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세종의 위대함’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혹시 막연하게 ‘성군’으로 칭송하며 그를 왕조시대라는 과거에 묻어둔 건 아닐까. 한국사학계 원로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81)가 세종실록을 바탕으로 사건과 업적을 조명한 ‘세종 평전―대왕의 진실과 비밀’(경세원)을 최근 출간했다. 1일 서울 관악구의 개인 연구실 호산재에서 만난 한 교수는 정치와 경제, 문화 강국을 이룩한 세종의 통치 비결을 설명하면서 “민주주의 제도라는 하드웨어의 약점을 ‘세종 스타일’의 소프트웨어로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민주주의 제도의 큰 문제가 소수의견을 묵살하니, 소수자가 승복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후유증이 생겨요. 다수결과 투표라는 게 사실 숫자놀음이지요. 51% 찬성으로 결정했으면 반대한 49%는 잘못된 의견을 가졌던 건가요? 심지어 보통 40%대, 때로 30%대 득표를 하고도 대통령이 됩니다. 독재는 1인 독재건 다수독재건 나쁜 겁니다. ‘세종 스타일’에서 배워야 해요.” 한 교수가 말하는 ‘세종 스타일’이란, 먼저 토론과 여론을 존중하는 소통정치다. 세종의 통치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은 무한권력을 발동할 수 있는 군주지만, 의정부와 육조 대신이 여는 합동회의의 사회자로 머무르고자 했다. 소통의 테크닉이 절묘했다. “상대의 발언을 묵살하는 법이 없어요. 대신이 말하면 일단 ‘네 말이 옳다’며 기를 꺾지 않고 존중하며 의견을 말하도록 이끌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만약 대통령이 면전에서 핀잔을 하면 누가 직언하겠어요. 세종은 그걸 아는 겁니다.” 찬반이 엇갈려도 숫자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반대 의견을 보완하며 “실록을 읽다 보면 답답증이 날 정도”로 회의를 했다. “그러니까 신하들이 뒷말이 없고, 정책에 자신도 참여했다는 책임의식이 커지지요. 세종 재위 33년간 반역으로 죽은 이가 없습니다. 대화와 소통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를 한 덕입니다.” 신하뿐 아니라 백성들의 의견도 존중했다. 조세제도인 ‘공법(貢法)’을 만들 때는 시안을 만들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전국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라 볼 수 있다. 조사 결과 찬성이 많았는데도 바로 실시하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 먼저 시험하고 반대론자가 제기한 문제를 수정 보완해 14년 뒤 최종 결정했다. 이렇게 만든 ‘전분6등 연분9등’의 공법은 이후 수백 년간 이어졌다. 적지 않은 반대에도 새 제도를 덜컥 시행해놓고 예상됐던 부작용은 감추려 안달하고, 집권 뒤 상대 당파 숙청을 반복하는 오늘날 정치는 세종 대보다 후퇴한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에 토론이 제대로 이뤄집니까? 숫자로 밀어붙이고 국회가 의결하면 끝나지요. 반대파는 물리력으로 막으려 하고. 이게 뭡니까.” 반면 나라의 백년대계는 일시적인 원망이 있더라도 꾸준히 밀고 나갔다. 대표적인 게 충청 경상 전라 등 ‘하삼도(下三道)’ 주민의 북방 이주정책이다. 4진을 새로 설치한 함길도는 야인의 침략 등으로 인구가 적은데, 하삼도는 인구가 조밀하고 향리(鄕吏)의 횡포도 적지 않았다. 주요 이주 대상은 경제력이 있는 향리층이었다. 그러나 정책에 반발한 백성이 스스로 손을 자르거나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졌다. 세종은 “내 마음이 매우 괴롭다”면서도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하기만 하고, 장래를 생각지 아니하여 한갓 세월만 허비한다면…”이라며 이주정책을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한 교수는 “세종의 사민(徙民)과 사군육진 개척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동강-원산 북쪽은 중국 땅이었을 것”이라며 “세종은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세종은 ‘외교의 대가’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게 대명 사대외교로 북방영토 회복을 뒷받침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군육진 개척은 당시 당당한 명나라 백성이었던 여진족을 토벌했던 겁니다. 여진족은 명 황제에게 조선이 괴롭힌다고 호소하지요. 명은 조선이 명나라 땅을 침략한 거라고 볼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사대에 충실하고, 두만강 이북 700리까지는 조선의 땅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명의 간섭을 막았던 겁니다.” 개방적 인사정책으로 ‘흙수저의 전성시대’를 만들기도 했다. 관노비 출신으로 종3품 벼슬을 한 장영실뿐이 아니다. 24년간 정승을 지낸 황희는 서얼 출신이었고, 성균관 사성(司成)이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무당의 자식이 집현전 학사가 됐고, 아전이 종2품에 올랐으며, 노비 출신이 형조참판을 지내고, 궁궐 춤꾼의 자식이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유소년 시절 왕자 충녕(세종)을 가르친 이들의 지위가 낮았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 교수는 분석했다. 세종을 가르친 이로는 이수(1373∼1430)와 김토가 꼽힌다. 김토는 생몰연도, 본관도 모른다. 문과에 급제한 적도 없는 의관 출신이었다. 역시 평민 출신으로 보이는 황해도 봉산 사람 이수는 나중에 봉산 이씨의 시조가 됐다. 한마디로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얘기다. 한 교수는 “세종처럼 노비의 인권을 보호한 임금이 없다”며 “신하들의 주장을 따랐다가, 나중에 다시 아버지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종부법’으로 바꿨다. 세종이 노비 수를 늘렸다는 주장은 사료를 제대로 보지 않아 생긴 오해”라고 말했다. 세종도 끝까지 완벽하지는 못했다. 말년에 다섯째와 일곱째 아들, 왕비 소헌왕후를 잇달아 먼저 떠나보낸 뒤에는 매우 불행했다. 불사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두고 ‘쓸모없는 유자(儒者)’라고 부르며 멸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상태를 알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이 세종의 비범함이었다. 재위 31년 1월에는 세종이 대신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털어놨다. “내가 기뻐하고 노여워함이…요즘에는 공사(公事)한 사이에도 발작하기를 무상하게 하고…만약 한두 해가 지나면 정신이 어두워져서 전연 모를 것으로 생각한다. 경들은 알고 있으라.” 한 교수는 “세종의 명언처럼 ‘신당기로 이일유후(身當其勞 以逸遺後·내가 고통스러운 일을 감당해 뒷사람에게 편안함을 줌)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루브르 아부다비에는 거장들이 그린 명화도 있지만 여러 인류 문명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물도 굉장히 많습니다. 문명을 탐험하는 타임머신을 타고자 한다면 꼭 와보시기 바랍니다.” 