밀어붙인 부작용도 실제로 있었다. 건설업체 사장 출신 이 대통령의 ‘가격 후려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동원됐던 건설업체들은 손해를 줄이려고 담합을 했다가 막대한 과징금을 물었다. 환경단체들은 보 때문에 강물이 ‘녹조 라테’가 됐다고 비판했다. 좋아한 건 ‘22조 원짜리 자전거길’을 이용하는 라이더들 정도였다. 박 정부에서 4대강은 금기어가 됐다. 박 정부 임기 3년 차인 2015년 하반기 43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 닥치자 극적 반전이 시작됐다. 4대강 보에 모인 물이 필요해진 것이다. 국토교통부 공식 문건에 ‘4대강 활용 방안’이란 표현이 다시 등장했다. 야당 소속 지자체장도 4대강 물을 끌어 쓰자고 했다. 국토부 공무원, 관련 공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르는 홍길동 신세에서 이제야 벗어났다”는 말이 나왔다. 그렇게 4대 강은 복권(復權)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 탄핵 후폭풍이 4대강에 밀려왔다. ‘4대강 재(再)자연화’를 공약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보름도 안 돼 규모가 큰 6개 보의 상시 개방, 4대강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지시했다. 4대강 사업은 청산해야 할 적폐로 낙인찍혔다. 보를 개방해 강줄기가 약해지고 강바닥이 허옇게 드러났지만 환경론자들은 모래톱에 온 왜가리, 백로 사진을 찍어 올리며 “자연이 돌아왔다”고 환호했다. 지난주 환경부 금강홍수통제소는 4년간 물을 흘려보내던 공주보의 수문을 닫아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가뭄도 가뭄이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4대강 사업을 잘 지키겠다”고 약속했고, 6·1지방선거에서 여당 출신 세종시장이 당선됐기 때문이다. 지금 감사원은 4대강 사업이 아니라 ‘문 정부의 4대강 보 해체 결정’의 타당성을 감사하고 있다. 4대강 보가 완공된 게 11년 전이다. 그 사이 기후변화가 빠르게 진전돼 올해 전 세계는 최악의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미중 신냉전 속에서 반도체를 안보의 방패로 삼은 대만은 작년에 물 부족이 심해지자 농민이 쓸 물까지 반도체 업체에 제공했다. 이렇게 강산과 세계가 급변하고 있지만 4대강을 둘러싼 논란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끝없는 돌림노래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이젠 이념, 진영이 아닌 과학에 판단을 맡겨 4대강의 오염을 줄이면서 모은 물을 가장 효과적으로 쓸 방법을 고민할 때도 되지 않았나.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6-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박중현]‘문라이팅’ 말고 풀타임으로 일할 자유

    윤석열 대통령이 부친에게서 대학 입학 선물로 받아 검사가 된 뒤에도 들고 다니며 읽었다는 애독서가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다. 직접 고쳤다는 대통령 취임사에 ‘자유’란 말이 35번 들어간 데도 이 책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러시아에서 직업이 매력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흔히 불법적이거나, 아니면 법규에 저촉되지 않는 ‘부업’의 기회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모스크바에서 가구집기, 시설이 고장 날 경우 국영 수리점에 전화하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업자’를 고용하면 대개는 국영 수리점 직원일 게 뻔한 일이지만, 가구는 신속히 고쳐질 것이다.” 구소련 공산주의 계획경제의 비효율과 이중성을 꼬집은 내용인데 원문에 사용된 부업이란 단어는 ‘문라이팅(moonlighting)’, 부업하는 사람은 ‘문라이터(moonlighter)’다. 해가 떠 있는 낮에 하는 일이 본업이라면 밤에 달빛 아래서 하는 일이 부업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월광 소나타’를 쳤다는 전 청와대 대변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표현이기도 하다. 지난 정부에서 한국의 부업인구, 복수의 직업을 가진 ‘N잡러’는 크게 늘었다. 작년 월평균 부업인구 수는 50만 명을 넘어섰다. 부업하는 걸 감추는 사람이 적지 않아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기그(Gig) 이코노미’의 확산으로 부업이 늘어나는 건 세계적 추세지만 한국 부업인구는 노동자의 자발적 선택보다 정부 정책, 제도의 실패로 늘었다는 점이 문제다. 지난 정부 초 최저임금이 2년 만에 30% 가까이 급등하자 식당, 카페, 편의점 주인들은 주 15시간 이상 일하면 하루치를 더 얹어줘야 하는 주휴수당을 아끼려고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잘게 쪼갰다. 그 바람에 한곳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던 직원, 알바생들은 두세 곳 일터를 옮겨 다니는 N잡러가 됐다. 주 15시간 미만 초단기 근로자 수가 올해 4월 역대 최대인 154만 명으로 불어난 이유다. 경직적 주 52시간제가 중소기업에 적용되자 초과근무 수당이 줄어든 근로자들은 부업을 찾아 나서고 있다. 코로나19로 영업시간이 제한된 동안에는 자영업자 사장들도 생계유지를 위해 택배, 음식배달 오토바이를 몰아야 했다. 본업만으로 원하는 소득을 얻을 기회가 제도적으로 제한되면서 구소련에서 그랬듯 부업이 생계유지의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프리드먼은 자본주의 사회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본질적 경제적 자유로 ‘자기 소득을 어떻게 쓸지 선택할 자유’, ‘재산을 소유할 자유’와 함께 ‘자기가 소유한 자원을 가치관에 따라 사용할 자유’를 꼽았다. 