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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악관에서 1일 진행된 국빈 만찬 테이블을 장식한 꽃은 ‘피아노 장미’였다. 국빈으로 초청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라는 점에 착안해 선택한 품종이었다. 버터에 구운 랍스터와 캐비아, 마멀레이드를 올린 소고기 스테이크, 수제 치즈 등 메뉴는 셰프들이 6개월 전부터 준비한 것들이다. 프랑스를 상징하거나 양국 인연을 강조하는 청·백·홍의 소품들이 만찬장 곳곳에 등장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해 “너무 공격적”이라며 불만을 쏟아낸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백악관의 극진한 대접이 무색할 만큼 직설적이었다. 대면 회담에서 담판을 짓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작심발언이었다. 결국 바이든 대통령이 IRA의 결함을 인정하며 수정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놨으니 마크롱 대통령으로서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 셈이다. 지난해 미국의 오커스(AUKUS) 결성 과정에서 77조 원에 달하는 자국의 디젤 잠수함 수출 프로젝트가 허공에 날아간 것에 격분했던 그로서는 쌓인 앙금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IRA는 한국에 전기차 보조금 문제로 알려져 있지만, 법 전체로 보면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된 부분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태양광 패널과 풍력 터빈, 그린수소 생산시설 등 신재생 에너지 분야에 총 369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찌감치 탄소중립 목표를 설정하고 녹색에너지 기업들을 육성해온 유럽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아우디와 폴크스바겐 등을 다 합쳐도 미국 시장 점유율이 5%에 못 미치는 전기차를 넘어서는 문제인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나선 것은 유럽연합(EU)을 대신해 총대를 멘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가뜩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난, 인플레이션 등으로 유럽 전체가 경제 문제에 민감해진 시점이다. IRA로 인해 프랑스에만 100억 유로의 투자 손실이 발생하고 1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으니 유럽 전체로는 말할 것도 없다. EU 내에서는 대미 경제보복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동맹끼리 ‘무역 전쟁’이 날 판이다. ▷프랑스보다도 먼저 IRA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나라가 한국이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들이 잇따라 워싱턴을 방문해 줄기차게 수정을 요구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바이든 대통령과 이 이슈를 논의했다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마크롱 대통령이 앞장서는 모양새가 됐지만, 강력한 대미 압박으로 힘을 보태는 유럽의 우군을 얻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IRA 수정 발언이 립서비스로 끝나지 않게 주요국이 단단히 힘을 모아야 할 때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요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기업 공장을 방문할 때마다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혹은 ‘미국에서 만드는 미래’ 같은 글귀가 카메라에 잡힌다. 제너럴모터스와 지멘스, IBM 등의 생산 현장이 모두 그랬다. 연설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뒤로 이 글귀가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어김없이 걸렸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메릴랜드주 볼보자동차 공장에서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두 번 연속 외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하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29일(현지 시간) 미시간주에 있는 SK실트론CSS 공장을 방문한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첨단기술 기업의 생산 시설을 돌아다니며 미국 제조업의 부활과 일자리 창출 성과를 강조해온 행보의 연장선상이다. 그렇다 해도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 공장을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날 일정은 참모들의 아침 브리핑만 빼면 SK실트론CSS 방문 및 비행기 이동으로 하루가 채워졌다. 짧게는 10분 단위로 짜여지는 빡빡한 대통령 스케줄을 감안하면 상당한 시간 투자다. ▷미시간주는 한때 활발했던 자동차, 철강 산업이 쇠락해 버린 ‘러스트 벨트’ 중의 하나다. 주요 선거 때마다 격전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이런 최대 경합지의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다. 그레천 휘트머 주지사는 공화당 후보를 두 자릿수 차이로 누르며 재선에 성공했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극적인 승리를 가져다준 미시간주를 찾아 격려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녹슬었던 지역을 미래의 첨단 산업 도시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반도체 공장은 최적의 연설 장소다. ▷SK가 공들여 높여온 백악관 내 인지도는 이번 방문 성사의 또 다른 배경이었다고 한다. SK그룹이 현재까지 밝힌 대미 투자 규모는 520억 달러에 달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SK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 회장들에게 공개적으로 “생큐”를 연발했고, 특히 최태원 회장에게는 영어 이름인 “토니”라고 부르면서 수차례 친근감을 표시해 왔다. 올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0주년을 맞아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방문한 곳이 SK실트론CSS 공장이다. ▷이렇게 쌓인 신뢰는 ‘21세기의 쌀’이라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미 간 경제안보 협력을 다지는 바탕이 될 것이다. 점점 빡빡해지는 미국의 대중 기술 규제와 투자 제한 속에서도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숨 쉴 여지가 생길 것이란 기대감도 커진다. 제조업 시설을 빨아들이는 미국의 ‘아메리카 퍼스트’가 동시에 만만치 않은 도전이 되기도 할 것이다. 양국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협력의 최적점을 찾는 숙제가 남았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즐겨 읽는다. 왕좌의 권력 다툼 과정 등에서 부딪힌 역경을 이점으로 바꾸는 방법을 고전 병법서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늘상 자정 넘어서까지 일한다는 그는 경제부터 외교안보, 문화까지 전방위로 발휘하는 영향력 때문에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린다. 일부다처제 국가에서 부인을 한 명만 둔 이유도 “삶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네옴시티’ 건설은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사우디의 핵심 사업이다. 야심 찬 30대 개혁군주가 추진하는 지구 역사상 최대 도시 프로젝트다. 그는 네옴시티를 구상하면서 “나만의 피라미드를 갖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사막 위 도시의 하이라이트는 100% 친환경 에너지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이다. 