아랍에미리트(UAE)가 ‘루브르’라는 브랜드 사용과 작품 대여료 등을 더해 프랑스에 1조5000억 원 넘게 지불하고 개관한 ‘루브르 아부다비’의 마누엘 라바테 관장(43)이 5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보와 만났다. 루브르 아부다비는 루브르 박물관의 첫 번째 해외 분관으로 ‘포스트 오일(Post-oil) 시대’를 대비하는 UAE의 특급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개관 당시 대여해 전시했던 다빈치, 모네, 반 고흐 등의 명화가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제작한, 세계 최고(最古)의 항아리 역시 이 박물관에 있다. 라바테 관장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존 아시아관을 개편한 ‘세계문화관’ 개관을 앞두고 이날 연 국제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다. 프랑스-박물관 기구(Agence France-Mus´eums)의 최고경영자를 지내기도 한 라바테 관장은 “프랑스 기메박물관에서 대여한 동아시아 문화재를 포함해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예술품을 루브르 아부다비에서 만날 수 있다”며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예술품을 하나의 공간에 담으면서 여러 문화와 문명 간의 연결을 보이는 게 우리 박물관의 전시 포인트”라고 했다. 관장이 가장 좋아하는 미술품도 ‘고대 요르단의 머리가 둘 달린 인물상’이라고 한다. 루브르 아부다비는 2017년 11월 개관 이후 최근까지 관람객 200만 명이 다녀갔다. 박물관의 개관 즈음 “‘오일 달러’로 문화를 살 수는 없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라바테 관장은 “지금은 프랑스 박물관계에서 우리 박물관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참신한 실험적 전시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이날 국립중앙박물관을 둘러본 라바테 관장은 특히 ‘천흥사 종’(1010년 제작)에 유난히 끌렸다고 했다. 그는 “용 모양 장식(종뉴·鐘紐)과 전체적인 볼륨감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며 “빌려가서 우리 박물관에 전시하고 싶다”고 농담을 던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2월 16일 개관하는 세계문화관은 해외 유수 박물관과 소장품을 교환 전시해 다양한 세계문화를 소개한다. 배기동 관장은 “세계 각지 문화의 고유성과 우리 문화의 가치를 더욱 확실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첫 전시로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 박물관과 협력해 ‘문명의 얼굴-이집트 문명관’을 선보일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이었던 농촌운동가 최용신(1909∼1935·사진)을 재조명한 심포지엄이 열린다. 최용신기념관은 동국대 역사교과서연구소 주관으로 8일 경기 안산시 기념관에서 최용신 탄생 11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최용신, 기억과 계승’을 개최한다. 정혜정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교수는 발표문 ‘일제하 사설교육기관과 샘골학원’에서 “일제강점기 최용신의 천곡학술강습소는 크리스천 브나로드 운동으로서 무산자 교육을 위한 계급적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의 안산시 상록구에 1929년 설립된 샘골강습소는 1932년 최용신이 당국의 인가를 받아 천곡학술강습소가 됐다. 정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학술강습소와 야학, 개량서당은 일제의 제도권 교육 사이에서 그나마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할 수 있는 틈새공간이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수가 늘어났다. 학술강습소는 농민운동과 연계됐고, 일제강점기 내내 탄압을 받았다. 기독교계 학술강습소는 탄압이 비교적 덜했지만 최용신이 운영했던 천곡학술강습소는 일제가 보기에 불온성이 강했다. 이는 신간회 수원지회 부회장이던 애국지사 염석주가 강습소 설립을 도운 것에서도 나타난다. 천곡학술강습소는 수업 시간에 민족관념을 교육하고,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를 국어라고 가르쳤다. 결국 1933년 4월 총독부는 사상운동의 진원지로 생각되는 사설 학술강습소 800여 곳과 농민조합 1100여 개를 폐쇄하기로 했다. 학술강습소가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사상의 주입’ 혹은 ‘실행소’라고 본 것이다. 최용신 사후 동생 최용경이 사업을 이어가던 천곡학술강습소도 1936년 6월 당국의 폐쇄 명령을 받았다. 당국은 강습소 폐쇄에 ‘교육의 결여’ ‘불완전한 교육’이라는 핑계를 댔다. 정 교수는 “1920년대 교육문화운동은 무산자에게 초점을 둔 인간해방의 맥락을 내포한 것이었고 1930년대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 역시 빈민, 농민, 민족을 구하는 민족해방, 계급해방의 목표를 담아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나는 … 만국기자대회에서 조선민족도 타민족에 비하야 별로히 손색이 무(無)하다는 실지의 증명을 표(表)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 동아일보 창간멤버 가운데 한 명인 김동성 기자(1890∼1969)가 1921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차 만국기자대회에 ‘코리아 대표’로 참석하고 이듬해 2월 연재한 기사의 첫머리다. 나라 없는 민족의 기자 대표로 참석한 셈이다. 김 기자는 “각국 대표석 가운데 ‘코리아’라는 이름의 좌석이 있는 것을 보고 감격했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김 기자와 같은 한국 언론학의 선구자를 조명한 ‘한국 언론학 선구자: 김동성과 김현준’(차배근 박정규 김영희 박선희 지음, 서울대출판문화원·사진)이 발간됐다. 김 기자는 1909년 미국에 유학해 신문학과 신문만화, 농학 등을 공부하고 귀국한 뒤 조사담당 기자로 본보 창간에 참여했고, 첫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신문에 만화를 도입했고, 영문 추리소설을 번역 연재해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특히 1924년 그가 펴낸 ‘신문학(新聞學)’은 미국의 실천적 저널리즘의 기초를 한국 사례와 함께 설명한 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 관련 전문도서로 평가된다. 광복 뒤에는 합동통신사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을 지냈다. 또 다른 언론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현준(1898∼1949)은 한국인 최초의 신문학 박사다. 독일 라이프치히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28년 귀국해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박사 논문인 ‘동아시아에서 근대 신문의 양태’는 한중일 신문의 모습을 개괄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동아일보의 예를 들며 “한국인에 의해 발행되고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신문은 (1면을) 국내외 정치내용의 주 사설로 시작한다”고 썼다. 잘못 알려진 김현준의 생애도 바로잡았다. 