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안녕, 서울. 우리 돌아왔어(We’re back).” 3년 9개월 만에 다시 뭉친 방탄소년단(BTS)의 복귀 공연은 리더 RM의 간결한 인사로 시작했다. 이어 경복궁, 광화문, 그리고 그 앞 월대까지 ‘왕의 길’이 비치고는 민요 ‘아리랑’ 선율이 삽입된 신곡 ‘보디 투 보디(Body to Body)’가 흘렀다. 태극기의 건곤감리를 응용한 미디어아트도 화려했다.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힙하게 소화한 이들을 보며, ‘국뽕’이라고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신곡 ‘에일리언스(Aliens)’에는 ‘김구 선생님, 어떠신가요(Tell me how you feel)’라는 소절이 있다.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는 ‘문화의 힘’을 갖기를 꿈꿨던 김구 선생에 대한 헌사로 들렸다. 한국적인 것을 숨긴 채 세계적인 것을 따라 하기에 급급했던 우리였다. 이날 190여 개국에 생중계된 BTS 무대는 우리가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가 한국을 보고, 한국을 입고, 한국을 즐겼다. 한국적인 것이 매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를 품은 광화문 일대는 주말 동안 BTS 팬들의 놀이터였다. 광화문 거리는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전광판을 통해 BTS 영상과 음악이 흘렀다. 어디서나 응원봉을 흔들며 춤을 추는 BTS의 팬클럽 ‘아미(ARMY)’ 회원들을 볼 수 있었다. 신문의 특집 섹션도 여럿 발행됐다. 동아일보도 ‘BTS 컴백 기념 특별판’을 배포했는데 아미들은 호외를 굿즈처럼 소중히 챙겨 갔다. ▷‘문화의 힘’이란 단지 K팝, K드라마의 성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민 의식 같은 우리 사회의 소프트파워가 뒷받침돼야 한다. 뉴욕타임스는 “광화문광장은 놀랍도록 질서정연했다”고 보도했다. 시민들은 안전한 축제를 위해 협조했다. 관객들은 공연 입장과 퇴장 시 검색으로 시간이 지연돼도 동요 없이 차분히 움직였다. 아미들은 ‘쓰레기를 치우고 떠나자’는 게시글을 공유했고, 자원봉사단을 구성해 공연이 끝난 뒤 청소를 했다. 그 덕분에 서울시 예상보다 쓰레기가 적었고 행사장은 깨끗했다. ▷BTS는 정규 5집 ‘아리랑’ 발매에 앞서 최초 아리랑 녹음본에 대한 사연을 담은 애니메이션 예고편을 공개했다. 1896년 5월 8일 자 워싱턴포스트에는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하워드대로 유학 간 한국 청년 7명이 아리랑을 불렀고, 이를 인류학자가 축음기로 녹음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영감을 받아 당시 태평양을 건넜던 한국인 유학생 7명과 광화문광장 공연을 위해 경복궁 앞에 선 BTS 7명이 교차하는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BTS는 한이 서린 슬픈 아리랑을 신나고 진취적인 노래로 다시 불렀다. 지금의 아리랑은 그래야 맞을 것 같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내년 의대 정원이 490명 늘어났고, 32개 의대에 정원 배분까지 마무리됐다. 1년 반 동안 나라를 뒤흔든 의정 갈등을 떠올리면 어리둥절할 만큼 조용한 마무리다. 의정 갈등이라는 흙탕물은 그렇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뒤틀린 우리 의료 시스템은 방향을 바꾸지 못한 채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 의대 증원 당시의 명분은 지역·필수 의료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응급실 뺑뺑이’가 사회적 문제가 됐고, ‘출산 난민’ ‘소아과 원정’처럼 지역 의료는 무너지고 있었다. 의료계 역시 해법은 달랐지만 그 명분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의대 정원을 늘리고 지역 의사를 뽑는다고 해서 지역·필수 의료가 저절로 살아나진 않는다. 의정 갈등 속에서 드러난 의료 시스템의 고질적 병폐도 바뀐 것이 없다. 지역·필수 의료의 붕괴는 원가에 못 미치는 낮은 수가, 수술보다 비싼 검사 수가 등 왜곡된 제도의 결과다. 의사들이 실손보험을 통해 수익 보전에 나서면서 거대한 비급여 시장이 형성됐다. 의료비는 매년 급증한 반면, 환자들의 만족도는 떨어졌다. 그런데 정부도 의료계도 내상이 큰 탓인지 의대 증원 이후 의료 개혁 논의는 실종된 상태다.의정 갈등에 휘발된 신뢰 자본 의정 갈등 동안 정부, 의사, 환자 사이에 불신이 쌓인 것도 의료 개혁의 동력을 살리기 어려운 이유다. 정부와 정책 파트너인 의료계는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이제는 물밑 소통도 거의 사라진 듯하다. 환자들은 의사의 직업윤리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병원에 가면 과잉 진료부터 의심한다. 의사들은 “환자 대면이 두려워졌다” “수술실을 지키는 데 힘이 빠진다”며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모두가 좌절감에 허우적대는데 의사, 환자, 시민단체가 만나 의료 시스템을 고쳐 보자는 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정 갈등이 한창이던 2024년부터 의료 공급자인 의사, 의료 소비자인 환자와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모인 의료공동행동이 출범했다. 이들은 그간 논의를 최근 ‘위기의 한국의료, 함께 다시 그리다’라는 책으로 펴냈고 ‘환자중심의료학회’를 출범시켰다. 의사와 환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의료계 학회는 처음이다. 병원과 학교를 이탈한 전공의·의대생을 향해 “진짜 피해자는 외면당한 환자”라고 일침했다가 의료계 내부에서 지탄을 받았던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 4명이 주축이 됐다. 당시 험한 비판을 쏟아냈던 대부분의 의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은 의정 갈등을 촉발한 시스템을 바로잡자며 환자와 손을 잡았고, 올바른 정책의 근거를 쌓아가기로 했다. 무의미한 싸움으로 남지 않으려면 환자중심의료학회 출범을 보며 의정 갈등 당시 전공의가 병원을 뛰쳐나가기보다 환자와 연대해 정부에 맞섰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대 2000명 증원을 두고 의사들은 ‘수능 성적 좋은 의사에게 진료받고 싶을 것”이라고 했다. 환자들의 요구는 달랐다. 학회에 합류한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장은 2014년 식도암을 진단받고 투병해 왔다. 그는 6일 출범식에서 “한국 의료는 질병을 고치는 기술은 뛰어나지만 환자의 삶을 돌보는 데는 실패했다”며 자신의 생명이 걸린 결정과 치료 과정에서 소외되는 환자의 고통을 전했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고 정부에 잘못된 의료 시스템을 바꾸자고 요구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말이지 않았을까. 1년 반 의정 갈등이 무의미했던 싸움으로 끝나선 안 된다. 환자가 치료받기 좋은 환경은 곧 의사가 일하기 좋은 환경이다. 의대 증원, 수가 인상 같은 지엽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환자 중심’이라는 원칙으로 돌아갈 때 의료계의 복잡한 난제들도 실타래를 끊듯 풀 수 있을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군 복무를 마친 방탄소년단(BTS)이 5번째 정규 앨범 ‘아리랑’을 들고 복귀하는 21일 공연은 대한민국 모두가 치르는 잔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광장 문화’를 낳은 우리의 앞마당 광화문광장이 야외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 남쪽 시청역 인근까지 2만2000명 규모의 관람 구역이 마련된다. 각국에서 손님이 몰려들면서 최대 23만 명이 운집할 것으로 예상된다. 비공식 국가나 마찬가지인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질 것으로 예상되는 현장을 넷플릭스가 190개국에 생중계한다. BTS 공연의 배경으로 당일 서울의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타는 것이다. ▷BTS 리더 RM은 앨범명이자 투어명인 ‘아리랑’에 대해 “저희다운 게 뭐냐, 저희가 어디서 출발했냐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2013년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닌 BTS가 데뷔했을 때 K팝의 상징이 될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다지더니 한국 가수 최초, 한국어 노래 최초로 빌보드 차트를 석권했다. 이번 앨범의 선주문량이 400만 장을 돌파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팬덤을 거느리고 있다. 