더 이상 원유에만 의존하지 않고 미래 에너지 개발에 나서겠다는 젊은 지도자의 뜻은 확고해 보인다. 한 외신 인터뷰에서는 “유가가 30달러든 70달러든 신경쓰지 않는다”며 “그 싸움은 내가 나설 싸움이 아니다”라고 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야심 찬 프로젝트에는 한국 기업들이 대거 참여한다. 5세대(5G) 이동통신, 인공지능(AI), 도심항공교통(UAM) 같은 첨단기술이 요구되는 수조 원대 사업들이다. 그린수소 등 신재생 에너지 분야의 협력도 눈에 띈다. 한-사우디 ‘수소 동맹’이라는 표현이 벌써 등장했다. 1970, 80년대 ‘1차 중동 붐’이 한국 건설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일군 것이었다면, 이제는 기술과 사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업그레이드된 ‘2차 중동 붐’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사우디는 최고 60도의 더위 속에서 모래바람과 싸우며 자국의 고속도로와 항만을 지어준 한국 노동자들을 잊지 않고 있다. 몇 년 전 건설 사업들이 줄줄이 지연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사우디의 고위당국자들이 “한국인들이 다시 와서 마무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한 사실이 현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아버지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이 한국 기업들을 극찬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사우디는 신도시 계획을 세우면서 판교 테크노밸리를 참고 사례로 검토했다. ▷사우디가 2019년 해외 가수들의 콘서트를 처음으로 허용한 이후 가장 먼저 초청한 그룹이 BTS다. 빈 살만 왕세자의 자녀들이 K팝에 갖고 있는 관심이 작용한 결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자국에 노동자들을 파견했던 자원 빈국 한국이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한 저력을 높이 사고 있다고 한다. 경제 협력에 더해진 사회, 문화적 관심이 50년 만에 찾아온 두 번째 기회의 문을 더 활짝 열어줄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그랜저’는 과거 한때 부(富)의 상징이었다. 비즈니스에서 성공한 회장, 사장들이 타고 다닌다고 해서 ‘회장님 차’로 불렸다. 1986년 출고 당시 가격이 최고 2000만 원대 후반으로 소형 아파트 한 채 값과 맞먹었다. ‘모래시계’ 같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조폭 두목들이 타는 ‘형님 차’로도 알려졌다. 부유층 자제들이 “건방지게 그랜저를 가로막는다”며 차선 변경으로 시비가 붙은 다른 차 운전자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세대 그랜저는 모서리가 네모난 박스에 바퀴를 달아놓은 듯한 디자인 때문에 ‘각 그랜저’라고 불렸다. 곧은 직선의 디자인이 자칫 투박해 보일 수 있는 대형 차체에 강인하고 단단한 이미지를 심어줬다. 현대차가 어제 새로 선보인 7세대 그랜저는 36년 전의 이 모델 디자인을 곳곳에서 차용했다. 첨단 기술을 적용한 차량의 외관에 복고풍의 레트로 감성을 덧입혔다. 그랜저를 고급 국산차의 대표 모델이자 성공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기성세대의 향수를 소환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선다. 개인의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적 아이콘이자 한 시대의 경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랜저가 출시된 해는 한국이 아시아경기를 치러내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이라는 굵직한 국제 행사 개최를 앞둔 때였다. 가파른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부가 팽창하던 시기, 고층 아파트의 숲이 들어서고 집집마다 컬러TV가 놓였다. ‘마이카’의 개념이 생겨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자동차로 재력을 과시하고자 했던 욕구가 치솟은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5000달러에 육박하는 2022년, 자동차가 반영하는 시대상도 변했다. 운전기사가 모는 시커먼 대형차보다는 성공한 젊은 사업가가 모는 컬러풀한 고급 세단이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더 주목받는다. 시대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브랜드의 진화도 계속된다. 6세대를 거치며 대중화돼온 그랜저의 주 소비층 연령은 5060세대에서 3040세대로 낮아지고 있다. 젊어진 감각으로 국내 시장을 공략 중인 럭셔리 외제차들과의 경쟁이 치열하다. ▷30여 년 전의 자동차 콘셉트를 되살리는 시도는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 파워와 성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세계시장을 누비는 한국 차의 품질은 변변한 자체 기술 하나 없어 일본 기업과 손잡아야 신차를 개발할 수 있었던 1980년대와는 급이 달라졌다. 그래도 자율주행을 비롯한 첨단기술 개발의 길은 여전히 멀다. 과거 유산에 바탕을 둔 복고 열풍 속에서도 자동차 업계의 시선은 더 앞선 미래에 박혀 있어야 할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서울역에서 깡통을 들었던 때 생각이 나서….” 앤디 김 미국 연방 하원의원의 아버지 김정한 씨는 아들의 후원회를 지켜보며 행사장 뒤에서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다. 이민 1세대인 아버지 김 씨는 고아원 출신으로 한때 길거리 동냥을 했을 정도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자신이 미국에서 유전공학박사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지만, 아들이 정치권에서 이뤄낸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소회는 남달라 보였다고 한다. ▷한국계 미국인 하원의원 4명이 11·8 중간선거에서 모두 연임에 성공했다. 앤디 김의 경우 26년 만에 탄생한 한국계 3선 기록이다. 지역구 관리를 넘어 주요 법안을 발의하고 각종 위원회에서 보폭을 넓히며 입법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게 되는 단계다. 공화당의 영 김, 미셸 스틸 박 의원과 민주당의 매릴린 스트리클런드 의원도 재선 고지를 가뿐히 넘었다. 한국명 ‘순자’인 스트리클런드 의원이 2년 전 첫 취임식에서 선보인 한복을 이번에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의회의 문턱은 높다. 특히 백인 남성이 주류인 공화당에서 비(非)백인 이민자들은 발붙이기가 쉽지 않다. 200명이 넘는 공화당 하원의원 중 흑인과 아시아계는 단 2명씩뿐이다. 이 중 아시아계 두 자리를 모두 한국계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영 김과 미셸 스틸 박은 아시아계를 겨냥한 혐오 범죄에 맞서 싸우던 지난해 CNN에 함께 출연해 “우리는 독종이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타적이고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공화당 내에서 이들의 존재는 상징적이다. ▷영 김은 차기 하원의장으로 유력한 케빈 매카시 공화당 원내대표가 직접 챙기는 의원으로 소문나 있다. 당내 넘버 3였던 리즈 체니 의원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탄핵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지도부에서 축출됐을 때 영 김은 후임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초선이었지만 21년간의 의회 보좌관 경력을 지닌 그의 체급은 3, 4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앤디 김은 향후 외교위원회 동아태소위원장 같은 의회 주요 직책에 오를 가능성이 거론된다. 한국계 의원들의 입지가 탄탄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한반도 관련 이슈에 대해 이들이 내는 목소리는 작지 않다. 영 김은 북한 인권 및 비핵화 관련 법안과 결의안을 지속적으로 발의하고 있다. 