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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경임 논설위원입니다.

woohaha@donga.com

취재분야

2024-03-24~20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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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13%
사회일반10%
건강10%
  • 권익위가 보여줬던 ‘가장 보통의 상식’[광화문에서/우경임]

    조국 법무부 장관이 14일 사퇴했다. 그가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 67일 동안 대한민국은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가 허물어진 ‘조국 아노미’에서 허우적댔다. 그 와중에도 상식의 붕괴를 막으려고 했던 분투는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해 충돌로 볼 수 있으며 직무 배제도 가능하다.”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은 10일 국정감사에서 조 장관의 직무 수행과 부인 정경심 교수의 검찰 수사 간 직무관련성이 있다고 단언했다. 이어진 여당 실세 의원과의 공방에서도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조 장관의) 이해 충돌 행위는 구체적으로 수사에 관여하거나 영향을 끼쳤을 때 문제가 된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이상 의미가 없다.”(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 위원장은 “법령상 직무관련자가 실제 권한을 행사했는지 여부를 떠나 (본인이) 신고를 하게 되어 있다”고 맞받아쳤다. 당초 권익위 내부에서는 두 가지 국감 시나리오가 있었다. ‘이해 충돌이 발생한다’고 단호히 답변하는 안과 ‘이해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소관 부처(법무부)에서 판단할 문제’라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안. 박 위원장은 원칙을 선택했다. 권익위 내부에서도 ‘놀랐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성골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다. 조 장관과 같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출신이다. 내 편으로 기울기보다 법학자로서의 신념, 시민단체에서 쌓은 소신이 앞섰던 것 같다. 같은 사례가 또 있다. 2월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제기한 김태우 전 청와대 특감반원에 대해서도 박 위원장은 “공익신고자가 맞다”고 했다. 당시 청와대는 “아직 김 전 수사관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지지 않아 공익신고자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박 위원장의 이런 해석은 단지 꼿꼿한 수장의 소신이 아니라 법이 그러한 까닭이기도 하다. 국감에 앞서 권익위는 ‘정부조직법·검찰청법·공무원행동강령을 고려하면 직무관련성이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었다. 공익신고자 보호법은 신고 내용이 거짓임을 알고 신고하지 않는 한 폭넓게 공익신고로 인정한다. 이런 법에 존재 근거를 둔 권익위가 자기부정(自己否定)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권익위는 궂은일을 도맡아하며 힘은 없는 조직이다. 공무원에게 한이 맺힌 국민들의 민원 처리, 내부 고발이나 다름없는 부패 방지 업무 등 조직을 괴롭히는 일만 한다. 검찰처럼 수사권을 가진 것도 아니고, 감사원처럼 조사권을 가진 것도 아니니 정부 안에서 그냥 ‘밉상’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2016년 9월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권익위는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에 73명 증원을 요청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국민 400만 명이 적용받는다는 법을 시행하면서 행자부는 1개 과, 단 5명을 늘려줬다. 정부·여당 내에서 쏟아지는 비상식적 발언에 어리둥절하던 차에 ‘천덕꾸러기’인 권익위만이 상식을 의심하던 국민을 위로했으니 기특한 일이다. ‘조국 아노미’를 헤쳐 오며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상식의 힘을 새삼 깨닫는다. 그런 상식은 제 할 일을 정직하게 하며 직업적 양심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지켜왔다는 것도.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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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수몰민[횡설수설/우경임]

    싸이월드 폐쇄 소식을 들은 지난 주말, 애플리케이션(앱)을 연신 실행시켜 봤지만 응답이 없었다. 20대를 차곡차곡 채운 추억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울컥해졌다. 미니홈피에는 젊음을 훈장으로 단 사진들이 가득했다. 젊음이 불안했던 시절, 서로를 위로했던 따뜻한 대화도 남아 있다. 싸이월드는 오늘 날짜와 동일한 날짜에 올렸던 게시글을 불러다 보여주는 ‘투데이 히스토리’라는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그렇게 소환되는 육아일기를 아이와 함께 보며 킥킥거리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싸이월드는 1999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창업동아리에서 잉태됐다. 2001년 미니홈피 서비스를 선보였는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개념이 일반화되기도 전에 탄생한 혁신적인 플랫폼이었다. 마크 저커버그가 하버드생만의 SNS로 페이스북을 시작한 것보다 3년이나 빨랐다. 미니홈피 주인(ID)은 도토리(가상화폐)를 사서 스킨(배경화면)을 바꾸고 미니미(아바타)를 꾸몄다. 사진과 게시글을 올리면 일촌(친구 또는 팔로어)이 방문해 댓글을 올린다. 일촌의 일촌 미니홈피를 계속 연결해서 방문하는 ‘파도타기’도 있었다. ‘원조’ SNS라 불릴 만한 기능을 갖추고 2000년대 초·중반 전성기를 누렸다. 2007년 CNN이 한국을 “미국의 페이스북보다 먼저 싸이월드가 등장한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소개한 적도 있다. ▷싸이월드는 이용자 폭증으로 서버 관리에 어려움을 겪다가 2003년 대기업(SK커뮤니케이션즈)에 인수됐다. 공룡이 된 싸이월드는 ‘모바일 시대’ 적응에 실패하며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4년 전에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가 인수해 재기를 꿈꿨으나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문을 닫을 처지라고 한다. 싸이월드 도메인 만료일은 다음 달 12일이다. 예고 없는 폐쇄로 추억이 강제 삭제될 위기에 처한 이용자들은 “백업이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이사를 갈 때면 누구나 앨범과 편지지 묶음을 우선적으로 소중히 챙겼다. 온라인 세상이라 해서 추억이 소중하지 않을 리 없건만, 디지털에선 저장만큼 소실도 쉽다는 사실에 속이 탄다. 2013년 1세대 커뮤니티서비스 프리챌이 종료 한 달 전에 이를 공지하자 이용자들이 일일이 글과 사진을 내려받는 수고를 했다. 7월 1세대 인터넷포털 드림위즈가 이메일 서비스를 중단해 20년간 사용한 이메일이 사라지기도 했다. IT 기업의 부침으로 수난을 겪고 있는 디지털 수몰민들은 ‘잊혀지지 않을 권리’를 호소한다. 이 글이 싸이월드에 대한 조서(弔書)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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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빠진 보훈처[횡설수설/우경임]

    비무장지대(DMZ)와 바로 맞닿은 강원 철원군 승리전망대에 오르면 오성산 일대가 펼쳐진다. 1952년 10월 14일∼11월 25일 국군·미군과 중공군이 43일간의 고지쟁탈전을 벌인 곳이다. 우리는 이를 ‘저격능선’ ‘삼각고지’ 전투로 나눠 부르고 중국은 능선과 고지 사이 고개 이름을 따서 상감령(上甘嶺) 전투라 부른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처절한 혈투 끝에 오성산 정상은 군사분계선 북측에 편입된다. 그래서 중국은 상감령 전투를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한 승전으로 자평하고 ‘6·25전쟁에서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선전해왔다. ▷그 상감령 전투 때 중공군의 사진이 우리 호국영웅 포스터에 사용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국가보훈처는 9월 6·25전쟁 영웅으로 1952년 9월 13일 중공군으로부터 수도고지를 사수하다 전사한 공해동 육군하사를 선정했다. 그의 얼굴 사진도, 수도고지 전투 사진도 없어 다른 사진을 골라 썼는데 하필이면 상감령 전투의 중공군 사진이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실탄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는 글귀에다 한 달 뒤 일어난 전투의, 그것도 적군 사진을 실어 추모한 셈이다. 보훈처는 포스터를 제작한 민간업체에 책임을 돌렸으나 감수책임을 회피한 구차한 변명이다. 더구나 사진의 출처가 국립서울현충원 공식 블로그였다는 게 더 충격적이다. 현충원 블로그에 중공군 사진이 국군 기록 사진인 것처럼 올라 있었던 것이다. ▷보훈처는 이미 배포한 포스터를 폐기하고, 블로그에서 사진을 내렸다. 사료 점검시스템을 구축해 철저히 검증하겠다고 한다. 단순한 실수일지라도 ‘국가유공자 및 제대 군인, 그 유족에 대한 보훈’이라는 본질적인 업무를 생각한다면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더욱이 보훈처는 근래 들어 약산 김원봉에게 건국훈장 수여를 검토하고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다리를 잃은 하재헌 예비역 중사에 대해 전상(戰傷)이 아닌 공상(公傷) 판정을 하는 등 불필요한 갈등의 진원지가 됐다. ▷현 정부 들어 국가보훈처장은 장관급으로 다시 격상됐고 생존 애국지사에 대한 특별예우금 인상 등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을 확대해 왔다. 나라를 위한 희생에 합당한 보상뿐만 아니라 희생자의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는 세심한 배려도 중요하다. 하 중사는 “다리 잃고 남은 건 명예뿐인데, 명예마저 빼앗아 가지 말라”고 했다. 억울한 희생이 되지 않도록 명예를 지켜주는 것도 남은 우리의 몫이다. 고작 21세에 적군의 총탄에 스러진 공 하사가 이 포스터를 봤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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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원 일요 휴무제[횡설수설/우경임]