대중 문화의 변방이었던 한국에선 상상조차 어려웠던 일을 그들이 해냈다. ▷서울 곳곳은 이미 ‘BTS노믹스’로 들썩이고 있다. 공연 당일 서울 도심 호텔은 객실이 동났다. 인근 카페, 편의점 등은 외국어 가능 직원을 구하고 컵라면, 핫팩 등을 평소 물량의 몇 배씩 늘렸다고 한다. 백화점, 면세점은 외국인 손님 맞이에 분주하다. 광화문 대형 전광판은 기업뿐 아니라 BTS 팬클럽인 아미(ARMY)까지 가세해 광고 특수를 누리고 있다. 다음 달부터 차례로 공연이 열리는 경기 고양, 부산까지 ‘BTS노믹스’ 온기가 퍼져 나가고 있다. ▷워낙 사람이 몰리다 보니 암표가 수십 배 가격에 거래된다. 관광지 길거리 음식부터 바가지요금이 극성을 부린다. 서울시가 나서 시장 교란 행위 단속에 나섰지만, 상인들의 자정 노력 없이는 한계가 있다. 안전 관리에도 비상이 걸렸다. 공연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명당’ 자리를 선점해 노숙하고 인파까지 몰려들면 자칫 사고가 날까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서울시는 사고, 화재 위험이 있는 곳을 집중적으로 점검했고 경찰은 인파 흐름을 통제하며 테러에 대비한 특공대까지 배치한다. ▷사실 BTS와 한국의 서사는 꼭 닮은 데가 있다. 대중 문화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올라선 BTS의 성공기는 한국이 지금과 같은 경제력과 문화력을 갖게 되기까지 걸어온 길과 겹쳐 보인다. 이번 ‘아리랑’ 공연은 그 성공을 자축하고 널리 알리는 축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손님들이 그 축제를 한껏 즐기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한국의 서사가 널리 알려지도록 제대로 손님을 치러야 할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젊은 운전자가 앉은 비틀거리는 외제차는 무조건 피해라.’ 마약 등 약물 운전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빈발하자 운전자 사이에서 이런 방어 운전 수칙이 회자된다. 특히 서울 강남에선 대낮에 약물에 취한 운전자들이 심심찮게 적발되고 있다. 마약 접근이 쉬운 유흥업소, 의료용 마약류를 처방하는 성형외과 등이 밀집해 있어 벌어지는 일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약물 복용 운전으로 인해 면허가 취소된 사례는 237건으로 2020년에 비해 약 4.4배 늘었다. ▷약물 운전의 위험성이 공론화된 계기는 2023년 8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인근에서 길을 걷던 20대 여성을 치어 숨지게 한 롤스로이스 뺑소니 사건이다. 30대 남성 운전자는 사고를 낸 직후 태연히 도주해 공분을 샀는데 운전 당시 케타민에 취한 상태였다. 한 달 뒤 압구정 로데오거리에서는 주차 시비 끝에 “칼침 맞아봤냐”며 흉기를 휘두른 람보르기니 운전자도 붙잡혔다. 그 역시 필로폰, 엑스터시 등 마약 양성 반응이 나왔다. 알고 보니 롤스로이스와 람보르기니 운전자는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며 수익을 공유하던 사이였다. ▷최근엔 마약뿐 아니라 의료용 마약류 오남용에 따른 약물 운전도 심각하다. 지난달 30대 여성이 몰던 포르쉐가 반포대교에서 추락해 한강 둔치로 떨어졌다.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포르쉐 안에서는 프로포폴 빈 병과 주사기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프로포폴은 의사 처방 없이 구할 수 없고 외부로 반출할 수도 없다. 불법 유통이 만연했다는 의심이 든다. 지난해 의료용 마약류 무단 투약 및 유통으로 검거된 인원은 총 1089명이다. 3년 전에 비해 3.4배 늘었다. 지난달에는 서울 서초구 일대에서 교통신호를 무시한 채 3km가량 운행하던 벤츠 운전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운전자는 손목에 주사기 바늘을 꽂은 채 잠들어 있었다. ▷정상적으로 의사 처방을 받았더라도 방심할 순 없다. 공황장애 치료제인 벤조디아제핀 계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인 메틸페니데이트 계열과 같은 향정신성 의약품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해 인지, 행동 반응을 느리게 한다. 지난달 압구정역 인근에서 50대 남성이 차량 3대를 잇달아 들이받아 4명이 다쳤다. 그는 항불안제를 복용했다고 했다. 영국과 독일은 향정신성의약품 복용 후 24시간, 호주는 12시간 운전을 금지하지만 우리는 아직 뚜렷한 기준이 없다. ▷술자리가 파한 뒤 주로 밤에 일어나는 음주 운전과 달리 약물 운전은 도로가 붐비고 행인이 많은 낮에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 위험이 더 치명적이라는 지적에 따라 4월부터 음주 운전만큼 처벌이 강화된다. 약물 운전은 마약류 투약 후 2차 범죄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마약, 의료용 마약의 불법 유통부터 뿌리 뽑는 것이 시급하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의식이 희미해지고 기력이 떨어진다. 신체 기능이 하나씩 멈추는 것이다. 그쯤이면 쇠약해진 몸은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다. 죽조차 삼키기 어렵다.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이런 상태를 ‘곡기를 끊는다’고 표현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길이 60cm 콧줄(코와 위를 연결하는 비위관)을 통해 강제로 영양을 공급한다. 삽관 과정도 고통스럽지만 이물감으로 답답함을 느끼는 고령 환자들이 자꾸 콧줄을 빼려고 한다. 그래서 요양병원에서 콧줄을 뽑지 못하도록 억제 장갑을 끼우거나 아예 손발을 묶어두기도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병의원에서 콧줄을 삽관한 환자는 27만3850명이었다. 이들 4명 중 1명은 임종 말기 영양 공급을 위해서였다. 특히 요양병원은 중환자실도 없는데 콧줄을 쓰는 환자 수는 7만7322명이다. 요양병원, 요양원에선 법적으로 영양 공급이 의무라는 이유로 콧줄을 하지 않으면 입원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쇠약한 고령 환자에게 일일이 음식을 먹이기 힘드니 콧줄을 끼워 두는 편이 환자 돌보는 데 편리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가 거부할 수 있는 연명의료 행위를 심폐소생술·혈액 투석·항암제 투여·인공호흡기 등으로 몇 가지만 인정한다. 환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거부 의사를 밝혔거나, 가족이 환자의 분명한 연명의료 거부 의사를 전달하더라도 콧줄·위루술 같은 영양 공급은 마지막 순간까지 중단할 수 없도록 했다. 2016년 연명의료결정법 제정 당시 종교계를 중심으로 물과 음식을 끊는 것은 생명을 해하는 것이라 반대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사후 법적 책임을 우려해 일단 콧줄을 권하고, 한번 꽂게 되면 뺄 방법이 없다. ▷콧줄을 쓸지, 말지 결정해야 할 순간 자식은 부모를 굶기는 것 같아 후자를 선택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는 건강한 사람의 사고일지 모른다. 임종기를 연구한 의사들 다수는 생의 말기에 곡기를 끊어도 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본다. 신체 기능이 저하돼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잘 인지하지 못해서다. 임종기에 억지로 영양을 공급하는 것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시간’만 연장하는 것이라고 의사들은 말한다. ▷2000년 일찌감치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한 대만은 한국과 달리 강제 영양 공급을 환자가 거부할 수 있는 연명의료 행위로 정해뒀다. 일본은 후생노동성 가이드라인에 따라, 미국과 영국은 의료계 자체 가이드라인으로 임종기 환자의 영양 공급을 중단할 수 있도록 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300만 명을 넘어섰다.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대하는 사회적 문화가 달라진 만큼 연명의료의 재정의를 생각할 때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는 1978년부터 48년간 명품 수선을 해 온 작은 공방이 있다. 이곳에선 낡은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제품을 새것처럼 복원해 주거나 쓸 만한 가죽을 잘라내 작은 가방이나 지갑을 만들어 준다. 1980년대 봉제공장에서 기술을 익혔다는 평균 경력 35년 장인들의 솜씨가 입소문을 타면서 옷장 속에 고이 모셔 뒀던 명품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사별한 남편이 사준 가방, 어머니가 물려주신 가방, 첫 월급으로 산 지갑 등 애틋한 사연이 있는 수선 요청이 많다. ▷2022년 루이비통이 이곳에서 대를 이어 공방을 운영하는 이경한 씨를 상대로 상표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 씨는 보통 10만∼70만 원씩을 받고 루이비통 가방을 해체한 뒤 원단과 금속 부품을 활용해 새로운 디자인의 가방, 지갑을 만들었다. 