책에 따르면 김현준은 전남 나주 태생이며, 문학박사가 아닌 신문학 전공의 철학박사였고, 1949년 광주 서석동 자택에서 담석증으로 사망했다. 저자들은 “김동성과 김현준이 뿌린 신문학의 씨앗은 광복 이후 한국 언론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됐다”고 발간 취지를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아편에서 모르핀을 분리해낸 지 71년이 지난 1897년 독일 바이엘사(社)의 연구진은 모르핀을 변화시켜 새로운 물질을 만들었고, 약국에서 기침 억제제로 팔았다. 질병을 치료하는 데 영웅적인 효과를 내라는 기대를 담아 지은 이 약의 이름은 ‘헤로인(heroin)’. 이 마약이 완전히 금지되기까지는 30년 가까이 걸렸다. 대형 제약회사가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 14년 동안 15억 달러(약 1조7500억 원)가 든다고 한다. 아직도 해마다 3만 t 넘게 팔리는 아스피린은 개발 과정에서 유망하지 않다고 판단돼 그냥 묻힐 뻔했지만 연구팀이 몰래 연구를 계속해 성공했다. 35년 경력의 미국 신약 연구자와 과학 전문 작가가 공저한 책이다. 신약 발견의 역사 속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897년 설립한 회동서관의 출판물부터 오늘날까지 근·현대 주요 출판사 37곳의 출판물 110여 점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삼성출판박물관(관장 김종규)은 기획전 ‘책을 펴내다―우리 근·현대 출판사 100년’을 12월 10일까지 서울 종로구 박물관에서 개최한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근대적 체계를 갖춘 최초의 한자 자전인 지석영의 ‘자전석요’(1909년·회동서관), 희귀본으로 꼽히는 이광수의 ‘무정’ 제5판(1924년·〃) 등이 있다. 일제 당국의 검열에서 대사의 주요 부분을 삭제당한 조명희 희곡집 ‘김영일의 사’(1923년·동양서원), 불온하다는 이유로 경찰 당국이 발행인과 시인을 검찰로 불구속 송치한 임화의 시집 ‘찬가’(1947년·백양당) 등도 볼 수 있다. 김종규 관장은 “출판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전시”라고 소개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부익부 빈익빈이 나타나고 있다. 밤을 새워서라도 토론하자.”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92)는 1967년 2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교수단 평가회’에서 계획의 부작용을 이렇게 지적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각 부처 장관도 참석한 자리에서 칭찬 일변도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 당시 변 교수가 손에 들고 있던 지시봉으로 박 대통령을 가리켰다고 오해한 한 장관은 변 교수를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 상황을 말없이 지켜봤다고 한다. 31일 발간된 ‘변형윤 회고록―학현일지(學峴逸志)’(현대경영사)의 한 대목이다. 변 교수는 주류 경제학 안에서 소득 재분배와 균형적 경제발전을 주장한 원로 진보 경제학자다. 우리 학계에 계량경제학을 처음 제대로 도입해 가르친 인물이기도 하다. 회고록에는 황해도 황주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학자로서 살아 낸 우리 현대사의 장면들이 담겼다. 1960년 4·19혁명 당시 피 흘리는 학생 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분노한 그는 4월 25일 교수단 시위에 참여했고, “학자로서 말과 글로 사회운동에 참여해야겠다”고 결심이 섰다고 했다. 이후 변 교수는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찬성하면서도, 여론을 수렴하지 않고, 성과가 독점되는 부작용을 지적했다. 1971년에도 박 대통령이 참석한 교수단 평가회에서 “실업률이 공식 통계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른 참석자들은 거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서 “한국 경제의 현실과 민심의 동향이 박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서울대 교수협의회장으로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은 그는 민주화 성명 발표를 주도하면서 4년 동안 해직교수 생활을 했다. 그가 해직교수 시절 창립한 ‘학현연구실’은 오늘날 ‘서울사회경제연구소’로 발전했다. 이 연구실 출신 교수들이 ‘학현학파’로 불리지만 변 교수는 “동질적인 철학이나 이론으로 분류되지 않기에 학파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른바 ‘학현학파’가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직접 언급은 책에 없다. 변 교수는 “시장은 결함이 있기에 정부가 개입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경제학은 인간 중심의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책을 맺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훈민정음 해례본’ 등 국보 12건을 비롯해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 4000여 점을 보관하는 새 수장고의 밑그림이 드러났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는 17일 회의를 통해 간송미술문화재단의 ‘훈민정음 보호각’ 건립 설계안을 가결했다. 보호각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정문 앞쪽 2146m²에 지상 1층, 지하 2층(연면적 1218m²)으로 2021년 6월 들어설 예정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포함한 국보·보물 32건, 시도지정문화재 4건, 비지정문화재 4000여 건 등을 보관할 예정이다. 비지정문화재(전적·典籍 2500건, 회화 949건 등)에도 보물급이 수두룩하다는 평가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은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자’라는 칭송을 받는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수집하고 후손이 지켜온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 건물은 간송이 1938년 ‘보화각’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시설 노후화로 현대식 수장고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나온 지 오래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의 대부분은 2014년부터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임시로 보관돼 있다. ‘훈민정음 보호각’은 사립미술관 수장고임에도 이례적으로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44억여 원을 건립에 투입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사찰 등 문화재 다량 소장처의 보존 관리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이 보호각 건립비를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현재 미술관 건물은 옛 ‘보화각’ 모습을 살려 전시장 겸 교육관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미술관은 2014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출범했고 박물관법에 따른 정식 박물관 등록도 추진하고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단일 저서에 지급되는 상금으로는 국내 최고 수준인 3000만 원 상금의 ‘한국학 저술상’(가칭)이 제정된다. 