    “아이×, 주말이 더 바빠. 문법 특강 있어.” “나도 학원 있는데….” 최근 동네를 걷는 중에 앞서 걷는 초등생 둘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주말에 만나서 놀기로 했는데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얼마나 놀고 싶을까’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학원 정보에 어두운 직장맘은 학원명이 궁금해져 귀가 쫑긋해졌다. ▷서울시교육청이 학원 일요 휴무제를 추진한다. 단 하루만이라도 학생들의 휴식권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여론조사, 토론회 등 공론화를 거쳐 11월 중 시민참여단이 권고안을 마련한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학원 격주 휴무제를 공약했으나 ‘풍선효과’가 크고 현실성이 낮다는 여론에 부딪혀 무산됐다.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조 교육감이 학원 일요 휴무제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강조되면서 ‘스라밸(공부와 삶의 균형)’도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늘었으며, 왜 학생들만 ‘월화수목금금금’인지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201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를 분석한 ‘학생 웰빙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의 주당 학습시간은 49.4시간으로 OECD 평균(33.9시간)보다 15.5시간이 많다. 당연히 행복지수는 밑바닥이다. 학생들의 쉴 권리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서 학원 일요 휴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한국의 역설’이 숨어 있다. 한국은 주당 60시간 이상 공부한 학생이 주당 40시간 미만 공부한 학생에 비해 학업성취도(과학 점수)와 삶에 대한 만족도가 동시에 높은 유일한 나라였다. 한국 학생들만 유독 공부를 좋아하는 유전자를 타고났을 리는 없고, 인생 단계마다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하는 시스템에 적응하다 보니 나타난 현상일 거다. ▷이런 사회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학원 일요 휴무제를 시행하면 기대했던 효과는 없고 괜히 행정력만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미 10년 넘게 오후 10시 이후 학원 교습을 금지한 조례가 시행됐지만 아이들이 일찍 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음성적인 개인과외, 그룹과외가 성행한다는 반론도 있다. 아이가 일요일마저 학원에 매여 있는 나라도, 당국이 학원을 일제히 휴무하게 하는 나라도 지구상에 드물 것이다. 서울시내 학원 2만여 곳을 일일이 규제하고 단속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을 배제한 일률적인 법제화보다는 더디더라도 ‘잘 놀면 잘 큰다’는 당연한 이치가 통하는 사회로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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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교육 정상화라는 학종의 거짓 신화[광화문에서/우경임]

    명분만 있고 효과는 없는 ‘위선의 정책’이 수두룩하지만 교육정책은 그 괴리가 유독 심한 것 같다. 우수한, 또는 잠재력이 우수한 학생을 공정하게 선발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공교육 정상화에도 기여해야 하는 대입제도가 대표적이다. 이런 명분으로 지난 10년간 급격히 확대됐던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과연 그 사명을 다하고 있을까.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비리 의혹으로 공정한 선발과 불평등 완화라는 신화에는 금이 갔다. 그렇다면 학종이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하는지를 따져볼 차례다. 그래야 대입 개편의 방향이 선다. “초등 5학년이면 수학의 정석을 시작해야 한다.” 교육 담당으로 처음 강남 사교육을 취재했을 때 선행 광풍을 확인하고도 믿기가 힘들었다. 이에 대해 교사나 교육단체의 진단은 한결같았다. 사교육의 공포 마케팅. “철수는 수학의 정석을 두 번 풀었어요. 어머니, 이러다 우리 영희 대학 못 가요”라는데 학원 문을 박차고 나올 학부모가 있겠냐는 거다. 정작 학부모들의 분석은 달랐다. 상위권 대학들이 수시전형 중에서도 교과 성적과 비교과 활동을 함께 평가하는 학종을 늘리면서 선행 광풍이 불었다고 한다. 보통 1년 정도 선행을 했는데 이제는 상급학교 공부를 미리 한다. 왜냐하면 고등학교에 가면 학종을 준비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으니까. 그 불안한 틈새를 학원이 파고들었다. 교과 성적이 좋으려면 수행평가를 잘해야 한다. 사회 과목을 예로 들면, 동아시아 역사 인식을 둘러싼 갈등과 관련된 영상을 제작하는 식으로 출제된다. 취재 중 만난 학부모는 “기말고사 앞두고 수행평가를 준비하느라 밤을 새운 딸이 울면서 학교를 갔다. 선행 안 시킨 엄마들 다 후회한다”고 했다. “옆 반에선 과학실험 보고서가 제출 당일 가방에서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학교생활기록부에는 교과 성적 외에 진로, 봉사, 독서활동 등 비교과 항목이 기재된다. 고스란히 입학사정 자료로 활용된다. 만약 의대에 진학하고 싶은데 조 장관의 딸처럼 의학논문 제1저자로 무임승차할 수 없다면 병원에서 주말마다 의료봉사라도 해야 한다. 선행학습을 해 둬야만 비교과 활동을 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얘기다. 학생부 기재 항목이 점점 줄었지만 대입과 직결되는 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진보 진영에선 학종이 선행학습을 유발하고 공교육을 왜곡시킨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교육열을 돈으로 뒷받침하는 서울 등 일부 지역, 특목·자사고 등 일부 학교에서 빚어진 적폐라고 본다. 그런데 지방이나 일반고도 다르지 않다. 학종으로 대학에 갈 만한 아이만 교내 상을 몰아주고, 학생부를 정성껏 작성해준다. 나머지 학생들은 공교육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학종 신화’를 신봉하는 이들에 대해 학부모들은 이런 의심을 한다. 학생선발권을 뺏긴 대학이 그나마 재량권을 가질 수 있는 전형이고, 교사는 평가라는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아서 아닌지. 학종이 공교육을 정상화한다는 신화는 거짓이다. 거꾸로 학교가 잘 가르친다,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신뢰가 쌓일 때 학종이 안착된다. 제발 교육부가 ‘어떻게 평가할까’ 말고 ‘어떻게 가르칠까’를 논의했으면 한다. 입시는 공교육을 혁신하는 절대반지가 아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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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슈아 웡[횡설수설/우경임]

    검은 테 안경에 검은 배낭을 둘러멘 앳된 모습. 올해 23세 조슈아 웡(黃之鋒) 홍콩 데모시스토당 비서장은 기존 민주화 운동 ‘스타 지도자’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의 민주화 운동 경력은 화려하다. 16세였던 2012년 웡은 중고생단체인 학민사조(學民思潮)를 설립해 중국식 국민교육 과목을 철회하는 시위를 이끌었다. 2014년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했던 우산혁명의 주역으로 경찰의 최루탄 물대포를 우산으로 막자고 제안한 것이 그였다. 올해 홍콩 시위는 뚜렷한 구심점 없이 수평적인 연대가 특징이지만, 웡은 국제사회를 향해 여론전을 벌이며 홍콩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파하고 있다. ▷웡 비서장뿐만 아니라 데모시스토당 지도자인 아그네스 초우, 네이선 로 모두 20대 초중반이다. 이번 홍콩 시위는 시위대의 57.7%가 20대로 조사되는 등 청년의 분노가 두드러진다. 미 경제매체 CNBC는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은 부모 세대에 비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20대는 ‘중국인이라서 자랑스럽다’는 응답이 9%에 불과할 정도로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다. 웡의 아버지는 정보기술 전문가이고,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위태로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앞에서 웡과 같은 20대가 느끼는 위기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 홍콩 시위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기반으로 연결되고 조직됐다. SNS는 중국 정부의 검열을 피해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반(反)정부에 머물지 않고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국제사회에 지지를 결집시키고 있다. 웡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민주화를 위해 군부에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한국이 홍콩 지지 발언을 해주길 바란다. 무역을 이유로 인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독일을 향해서는 “홍콩에 진압용 무기 수출과 판매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곧 방문할 미국에는 “미국-중국 무역협상 의제로 홍콩을 올리고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촉구한다. 30년 전 톈안먼 사태보다 한층 진화한, 세련된 저항을 하고 있다. ▷웡은 “홍콩 시위는 2047년 이후 홍콩의 미래, 우리 세대에게 주어질 미래에 관한 것”이라며 “청년들은 우리 사회의 중대한 결정마다 소외됐지만 그 결과와 가장 오랫동안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그 흐름을 바꾼 혁명에는 항상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겠다고 나선 용기 있는 젊음이 있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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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다”[횡설수설/우경임]