외교위, 국방위 소속인 앤디 김이 청문회에서 진행하는 북한, 한미 동맹 관련 질의는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미셸 스틸 박과 스트리클런드는 “한국계 미국인의 목소리를 키우고 한미 양국 간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계의 ‘매운맛’을 보여주고 있는 의원들의 더 많은 활약을 기대한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지구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 오시네요.” 2009년 영국 런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오찬장에 들어서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당시 브라질 대통령을 보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주변의 정상들에게 던진 소개말이다. 집권 2기 후반부, 전례 없는 경제 성과에 힘입어 룰라의 지지율이 80%를 넘어설 때였다. ▷해외 정상들도 부러워한 록스타급 인기 속에 대통령궁을 떠났던 그의 퇴임 후 추락과 재기 과정은 롤러코스터급이다. ‘세차 작전(Operation Carwash)’으로 불린 검찰의 부패 수사에서 수백억 달러의 뇌물과 돈세탁 혐의가 드러난 그는 2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절차적 문제로 2019년 재판 무효 판정을 이끌어낼 때까지 부패 정치인 딱지를 달고 580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77세 나이에 선거판에 다시 뛰어든 그는 그제 대선에서 브라질의 첫 3선 대통령이라는 역사를 쓰며 12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브라질의 정권 교체는 라틴 아메리카 ‘핑크 타이드’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아르헨티나, 멕시코, 콜롬비아 등 7개 주요국 중 6개국이 이미 진보 정권으로 교체된 상태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악화한 빈부 격차와 실업이 좌파 물결을 일으킨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브라질의 경우 ‘열대의 트럼프’로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심판론도 작용했다. 그의 극우 정권을 받쳐온 농업 자본과 보수 기독교, 군부의 이른바 ‘3B(beef, bible, bullet)’는 힘을 쓰지 못했다. ▷룰라가 완성한 중남미 제2의 ‘핑크 타이드’는 2000년대 초반의 첫 번째 물결과는 많이 다를 가능성이 높다. 첫 번째 ‘핑크 타이드’는 저금리 기조 속 경제 붐으로 정부가 부담 없이 재정 지출을 늘리던 시기였다. 반면 지금은 미국발 금리 인상과 인플레이션으로 정책적 여력이 크게 줄어든 데다 팬데믹 여파도 지속 중이다. 사회적 불안과 양극화 심화도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좌파의 물결이 과거보다 훨씬 짧고 불안정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룰라는 ‘남미 좌파의 대부’로 불리지만 집권기 그의 정책은 실용주의를 앞세운 중도에 가까웠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나는 ‘걸어 다니는 변형 동물’이 되고자 한다. 바뀌는 사실관계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걸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내외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 ‘룰라노믹스’에 대한 국민의 향수가 미래 기대치까지 한껏 높여 놓은 시점이다. 룰라가 집권 3기 정책적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국부를 키웠던 그의 화려한 과거 성과까지 한순간에 흔들릴지 모른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우리가 꿀 빨았던 세대라고요?” 세대갈등이 다시 거세지던 지난해 4050세대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기성세대를 향해 거칠어지는 2030세대의 불만과 비판이 중장년층의 논쟁을 부추긴 것이다. 한쪽에선 혹독한 IMF 구조조정 경험과 구직난 등을 거론하며 “후세대가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고 발끈하는 반응을 내놨다. 반면 ‘한강의 기적’을 이룬 산업화 시대 성장기에 올라타 자산을 축적해 왔으니 “꿀 빤 세대가 맞지 않냐”는 반박 의견들도 많았다. ▷한국의 40대와 50대는 전체 연령의 32.5%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세대다. 이 세대가 보유한 부동산 등 자산은 전체의 53.3%로 절반을 넘는다. 국가경제 측면에서 ‘경제의 허리’이자 인생 주기에서도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다. 동시에 자녀 교육과 부모 부양의 부담을 양쪽에서 떠안아야 하는 고단한 ‘샌드위치 세대’이기도 하다. 자산이 많은 만큼 이 세대가 짊어진 부채 비율은 60.2%(948조 원)에 달한다. ▷요즘 4050세대 중에는 젊은 세대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가 적잖다. 정부가 청년을 우대하는 부동산, 금융 정책을 쏟아내면서 “중장년층을 외면하는 역차별”이라는 불만이 높아졌다. 최근 발표된 ‘공공주택 50만 가구 공급대책’만 해도 종류에 따라 최대 80%가 청년층에 배분되는 구조여서 “젊은이만 국민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4050세대도 가계대출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를 챙길 여력은 급속히 사라지는 분위기다. ▷이들의 불만을 감수하며 밀어붙이는 정부의 청년 대책이 2030세대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다. 공공주택 분양은 당첨자들만 얻을 수 있는 제한적 혜택이고, 금융상품의 세제 지원도 정기적으로 돈을 부을 수 없는 청년에게는 그림의 떡이라고 이들은 항변한다. 청년희망적금만 해도 급전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석 달여 만에 17만 명의 가입자가 빠져나갔다. 청년들에게 4050세대의 불만은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자들의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현재 추진되는 청년 정책의 상당수는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청년층 표심을 잡기 위해 정부가 내놨던 공약에서 출발했다. 미래 세대를 위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한정된 재원으로 특정 세대를 챙기려다 보니 불가피하게 소외되는 세대가 나올 수밖에 없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4050세대 일각에서는 납세 거부 운동을 하자는 극단론까지 나오는 판이다. 연금, 노동 개혁 같은 본질적 대책은 놔두고 보여주기식 선심성 정책을 앞세운 결과가 세대갈등을 부추기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인도의 권력은 악한과 사기꾼과 약탈자들의 손에 들어가고 지도층은 무능하고 약해빠진 이들로 채워질 것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1947년 독립을 선언했을 때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악담을 퍼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국주의 향수를 버리지 못한 채 쓴맛을 다시던 영국의 당시 분위기였다. 인도가 독립 75주년을 맞은 올해, 인도계인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이 영국의 새 총리로 결정되자 “처칠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민자 2세인 수낵 신임 총리는 영국 역사상 첫 비(非)백인 총리가 된다. 부모가 각각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살다 영국으로 이주한 인도계다. 이민자의 아들, 그것도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이민자의 핏줄이 견고했던 보수당 내 ‘백인 장벽’을 깨뜨린 것이다. 인도는 전역이 흥분에 휩싸였다. “제국주의의 반전”, “영국에서 뜨는 인도의 태양”, “제국을 떨치고 일어난 인도의 자손” 같은 표현이 인터넷에 쏟아지고 있다.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평가도 있다. ▷불과 50일 전 수낵이 리즈 트러스와의 경선에서 패배했을 때만 해도 그의 정치 인생은 내리막길에 들어선 것처럼 보였다. 보수당원 16만 명이 진행한 투표에서 57% 대 43%로 고배를 마셨다. 부인의 탈세 논란 등으로 상처가 나면서 빠르게 존재감을 상실했다. 