루이비통은 리폼 제품에 자사 로고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상표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500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도 청구했다. ▷리폼 업체가 한둘이 아닌데 왜 이 씨의 공방만 소송을 당했을까. 이 씨가 직접 밝힌 사정은 이렇다. 2022년 루이비통은 법무법인을 통해 국내 명품 리폼 업체들에 “리폼이 적발되면 법적 소송을 하겠다”며 앞으로 중단하겠다는 확약서를 받았다고 한다. 겁에 질린 소상공인들은 도장을 찍었지만, 이 씨만 이를 거절했다. 이 씨는 한 유튜브에 출연해 “리폼을 해서 파는 것도 아니고 소비자가 맡기면 기술을 제공할 뿐인데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소송 비용 부담에도 자칫 수선업체가 줄도산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버텼다. ▷1, 2심에선 이 씨가 졌다. 리폼 제품도 독립된 교환 가치를 지닌 상표법상 ‘상품’에 해당한다고 법원은 봤다. 판결이 알려지자 비싼 가격에 비해 부실한 사후서비스(AS)가 불만이던 소비자들은 뿔이 났다. 명품을 AS 맡기면 본국으로 보내야 한다며 수개월을 기다리라 하기 일쑤다. 그 비용도 상당하다. 그러면서 ‘내돈내산’ 리폼까지 안 된다니 수백만 원짜리를 버리란 말이냐는 항변이다. ‘자동차 튜닝도 금지하나’ ‘옷 줄여서 아이 입히면 불법이냐’ 등 냉소적 반응이 쏟아졌다. 중국 짝퉁 시장은 방치하면서 한국에선 영세 소상공인에게까지 쩨쩨하게 군다는 불만도 있다. ▷대법원은 다르게 봤다. 리폼 제품이 개인적 용도로만 사용되는 한 상표권 침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고 26일 원심을 파기했다. 리폼은 개성을 표현하거나 재활용 등을 통해 제품 수명을 연장하는 행위이므로 소유권 행사 및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원 순환이라는 환경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고이고이 아껴 쓰는 소비자,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고친 장인에게 죄를 묻는 건 상식적으로 아니지 않나.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단에 김남국 전 대통령실 국민디지털소통비서관이 합류했다. ‘훈식이 형, 현지 누나’ 문자 논란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지 두 달여 만이다. 김 대변인은 2020년 총선 때 국회에 입성했다. 이른바 ‘조국 사태’ 당시 검찰을 비판하는 조국백서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민주당에 발탁됐고, 검찰 개혁을 앞당길 30대 젊은 변호사라는 이유로 경기 안산 단원을에 전략 공천됐다. “매일 밤 조국을 위해 기도한다”면서 ‘친조(친조국)’임을 내세워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으나, 점차 ‘친명(친이재명)’ 색깔이 뚜렷해졌다. 원조 ‘친명’과 중앙대 선후배들이 뭉친 7인회에 참여해 이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이던 시절 우군을 자처했다. ▷초선 의원이었던 그가 다선 의원보다 유명해진 건 2023년 5월 거액의 코인을 보유한 사실이 보도되면서부터다. 비록 가상자산을 신고할 법적 의무는 없더라도 고의로 감춘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의정 활동 중에 빈번하게 코인 거래를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2022년 11월 ‘이태원 참사’ 현안 보고가 있었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도중 코인 매매를 한 사실이 보도됐고 여론이 들끓었다. 국민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상실한 행동이었다. ▷코인 의혹이 불거진 지 9일 만에 김 대변인은 “부당한 정치 공세”라며 탈당했다. 당의 징계도 없었고, 코인도 지켰다. 당시 당 대표 측근이라 온정적으로 대처한다는 비판이 당 안팎에서 나왔다. 그는 2024년 3월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 슬그머니 입당했다가 그해 4월 총선 이후 민주당과 합당되면서 우회 복당했다.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실 국민디지털소통비서관을 맡았다. ▷지난해 12월 청와대 입성 반년 만에 그는 사실상 경질되고 만다. 7인회 멤버였던 문진석 민주당 의원과 주고받은 문자 내용이 공개된 것이다. ‘우리 중(앙)대 출신. (이재명) 대통령 (경기도) 지사 출마 때 대변인도 했고 자동차산업협회 본부장도 해서 회장 하는 데 자격은 되는 것 같다.’ 문 의원의 문자에 김 대변인은 ‘넵 형님, 훈식이 형이랑 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라고 발랄하게 답했다. 그 자리에 맞는 공적 의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한 통의 문자로 청와대가 민간 협회 인사까지 개입하고, 학맥과 그림자 실세가 인사를 좌지우지한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코인 보유 논란에도, 인사 청탁 논란에도 그를 감쌌던 민주당은 이번에는 대변인 등용으로 정치적 재기의 길을 열어 줬다. 세간에선 ‘남국 불패’냐고 한다. 박수현 민주당 대변인은 한 방송에서 “두 번의 큰 고비를 겪으면서 반성도 했을 것이고, 젊은 정치인이 집에 틀어박혀서 위축된 생활을 보내게 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라고 했다. 반복된 선처를 경험할 기회도 못 가져 본 청년 정치인들은 이 말에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김희수 진도군수의 ‘처녀 수입’ 발언 영상을 찾아봤다.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광주·전남이 통합할 때 인구 소멸에 대한 것을 법제화해서, 정 못하면 스리랑카나 베트남이나 그쪽 젊은 처녀들 좀 수입을 해서 농촌 총각들 장가도 보내야 한다.” 2026년 한국에서 공직자가, 그것도 공적 자리에서 한 발언이라곤 믿기지 않는다. 사람은 사고팔지 않는다. 반인권적이다. 성 경험이 없는 여성이란 뜻을 내포하는 처녀라는 단어도 사라진 지 오래다. 성차별이다. 물론 총각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여성을 인구를 늘리기 위한 출산 도구로 봤다. 성차별이다. 스리랑카, 베트남을 여성 공급 기지쯤으로 치부했다. 인종차별이다. ‘71세 한국 남성’인 본인을 제외한 모두를 배제하는 그의 발언이 경악스러웠다.외국인 13% 넘는 진도군 책임자가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광주·전남 행정통합 타운홀 미팅’에 진도군수로 참석했으니, 발언의 무게를 몰랐을 리 없다. 단순한 실언이 아니라 평소 생각이 여과 없이 드러난 것으로 봐야 한다. 평소 그의 발언이라면 좌중이 고개를 끄덕여 주는 ‘소권력’을 누려 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이날 타운홀 미팅에서 그의 발언이 끝나자 싸늘하게 식을 줄 알았던 장내에선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행정안전부의 2024년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주민 현황’을 보면 전남 진도군은 총인구(2만9448명) 가운데 외국인 주민의 비중이 13%를 넘어섰다. 전국 지자체 평균(5%)의 2.6배에 달한다. 이런 지역의 군수가 ‘혐오 발언’을 당당히 내뱉고, 인권 감수성의 결핍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 비단 김 군수뿐이랴. 지난해 11월 김종훈 당시 울산 동구청장은 “동남아에 사는 것 같다” “불안해서 못 살겠다”와 같은 주민 발언을 직접 인용하며 “단지 막연한 불안감이라고 얘기할 수 있나”라고 했다. 2023년 5월 양태석 경남 거제시의원은 “외국 사람들은, 특히 베트남 애들, 이런 애들은 관리가 안 된다”며 “베트남 애들 10명 중 1명은 ‘뽕’을 한다”고 했다. 2019년 6월에는 정헌율 전북 익산시장이 다문화 가정 자녀를 향해 “잡종”이라고 불렀다. 그는 “생물학적, 과학적으로 얘기한다면 잡종 강세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고 했고 해당 발언이 논란이 되자 ‘튀기’라는 말을 쓸 수 없어 ‘잡종’이라고 했다는 기괴한 해명을 했다. 모든 발언이 사석이 아니라 공적 업무를 보던 중에 나왔다. 울산 동구, 전북 익산, 경남 거제의 외국인 주민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7.9%, 4.3%, 7.9%였다. 