상은 ‘고서점계의 전설’ 고(故) 산기 이겸노 씨(1909∼2006·사진)의 유지를 이은 산기재단(이사장 이동악)이 후원해 만들어진다. 이 씨는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점이자 국학 자료의 보급기지 역할을 했던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통문관’의 창업주다. ‘월인석보’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해 국보급 보물급 고서와 고문헌을 찾아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고 직지심경과 계미자 갑인자 등 옛 활자를 판별한 연구가이기도 했다. ‘청구영언’ ‘훈민정음’ ‘동국정운’의 영인본을 발간했다. 산기재단은 이번 상에 상금과 수상 도서 구입비, 심사 운영비 등 5000만 원을 후원한다. 재단 측은 “평생 우리나라 고문헌의 보존과 연구 조력에 애쓰며 전통문화의 보전 및 확산에 노력한 선생의 뜻을 잇고자 상을 제정한다”고 밝혔다. 재단은 기존에도 고문서와 고서적에 관한 각종 연구를 지원하고 장학사업을 벌여 왔다. 광복 이후 우리말로 출판된 우수 한국학 관련 학술도서 1종을 시상하며 고문서와 전적류를 다룬 학술서를 우대할 방침이다. 심사위원 9명이 올해 말까지 심사해 2020년 1월에 첫 시상을 할 예정이다. 심사와 시상은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이 주관한다. 안 원장은 “지식문화의 핵심인 우수 학술도서를 시상해 한국학 연구자들의 출판 활동을 독려하고 학문 발전과 연구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산기재단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상 제정과 재단 보유 고문헌 관리, 연구 협력에 관한 협약식을 31일 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죽음을 각오한 길이었다. 1909년 8월 30일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는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품속에 베를린에서 산 호신용 리볼버 권총이 있었지만 그 무게도 불안함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미국의 아내에게는 이미 자신의 유고 시 재산 정리와 아이들의 양육을 당부하는 유서도 남겼다. ‘서울에 가서 남겨둔 집안일도, 책도 정리해야 한다….’ 무엇보다 박사는 서울이 그리웠다. 일제는 2년 전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모자로 박사를 지목했다. 박사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특사증과 각국 원수에게 보내는 황제의 친서를 소지한 채 한국을 떠났다. 당시 박사의 일거수일투족은 서울의 통감부, 일본 외무성 등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미국에 가서는 일제의 침략을 알리는 여론전을 폈다. 스티븐스 저격 사건으로 반한 여론이 상당한 가운데 박사는 뉴욕타임스(NYT) 등을 통해 외롭게 한국을 옹호했다. 황후를 살해하고, 황제를 폐위한 일본이었다. 박사가 미국인이라고 해도 이번에 한국에 돌아오면 신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박사의 한국 입국 뒤 NYT는 “박사가 암살 표적이 됐다”는 전언을 보도했다. 신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김동진 지음·참좋은친구)를 통해 들여다본 박사의 삶 가운데 한 장면이다. 저자가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2010년) 이후 10년 가까이 자료를 추적해 보완한 박사의 삶이 촘촘하게 담겼다. 유서도 박사의 외손녀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 중 하나다(Koreans are among the world’s most remarkable people).” 저자가 찾아낸 1949년 7월 미국 ‘스프링필드유니언’지에 실린 헐버트 박사의 인터뷰다. 찢어지게 가난한 작은 신생 독립국 국민을 평가하는 표현이었으니 ‘황당한 소리’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박사는 확신했다. “한국인은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했고, 임진왜란 때 거북선으로 일본군을 격파해 세계 해군사를 빛냈으며, (조선왕조실록같이) 철저한 기록 문화를 지니고 있다”며 사례를 거론했다. 무엇보다도 “3·1운동으로 보여준 한민족의 충성심(fealty)과 비폭력 만세 항쟁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라고 강조했다. 박사가 1905년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돼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할 당시 고종과 박사가 눈물 어린 전보를 주고받았다고 보도한 NYT 1905년 12월 기사도 새로 찾아냈다. 고종은 “나 대한제국 황제는 …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노라. … 최상의 방책으로 미국과 이 조약의 종결을 이끌어내길 바라오. …”라는 전보를 박사에게 보냈다. 저자는 “황제가 늑약이 무효라고 선언한 실체적 증거가 이 전보”라고 했다. 부인 메이 헐버트가 일제의 침략을 고발한 인터뷰 기사도 책을 통해 공개했다. 메이 헐버트는 뉴욕트리뷴 1910년 5월 기사에서 “한국의 상류층은 일본 상류층에게 굴욕을 당하고, 한국 노동자들은 일본 노동자에게 좌우로 두들겨 맞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증언했다. ‘헐버트의 꿈…’에는 목숨을 걸고 한국을 사랑한 박사의 삶이 드러난다.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 한글 전용의 선구자, 한국어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민권운동가 등 박사의 다양한 면모를 각종 기고문과 편지, 저서, 회고록을 통해 재조명했다. 박사가 출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의 출간 시기가 1891년 1월이라고 확인하기도 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 “헐버트의 삶은 한국사이자 한민족 자산”▼“호머 헐버트 박사의 삶은 한국사의 일부이고, 한민족의 자산입니다. ‘외국인의 부차적인 도움’ 정도로 치부할 대상이 아니에요.”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의 저자인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69)은 25일 이렇게 강조했다. 기자가 “이름을 듣고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라고 말을 흐리자 나온 답이었다. JP모건체이스은행 한국회장을 지낸 김 회장은 대학 시절 헐버트 박사의 ‘대한제국의 종말’을 읽고 감동받아 그를 연구해 왔다. 지금도 박사의 자료를 찾으러 미국을 수시로 드나든다. 김 회장은 “고종의 밀사는 일제에 목숨을 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며 “헐버트 박사는 나중에 일제에 의해 추방돼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전역을 돌며 수천 회 강연하고 언론에 기고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강조했다. 