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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은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현존 최고(最古) 태극기인 ‘고종이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2호·사진)를 박물관 중근세관 대한제국실에서 15∼21일 공개한다. 미국인 오웬 데니(Owen N. Denny·1838∼1900)가 청나라의 압력으로 외교고문직에서 파면돼 미국으로 돌아가던 1890년 고종이 선물한 가로세로 263×180cm의 대형 태극기다. 1981년 후손이 한국에 기증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악명 높은 사실이다.” 1919년 3·1운동이 벌어진 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가운데 하나인 영자 신문 ‘Seoul Press(서울프레스)’가 그해 3월 20일 보도한 기사 ‘잔인한 이야기’ 가운데 일부다. 국제 사회에 전해진 3·1운동과 일제의 탄압 양상을 과장이나 거짓으로 매도하고자 했던 것. 조선총독부가 대외적으로 3·1운동을 어떻게 왜곡하고 국제 여론전을 펼치려 했는지에 주목한 연구가 나왔다. 최우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독립기념관이 1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주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 ‘국제사회는 3·1운동을 어떻게 보았는가’에서 ‘3·1운동과 조선총독부의 국제언론 대응’을 발표했다. 3·1운동 당시 고종 장례에 참여하러 온 해외 기자, 통신원들과 선교사들이 만세운동의 소식을 외부로 실어 날랐다. 발표문에서 최 연구위원은 “조선총독부는 ‘서울프레스’를 통해 국외 언론 보도를 직접 반박하려 했다”고 밝혔다. 발표문에 따르면 서울프레스는 3월 20일 기사에서 “한국인은 모든 종류의 소문을 제작하고 전파하는 데 능숙하다”고 매도했다. 일제 탄압의 양상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벨기에에서 행한 학살사건에 비유하거나, 여학생이 경찰서에서 고문당해 사망했다는 소식, 서대문감옥의 죄수들이 고문당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한 해외 언론 보도는 “모두 다 사실무근의 거짓말”이라고 이 기사에서 주장했다. 또 조선인의 만세운동은 ‘폭동’으로 묘사하는 반면 탄압했던 일본 군경은 ‘평화의 수호자’로 표현했다(5월 6일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없음’ 기사). 서울프레스는 스코필드(1889∼1970)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진상이 알려진 수원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역시 공세적인 만세시위 탓에 발생했다고 왜곡했다. 학교 건물과 경찰서가 파괴되고 일본 경찰 2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한 명이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됐기에 진압부대가 운동 참가자들에게 적개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제암·고주리 학살은 무고한 양민에 대한 일제의 끔찍한 보복행위였다. 서울프레스의 야마가타 이소오 사장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았던 서대문감옥을 방문한 뒤 “감옥이 아니라 기술학교처럼 보인다”는 평가를 내렸다(5월 11일 ‘서대문감옥 방문’). 이에 스코필드 선교사는 감옥에서 몇 주 지내다 나온 사람을 만났는데 생가죽만 남아 있었다고 즉각 반박했다. 1905년 창간한 서울프레스는 이듬해 통감부가 인수한 뒤 일간지로 바뀌었으며,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일한 일간 영자신문이었다. 명목상 개인 경영의 형태였지만 여러 측면에서 ‘경성일보’ ‘매일신보’와 함께 총독부 기관지로 분류된다. 1919년 당시 신문 원본은 남아 있지 않아 1919년 3월 14일∼5월 16일 기사 가운데 25개를 모아 5월 20일 발행된 팸플릿 책자가 분석 대상이 됐다. 한국인은 미개하다며 여론전을 벌이기도 했다. ‘산림 파괴’(4월 6일)라는 기사는 한국인들이 일본 당국의 지시로 심긴 나무들에 적의를 품고 나무를 훼손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라 다카시 당시 일본 총리는 1919년 3월 11일 국무회의 뒤 “외국인이 본 건(3·1운동)을 주목하고 있으니 잔혹하다든가, 가혹하게 추궁한다든가 하는 비평이 생겨나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는 훈령을 조선 총독에게 보냈다. 서울프레스의 여론전 역시 그 일환으로 평가된다. 최우석 연구위원은 “서울프레스는 조선인의 피해를 ‘거짓말’로 몰아갔지만 부정할 수 없는 대규모 학살이 확인되면서 식민권력이 유지하려 했던 ‘문명적’ 통치의 이미지는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악명 높은 사실이다.” 1919년 3·1운동이 벌어진 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가운데 하나인 영자 신문 ‘Seoul Press(서울프레스)’가 그해 3월 20일 보도한 기사 ‘잔인한 이야기’ 가운데 일부다. 국제 사회에 전해진 3·1운동과 일제의 탄압 양상을 과장이나 거짓으로 매도하고자 했던 것. 조선총독부가 대외적으로 3·1운동을 어떻게 왜곡하고 국제 여론전을 펼치려 했는지에 주목한 연구가 나왔다. 최우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독립기념관이 1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주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 ‘국제사회는 3·1운동을 어떻게 보았는가’에서 ‘3·1운동과 조선총독부의 국제언론 대응’을 발표했다. 3·1운동 당시 고종 장례에 참여하러 온 해외 기자, 통신원들과 선교사들이 만세운동의 소식을 외부로 실어 날랐다. 발표문에서 최 연구위원은 “조선총독부는 ‘서울프레스’를 통해 국외 언론 보도를 직접 반박하려 했다”고 밝혔다. 발표문에 따르면 서울 프레스는 3월 20일 기사에서 “한국인은 모든 종류의 소문을 제작하고 전파하는데 능숙하다”고 매도했다. 일제 탄압의 양상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벨기에에서 행한 학살사건에 비유하거나, 여학생이 경찰서에서 고문당해 사망했다는 소식, 서대문감옥의 죄수들이 고문당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한 해외 언론 보도는 “모두 다 사실무근의 거짓말”이라고 기사는 주장했다. 또 조선인의 만세운동은 ‘폭동’으로 묘사하는 반면 탄압했던 일본 군경은 ‘평화의 수호자’로 표현했다.(5월 6일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없음’ 기사) 서울 프레스는 스코필드(1889~1970)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진상이 알려진 수원 제암·고주리 학살 사건은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역시 공세적인 만세시위 탓에 발생했다고 왜곡했다. 학교 건물과 경찰서가 파괴되고 일본 경찰 2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한명이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됐기에 진압부대가 운동 참가자들에게 적개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제암·고주리 학살은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끔찍한 보복행위로 실상 주민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을 뿐 이들 동네에서는 만세운동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서울프레스의 야마가타 이소오 사장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았던 서대문감옥을 방문한 뒤 “감옥이 아니라 기술학교처럼 보인다”는 평가를 내렸다.(5월 11일 ‘서대문감옥 방문’). 이에 스코필드 선교사는 감옥에서 몇 주 지내다 나온 사람을 만났는데 많은 곳에 껍질이 벗겨져 생가죽만 남아있었다고 즉각 반박했다. 1905년 창간한 서울프레스는 이듬해 통감부가 인수한 뒤 일간지로 바뀌었으며,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일한 일간 영자신문이었다. 