영국 생활을 접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역전의 기회는 드라마틱하게 찾아왔다. “총리를 다시 뽑게 됐다”고 알리는 전화를 받은 것은 그가 볼링장에서 공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수낵 총리는 “영국은 조국이고 고향”이라면서도 자신의 종교와 문화유산의 뿌리가 인도에 있다고 강조해 왔다. 힌두교도인 그는 소고기를 먹지 않으며, 하원의원 취임식 때는 힌두교 경전을 들고 선서했다. 다만 이민자 출신임에도 그의 이민 정책은 강경하다. 그가 브렉시트에 찬성한 이유 중 하나는 영국의 국경 통제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선 과정에서는 불법 이민자 단속을 강화하는 공약을 내놨다. ▷수낵 총리가 자신을 지지하는 동료 의원 100명을 다시 끌어모으는 데는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트러스노믹스’ 파장을 경고해 판단력을 입증한 그는 보수당의 강력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경제위기를 뚫어낼 구체적 해법은 아직 없다. 재정 보수주의자인 그가 의료, 복지 지원 확대를 원하는 민심을 어떻게 끌고 갈지도 관전 포인트다. 영국의 추락을 멈춰 세울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면 ‘44일 천하’로 끝난 전임자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란 법은 없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마거릿 대처는 이런 감세 공약에 동의하지 않았을 겁니다.” 영국 총리 선거를 앞둔 올해 7월, 대처 정권에서 장관을 지낸 3명의 원로는 언론 인터뷰에 동시 출연해 리즈 트러스 당시 후보의 감세 공약을 비판했다. 재정적자 감축이 병행되지 않는 트러스의 감세안이 대처리즘과는 동떨어져 있다며 “대처 전 총리가 매우 마뜩잖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제2의 대처’를 꿈꾸고 있던 트러스에게 특히 뼈아픈 지적이었을 것이다. ▷감세 정책은 대처 전 총리가 파탄 직전이던 영국 경제를 살려낸 대표적인 회생 카드 중 하나였다. ‘대처 따라 하기’를 선거 캠페인 전략으로 삼았던 트러스 총리가 주목한 정책인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치솟는 물가와 급증하는 나랏빚, 악화하는 재정적자 같은 상황 변수를 읽지 못했다. 최악의 타이밍에 시장 흐름과 거꾸로 가는 그의 감세 정책을 놓고 “환상의 섬에서나 가능한 위험한 동화”(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트러스 총리가 취임 38일 만인 14일 결국 백기를 들었다. 고소득자 소득세 감면 정책을 접은 데 이어 법인세 19% 유지 계획을 철회해 25%로 인상하는 기존 정부안대로 시행키로 했다. 정치적 동지인 쿼지 콰텡 재무장관도 전격 경질했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역대 최저치로 떨어지고, 국채 금리가 급등하면서 국가 파산설까지 제기되는 상황을 버티지 못했다. 두 차례의 굴욕적 정책 유턴을 놓고 이코노미스트지(紙)는 “트러스노믹스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정책의 효과, 파장 고민 없이 외형 베끼기에만 골몰한 결과가 참혹하다. ▷감세안 백지화 이후에도 성난 여론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트러스 총리가 실책에 대한 사과 없이 콰텡 장관을 자른 것을 놓고 ‘책임을 떠넘긴 지도자’라는 비판까지 추가됐다. 미국 워싱턴에서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차총회 만찬에 참석 중이던 콰텡 장관은 갑작스러운 경질 예고에 식사 시작 15분 만에 부랴부랴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트러스 총리 본인의 입지도 위태롭다.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청원 서명자가 50만 명에 이르고, 일부 언론은 벌써부터 후임자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영국 보수당 내에서는 트러스 총리의 일방적인 정책 독주가 당의 정체성까지 흔들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보수당 중진인 마이클 고브 의원은 감세안에 대해 “보수적이지 않다”며 정책 이념을 문제 삼고 나섰다. 위기 국면에서 민심의 요구와 경제 상황에 맞춰 정책을 조정하며 쌓아온 보수당의 유연한 이미지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상당하다. ‘대처의 뚝심’처럼 포장된 독선 때문에 12년 만에 정권까지 바뀔지 모른다는 여당의 아우성이 커지고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닉슨 대통령이 요즘 스트레스가 많다. 밤에 종종 술을 마신다.” 미국이 베트남전 출구 전략을 모색하던 1970년대 초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소련의 협상 상대들에게 이런 내용을 흘렸다. “통제 불가능하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충동적으로 변한 닉슨이 언제라도 핵 단추를 누를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미국은 이렇게 소련을 움직여 북베트남을 협상장에 나오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치광이 전략(The madman theory)’은 자신을 비이성적인 위험인물로 포장한 뒤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전략이다. 예측 불가능한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다. 서로가 극단으로 치닫는 치킨게임에서 효과를 보는 벼랑 끝 전술이다.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독재자들의 경우 이 전략을 쓰는 건지, 아니면 실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지를 놓고 외부 전문가들 간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부자(父子)는 미치광이 이론의 분석 대상으로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사례다. 은둔형 독재자의 무모한 도발과 위협, 핵무기 집착을 놓고 “미쳤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런 북한을 향해 미치광이 전략으로 맞대응했던 이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다. ‘화염과 분노’ 시기 “김정은보다 더 큰 핵 단추를 갖고 있다”며 긴장감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트럼프 본인도 좌충우돌 정치 행보를 놓고 ‘광인’이라는 비판과 ‘미친 척하는 냉철한 비즈니스맨’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불러일으킨 ‘미치광이 지도자’에 대한 공포는 차원이 다르다. 6000기에 가까운 핵무기를 보유한 러시아의 지도자가 핵전쟁 위협을 넘어 실제로 전술핵을 터뜨릴 기세다. 2월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했을 때 이미 편집증, 과대망상증 같은 정신이상설이 불거졌다. 중언부언하는 연설을 지켜본 외신들이 “뭔가 달라졌다”며 코로나19 시기 크렘린궁에 고립돼 있던 그의 심리 상태에 주목했다. 예스맨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현실 감각도 약해져 가고 있다는 게 서방 정보기관들의 판단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최근 CNN 인터뷰에서 푸틴에 대해 “매우 잘못 판단하고 있는 이성적 행위자”라고 말했다. 푸틴이 이성을 잃지 않은 지도자라고 인정하며 다독이는 동시에 ‘이성을 되찾고 더 이상 전세를 오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광기이든 오판이든 위태로운 지도자의 손에 들린 핵 카드의 위험성은 다르지 않다. 전 세계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자멸적 도박은 당장 중단돼야 한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2017년 11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정감사. 밤 12시를 넘길 무렵 증인으로 참석해 있던 한 대기업 사장이 불쑥 손을 들더니 “아까 끝난 사람들은 가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질문도 없이 새벽까지 앉혀놓기만 한 국감을 지켜보다 못해 ‘집에 가겠다’는 항변을 터뜨린 것이다. 이 장면을 놓고 “호통이나 면박 주기 질의를 피해 간 게 어디냐”는 말이 나왔다. 