친한파가 적었던 미국 지성사회에서 박사가 얼마나 외롭게 투쟁했는지, 김 회장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고 했다. 헐버트 박사는 별세 뒤인 1950년 건국훈장 태극장을 받았고, 태극장은 상훈체계가 바뀌면서 나중에 독립장으로 변경됐다. 독립장은 5등급의 건국훈장 가운데 대한민국장과 대통령장에 이어 세 번째다. 한국에 대한 박사의 공을 생각하면 서훈 등급을 올려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의견이다. “1950년 서훈 당시 공적 조사를 못했을 겁니다. ‘일사부재리’라는 형식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심사를 제대로 해야 해요.” 김 회장은 여전히 ‘사라진 고종의 비자금’을 추적하고 있다. “1908년 일본이 독일 은행에서 찾은 돈을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주라고 부통감이 지시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실제 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완용에게 줬다면 고종이 과연 몰랐을까요?” 실제 고종은 1909년 내탕금(임금의 개인 재산)을 찾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관련 서류를 헐버트 박사에게 줬다. 박사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이 서류들을 1948년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김 회장은 “내탕금을 찾는 건 박사의 한을 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사를 두고 ‘지덕체를 갖춘 전인격의 표상’이라고 평가한 한 교육학자의 표현에 동의합니다. 박사는 삶의 폭이 참으로 넓고 깊어서 오히려 조명이 잘 안된 면이 있다고 봐요. 이번 책은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 출판해 박사와 한국사의 진짜 모습을 해외에도 알릴 생각입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아침 하늘 환하기 전에 깨어나니/…/모든 사랑은 살아 있으라”(시 ‘아침에 부쳐’에서)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2007년 발간 시집. 작가가 1960∼1986년 쓴 것들 가운데서 골라 배치했다. 저자는 언어극 ‘관객모독’(1966년) ‘카스파’(1967년)에서 했던 전위적 실험을 시에서 이어갔다. 시인은 일상을 다른 눈으로 새롭게 보는 방식을 제안한다. “잠들 때 내가 깨어난다:/내가 대상을 보는 게 아니라 대상이 나를 본다;/…/내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이 나를 발음한다;/창문으로 가면 내가 열린다”(시 ‘전도된 세계’에서) 역자는 “언어를 분해하고 관찰하며 실험하는 동안 현실세계 전체에 의문부호를 붙이는 전위시의 면모가 드러난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의 현행 중학 역사교과서가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 피해 배상이 종료된 것처럼 서술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한국의 경제 발전이 일본의 원조 덕분이라고 오해될 만한 구절도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최보영 동국대 역사교과서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일본 중학 역사교과서 2종을 분석한 결과를 26일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이에 따르면 학교 채택률이 절반을 넘는 ‘도쿄서적’ 교과서는 일제가 침략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배상 문제를 언급하면서 “1950년대 말까지 대부분 해결됐다”고 한 뒤 “한국과는 1965년에 한일 기본조약을 맺고 한국 정부를 조선반도의 유일한 정부로 승인했다”고 서술했다. 최 연구원은 “서술의 맥락상 한국에 대한 배상이 모두 끝난 것처럼 쓰여 있다”고 밝혔다. 우익 성향으로 분류되는 이쿠호샤(育鵬社) 교과서는 ‘우리나라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국교를 맺고 중국,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다액의 경제원조(ODA)를 실시했다. 그 후 한국이나 싱가포르 등은 신흥공업국(NIES)으로 발전했다’고 기술했다. 최 연구원은 “배상 문제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고, 마치 일본의 경제 원조를 통해 한국이 발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성백제의 왕실 묘역인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화장(火葬)을 한 사람 뼈 4.3kg이 수습됐다. 백제 고분에서 화장한 인골(人骨)이 다량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으로, 한성백제 왕실의 장례 문화를 보여줘 주목된다. 한성백제박물관은 “고분군 남쪽 1호분 주변 발굴 결과 새로 발견된 적석묘(積石墓·돌무지무덤)의 매장의례부(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른 시설) 3곳에서 인골이 출토됐다”며 “한 지점에서만 인체의 같은 부위 뼈가 2개 이상 발견돼 여러 사람의 뼈로 보인다”고 23일 밝혔다. 인골은 토기를 비롯한 제사 유물과 함께 고운 점토로 덮여 있었으며 화장 뒤 잘게 분골한 것으로 분석됐다. 마치 뿌려지듯 흩어진 상태로 출토됐다. 특히 1호분과 북쪽 2호분 사이에서 남북방향 약 100m, 동서 약 40m 공간에 네모 모양의 적석묘 16기가 사방으로 빈틈없이 붙어있는 초대형 ‘연접식 적석총’이 백제 고분에서는 처음 발견됐다. 적석묘의 가장자리 한 축에 잇대어 바로 돌을 덧붙여 쌓아나가며 무덤이 확장되는 형태로 1호분과 이어져 있다. 박물관은 “1호분이 단독 무덤이 아니라 연접식 적석총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금귀걸이, 유리구슬, 중국제 청자, 토기, 기와 등 총 5000여 점의 유물도 함께 출토됐다. 박물관 부설 백제학연구소의 최진석 학예연구사는 “4세기 후반경 여러 대에 걸쳐 무덤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며 “추가 발굴에 따라 연접한 적석묘가 계속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연접식 적석총은 중국 지안시의 일부 고구려 적석총에서 길게 이어진 형태로 확인되기도 한다. 석촌동 고분군은 1970년대부터 본격 발굴조사가 이뤄진 백제의 왕릉급 고분군으로 현재 적석총 5기와 흙무덤 1기 등 총 6기가 복원돼 있다. 3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50m에 이르는 대형으로 백제의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1917년도에 제작된 고분분포도에 따르면 석촌동과 송파동, 방이동 일대에 300여 기의 대형 고분이 있었지만 전쟁과 개발로 대부분 훼손, 멸실됐다. 그러나 아직 지하에 무덤 일부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박물관은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구글 창에 ‘민족’을 넣으면 약 4110만 개의 각종 자료가 검색된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이 낱말을 널리 사용한 건 100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1919년 3·1운동이 ‘민족’이라는 단어를 대중에 전파했고, 사회 각계각층의 근대적 단체 결성을 촉발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지체된 근대로의 전환, 1919년’이라는 논문에서 “‘민족’이라는 낱말이 확산한 건 3·1독립선언서와 이후 발간한 한국어 신문 등 매체를 통해서였다”고 밝혔다. 