신체, 두뇌가 유일한 자원인 노동자에게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는 자유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국회 시정연설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노동개혁’을 강조했다. 그런 기준으로 볼 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 터키에만 남아 있는 주휴수당은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뒤떨어진 제도다. 주 52시간제와 관련해 한국처럼 월 단위로 근로시간 제한을 맞추도록 하는 선진국도 거의 없다. 임금을 많이 받는 전문직 노동자는 근로시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게 세계적인 트렌드다. 대통령선거, 지방선거로 이어지던 정치의 계절은 끝났다. 코로나19도 진정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새 정부는 대선을 통해 약속한 노동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 조각난 일자리, N잡러를 양산한 각종 제도를 손봐 국민에게 마음껏 일할 자유를 돌려주는 게 그중 제일 급한 일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6-0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박중현]성공하고도 실패한 文의 ‘주류세력 교체’

    몇 주간 우리 사회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특이한 정권 교체를 경험했다. 후임 하는 일이 마뜩지 않다고 퇴임할 대통령이 불편한 감정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내비친 적은 없었다. 5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덕담하고 떠나는 게 정상인데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다음 정부는 우리 정부의 성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다시피 하는 가운데 출범하게 돼 우리 정부의 성과, 실적, 지표와 비교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어디 잘되나 보자’는 앙심이 느껴진다. 그래서 퇴임하는 날 청와대 앞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다시 출마 할까요”라고 한 말도 단순한 농담같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문 전 대통령의 캐릭터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기 전인 2017년 1월 펴낸 책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이유를 찾는 게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그는 “가장 강렬하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정치의 주류세력들을 교체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이라고 썼다. 주류 교체 의지는 취임 후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전직 대통령 둘을 감옥에 보냈고, 비주류였던 김명수 대법원장을 필두로 사법부 주류도 싹 바꿨다. 2020년 4·15총선에선 팬데믹으로 인한 ‘국기 결집 효과’와 재난지원금의 힘을 빌려 180석 거대여당을 키워냈다. “한국 사회의 주류가 산업화 세력에서 민주화 세력으로 완전히 교체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수사한 뒤에는 검찰 수뇌부까지 바꿨다. 권력 핵심부만 교체된 게 아니다. 실패한 경제정책으로 혹평받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세금 일자리 등은 지지세력 확장에 효과가 있었다. 최저임금 선상에 몰려 있던 20대 직장인들은 따로 임금협상을 안 해도 연봉이 5년간 40% 넘게 올랐다. 그중엔 여성이 많다. 20대 여성 58%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찍은 게 국민의힘의 반(反)페미니즘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금 일자리로 생계에 도움을 받는 노인도 수십만 명이다. 포퓰리즘 정책은 수많은 이해 관계자를 만들었다. 문 전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5년 만에 주류세력 교체와 지지층 확장에 모두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마지막 주까지 유지된 40%대 지지율이 그런 생각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정권 교체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 “저는 한 번도 링 위에 올라가 본 적 없다”고 답한 데에서 ‘대선에서 진 건 내가 아니다’라는 속내가 엿보인다. 그가 뭐라고 생각하든 ‘문재인의 주류세력 교체’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바로 그 주류에게 칼을 들이댔다가 고초를 겪고 물러난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됐다. 주류 교체를 목표로 폈던 편 가르기 정치, 정책들은 더 많은 국민들에게 환멸을 줬다. 지지세력만 바라본 규제 일변도 부동산 정책, 성장률을 깎아먹은 ‘소득주도 성장’은 ‘경제에 무능한 좌파’ 이미지를 강화했다. 문 전 대통령이 애지중지 키운 주류가 이젠 교체의 대상이다. 그들의 적폐를 새 정부가 낱낱이 파헤치길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거대 야당은 다음 총선까지 최소 2년간 국회를 쥐락펴락할 기세고,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공공기관장 257명은 바꿀 수도 없다. 정권 말 밀어붙인 ‘검수완박’은 자신들에게 손댈 생각도 말라는 뜻이다.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도 든다. 대통령이 작심하고 사회의 주류를 바꾸겠다고 나설 때 국민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그 끝은 또 얼마나 허망한지 이미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나.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5-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나쁜 엔低, 나쁜 원低 [횡설수설/박중현]