명목상 개인 경영의 형태였지만 여러 측면에서 ‘경성일보’ ‘매일신보’와 함께 총독부 기관지로 분류된다. 1919년 당시 신문 원본은 남아있지 않아 1919년 3월 14일~5월 16일 기사 가운데 25개를 모아 5월 20일 발행된 팸플릿 책자가 분석 대상이 됐다. 한국인은 미개하다며 여론전을 벌이기도 했다. ‘산림 파괴’(4월 6일)라는 기사는 한국인들이 일본 당국의 지시로 심어진 나무들에 적의를 품고 나무를 훼손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라 다카시 당시 일본 총리는 1919년 3월 11일 국무회의 뒤 “외국인이 본 건(3·1운동)을 주목하고 있으니 잔혹하다든가, 가혹하게 추궁한다든가 하는 비평이 생겨나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는 훈령을 조선 총독에게 보냈다. 서울프레스의 여론전 역시 그 일환으로 평가된다. 최우석 연구위원은 “서울프레스는 조선인의 피해를 ‘거짓말’로 몰아갔지만 부정할 수 없는 대규모 학살이 확인되면서 식민권력이 유지하려 했던 ‘문명적’ 통치의 이미지는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일본군이 1940년대 베트남을 침략하면서 ‘위안소’를 운영했음을 보여주는 프랑스군 공식 자료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프랑스 해외영토자료관(ANOM)에서 일본군이 하이퐁, 박닌, 하노이 등 베트남 북부 도시에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프랑스군 문서를 확인했다고 12일 밝혔다. 베트남 지역 일본군 위안소는 지금까지는 구술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알려졌다. 이번에 확인된 프랑스군의 1940년 10월 7∼10일 보고서에는 베트남 북부 항구도시 하이퐁에 진주한 일본 육군과 해군이 각각 위안소(Maisons de Tol´erance)를 ‘비엔 호숫가’에 설치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는 장교, 부사관, 사병 등으로 구분된 세 종류의 위안소가 설치될 것이라면서, 설립 자금 조달은 폴 베르 거리의 한 환전소를 통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와 별도로 1941년 2월 신원 불명의 여성 25명이 하이퐁항에 도착했다고 기록한 일본군 관련 프랑스군 보고서도 확인됐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 비시 정부가 세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독일의 동맹인 일본과 협력했다. 일본군은 1940년 9월 북부 베트남에 진주했고, 1941년에는 남부 베트남까지 점령했다. 일본군의 베트남 점령 루트는 하이퐁항에서 박닌, 하노이로 이어졌다. 위안소가 표기된 지도 2점도 확인됐다. 그중 하나인 박닌성 일본군 기지 배치도에는 위안소가 일본군 기지 경계선에 바로 붙어 있어 일본군의 통제와 관리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노이 시내의 일본군 배치도에도 위안소가 일본군 주요 시설과 함께 시내에 설치돼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번에 확인한 문서들은 위안소 설치의 실질적인 주체가 일본군이었음을 다시금 뒷받침한다. 국사편찬위는 “일본군은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1년 3개월 전 베트남을 점령하고 곧바로 위안소를 설치했던 것”이라며 “일본군이 전쟁 당시 침략하는 곳마다 위안소를 설치해 운영했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된 것”이라고 밝혔다. 조광 위원장은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책임 및 반성을 회피하고 있는 현실에서 더욱 가치가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국사편찬위는 2016년부터 일본군 ‘위안부’와 전쟁범죄 자료를 수집, 편찬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는 파리7대학 마리 오랑주 교수와 재불 사학자 이장규 씨가 참여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제국 패망사’는 머리말부터 아찔하다. “우리가 타일러 데닛(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밝힌 미국의 외교사가)의 말대로만 했다면,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전쟁 대신 평화롭게 마무리됐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저자의 이런 가정대로 됐더라면, 그러니까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지 않고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중일전쟁은 2차대전과 별개의 전쟁이 됐을 것이며 일제는 나중에 만주를 잃지 않는 정도에서 중국과 강화를 했을 수도 있다. 물론 ‘김 씨’는 여전히 ‘가네모토(金本) 상’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저명 전쟁사학자가 태평양전쟁의 전사(前史)인 1931년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양상, 일본의 항복까지를 다룬 논픽션이다. 1972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 취재를 바탕으로 써서 치밀하고 흥미롭다. 앞부분 1936년 황도파(皇道派·일본군 내 일왕 절대주의 급진파) 장교들의 ‘2·26 쿠데타’ 서술부터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박진감이 넘친다. 실패한 이 쿠데타는 오히려 군부가 정치를 더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1년 개전 직전 나가노 해군 군령부 총장은 쇼와 일왕을 만나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2년분이며, 전쟁이 나면 18개월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든 선수를 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왕은 말했다. “전쟁은 절망적이겠군.” 일본은 어째서 제 무덤을 판 이 전쟁으로 달려갔는가. 책은 팽팽하던 전쟁파와 외교파가 일왕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종교적 광신에 휩싸이는 과정을 도쿄의 권력 최상층부에 현미경을 들이대며 보여준다. 이 책의 번역 출간은 때늦은 감이 있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시중에 태평양전쟁 전반을 다룬 통사는 단 한 권도 없다.” 한국의 해방을 직접 가져온 것이 미군의 태평양전쟁 승전인데도 우리는 주로 중국을 무대로 벌어진 무장투쟁이나 의열투쟁에만 큰 관심을 갖는 경향이 없지 않다. 책 서두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다리를 다쳤던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미주리호에 오른 사진은 그만큼 상징적이다. 제목만 보고 최근 한일 갈등 국면에서 ‘심리적 위안’이 될 책이라고 믿는다면 오해다. 저자의 시선은 ‘일본이 이래서 망했다’는 것보다는 무모했지만 강력했던 적을 이해하려는 데 가깝다. 1970년 첫 출간 당시 원제는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Japanese Empire’. 에필로그는 패전 몇 달 뒤 황궁과 맥아더 사령부에 번갈아 절을 하는 한 나무꾼의 행동으로 마무리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는 길 건너편에 있는 영원한 존재(일왕)를 숭배하면서 지금의 쇼군(맥아더 장군)이 가진 일시적인 권력을 솔직하게 받아들였다.” 이처럼 일왕과 천황제도에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은 종전은 일본이 제대로 된 반성 없이 전후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다수 일본인에게 종전은 강자 미국을 받아들이는 문제였지 반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책임에 대하여’가 다루는 주제로 이어진다. ‘책임에…’는 자이니치(在日·재일) 조선인 2세로 일본의 우경화와 국민주의의 위험성을 비판해 온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교수와, 일본의 역사왜곡과 인권 문제를 지적해 온 비판적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대학원 교수의 대담집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오키나와 미군기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천황제의 모순 등을 다루면서 현대 일본이 퇴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다카하시 교수는 일본의 현재를 상징하는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천황제가 전쟁 전과 전쟁 중에 야기한 참화에 대해 아키히토 (전) 일왕 자신도, 일본 정부도 공식적으로 반성의 뜻을 표한 적이 없다. 