    기적이 일어났다. 9일 오후 6시(현지 시간) 미국 해안경비대(USCG) 트위터에 “마지막 골든레이호 선원을 무사히 구출했다”는 소식이 올라온 것. 현대글로비스 완성차 운반선인 골든레이호가 미국 조지아주 브런즈윅항에서 12.6km 떨어진 바다에서 전도(顚倒)된 사고가 일어난 지 41시간 만이다. 승선자 24명 가운데 20명은 바로 구조됐으나 선박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구조가 중단됐다.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화재가 겹쳐 선박 내부 온도가 50도까지 치솟았다. 남은 한국인 선원 4명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전장 199.9m, 전폭 35.4m 크기 골든레이호는 마치 언덕이 쓰러진 듯 보였다. 화재를 진압한 해안경비대원들은 그 언덕에 올라 생존자를 찾아 나섰다. 선체를 ‘똑똑’ 두드리는 소리로 이들의 위치를 파악한 건 9일 낮. 구조는 서두르지 않되 치밀하게 이뤄졌다. 해안경비대원들은 먼저 7.6cm 구멍을 뚫어 빵과 물을 공급했고 내시경 카메라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 사다리를 내려보낼 선체를 뚫는 데는 드릴을 썼다. 용접은 빠르지만 불꽃이 튈지 몰라서다. 마지막으로 구조된 선원 A 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갇혀서 가만히 밤을 새웠지만 구조대는 (파이프 등을) 자르고 없던 길을 만들고 우리를 찾기 위해 밤을 새웠다”고 했다. ▷이번 골든레이호 구조 과정을 보며 ‘허드슨강의 기적’을 떠올렸다. 2009년 1월 뉴욕 허드슨강에 US에어웨이 비행기가 이륙 5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비상착륙했다. 승객이 전원 생존한 이 사고는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에선 기장의 기민한 판단과 헌신적인 구조 노력 등 영웅적인 행보가 감동을 줬지만 그 후 발간된 사고조사보고서는 철저한 재난 대비 덕분에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보고서는 사고 직후 각 기관에 비상경보가 전파되고 구조선이 움직이고 구급차가 집결하기까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초 단위로 기록했다. ▷골든레이호 구조작업을 지휘한 로이드 헤플린 중위는 “그들이 ‘똑똑’거리는 생존 신호를 냈을 때 밖에서 선체를 밤새워 두드렸던 건 결코 (생존자들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우리의 응답 메시지였다”며 “당신들은 혼자가 아님을 알려야 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우리는 죽지 않는다’를 되뇌며 선체를 두드리던 생존자들은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기꺼이, 묵묵히 타인의 생명을 지키는 데 사력을 다하는 이들 덕분에 사회의 안전판이 단단한 것일 터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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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도국 반납[횡설수설/우경임]

    정부가 24년 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당시 얻은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 지위를 포기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월 26일 “WTO가 중국 등 20여 개국의 개도국 혜택을 90일 이내 철회하지 않으면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 대우를 중단하겠다”고 트윗글로 압박했고, 그 시한이 다음 달 23일이다. 미국과 중국의 고래 싸움에 등 터질까 봐 이미 대만과 브라질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가 개도국 지위를 자진 반납했다.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주는 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이 1953년 67달러에서 지난해 3만 달러가 넘어선 나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여 년간 한국이 유일하다. 워낙 압축성장을 하다 보니 개도국이 아니라는 데 심리적 저항감이 있지만 경제지표로만 보면 선진국이라 봐도 무방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개도국 지위를 철회하는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주요 20개국(G20) 회원, 고소득 국가(세계은행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 1만2056달러 이상) 등 네 가지 기준을 제시했는데 한국은 이 기준에 모두 해당한다.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한국은 독특한 길을 걸어왔다. 3일 세상을 떠난 이매뉴얼 월러스틴 미 예일대 석좌교수는 개별 국가가 아닌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분석했다. 앞서 근대화를 이룬 중심부 국가들이 주변부 국가를 착취하는 구조인 세계 분업 체제에서 주변부 국가들은 저발전 상태에 고착된다. 예외가 있다. 바로 한국과 대만이다. 월러스틴 교수는 이를 ‘미국의 초청에 의한 발전’이라고 했다. 미국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국가가 충돌하는 지점에 놓인 두 나라에 막대한 원조를 했고 자유무역질서로 편입시켰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도 “한국과 대만의 경제적 성공은 매우 특수한 경험으로 다른 개도국들의 모델이 될 수 없다”며 ‘한강의 기적’이 전파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개도국 지위 포기는 상징적인 선언에 가까워 별도의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농업 부문은 낮은 관세, 높은 보조금을 적용받고 있어 농민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그동안 누리던 특혜를 당장 뺏기는 것은 아니고 새로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WTO 내 다자간 무역협상은 지지부진하고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 대세라 ‘우리 하기 나름’이라고 정부는 판단하는 모양이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세계 무역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는 것. WTO 가입으로 고속 성장의 티켓을 끊었듯, 이번 개도국 지위 포기가 농업을 혁신할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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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매운동은 한국 소비자의 선택… 위안부는 민족 아닌 인권문제”[논설위원 이슈 칼럼/우경임]