권력을 가진 지역 정치인이 이들을 공개적으로 비하하거나 잠재적 위협으로 낙인찍는 행위는 사회에 ‘혐오 허가증’을 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외국인 유입이 없으면 존립이 위태로운 지역에서 아직도 이들을 ‘2등 시민’으로 취급한다.차별 정서에 편승해 갈등 부추겨 2019∼2024년 전국 지자체 10곳 중 9곳에서 외국인 주민이 증가했다. 특히 인구 소멸 지역일수록 외국인 주민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5년간 50% 이상 증가한 곳이 35곳이나 된다. 이들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공장이 돌아가지 않으며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없다. 이미 우리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다. 이들을 포용해야 마땅한 지자체장과 지역 의원이 외국인 차별 정서에 편승해 공적 폭력을 마구 휘두른다. 김 군수의 발언이 알려지자, 주한 베트남 대사관은 전남도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여성의 존엄과 명예를 존중하는 것이 베트남과 한국 양국이 공유하는 가치이자 자산이며 원칙”이라고 했다. 절제되고 품격 있는 언어였다. 이런 나라에선 자질 있는 군수를 수입해야 맞지 않나.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이재명 대통령이 6일 3대(내란, 김건희, 채 상병) 특검에서 미진했던 수사를 이어갈 2차 종합특검으로 조국혁신당이 추천한 권창영 변호사를 최종 임명했다. 이례적이라는 뒷말이 무성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추천한 전준철 변호사를 탈락시키고 판사 출신을 임명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민주당 추천인 전 변호사가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린 전력이 있었다. 이 대통령이 “부적절한 추천”이라며 이런 후보자를 당이 걸러내지 않은 건 문제라는 취지로 질책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를 직격한 듯한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자 이성윤 최고위원은 “전 변호사 추천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라는 글을 올렸다. 전 변호사는 이 의원이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재직하던 2020∼2021년 그 아래서 반부패수사1·2부장을 지낸 ‘특수통’이다. 전 변호사는 이 대통령에게 불리한 진술이 나온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과 무관한 쌍방울 임직원의 비리 사건을 맡았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당내 친명계에선 “어떻게 대통령이 기소되는 데 영향을 미친 김 전 회장의 변호인을 추천하느냐”며 황당해했다. ▷이 의원이 친분을 바탕으로 무리한 추천을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다. 더욱이 전 변호사는 지난해 여름 1차 특검 당시 민주당 당적 때문에 추천에서 배제됐다. 이 의원이 직접 발의한 2차 특검법에선 당적 보유 1년이 지나면 특검에 임명할 수 있도록 자격을 완화한 사실도 드러났다. 전 변호사 추천을 염두에 둔 자격 기준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정 대표는 연이틀 “대통령에게 누를 끼쳐드린 데 대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친명계 의원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모양새다. 친명계 의원들은 “이번 특검 추천 과정에서 당 최고위원회의나 국회 법사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과 논의가 전혀 없었다”며 당 지도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배신” “반역”이라는 격앙된 목소리도 나온다.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특검 후보 추천 등을 언론 보도를 보고야 알게 되는 불투명한 ‘밀실’ 의사 결정에 당내 불만이 상당히 쌓인 상태다. ▷그간 ‘명청(이재명-정청래) 대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당내 친명-친청 갈등, 넓게는 당청 갈등이 누적되어 왔다. 정 대표 체제 아래서 정부의 검찰·사법 개혁안이 번번이 뒤집혔다. 친명계 반발을 무릅쓰고 조국혁신당과의 합당도 전격 선언됐다. 하지만 ‘김성태 변호인’ 특검 후보 추천으로 정청래 체제가 내상을 입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 바람에 3월 중 합당이란 구상도 흔들린다는 평가도 나온다. 민주당은 10일 긴급 의총을 열고 합당 문제를 논의할 예정인데 6월 지선 이후로 미루자는 의견이 힘을 얻는다고 한다. “집권 야당”이라는 성토까지 나오는 정 대표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살이 아니라 주가만 빠졌다.’ 비만치료제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덴마크 제약사 노보노디스크와 미국 제약사 일라이릴리 주가가 5일 미국 증시에서 각각 약 8%씩 빠졌다. 특히 노보노디스크 주가는 43달러까지 내려 위고비를 출시하기 전인 2021년 주가로 돌아갔다. 지난달 주사제에 더해 위고비 알약까지 출시하면서 탄탄한 실적을 예상했던 투자자들 사이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가 급락의 원인은 미국 원격의료 플랫폼인 힘스앤드허스헬스(Hims & Hers Health)가 위고비 알약과 동일한 성분(세마글루타이드)으로 조제한 비만약을 구독할 수 있는 서비스를 출시했기 때문이다. 구독 첫 달에는 49달러, 이후에는 매달 99달러를 내면 된다. 현재 월 149∼299달러에 팔리는 ‘원조’ 위고비 알약에 비해 월등히 싸다. 힘스앤드허스는 원격으로 의사 진료를 보고 그 처방에 맞춰 약을 정기적으로 배송해 주는 구독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국에서 위고비 특허는 2032년 만료된다. 따라서 위고비 복제약을 만들 순 없다. 힘스앤드허스는 약국에서 파는 조제약으로 특허를 우회했다. 미국에선 약의 용량, 제형 등을 환자에 맞춰 제조할 수 있는 ‘복합 제조’가 허용된다. 예를 들어, 다섯 살 아이가 항생제를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약사가 용량을 성인의 3분의 1, 딸기 맛 시럽으로 자체 조제할 수 있다. 힘스앤드허스는 비만약도 이렇게 맞춤형으로 조제해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 과정을 생략하고 특허법 사각지대를 공략했다. ▷복용이 편리한 알약으로 2억 명에 달하는 과체중 또는 비만 인구를 흡수하려던 제약사들은 힘스앤드허스에 허를 찔린 셈이다. 사실상 제약사의 사업 구조를 뿌리부터 흔드는 ‘변종’ 조제약에 대해 제약사는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노보노디스크는 “불법적으로 대량 조제한 모조품”이라며 “FDA 평가를 거치지 않아 환자 안전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한다”고 했다. 노보노디스크는 각국에서 특허 만료가 시작된 올해 조제약까지 출시되면서 매출이 최대 13%가량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절정에서 무너졌던 노키아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는 불안이 엄습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 약값을 낮추겠다며 월 1000달러가 넘던 위고비, 마운자로 주사제 가격을 거의 반의반값으로 후려쳤다. 외신들은 힘스앤드허스의 비만약 구독 서비스는 FDA 개입 여부가 그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FDA가 ‘복합 조제’가 허용되는 비만약이 공급 부족 상황이 아니라고 보거나, 안전성 검증을 요구한다면 서비스가 중단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가장 싼 약값을 지불할 것”이라는 트럼프 행정부 아래서 FDA가 그린란드 분쟁을 벌이는 덴마크의 제약사에 유리한 결정을 할지는 물음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 공포됐던 1948년 7월 17일을 기념하는 제헌절이 다시 공휴일로 지정됐다. 올해 제헌절은 마침 금요일이라 3일간 쉬는 ‘황금 주말’이 늘었다. 제헌절은 3·1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5대 국경일이었지만 유일하게 쉬는 날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공휴일로 재지정하자는 법안이 이미 여럿 발의돼 있었고 12·3 비상계엄 이후 헌법 정신이 강조되면서 공휴일법이 29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공휴일이 그 지위를 빼앗긴 건 근로 시간 단축 제도의 도입 과정과 관련이 깊다. 2004년 도입된 주 5일제는 6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확대됐다. 