일왕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천황제”라며 “반민주주의적 사상이 일본의 정치 속에 뿌리 깊이 남은 것도 천황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천황제는 근대 일본의 몬스터 같은 제도로, 실체 없는 유령 같은 것을 설정해 놓고 대립을 조정하며, 그 결과를 지배층의 이익으로 회수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제국 패망사’는 머리말부터 아찔하다. “우리가 타일러 데닛(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밝힌 미국의 외교사가)의 말대로만 했다면,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전쟁 대신 평화롭게 마무리됐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저자의 이런 가정대로 됐더라면, 그러니까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지 않고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중일전쟁은 2차대전과 별개의 전쟁이 됐을 것이며 일제는 나중에 만주를 잃지 않는 정도에서 중국과 강화를 했을 수도 있다. 물론 ‘김 씨’는 여전히 ‘가네모토(金本) 상’으로 불렸을 지도 모른다. 미국의 저명 전쟁사학자가 태평양전쟁의 전사(前史)인 1931년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양상, 일본의 항복까지를 다룬 논픽션이다. 1972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 취재를 바탕으로 써서 치밀하고 흥미롭다. 앞부분 1936년 황도파 장교들의 ‘2·26 쿠데타’ 서술부터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박진감이 넘친다. 실패한 이 쿠데타는 오히려 군부가 정치를 더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1년 개전 직전 나가노 해군 군령부 총장은 쇼와 일왕을 만나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2년분이며, 전쟁이 나면 18개월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든 선수를 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왕은 말했다. “전쟁은 절망적이겠군.” 일본은 어째서 제 무덤을 판 이 전쟁으로 달려갔는가. 책은 팽팽하던 전쟁파와 외교파가 일왕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종교적 광신에 휩싸이는 과정을 도쿄의 권력 최상층부에 현미경을 들이대며 보여준다. 이 책의 번역 출간은 때늦은 감이 있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시중에 태평양 전쟁 전반을 다룬 통사는 단 한 권도 없다.” 한국의 해방을 직접 가져온 것이 미군의 태평양전쟁 승전인데도 우리는 주로 중국을 무대로 벌어진 무장투쟁이나 의열 투쟁에만 큰 관심을 갖는 경향이 없지 않다. 책 서두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다리를 다쳤던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미주리호에 오른 사진은 그만큼 상징적이다. 제목만 보고 최근 한일 갈등 국면에서 ‘심리적 위안’이 될 책이라고 믿는다면 오해다. 저자의 시선은 ‘일본이 이래서 망했다’는 것보다는 무모했지만 강력했던 적을 이해하려는 데 가깝다. 1970년 첫 출간 당시 원제는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Japanese Empire’. 에필로그는 패전 몇 달 뒤 황궁과 맥아더 사령부에 번갈아 절을 하는 한 나무꾼의 행동으로 마무리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는 길 건너편에 있는 영원한 존재(일왕)를 숭배하면서 지금의 쇼군(맥아더 장군)이 가진 일시적인 권력을 솔직하게 받아들였다.” 이처럼 일왕과 천황제도에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은 종전은 일본이 제대로 된 반성 없이 전후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다수 일본인에게 종전은 강자 미국을 받아들이는 문제였지 반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책임에 대하여’가 다루는 주제로 이어진다. ‘책임에…’는 자이니치(在日·재일) 조선인 2세로 일본의 우경화와 국민주의의 위험성을 비판해 온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교수와, 일본의 역사왜곡과 인권 문제를 지적해 온 비판적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대학원 교수의 대담집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오키나와 미군기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천황제의 모순 등을 다루면서 현대 일본이 퇴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다카하시 교수는 일본의 현재를 상징하는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천황제가 전쟁 전과 전쟁 중에 야기한 참화에 대해 아키히토 (전) 일왕 자신도, 일본 정부도 공식적으로 반성의 뜻을 표한 적이 없다. 일왕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천황제”라며 “반 민주주의적 사상이 일본의 정치 속에 뿌리 깊이 남은 것도 천황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천황제는 근대 일본의 몬스터 같은 제도로, 실체 없는 유령 같은 것을 설정해 놓고 대립을 조정하며, 그 결과를 지배층의 이익으로 회수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 중기 노비 신분의 한 어부가 있었다. 외국어를 잘한 그는 우연히 외국으로 잡혀갔다가 큰 섬이 조선의 영토라고 강력히 주장해 외국 정부의 공식 문서를 받아냈다. ‘드라마틱하지만 개연성은 떨어지는 듯한’ 이 이야기는 숙종 때 실존인물인 안용복(1658?∼?)의 행적이다. 혹시 숨은 배경은 없는 걸까. 안용복의 1696년 2차 도일(渡日)이 소론(少論) 정권의 밀사 파견이었다는 설을 내놨던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1693년 1차 도일의 성격에 관해 새로운 주장을 했다. 최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울릉도 쟁계(爭界)를 촉발한 안용복의 1차 도일은 일본 어민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 아니라 안용복이 고의로 납치를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먼저 1차 도일 당시 일본의 대응이 자연스럽지가 않다고 했다. 일본은 안용복을 수인(囚人)으로 취급하다가 나중에는 표류민(漂流民)으로 대우했는데, 그 대우가 지나치게 융숭했다는 것.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요나고에서 조선인의 구서(口書·진술서) 및 (저들이) 소지하고 있던 서(書) 3통, 작은 칼(小刀) 1본을 에도에 보냈다.” 안용복이 머무르던 돗토리번(鳥取藩)의 공식 일지인 ‘공장(控帳)’의 1693년 4월 30일 기록이다. 진술서와 함께 에도 막부에 파발을 띄워 보낼 정도로 중요한 ‘서(書) 3통’을 왜 우연히 납치된 어부가 갖고 있었을까. ‘서 3통’에 관해 또 다른 일본 사료인 ‘어용인일기(御用人日記)’에서는 ‘품속에 간직한 서부 3통’(懷中之書付三通)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서 3통’이 울릉도 관련 내용인지, 조정의 인물이 일본에 보내는 서한인지, 신원보증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1차 도일이 단순 납치가 아니었음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라고 말했다. 안용복 일행의 소지품도 심상치가 않다. 최 교수는 안용복과 함께 납치당한 박어둔이 챙긴 ‘보따리’는 중요한 물건을 쌀 때 쓰는 ‘비단 보자기’로 번역하는 게 옳다고 봤다. 갓(笠), 실띠(打帶)도 있었는데, 실띠는 사대부가 정장을 할 때 쓰는 관대(冠帶)라는 것. 반면 어렵 도구는 갈고리 하나뿐이었다. 