    어쩌면 일본을 한참 아래로 보며 자란 첫 세대일 터다. 밀레니얼 세대보다 늦게,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태어난 Z세대 얘기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1998년 이후 태어난 Z세대는 한국 문화의 저력을 실감하고 있다.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 사이에도 방탄소년단의 일본 투어 공연은 21만 명이 관람했고, 싱글 앨범은 돌풍을 일으켰다. 일본 영화 가요 만화 수입을 앞두고 마치 문화 침략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경계했던 시대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경제적으로는 한일이 비등비등한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보며 자랐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을 겪는 동안 우리 경제는 승승장구했다. 한국과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격차는 3배로 좁혀졌고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로 엇비슷한 수준이다. Z세대는 삼성 스마트폰을 쓰고, 모토로라 휴대전화는 알지 못한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며 민족주의 정서가 희박할 것 같은 Z세대가 반일(反日) 감정을 드러내며 불매운동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Z세대 대학생 8명을 인터뷰해 이들이 생각하는 ‘반일’에 대해 들어봤다.○ Z세대 8명에게 물어보니 Z세대는 일본 여행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인 친구를 사귀거나 함께 공부한 경험이 있었다. 일본과 직접 접촉하면서 역사 교과서 속 일본과 밖 일본이 다르다고 느꼈다고 한다. 통계적으로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이 낮게 나타났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일본인에게 호감이 간다’는 응답이 가장 많은 건 Z세대(51%)였다.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응답(29%)의 1.8배나 됐다. 물론 이웃 국가로서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매우 낮았다. 여느 세대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비율만 떼어 보면 Z세대(69%)가 가장 낮았다. 배민석 씨(20·한국외국어대)는 “한일 분쟁이 개인 대 개인 간 갈등은 아니지 않으냐”며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지만 단절되어 살 수 없는 양국 국민이 서로 적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불매운동은 꾸준히 참여하고 있었다. 같은 조사에서 Z세대 불매운동 참여율은 7월 둘째 주 66%였으나 7월 넷째 주에는 76%로 뛴다.(※한국갤럽은 8월 해당 문항을 조사하지 않았다. 한국리서치 등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참여율이 더 높아졌다.) 인터뷰에 응한 8명 모두 일본 여행을 접거나 일본 제품을 사지 않고 있었다. 이병창 씨(25·연세대)는 “불매운동은 소비자의 선택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외국 여행을 가는 친구가 일본 경유조차 꺼리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강제징용을 부인하는 일본이 싫어서’라고 하더라”며 “감정적인 반응이든, 이성적인 판단이든 소비자로서 마음이 시켜서 사지 않았다는데 이를 비난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 기업이든 한국 기업이든 돈을 쓰면서 마음이 불편해진다면 소비자는 사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반일감정 SNS상에서 증폭됐지만 2000년대 스마트폰 대중화와 함께 자라난 Z세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연결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다. SNS에서 한일 분쟁에 관한 정보나 불매운동 정보를 얻었고 ‘일본 제품 보이콧’ 같은 푯말을 찍어 올리거나 #(해시태그)를 통해 의견을 드러냈다. 김지원 씨(20·이화여대)는 “SNS를 보면 자주 보고, 관심 있는 주제를 걸러서 보여준다. ‘인권’ ‘대학’과 같은 커뮤니티에서 추천해주는 게시물을 통해 주로 정보를 얻게 된다”고 했다. 반일에 관한 정보를 편식하면서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 나타나는 건 아닌지 물었다. 이에 대해 김민수 씨(20·연세대)는 “강경론이 SNS상에서 과다 대표되는 경향이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불매운동에 대한 체감 정도가 다르다”며 “일본 제품을 (한 개도 쓰지않는) 사람을 실제로 마주치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반면 김나연 씨(19·연세대)는 “굳이 일본 제품을 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방적인 여론 몰이에는 거리를 둔다”며 “‘토착왜구’ 같은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프레임도 위험해 보인다. 1920년대 일본이 조선 분열 책략을 썼던 것과 뭐가 다른가”라고 비판했다. ○ “일본, 불공정한 게임 하고 있다” 이들이 불매운동에 나선 배경에는 일본이 먼저 게임의 룰을 깼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최다은 씨(19·부산대)는 “일본은 이번 경제보복 조치에 대해 징용 판결 때문이다, 전략물자를 반출했기 때문이다 등 오락가락하며 일관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일본의 부당한 조치는 국제무역의 ‘룰’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박재원 씨(20·고려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부터 2015년 위안부 합의까지 한일 관계의 불균형이 누적돼서 터진 것 같다”며 “과거 잘못을 부인하는 일본의 태도가 한국인이 인내할 수준을 넘어섰다. 일본이 한국을 동등한 이웃 국가로 대한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반일과 우리 정부의 반일 기조를 지지하는 것은 별개라고 봤다. 배민석 씨는 “합리적인 대안 없이 반일, 혐한 감정을 부추겨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가. 소수 정치인들의 정파적 이익에 이용당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김민수 씨도 “일본 정부의 조치는 시정돼야 하지만 우리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충분히 했는지, 그건 다른 문제”라고 했다. Z세대는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분노가 컸다. 이들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 증언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뒤에 태어났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시민운동을 동력 삼아 국제적인 이슈가 된 만큼 그 활동에 다수가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인권동아리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돕는 배지를 팔고, 모의유엔총회 등에서 토론하는 식이다. 김나연 씨는 “위안부 피해자는 민족주의 차원이 아닌 보편적인 인권 측면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류의 역사다. 과거에 매여서도 안 되지만 이를 잊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노승현 씨(20·경희대)는 “배상도 사과도 중요하지만 일본이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라고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Z세대가 말하는 진정한 반일은 그렇다면 진정한 반일이란 뭔가. 극일이란 가능한가. 김민수 씨는 “삼성이 소니를 넘어선 것처럼 실력으로 이기는 것이 극일이다. 실리적인,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과거 조선처럼 명분에만 집착해선 넘어설 수 없다”고 말했다. 노승현 씨도 “작은 나라인 만큼 경제로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경제력이 압도적이었다면 독도나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에 밀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을 배울 때 일본의 실력에 대해 배운 적은 없는 것 같다. 일정 수준 기술 자립도 필요하고 이참에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극일이 국가적인 목표가 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병창 씨는 “일본보다 경제력이 커지고, 일본이 망했으면 하는 게 우리의 목표이라는 게 이상하다”며 “그런 목표를 위해 희생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일본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면 자연스럽게 극일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Z세대는 이웃 국가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당당하게 항의했다. 한 달 뒤에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의 입시비리 의혹에도 촛불을 들었다. 정정당당하게 뛴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라고 하면 참지 않는다. 그것이 Z세대를 관통하는 가치관으로 보였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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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모 스펙’ 없는 아이에게 공정한 입시제도란[광화문에서/우경임]

    “제도가 나쁜가요. 악용하는 게 나쁜 거죠.”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의 입시 의혹이 불거진 뒤 서울 강남 대치동 입시컨설턴트와 나눈 대화다. 지금이라면 조 후보자의 딸은 제1저자로 오른 의학 논문을,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딸은 인도 대통령 추천사가 적힌 저서를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쓸 수 없다. 이처럼 입시제도를 계속 손질해도 반칙을 시도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란 뜻이다. 그는 교육부의 지침을 “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 다 하란 얘기”라고 해석했다. 여전히 아버지가 뭐 하시는지 등 ‘부모 스펙’은 통한다는 것. 부모 재력이나 인맥이 동아리나 진로 활동을 뒷받침하면 쉽게 ‘예비 과학자’ ‘예비 법조인’이 만들어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1일 조 후보자의 딸 입시 의혹과 관련해 “(조 후보자) 가족 논란 차원을 넘어서 대학입시제도 전반에 대해 재검토해 달라”고 했다. 교육부는 부랴부랴 차관 주재로 대입제도 개편 방안 회의를 열었다. 공론화를 통해 대입을 둘러싼 갈등을 얼기설기 봉합한 지 겨우 1년이 지났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출범하면 슬쩍 대입 개편을 미룰 참이었는데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으니 버틸 재간이 없다. ‘벌집 쑤시기’인 입시를 다시 만지려니 교육부로선 이런 날벼락이 없을 게다. 공정하고 단순한 입시. 문 대통령은 대입을 언급할 때마다 일관된 주문을 해 왔다. 이번 지시는 이를 뒤집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입시가 공정하려면 예측 가능해야 한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고 ‘부모 스펙’이 빵빵한 아이들의 기회가 늘어난다. 부모의 경제·사회·문화 자본이 배합돼 최적의 결과를 낳은 조 후보자 딸의 입시 과정이 대표적이다. 그가 대학생이 된 2010학년도는 입학사정관제 전형이 갑자기 확대되며 선발 인원이 10배 이상 늘었던 해다. 입시가 어떻게 요동을 치든지 부모 스펙을 갖춘 아이들은 대학에 간다. 정시 비율이 늘든, 수시 비율이 늘든 자신에게 유리한 전형을 찾아낸다. 여의치 않으면 해외 유학을 간다. 교육부의 교수 논문의 중고교생 공저자 실태 조사를 보면 2007년 이후 10년간 교수 102명이 논문 160편에 자신의 자녀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학생부에 논문 기재가 금지된 2014학년도 이후에는 그 수가 급감했다. 반대로 부모 스펙이 없는 아이들은 어느 입시에서든 불리한 게임을 한다. 일반고에선 학종으로 대학 갈 아이 한두 명에게 상이나 성적을 몰아준다. 특목고·자사고생이 아니거나 부모가 챙길 여력이 없는 아이들의 학생부는 텅 비어 있다. 수능 역시 사교육 도움 없이는 고득점이 어렵다. ‘100% 노력’만으로 아이 실력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공정한 입시란 공교육 내실화가 전제돼야 하고, 수년간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예측 가능해야 한다. 2일 사교육업체 주가가 일제히 고공 행진했다. 현 정부 들어 대입제도 개편이 혼선을 빚으면서 고1, 고2, 고3이 각각 다른 입시를 치르게 됐는데 또 바뀐다고 하니 그 불안을 파고든 것이다. 반칙을 한 사람을 퇴장시키면 되는데 경기 규칙을 공정하게 바꾼다고 한다. 앞으로 대입을 치러야 하는 학생, 그들을 키우는 평범한 학부모들은 정말 울고 싶을 따름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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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년 만의 사과[횡설수설/우경임]