박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한국에서 ‘民族(민족)’이 처음 사용된 건 1900년 황성신문이고, 1904년경부터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됐다. 그러나 민족은 비교적 낯선 말이었고, 대신 ‘동포’가 많이 쓰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도 “우리 동포에게 포고한다”(대한매일신보)고 했다. 국권 피탈 이후 ‘민족’ 개념의 확산에 일대 전기가 된 건 3·1운동이었다. 3·1독립선언서에서 ‘민족’은 14회 등장해 가장 많이 사용한 명사다. 33인은 ‘민족대표’를 자임했다. 각종 지하신문과 전단에서도 ‘민족’은 빈번히 등장한다.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잡지 ‘개벽’ 등이 창간한 것도 ‘민족’이라는 용어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동아일보는 지령 100호부터 3대 사시(社是) 가운데 하나로 ‘조선 민족의 의사를 표현함’을 내세웠다. 1920년 4월 6일 사설은 “민족은 역사적 산물”이며, “생명을 가진 실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대중은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민족’, ‘민족 자결’의 개념에 입각해 만세를 부르며 스스로 조선민족의 일원이라고 인식하게 됐다”면서 “민족의식은 민족 내부의 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근대적 성격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3·1운동은 ‘단체’의 확산도 불렀다. 1905년 을사늑약 뒤 여러 정치단체와 교육계몽단체가 등장했지만, 국권 피탈 이후 강제 해산돼 비밀결사로 이어졌다.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단체가 만들어졌다. 1922년 ‘조선치안상황’ 자료에 따르면 청년, 종교, 산업, 교육, 노동 단체와 소작인회 등 각종 사회단체 수가 1920년 579개에서 1922년 1525개로 늘었다. 동아일보가 각종 단체, 특히 청년회 조직을 독려한 것도 효과를 냈다. 박 교수는 “대중 계몽이나 공공 이익을 목표로 한 단체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근대적 성격을 띠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이 논문을 역사학계 최대 연례행사인 제62회 전국역사학대회 ‘현대의 탄생’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이 대회는 25,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과 성북구 고려대에서 열린다. 박종린 대회 조직위원장(한남대 교수)은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민주주의, 공화정의 확산을 비롯해 ‘현대’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대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피할 수 없다면 누군가에게 대신하게 하라.’ 껄끄러움, 민망함, 미안함, 귀찮음…. 이 같은 감정을 ‘스킵(Skip)’할 수는 없을까. 불편한 감정을 감내하는 대신에 돈을 지불하고 이를 타인에게 맡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감정 대행을 주문받은 업체들은 퇴사 등 전문 절차부터 이별, 사과, 역할 대행 등 업무를 세분하며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대면 접촉과 감정 소모에 피로감을 느끼는 세태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퇴사 대행 평균 10만∼20만 원에 해결 “껄끄러운 퇴사, 다 맡기세요” “쓰던 노트북 퀵으로 보내요.”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씨(40)는 최근 택배 한 건을 전달받았다. 퇴사한 후배 A 씨가 보낸 노트북과 사무기기였다. “직장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던 A 씨는 사직서 발송부터 퇴직금, 실업급여 정산 등을 대행업체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 김 씨는 “처음엔 사무실이 술렁일 정도로 모두 당황했지만 나름의 고민이 많았을 A 씨 심정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최근 늘고 있는 퇴사 대행 절차는 대략 이렇다. 희망퇴직일을 정하면 퇴사플래너와의 상담을 거쳐 사직서 등 문서를 작성한다. 대행업체는 고객 대신 사직 의사를 전달하고 사직서와 반납할 물품을 발송한다. 사직서가 수리되면 퇴직금 정산,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등 서류를 전달받는다. 추가 요청에 따라 사무실 짐을 대신 빼는 경우도 있다. 한 퇴사 대행 서비스 이용자는 “상사의 폭언과 과도한 업무 지시로 사직서를 냈지만 수리조차 안 됐다. 서비스를 이용해 회사를 찾거나 인사팀과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잘 조율됐다”고 했다. 다른 이용자는 “회사 입장만 강요해 퇴사일도 정하기 어려웠다. 서비스 이용 후 번거로운 일이 사라져 이직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가격은 보통 10만∼20만 원 선이다. 회사 관계자와의 대면 접촉 같은 추가 대행 업무가 필요하면 50만 원까지 오르기도 한다. 한 퇴사플래너는 “회사 규모, 긴급성, 근로 형태에 따라 비용 차이가 나며 2030세대와 여성 직장인 이용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흰 봉투에 사직서를 넣어 직접 전달하는 기존 사표 제출 공식도 변화하고 있다. 사직서 발송만을 대행하는 ‘립(Leave) 서비스’ ‘출근길 사직서’ 같은 애플리케이션(앱)에서는 양식에 맞게 부서, 이름, 사유만 기입하면 PDF파일 사직서가 e메일로 발송된다. 제출 예정일도 설정할 수 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표방하며 ‘입사와 동시에 사표를 작성한다’는 그 나름의 규칙도 적혀 있다.○ 내밀한 영역까지 침투, 이별·사과·질투심 유발도 대행 “택배 보내듯 감정도 대신 전달” 이별, 사과, 질투심 유발 등을 대행하는 서비스도 인기 있다. 이 업무만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업체는 따로 없으나, 주로 역할 대행 업체들이 맡는다. 과거 애인·하객 대행 등을 주로 수행했다면 최근 이별, 사과 통보 등 좀 더 감정적인 영역의 일을 대행하는 게 특징이다. 의뢰인 대신 유선으로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지만 업체 직원들이 상대를 만나 부모, 친인척 역할을 하며 정중히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연인의 과도한 집착, 안전한 이별, 집안 반대 등이 주된 서비스 이용 사유다. 가격은 보통 10만∼30만 원대. 요구 사항에 따라 수백만 원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역할대행119 대표는 “대학생, 여성 이용객이 많다. 시기적으로 크리스마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깔끔한 이별을 원하는 일이 많은데, 대면 접촉을 꺼리고 이별 과정에서 상대 반응이 두려운 이들이 저희를 찾는다”고 했다. 사과 대행의 경우 과실 때문에 ‘진상’ 손님을 상대하기 힘들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 많다. 또 돈을 제때 갚지 못할 때 공손하고 정중하게 갚지 못하는 불가피한 이유와 사과를 전해 달라고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역할극을 통해 연인 사이에서 질투심을 유발해 달라는 요청도 꽤 들어온다. 전문가들은 대면 접촉이 점점 사라지는 사회에서 대행 서비스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능력이 떨어진 현대인이 정신적 압박감, 상처로부터 탈피하고픈 심리가 반영된 현상이다. 서비스는 향후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고 감정 전달에 서툰 사회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정해주는 과외, 학원에 맞춰 살아온 젊은층은 앞으로도 대리인을 내세운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

