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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주가 예측 실패 사례로 기록된 인물은 1920년대 미국 예일대의 자랑이었던 ‘계량경제학의 창시자’ 어빙 피셔 교수다. 주식투자자로도 유명했던 그는 1929년 10월 투자자들 모임에 참석해 “이제 주가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고원(高原)에 이르렀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로부터 열흘 뒤 다우존스평균주가가 하루 만에 30% 이상 폭락했는데, 바로 대공황의 시작을 알린 ‘검은 목요일’이었다. 한 달 후에도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회복이 머지않았다”고 장담했는데, 그로부터 3년간 주가는 10분의 1로 떨어졌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이달 초 “빚투도 레버리지의 일종”이란 발언으로 곤욕을 치렀다. 코스피가 4,221.87의 사상 최고가를 찍은 다음 날인 4일 라디오에 나와 “그동안 빚투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봤다” “(코스피 5,000은) 당연히 가능하다”고 했다. 당일 2.37% 하락을 시작으로 주가는 보름째 요동치며 투자자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무리한 투자를 말려야 할 사람이 빚투를 부추겼다’는 야당 의원들의 질책에 그는 결국 국회에서 사과해야 했다. 주가 예단의 함정을 잘 아는 금융 관료가 자신의 실수가 경제 교과서에 ‘박제’될 위험을 감수하며 선 넘는 발언을 한 건 이재명 정부의 ‘코스피 5,000 공약’을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주가가 정책목표가 되면서 정권 향배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공무원 영혼 안의 ‘위기회로’가 멈추고, ‘희망회로’만 작동했을 거란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 금융계의 인공지능(AI) 과잉투자에 대한 우려, 고환율을 피하기 위한 외국인의 증시 이탈 가능성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을 리가 없다. 이런 정책 조급증은 다른 분야에서도 확인된다. 지난달 서울 전 지역과 경기 12개 핵심 지역을 ‘3중 규제’로 묶은 국토교통부의 ‘10·15 대책’ 관련 통계조작 논란이 그렇다. 대책 발표 이틀 전 9월분 집값 통계를 한국부동산원에서 받고도 상승률이 높은 6∼8월 통계를 근거로 규제지역을 확대한 게 문제다. 9월 통계가 반영됐다면 서울 은평·도봉·중랑구 등 집값이 떨어진 다수 지역이 대출 제한 등의 규제를 피할 수 있었다. 공식 통계 공표 일자가 15일이고, 하루 전 대책이 결정돼 어쩔 수 없었다는 국토부 변명이 궁색하게 들리는 건 “하루 늦춰 ‘10·16 대책’을 내놓을 순 없었나”라는 반론이 더 설득력이 있어서다. 집값 상승세가 인접 지역으로 번지는 ‘풍선효과’를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의욕 과잉이 낳은 사달로 보인다. 개혁신당이 제기한 행정소송에 대해 김윤덕 국토부 장관은 “만약에 진다면 (해당지역 규제 해제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환경 정책의 과속은 더 심하다. 정부는 최근 ‘2035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확정해 발표했는데 2018년 배출량 대비 최소 53%, 최대 61%를 줄이는 내용이다. ‘세계 6위 제조업 강국’ 위상을 유지하려면 48%를 넘겨선 안 된다는 산업계 호소를 한참 뛰어넘는 것이어서 충격을 줬다. 전기요금 인상, 막대한 탄소 저감 투자가 불가피해 향후 10년 이상 이어질 대미 투자, 중국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기업들이 버텨내기 어렵게 됐다. 이 안건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키면서 이 대통령은 “일부 고통이 따르더라도 지속 가능한 성장,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반드시 가야 할, 정말로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1년 온실가스 40% 감축목표가 담긴 ‘2030 NDC’를 발표할 때 “매우 도전적인 과제이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한 것과 판박이다. 실제로는 탄소중립을 주도해 온 유럽연합(EU)에서 성장의 발목을 잡는 온실가스 목표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미국은 아예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했다. ‘합리적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정부라 뭐 하나라도 다르길 기대했던 기업들의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대선 공약은 5년 안에 달성하면 되는 목표다. 후유증이 클 2030세대의 빚투까지 부추기며 당장 코스피를 5,000 선까지 끌어올릴 이유가 없다. 정부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는 규제를 하루 이틀 먼저 하느냐가 아니라, 5년 내내 얼마나 착실히 아파트를 지어 공급하느냐에 달렸다. ‘잠재 성장률 제고’를 최고 목표로 하는 정부라면 환경주의자들의 근본주의적 주장보다 기업들의 합리적 요청에 더 귀를 기울여 과속을 막았어야 했다. 벼가 빨리 자랐으면 하는 조바심에 모를 끌어올리다가 농사를 망친 송나라 농부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 조장(助長)이다. 주식·부동산·환경·노동 등 정책 전반에서 이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현 정부 임기는 아직 10분의 1도 지나지 않았다. 한미 관세협상을 어렵게 끝낸 이 대통령이 “우리가 가진 최대의 무기는 버티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른 경제 정책에선 그런 참을성을 찾아보기 어려워 걱정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10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미국 2위 고용주 아마존이 인원 감축에 돌입했다. 인공지능(AI)과 로봇을 더 많이 활용하는 대신 불필요한 인력을 쳐내기로 한 것이다. 한국에선 최근 LG유플러스가 3년 만에 대규모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기업들로선 현실로 닥쳐온 ‘AI 혁명’에 적응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 전략이다. 