그래도 저항이 컸다. 기업들은 생산성 손실과 비용 부담을 호소했고 정부는 ‘당근책’으로 공휴일 축소를 추진했다. 2006년 식목일(4월 5일), 2008년 제헌절이 차례로 공휴일에서 제외된 까닭이다. 근로 일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법정 공휴일도 줄어드는 일종의 거래가 이뤄진 셈이다. ▷이보다 앞서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된 국군의 날(10월 1일)과 한글날(10월 9일)은 토요일 반나절만 근무하는 주 5.5일제 시행의 여파였다. 10월의 방학이라 불렸던 ‘퐁당퐁당’ 공휴일부터 퇴출당했다. 당시 이를 논의했던 국무회의 브리핑을 보니 “사회가 너무 노는 분위기로 가는 것은 문제”라며 “공휴일을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국무위원의 정제된 발언 수위가 이랬으니 사회적으로 얼마나 근면, 성실이 강조되던 분위기였을지 짐작이 간다. ▷공휴일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쉬라고 하는 날이니 시대상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유엔의 날(10월 24일)은 6·25전쟁에 참여했던 유엔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공휴일로 지정됐다. 하지만 북한이 세계보건기구(WHO), 유네스코 등 유엔 산하 기구에 줄줄이 가입하자 정부가 그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공휴일 지정을 취소했다. 남북 경쟁이 쉬는 날을 갑자기 일하는 날로 만들었다. 1999년부터는 1월 2일이 신정 연휴에서 제외됐다. 양력설을 권장했으나 여전히 음력설을 고수하는 사람이 많자 휴일을 축소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난 극복이라는 명분도 있었다. ▷제헌절이 추가되면서 올해 연간 법정 공휴일(대체 휴일 포함)은 22일까지 늘어났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합하면 모두 119일, 일 년의 약 3분의 1을 쉬는 셈이다. 현재 주 4.5일제 도입도 논의되고 있다. 예전 같으면 공휴일을 축소하자는 목소리가 벌써 나왔을 법도 한데 잠잠하다. 키오스크부터 휴머노이드까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기술이 등장해 노동력 투입이 곧 생산성과 직결되지 않는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분위기도 대세로 자리 잡았다. 제헌절에 출근하던 18년 동안 세상이 이렇게나 바뀌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보통 5000∼1만 원이면 살 수 있는 ‘시장표’ 김장 조끼의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이 화제가 되고 있다. 명품 브랜드에서 김장 조끼를 그대로 베낀 듯한 제품을 출시한 것이다. 발렌티노는 알록달록한 꽃무늬에 털 장식을 단 조끼를 내놓았다. 가격이 무려 630만 원이다. 제품명 자체에 김장 조끼를 연상시키는 ‘겨울이 지난 후’(프랑스어로 Après l’Hiver) ‘작은 꽃들’(이탈리아어로 ‘Fiorellini’) 같은 단어가 들어 있다. 몽클레르도 큼직한 꽃무늬가 박힌 오리털 조끼를 233만 원에 판다. 지난해 아디다스도 진홍색 꽃무늬 재킷을 출시해 인기를 끌었다. ▷마당에 둘러앉아 고무 대야에 잔뜩 쌓인 김치를 종일 버무리려면 따뜻하면서도 팔, 다리가 움직이기 편해야 했다. 솜으로 누빈 김장 조끼와 몸뻬 바지는 실용성과 보온성을 갖춘 최고의 작업복이었다. 김장 조끼가 상징하는 ‘시골’ ‘김치’ ‘할머니’는 개발도상국 한국에서 자란 세대에겐 정겹지만 촌스러운 감성이었다. 그런데 선진국 한국에서 태어난 잘파(Z+알파) 세대는 달랐다. 거리낌 없이 할머니 옷장을 열고 ‘쿨(Cool)’하고 ‘힙(Hip)’한 패션으로 새롭게 해석했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자신을 드러냈다. ▷김장 조끼 열풍은 전형적인 ‘K컬처’ 확산 공식을 따른다. 블랙핑크 제니, 에스파 카리나가 김장 조끼를 입은 사진이 SNS를 타고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들이 입은 김장 조끼가 도대체 무엇인지 서사를 다룬 기사가 쏟아지고, SNS에선 인증 사진이 줄을 잇는다. 한국 문화를 체험하고 싶은 외국인 관광객의 쇼핑 목록에 오르면서 전통시장 매대를 점령했다. 외국 여행을 갔다가 김장 조끼를 입은 현지인을 봤다는 목격담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이베이(eBay), 엣시(Etsy) 등 온라인 쇼핑 플랫폼에서도 팔리고 있다. ▷한류는 K팝, K드라마를 넘어 직접 가서 입어 보고, 먹어 보는 한국의 일상을 체험하는 놀이로 진화했다. 이제 명소를 찍고 돌아가는 단체 관광이 아니라 ‘한 달 살기’처럼 한국 문화에 녹아드는 관광이 뜨고 있다. 김장 조끼와 몸뻬 바지를 걸치고 김치를 담가 보고, 광장시장 노점에서 식사하고, 구석구석 골목길을 걷는다. 우리의 일상이 ‘쿨’하게 소비된다는 건 한국이 경제 강국에서 문화 강국으로 거듭났다는 뜻일 터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3년 전 ‘기생충’ ‘오징어 게임’으로 대표되는 한류를 다룬 기사에서 ‘20세기 내내 쿨이라는 개념을 서구가 독점했지만 이제는 대중문화가 다극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서구 문화의 일극 체제가 무너진 건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에서 문화가 융성하고, 온라인에서 누구나 미디어를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는 그 드문 행운을 누리는 나라에 살고 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우리나라 청년들의 삶을 설명하는 지표들이 잇달아 발표됐다. 지난해 20, 30대 ‘쉬었음’ 인구는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가구당 자산이 5% 가까이 늘었는데 오직 39세 이하 청년층의 자산만 감소했다. 소득이 적어 ‘영끌’도 힘든 청년층이 집값 상승 흐름에서 배제된 까닭이다. 청년 자살률도 10년 이래 최고치였다. 이런 우울한 뉴스를 순식간에 덮은 건 김병기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끝없이 터져 나오는 의혹이었다. 역시나 ‘부모 찬스’ 의혹은 빠지지 않았다.자식 뒷바라지에 너무 바빴던 아빠 김 의원은 당무 보랴, 지역구 챙기랴 바쁜 와중에도 두 아들을 위해 ‘슈퍼맨’처럼 움직였던 것 같다. 김 의원의 장남은 4차례 국가정보원 공채에 응시한 끝에 2016년 합격했다. 장남이 2014년 공채에서 탈락하자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였던 김 의원이 국정원에 불합격 처분 취소를 지속해서 요구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2016년 김 의원의 아내가 이헌수 당시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에게 낙방에 항의하는 통화 녹취록도 공개됐다. 이 실장은 “경력직을 추가로 뽑을 것이니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 통화 넉 달 뒤 장남은 합격했다. 장남은 입사 9년 차인 2024년 극비리에 수행해야 할 국정원 업무를 아버지를 통해 보좌관에게 ‘외주’를 준 정황도 드러났다. 그간 보도에 따르면 김 의원 차남은 2023년 3월 대학과 기업이 계약을 맺고 직원을 교육하는 계약학과인 숭실대 혁신경영학과에 편입했다. 그 방법이 기발했다. 차남은 편입하기 전에 A기업에 취업했다가 10개월을 채우고 그만뒀다고 한다. 김 의원이 숭실대 총장을 직접 만나 편입 방법을 문의했고, A기업 대표에게 취업 청탁 전화를 했던 정황을 볼 때 편입 조건을 갖추려는 위장 취업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차남은 졸업 후에 ‘빗썸’에 취직했는데 이때도 김 의원이 차남의 이력서를 들고 다녔고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보도됐다.청년 인턴에는 갑질, 자식은 애지중지 이 후보자의 모성애도 아들을 위해 국회의원을 했나 싶은 김 의원의 부성애 못지않다. 장남의 ‘위장 미혼’으로 가점을 얻어 로또 아파트에 당첨된 건 ‘부모 찬스’가 아닌 ‘아들 찬스’라 치자. 차남과 삼남은 집에서 가까운 지역아동센터와 경찰서에서 각각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했다. 앞으로 사실 확인이 필요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곳은 이들이 근무를 시작한 해부터 공익요원을 받았다. 이 후보자가 보좌진에게 삼남 근무지로 수박을 배달하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자식 같은 의원실 인턴에게 “IQ가 한 자리냐” “널 죽였으면 좋겠다”며 막말을 퍼붓던 이 후보자지만 자식은 그저 안쓰러웠나 보다. 