    한국과 일본의 화폐 가치가 요즘 경쟁하듯 하락하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255.9원으로 2년여 만의 최고 수준이었다. 같은 날 도쿄 외환시장의 엔-달러 환율은 20년 만의 최고인 131엔으로 상승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이달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란 전망에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원화, 엔화 가치가 나란히 시험대에 올랐다. ▷지금의 ‘엔저’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의 연장선에 있다. 2013년 아베 전 총리의 지명을 받아 취임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디플레이션 극복을 명분으로 마이너스 금리, 무제한 돈 풀기 정책을 10년째 유지하고 있다. 낮은 엔화 가치로 일본 수출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경제를 살리는 게 목적이다. ▷문제는 일본의 생산시설이 이미 해외로 대거 빠져나갔다는 점이다. 일본 자동차 기업 차량의 3분의 2가 해외에서 생산된다. 엔저의 수출 확대 효과가 크게 줄었다. 반면 천연가스, 원자재 등 수입 가격 인상 부담은 엔저로 배가되고 있다. 기대한 효과 대신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고, 수입품 값이 올라 일본 소비자만 가난해진다는 게 ‘나쁜 엔저’ 논란의 핵심이다. ▷엔저와 달리 ‘원저’는 한국 정부가 의도한 게 아니다. 달러 강세와 중국의 성장률 하락이 겹치면서 위안화를 따라 원화가 급락했다. 원저를 이용한 수출 확대로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했을 정도로 과거엔 원저가 수출에 호재였다. 지금은 경쟁국인 중국 대만 일본의 화폐 가치가 동시 하락해 수출 증대 효과가 희석되고 있다. 증시에서도 환차손을 피하려는 외국인들의 ‘셀 코리아’가 나타나고 있다. ▷원유,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3, 4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가 나면서 한국도 ‘나쁜 원저’를 고민해야 할 처지다. 작년 100대 기업의 해외법인 매출이 국내 매출과 맞먹을 정도로 한국 기업의 생산시설도 이미 해외로 많이 이전돼 수출 증대 효과가 줄었다. 미국, 유럽연합(EU)이 ‘자국 내 생산’을 강조하면서 반도체, 배터리 분야 신규 투자도 대부분 해외에서 이뤄진다. ▷일본은행은 최근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방향을 바꾸기도 어렵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6%로 금리를 올리면 정부 이자 부담이 폭증해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질 수 있다. 재정 사정이 일본보다 나은 한국은 금리를 올려 원화 가치를 지킬 수 있지만 막대한 가계부채 탓에 경기 침체가 우려된다. 서둘러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도 일본의 뒤를 이어 더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5-0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박중현]단순 노무직 찾는 청년들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나가쿠보 도루(長久保徹)가 1985년 자신의 노래에 사용한 ‘프리아르바이터(free+arbeiter)’란 말은 “취직의 틀에서 벗어났어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2년 뒤 취업정보업체 리크루트가 이 말을 줄인 ‘프리터’를 ‘원할 때 필요한 만큼 일하는 청년’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의 버블이 한창이어서 짧게 일하고도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 분석에 따르면 작년 한국의 15∼29세 청년 취업자 중 배달 판매 경비 등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는 청년의 수가 41만3000명이었다. 40만 명이 넘은 건 처음이고 전년 대비 증가율도 11.3%로 전체 청년 취업자 증가율 3.0%보다 훨씬 높았다. 양질의 일자리 취업이 어려워 비숙련 단기 일자리에 머물러 있는 프리터족(族)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같은 단순 노무직이라도 용돈 벌려고 일하는 것과 생계를 유지하려고 일하는 건 다르다. 일본의 프리터도 경기가 좋던 시절 취직을 거부하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높은 임금을 챙긴 1980년대 ‘거품기(期) 프리터’와 버블이 꺼진 1990년대 이후 취업이 안 돼 저임금을 받으며 생활비를 번 ‘빙하기 프리터’로 나뉜다. 지금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는 한국 청년들은 마음에 차는 직장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경향이 강하다. ▷청년의 단순 노무직 증가는 코로나19 이후 음식배달, 택배 등 배달 일거리가 급증한 영향이 크다. 