하지만 기술 급변의 시대에 다시 사회로 내던져진 중년 세대에겐 가혹한 시련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아마존은 본사 직원 35만 명 중 최대 3만 명 정도를 줄이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2027년까지 미국 내 신규 인력 16만 명을 자동화로 대체할 수 있고, 이는 상품 1개를 판매할 때 약 30센트의 비용 절감 효과를 낼 것’이란 아마존의 내부 문서가 얼마 전 유출돼 공개된 적이 있다. 그래서 대량 해고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내부 문서에 따르면 아마존은 전체 사업 운영의 75%를 자동화할 계획이다. 2033년까지 상품 판매량을 2배로 늘리면서도, 자동화를 통해 60만 명의 추가 고용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앞서 마이크로소프트(MS)도 9000명을 해고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진행했는데, 감원의 주요 타깃은 40, 50대 중간 관리자였다. ▷LG유플러스는 3분기 중 전체 인력의 5.7%에 해당하는 600여 명을 희망퇴직 형태로 구조조정했다. 다수는 50대 과장급으로, 1인당 최대 4억∼5억 원대의 위로금을 받았다. 아직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 나이여서 퇴사 후 학자금을 지원하는 조건도 붙었다. 업계에선 “사상 최대의 퇴직 지원금”이란 평가가 나왔지만, 급격한 AI 전환으로 재취업도 어려운 시대에 ‘따뜻한 이불’ 밖으로 나가야 하는 퇴사자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데도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은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KT는 작년 말부터 1조 원을 들여 2800여 명을 희망퇴직으로 내보내고, 1700명을 자회사로 전출했다.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5대 시중은행에서도 올해 2000명 정도가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난다. 은행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인 50대 중반 퇴사자가 제일 많다. 모두 세대교체 없이 적체된 고령 인력을 유지하면서 AI 시대에 대응하기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노동계와 정부 여당이 법정 정년 65세 연장의 군불을 때는 것도 구조조정을 서두르는 이유다. ▷조용히 진행되는 희망퇴직, 찬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대기업 인사 시즌의 영향일까. 기업의 줄도산으로 퇴직자가 쏟아지던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배경인 드라마 ‘태풍상사’가 세간의 화제라고 한다. 증시에는 열풍을 불어넣는 AI가 고용시장엔 초유의 한파를 예고하고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그런데, 바나나는 왜 오르냐고. 수입 규제 품목도 아니잖아요. 공급 수량 얼마든지 늘릴 수 있는 게 바나난데….” 지난달 말 국무회의를 주재하던 이재명 대통령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게 이렇게 캐물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과일 수입하려는 걸 다 알고 있고, 수입할 때도 가격을 (올리는 것)”이라는 송 장관의 답에 대통령이 “에이, 그런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당황한 송 장관이 “2023년 12월부터 시점을 고려할 때 환율 문제도 좀 생각해야 한다. 이때부터 환율이 굉장히 높았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바나나 토론은 “제가 추측하는 이유는 정부 통제 역량의 상실”이란 대통령의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장바구니 물가를 깨알같이 챙기는 대통령의 모습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다만 왜 ‘바나나’였는지는 의문이다. 추석 연휴를 사흘 앞둔 시점에 일반 국민, 자영업자들의 관심이 제일 높은 품목은 쌀값이었다. 추석연휴가 지나며 하락했지만 17일 기준 쌀 20kg 소매가는 6만6075원으로 1년 전보다 24% 높다. 1인당 쌀 소비량이 매년 최저치를 경신하는데 쌀값이 급등한 이유는 정부의 통제가 과도하게 이뤄진 탓이다. 작년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평년보다 쌀값이 떨어지면 재정을 투입해 가격을 예년 수준으로 떠받치는 법이다. 농민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윤 정부는 양곡법 개정 대신 작년 10월 비축분 외에 26만 t의 쌀을 추가로 매입했다. 그 결과가 지금 쌀값이다. 공깃밥 가격이 2000원으로 올라 음식점 주인, 고객 모두 부담이 커졌다. 이쯤 되면 너무 많이 사들인 쌀을 과감히 풀어야 하지만, 끝내 양곡법을 개정한 새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가격 안정을 위해 재고를 일부 방출하긴 했지만 정부의 기본적 태도는 ‘햅쌀이 나오면 가격이 내릴 것’이란 거다. 그사이 일본에선 작년부터 이어진 ‘레이와(令和) 쌀 소동’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이시바 시게루 정부가 실각했다. 정부가 자산 시장에서 바나나, 쌀만큼 가격 문제에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품목이 주가와 집값이다.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코스피는 머잖아 4,000 선을 돌파할 기세다.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은 “주식시장 상승분 중 8할 이상이 정책의 힘”이라고 자신했다. 세계 주식시장이 동반 상승세란 점에서 ‘8할 이상’은 과장돼 보이지만, 상법 개정 등 정부 주가 부양책이 큰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쌀값처럼 정부가 가격을 밀어올리고 있다는 의미다. 반면 한국 가계 자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집값은 ‘10·15 부동산 대책’을 통해 꽁꽁 묶었다. 토지거래허가구역 등 ‘3중 규제’로 묶인 서울시 전역과 인접 경기도 12개 지역에선 대출이 어려워져 현금부자가 아닌 이들은 집을 사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의 주택거래를 사실상 멈춰 세운 건 건국 이후 처음이다. 한 달여 전 ‘9·7 공급대책’에 대해 “칭찬도 비난도 없는 걸로 봐서는 잘한 것 같다”던 이 대통령의 말이 무색해졌다. 어느 나라, 어떤 정부든 자산·상품·서비스 가격을 정치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통제하고 싶은 유혹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개방된 시장경제 체제에서 글로벌 시장의 자금흐름, 시장 구성원의 욕망에 역행하는 정부의 가격 개입은 실패로 끝나거나, 큰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넘쳐나 주식, 금, 가상화폐 등 모든 자산이 급등하는 ‘에브리싱 랠리’의 시대다. 