최 교수는 “소지품도 안용복 일행이 예사 어부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돗토리번사’ 등에는 안용복이 납치되기 한 해 전인 1692년에도 전복을 따던 조선인과 일본인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충돌하면서 대화한 기록이 나온다. 최 교수는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이 1년 간격으로 울릉도에서 조우했고, 조선 어부들 가운데 일본어를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라며 “안용복이 1692년부터 울릉도를 통해 도일할 기회를 엿봤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안용복이 에도에 실제 갔는지에 대한 논쟁에 관해서는 “납치와 직접 관련된 오오야 가문의 고문서에 일행의 에도행이 기록돼 있고, ‘죽도기사’ 9월 4일자에 실린 ‘조선인구상서(朝鮮人口上書)’에는 일행이 ‘34일간 돗토리에 체류했다’고 써 있다”며 “이 기간에 안용복이 은밀하게 에도에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사진)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문화재청은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매주 수∼토요일만 하루 2회(오전 10시 반, 오후 2시 반) 근정전 내부를 특별 관람 형식으로 개방한다고 밝혔다. 평소 관람객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봐야 하지만 이 기간에는 전문 해설사가 미리 관람 신청한 이들을 근정전 내부로 안내한 뒤 기능과 상징, 구조물을 설명한다.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朝會), 외국 사절 접견 등 국가적 의식이 열리던 중심 건물이다. 궁궐 정전은 그동안 문화재 훼손과 사고 우려 탓에 관람객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최근 내부를 정비하고 안전요원을 배치해 올 3월과 4월 각각 창덕궁 인정전과 창경궁 명정전을 개방한 바 있다. 1회당 20명으로 내부 관람 인원이 제한된다. 관람 희망일로부터 7일 전 오전 10시부터 하루 전까지 경복궁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된다. 중학생 이상 또는 만 13세 이상만 관람 가능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문화재청은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매주 수~토요일만 하루 2회(오전 10시 반, 오후 2시 반) 근정전 내부를 특별 관람 형식으로 개방한다고 밝혔다. 평소 관람객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봐야 하지만 이 기간에는 전문 해설사가 미리 관람 신청한 이들을 근정전 내부로 안내한 뒤 기능과 상징, 구조물을 설명한다.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朝會), 외국 사절 접견 등 국가적 의식이 열리던 중심 건물이다. 십이지신과 사신상으로 장식된 상·하층의 이중 월대(月臺 또는 越臺) 위에 세워져 위엄이 더하다. 중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위아래가 트여 더욱 웅장하며, 천장 가운데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한 쌍의 황룡 조각이 설치돼 있다. 어좌(御座) 뒤로 병풍 ‘일월오봉병’이 둘러져 있다. 궁궐 정전은 그동안 문화재 훼손과 사고 우려 탓에 관람객에 개방되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최근 내부를 정비하고 안전요원을 배치해 올 3월과 4월 각각 창덕궁 인정전과 명정전을 개방한 바 있다. 1회당 20명으로 내부 관람 인원이 제한된다. 관람 희망일로부터 7일 전 오전 10시부터 하루 전까지 경복궁 인터넷 홈페이지(www.royalpalace.go.kr)에서 신청하면 된다. 중학생 이상 또는 만 13세 이상만 관람 가능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명성교회의 ‘부자(父子)세습’은 교회법상 불법이라는 교단의 판결이 나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재판국(강흥구 재판국장)은 명성교회 설립자 김삼환 목사(73)의 아들 김하나 위임목사(45) 청빙(請聘·교회가 목사를 구함) 결의 무효소송 재심 재판에서 청빙 결의는 위법하다고 5일 판결했다. 재판국원 15명 가운데 14명이 판결에 참여했으며 표결 결과는 공개하지 않았다. 김삼환 목사가 1980년 설립한 명성교회는 등록 교인이 10만 명에 달하는 예장 통합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다. 예장 통합노회는 2013년 ‘교회 세습 금지’를 교단 헌법으로 결의했다. 그러나 명성교회는 김 목사가 정년퇴임하고 2년 뒤인 2017년 아들인 김하나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교단 헌법은 “은퇴하는 담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는 담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다”로 규정돼 있다. 명성교회는 김 목사가 이미 은퇴했기 때문에 ‘은퇴하는’ 목사가 아니어서 교단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명성교회가 속한 서울동남노회는 ‘서울동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 무효 소송을 냈다. 지난해 8월 교단 재판국은 청빙이 적법하다며 명성교회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교단 총회는 재판국원을 전원 교체한 뒤 재심을 진행했다. 명성교회 측은 6일 장로 일동 명의의 입장문에서 “재판국원이 전원 교체되고 판결이 연기, 번복된 것은 이 사안이 법리적으로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후임 목사 청빙은 당회와 공동의회의 투표라는 민주적 결의를 거쳐 노회의 인준을 받은 적법한 절차였다”고 밝혔다. 강동원 명성교회 장로는 “교회가 교단을 탈퇴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명성교회의 ‘부자(父子)세습’은 교회법상 불법이라는 교단의 판결이 나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재판국(강흥구 재판국장)은 명성교회 설립자 김삼환 목사(73)의 아들 김하나 위임목사(45) 청빙 결의 무효소송 재심 재판에서 청빙 결의는 위법하다고 6일 판결했다. 재판국원 15명 가운데 14명이 판결에 참여했으며 표결 결과는 공개하지 않았다. 김삼환 목사가 1980년 설립한 명성교회는 등록 교인이 10만 명에 달하는 예장통합 교단의 대표적 교회다. 예장 통합노회는 2013년 ‘교회 세습 금지’를 교단 헌법으로 결의했다. 그러나 명성교회는 김 목사가 정년퇴임하고 2년 뒤인 2017년 아들인 김하나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교단 헌법은 “은퇴하는 담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는 담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다”로 규정돼 있다. 명성교회는 김 목사가 이미 은퇴했기 때문에 ‘은퇴하는’ 목사가 아니어서 교단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명성교회가 속한 서울동남노회는 ‘서울동남노회정상화를위한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김하나 목사 청빙결의 무효 소송을 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교단 재판국은 청빙이 적법하다며 명성교회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교단 총회가 재판국원을 전원 교체했고, 재심에서 원심을 뒤집은 이번 판결이 나왔다. 명성교회 대외협력실장인 강동원 장로는 이번 판결에 대해 “법리적으로 잘못됐다”며 “재재심 청구도 가능한데, (교회와 교단이) 시간을 두고 조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교인이 목사 청빙권을 가지며 개별 교회가 자율권을 갖는다는 게 장로교의 기본 교리”라면서도 “명성교회가 교단을 탈퇴하거나 사회법에 따라 법원에 소송을 낼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바다 냄새, 솔향기, 그리고 책 냄새. 4일 오후 강원 강릉시 연곡해변캠핑장의 소나무 숲에 자리 잡은 ‘책 읽는 버스’에는 세 가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해수욕을 마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아이들과 부모들이 시원한 버스 안으로 모여들었다. ‘책 읽는 버스’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운영하고 KB국민은행이 후원하는 이동도서관이다. 