함께 증인으로 소환된 다른 대기업 대표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총수나 최고경영자(CEO)가 국감 증인으로 소환되면 기업에는 비상이 걸린다. 최소 2주 전부터 전담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로펌까지 동원해 컨설팅을 받으며 모의 국감을 치르는 곳이 많다. 표정과 손짓까지 예행연습을 반복한다.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예상 질의 내용은 물론이고 기업 정보를 어디까지 공개해야 할지 등을 놓고 회의가 반복된다. 올해는 총수들이 최종 명단에서 제외됐지만 전문경영인이 대신 출석한다고 해도 이 과정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문제는 이런 준비가 생산적인 국회 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CEO들의 발언을 들을 새도 없이 몰아치는 의원들의 꾸중과 윽박지르기, 망신 주기 질책이 질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10시간 넘게 국감장에 앉아있으면서 답변 시간은 1분을 넘지 못한 CEO들도 있었다. 시간 낭비를 넘어 굴욕이다. 질의 내용이 기업인들에게 때로 시장을 거스르는 간접적 압박으로 작용할 여지도 적잖다. 의원들은 올해 치킨 값을 인상한 이유를 따져 묻겠다며 치킨 프랜차이즈 기업 임원들을 소환한 상태다. ▷“정말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출석했던 2018년 국감장 풍경은 좀 달랐다. 그는 자신의 프랜차이즈 사업이 소상공인들의 상권을 침해한다는 의원들의 비판에 “골목상권이랑 먹자골목을 헷갈리시는 게 정말 큰 문제”라고 맞받아쳤다. 쟁점이 된 내용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사이다 발언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의원들 앞에서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 CEO는 많지 않다. 발언 후폭풍이 회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전전긍긍하며 몸을 낮추는 기업인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17대 평균 50명 선이었던 국감의 기업인 증인 수는 회기마다 늘어나 20대 국회에는 150명을 넘었다. 올해도 한 의원실에서만 기업인을 50명 넘게 신청해 “너무한다”는 뒷말이 나왔을 정도다. 정부의 국정 운영을 감사하는 자리에서 민간 기업인들로부터 들을 말이 그렇게 많을까. 환율과 주가가 날뛰고 재고가 급증하면서 기업들은 생존을 건 비상경영에 속속 돌입하고 있다. 이들이 위기 대응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국가경제를 위해 국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박진 외교부 장관은 요즘 밤잠을 못 이루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취임 4개월 만에 이른바 ‘외교 참사’를 이유로 해임건의안이 통과되는 굴욕을 당했다. 그것도 핵심 외교상대국인 미국의 2인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방한 당일에 당한 일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해임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하루 만에 거부했지만 쉽사리 지워지진 않을 낙인이다. 역대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6명의 장관 중 5명은 스스로 물러났다. 민주당이 내세운 해임건의안의 이유를 따져보면 박 장관 혼자서 책임을 떠안을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일 관계의 민감함이나 일본 국내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섣불리 양국 정상회담을 발표한 것, “한일이 흔쾌히 합의했다”며 기대치를 불필요하게 높여놓은 건 모두 대통령실이었다. 한미 간 ‘48초 회담’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일정 조정이라는 현장 변수가 일부 원인을 제공했다. 국회를 들쑤셔놓은 비속어 논란은 대통령 본인이 자초했다. 박 장관은 4선의 거물급 정치인이다. 그는 “외교는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지만 그 당위성과는 별개로 정치 현실에서 외교가 늘 정쟁의 대상이었다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이제는 그 자신이 여의도 정치의 공격에 휘청거리고 있다. 정의당이 언급한 대로 ‘왕자 대신 매 맞는 아이’가 돼버린 형국이다. 15∼18세기 유럽 왕실에서 감히 손댈 수 없는 왕자를 대신해 벌을 받았다는 ‘휘핑 보이(whipping boy)’와 다를 바 없다. 사실 그는 취임 초기부터 적잖은 기대를 모았던 스타 장관 후보 중 한 명이었다. 대통령 통역을 맡았던 영어 실력에 매끄러운 언변과 매너를 갖춘 그는 외교무대에서 환영받았다. 강제징용 피해 어르신을 찾아가 큰절을 하는 장면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한다는 정치인의 강점도 드러났다. 장점만 부각됐던 건 아니다. 행사 사진에 신경 쓰는 그를 두고 ‘1000장 장관’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부처 소속 사진사를 전속처럼 데리고 다니며 행사 사진을 1000장씩 찍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과장된 표현 속에는 이미지 관리가 지나친 게 아니냐는 내부의 불만이 반영돼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과 겸직이다 보니 박 장관은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지역구의 수해 현장에 달려가고, 명절에는 곳곳을 돌며 주민들을 만난다. 서울시 당정간담회 같은 의정 활동도 챙기고 있다. 정치인 출신 외교수장이 가져온 낯선 풍경들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5개월 만에 단명한 박정수 장관 이후 정치인이 외교장관을 맡았던 전례는 없었다. “자기 정치를 하려다 외교업무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런 우려를 털어내는 일은 결국 박 장관 스스로 해낼 수밖에 없다. 중국, 미국, 일본 등 주요국과의 민감한 현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늘어난 데다 러시아 전쟁으로 격화하는 신냉전 속 대외 상황은 연일 급변하고 있다. 경제안보 중요성은 커지는데 첫 시험대였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놓고 초반 대응을 잘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돼 있다. 사소한 의전 실수조차 가볍게 넘길 수 없게 된 국면에서 외교부는 살얼음판 분위기다. 현장 경험이 부족한 학자 출신 국가안보실 인사들의 빈틈을 메우는 것도 미션으로 추가돼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업무를 담당할 외교 실무자들을 통솔하는 게 박 장관이다. 그는 취임사에서 “외교는 실력이다”라며 직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장관 본인부터 이를 증명해야 할 때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미국 국무부는 이달 초 ‘숨은 코브라 찾기(Unhiding Hidden Cobra)’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해외에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숨은 코브라’는 라자루스를 비롯한 북한 해커 집단으로 사이버 업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다. 이들의 해킹을 적발해 무력화하는 프로그램을 아시아, 아프리카 등 6개국에 제공함으로써 글로벌 대응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수위를 높여가는 북한의 사이버 공격에 미국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움직임이었다. ▷북한의 사이버 금융 역량이 전 세계 1위를 기록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퍼센터가 발표하는 ‘국가별 사이버 역량 지표 2022’에서 집계된 순위다. 북한은 사이버 방어력, 해외정보 수집력, 인터넷 정보 통제력 등 나머지 7개 분야에서는 하위권인데 유독 사이버 금융 분야에서만 기형적으로 점수가 높다. 2위를 한 중국조차 이 분야의 점수는 10점대 초반으로 북한(50점)의 5분의 1 수준이다. ▷사이버 금융 분야 점수는 해외 금융기관의 정보통신 기반을 공격하거나 해킹으로 정보를 빼내는 등의 활동을 많이 할수록 높아진다. 