이 후보자의 아들 셋은 할머니로부터 서울 상가와 아파트, 비상장 주식을 고루 물려받았다. 당시 이들의 소득으로 미루어 볼 때 부모로부터 증여를 받아 매매 대금을 치르고 세금을 냈을 것이란 의심이 존재한다. 이 후보자의 아들 셋은 이미 10억 원대 자산을 축적했다. 보통 청년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이 격차를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김 의원과 이 후보자의 애끓는 자식 사랑은 청년들이 ‘부모 찬스’까지 동원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협소한 기회를 두고 끝없이 경쟁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남 탓할 줄 모르고, 반칙할 줄 모르고, 변명할 줄 모르는 많은 청년은 스스로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자책한다. 좌절이 깊어 주저앉고 만다. 이런 사회를 바꿀 책임이 있는 공직자가 공동체의 안녕보다 자식의 안녕만 챙기고 위법을 저지르고도 그 윤리의 타락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절망스럽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아 이것마저 없다면’.(안도현 ‘퇴근길’) 시인이 노래했듯이 한국인에게 삼겹살은 음식, 그 이상이다. 그래서 비계를 밑장 깔아 파는 삼겹살이나 고기보다 비계만 많은 삼겹살 구이에 일절 관용을 베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삼겹살마저…’라는 배신감이 절로 들어서다. 최근 울릉도의 한 식당이 ‘고기 반, 비계 반’인 삼겹살 구이를 팔았다가 뭇매를 맞았다. 정부가 ‘비계 삼겹살’ 해결책으로 삼겹살을 지방량에 따라 부위를 나눠 유통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삼겹살은 돼지갈비 아래에서 다리 쪽으로 이어지는 뱃살 부위를 일컫는다. 지금까지 삼겹살의 지방 두께는 1cm 이하로 관리하도록 권고됐다. 앞으로는 지방 함량에 따라 3개 부위로 나눈다. 지방이 적정한 부위가 ‘앞삼겹’, 지방이 적은 부위는 ‘뒷삼겹’이다. 삼겹살 재명명을 촉발한 ‘비계 삼겹살’은 소고기의 차돌박이에 빗댄 ‘돈차돌’로 거듭났다. ▷돼지고기는 1+, 1, 2등급으로 나뉜다. 최상급인 1+ 등급은 중량에 따른 지방 비율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정 범위에 있어야 한다. 현재 1+ 등급 삼겹살 내 지방 비율은 22∼42%인데, 정부가 이를 25∼40%로 조정하기로 했다. 농가들이 지방이 적은 돼지를 사육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취지다. ‘비계 삼겹살’ 논란에 돼지도 골고루 사료를 먹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게 됐다. ▷이번 축산물 유통 구조 개선 방안에 따라 달걀도 크기별로 새 이름을 얻었다. 기존에 달걀 크기가 큰 순서대로 왕, 특, 대, 중, 소로 불렀는데 이를 2XL, XL, L, M, S로 바꿨다. ‘달걀이 옷이냐’는 조롱도 있지만 ‘왕’이 큰지, ‘특’이 큰지 헷갈리던 차에 직관적이라는 반응이 우세하다. 사실 달걀 등급제는 크기 표시가 아니더라도 너무 복잡하다. 달걀 크기 외에도 신선도에 따라 1+, 1, 2, 3등급으로 나뉘고 사육 방식에 따라 자유 방사부터 케이지 사육까지 1, 2, 3, 4번 사육으로 표시한다. 동물복지, 무항생제, 유정란 인증은 또 별도다. 이 숫자들을 조합하다 보면 달걀 고르기가 방정식 풀기만큼 어렵다. ▷달걀 등급과 인증 표시가 복잡해지며 ‘왕’ ‘1+’ ‘1번 사육’ 달걀의 가격이 올랐다. 이처럼 돼지고기 부위를 세분해서 팔면 값만 뛸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뒷삼겹 가격을 내리진 않고 앞삼겹 가격을 올리지 않겠냐는 말이다. 소비자가 취향대로 골라 먹을 순 있겠으나 상품성이 없었던 비계 삼겹살도 돈차돌이 되어 제값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식당에서 파는 삼겹살 200g의 평균 가격은 2만 원을 넘어섰다. 소비자는 비계 삼겹살뿐만 아니라 비싼 삼겹살도 달갑지 않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택배를 받아보면 물건을 샀는지, 상자를 샀는지 헷갈릴 정도다. 반창고와 양념이 떨어져 묶어 주문했는데 반창고 한 개, 양념 한 개가 각각 가로세로 족히 30cm 되는 택배 상자에 따로 배달됐다. 공책 5권을 시켰는데 택배 5개가 도착해 식겁한 적도 있다. 식품 포장은 더 심각하다. 이른바 ‘뽁뽁이’라는 완충재로 말고, 보랭팩을 여럿 넣고, 다시 비닐 충전재를 넣어 상자에 담아 보낸다. 냉동, 냉장, 상온 보관 식품을 각각 다른 상자에 담아 보내기 때문에 재활용 쓰레기 처리에 여간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다. 택배를 줄여야겠다고 결심해 보지만 그 편리함에 번번이 지고 만다. ▷기업으로선 상품이 손상돼서 반품을 받느니 포장을 많이 하는 것이 비용적으로 낫다. 택배 상자 역시 크기가 다양할수록 구입과 재고 비용, 포장 시간이 늘어난다. 표준 규격으로 설계된 자동화 설비 투자를 늘리거나, 아니면 인력을 더 고용해야 한다. 차량에 실을 때도 상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면 공간 사용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결국 기업으로선 과대 포장이 낭비가 아니라 비용 절감인 셈이다. ▷2023년 한 해 동안 재활용 폐기물 395만 t 가운데 포장 폐기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47.8%로 절반 가까이 된다. 2020년까지만 해도 포장 폐기물의 비중이 30%대였는데 코로나19 유행 동안 온라인 쇼핑이 늘면서 2021년 44.2%, 2022년 45.1%로 급증했다. 실제 아파트 단지 내 재활용 분리수거장에 가면 종이 상자, 스티로폼 상자, 뽁뽁이 등 택배 포장이 정말 무덤처럼 쌓여 있다. ▷정부는 2022년 4월 택배 과대 포장 규제를 도입했다. 포장 횟수는 1회로 하고, 택배 상자의 빈 공간이 50% 이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원래 2년 유예 기간을 거쳐 2024년 시행될 예정이었는데 돌연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다며 내년 4월까지 계도 기간을 뒀다. 대상 제품이 1000만 종 이상이고, 연간 60억 개에 달하는 택배 상자를 일일이 검사하는 게 어렵다는 이유였다. 규제 도입 당시에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문제였다. 3년이 지나도록 정부, 기업이 제도 시행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정부는 최근 일회용컵 따로 계산제, 빨대 제공 중단 등의 내용이 담긴 ‘탈플라스틱 로드맵’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체 폐기물 가운데 가정에서 배출하는 생활폐기물은 12%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상품 포장이나 택배 포장에서 발생하는 생활폐기물은 개인이 줄이려고 해봐야 방법도 없다. 이러니 “만만한 소비자만 규제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정책 순응도가 낮아진다. 유럽연합(EU)이나 일본은 생산자 규제로 방향을 틀었다. 생산 단계에서부터 과대 포장을 줄이지 않으면 지구가 쓰레기 더미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이재명 대통령은 내년 규제, 금융, 공공, 연금, 노동, 교육 등 6대 구조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교육 개혁은 유독 방향도, 실체도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12일 교육부 업무보고에선 교육 개혁에 대한 밑그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정작 남은 건 ‘환(환단고기)빠 발언’뿐이었다.이날 이 대통령의 발언만 논란이 된 건 최교진 교육부 장관의 업무보고가 그만큼 내용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최 장관은 “인공지능(AI)의 발전은 경험하지 못한 대전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진단하고도 AI와 함께 살아갈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고, 어떻게 가르칠지 제시하지 않았다. 교육부의 업무보고 1번은 ‘헌법 가치를 실천하는 민주시민·역사교육’이었다. 물론 중요하지만 이런 대전환기에 1번 정책이 맞나. 정작 현장과 불협화음을 빚는 고교학점제, 박사도 풀지 못하는 수능과 같은 민감한 이슈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이 정도면 ‘탕핑’ 아닌가사흘 뒤 최 장관의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기자들은 업무보고에서 듣지 못했던 교육 개혁 방향을 듣고 싶었다. 첫 질문은 국가 인공지능 전략위원회가 과정 중심 평가 체계를 도입하고 이를 대입에 반영하라고 권고했는데, 이에 대해 교육부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였다. 