유통, 배달업체들이 적자까지 봐가며 배달 속도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배달비가 건당 최대 1만 원까지 치솟아 배달 일만 해도 돈을 웬만큼 버는 청년이 늘어났다. 문재인 정부 5년간 41.6%나 오른 최저임금도 한몫했다. ▷대학진학률 70%가 넘는 한국 청년들의 ‘하향 취업’은 생산연령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 큰 손실이다. 20, 30대에 전문성과 숙련도를 높일 기회를 놓치면 나이 들어 청년층, 외국인 노동자와 질 낮은 일자리를 놓고 다투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일본에선 청년기에 프리터로 살다가 40, 50대에 부모 연금에 의지하는 ‘기생형 싱글’이 사회 문제다. ▷다행히 전문 기술을 쌓기 위해 전문대에 ‘유턴 입학’하는 대학 졸업자들이 늘고, 미취업 청년 대상으로 삼성이 진행하는 소프트웨어 교육에도 지원자가 몰린다. “평생 알바 하며 사는 게 낫지 않나”라는 청년들의 말은 아직까지 취업난에 지쳐서 하는 푸념에 가깝다. 이들이 탈진하기 전에 괜찮은 일자리를 더 만들고, 교육 과정도 손봐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4-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박중현]대한민국 포퓰리즘史 3대 장면

    #1. “40%의 근거가 뭡니까?” 2019년 4월 16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앞으로도 국가채무비율 40% 선을 유지하겠다”고 보고하던 홍남기 경제부총리에게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누가 봐도 돈을 더 쓰기 위해 나랏빚을 늘리자는 주문이었다. 건국 이후 지켜지던 ‘재정은 국가경제 최후의 보루’라는 정부 재정운영 철학이 이 질문 하나로 무력화됐다. #2.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를 드리기 위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21대 국회의원 선거 하루 전인 2020년 4월 14일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밝혔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된 지 3주 만에 소득하위 70% 국민에게 돈을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선거는 더불어민주당의 완승으로 끝났고, 나중에 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돼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씩 지원금을 받았다. #3. “새 정부 출범 100일 동안 50조 원을 투입해 정부의 영업제한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겠습니다.” 작년 11월 8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이렇게 약속했다. 이 밖에도 병사 월급 200만 원, 기초연금 10만 원 인상 등 공약 이행에 5년간 266조 원을 쓰겠다고 했다. 취임을 19일 앞둔 지금까지 재원 마련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최빈국에서 시작해 70여 년 만에 선진국 문턱을 넘었던 한국 경제의 쇠락 원인을 찾아 누군가 나중에 ‘대한민국 포퓰리즘의 역사’를 쓴다면 반드시 포함될 3개 장면이다. 한국은 후발국 중 드물게 큰 재정위기를 겪지 않았던 나라다. 좌파든, 우파든 역대 정부는 “국민이 원하는 건 다 주라”던 그리스 파판드레우 정부처럼 결정적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고, 포퓰리즘 정부란 비판은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랬던 한국이 3년 만에 확 달라졌다. 첫 장면의 주인공으로 꼽히는 게 문 대통령으로선 억울할 수도 있겠다. 복지 확대 약속에 쓸 돈은 부족한데 공무원들이 다른 선진국보다 낮은 40% 국가채무비율을 고집하는 게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40%를 “재정건전성의 마지노선”이라며 박근혜 정부를 비판한 건 4년 전 그 자신이었다. 무릇 역사에는 고정관념을 깨고 흐름을 바꾼 인물이 기록되는 법이다. 그가 물길을 안 텄다면 작년 말 대선을 치르던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국가채무비율 100%가 넘으면 문제가 생기나”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었겠나. 1차 재난지원금 지급 결정은 과단성 면에서 포퓰리즘사에 오래 남을 장면이다. 100년 만의 팬데믹이 문 대통령의 ‘헌정사상 최초’ 결정을 거들었다. 10조 원 넘는 돈을 선거 전날 국민에게 나눠주기로 결정한 이 시점을 시작으로 선거만 있으면 적자국채를 발행해서라도 추가경정예산을 짜는 게 관행이 돼 가고 있다. 윤 당선인의 ‘50조 원 공약’은 포퓰리즘 경쟁에서 늘 손해 보던 우파가 작심하고 공세로 돌아서 좌우 구분 없는 포퓰리즘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기초연금’ 공약으로 박근혜 정부 출범에 기여했던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의 손길이 느껴지긴 해도 결국 공약은 윤 당선인 것이다. “앞으로도 포퓰리즘 하겠다”고 장담하는 후보와 경합하면서 이 공약이 없었다면 0.73%포인트 차이 승리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의 신기원을 열었던 이재명 후보의 공약들이 선거 패배로 미수(未遂)에 그친 반면 윤 당선인 공약은 역사에 남는다. 그의 공약이 선거용 ‘할리우드 액션’이길 기대하며 표를 던진 유권자들은 이 장면이 미완(未完)의 역사로 남길 바라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4-2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박중현]영리병원