대형버스를 개조해 서가와 영상·음향시설, 긴 의자를 설치하고 책 1000여 권과 DVD 100개를 들여놨다. 평소 도서관이 먼 산간 도서 지역의 마을이나 농어촌,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 현장을 다니는데 이번에는 휴가철을 맞아 강원도의 캠핑장을 찾은 것. 친구 사이로, 가족들이 함께 피서를 온 설유빈 양(서울 월촌초 6)과 서예린 양(서울 가락초 6)이 나란히 버스에 올랐다. “해변에 도서관이라니! 학교에서는 책을 조용히 봐야 하는데, 여기는 그네에 앉아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니까 더 좋네요.”(설 양) “소나무 향기가 나는 곳에서 책을 보니 읽고 싶은 기분이 더 나네요.”(서 양) ‘책 읽는 버스’와 피서객들이 해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곳을 찾다 보니 피서지에서 버스 만나기를 기다리는 팬도 생겼다. 가족과 함께 캠핑장에 놀러 온 윤호상 군(경기 광명시 철산초 6)은 작년에도 이 캠핑장에서 버스를 만났고, ‘탈무드’를 선물로 받아 가기도 했다. 윤 군은 “올해 또 버스가 와 있는 거 보고 정말 반가웠다”고 말했다. 윤 군의 어머니는 서가에서 ‘82년생 김지영’(조남주 지음)을 뽑아 들었다. 그는 “이번에도 책 읽는 버스가 캠핑장에 오길 바랐는데 운이 좋았다. 버스에 볼만한 책이 되게 많다. 일정이 맞아 내년에도 버스와 같은 기간에 여기로 휴가를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버스가 지난달 26∼31일 찾은 강원 속초시 설악동 오토캠핑장에 온 최민아 씨(경기 군포시)도 “작년에는 연곡해변캠핑장에서 책 읽는 버스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여기서 만나서 또 책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 “공부를 할 때!” “시험을 볼 때!” “6교시 할 때!” 버스 안에 둘러앉은 초등학생 20여 명이 동화 ‘눈물바다’(서현 지음)를 함께 읽은 뒤 “언제 화가 나?”라는 물음에 큰 소리로 외쳤다. 강릉에서 독서치료를 접목한 심리상담소 ‘마음놀이터’를 운영하는 최혜경 씨(52)가 자원봉사자로 나서 같이 책을 읽고 다섯 글자로 자신의 감정에 관해 답하도록 한 것. 아이들은 “게임 졌을 때” “만화 못 볼 때” 슬프다고 했다. 종종 학교에서 독서 수업을 한다는 최 씨는 “학교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며 “‘책 읽는 버스’처럼 놀러 와서 느긋하게 책을 보는 자유로움을 학교에서 독서할 때도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럼 아이들은 “언제 행복해?” 질문에 다섯 글자로 뭐라고 답하며 소리쳤을까. “책을 읽을 때!” “여행을 갈 때!” “지금 이 순간!”이었다. 기훈 군(광명 철산초 4)은 “독서 선생님이 특별한 일이 없어도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책 읽는 버스는 피서객들이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고 책을 빌려가도록 한다. 날마다 50권 정도를 대여한다. 각자 숙소에서 보고, 다음 날 오전 반납하면 된다. 종종 “뭘 보고 날 믿고 책을 빌려주느냐”, “내가 책을 안 돌려주면 어쩌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독서가들의 인성을 믿는다”는 게 운영진의 말이다. 실제 책 회수율은 ‘99.9% 이상’이라고 한다. 최현진 씨(41)는 김애란 소설가의 ‘바깥은 여름’을 빌려가면서 “휴가 오면서 가족들이 집에서 책을 한 권씩 챙겨왔는데, 안 갖고 와도 될 뻔했다”고 말했다. 버스에 오른 한 학생은 ‘책버스’로 삼행시를 이렇게 지었다. “책을 읽는 것은/버려지는 시간들을/스스로 구원하는 기회다.” 이날 버스에서는 배지 만들기, 논어와 탈무드 등의 포켓북 배포 행사도 열렸다. ‘책 읽는 버스’는 8일까지 연곡해변캠핑장에 머무르고, 10∼12일에는 경남 통영한산대첩 축제 현장을 찾아간다. 책 읽는 버스 방문 신청은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강릉=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바다냄새, 솔향기, 그리고 책 냄새. 4일 오후 강원 강릉시 연곡해변캠핑장의 소나무 숲에 자리잡은 ‘책 읽는 버스’에는 세 가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해수욕을 마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아이들과 부모들이 시원한 버스 안으로 모여들었다. ‘책 읽는 버스’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운영하고 KB국민은행이 후원하는 이동도서관이다. 대형버스를 개조해 서가와 영상·음향시설, 긴 의자를 설치하고 책 1000여 권과 DVD 100개를 들여놨다. 평소 도서관은 먼 산간 도서 지역의 마을이나 농어촌,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 현장을 다니는데 이번에는 휴가철을 맞아 강원도의 캠핑장을 찾은 것. 친구 사이로, 가족들 함께 피서를 온 설유빈 양(서울 월촌초 6)과 서예린 양(서울 가락초 6)이 나란히 버스에 올랐다. “해변에 도서관이라니! 학교에서는 책을 조용히 봐야 하는데, 여기는 그네에 앉아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니까 더 좋네요.”(설유빈) “소나무 향기가 나는 곳에서 책을 보니 읽고 싶은 기분이 더 나네요.”(서예린) ‘책 읽는 버스’와 피서객들이 해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곳을 찾다보니, 피서지에서 버스를 만나기를 기다리는 팬도 생겼다. 가족과 함께 캠핑장에 놀러 온 윤호상 군(경기 광명시 철산초 6)은 작년에도 이 캠핑장에서 버스를 만났고, ‘탈무드’를 선물로 받아 가기도 했다. 윤 군은 “올해 또 버스가 기다리는 거 보고 정말 반가웠다”고 말했다. 윤 군의 어머니는 서가에서 ‘82년생 김지영’(조남주 지음)을 뽑아들었다. 그는 “이번에도 책 읽는 버스가 캠핑장에 오길 바랐는데 운이 좋았다. 버스에 볼 만한 책이 되게 많다. 일정이 맞아 내년에도 버스와 같은 기간에 여기로 휴가를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버스가 지난달 26~31일 찾은 강원 속초시 설악동 오토캠핑장에 온 최민아 씨(경기 군포시)도 “작년에는 연곡해변캠핑장에서 책 읽는 버스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여기서 만나서 또 책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 “공부를 할 때!”, “시험을 볼 때!”, “6교시 할 때!” 버스 안에 둘러앉은 초등학생 20여 명이 동화 ‘눈물바다’(서현 지음)를 함께 읽은 뒤 “언제 화가 나?”라는 물음에 큰 소리로 외쳤다. 강릉에서 독서치료를 접목한 심리상담소 ‘마음놀이터’를 운영하는 최혜경 씨(52)가 자원봉사자로 나서 같이 책을 읽고 다섯 글자로 자신의 감정에 관해 답하도록 한 것. 아이들은 “게임 졌을 때, 만화 못 볼 때” 슬프다고 했다. 종종 학교에서 독서 수업을 한다는 최 씨는 “학교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며 “‘책 읽는 버스’처럼 놀러 와서 느긋하게 책을 보는 자유로움을 학교에서 독서할 때도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럼 아이들은 “언제 행복해?” 질문에 다섯 글자로 뭐라고 답하며 소리쳤을까. “책을 읽을 때!”, “여행을 갈 때!”, “지금 이 순간!”이었다. 기훈 군(광명 철산초 4)은 “독서 선생님이 특별한 일이 없어도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책 읽는 버스는 피서객들이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고 책을 빌려가도록 한다. 날마다 50권 정도를 대여한다. 각자 숙소에서 보고, 다음날 오전 반납하면 된다. 종종 “뭘 보고 날 믿고 책을 빌려주느냐”, “내가 책을 안돌려주면 어쩌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독서가들의 인성을 믿는다”는 게 운영진의 말이다. 실제 책 회수율은 ‘99.9% 이상’이라고 한다. 최현진 씨(41)는 김애란 소설가의 ‘바깥은 여름’을 빌려가면서 “휴가 오면서 가족들이 집에서 책을 한권 씩 챙겨왔는데, 안 갖고 와도 될 뻔 했다”고 말했다. 버스에 오른 한 학생은 ‘책버스’로 삼행시를 이렇게 지었다. “책을 읽는 것은/버려지는 시간들을/스스로 구원하는 기회다.” 이날 버스에서는 배지 만들기, 논어와 탈무드 등의 포켓북 배포 행사도 열렸다. ‘책 읽는 버스’는 8일까지 연곡해변캠핑장에 머무르고, 10~12일에는 경남 통영한산대첩 축제 현장을 찾아간다. 