최 장관은 “서울, 경기 ‘(교육청)’에서 AI 채점 보조 시스템을 민간기업과 개발하고 있다. 그 시스템이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돕는 일을 교육부가 하겠다”고 했다. ‘교육청’이 잘하고 있다는 동문서답이다.이어 영유아 사교육 대책팀이 신설됐는데 사교육비를 줄일 방안이 있는지 물었다. “대학 입시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교육 대응책을 ‘국가교육위원회’와 함께 논의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사교육 대책은 ‘국가교육위’가 주도할 일이라고 했다.내년 3월부터 학습 및 복지, 건강, 진로 상담을 원스톱 제공하는 학생 맞춤 통합지원법이 시행된다. 취지는 좋지만 인프라가 부족해 벌써 고교학점제 꼴이 날 것이란 우려가 크다. 이에 대해 최 장관은 “선생님들의 업무를 덜어드리기 위해 ‘교육지원청’ 차원에서 학맞통 정신에 맞게 지원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행정기관으로 치면 시군구청에 해당하는 ‘교육지원청’까지 소환된 것이다.현재 교육청은 초중등 교육, 국가교육위는 중장기 교육 전략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부의 업무인 고등교육에 대한 답변은 어땠을까.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업은 교육부 사업이라기보다는 ‘지방시대위원회’ 사업의 교육 분야를 맡고 있는 것이다. 이 사업은 산업부, 노동부 여러 부처가 함께 각각의 역할을 하고….”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주무부처가 교육부가 아닌 줄 처음 알았다. 수능 개선안과 관련해선 “국가교육위에서 공론화 과정을 거치고 보완한다면 그 과정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 제도를 시행하기 위한 준비가 교육부의 역할”이라고 했다. 이 정도면 중국에서 유행한다는 ‘탕핑’(躺平·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음) 아닌가.교사 정치기본권 수호에만 적극이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출신인 최 장관이 똑부러진 대답을 한 건 업무보고에서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교원의 정치기본권 보장’과 관련한 질문이었다. “SNS 정치 관련 글에 교사가 ‘좋아요’를 누르는 활동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어른인 교사는 최 장관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권리 수호가 가능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4세 고시를 보라면 봐야 하고, 퍼즐 같은 수능을 풀라면 풀어야 한다. 그가 ‘교사부’ 장관을 자처하며 교육 개혁을 주저하면 아이들은 잘못된 교육 시스템에 순응해 생존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교육은 답이 없다지만, 장관이라면 최소한 개혁 의지는 보여야 하지 않나.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완벽한 경기를 완벽한 승리로 완성한 건 ‘삐약이’ 신유빈 선수의 인터뷰였다. 13일 홍콩에서 열린 월드테이블테니스(WTT) 대회에서 신 선수는 임종훈 선수와 혼합복식 조를 이뤄 우승했다. 이 대회는 WTT 시리즈 경기 성적이 상위권인 선수들을 초청해 치르는 일종의 ‘왕중왕전’이다. 임종훈-신유빈 조는 남녀 단식 세계 1위인 왕추친-쑨잉사 조와 결승전에서 맞붙어 3-0으로 완파했다. 우승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신 선수는 맞상대였던 네 살 위 쑨 선수에게 “잉사 언니, Take care(건강 챙기세요)”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임종훈-신유빈 조는 왕추친-쑨잉사 조와 파리 올림픽, 도하 세계선수권 대회 등에서 6번 맞붙어 6패를 기록했다. 이날 값진 첫 승리를 만끽할 법도 한데 신 선수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발목 부상을 안고 경기에 임한 쑨 선수부터 찾았다.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고 쑨 선수도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어진 인터뷰에선 그는 “운동선수에겐 몸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 저도 마음이 아프다”라고 했다. 임 선수 역시 “프로페셔널하게 경기를 해 준 왕추친-쑨잉사 선수에게 고맙다”고 했다. 이들의 인터뷰를 지켜본 홍콩 관중들은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이날 경기는 스포츠 정신의 ‘정석’ 같았다는 평가다. 부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 선수와 부상당한 상대 선수를 걱정하며 승리 앞에서 겸손한 선수…. 아름다운 경쟁은 중국인의 마음까지 녹였다. 웨이보 등 중국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우승 세리머니를 자제하고 중국 선수를 배려한 신 선수의 매너를 칭찬하는 글이 이어졌다. 오랜 시간 살얼음판 같던 한중 관계에서 신 선수가 외교관 100명이 못 할 일을 해낸 것 같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여자 단식 동메달 결정전에서 신 선수는 일본의 하야타 히나 선수에게 접전 끝에 패했다. 아깝게 진 경기인데도 상대 선수에게 먼저 다가가 밝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 그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신 선수는 “나를 이긴 상대들은 그만큼 나보다 더 오랜 기간, 묵묵하게 노력했던 선수들”이라며 “그런 점은 인정하고 배워야 한다”고 했다. 당시에도 일본 언론과 SNS에서 신 선수에게 매료됐다는 반응이 나왔다. ▷사실 스포츠 선수끼리는 국경, 인종, 언어를 넘어 우정을 나누곤 한다. 훈련 과정은 얼마나 고되고 경기는 긴장되는지, 승패에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얼마나 많은지, 정당한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는 패배는 얼마나 쓰라린지 ‘동병상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 선수는 “다들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경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반경이 국경을 넘어선다는 것을 ‘삐약이’ 신 선수가 보여준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뀐 건 2017년 수능부터다. 원점수 90점 이상을 받으면 모두 1등급이다. 그런데 올해 수능에서 영어 1등급 비율이 3.11%에 그쳐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국어 수학 등 나머지 상대평가 과목의 1등급 비율(4%)을 밑돈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것이다. 올해 영어 1등급을 받은 수험생은 1만5145명, 지난해 절반 수준이다. 평소 모의평가 성적을 믿고 수시에 지원했던 수험생들은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대거 탈락할 처지다. “강제로 재수하게 생겼다”며 울분을 터뜨린다. ▷오승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10일 이른바 ‘불(火)영어’ 사태를 책임지고 사퇴했다. 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1998년 출범 이후 원장 12명(1명은 연임) 가운데 오 원장을 포함해 9명이 중도 사퇴했다. 이 중 6명은 수능 출제 오류로 물러났다. 오 원장은 ‘평가원장 잔혹사’ 명단에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로 물러난 첫 사례로 이름을 올렸다. 전임 이규민 원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배제’ 지시를 따르지 않고 수능 모의평가를 출제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경질됐다. ▷오 원장은 “(수능 출제도) 결국 사람이 하는 거라 아이들에 따라, 출제자에 따라 난이도가 오락가락한다”고 했다. 입시 당락에 결정적인 수능은 ‘완벽한 시험’이기를 요구받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처음 출제 오류로 물러난 건 3대 이종승 원장이다. 2004학년도 수능 언어영역 17번 문항이 복수 정답인 것으로 인정돼 재채점이 이뤄졌다. 입시 현장의 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해임됐다. 가장 최근에는 2022학년도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이 법원 소송으로 비화했다. 