    20년 전 김대중 정부는 각종 규제를 대폭 풀어주는 경제자유구역을 지정하고, 이곳에 외국인이 투자하는 ‘영리병원’의 설립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의료법은 의사 개인과 비영리 법인만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경제자유구역 등에는 해외자본이 50% 이상 투자해 수익을 내는 병원을 세울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인 등 외국인 환자, 해외 의료쇼핑을 다니는 한국의 고소득층이 이곳에서 돈을 쓰게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의사 단체의 반발에 부딪혔다.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공공 의료체계가 무너지고 서민 의료비 부담이 커진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반대 때문에 10년이 지난 뒤에야 세부 시행규칙이 정비되고 공식 명칭도 ‘투자개방형 병원’으로 바뀌었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한국 건강보험은 적용이 안 되지만 내국인을 치료하지 못한다는 규정은 없다”고 했다. ▷2017년 중국계 뤼디(綠地)그룹이 설립허가를 신청한 제주 서귀포시 녹지국제병원은 ‘국내 1호 영리병원’이 될 예정이었다. 지역 여론의 반대가 있었지만 제주도는 국제 관광지로서의 위상 등을 고려해 ‘외국인만 진료한다’는 조건을 걸어 승인했다. 원래 계획과 달리 한국인 환자를 못 받게 된 병원 측은 이런 제한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며 개원을 늦췄다. 석 달이 지나도 병원이 문을 열지 않자 제주도는 2019년 허가를 취소했다. ▷제주지방법원이 이달 5일 내국인 진료 제한 취소소송 1심 판결을 내놨는데 병원 측이 이겼다. “진료 대상을 제한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따로 제기된 병원 허가취소 무효화 소송도 올해 1월 병원이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다만 모든 소송을 병원 측이 이겨도 영리병원이 문을 열긴 어렵다. 이미 지분 대부분을 한국 기업에 팔았기 때문이다. ‘1호 영리병원’ 등장까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최초 작명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동네의원, 종합병원도 돈 버는 건 마찬가진데 ‘영리’라는 말 때문에 ‘의료를 돈벌이 수단으로 본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돈 많은 사람만 좋은 치료를 받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정서도 걸림돌이다. ▷대다수 선진국에선 값이 싸지만 서비스 수준이 낮은 공공의료와 별도로 비싼 비용을 내야 하지만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리병원이 공존한다. 병원에 대한 투자가 늘면 의사의 보수가 올라 낮은 건강보험 수가 때문에 나타나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 기피 현상을 줄일 수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의사와 자본이 연결되면 ‘아시아 의료허브’의 실현이나 고급 일자리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문제가 아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4-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박중현]성공한 한국은행 총재 만들기

    “아무래도 잠재성장률이 5%가 안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직원들 시켜서 시스템을 다시 돌리고 있어요.” 2003년 9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당시 한국은행 조사국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임 김대중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발급 기준을 지나치게 완화한 탓에 신용불량자가 폭증하는 ‘신용카드 사태’가 시작되고, 외환위기 이후 눌려 있던 노사분규까지 폭발하고 있었다. “잠재성장률을 7%로 끌어올리고, 10년 안에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성장 공약은 첫해부터 삐걱거렸다.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한 나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잠재성장률이다. 지금은 2% 안팎 잠재성장률에 익숙해졌지만, 1998년 외환위기로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가 이듬해 11.5% 플러스로 돌아서 고속성장을 계속하던 당시 ‘5% 붕괴’는 경제의 기초체력에 큰 탈이 났다는 뜻이었다. 며칠 후 익명의 ‘한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잠재성장률 4%대 예고…한국 저성장 시대 진입’이란 제목의 1면 톱, 3면 전면 기사를 썼다. 비판적 보도에 대한 정권의 반응이 날로 과격해지던 시절이었다. 신문이 배달되자 한은에선 큰 소동이 벌어졌다. “사실무근이다. 한은 관계자 중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자료가 기자실에 배포됐다. ‘정권 실세’ 청와대 관계자가 한은 부총재에게 전화해 “당장 부인 보도 자료를 내고 발설자를 색출하라”고 주문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래도 기자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취재원을 찾아낼 순 없었다. 박승 총재 등 당시 한은 수뇌부도 적발되면 인사 등에서 불이익을 당할 게 뻔한데 국가 경제를 걱정했다는 이유로 발언자를 찾아낼 의지는 없었을 것이다. 