주가를 올리긴 쉽지만, 부동산값을 안정시키거나 내리긴 대단히 어려운 환경이다. 집은 바나나처럼 단기간에 수입을 늘리거나, 빵처럼 찍어낼 수도 없다. 미국, 유럽 금융권에서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증시 고공행진과 관련해 “거품” “고평가” 같은 발언의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3500억 달러(약 499조 원) 대미투자와 관련한 우려로 1420원대까지 치솟은 원-달러 환율 등 증시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요인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정부는 “과열이 아니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뿐 ‘영끌’, ‘빚투’에 대한 경고 한마디 없다. 반면 집값과 관련해선 “집값이 안정되고, 돈이 쌓이면 그때 가서 사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의 경험과 본능은 거래가 중단된 동안 주택선호 성향을 뒤집을 만한 파격적 공급대책이 없으면, 나중에 집값이 더 크게 오를 거란 쪽을 가리키고 있다. 게다가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조만간 금리를 추가로 내릴 전망이고, 우리 정부는 확장재정 기조를 바꿀 생각이 없다. 정부도, 국민도 넘쳐나는 돈이 원하는 쪽으로만 흘러갈 거란 요행을 바라는 대신 ‘시장의 역습’에 철저히 대비하는 게 현명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가미카제(태평양전쟁 때 일본 자폭 특공대) 같은 공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일 연방정부 ‘일시 업무 정지(셧다운)’를 민주당 탓으로 돌렸다. 다음 회계연도(2025년 10월∼2026년 9월) 예산안에 여야가 합의하는 데 실패하자, 정부 마비를 야당의 발목 잡기 탓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자신의 의사가 담긴 예산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다수의 연방공무원을 ‘영구 해고’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미국 정부는 1일 0시부터 돈이 들어가는 대부분의 공공 서비스를 중단했다. 트럼프 1기 때인 2018년 12월 말부터 35일간 지속된 최장 셧다운 이후 약 7년 만이다. 미국에선 여야가 예산안에 합의하지 못할 때 이런 행정 공백이 발생한다. 80여만 명의 연방 공무원은 곧바로 강제 무급휴직에 들어갔다. 일터를 지켜야 하는 경찰·소방 등 필수 업종 공무원의 월급 지급도 중단되고, 셧다운이 끝난 뒤에야 정산을 받는다. ▷예산안의 최대 쟁점은 ‘오바마 케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저소득층 공공의료보험 가입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도입했는데, 올해 말 시한이 끝난다. 민주당은 트럼프가 삭감한 관련 예산의 복구를 주장하고, 공화당은 민주당이 미국인의 세금으로 불법 이민자에게 헬스케어 보조금을 주려고 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트럼프의 공화당은 상·하원에서 모두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달 하원은 10월 말까지 전년도와 같은 정부 지출을 유지하는 셧다운 회피 법안을 통과시켰다. 상원 통과만 남았는데, 이제까지 6차례 투표는 부결됐다. 상원의 무제한 ‘필리버스터(토론을 통한 의사 진행 방해)’를 돌파하기 위해선 60표가 필요한데 공화당의 의석은 100석 중 53석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는 커지고 있다. 급여를 못 받는 공항 관제사 일부가 병가를 내면서 항공편 지연이 급증했다. 셧다운이 언제 끝날지 몰라 ‘우버 택시’를 운전하며 주택담보대출 상환금, 생활비를 버는 관제사들도 있다고 한다. 정부의 물가·고용 관련 통계 발표도 중단됐다. 연방 공무원의 소득 감소가 소비침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셧다운이 한 주 길어질 때마다 약 21조 원의 경제적 피해가 발생한다는 추산도 있다. ▷인공지능(AI) 낙관론에 힘입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미국 증시는 “협상은 없다”며 버티는 트럼프의 심리적 뒷배가 되고 있다. 과거 발생한 셧다운 때 증시가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경험도 작용했다. 다만 경제의 미래가 불확실할 때 상승하는 ‘안전자산’ 금의 가치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달러 가치는 약세를 보이면서 세계 최강국의 정치 혼란에 대한 글로벌 시장의 불안감을 반영하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해마다 노벨상 시즌에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가 분야별 수상자를 발표할 때 이들의 국적, 소속 기관에 관심이 쏠리는 건 한국인들만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공개된 7일엔 국적보다 특정 기업의 이름이 더 주목을 받았다. 공동 수상자 3명 중 2명이 미국 빅테크 플랫폼 기업 ‘구글’에서 일하거나, 일한 적 있는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2년 연속으로 노벨상을 받으면서 구글 출신 수상자 수는 5명으로 늘었다. ▷올해 물리학상 수상자 중 한 명인 프랑스 출신 미셸 드보레는 미국 예일대, UC샌타바버라 교수면서 구글의 양자 분야 연구 조직인 ‘구글 양자 AI(인공지능)’의 수석 과학자다. 지난해 세계 최고 슈퍼컴퓨터로 10의 25제곱년(年) 걸릴 문제를 양자컴퓨터 ‘윌로’로 5분 만에 해결했다는 논문을 낸 저자 중 한 명이다. 공동 수상자 존 마티니스 UC샌타바버라 명예교수도 2020년까지 구글에서 양자 컴퓨터 구축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작년 물리학상 공동 수상자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도 10년간 구글에서 AI를 연구하며 부사장직까지 올랐다가 2023년 떠난 인물이다. 작년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엔 구글 산하 AI 조직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최고경영자(CEO)와 존 점퍼 연구원이 이름을 올렸다. 2016년 한국 바둑기사 이세돌에게 4승 1패 전적으로 이긴 ‘알파고’의 아버지 허사비스는 단백질 구조 분석용 AI 모델 ‘알파 폴드’ 개발 공로가 인정돼 화학상을 받았다. ▷1901년 첫 시상 이후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낸 조직은 스탠퍼드대, 하버드대 같은 대학,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등 연구기관이 대부분이다. 