조사 대상국인 30개국 중 북한, 중국, 이란, 베트남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0’점을 받았다. 이와 대비되는 북한의 고득점은 불법 사이버 활동이 가상화폐 거래소 공격 등을 통한 금전적 이익 확보에 집중돼 있음을 재확인하는 성적표인 셈이다. 각종 경제제재에 코로나19 봉쇄 여파까지 겹치면서 북한은 외화 고갈 상태에 놓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해킹은 이미 악명이 높지만 최근에는 신종 기술을 이용해 더 치밀하게 이뤄지는 게 특징이다. ‘마우이(Maui)’라고 불리는 신종 랜섬웨어가 대표적이다. 북한 해커들이 이를 이용해 미국의 공중보건, 의료 관련 기관들로부터 50만 달러 상당의 비트코인을 뜯어낸 사례가 7월 연방수사국(FBI)에 적발됐다. 북한은 가상화폐를 쪼개고 섞은 뒤 재분배하는 ‘믹서’ 혹은 ‘텀블러’라는 기술도 활용하기 시작했다. 믹싱 과정을 반복하면 가상화폐 거래 추적이 어려워진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고위당국자는 북한을 ‘국가를 가장해 수익을 추구하는 범죄조직’이라고 불렀다. 북한이 유럽과 아시아의 가상화폐 거래소를 공격해 빼낸 금액은 지난해에만 5000만 달러에 이른다. 탈취한 금액의 3분의 1은 핵·미사일 개발에 들어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사회의 제재도 점차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겨냥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해킹 정보를 제공할 경우 지급하는 포상금 규모도 최대 1000만 달러까지 높였다. 해킹 차단이 사이버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것이자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저지하는 일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2002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집권 연장 여부를 놓고 진행된 주민투표 찬성률은 100%였다. 쿠바에서는 라울 카스트로 공산당 총서기가 2008년 선거에서 99.4%의 지지율을 얻었다. 북한에서 제14기까지 치러진 대의원 선거는 모두 투표율 99%에 찬성률 100%를 기록했다. 직접투표, 비밀투표 등 원칙을 규정해 놨지만 이대로 진행됐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총칼의 위협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숫자였다. ▷독재 체제를 연구해온 학자 프랑크 디쾨터는 “독재에도 연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포와 폭력만으로는 권력 유지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받쳐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거와 주민투표를 앞세워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대표적인 연출 기법 중 하나다. 아이티와 콩고, 베트남 등에서도 과거 95∼99%가 넘는 찬성률이 나왔다. 100%를 넘어서는 기이한 투표율로 국제사회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투표의 기본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결과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에 점령한 지역 4곳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찬성률이 최대 99%로 집계됐다고 한다. 투표는 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헌병과 선관위 직원이 가가호호 찾아가 투표용지를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투표소에는 러시아 용병기업 와그너그룹의 상징인 해골 모양 마크를 단 군인이 경계를 섰다. 배치된 투표함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박스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투표하지 않는 것은 지하실로 끌려가는 직행 티켓”이라는 게 한 우크라이나 언론이 외신에 전한 분위기다. ▷병합 대상 지역 중 이미 독립을 선언한 도네츠크, 루한스크는 러시아계 인구 비율이 40%에 육박하는 곳이어서 일찌감치 ‘가결’이 예상됐던 곳이기는 하다. 2월 전쟁이 시작된 이후 러시아에 반대하는 지역주민 수만 명은 이미 다른 곳으로 탈출한 상태다. 남은 유권자 가운데 투표에 반대하는 이들은 집에 없는 것처럼 커튼을 치고 집에 전등을 꺼놓는 식으로 저항했다. 이들의 침묵은 투표에 반영되지 않았다. 압도적인 찬성률은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가 무리수를 써가며 우크라이나 동남부 병합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화력 보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게 정설이다. 병합 지역이 공격받게 되면 ‘영토 수호’를 주장하며 대대적인 총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새 병합지와의 조약 체결, 병합의 합헌 여부 검증, 의회와의 협의 및 비준 동의, 대통령 최종 서명 등 절차를 준비 중이다. 핵전쟁의 방아쇠가 될 수도 있는 ‘땅따먹기 쇼’가 21세기 지구촌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2019년 이탈리아 젊은이들이 ‘이오 소노 조르자(Io Sono Giorgia)’라는 제목의 리믹스 곡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극우 성향 정치인인 조르자 멜로니가 한 집회에서 높은 톤으로 외쳐댄 발언에 디스코풍의 리듬을 입힌 곡이었다. 진보적 디제이들이 그를 조롱하려고 만든 이 음악 동영상은 아이러니하게도 12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킨다. 군소정당을 이끌던 고졸 출신의 40대 미혼모 정치인이 일약 스타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이탈리아 사상 첫 여성 총리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들(FdI)’ 대표는 ‘여자 무솔리니’로 불리는 극우파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 “그가 했던 모든 일은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고 추켜올렸다. “50년 동안 그런 정치인은 나온 적이 없었다”고도 했다. 음악으로 각색된 3년 전 연설도 ‘무솔리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내용이다. “나는 조르자, 어머니이고 이탈리아인이며 기독교”로 시작되는 당시 발언은 무솔리니 정권의 슬로건이었던 ‘신, 조국, 가족’과 유사하다. ▷무솔리니는 언론과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며 21년간 장기 집권의 흑역사를 썼다.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유럽의 양대 미치광이 독재자로 꼽힌다. 전위 민병대 ‘검은 셔츠단’을 앞세워 나라를 파시즘의 광기 속에 몰아넣었던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그런 무솔리니와 비교되는 것에 대해 멜로니는 “웃기는 일”이라고 일축해 왔다. 파시즘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받아들인다면서도 자신은 ‘네오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논란이 된 파시스트 슬로건에 대해서는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선언일 뿐”이라고 했다. ▷반대파들은 그를 향해 ‘위험한 극단주의자’, ‘이탈리아의 히틀러’라는 독설을 쏟아내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화살이 날아드는 형국이다. 탈(脫)유럽연합(EU)을 외쳐온 그가 EU의 단결을 흔드는 뇌관이 될 것이라는 경계심이 상당하다. 그가 이끄는 우파연합의 친러 성향으로 볼 때 향후 러시아에 맞선 서방의 대동단결 전선에 구멍을 낼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는 딱지가 붙은 이유다. ▷이탈리아는 지난 20년간 정권이 11번 바뀔 정도로 정치적 리더십이 불안정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난과 인플레이션, 치솟는 국가부채 등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러시아 제재와 나토(NATO), EU 통합 같은 대외 현안들도 쌓여 있다. 