석 달 후 한은은 ‘한국 경제의 장기 성장기반 확충을 위한 과제’란 제목의 보고서를 슬그머니 내놨다. “2000∼2003년 잠재성장률은 4.8%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한 줄 들어 있었다. 그해 한국은 3.1% 성장했다.11년이 지난 2014년 박근혜 정부 2년 차에 한은 총재에 취임한 이주열 ‘전 조사국장’을 만났다. “총재가 되기까지 두 번 큰 위기를 겪었는데, 그중 한 번이 당신이 쓴 기사”라고 말해 같이 웃었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서 연임됐다. ‘소득주도 성장론자’를 요직에 대거 중용한 현 정부도 중앙은행 총재까지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비주류로 바꿀 자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임기 8년이 편치만은 않았다. 우파, 좌파 가리지 않고 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집권 세력은 한은에 무리한 주문을 했다. 세월호 사고 후 침체된 경기를 끌어올리려고 박근혜 정부는 한은에 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현 정부 여당 국회의원들은 재정을 퍼 쓰는 것도 모자라 한은이 국채를 인수해 돈을 더 찍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흔들리는 듯한 순간도 있었지만 미국의 긴축에 앞서 작년 8월부터 금리를 올리는 등 ‘인플레 파이터’로서 본분을 지켜냈다. 오늘로 이 총재의 임기가 끝난다. 후임은 공석이다. 신구 권력의 인사권 기 싸움 끝에 이창용 전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국장이 후보로 지명됐지만 인사청문회 문턱을 넘어야 한다. 이견이 별로 없는 준비된 총재감인데도 정치적 부담을 지고 출발해야 하는 게 안타깝다.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는 커지고, 몇 년 뒤 잠재성장률 1%대가 무너질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미국의 대공황,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에는 중앙은행의 실패한 통화정책이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은의 신임 수장이 반드시 성공한 총재가 돼야 하는 이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3-3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박중현]현대차 중고차 판매 허용

    미국 온라인 중고차 판매업체 카바나는 2015년 11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5층 빌딩 크기의 ‘자동차 자판기’를 공개했다. 인터넷에서 중고차의 3차원 영상, 수리 내용 등을 보고 차를 고른 고객은 이곳에 찾아와 자기 이름이 새겨진 동전을 발급받는다. 동전을 투입구에 넣으면 투명 빌딩 안에 주차된 차를 로봇 팔이 꺼내준다. 7일 이내 반품도 가능하다. 코로나19로 중고차를 살 때도 대면거래를 꺼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카바나는 ‘중고차 업계의 아마존’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렇게 중고차를 온라인으로 사고팔려면 판매자를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 소비자들의 중고차 시장에 대한 신뢰는 낮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최근 중고자동차판매업을 ‘생계형 적합 업종’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현대자동차, 기아, 한국지엠, 르노코리아, 쌍용차 등 완성차 업체들의 중고차 시장 진입 기회가 열린 것이다. 업체 대부분이 6개월 안에 ‘인증 중고차’ 사업에 나설 예정이다. ▷벤츠 BMW 테슬라 등 수입차 업체들은 이미 국내에서 인증 중고차 사업을 벌여 왔다. 신차 구매 고객이 이전에 타던 자사 중고차를 적절한 가격에 보상해 주고, 중고차는 수리해 보증을 붙여 판매한다. 신차 고객은 부담이 줄어 좋고, 중고 수입차를 원하는 고객은 안전한 차를 탈 수 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중고차 업계의 반발에 밀려 역차별을 받아 왔다. ▷소비자단체들은 완성차업체의 중고차 시장 참여를 환영하고 있다. 일부 양심적이지 못한 중소업체들이 미끼, 허위 매물을 인터넷에 올려놓고 이를 보고 찾아온 고객에게 비싸고, 품질 낮은 중고차를 파는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 5월에는 중고차 매매 사기단에 속아 할부로 트럭을 샀다가 빚을 감당하지 못한 60대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도 있었다. ▷현대차는 첫 구입 후 5년, 주행거리 10만 km 미만이면서 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자사 차량만 거래하고, 중소업체와의 상생을 위해 시장점유율도 2024년까지 전체의 5.1%를 넘기지 않을 방침이다. 작년 한국의 중고차 거래 대수는 387만2000대로 신차 판매 대수의 2.2배다. 완성차 업체의 진입으로 소비자의 신뢰가 높아지면 시장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다. ▷3년 전 나왔어야 할 정부의 결정이 늦어지면서 중고차 시장 발전이 지체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기업에 밀려 고사할 것이란 중고차업계의 주장에 정부가 너무 눈치를 봤다는 것이다. 상생만큼 중요한 게 소비자의 편익이다. 카바나처럼 새로운 아이디어, 판매방식으로 도전하는 ‘중고차 벤처’의 등장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3-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한은 총재 지명[횡설수설/박중현]