이젠 구글이 2년 연속 수상자를 배출해 노벨상의 새로운 ‘산실’이 됐다. AI, 양자컴퓨터 등 차세대 기술에 캐나다, 호주의 국가 예산보다 많은 연평균 340억 달러(약 48조 원)의 연구개발(R&D)비를 투자하고, 최고 인재 확보를 위해서라면 그가 속한 회사까지 통째로 인수하는 구글식 투자가 결실을 보고 있다. ▷‘노벨 평화상’에 유달리 집착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의문의 1패’를 당했다.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존 클라크 미 UC버클리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정부의 대학·연구소 예산 삭감과 인력 감축을 “재앙”으로 표현하며 “예전 수준 회복에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꼬집었다.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윤석열 대통령 한마디에 작년 R&D 예산을 16.6%(5조2000억 원) 깎아 과학·기술계를 분노케 했던 한국도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한 국내 저비용항공사(LCC)가 최근 초저가 이벤트 상품으로 부산 출발 필리핀 세부행 편도 항공권을 ‘5만9900원’에 내놨다. 같은 회사 서울∼부산 편도 항공권 6만6000원보다 싸다. 9개나 되는 국내 LCC들의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믿기 힘든 가격의 항공권이 등장한 것이다. 해외여행 비용을 한 푼이라도 줄이려는 이들에겐 호재지만, 수익성 추락에 고민하는 항공사들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다. ▷이달 10일에 하루 휴가를 내면 3∼12일 열흘이란 긴 휴일을 즐길 수 있는 추석연휴를 앞두고 LCC의 초특가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담 여행사가 모집한 3인 이상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내년 6월 말까지 무비자로 최장 15일간 한국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한 조치까지 LCC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2분기 국제선 이용객 수는 2254만 명으로 작년 동기 대비 6.5% 늘었다. 그런데도 과잉 경쟁과 항공권 가격 하락으로 LCC 중 다수는 이 기간에 수백억 원씩 적자를 냈다.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 덕에 7월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23% 급증했지만, 혜택의 대부분은 해외 마케팅에 강한 대형 항공사들이 챙겼다고 한다. LCC들 사이에서 “이러다 다 죽는다”는 비명이 나오지만,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치킨게임’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파라타항공이 항공운항증명(AOC)을 발급받아 국내 정기편 비행기를 띄우면서 LCC 업계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한국의 LCC 수는 면적이 98배인 미국과 같은 9개이고 일본(8곳), 독일(4곳)보다도 많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상 LCC 노선으로 갈 수 있는 나라의 수도 상대적으로 적어 성장의 벽에 부딪혔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LCC들은 아예 ‘LCC’ 꼬리표를 떼고 중대형 항공기로 장거리 노선을 운항하면서 좋은 기내 서비스를 제공하는 ‘풀 서비스 캐리어(FSC)’로 전환하는 걸 고민 중이라고 한다. 내년 말 목표로 추진 중인 대한항공 자회사 진에어와 아시아나항공 자회사인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 LCC 3사의 통합이 ‘레드오션’이 돼버린 시장을 바꿔 놓을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초저가 항공권 구매 기회가 많아지는 건 고객들로선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수익성이 나빠진 LCC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을 위한 투자까지 줄일까 봐 걱정이다. 국내 LCC들의 평균 정비 인력은 대형 항공사 대비 60% 수준에 그친다. 대형 항공사들에 비해 잦은 운항시간 지연에 대한 고객들의 불만도 크다. 값이 싼 항공사보다 더 안전한 항공사 비행기를 골라 타는 스마트한 소비자들이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정부가 내놓은 내년도 예산안과 ‘2025∼2029년 국가재정 운용계획’에 따르면 이재명 정부 집권 5년간 나랏빚은 515조 원 늘어날 전망이다. 복지 정책을 확대하고, 코로나 팬데믹에 대응해 돈을 뿌린 문재인 정부의 407조 원보다 100조 원 이상 많다. 내년 정부 지출은 올해 본예산보다 8.1% 급증하고 이후에도 늘어나는데, 세금은 그만큼 안 걷힐 게 확실해 보인다. 이런 재정운용 계획을 세울 때 정부가 예상치 못했던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관세협상을 통해 한국 정부가 미국에 약속한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다. 이 대통령은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면 탄핵당했을 것” “(한미) 통화스와프 없이 미국 요구를 수용하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와 같은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합의에 포함된 3500억 달러 펀드는 양국 전략산업 협력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우리 기업들의 적극적 미국 시장 진출을 도울 것”이라고 했던 7월 말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 대통령 입에서 ‘탄핵’ ‘외환위기’란 표현이 나온 건 상황이 심상찮다는 방증이다. 당초 정부는 “3500억 달러 펀드 중 일부만 직접투자일 뿐 대부분은 대출, 보증 형태”라고 설명해왔다. 5500억 달러 대미 투자를 약속한 일본 정부와 같은 방식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달 초 일본이 관세율을 서둘러 끌어내리기 위해 5500억 달러를 ‘직접 투자’하는 내용의 양해각서에 사인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한국은 관세를 내든지, 아니면 합의를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하라. 