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죽음 애도한 조선의 선비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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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자만시’ 계보 연구
“죽음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 삶에 대한 열망 드러낸 것”

“어느새 무덤이 말 앞에 이르고, 성명이 저승 명부에 떨어졌구나. … 다섯 딸은 아버지를 찾아 울고, 아들 하나는 하늘 부르며 곡하며….”

조선 전기 문신 남효온(1454∼1492)이 남긴 시 가운데 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다. 흥미로운 건 이 시 속의 아버지가 남효온 자신이라는 것. 망자가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시를 짓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 시는 이른바 ‘자만시(自挽詩)’다.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挽詩)를 자신을 대상으로 지은 것이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조선시대 자만시의 계보를 연구한 책 ‘나의 장례식: 自挽詩(자만시), 나의 죽음 소유하기’(고려대 출판문화원)를 최근 발간했다.

남효온은 스승으로 모셨던 김종직(1431∼1492)에게 1489년 편지를 쓰면서 별지로 자만시를 담아 부쳤다. 시는 죽음에 대한 달관을 표현하다가 돌연 살면서 한스러웠던 일을 털어놓기도 한다. “집이 가난하여 술이 넉넉지 못했네. 행실이 더러워서 미치광이로 불렸고, 허리가 곧아 높은 사람 노엽게 했지. 신발이 뚫어져 발꿈치가 돌에 채이고, 집이 낮아 서까래가 이마 때렸다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벼슬을 단념한 채 평생 바른말을 아끼지 않았고, 단종을 위해 절개를 지키다 죽은 이들을 다룬 ‘육신전’을 펴냈던 남효온의 삶이 시를 통해서도 그려지는 듯하다. 남효온은 이 자만시를 남기고 3년 뒤 세상을 떴다.

“늙은 홀아비 신세 담박하기가 중과 같고, 고루하니 어찌 멀리 있는 벗 찾아온 적 있으랴. 쇠한 눈이라 일찍 온 봄에 더욱 놀라니, 매화 이미 졌지만 살구꽃 아직 남았기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던 숨은 선비 김상연(1689∼1774)의 자만시다. 죽음의 겨울, 일찍 찾아온 봄, 져버린 매화와 남은 살구꽃의 대비가 선명하고 의미심장하다.

책에 따르면 자만시의 뿌리는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양식화된 만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 중국의 만시와 자만시는 보편적 생사를 주요 주제로 한 반면 조선의 자만시는 개인적 사연을 담은 자만시가 많다.

임 교수는 자만시가 자신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임 교수는 “타인에 대한 만시가 죽음을 통한 상실감을 드러낸다면 자만시는 자신의 가장된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다”며 “‘죽은 나’라는 가공의 자아가 현실의 나를 규정하고 만든다는 점에서 자만시는 자기형상의 창조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남효온#자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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