소송을 제기한 응시생 92명은 세계적 유전학 석학으로부터 “문제의 전제에 모순이 있다”는 답변서를 받아 수능 공신력을 문제 삼았다. 평가원이 패소했고 당시 11대 강태중 평가원장이 물러났다. ▷암기력이 아닌 사고력을 측정하겠다며 수능이 도입된 지 32년이 지났다. 하지만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서 당초 취지는 온데간데없다. 전국 수험생을 일렬로 줄 세우는 변별력을 갖추려다 보니 배배 꼬인 문제가 출제된다. 최상위권 대학 합격생을 가려내기 위한 ‘킬러 문항’이 대표적이다. 32년 전과 교과과정은 다를 바 없는데 기출 문제를 피하고 변별력을 갖춘 ‘기적의 문제’를 찾아내야 한다. ▷사교육은 지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도 출제 패턴을 익혀 마치 퍼즐 풀듯 정답을 골라내는 요령을 주입하고 있다. 수능이 고교 교육과 괴리된 채, 되레 획일적 인재를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수능이 학업 성취도 측정을 넘어 대학의 역할인 학생 선발까지 떠맡아 벌어지는 일이다. ‘수능 만능주의’ 신화를 깰 때가 됐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잘 잊어버리는 사람을 금붕어에 빗댈 만큼 금붕어는 하찮은 지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5일 이재명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초인공지능(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을 언급하며 “인류는 금붕어가 되고 AI가 인간이 되는 모습이 펼쳐질 것”이라고 했다. 범용일반지능(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이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졌다면 ASI는 인간보다 1만 배 뛰어난 지능을 가진 기술이다. AI가 인간을 금붕어로 만들 만큼 똑똑해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손 회장은 지난해 6월 주주총회에서 “ASI가 10년 이내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AI 긍정론자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도래를 예상한다. 인간을 초월한 지능이 출현하면 금붕어가 인간의 행동과 의도를 이해할 수 없듯, 우리가 AI의 행동과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손 회장은 “이제는 우리가 AI를 통제하고, 가르치고, 관리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AI와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고 어떻게 동기화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빅테크들은 ASI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메타는 7월 초인공지능연구소(MSL)를 설립해 AI 연구자들을 대거 영입했다. 구글은 딥마인드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는 ‘슈퍼인텔리전스팀’을 꾸려 ASI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인간을 초월한 지능을 가진 ASI가 등장하면 질병, 빈곤, 에너지 등 인류의 난제도 ‘1+1’을 계산하듯 쉽게 해결할 것으로 예상한다. 금붕어가 수조라는 인간이 만든 완벽한 생육 환경에서 살듯이 말이다. ▷인간이 금붕어가 되고 AI가 만든 세상이 수조가 된다면 축복일까, 재앙일까. 손 회장은 낙관적으로 봤다. 그는 “우리가 강아지를 죽이려 하지 않는 것처럼, AI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ASI가 우리를 공격하거나 먹을까 봐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금붕어를 키울 때 수조 물을 갈고, 적당한 수온을 유지하고, 시간에 맞춰 먹이를 주는 것처럼 ASI도 인간을 그렇게 돌볼 것이란 예상이다. ▷2014년 저서 ‘슈퍼 인텔리전스’로 ASI 출현을 예고한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지난해 출간한 ‘딥 유토피아(Deep Utopia)’에서 AI가 인간보다 모든 일을 잘하게 된 세상을 그렸다. 일하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질병 정복으로 늙지 않는 세상이 왔다. 인간은 풍요롭긴 하지만 삶의 목적을 찾기 어렵고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다. 남을 돕는 봉사, 모성을 발휘하는 육아처럼 인간의 마지막 영역이라 믿었던 일까지 AI가 오류 없이 잘할 수도 있다. 어쩌면 AI가 인간을 해치는 것보다 더 두려운 미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2·3 비상계엄 선포 직전 열린 ‘5분 국무회의’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발언하는 동안 국무위원 10명 중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 윤 전 대통령의 발언을 조용히 경청했고, 계엄 지시 문건을 공손히 받았다. 영상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감사원이 최근 공개한 ‘의대 증원 추진 과정’ 감사 보고서는 ‘5분 국무회의’ 같은 비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일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의대 2000명 증원이 결정됐다’는 감사 보고서의 결론보다 행간에 담긴 상식을 벗어난 국정 운영에 놀라고 말았다. 윤 전 대통령은 한 번도 2000명이라는 숫자를 콕 찍어 지시한 적이 없었다. 대통령실 참모, 정부 관료가 거친 성정의 대통령을 거스를까 마치 ‘스무고개’를 풀 듯이 집단 지성을 발휘한 결과였다.“충분히 증원” 대통령 지시 맞히기의대 증원 방안의 첫 보고는 2023년 6월이었다. 2025년부터 매년 500명씩 늘리는 방안이었다. 이에 대해 조규홍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대 증원에 관한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여 보는 차원에서 이전 정부에서 추진한 연 400명 증원을 참고해 제시한 숫자”라고 진술했다. 처음부터 과학적 추계나 의료계와의 합의는 제쳐두고 대통령의 뜻을 알아보려는 ‘간 보기 숫자’를 내밀었단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그것 가지고 문제 해결이 되겠나. 1000명 이상은 늘려야 하지 않겠나”고 이를 반려했다.복지부는 같은 해 10월 대통령 보고 초안을 다시 만들었다. 이번에는 2025년부터 3년간 매년 1000명씩 늘리고 이후 정원을 재조정하겠다고 했다. 이를 사전에 검토한 안상훈 당시 대통령사회수석비서관이 “1000명 정도로 보고하면 혼날 수도 있다”며 박민수 당시 복지부 2차관에게 다시 만들라는 뜻을 전달했다.대통령실 참모가 정책적 합리성도, 정무적 판단도 아닌 단지 대통령에게 혼날까 봐 수정을 지시했는데 그 지시가 또 통했다. 복지부는 초안을 고쳐 3년간 1000명씩 늘리고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 2000명을 증원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런데도 윤 전 대통령은 “필요한 만큼 충분히 더 늘려라”고 재차 지시했다. 그 자리 참석자 누구도 대통령에게 ‘충분히’의 뜻을 묻거나 적정 증원 규모나 의대 교육 여건을 설명하지 않았다.누구도 “안 된다” 하지 않았다두 번이나 보고가 퇴짜 맞자, 조 전 장관은 “대통령이 충분한 증원을 계속 지시했는데 복지부 장관으로서 충분히가 어느 정도인지 고민에 빠졌다”고 했다. 주무 부처 장관 고민의 수준이 이랬다. 그제야 복지부는 보고서 3건을 종합해 2035년 부족 의사 수 1만 명이라는 근거를 찾았다.복지부의 ‘1만 명 부족’ 추계를 보고받은 이관섭 당시 정책실장은 ‘2000명’이라는 숫자를 처음 꺼냈다. 조 전 장관에게 “첫해부터 2000명 일괄 증원으로 가자”는 제안을 했다. 복지부는 이를 반영해 같은 해 12월 ‘900∼2000명 단계적 증원안’과 ‘2000명 일괄 증원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윤 전 대통령은 단계적 증원안에는 반대했고 일괄 증원안에는 “더 검토를 해보라”고 지시했다. 지난해 2월 6일, 복지부는 대통령이 비토하지 않은 ‘2000명 증원안’을 대통령의 뜻이라고 보고 발표했다.그리고 1년 7개월간 의정 갈등으로 온 나라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토론은커녕 지시에 토도 달지 못하니 의대 증원 같은 비합리적인 정책이 나오고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처럼 국력이 낭비됐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은 계엄으로 폭주했다. 직에 걸맞은 책임감이라고는 없던 ‘예스맨’ 관료들의 비겁함도 동력을 제공했을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