    ‘원인 미상 폐손상 질환.’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 물질로 인한 폐질환의 첫 진단명이다. 2011년 4월 서울아산병원에 20, 30대 임산부 등 8명이 이 진단명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폐가 딱딱하게 굳는 섬유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돼 급성호흡부전을 겪다가 4명이 사망했다. 도통 원인을 알 수 없던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의료진은 신종 감염병을 의심했고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에 나섰다. 이들의 예리한 진단과 정직한 신고가 없었다면 ‘원인 미상’인 억울한 죽음이 계속됐을 것이다. ▷그해 8월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 살균제와의 인과관계가 의심된다고 발표했고 11월 살균 효과를 지닌 화학물질의 독성이 잠정 확인됐다. 17년간 가습기 살균제 998만 개가 팔린 뒤였다. 현재 공식적인 피해신고자는 6309명, 전체 사용자의 1% 수준으로 추정된다. 원인은 밝혀졌으나 피해자와 그 가족은 길고 긴 고통의 터널로 들어섰다. 2011년 3월 결혼 9년 만에 어렵게 첫딸을 얻은 정모 씨는 3개월 뒤 아내를 잃었다. 임신으로 배가 불러 숨이 가쁜 줄만 알았지 건강을 위해 가습기 살균제를 꼼꼼히 챙겨 쓴 것이 비극을 낳을 줄이야. 가족을 잃은 슬픔, 내 손으로 가습기를 틀어줬다는 죄책감에 정상적인 삶을 꾸릴 수 없었다. 가습기 사용이 잦은 임산부나 영·유아 피해가 커서 가정이 해체된 경우가 많다. ▷사회적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피부에는 안전한 화학물질이 흡입하면 독성물질이 된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기업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기업에서 돈을 받은 교수는 유해성 실험을 버젓이 조작했다. 공산품으로 분류돼 안전성을 검증하는 체계도 미비했다. 그 사실은 되레 정부에 면죄부를 줬다. ‘살균 99.9%’라는 광고를 믿고 구입했던 피해자들은 기업과 정부가 책임을 미루는 상황에서 법적 다툼에도 연이어 패소하며 절망에 빠져들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따르면 피해자와 가족들의 66.3%가 지속적인 울분을 경험했고, 27.6%가 자살을 생각했다. ▷8년이 지난 27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청문회. 이 원료를 제조한 SK케미칼 최창원 전 대표이사와 제품을 만든 애경산업 채동석 부회장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휠체어를 타고 이를 지켜보던 피해자들 사이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2년 전에야 피해구제 특별법이 시행됐고, 이제야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거론한다. 원인 규명도, 사과도, 법적 처벌과 보상도 지연되며 무력하고 아팠을 이들에게 너무 늦지 않는 사과이기를.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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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출생시민권[횡설수설/우경임]

    ‘중국인 임신부들은 해외여행을 온 것처럼 하와이로 입국한 뒤 로스앤젤레스(LA)로 이동했다. 입국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헐렁한 옷을 입어 부른 배를 감췄다. 머물 숙소로는 미리 외운 대로 와이키키 해변 5성급 호텔인 트럼프 호텔을 콕 집어 답했다.’ 올해 1월 미국 LA 연방검찰은 중국인 원정출산 알선업체 대표 등 20명을 비자 사기와 자금세탁 혐의로 기소했는데, 이 기소장에 쓰인 수법이다. 이 업체들은 미국 시민권 획득을 위한 원정출산 상품을 1인당 4만∼8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1일 “국경을 넘어와 아기를 낳으면 ‘축하해요, 이제 아기는 미국 시민이네’라고 말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솔직히 웃기는 일”이라며 출생시민권 제도 폐지를 언급했다. 미국에 불법 이민자 부모나 원정출산을 온 부모가 낳은 출생아 수가 연간 30만 명 수준이다. 이 가운데 원정출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10%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생시민권 폐지는 ‘캐러밴’(중남미 3개국 이민자)을 막기 위한 반(反)이민정책이지만 중국 한국 등에서 온 부유층들이 원정출산을 통해 학업·취업에서 혜택을 누리는 것도 겨냥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선거를 한 달 앞둔 지난해 10월 인터넷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한 미국 시민이 되고 85년 동안 모든 편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끝낼 때가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법 이주의 닻을 내리는 아기들(앵커 베이비·anchor babies)”이라고 했다. 원정출산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시민권이 부여되고 나중에 부모나 형제를 초청해 연쇄 이민이 이뤄진다는 점을 조롱한 것이다. 그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미 상원을 장악했다. 사실상 ‘트럼프의 승리’라는 평가가 나왔었다. ▷출생시민권 폐지는 ‘미국에서 출생하거나 귀화한 사람, 관할권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미국 시민’이라고 규정한 미 수정헌법 제14조와 배치된다. 이른바 ‘속지주의’는 1868년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에서 해방된 흑인들에게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비준됐다. 이후 미국 시민권자가 아닌 부모를 둔 이민자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관할권’을 물리적인 영토가 아니라 합법적인 체류를 기준으로 보는 극소수 의견도 있긴 하지만 출생시민권을 폐지하려면 먼저 수정헌법 제14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때문에 대선을 앞둔 정치적 행위라는 분석이 많다. 그럼에도 그의 반이민 구호가 통하는 것을 보면 미국의 인심이 사나워진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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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만나러 갑니다[횡설수설/우경임]

    “2011년 ‘이만갑’을 처음 시작할 때 남한에선 UFO(미확인 비행 물체)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매거진M이 2017년 2월 종합편성채널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를 분석한 글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 이방인으로 살던 탈북민들이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고 TV 예능의 주인공이 된 ‘이만갑’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탈북민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놓았다. 그 ‘이만갑’이 18일로 400회를 맞았다. ▷‘이만갑’ 속 재기 넘치는 탈북 여성들의 수다에는 웃다가 울리는 유머 코드가 있었다. 지금까지 600명이 넘는 탈북민이 출연했다. ‘북한 김태희’ ‘북한 심은하’가 탄생했다. ‘북한 심은하’로 불리며 7년간 출연 중인 신은하 씨와 그의 언니 은희 씨 자매는 고운 외모에선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우여곡절을 겪고 한국에 왔다. ‘이만갑’을 탄생시킨 채널A 이진민 PD는 “보통 20대 아가씨가 경험할 수 있는 고통의 총량이 넘는 기억을 갖고 있는데도 참 밝았다”며 “온갖 고초를 겪은 탈북민들이 삶에 대한 희망, 가족에 대한 사랑을 순수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토크쇼’로도 통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사연을 듣고 있자면 다른 체제 아래서 억압받던 삶이 안타까우면서도 사람 사는 게 어디서나 비슷하구나 싶다. ‘이만갑’은 폐쇄적인 북한 사회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과 같았다. 탈북민들 사이에서도 인기 프로그램이다.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의식해 또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을 위해 신분 노출을 꺼리던 이들이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계기가 됐다. 2016년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는 한국 언론과의 첫 기자간담회에서 해외 체류 북한 외교관들과 주민들이 ‘이만갑’을 즐겨 본다고 했다. 북한을 들여다보는 창인 동시에 남한을 들여다보는 창이 된 ‘이만갑’은 남북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데 일조하고 있다. ▷첫 방송부터 ‘이만갑’을 진행해 온 MC 남희석 씨는 “언젠가 두만강, 백두산에서 북한을 바라보며 방송하고 싶다”며 400회를 맞이한 소회를 밝혔다. 아마 출연자들은 더욱 간절할 것이다. ‘이만갑’ 5주년 특집에 출연했던 최종숙 씨는 “통일이 딴 게 있겠느냐. 어디든 맘대로 가고, 누구든 맘껏 만나고. 하루빨리 평양 가서 이만갑 찍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만갑’ 출연자들이 북녘에서 마음껏 웃고 떠들며 끼를 발휘하는 그날,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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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반고 개혁하려면 교사를 뛰게 하라[광화문에서/우경임]