책 읽는 버스 방문 신청은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 강릉=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여러 차례 위기를 겪은 강원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건설 사업이 최근 시공사 변경으로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부터 사업 주체로 전면에 나선 영국 멀린사 측이 현대건설을 새 시공사로 선정하자 강원중도개발공사(기존 시행사)와 계약하고 기반공사를 해온 STX건설이 반발하고 나섰다. 레고랜드 건설에 반대하는 지역 시민단체들은 “강원도가 준비 없이 낙관적 기대만 가지고 공공재산의 개발에 뛰어들었다”며 “도가 땅을 100년간 무상으로 내주고, 부지 조성까지 해주고도 이익과 경제효과는 의심스러운 이 사업을 전면 중단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화재 훼손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중도에서는 우리나라 발굴 사상 최대 규모의 청동기 유적이 발견됐다. 중요 문화재가 있는 지역의 개발은 제한되는 게 정상인데, 1980년대부터 이미 유적이 발굴된 중도는 어떻게 개발 허가가 난 것일까. 매장문화재법에 따라 문화재 유존지역은 임의로 발굴할 수 없다. 건설공사를 위해 부득이한 경우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실제 심의는 문화재위원회 매장문화재분과위원회(매장분과위)가 한다. 유적 훼손 논란에 강원도는 “문화재청의 지침을 따랐다”고,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의 심의, 현장조사, 시굴조사를 거쳐 발굴을 허가했다”고 해명해왔다. 전문가들이 결정한 대로 했다는 얘기다. 모든 사태의 주범은 정말 ‘마와 우엉’일까. 2011년 8월 26일 열린 매장분과위에 강원도가 신청한 ‘하중도 관광지개발사업부지 내 유적 발굴’이 심의 안건으로 올랐다. 여기서 발굴 불가를 결정했다면 중도 개발은 불가능했다. 이날 안건 참고사항에는 “마와 우엉 등 심경작물이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있어 지표하에 매장돼 있는 유적의 보존에 급격한 영향을 주고 있는 실정”이라고 쓰여 있다. 내버려 두면 뿌리가 긴 식물이 유적을 훼손하니 발굴이 시급하다고 강원도가 주장한 것이다. 문화재위원 3명이 그해 9월 15일 중도를 현장 조사했다. 그리고 “시굴 대상지의 50% 정도가 마·우엉의 경작으로 인하여 유적의 훼손이 심각한 상태”라고 보고했다. 의문 하나. 회의록에 ‘○○○’로 기록된 당시 현장 조사위원들은 무엇을 근거로 땅속 깊이 묻힌 유적의 훼손이 심각한 상태라고 판단했을까? 확실한 건 나중의 발굴조사 결과 작물로 인한 유적 훼손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해 9차 매장분과위(9월 23일)는 중도 61만여 m²의 발굴을 가결했고, 문화재청은 그해 10월 17일 시굴조사를 허가했다. “유구가 파괴됐다고 지레짐작하고 (레고랜드를 개발하는) 조건부로 발굴 허가가 나갔던 거 같습니다.” 고고학자인 심정보 한밭대 명예교수(69)는 23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심 교수는 대규모 발굴조사가 시작된 뒤인 2013년 5월부터 2015년 4월까지 매장분과위원장을 지냈다. 그럼 ‘한국고고학 역사상 최대의 청동기 마을유적’ 위에 테마파크가 들어서게 된 건 강원도와 고고학자들이 유적의 안위를 지나치게 염려한 탓일까.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76)을 최근 만났다. 2011년 5월부터 2013년 4월까지 지 이사장은 매장분과위 위원장을 지낼 당시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승인했다. 1980년대 초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 재직 시절 중도를 직접 발굴하기도 했다. 당시 조사단은 발굴 조사를 5차례 했고, 보고서를 5권 냈다. ―중도 개발을 위한 발굴을 애당초 왜 승인했나. “중도에서 유구가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지 이사장) 시굴조사 뒤인 2013년 4월 매장분과위는 “건축 계획은 발굴 결과에 따라 재검토가 가능하다”는 조건을 달아 본격 발굴 허가를 내줬다. 2013년 10월 본격 발굴을 시작했다. 이듬해까지 둘레 약 404m(면적 약 1만 m²)의 한반도 최초 발견 방형(方形·네모) 환호(環濠)를 비롯해 주거지 925기, 수혈 364기, 지석묘 100기를 비롯해 1412기의 유구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 매장분과위원장인 심정보 교수는 “유구가 어마어마하게 나왔다”고 회고했다. ―그때라도 개발을 전면 중지시킬 수 없었나. “강원도가 레고랜드를 만든다고 수백억 원을 들였고 발굴조사를 했는데, 사업을 못 하게 했다면 ‘전 문화재위가 허가했는데 왜 못 하게 하느냐’고 소송이 들어왔을 것이다. 매장분과위원들이 환호 주변이라도 보호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심 교수) 심 교수는 “환호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겠다고 문화재청장에게 발언도 했다”고 회고했다. 2014년 9월 매장분과위는 환호와 주거지를 복토(覆土·흙을 덮음)해 보존하고, 상부에 유적의 성격을 살리는 재현 방안을 마련하라고 결정했다. 묘역식 지석묘는 이전 복원을 결정했다. 논쟁 끝에 2016년 3월 환호 지역을 보존구역으로 새로 설정하는 최종 절충안이 나왔고, 레고랜드를 이 계획대로 건설할 예정이다. 건설 계획을 살펴보자. 환호와 인근 구역은 복토해 보존하고, 그 위에는 청동기시대 방형 환호와 대형 주거지 모형을 재현한다. 지석묘도 여기에 이전한다. 이게 유적공원이다. 유적공원 이외의 다른 곳은 어떨까? 유적공원이 되는 곳 서남쪽 구역에도 중도유적의 대표적 유구라 할 만한 주거지 약 1000기가 밀집해 있다. 이곳을 흙으로 덮은 위에 레고랜드 시설과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확인된 유적은 복토해 원형 보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고 밝혔다. 흙을 덮었으니, 땅속에 원형이 보존된다는 게 문화재청 해명이다. 땅속 유적 위로 대규모 위락시설이 들어서는 걸 원형 보존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렸다. 중도 발굴이 ‘초스피드’로 이뤄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저서에서 “청동기시대 중도는 춘천 일대의 손꼽히는 도시였을 것”이라면서 “이 정도 규모라면 당연히 수십 년을 두고 천천히 조사를 해야 한다”고 썼다. 이번 중도 발굴은 2013∼2017년 5년 동안 진행했다. 개발 반대와 중도 유적 보존 활동을 벌여 온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75)는 기자에게 발굴 현장 사진 2장을 보여줬다. 그가 2016년 8월 23일 국회의원을 대동하고 방문해 찍은 사진에는 지석묘군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0월 27일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에는 지석묘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지석묘가 15기 있었다. 그리고 그 40cm 아래서 지석묘 3기와 목관묘 1기가 확인됐다. 그러니 모두 19기다. 19기를 두 달 만에 걷어내고 철거를 한 거다. 이건 해치웠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문제는 발굴 정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아 졸속 발굴 주장이 옳은지 틀린지도 검증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한 고고학자는 중도 발굴 당시 현장을 참관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참관하려고 가면 입구에서 막아버렸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아지고, 항의를 하니 뒤늦게 마지못해 몇 군데 공개했는데 가보면 다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이 학자는 “고고학 발굴의 핵심은 공개”라며 “혹시라도 누군가 졸속 발굴할 마음을 품고, 정보를 통제한 뒤 파버리면 발굴을 제대로 한 것인지 나중에는 검증할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2017년 11월 발굴이 끝났음에도 정식 발굴보고서 발간이 지체되는 것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문화재 ‘구제 발굴’의 근본적인 문제도 거론된다. 