이탈리아의 선택이 주변국에 미칠 연쇄적 파급 효과는 적잖을 것이다. 새 총리가 어떤 본색을 드러내느냐에 유럽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됐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팬데믹은 정말로 끝난 것일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대유행의 종식을 선언한 이후 외신이 쏟아내고 있는 질문이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상당수 현지 언론의 판단은 “아니요”. 미국에서는 여전히 하루 평균 2만 명 넘는 신규 확진자에 400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4300명이 새로 입원한다. 미국 보건부가 석 달 단위로 연장해온 공중보건 비상사태 국면도 유지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팬데믹은 끝났다”라고 불쑥 언급한 곳은 디트로이트 모터쇼 방문을 계기로 진행한 CBS ‘60분’과의 인터뷰에서였다. 북미 최대 규모의 모터쇼에서 마스크 쓴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게 그의 확신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발언은 당장 백악관 당국자들부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의회에 추가 요청해 놓은 224억 달러의 예산을 받아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정부의 백신 접종 캠페인도 동력이 떨어질 판이다. ▷야당인 공화당은 “바이든 대통령의 말이 맞다면 공중보건 비상사태부터 해제하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해제할 경우 1500만 명의 취약계층이 백신 접종과 치료 시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게 된다. 미국 내 전문가들도 우려와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허튼소리”, “역겨운 발언”, “중간선거를 의식한 보건 포퓰리즘”이라는 날 선 반응까지 나왔다. 모더나와 화이자 등 백신업체들의 시가총액은 하루 만에 90억 달러(약 12조5000억 원) 넘게 날아가 버렸다. 후폭풍이 한동안 이어질 조짐이다. ▷2년 반 동안 지속돼온 팬데믹이 종식 단계로 가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전문가는 없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도 “끝이 보인다”고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들은 전부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했고, 자가 격리 규정도 대폭 완화했다. 스위스에서는 코로나19에 걸려도 사무실로 출근하고 회의에도 참석한다. 그렇다고 ‘종식’을 공식 선언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백신과 치료제에 힘입어 팬데믹 양상을 바꿔 놓기는 했지만 바이러스 자체의 위험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국가별, 지역별 의료체계와 대응 상황도 천차만별이다. ▷마스크조차 벗지 못하는 한국에 코로나 종식 논란은 일러도 한참 이르다. 실내 마스크 착용 규정을 풀어 달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보건당국은 아직 단호하다. 독감의 5배에 이르는 현재 코로나바이러스의 전파력(R0)이 더 낮아지고, 위중증 이완율 등 수치가 더 떨어져야 방역 완화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올겨울 독감과 코로나가 함께 유행하는 ‘트윈데믹’ 가능성도 남아 있다. 결국 과학적인 데이터와 지표에 근거해서 차근차근 연착륙을 향해 나아가는 것 외에는 길이 없어 보인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리즈 트러스 영국 외교장관은 ‘카멜레온’이라는 평가를 받는 정치인이다. 군주제 폐지와 마약 합법화 등을 외치며 진보당에서 활동하다가 보수당으로 옮겨 외교수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2014년부터 8년간 환경·농림부와 법무부, 재무부, 통상부 장관을 두루 거쳐 “직업이 장관”이라는 말도 듣는다. 5일 당 대표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그는 이제 마거릿 대처, 테리사 메이 전 총리에 이어 세 번째 여성 총리 탄생이라는 역사를 쓰게 됐다. ▷“당황스럽다. 왜 여성 정치인들은 늘 대처와 비교당하느냐.” 그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처 전 총리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를 반박했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대처 전 총리와 트러스 장관을 비교하는 각종 사진이 넘쳐난다. 통이 넓은 흰색 리본 블라우스, 러시아 모스크바 광장에서 눌러쓴 모피 털모자 같은 패션부터 탱크 위에 올라탄 사진 구도 등은 30여 년 전 대처 전 총리의 것과 판박이다. ‘대처의 아바타’라고 불릴 법하다. ▷트러스 장관은 전속 사진사를 두고 인스타그램 활용을 극대화해 온 ‘이미지 관리의 달인’이다. 그런 그가 “나는 그저 나 자신일 뿐”이라고 강변해도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대처 전 총리는 과감한 노조 개혁과 재정 개혁을 통해 1970년대 영국병을 치유해낸 ‘철의 여인’으로 평가받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윈스턴 처칠에 이어 두 번째로 존경받는 지도자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대처 전 총리에 이어 26년 만에 두 번째 여성 지도자가 된 메이 전 총리도 선거 과정에서 ‘제2의 대처’ 이미지 활용을 망설이지 않았다. ▷세 여성 지도자는 보수적인 영국 정치권, 그것도 보수 토리당의 유리천장을 잇따라 깨뜨리는 성공 스토리를 썼다. 옥스퍼드대 출신의 엘리트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대내외적으로 강경한 정책을 밀어붙인 매파 정치인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때로 파격적이기까지 한 시도로 “차갑고 완고하다”는 평가를 바꿔 왔다. 메이 전 총리는 100권이 넘는 요리책을 사 모으는 취미와 호피무늬 구두를 비롯한 과감한 패션 스타일이 화제였다. 트러스 장관은 두 딸을 키우며 노래방을 즐기는 일상을 공개해 왔다. ▷트러스 신임 총리가 직면하게 될 현실은 엄중하다. 영국은 브렉시트(Brexit)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까지 겹치면서 치솟는 물가와 인력난, 에너지난에 신음하고 있다. 대처 전 총리에 대한 영국인들의 향수가 점점 짙어지고 있는 것은 이런 국가적 위기 때문일 것이다. 대처 이미지의 모방을 넘어 그에 못지않은 리더십을 보임으로써 영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달라는 게 이들의 요구다. 영국 사상 최초 40대 여성 총리의 어깨가 그만큼 더 무거워졌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정관계와 재계 유력 인사들의 재킷이나 바지 주머니가 이상하게 두툼한 것은 대개 휴대전화를 두 개씩 넣어 다니기 때문이다. 과도한 업무 연락에 시달리거나 공적으로 노출돼 있는 인사들 상당수가 업무폰 외에 개인폰을 따로 갖고 다닌다. “당신에게 알려준 것은 내 개인폰 번호”라고 은근히 귀띔하기도 한다. 그만큼 상대에게 신뢰를 갖고 있다는 메시지다. 번호를 분리할 필요가 있는 이들에게 묵직한 휴대전화 두 개를 챙겨 다니는 수고로움은 감내해야 할 대가였다. ▷1대의 스마트폰으로 2개의 전화번호를 동시에 쓸 수 있는 서비스가 이달부터 시작됐다. 앞으로는 스마트폰에 직접 장착하는 유심(USIM)칩 외에 기기 안에 내장돼 있는 e심을 병용해 2개의 회선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세컨드폰을 가뿐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휴대전화를 한 개만 사용해온 이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이다. 기존 통신사 서비스를 유지하면서 알뜰폰의 저렴한 데이터를 이용하거나 해외출장 시 현지 국내요금제를 선택할 수 있는 혜택이 열렸다. ▷이른바 ‘듀얼심’의 기술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다. 독일기업 지멘스가 관련 기술의 특허를 낸 게 1990년대였다. 핀란드 통신업체 베네폰이 2000년 내놓은 첫 듀얼심 휴대전화 ‘트윈폰’은 기기 뒷면에 유심칩 두 개를 나란히 꽂아 사용하는 형태였다. 