‘피할 수 없다면 누군가에게 대신하게 하라.’ 껄끄러움, 민망함, 미안함, 귀찮음…. 이 같은 감정을 ‘스킵’(Skip) 할 수는 없을까. 불편한 감정을 감내하는 대신 돈을 지불하고 이를 타인에게 맡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감정 대행을 주문받은 업체들은 퇴사 등 전문절차부터 이별, 사과, 역할대행 등 업무를 세분화하며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대면 접촉과 감정소모에 피로감을 느끼는 세태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퇴사 대행 평균 10~20만 원에 해결 “껄끄러운 퇴사, 다 맡기세요.” “쓰던 노트북 퀵으로 보내요.”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모(40) 씨는 최근 택배 한 건을 전달받았다. 퇴사한 후배 A 씨가 보낸 노트북과 사무기기였다. “직장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던 A 씨는 사직서 발송부터 퇴직금, 실업급여 정산 등을 대행업체를 통해 진행 중이다. 황 씨는 “처음엔 사무실이 술렁일 정도로 모두 당황했지만 나름 고민이 많았을 A 씨 심정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최근 늘고 있는 퇴사대행의 절차는 대략 이렇다. 희망퇴직일을 정하면 퇴사플래너와 상담을 거쳐 사직서 등 문서를 작성한다. 대행업체는 고객 대신 사직의사를 전달하고 사직서와 반납할 물품을 발송한다. 사직서가 수리되면 퇴직금 정산, 근로소득원천징수 등 서류를 전달 받는다. 추가요청에 따라 사무실 짐을 대신 빼는 경우도 있다. 한 퇴사대행 서비스 이용자는 “상사 폭언과 과도한 업무지시로 사직서를 냈지만 수리조차 안됐다. 서비스를 이용해 회사를 찾거나 인사팀과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잘 조율됐다”고 했다. 다른 이용자는 “회사 입장만을 강요해 퇴사일도 정하기 어려웠다. 서비스 이용 후 번거로운 일이 사라져 이직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가격은 보통 10만~20만 원선이다. 회사 관계자와의 대면접촉 같은 추가 대행 업무가 필요하면 50만 원까지 오르기도 한다. 한 퇴사플래너는 “회사규모, 긴급성, 근로형태에 따라 비용 차이가 나며, 2030세대와 여성 직장인 이용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흰 봉투에 사직서를 넣어 직접 전달하는 기존 사표 제출공식도 변화 중이다. 사직서 발송만을 대행하는 ‘립(Leave) 서비스’ ‘출근길 사직서’ 같은 애플리케이션(앱)에서는 양식에 맞게 부서, 이름, 사유만 기입하면 PDF파일 사직서가 e메일로 발송된다. 제출 예정일도 설정할 수 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표방하며 “입사와 동시에 사표를 작성한다”는 나름의 규칙도 적혀있다. ● 내밀한 영역까지 침투, 이별·사과·질투심 유발도 대행 “택배 보내듯 감정도 대신 전달” 이별, 사과, 질투심 유발 등을 대행하는 서비스도 인기다. 이 업무만을 전문 수행하는 업체는 따로 없으나, 주로 역할대행 업체들이 맡는다. 과거 애인·하객 대행 등을 주로 수행했다면 최근 이별, 사과 통보 등 보다 감정적 영역의 일을 대행하는 게 특징이다. 의뢰인 대신 유선상으로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지만 업체 직원들이 상대를 만나 부모, 친인척 역할을 하며 정중히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연인의 과도한 집착, 안전한 이별, 집안 반대 등이 주된 서비스 이용 사유다. 가격은 보통 10만~30만 원대. 요구사항에 따라 수백만 원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역할대행119 대표는 “대학생, 여성 이용객이 많다. 시기적으로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깔끔한 이별을 원하는 일이 많은데, 대면접촉을 꺼리고 이별과정에서 상대 반응이 두려운 이들이 저희를 찾는다”고 했다. 사과대행의 경우 과실 때문에 ‘진상’ 손님을 상대하기 힘들어 느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 많다. 또 돈을 제때 갚지 못할 때 공손하고 정중하게 갚지 못하는 불가피한 이유와 사과를 전해달라고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역할극을 통해 연인 사이에서 질투심을 유발해달라는 요청도 꽤 들어온다. 전문가들은 대면접촉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사회에서 대행 서비스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능력이 떨어진 현대인이 정신적 압박감, 상처로부터 탈피하고픈 심리가 반영된 현상이다. 서비스는 향후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고 감정전달에 서툰 사회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정해주는 과외, 학원에 맞춰 살아온 젊은층은 앞으로도 대리인을 내세운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말레이반도 서북부의 작은 섬인 말레이시아 페낭은 ‘동양의 진주’로 불렸다. 페낭은 말라카 해협 북부의 중심으로 1786년 영국에 점령당한 뒤 동서 바닷길 교역의 거점이 됐다. 아편 무역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의 핵심 사업이었고, 페낭은 그 길목에 있었다. 깡통에 쓰이는 주석과 타이어의 재료인 고무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페낭은 또다시 격변한다. 책은 18세기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페낭의 중국계 이민자 사회를 살폈다. 지역사회의 주역인 중국계 이민자들은 ‘현지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인 ‘페라나칸’으로 불린다. 중국미술사를 전공한 저자가 페라나칸의 다층적 면모를 역사적으로 조명했다. 부제 ‘동남아의 근대와 페낭 화교사회’.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러한 유의 비평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의 문학에 과연 어느 정도로 유용할 것인가.”(강신재 소설가·1924∼2001) 1959년 5월 26, 27일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한 소설가가 비평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사수(射手)는 등단 10년이 된 여성 소설가 강신재 씨. 