일본은 사인했다”는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발언이 곧이어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프로젝트를 지정하면, 45일 안에 ‘현금을 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으면 합의한 상호·품목 관세율 15%를 4월 초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25%로 되돌릴 수 있다는 공개 압박이었다.“합의문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됐다”던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대통령실 평가는 우리 정부만의 생각이었다. 우리 협상라인은 당초 일본이 5500억 달러를 직접 투자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해 ‘묻어가기’ 전략을 취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가 환영한 1500억 달러짜리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내세워 미국 진출 한국 기업에 대출해주거나, 보증을 서줘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트럼프의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우리 정부가 트럼프의 남은 임기 3년 4개월 동안 3500억 달러의 ‘현금’을 마련할 방법은 국채나 국책은행 공채를 발행해 빚을 내는 것뿐이다. 한국은 준(準)기축통화국인 일본과 달리 해외에서 국채를 팔아 달러를 모으기 어렵다. 또 외환보유액의 85%에 해당하는 돈을 단기간에 미국에 보내야 한다면 외환시장에도 큰 탈이 날 것이다. 투자하고 나서도 문제다. 원금을 회수할 때까지 이익을 양국이 나눈다고 하지만, 트럼프가 마음대로 지정하는 프로젝트가 실제 이익을 낼지 미지수다. 이익이 나도 양국이 반반씩 나누는 걸 전제로 연간 수익률 10%일 때 원금 회수에 20년, 4%면 50년이 걸린다. 그동안 우리 국민은 국채이자까지 세금으로 갚아야 한다. 게다가 원금 회수 이후엔 미국이 이익의 90%를 가져가겠다고 한다.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인이라도 국가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고, 미래 세대에 막대한 빚까지 지우면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걸 지원하는 데 동의하긴 어렵다. 이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요청한 대로 한국도 일본처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미국과 맺어 위기 시에 달러를 빌려 쓸 수 있게 되면 외환시장의 충격은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나랏빚 증가까지 피할 수는 없다. 현 정부에서 늘어날 나랏빚 515조 원에 트럼프 청구서에 적힌 488조 원을 더하면 약 1000조 원이다. 유엔총회 참석차 방미 중인 이 대통령은 어제도 미 상·하원 의원단을 접견하면서 한국이 처한 어려움을 길게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의 평소 독단적 행태를 볼 때 ‘3500억’이란 숫자 자체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경쟁국 일본보다 10%포인트 높은 대미 관세를 장기간 감내하는 것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정부는 어떻게든 대미 투자 중 직접 투자 비중을 최소화하고, 투자 기간을 늘리면서 우리 기업들의 사업에 투자할 길을 찾아내야 한다. 이와 함께 이전에 세워둔 내년 예산안, 국가재정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 3500억 달러 ‘트럼프 청구서’는 점점 더 ‘국난(國難)’ 수준의 위기로 발전하고 있다. 일본 경제를 ‘잃어버린 30년’에 빠뜨린 1985년 ‘플라자 합의’에 비견되기도 한다. 허리띠도 졸라매지 않고 닥쳐오는 국난을 이겨내는 건 대단히 어렵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독침으로 널 찌르면 나도 물에 빠져 죽을 텐데,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니.” 강물을 건너게 도와달라고 개구리에게 부탁하던 전갈은 겁이 나 등에 태워주길 주저하는 개구리를 이렇게 안심시켰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강을 절반쯤 건넜을 때 전갈은 개구리의 옆구리를 찔렀다. 독이 퍼져 죽어가면서 “도대체 왜?”라고 묻는 개구리에게 전갈이 하는 말. “어쩔 수가 없어. 이게 내 본성이라고….” 더불어민주당이 노란봉투법과 ‘더 센 상법’을 단독 처리하는 걸 지켜본 한 중견기업 오너는 ‘전갈과 개구리’ 우화가 떠올랐다고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황당한 비상계엄에 분노해 이재명 정부의 출범을 순리로 받아들였고, ‘실용적 시장주의’ 메시지에 대한 기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잇따른 반(反)기업 입법을 보면서 “역시나” 하고 희망을 접었다는 거다. 노란봉투법과 2차 개정 상법, 앞서 통과된 1차 개정 상법만큼 갓 출범한 정부, 기세등등한 거대여당의 입법에 맞서 재계가 끝까지 반발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기업 경영에 실질적 충격이 예상되거나, 경영권을 위태롭게 할 사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욱이 이들 법안은 하나같이 선진국에서 선례를 찾기 힘든, 대단히 한국적인 갈라파고스 입법들이다. 재계는 노란봉투법에서 사용자 정의를 ‘근로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지위에 있는 자’로 확대하는 부분만은 빼달라고 마지막까지 호소했다. ‘실질적’이란 말에 아무런 설명도 붙지 않아 하청업체 근로자들이 원청 대기업을 상대로 단체협상을 요구하고, 파업을 벌일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선진국 법원이 사용자 범위를 넓게 인정한 관련 판례가 있긴 하지만, 법으로 이걸 못 박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거의 처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미 시행된 1차 개정 상법은 기업 이사들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와 전체 주주’로 확대했다. 미국의 일부 주법에만 있는 조항이다. 2차 개정 상법으로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에 의무화된 집단투표제는 주주에게 복수의 표를 주고, 이사 선정 때 표를 몰아줄 수 있게 한 법이다. 1950년대에 일본이 도입했다가 주주 간 파벌 싸움 등 부작용이 커 1974년 폐지하는 등 주요 7개국(G7) 중에선 의무화하고 있는 나라가 없는 제도다. 