    “미리 저축을 좀 해 둬요.” 재테크에 대한 조언이 아니다. 올해 첫째를 동네 일반고에 보낸 엄마에게 ‘아이가 학교에 잘 다니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학기 초에 학교를 갔더니 수업 받는 아이들 태반이 자고 있고, 따라올 아이만 들으라는 식”이라며 “학교는 배우는 곳이 아니라 내신시험 치르는 곳”이라고 했다. 대학에 가고 싶으면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사교육비가 여간 부담이 아니니 아이가 초등생일 때 아껴 두라고 했다. 이런 일반고에 생기가 돌게 될까. 교육부는 이달 중 일반고 역량 강화 방안을 발표한다. 자율형사립고를 폐지하기에 앞서 일반고 수준을 높여 달라는 요구에 대한 교육부의 첫 답변이다. 올해 25년 차 박성은 고교 교사. 비평준화 지역 입시 명문고에서 9년간 재직했고 지난해부터 농촌 소재 인문계고(일반고)에서 가르친다. 최근 두 고교에서 과학실험수업을 진행한 경험을 공유한 그의 글을 읽었다. 그는 ‘교육을 학교에 의존하는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교사로서 행복하다. 하지만 사교육으로 빈틈없이 관리된 아이들에 비해 학업 역량 부족이 누적된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적었다. 아이들의 학업 역량을 키우려면 맞춤형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학교 자원도, 교사의 에너지도 부족하다고 느껴서다. 이른바 명문고에선 과제를 주면 아이들이 내용물을 완벽하게 채워 냈다. 일반고에선 교사의 손길이 ‘훨씬 많이’ 필요했다. 정성을 쏟아도 아이들의 결과물은 성기었고, 박 교사는 진심 어린 감탄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가와 “스스로 끝까지 해내는 수업에서 성취감을 느꼈다” “배움의 기쁨을 알겠다. 힘들었지만 재미있다”고 속삭였다. 학업 능력이 우수한 아이들보다 뒤처지는 아이들을 성장시키려면 역량 있는 교사의 헌신이 필수적이란 얘기다. 아무리 교과서를 새로 써도, 입시를 바꾸어도, 교실을 꾸며 봐도 우리 교육은 그대로였다. 박 교사의 수업이 아이들에게 성취동기를 부여했듯이 일반고가 바뀌려면 교사가 변화해야 한다. 역대 교육 정책은 수업을 하는 교사가 아니라 평가를 받는 학생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를 답습했다고 본다. 이번 정책의 목표는 교사가 뛰게 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돼야 한다. 박 교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교사를 움직이게 할 방법을 물었다. “충분한 합의를 통해 미래 교육에 대한 방향을 정하고 교사들 마음에 불을 질러야 한다. 교사는 월급을 많이 받기 위해서 선택한 직업이 아니다. 아이를 가르치고 그 삶에 올바른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서다. 막상 고교에 근무하면 입시에 대한 압력과 경직된 문화 안에서 꼼짝하기 어렵다.” 물론 성과급 등으로 교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그의 답변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인간의 욕망이 움직이는 데 교사라고 예외일까 싶지만 그런 신념을 가졌기에 원칙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일 터다. 박 교사는 ‘우리 교육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교육부의 일반고 대책에는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담겨야 한다. 표류하는 배 안에서 똑바로 물건을 쌓을 수 없듯이, 방향 없이 방법만 덧칠한 교육 정책은 학교 현장을 어지럽게 만들 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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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격의료[횡설수설/우경임]

    “할머니가 허리와 팔다리가 아프다고 하시는데 퇴행성관절염입니다.” 강원 춘천시 보건소 황모 의무과장이 화상시스템 속 최모 할머니를 진찰하고 진단을 내린 뒤 동네 진료보건소 간호사에게 처방전을 띄웠다. 배를 타고 소양강댐을 건너 다시 버스를 타는 등 3, 4시간이 걸리는 보건소 방문 대신 집 근처서 약을 탈 수 있게 된 최 할머니 사연을 다룬 이 기사는 원격의료를 다룬 최근 기사가 아니다. 1999년 6월 ‘춘천 오지마을 첫 영상진료’라는 연합뉴스의 보도다. 당시에도 가능했던 원격의료는 20년 동안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채 원점을 맴돌고 있다. ▷20년 동안 3개 정부가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했다. 하지만 대형병원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동네의원들이 몰락할 것을 우려한 의료계 반발을 넘지 못하고 그저 시범사업으로 끝났다. 현 정부도 지난달 23일 강원도를 의료법상 원격의료 규제를 면제받는 ‘디지털헬스케어’ 규제자유특구로 지정했다. 현행 의료법은 의사와 환자 간이 아닌 의사끼리만 원격의료를 허용한다. 이 예외로 도서벽지 같은 격오지(隔奧地), 군부대, 교도소 등만 뒀다. 규제자유특구에선 고혈압·당뇨 재진환자가 집에서 의사로부터 원격진찰을 받고, 간호사가 방문하면 원격진단과 처방도 가능하다. ▷이 원격의료 사업에 동네의원만 참여하도록 했는데 단 한 곳이 응했다고 한다. 강원도의사회는 “원격의료의 문제점을 홍보했지만 불참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선을 그었지만 아무래도 서로 동료 의사들의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대한의사협회는 우리나라처럼 병원 근접성이 뛰어난 곳에서 원격의료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아 국민의 생명권을 침해할 수 있고,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의료기기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니 오진의 책임 소재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 단지 ‘밥그릇 지키기’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기술 발달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만성질환자의 스마트폰에는 투약 및 식생활 기록이 꼬박꼬박 남는다. 의사가 구글 글래스를 착용한 구급요원이 보내는 영상을 보며 응급조치를 한다. 2월 세계 최대 모바일 행사인 ‘MWC19 바르셀로나’에선 세계 최초로 5km 떨어진 환자에 대한 원격수술이 시연됐다. 5세대(5G) 이동통신 시대에는 응급 상황에서도 실시간 원격수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AI) 의사 왓슨의 진단은 얼마나 정확한가. 자칫 강원도 규제자유특구 실험조차 무산된다면 이런 기술혁명 속에 우리만 ‘의료 갈라파고스’에서 살게 될까 우려스럽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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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협은 더럽지 않다” [횡설수설/우경임]

    “타협은 더러운 말이 아니다. 절대주의자들은 다른 합리적인 견해를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지만, 정치의 가치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다.” 어제 영국 보수당 신임 대표로 선출된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에게 총리직을 물려줄 테리사 메이 총리의 말이 여운을 남긴다. 존슨 차기 총리는 10월 31일 유럽연합(EU) 탈퇴를 공언하고 있어 EU와 아무런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물러나는 메이 총리는 이를 예상한 듯 17일 마지막 연설에서 존슨 등 보수당 내 강경파를 겨냥했다. ▷메이 총리는 2016년 7월 브렉시트발(發) 혼란을 헤쳐 나갈 구원투수로 취임하면서 “모두를 위한 영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가 재임한 3년 동안 영국은 EU에 남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격랑 속에서 표류했다. 매년 부담금을 내고 EU 단일시장에 남는 ‘소프트 브렉시트’ 방안은 의회에서 세 차례나 부결됐다. 결국 스스로 물러나면서 메이 총리가 타협의 미덕을 강조한 건 브렉시트 강경파와 세계적 포퓰리즘 흐름에 맞서 브렉시트 연착륙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3년의 경험이 응축된 말일 터다. ▷메이 총리가 ‘유리절벽’에서 떨어진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유리절벽’은 조직에 막다른 위기가 닥쳐야 여성에게 고위직이 돌아가고, 그 위기를 돌파하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현상을 빗댄 말이다. ‘유리천장’을 돌파해 보니 절벽인 셈이다.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 혼란을 만든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당시 EU 탈퇴에 앞장서던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이 당 대표 경선에서 돌연 사퇴해 버리면서 얼떨결에 당선된 측면이 있다. 그래서 “남성들이 만든 쓰레기를 치우게 됐다”는 소리를 들으며 취임했는데 이제 임기 내내 메이 총리를 흔들던 존슨이 차기 총리로 등극했고 캐머런 전 총리도 정계복귀설이 솔솔 흘러나온다. ▷“정치에는 승자와 패자가 나뉘지 않는다”는 메이 총리의 말도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 곱씹어 보게 된다. 국민에게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정치가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민주당 초선 의원 4인방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인종차별 발언을 퍼부은 다음 “이 정치적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고 되레 큰소리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브렉시트 협상에서 백기만 나부낀다”며 대안 없는 강경론을 밀어붙이는 존슨 차기 총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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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연금 개혁안 어디로 사라졌나[광화문에서/우경임]