구제 발굴은 토목이나 건설 공사에 앞서 유적을 발굴해 ‘구제’하는 걸 말한다. 그러나 연구와 보존보다는 개발을 위해 ‘해치우는’ 측면이 강하다는 지적이다. 이형구 교수는 “중도 역시 테마파크와 호텔을 지으려니 전면 발굴하는 것이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일부만 발굴하고, 대부분 원상태 그대로 놔둬 기술이 더 발전한 뒤 후손들에게 조사할 기회를 줄 수 있다. 로마 유적도 상당수가 지하에 그대로 있지 않는가.” “우리나라 고고학 분야에서 굉장히 중요한 학회의 학회장을 지낸 교수 한 분이 찾아와 말했다. ‘정말 죄송하다. 학계가 반대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고….” 레고랜드 개발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오동철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장(58) 말이다. 고고학계가 개발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사정’은 무엇일까. 한 고고학자는 학자 역시 ‘발굴권’ 앞에서 ‘을’일 뿐이라고 털어놨다. “교수들도 구제 발굴을 한다. 발굴 허가는 문화재청이 낸다. 한마디로 문화재청이 고고학자에게도 ‘갑’이다. 발굴 용역으로 무시하지 못할 금액이 오가는데, 그걸 받아 발굴하는 이들이 정부나 지자체에 대놓고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정부가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종속시키고 있는 거다.” 중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강인욱 교수는 “강원 지역에 살았던 예맥족의 선조”라고 봤다. 이형구 교수는 “나중에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라고 본다. 그들을 뭐라고 부르건 간에 중도에 살았던 이들이 한국인의 한 기원을 이룬다는 건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특히 중도 유적은 시대적으로 신석기부터 청동기, 철기까지 우리나라 고대사를 관통한다. 유구 3090기(청동기 환호 1기, 원삼국 환호 1기, 주거지 1423기, 지석묘를 비롯한 분묘 166기 등)를 발견했다. 환호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주거 공간, 생산 공간, 경작구역, 분묘 구역이 질서 있게 분할돼 마치 고대의 기획 도시와 같다는 평가도 나온다. 유물도 9222점(금 귀걸이, 토기 등)이나 나왔다. 특히 집 자리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을 두고 “동북아 청동기시대 연구에 획을 긋는 자료”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금까지 비파형동검은 거의 예외 없이 고인돌 같은 특수한 무덤에서만 발견됐다. 그러나 중도 유적의 발굴로 집에서 사용될 정도로 일반화됐다는 것이 밝혀졌다. 각종 규제로 개발에서 소외된 이들의 심정은 사실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 오동철 사무국장은 “춘천은 상수원 보호 등 각종 규제로 개발에서 소외돼 지역이 낙후했다는 인식이 강한 게 사실”이라며 “일자리가 1만 개 창출된다고 하니 지역민들이 대단한 사업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꼭 이처럼 가치가 높은 유적지를 개발해야 했을까. 만약 경주의 고분군을 묻어버리고 위에 산업단지를 조성하면 어떨까. 이런 발상이 불쾌한 까닭은 한국인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문화재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00년 넘게 한곳에서 사람들이 산 흔적을 간직한 춘천 중도는 ‘청동기시대의 천년고도 경주’라고도 할 수 있다. 영국은 스톤헨지가 있는 솔즈베리 평원을 통째로 보존한다. 중국은 랴오닝(遼寧)성 우하량의 홍산문화 유적에 유리돔을 씌웠다. 일본은 중도보다도 규모가 작은 요시노가리 유적의 개발을 중단시키고, 역사 공원으로 보존시켰다. 만약 레고랜드 건설 사업 중단을 결정한다면 강원도가 이미 쓴 돈은 매몰비용이 된다. 계약 해지로 인한 파장도 작지 않을 것이다. 평소 5000년 역사의 문화민족이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우리는 한반도에서 면면히 사람이 살았던 증거를 놓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도시인이라면 일상을 어디서들 보내시는지? 집과 일터, 주말에는 대형마트나 고작해야 키즈카페? 사정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부유한 미국인이 사적 영역에서 향유하는 편의시설이나 여가시설과 비교하면, 공공시설의 여건은… 훨씬 더 나빠졌다.” 미국의 도시사회학자가 동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교류하는, 가정도 일터도 아닌 ‘제3의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다. 직원이나 배우자, 부모로서만 살아가는 건 사실 좀 안쓰러운 일이다. 새로운 사회적 지지와 유대감을 원한다면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커피하우스, 펍, 카페, 이발소, 미용실 등이 ‘제3의 장소’가 됐지만 근대 도시화 과정에서 의미가 퇴색했다. 그런 사정은 우리도 다름없다. ‘제3의 장소’는 풀뿌리 민주주의에도 중요하다. 기자도 주차장 대신 공원을 만들자는 운동을 벌여 성공시킨 경기 부천시의 한 ‘작은 도서관’ 동화 읽기 모임을 만난 적이 있다. 1989년 초판이 나왔고, 1999년 개정판을 번역했으니 벌써 20, 30년이 된 책이지만 오히려 우리 사회에는 오늘날 주목할 만한 주제다. 동네에 ‘작은 도서관’ 같은 제3의 장소가 있다면 시간을 내 문을 두드려 보자. 마음을 열 준비가 된 이웃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으니.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도시인이라면 일상을 어디서들 보내시는지? 집과 일터, 주말에는 대형마트나 고작해야 키즈카페? 사정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부유한 미국인이 사적 영역에서 향유하는 편의시설이나 여가시설과 비교하면, 공공시설의 여건은… 훨씬 더 나빠졌다.” 미국의 도시사회학자가 동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교류하는, 가정도 일터도 아닌 ‘제3의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다. 직원이나 배우자, 부모로서만 살아가는 건 사실 좀 안쓰러운 일이다. 새로운 사회적 지지와 유대감을 원한다면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커피하우스, 펍, 카페, 이발소, 미용실 등이 ‘제3의 장소’가 됐지만 근대 도시화 과정에서 의미가 퇴색했다. 그런 사정은 우리도 다름없다. ‘제3의 장소’는 풀뿌리 민주주의에도 중요하다. 기자도 주차장 대신 공원을 만들자는 운동을 벌여 성공시킨 경기 부천시의 한 ‘작은 도서관’ 동화 읽기 모임을 만난 적이 있다. 1989년 초판이 나왔고, 1999년 개정판을 번역했으니 벌써 20, 30년이 된 책이지만 오히려 우리 사회에는 오늘날 주목할 만한 주제다. 동네에 ‘작은 도서관’ 같은 제3의 장소가 있다면 시간을 내 문을 두드려 보자. 마음을 열 준비가 된 이웃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으니.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새로운 모양의 백제 은제 관식(冠飾·관모에 부착하는 장식)이 전남 나주시 송제리 고분에서 출토됐다.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임승경)는 송제리 고분을 조사한 결과 풀잎 모양의 은제 관식을 비롯해 은제 허리띠 장식, 청동 잔, 등자(등子·발걸이)와 말다래(말 옆구리에 늘어뜨리는 네모난 부속) 고정구, 호박으로 만든 관옥 등이 나왔다고 밝혔다. 송제리 고분은 이미 도굴된 상태로 1987년 세상에 알려졌다. 관식은 백제 고위관료가 착용했으며, 지배층 고분에서 주로 나온다. 기존에는 은으로 만든 꽃봉오리 모양의 은화(銀花) 관식이 주로 발견됐다. 이번에 출토된 풀잎 모양 관식은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때를 전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함께 출토된 청동 잔과 호박옥 등은 공주 무령왕릉 출토품과 형태가 같고, 관에 쓴 못은 대가리를 은으로 감싼 것으로 백제 고위층의 무덤에서 주로 나오는 것이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출토된 유물로 보아 송제리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 성왕(523∼554) 시절 왕실 인물로 추정된다”며 “무덤이 영산강 유역의 중심지에서 꽤 떨어진 이유를 해명하는 게 과제”라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단번에 내리그은 필획에 해면 위에 칼날 같은 바위가 솟아났다. 