비슷한 법안들이 발의됐다가 불발됐던 문재인 정부와 다른 점이라면 지금 이재명 정부는 압도적 거대여당의 힘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법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탄핵의 늪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는 야당은 전혀 막아설 힘이 없다. 문제는 이런 좌파적 법과 제도가 우리 경제 전반의 속도를 거의 확실하게 떨어뜨릴 것이란 점이다. 노란봉투법 시행이 6개월 넘게 남았는데, 벌써 여러 대기업 하청업체 노조들은 자기 회사 대표를 건너뛴 채 “진짜 사장 나와라”며 원청 기업에 요구하고, 불법 하청을 줬다며 고소장을 내기 시작했다. 이 법이 ‘대화 촉진법’이자 ‘상생의 법’, ‘노동과 함께하는 진짜 성장법’이라는 민노총 위원장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의 주장과 전혀 상반된 움직임이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건설업체를 대상으로 이 대통령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주가를 폭락시켜야” 같은 강성 발언을 쏟아낸 뒤엔 관련 기업의 사업장들이 올스톱됐다. 안전사고는 확실하게 감소할 것이다. 하지만 국내총생산(GDP)의 15%를 차지하는 건설업 현장의 위축은 13조2000억 원짜리 민생회복 소비쿠폰의 경기 진작 효과를 떨어뜨릴 공산이 크다. “꽤 큰 개미” 대통령에 대한 기대로 ‘5,000’을 금세라도 터치할 것 같던 코스피는 내년도 세제 개편안에 담긴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강화 등에 대한 실망감으로 3,100∼3,200 박스권에 갇혀 버렸다. 요즘 정부와 여당이 밀어붙이는 정책과 입법의 대다수는 ‘잠재성장률 3% 회복’이란 국정목표와 상충한다. 지난주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향후 1년간 경기전망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5%만 ‘좋아질 것’이라고 답했다. 낙관론은 대통령 취임 직후인 6월의 52%에서 17%포인트 뚝 떨어진 반면에 비관론은 25%에서 39%로 14%포인트 증가했다. 경제의 ‘기어’를 저속으로 내리는 정책을 골라 쓰면서, ‘액셀’을 강하게 밟아봐야 소리만 요란할 뿐 성장의 속도가 높아지기 어렵다는 걸 실감하는 국민이 많아지고 있다. 대선의 강을 건너야 할 때 잠시 유권자와 기업들을 안심시키려고 친기업·성장을 외쳤을 뿐,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다면 뭐라 할 방도가 없다. 하지만 고속성장은 하고 싶은데, 방법을 잘못 알아서 이러는 거라면 요즘 ‘현타’가 왔다는 기업인들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기업들이 도입한 생성형 인공지능(AI) 파일럿 프로그램의 불과 5%만 수백만 달러(수십억 원대)의 가치를 창출했을 뿐이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산하 연구조직인 ‘NANDA 이니셔티브’가 18일 내놓은 ‘생성형 AI의 격차: 2025년 기업 내 AI 현황’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다. 앞서 15일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인터뷰에서 “투자자들이 AI에 지나치게 흥분한 단계에 있다. 닷컴버블 때처럼 과열된 건 사실”이라고 말한 것과 보고서의 반향이 겹치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이 갑자기 ‘AI 거품론(論)’의 깊은 불안 속으로 빠져들었다. ▷300개 이상 기업의 AI 사업 계획을 분석하고 기업 리더·경영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작성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400억 달러(약 56조 원)의 투자가 이뤄졌는데도, 95%의 기업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픈AI의 챗GPT,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파일럿 등 생성형 AI를 업무에 도입했더니 직원들의 업무편의 개선, 생산성 강화에 일부 효과가 있었지만, 기업의 매출 상승, 수익 창출로 거의 연결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투자자들이 얼어붙은 건 닷컴버블 붕괴의 트라우마가 크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 세계의 투자자들은 이름에 ‘인터넷’, ‘닷컴’이 포함된 기업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쏟아부었다. 이 중 대다수가 이익을 못 내는 쭉정이란 사실이 확인되면서 2000년 증시가 폭락해 5조 달러(약 7000조 원)가 증발했다. 이번 달 선보인 오픈AI의 ‘GPT 5’가 인간의 모든 지적 작업을 대신할 수 있는 ‘범용인공지능(AGI)’과 거리가 멀다는 실망감도 거품론에 한몫했다. ▷물론 낙담하긴 이르다는 반론이 많다. 투자자 돈만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뒤 아무 성과를 못 내고 사라져간 닷컴기업들과 달리 챗GPT 등은 정기구독 등으로 이미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는 게 근거다. 기업가치 고평가 논란으로 최근 주가가 폭락한 미국 AI 방산기업 팔란티어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실력을 입증했다. 중국에서 일반인 대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휴머노이드 로봇, 미국 테슬라의 자율주행차도 두뇌 역할을 하는 AI 없인 돌아가지 않는다. ▷닷컴버블을 겪은 세대라면 지금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AI 모델과 기업 대다수가 십수 년 뒤 일반인의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질 것이란 걸 경험적으로 안다. 단지 어느 AI가 끝까지 살아남아 정보기술(IT)계의 구글 같은 존재가 될지, 그때 한국인들이 우리 정체성이 담긴 ‘소버린 AI’를 쓰고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울 뿐이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투자자들은 수없이 많은 AI 버블론의 고달픈 고개를 넘어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법인세가 100조 원에서 거의 60조 원으로 40%나 빠졌습니다. 그냥 감세를 해준다고 투자하는 건 아닙니다.” 1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 자격으로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 말이다. 여당 의원의 법인세 인상 요구에는 “종합적으로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가 25%에서 24%로 낮춘 최고세율을 원상 복구하는 데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이 장면에서 이질감을 느낀 건 법인세 인상 요구를 이렇게 흔쾌히 수용하는 경제부총리를 본 기억이 없어서다. 