칩을 4개까지 장착할 수 있는 쿼드(quad) 모델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 듀얼심 서비스를 운용하는 통신사는 2020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 69개국 175개. 해외에서는 이미 상용화된 서비스이건만 한국은 유심칩 판매수익 감소를 우려한 통신사들의 견제 등으로 도입이 늦어졌다. ▷휴대전화 번호가 주민등록번호보다도 자주 쓰이는 핵심 개인정보가 돼 버린 세상이다. 통화와 문자 송수신 같은 기본 커뮤니케이션 외에 본인 인증, 금융 거래 등에도 전화번호 입력은 필수다. 각종 웹사이트 가입부터 배송 정보 입력, 식당에 대기 순번을 걸어놓는 일까지 번호 노출을 요구받는 상황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본캐’ 번호를 함부로 갈아치울 수 없으니 ‘부캐’ 번호가 필요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1폰 2번호’ 사용이 프라이버시와 디지털 정체성의 문제로 직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서비스를 시행 중인 해외 국가에서는 번호를 2개 쓰면서 바람을 피우다 배우자에게 적발되는 사례들이 종종 뉴스가 되기도 한다. 듀얼심을 악용하려는 사람들도 생겨날 것이다. 그래도 2025년이 되면 전 세계 스마트폰의 절반 이상이 듀얼심을 탑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최적화된 방식으로 휴대전화를 이용, 관리하는 게 관건일 것이다. 한국의 ‘투넘버 시대’는 어떻게 열릴지 궁금해진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그리셤의 소설 ‘루스터 바’에는 억대 학자금 대출에 시달리는 로스쿨 학생 3명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빚에 짓눌려 있던 이들은 가짜 변호사 행세를 하며 돈을 긁어모을 사기 행각을 시작한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대학생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주목받은 작품이다. 그리셤은 2017년 출간 당시 “학생들이 도저히 갚을 길 없는 대출금 위기가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 대학생의 55%는 학자금 대출을 받고, 평균 2만8400달러의 빚을 진 상태에서 졸업한다. 학자금 대출이 있는 미국인은 현재 4300만 명. 대출 총액은 1조7500만 달러(약 2330조 원)에 이른다. 연간 최대 7만 달러가 넘는 미국의 대학 등록금을 대출금 한 푼 없이 납부할 수 있는 청년들은 많지 않다. 이자는 불어나는데 임금이 줄고 물가는 오르니 부담은 커진다. 대출자 5명 중 1명은 50세 이상 장년층이다. 수십 년을 갚아 나가고도 아직 원금을 못 털어낸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대대적인 학자금 대출 탕감 계획을 놓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빚의 사슬을 끊어 중산층의 안정적 생활을 돕겠다는 취지라지만, 결국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포퓰리즘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치솟는 물가를 잡겠다고 연달아 금리를 인상하면서 한쪽에서는 돈을 뿌리는 무책임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찬성 쪽에서도 의견은 갈린다. 민주당 강성 의원들은 1인당 최대 2만 달러의 탕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되레 5만 달러까지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학자금 대출 탕감이 불붙인 미국 내 공정성 논란은 특히 거세다.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이들, 각종 대출금을 묵묵하고 성실하게 갚아온 이들과의 형평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고소득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엘리트까지 정부가 세금으로 도와줘야 하느냐는 반발이 나온다. 한국 돈으로 1인당 연간 소득이 약 1억6000만 원, 부부 합산으로는 3억 원인 경우까지 탕감 대상에 들어간다니 이런 비판을 피해 가긴 어려워 보인다. ▷공부 때문에 청춘 시절부터 떠안게 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다. 그러나 빚 탕감은 숫자 계산을 넘어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고려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민감한 선택이다. 역차별과 도덕적 해이 논란, 그것이 불러올 부정적 파급 효과까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국에서 청년 채무자의 대출이자 감면을 놓고 논란이 불거진 것도 결국 같은 이유였다. 공정성과 경제성 사이의 미묘한 구도 속에서 국민적 합의를 끌어낼 최적의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한국에도 미국에도 지난한 과제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최대 65% 세일, 엄청난 딜입니다!” 미국 유통업체 월마트와 베스트바이 같은 업체들은 요즘 세일이 한창이다.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도 가격을 확 낮춘 상품들이 나온다. 늘어난 재고 물량을 처리하기 위한 땡처리가 시작된 것. 월마트는 지난달 재고품 규모가 600억 달러(약 79조 원)까지 늘어나 있다. 이들 기업을 포함한 전 세계 2300여 개 제조업체들의 재고 총액은 현재 1조8700억 달러로, 10년 만에 최대치까지 치솟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전자의 올해 상반기 재고자산 총액은 처음으로 50조 원을 넘어섰다. 재고가 팔리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역시 역대 최고치인 평균 94일까지 늘어났다. LG디스플레이를 비롯한 다른 주요 기업들의 상반기 재고자산도 대체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재고가 늘어나는 만큼 냉장고와 세탁기, 휴대전화 같은 제품의 생산량은 줄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 코로나19 특수 대응 차원에서 공급을 늘리다 보니 수요를 초과하게 된 측면이 있다지만 그 흐름이 심상치 않다. ▷창고에 들어찬 재고 상품들은 경기침체의 전조로 여겨진다. 세계경제가 현재 경기침체에 진입했는지를 놓고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재고 수치는 기업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선행지표 중 하나다. 재고 증가는 기업들의 수익성 악화, 생산 감소, 투자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 LG전자의 경우 TV 생산라인 가동률이 72%대까지 내려와 있다. 경기침체(Recession), 즉 ‘R의 공포’가 현실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물건은 안 팔리는데 원자재 가격과 운송비용은 오르니 기업들의 한숨도 커져 간다. ▷미국 CNBC는 주요 기업들의 재고가 쌓여가는 상황을 놓고 ‘재고가 이끄는 경기침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재고 부담이 기업 활동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평가다.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기침체 요인들은 당장 해법을 찾기도 쉽지 않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져온 에너지와 식량 위기, 인플레이션 및 급속한 금리 인상의 여파가 얽혀 있다. 중국 경제도 글로벌 경제를 흔들 변수다. 2분기 0%대 성장, 20%대 청년실업률이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든 중국은 올해 경제성장률 5%를 낙관하기 어렵다. ▷재고떨이와 폭탄 세일이 당장은 반가운 뉴스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업들의 생산 위축이 수익성 악화, 인력 구조조정과 대규모 실직 사태로 이어지면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다. 가뜩이나 장바구니 물가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지갑을 닫는 실업자들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다. 960조 원대 자영업자 빚폭탄마저 째깍거린다. ‘R의 공포’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