    독립된 중앙은행은 수많은 호황과 불황을 겪은 자본주의 체제가 경기 급등락을 줄이기 위해 고안한 발명품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흔히 낮은 금리를 통해 경기를 더 띄우고 싶어 하지만 ‘파티의 흥을 깨는 사람’에 비유되는 중앙은행은 물가 인상 가능성이 보이면 금리를 올릴 준비부터 하기 때문에 긴장관계가 불가피하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파격적 금리 인하를 기대하고 임명한 ‘비둘기파’지만 조 바이든 정부에선 인플레이션에 맞서 긴축을 추진하는 ‘매파’로 변신하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70) 임기가 이달 31일 끝난다. 이 총재는 코로나19 사태 발생 직후인 재작년 3월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0.5%포인트 내려 경기 하강 속도를 늦추고, 미국 금리 인상에 앞서 작년 8월부터 금리를 올려 상황에 대처해 왔다. 한은 설립 이후 최장기(43년) 근속자, 박근혜 정부 때 취임해 문재인 정부에서 연임된 44년 만의 8년 연임 총재 기록도 세웠다. 다만 급등한 집값을 잡는 데 금리라는 ‘소 잡는 칼’을 지원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총재는 올해 말까지 기준금리가 1.75∼2.00%로 오를 것이라는 시장의 기대에 무게를 실으며 향후 2, 3번 정도 금리를 더 올릴 것이라고 예고한 상태다. 하지만 차기 총재가 임명된 뒤 이 같은 예고가 그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급등하는 물가를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은 불가피하지만 고유가 고환율에 우크라이나 사태가 겹친 복합 위기를 감안하면 통화당국은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정권 교체와 맞물려 통화정책 수장 자리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차기 한은 총재 4년 임기 대부분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겹친다. 문 정부가 지명권을 고집할 경우 마찰이 발생해 차기 총재 인선과 취임이 크게 늦어질 수 있다. 다행히 윤 당선인이 후보를 제안하고, 현 청와대가 인사 검증과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를 대행해 문 대통령이 지명하는 식으로 공백을 최대한 줄이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긴박한 경제 안팎 사정을 고려할 때 차기 한은 총재에겐 어느 때보다 탁월한 식견과 실력이 요구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유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무역수지, 성장률 전망이 흔들리고, 미국 금리 인상을 앞두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등 대외 환경과 국내 경제가 긴밀히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작년 말 종료된 한미 통화스와프를 재개하려면 탄탄한 국제 네트워크도 필요하고, 정부의 포퓰리즘 요구를 견제할 강단도 필요하다. 현 정부든, 차기 정부든 ‘자기 사람 챙기기’ 같은 사심(私心)을 끼워 넣으면 곤란하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3-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박중현]경제정책 작명

    Y노믹스, 윤노믹스, SY노믹스, 윤석열노믹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20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가 추진할 경제정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아직 차기 정부 정책의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나지 않아 공식화된 이름도 없지만 세간에선 예전 작명법에 준해 다양한 이름을 만들어 붙이기 시작했다. ▷국가 수장의 성(姓), 이니셜에 이코노믹스(경제학)를 결합한 ‘∼노믹스’의 원조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레이건 정부는 2차 오일쇼크로 침체에 빠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정부 역할을 축소하고, 세금을 낮추는 레이거노믹스를 1980년대에 추진했다. 조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제품을 자국 내에서 생산하도록 유도하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대폭 늘리는 바이드노믹스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일본에선 아베 신조 총리 때 아베노믹스부터 총리 이름을 경제정책 작명에 쓰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강조하며 사용한 DJ노믹스가 처음이다. 노무현 정부는 7% 성장론, 균형발전 등이 담긴 노(盧)노믹스, 이명박 정부는 세금 인하와 규제 완화를 핵심으로 한 MB노믹스를 추진했다. 지하경제 양성화 및 재정·세제 구조조정을 통한 복지 확대를 추진한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근혜노믹스 또는 박근혜노믹스로 불렸다. 