세수 부족을 이유로 법인세 인하에 반대한 이들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경제 컨트롤타워’로 불리는 기재부, 그 전신인 재정경제부를 통틀어 법인세를 내려도 투자는 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인상에 적극 찬성하는 부총리는 사반세기 동안 본 적이 없다. 2002년 김대중 정부는 28%였던 법인세 최고세율을 27%로 낮췄고, 노무현 정부도 2005년 25%로 인하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22%로 3%포인트나 낮췄는데, 문재인 정부가 2018년 25%로 돌려놨다. 3%포인트 낮추려던 윤석열 정부는 야당 반대에 부딪혀 1%포인트 인하에 만족해야 했다. 이제 이재명 정부가 다시 25%로 높여 세제를 ‘정상화’ 하겠다고 한다. 과거 재정·세제를 책임지는 기재부, 재경부 수장들 사이에서는 경제가 어려울 때 법인세율을 낮춰 투자·고용을 촉진해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있었다. 다른 선진국들도 수십 년간 법인세 인하 경쟁을 벌여왔다. 김영삼·이명박·윤석열 등 우파 정부는 물론이고, 김대중·노무현 좌파 정부에서도 법인세율이 계속 낮아진 이유다. 노무현 정부 첫해인 2003년 재경부 세제실장 출신 김진표 부총리가 법인세 인하를 주장했을 때 ‘청와대 386’의 반격은 거셌다. 하지만 대선 후보 시절 “법인세 인하는 큰 기업에만 유리하다”며 부정적이던 노 대통령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이 뚝 떨어지고, 주가까지 곤두박질치자 재경부 의견을 받아들여 세율을 낮췄다. 유일하게 세율을 높인 문 정부 때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문 정부 첫 경제수장인 김동연 부총리(현 경기지사)는 취임 초 “소득세, 법인세 등 명목세율 인상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 달 뒤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증세를 건의하고, 문 대통령이 받아들이면서 약속을 못 지킨 경제수장이란 비판을 받았다. 올해 초 한 인터뷰에서 김 지사가 “(문 정부의) 첫 파열음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서, 두 번째는 갑작스러운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에서 나왔다”고 한 걸 보면 말 못 한 속앓이가 깊었던 모양이다. 이번 구 부총리 발언이 더 불편한 건 그가 거론한 숫자 때문이다. 그는 62조5000억 원인 작년 법인세수와 103조6000억 원이 걷힌 2022년을 비교해 40% 감소했다고 했다. 2022년은 전년도 ‘팬데믹 특수’로 사상 최대 실적을 낸 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이 법인세를 많이 낸 해이고, 반면 작년은 주요 기업이 실적 악화로 세금을 못 낸 해다. 앞서 세율 25%가 적용된 2018년 세수는 70조9000억 원, 2019년은 72조2000억 원이었다. 윤 정부가 세율을 24%로 낮춘 2023년에도 80조4000억 원이 걷혔다. 2022년이 이례적으로 세수가 많았고, 작년은 심하게 덜 걷힌 해일 뿐, 한국의 평년 법인세수는 70조∼80조 원 수준이란 의미다. 문 정부의 기재부 예산실장, 2차관을 거쳐 임기 말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을 지낸 ‘예산통’ 구 부총리가 이걸 모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런데도 세금 인상 논리를 뒷받침하기 유리한 숫자 2개만 콕 집어 비교한 건 전형적인 ‘통계 체리 피킹’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경제부총리의 발언에 대한 신뢰를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다. 게다가 세율을 1%포인트 다시 올려도 늘어나는 세수는 기껏해야 수조 원이다. 구 부총리 말대로 법인세를 깎아준다고 기업이 투자와 고용을 무조건 늘리진 않는다. 하지만 세율을 높이면 거의 틀림없이 기업의 투자와 고용, 배당은 위축될 것이다. 전 정부 정책의 흔적을 지우려고 관세 전쟁 중인 자국 기업에 세금을 더 물리는 ‘반(反)기업 정부’란 이미지는 덤이다. 구 부총리는 노무현 정부 출범 초 파견돼 임기 5년을 청와대에서 함께해 공무원으론 특이하게 ‘순장조’로 불린 인물이다. “전 세계에서 기업 하는 사람이 활동무대를 어디로 할 것인가 결정할 때, 법인세율을 갖고 고려한다면 정부는 승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국가, 지역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마당이면 1%라도 유리하게 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 관료의 설득에 법인세 인하로 마음을 돌린 노 대통령이 2003년 한 말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구 부총리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협상의 달인’을 자임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두고두고 ‘자랑’할 사진 한 장이 공개됐다. 일본 측 관세 협상단과 22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마주 앉은 트럼프의 책상 위에는 ‘$400B(빌리언)’이란 액수가 인쇄된 패널이 놓였다. 그런데 숫자 4는 펜으로 지워져 있고, 그 위에 ‘500’이란 손 글씨가 적혀 있었다. 협상 도중에 트럼프의 즉흥적 요구로 일본의 대미 투자액이 자그마치 5000억 달러로 1000억 달러(약 137조 원)나 늘어났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트럼프가 몇 시간 뒤 최종적으로 공개한 일본의 대미 투자펀드 규모는 5500억 달러(약 758조 원)로 그보다도 더 불어났다. 패널에는 ‘이익 공유 50%’란 문구도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일본 투자에서 나오는) 이익의 90%는 미국이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당초 미국과 일본이 투자 이익을 ‘5 대 5’로 나누기로 했는데, 마지막에 분배 비율이 ‘미국 9 대 일본 1’로 바뀐 것이다. ▷대미 투자펀드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패널’도 만들었다는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5500억 달러가 일본의 자본, 대출, 대출보증을 합한 액수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미국에서 항생제를 만들자’고 하면 일본이 자금을 댄다. 