    국민연금 개혁안의 윤곽이 처음 그려진 건 약 1년 전. 지금은 우리 사회가 그 방향을 두고 시끌벅적했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논의 자체가 실종됐다. 종적을 감춘 국민연금 개혁안의 행적을 따라가 봤다. 지난해 8월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는 국민연금이 현행대로 운영되면 2057년 고갈될 것이라는 재정추계 결과를 발표하고, 매달 내는 보험료율을 최소 3∼4%포인트 이상 올리는 2개 방안을 제안했다. 보건복지부가 이를 두고 여론 수렴에 나섰지만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추계를 하는지도 모르던 국민들에게는 난데없이 지갑 터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더 받고 싶지만 더 내긴 싫다’는 국민들의 마음을 읽고 달랜 것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3개월 뒤 복지부의 연금 개혁안 초안을 보고받은 문 대통령은 “보험료 인상(폭)이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며 재검토를 지시했다. 연금 개혁안의 비극적인 결말이 예고된 순간이었다. 도저히 ‘더 받고 덜 내는’ 마법을 부릴 수 없었던 복지부는 지난해 12월 현행 제도대로 유지하는 방안을 포함한 4개 방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국회에선 폭탄이 투하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회는 재빠르게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단일안을 만들어 오면 처리하겠다”며 경사노위에 폭탄을 넘겨 버렸다. 노사 간 ‘오늘’의 이해관계가 팽팽히 맞서는 경사노위에서 ‘미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해 달라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번 국회뿐 아니라 20년 넘게 국회는 한 번도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에 찬성한 적이 없다. 2007년 단 한 번 소득대체율을 60%에서 50%로 깎았는데 당시에도 보험료는 그대로 뒀다. 그것도 국민연금법은 쏙 빼고 기초노령연금법만 처리했다가 거센 여론의 반발로 궁지에 몰려 통과시켰다. 정부→국회→경사노위가 서로 폭탄을 돌리는 사이 4월 경사노위 내 국민연금 특위는 활동이 종료됐다. 국민연금 개혁안이 그렇게 실종되나 싶었는데 정부가 불씨를 다시 피우는 모양이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8월 말까지 경사노위에서 최종 결론을 내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했고 그 논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9월 정기국회에서 국민연금 개혁안 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해 복지부가 물밑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박 장관은 국민연금이 처음 시행된 198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전신인 한국인구보건연구원 내 국민연금 연구팀이 꾸려질 당시 연구자로서 참여했다. 그만큼 국민연금에 대한 소신이 뚜렷하고, 올해 초 “국민연금법을 처리해야 하지 않냐”고 청와대에 얘기했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럼에도 주무 부처 장관이 개각 교체 명단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나서야 뒤늦게 움직인다는 비판을 피할 순 없을 것 같다. 국민연금 제도 설계에 참여했던 박남훈 전 대통령정책비서관은 ‘보험료 인상이 정치적 문제가 됐다’는 질문을 받고 “정치인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전문가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양심불량”이라고 일침을 놓았다(‘한국의 사회보험, 그 험난한 역정’). 장관을 비롯한 정부 내 전문가들이 침묵했던 지난 1년 동안 국민연금 개혁안은 표류했고, 다음 세대의 부담은 또 늘어났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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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드투’[횡설수설/우경임]

    지금까지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유색인종 여성 민주당 하원의원 4인방을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Go back to your country)’고 트윗 글을 날렸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인종차별 발언은 금기어 중 금기어고 이런 발언이 들통난 공직자는 물러나는 게 당연했다. 한데 그는 “내 몸에는 인종차별주의자의 뼈가 없다”고 우기더니 17일 미국 하원에서 그의 발언을 규탄하며 발의된 탄핵 결의안이 부결되자 “위대한 경제 부흥을 일으킨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돌아가(Go back)’ 경험담 고백이 쏟아지며 ‘반(反)트럼프 연대’가 형성됐다. 이른바 ‘허드투(Heard Too·나도 들었다)’ 운동. 파키스탄계 배우 쿠마일 난지아니는 “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아주 많이 들어봤다. 한 달 반 전에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들었다”고 했고,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법무차관을 지낸 변호사 닐 카티얄은 “3세 때부터 거의 매일 그 말을 듣는다”고 썼다. ▷뉴욕타임스는 비슷한 경험을 한 독자 제보를 받았는데 하루 만에 4800여 통이 접수됐다. ‘인종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이지만 인종차별 정서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일이지만 미국에선 1798년 적대국 출신이거나 위험하다고 간주되는 외국인의 추방을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된 적이 있고, 1882년에는 중국인 노동자의 수를 제한하는 중국인배척법이 발의됐었다. ▷남성 대 여성, 백인 대 흑인, 부자 대 빈자….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와 타자를 구별 짓기 함으로써 정체성을 만든다. 인간의 역사에서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이 때문에 학교와 가정, 사회에서 ‘차별은 옳지 않다’는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세워 차별에 맞서 왔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차별의 언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위기마다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과감한 이민정책으로 인재를 끌어들여 성장했고,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이라는 국제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이 어느새 세계와 연결된 문을 닫고 내부적으로는 ‘닫힌 사회’를 지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 흐름 선두에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서 있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아메리칸’에게 문을 걸어 잠근다면, 우리는 세계의 리더로서의 지위를 곧 잃고 말게 될 것이다.” 1989년 1월 임기 마지막 날 ‘원조 보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남긴 연설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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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승준[횡설수설/우경임]

    2002년 2월 2일 새벽 인천공항. 미국 시민이 되어 20여 일 만에 돌아온 가수 유승준 씨가 ‘STEVE SEUNG JUN YOO’라는 이름이 적힌 여권을 입국심사대에 내밀었다. “스티브 유, 입국이 금지됐습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은 “우리나라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칠 행동을 할 염려가 있는 경우 입국을 금지시킬 수 있다”고 영어로 통보했다. 공항에서 6시간 넘게 대기하던 유 씨는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리고 17년 동안 예비 장인상을 치른 3일을 제외하곤 한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97년 샛별처럼 등장해 ‘가위’ ‘나나나’ 등 여러 히트곡을 부른 인기 절정의 댄스가수가 그렇게 사라졌다. 평소 반듯한 언행으로 ‘아름다운 청년’이라 불렸던 그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는 당연히 가야 한다”고 공언했다. 막상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하게 되자 귀국보증제도를 통해 해외 공연을 핑계 삼아 출국했다가 돌연 한국 국적을 버렸다. 국민정서법에 딱 걸렸고 여론이 들끓었다. 법무부는 “국방의 의무 기피 풍조를 심어주는 악영향이 우려된다”며 입국 금지를 결정했다. ▷2015년 유 씨는 주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에 재외동포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부당한 뒤 소송을 냈다. 당시 만 38세로 병역이 면제되는 해라 그의 입국 시도는 더욱 논란이었다. 그해 5월 인터넷 방송을 통해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며 무릎까지 꿇고 사과했으나 여론은 싸늘했고 1, 2심에서도 잇달아 패소했다. 그런데 대법원이 11일 “비자 발급 거부가 위법”이라며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전화로 비자 발급 거부 사실을 통보하는 등 절차가 적법하지 않고, 그 행위에 비해 비자 거부가 과하다는 취지다. 정부는 유 씨의 비자 발급 여부를 다시 판단해야 한다. 한국에 들어올 가능성이 생겼다는 소식에 유 씨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최근 강원 철원 군부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른 더위에 두꺼운 저격수용 위장복을 입은 앳된 군인이 유독 힘들어 보여 눈길이 갔다. 힐끔힐끔 그를 보며 이들이 바치는 귀한 젊음을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 아닌지 자꾸만 미안해졌다. 유 씨의 행적은 이처럼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젊음을 조롱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 분노가 깊고 오래가는 것일 터. 병역을 기피한 고위공직자 자녀나 연예인이 수두룩한데 가혹하다는 여론도 있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입국을 허가하면 안 된다’는 응답이 68.8%였다. 43세 그에게 입국심사대의 문이 열리더라도 국민 마음의 문까지 열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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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권 젖은 외교관, 쉬러 오는 주재관… “적지에서 우리끼리 자멸”[논설위원 이슈 칼럼]