까마득히 먼 바위 꼭대기에는 바닷새들이 한가롭다. 네 신선이 뛰놀았다는 사선정(四仙亭)은 텅 비었다. 지금은 북한 지역에 있어 가지 못하는 강원도 통천 총석정(叢石亭)을 그린 16세기 중반 그림이다. 그림을 그린 ‘상산일로(商山逸老)’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1557년 봄 홍연(생몰년 미상·1546년 사마시 진사)과 관동 지방을 유람한 뒤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며 그 풍광을 그리워했다는 걸 발문에서 알 수 있다. “그곳의 높고도 빼어난 봉우리와 깊고도 그윽한 골짜기며 천태만상의 구름과 산 기운, 아득히 넘실대는 호수와 바다를…”이라고 썼다. 경포대도 그렸다. 그림 위쪽에 오대산이 아득히 자태를 자랑하고,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경포대와 경포호, 죽도(竹島)의 풍경이 펼쳐진다. 오른쪽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경포 해변의 모래사장 ‘백사오리(白沙五里)’ 옆으로 해송이 줄지어 서 있다. 총석정도와 경포대도는 강원도 명승지를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일 뿐 아니라 실경산수화의 전통이 겸재 정선(1676∼1759) 이전부터 확립됐음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설명했다. 두 작품은 재일교포 윤익성 레이크사이드 컨트리클럽 창업주(1922∼1996)의 유족이 고인의 유지를 따라 기부한 돈으로 일본에서 구매했다. 두 작품은 9월 22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는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조선시대 실경산수화’ 전시에서 볼 수 있다. 화가 김응환(1742∼1789)이 말년에 김홍도와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린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은 일반에 처음 공개하는 작품. 이를 비롯해 16∼19세기 그림 360여 점을 볼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50년 가까이 한반도 문제를 다룬 일본의 대표적 전문가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대 명예교수의 책 ‘한반도 분단의 기원’(동서대 일본문화연구센터 편찬·나남)이 25일 번역 출간된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10월 나왔다. 책에서 그는 미소 양국의 안보관이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힘의 공백’ 지대에서 충돌했고, 한반도 분단을 낳았다고 봤다.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26일 오후 5시 열리는 출판 기념 강연회를 앞두고 일본에 있는 그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한반도 분단이라는 주제를 탐구한 동기는 무엇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영토로 간주됐다. 좋든 싫든 한반도 분단은 일본 현대사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아무도 그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그 터부를 깨고 싶었다. 또 원자폭탄의 투하가 일본과 한국에 다른 운명을 가져왔기 때문에 큰 관심을 가졌다. 사실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한반도 분단의 첫 번째 계기가 됐다.” 오코노기 교수는 책에서 집요하게 사료를 통해 미소의 군사전략을 파고들며 ‘38도선’의 기원을 찾아 나간다. 그는 원폭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방정식’이 급변했다고 봤다. 일본의 항복이 당겨지면서 미군은 대규모 상륙작전 대신 일본과 한반도에 진주작전을 기동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원폭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미소의 분할 점령을 피하는 대신 전체가 소련의 위성국이 됐을 거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광복 후 좌우합작 운동에 대해 평가해 달라. “너무 늦었다. 처칠 영국 총리가 1946년 3월 유럽을 분단하는 ‘철의 장막’ 연설을 한다. 그때 한반도의 38도선도 분단선이 됐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 무렵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시작했다.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를 포함해 좌우 양파가 적극적으로 신탁통치를 받아들였다면 다른 역사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는 가상의 세계에 속한다.” 오코노기 교수는 책에서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과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승만의 등장 등은 독립과 통일이라는 또 하나의 ‘상극’ 관계를 탄생시켰다”면서 “즉 ‘독립을 달성하려면 통일이 불가능해지고, 통일을 실현하려면 전쟁이 불가피해지는 불편한 상태’가 한반도 분단으로 이어졌다”고 썼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강대국의 안보가 충돌하는 조건은 그대로인가. “냉전이 끝났으니 당시와는 다르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아직 시스템으로서의 세력 균형이 탄생하지 않았다.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 공존이 실현되고, 그것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전에 미중 대립이 심각해지면 분단이 더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최근 한일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양쪽 국민은 격한 대립도, 극단적인 정책도 원하지 않는다고 본다. 한일 정부도, 국민도 협력의 중요성을 잊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안보상 미국을 사이에 두고 상호 의존하는 관계다.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고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는 이웃 나라다. 장래 미국과 중국의 틈새에서 미들파워로서 지정학적 전략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면 대북 경제지원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때 한국은 일본의 협력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한일 협력 없이 북한의 본격적인 개방과 개혁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건 일본에도 중요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배우 마동석(48)이 마블 영화 ‘이터널스’에 주연으로 출연한다. 마블 스튜디오는 20일(현지 시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코믹콘에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영화의 라인업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영화는 초인적 힘을 지닌 불사의 종족 ‘이터널스’에 관한 이야기로 마동석은 주연 10명 가운데 하나인 길가메시 역을 맡는다. 한국계 남자 배우가 마블 영화에서 주연하는 건 마동석이 처음이다. 이날 마동석은 함께 캐스팅된 앤젤리나 졸리 옆에서 출연 소감을 밝혔다. 리처드 매든, 샐마 하이엑 등 유명 배우도 주연을 맡는다. 개봉은 2020년 11월. 한편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해 4월 말 개봉한 ‘어벤저스: 엔드게임’은 21일까지 27억8900만 달러(약 3조2784억 원)를 벌어들여 ‘아바타’(2009년)를 제치고 세계 흥행 수입 1위에 올랐다고 월트디즈니가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