하지만 출범 이듬해 세월호 참사 후 경기가 가라앉자 최경환 경제부총리 주도의 종합 경기부양책이 나왔고, 그때부터 초이노믹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임기 초 J노믹스로 명명됐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확대 등으로 근로자 소득을 높여 경제를 키운다는 소득주도성장이 핵심이다. J노믹스란 이름은 현 정부 첫 대통령경제보좌관을 지낸 김현철 서울대 국제경제학부 교수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J’는 대통령 이름 첫 자의 이니셜일 뿐 아니라 글자 모양처럼 처음엔 잠깐 경제가 주저앉더라도 잠시 뒤 빠르게 우상향하며 살아날 것이란 기대가 담긴 작명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 당선인은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꼽을 만큼 자유시장 경제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그의 공약 대부분은 실패한 현 정부 부동산, 일자리, 탈원전 정책에 대한 반작용 성격이 강하다. 경쟁적으로 쏟아낸 포퓰리즘 공약까지 뒤섞여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과 비전이 아직 뚜렷하지 않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걸러낼 건 걸러내고, 더할 건 더해 전체 그림을 완성한 뒤 작명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3-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박중현]‘정치 손해’ 감수하는 리더가 ‘경제 미래’ 연다

    “다음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안 할 것 같았다. 정치적 손해가 가는 일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선언한 뒤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14개월간 이어진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노동계, 농민의 반대시위가 이어졌고 반미(反美) 성향 지지층이 이탈했다. 2007년 12·19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고 5일 후 열린 청와대 회의에 참석한 경제부처 장관들은 “우리 정부가 시작한 일이니 쇠고기 수입 문제까지 털고 가자”고 주장했다. 그해 초 광우병과 관련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한국이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자 미국이 반발하면서 한미 FTA 협상은 결렬 위기를 맞았다. 3월 노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전화해 문제 해결을 약속하고 4월에 협상이 타결된 만큼 그 약속을 지키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날 회의의 결론은 ‘쇠고기 문제는 차기 정부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나를 여기서 더 밟고 가려고 합니까”라며 감정이 격해져 눈물까지 내비쳤다고 회의 참석자들은 전한다.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기로 마음 먹었어도 막상 정권이 교체되자 노 대통령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다. 결국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최대 정치 리스크가 됐다. 이 대통령은 한미 FTA 비준을 앞당기기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을 결정했다가 취임한 지 몇 달도 안 돼 광화문 촛불시위에 직면했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들을 바라보며 이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곧이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한미 FTA에 부정적인 오바마 정부의 태도 때문에 지연되다가 결국 임기를 1년여 남긴 2011년 말 한나라당이 국회 비준동의안을 단독 처리해 이듬해 3월 15일 발효됐다. 다음 주 발효 10주년을 맞는 한미 FTA의 성적표는 흠잡을 데가 없다. 한국의 대미(對美) 수출액은 10년 전보다 70% 늘었고, 이 기간 대미 연평균 수출액 증가율은 6%로 전체 수출액의 3배 속도였다. 자동차, 반도체 수출이 급증했고 원유 수입은 늘었다. 최대 걸림돌이던 농축수산물은 수입이 30% 증가하는 동안 수출이 82%나 급증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작년 수입 쇠고기 중 55%로 광우병 공포는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노무현이 판을 깔고 이명박이 마무리한 한미 FTA의 과실은 뒤이은 정부들이 거뒀다. 너무 좋은 성과 때문에 탈까지 났다. 미국 쪽의 큰 무역적자를 문제 삼은 트럼프 정부는 한미 FTA를 깰 것처럼 하면서 개정을 요구했다. 2012년 대선 때 ‘한미 FTA 재협상’을 공약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 자동차 수입 등에서 일부 양보하면서까지 FTA를 지키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은 이렇게 좌파, 우파 정부의 정치적 수난을 거름 삼아 만들어졌다. 하지만 10년 번영의 주춧돌이 됐던 ‘FTA 선도국가’ 한국의 위상은 요즘 흔들리고 있다. 미중 경제패권 전쟁, 강대국의 자국 이기주의로 인한 신(新)냉전 속에서 한국은 어느 편에 설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국내적으론 노동, 규제, 연금 개혁 등 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20대 대통령 당선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 중 어느 하나 녹록한 게 없다. 그렇더라도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이 그랬듯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디뎌야 한다. 정치적 손해, 때로는 눈물까지 감수해야 하더라도.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3-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