    2017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은 아세안과 한국의 관계를 한반도 주변 4강(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신(新)남방정책’을 발표했다. 지난해 8월 대통령 직속으로 ‘신남방정책 특별위원회’를 설치한 데 이어 올해 5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대표부를 신설했다. 신북방정책과 더불어 핵심 외교정책의 한 축인 셈이다. 그런데 신남방정책의 최전방 기지인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에서 탈이 났다. 외교부와 삼성에서 근무했던 김도현 주베트남 대사와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인 도경환 주말레이시아 대사가 비위에 연루돼 두 달 전 소환됐다. 김 대사는 지난해 10월 현지 기업으로부터 항공권과 숙소를 제공받은 사실이 인정돼 청탁금지법 위반 등으로 최근 해임됐다. 도 대사는 직원에게 폭언을 하고 식자재 구입비를 부풀려 공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으로 인사혁신처 중앙징계위에 회부됐고 징계위의 결정 통보를 기다리고 있다. 아세안 10개국 중 특임대사가 부임했던 2개국 모두 대사가 연루된 ‘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다.‘新남방정책’ 특임대사 2명 좌초○ “재외공관이 일을 너무 안 한다” 노무현 정부 당시 자주파로 분류돼 동맹파와의 갈등의 중심에 있던 김 전 대사는 지난해 4월 특임대사로 부임했다. 처음에는 코드 인사 논란 속에 불거진 사건이려니 했는데 그가 소환된 이후 베트남 일부 교민 사이에서 그의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사유가 있다면 징계를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 속사정이 궁금해졌다. 중앙징계위가 열리기 직전인 5월 16일 김 전 대사를 만났다. 지난주 소청심사까지 마무리됐기에 그의 주장 중 ‘재외공관의 문제점’에 대한 대목들을 지면에 싣는다. ―직원에게 폭언을 하는 등 이른바 ‘갑질’ 의혹이 있다. “다른 부처에서 파견된 주재관들과 갈등이 컸다. 양국 간 외교는 늘 하던 일이다. 현지 기업의 애로를 해소하고, 교민들의 교육이나 비자 문제 등을 다루려면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3년 쉬러 왔는데 왜 일이 많아지지’라는 불만이 있었다. 재외공관에 파견 나오면 일을 하나, 안 하나 평가는 똑같다는 거다. 사실 인사고과에 영향이 없는 게 맞다. 기업에서 온 입장에서는 ‘이렇게 일을 안 할 수가 있나’ 싶었다. (※그는 2013년부터 삼성전자에서 5년간 근무했다) 일이 진척되지 않다 보니 화를 낸 것도 사실이다. ―부정청탁금지법 위반으로 중징계를 받았는데…. “지난해 2월 다낭, 10월 냐짱 출장에서 베트남 기업으로부터 항공권과 숙박을 지원받은 게 문제가 됐다. 냐짱 출장의 경우 KN골프클럽 개관식이었는데 가족 동반으로 참석했다. KN그룹 부회장이 딸만 넷이다. 우리 아이들이 다섯인 걸 알고 반가워하며 초청했다. 공무상 출장으로 결재받은 사안이다.”(※그의 해명은 징계위서 수용되지 않았다.) “주재관들 ‘일 많아졌다’며 반발” ―정상적인 외교 활동이라면 왜 직원들이 반발했나. “신남방정책 추진이라는 특명을 받고 임명됐다. 관행대로만 일한다면 특임대사가 왜 필요한가. 그런데 이런 관행을 바꾸려면 저항이 따른다. 외교관이든 주재관이든 열심히 일해 특임대사에게 인정받아도 인사상 이익이 별로 없다. 아주 유력한 정치인이 온다면 모를까 조직 장악이 어렵다. 요즘 아래 직원들이 ‘화난 말투였다’ ‘눈빛이 쏘아봤다’며 갑질이라고 하면 움츠러든다. 민간기업과 공무원 문화가 다른데 빨리 적응을 못 한 것은 잘못이라 생각한다.”○ “교민들 만나면 골치 아프니 만나지 말라고 해” 김 전 대사가 다른 부처 출신 주재관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반면 산자부 출신인 도 대사는 외교부 직원 4, 5명의 집단적인 저항에 부딪혔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27일 도 대사와 통화를 했다. ―외교부 출신들과 불화가 있었다는 건가. “신남방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가자마자 신남방정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한류 열풍을 경제와 연계하고, 할랄푸드 시장에 진출하는 로드맵을 만들어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 출신들이 ‘안 된다’며 지시 거부를 하더라. 대사관 예산 결재 권한을 외교부 출신인 차석 대사한테 위임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이를 거부했더니 갈등이 점점 커졌다. 인사권이 없으니 이런 상황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재외공관이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처음 부임해서 직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교민들을 만나면 골치 아프니 만나지 말라’는 것이다. 해외공관이야말로 공무원 복지부동의 전형이다. 주거비 학비 통신비 등 각종 수당이 포함돼 본부보다 3, 4배 급여를 많이 받는다.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하기보다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적지에서 집안싸움으로 자멸한다” 두 대사의 해명은 자신들의 부적절한 처신을 변명하기 위해 조직에 책임을 돌리는 것일 수 있다. 또는 그들의 주장처럼 나태한 조직을 바꿔보려다 반감을 산 상태에서 허물을 잡힌 것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진위는 차차 드러나겠지만 두 대사의 해명에는 공통점이 있다. ‘고립된 왕국’인 재외공관에서 외교관과 주재관 사이 해묵은 갈등이 우리 외교 역량을 해치고 있다는 점이다. 전·현직 외교관, 주재관과 통화해 보니 “외교관과 주재관이 그저 한 공간에 머물 뿐, 전혀 시너지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각 부처에서 파견한 주재관들은 ‘쉬러 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기수나 승진 순서대로 파견을 나오니 긴장감 없이 업무에 임한다. 반면 외교관들은 권위적인 관행, 폐쇄적인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외교관은 주재관을 향해 “남 일 보듯 일한다”고 하고, 주재관은 외교부 출신을 향해 “자기들끼리만 뭉쳐 다닌다”고 하며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고 한다. “국익을 수호하는 최전방이 재외공관인데 집안싸움으로 원팀 대응이 어렵다”고도 했다.외교관-주재관, 편갈라 집안싸움 현재 재외공관 수는 166곳이다. 공관당 인원은 수 명에서 수십 명까지 편차가 크지만 3, 4인 공관이 35%를 차지한다. 실질적인 외교력을 발휘하기에는 규모가 작아 통폐합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대사 자리를 위해 공관을 늘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이다. 외무고시 출신이면 정년까지 공관장 두 번은 나간다는 암묵적인 공식이 아직도 통한다. 공관장이 굳이 성과를 내거나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다. 더욱이 미국 중국같이 대형 공관들은 업무량도 많고 각종 감사도 정기적으로 받지만 이런 소형 공관들은 감시 사각지대에 있다. 주재관은 각 부처에서 인사를 한다. 그러다 보니 공관장에 대한 충성도가 낮고 외교 업무의 전문성도 부족한 경우가 없지 않다. 공관장은 인사권이 없는 대신 이들에 대한 지휘 책임 역시 지지 않는다. 기강 해이를 막을 제도적 장치는 없는 것이다.특임공관장 자질 검증 강화해야 외교관 출신이 아닌 공직자 학자 정치인 등 전문가를 선발하는 특임대사는 더욱 고립되기 쉽다. 이번에 특임대사 공관만 사고가 난 것을 두고 “순혈주의를 깨려다 자질과 조직 관리 능력이 제대로 검증이 안 된 상태에서 공관장을 내보낸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는 현재 19%인 특임대사 비율을 30%까지 늘리겠다고 했지만 공관장만 바꿔서는 ‘무사안일’ 외교 관행을 깨기가 어렵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외교관과 주재관 사이 불신의 벽은 더 높아집니다. 이들 사이 화학작용이 일어나도록 재외공관 개혁이 필요합니다. 적지에서 우리끼리 자멸해서야 되겠어요.” 전직 외교부 출신의 고언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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