앞서 백철 평론가(1908∼1985)가 자신의 신작 ‘절벽’을 혹평하자 이를 하나하나 반박한 것이다. 강 씨는 “나는 (백)씨의 두뇌 구조나 센스에 대해서 생각해 볼 뿐”이라는 신랄한 표현과 함께 ‘평론가의 예술적 감각―백철 씨의 평을 박(駁)한다’는 글을 2회에 걸쳐 실었다. 백 평론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백철은 평론 경력이 30년에 가까웠고, 당시 문단의 몇 안 되는 전업 평론가이기도 했다. 나이도 강 씨보다 열여섯 살이 많았다. 백 평론가는 ‘문장과 이미지의 간격―강신재 씨에게 답함’이라는 재반박 글을 2회에 걸쳐 기고하면서 “아직 습작기도 넘어서지 못한 젊은 작가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망언이 아닌 것 같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연남경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이 논쟁에 주목했다. 연 교수는 26일 발표 예정인 글 ‘현대비평의 수립, 혹은 통설의 탄생’에서 “거의 기억되지 않은 이 짧은 논쟁은 현대비평이 수립되고 현대문학의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문제제기가 잠시 이뤄진 순간”이라고 봤다. “신인 여성 작가가 기성 남자 비평가의 위력에 항변하며 현대문학의 수립 방향에 이견을 냈다”는 것이다. 백 평론가는 ‘절벽’이 여인의 신변 이야기이기에 작품의 질이 빈약하며, 문장의 수사가 혼란스럽다고 비평했다. 연 교수에 따르면 이런 관점은 당대 문단이 여성 신인을 바라보는 통상의 시선이었다. 1950년대 비평뿐 아니라 1960년대 문단을 휘어잡은 ‘4·19세대’의 비평도 마찬가지였다. ‘현실 참여’라는 주류 지식인 남성들의 이념을 공유하지 않았던 강 씨의 소설은 ‘지성의 결여’로 치부됐다. 연 교수는 “엘리트 남성이 주도한 비평 담론은 여성 작가의 작품을 ‘산문정신의 실패’나 ‘현실인식의 부족’으로 규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 씨는 자신의 글에서 “소설에는 그 소설 자체의 분위기와 흐름이 있다. … 이것은 소설이 지닌 이념, 혹은 사회성이라는 것과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작품과 무관하게 이념이나 사회성을 엉뚱하게 요구하는 데 반기를 든 것이다. 강 씨는 화제를 불러일으킨 1962년 작품 ‘젊은 느티나무’를 비롯해 수많은 소설을 오래도록 썼다. 1990년대 들어서는 “남성 작가들의 비현실적 서정성과 다른, 현실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한 서사적 서정성”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연 교수의 발표문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이 개원 60주년을 기념해 26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여는 ‘한국 근현대 학문의 성립과 통설의 탄생’ 학술대회에서 공개한다. 학술대회에서는 이 밖에도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방법론적 기원’(도면회 대전대 교수) 등 4편을 발표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말을 탄 주인공이 개로 보이는 동물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활을 든 이들은 사슴 등 여러 동물을 향해 시위를 당기려 한다. 또 다른 인물들은 춤을 추는 듯 기마행렬을 따른다. 1500년 전 무덤 주인공의 생전 활동 모습을 그린 것일까, 저승에서의 영화(榮華)를 기원한 그림일까. 경북 경주시 황오동 쪽샘지구 44호 무덤에서 이런 행렬도를 새긴 5세기 장경호(長頸壺·목이 긴 토기 항아리)가 출토됐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행렬이라는 큰 주제를 바탕으로 기마, 무용, 수렵하는 이들이 복합적으로 그려진 토기가 발견된 건 처음”이라며 “내용의 구성이 풍부하고 회화성이 우수한 귀중 자료”라고 16일 밝혔다.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는 무덤 둘레의 호석(護石) 북쪽 자갈을 깐 층에서 깨진 상태로 일부 조각이 나왔다. 문양은 크게 4단으로 위쪽 1, 2단과 제일 밑단에는 기하학적 문양을 반복했고 3단에 인물과 사슴 멧돼지 말 개 등 동물을 표현했다. 문양과 그림은 빗처럼 생긴 도구로 쓸듯이 새겼다. 제사용 토기로 보이며 원래 높이는 약 40c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행렬도의 주제가 무용총 수렵도와 무용도, 안악 3호분 행렬도를 비롯한 고구려 고분벽화와 유사해 주목된다. 말의 머리 부분 갈기를 묶어 뿔처럼 묘사한 점은 안악 3호분 행렬도와 유사하다. 인물들이 팔을 나란히 든 모습은 무용도와 닮은 점이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행렬의 주인공과 함께 있는 개는 고구려 벽화처럼 무덤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번 토기는 신라가 5세기 초 관계가 밀접했던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증거로 해석된다. 5세기 전 시대에 풍경화에 가까운 행렬도가 그려진 신라 토기는 없었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그러나 고구려와 중국의 장례 관련 그림에서는 사냥과 행렬이 흔한 테마”라며 “토기에 드러난 회화적 요소는 서기 400년 이후 신라가 고구려 전성기의 문화로부터 압도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쪽샘지구 44호 무덤에서는 말 문양이 그려진 발형기대(鉢形器臺·굽다리접시를 확대한 모양의 그릇 받침대) 조각도 출토됐다. 말갈기, 발굽, 관절 등 말 2마리의 모습이 묘사됐다. 몸통의 격자무늬는 말 갑옷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호석 주변에서 대호(大壺·큰항아리) 9점을 비롯한 제사 유물 110여 점이 출토됐다. 대호는 호석을 따라 일정 간격으로 배치됐고, 그 안팎에서 굽다리접시(高杯·고배), 뚜껑 접시(蓋杯·개배), 흙 방울(土鈴·토령) 등 소형 토기들을 발견했다. 쪽샘지구 44호 무덤은 지름 약 30m의 중간 크기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돌무지덧널무덤)다. 2014년 발굴을 시작했다. 연구소는 내년까지 돌을 쌓아놓은 적석부를 건축적, 구조공학적 관점에서 정밀 조사하고 시신과 부장품을 두는 매장 주체부를 발굴할 방침이다. 쪽샘지구에는 4∼6세기 신라 왕족과 귀족의 무덤 1100여 기가 몰려 있다.경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09년 서울 은평구 진관사 칠성각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가 등록문화재 지정 이후 처음 전시된다. 동국대 박물관(관장 최응천)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근대 불교계 인사들의 유물 98점을 선보이는 특별전 ‘근대 불교의 수호자들’을 15일부터 12월 13일까지 서울 중구 박물관에서 개최한다. 진관사 태극기는 1919년 진관사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초월 선생(1878∼1944)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을 수리하기 위해 벽체를 뜯다가 불단과 기둥 사이에서 3·1운동 당시 항일 지하신문과 함께 발견됐다. 안중근 의사 유묵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와 만해 한용운의 친필, 염주도 공개한다. 이 밖에도 민족대표이자 한용운의 사형인 백용성 관련 유물, 임정에서 활동했던 프랑스 유학승 김법린의 유품 등을 선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