이익의 90%는 미국 납세자가 갖고, 10%는 일본이 가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해 일본 돈을 트럼프 마음대로 쓰겠다는 거다. ▷개인 간에 이런 계약을 맺는다면 ‘강압에 의한 부당 거래’란 말이 나오겠지만 일본 정부는 오히려 자기위안으로 삼는 분위기다. 그 대신 25%로 예고됐던 상호관세, 자동차·부품 품목관세를 15%로 낮췄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이 한국에도 똑같은 요구를 한다는 점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러트닉 장관이 한국에 4000억 달러 투자펀드 조성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요구액은 작년 한국 정부 예산의 80%가 넘는다. 경제 규모가 일본의 절반이 안 되는데, 투자액은 별 차이가 없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따로 믿는 구석도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올해 5월 인공지능(AI) 투자를 위해 미국 정부에 제안한 3000억 달러짜리 ‘미일 공동 국부펀드’로 투자액의 절반 이상을 갈음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국가 간 약속이 대체로 그렇듯 ‘트럼프 임기만 넘기자’는 속셈도 있을 것이다. ▷최종 담판을 앞둔 한국으로선 트럼프의 변덕에 대놓고 화를 내기도 어렵다. 일본과 최소 대등한 조건을 확보하지 못하면 대미 수출에 치명적 타격을 받게 돼서다. 30년 넘게 세계 최대 순(純) 채권국 자리를 지킨 일본과 투자 규모로 경쟁하기도 쉽지 않다. 한국 경제의 미래가 걸린 관세 협상이 점점 더 난감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 1일 ‘해방의 날(Liberation Day)’에 최고 관세율을 부과한 나라는 아프리카 남부의 레소토다. 인구 200만 명, 국내총생산(GDP) 3조 원이 채 안 되는 소국이다. 다이아몬드, 임가공 리바이스 청바지 등 대미 수출이 재작년 3270억 원 규모인데, 다음 달 1일부터 50% 상호관세를 물어야 한다. 미국산 제품 수입이 미미하다 보니 무역적자액을 수입액으로 나눈 ‘황당 관세 공식’의 직격탄을 맞고 국가경제가 휘청거리는 중이다. ▷두 차례 연장 끝에 관세 부과 최종시한으로 통보된 8월 1일을 앞두고 백악관발 관세 서한을 받은 각국 정부의 표정이 천양지차다. 미얀마의 경우 40% 고율관세 폭탄을 맞고도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반응이다. 미얀마의 관세율은 40%로 25∼36%인 주변국보다 높다. 그런데도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은 트럼프 리더십을 극찬하는 답장을 공개했다.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처음으로 미국이 ‘공식 정부’ 대우를 해줘 고맙다는 것이다. ▷50% 관세가 통보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동등한 대미 보복관세를 다짐하며 기세가 등등하다. 대미 무역 비중이 GDP의 1.7%로 크지 않은 데다, 관세를 계기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면 좌파의 내년 대선 승리가 더 쉬워질 거란 계산이다. 오히려 미국에서 소비되는 커피의 3분의 1, 오렌지주스의 절반 이상이 브라질산이어서 관세 부과로 인한 미국 쪽 충격이 더 클 거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캐나다는 35%를 통보받고 찬물을 뒤집어쓴 분위기다. 캐나다와 같이 미국과 국경을 접한 멕시코에 30% 관세가 부과되면서 쇼크는 더 커졌다. 트럼프는 “캐나다가 보복관세를 물리면, 그만큼 35%에 추가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트럼프 정부에 당당히 맞서겠다며 4월 재집권한 중도좌파 자유당, 미국산 제품 불매운동을 벌인 캐나다인에 대한 트럼프의 뒤끝이란 해석이 있다. 당초보다 1% 높아진 25% 관세율을 받은 일본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트럼프를 직접 만나고, 여섯 차례 협상을 성실히 진행하고도 ‘뒤통수를 맞았다’는 분위기다. ▷관세전쟁의 클라이맥스인 다음 달 1일이 다가오는데도 글로벌 금융시장은 의외로 평온하다. 고관세 충격 우려에도 미국 증시는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트럼프는 언제나 꽁무니를 뺀다(Trump Always Chickens Out)’는 ‘타코(TACO)’ 별명처럼 이번에도 막판에 발을 뺄 거란 기대가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런 불확실한 ‘희망적 사고’에 휩쓸려 긴장의 끈을 늦추다가 관세 급등의 충격을 받는다면 하반기 한국의 경기 회복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6월 한 달간 코스피가 13.9%나 올랐다. ‘1차 동학개미 운동’이 한창이던 2020년 11월 이후 월 기준으로 최고 상승률이다. 지난달 초에는 달러 약세, 원화 강세를 겨냥한 외국인들이 상승을 주도했지만 3,000 선 돌파 뒤부터는 국내 개미군단이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상승폭을 키웠다. ‘국장 복귀는 지능순’을 외치며 유턴해 돌아온 ‘서학개미’들까지 합류하며 ‘2차 동학개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말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코스피 5,000’ 공약을 내걸고 출범한 이재명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작용했다. 지금 한국 증시를 둘러싼 환경은 1차 동학개미 운동 때와 닮아가고 있다.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이 확산되자 중앙은행들은 기준금리를 대폭 내리고, 각국 정부는 돈 풀기에 나섰다. 문재인 정부가 4·15 총선을 앞두고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씩 재난지원금을 나눠준 것도 그때다. 요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기준금리 인하를 연일 압박받고 있다. 금리 인하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한국은행도 서울 등 수도권 집값만 안정되면 금리를 내릴 태세다. 한국 새 정부의 첫 경제 정책은 전 국민에게 15만∼52만 원씩 소비쿠폰을 나눠주는 30조5000억 원 규모의 2차 추경이다. 유동성이 불어나고 있다. 부동산 시장도 5년 전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2021년 2월 한국 증시에서 일어난 동학개미 운동을 소개하면서 가장 큰 원인으로 문 정부 때 폭등한 아파트 값을 지목했다. ‘월급 모아선 집을 살 수 없다’며 좌절한 한국 청년들이 영혼을 끌어모으고, 빚까지 내 주식 투자에 뛰어들었다는 분석이었다. 지난주 서울 아파트 값 상승폭은 6년 9개월 만에 최고였다. ‘6·27 대출 규제’로 수도권 주택담보대출 상한이 6억 원으로 묶인 만큼 유동성이 증시로 더 쏠릴 가능성이 커졌다. 5년 전과 큰 차이점은 기업이 처한 현실이다. 팬데믹으로 위기가 닥칠 거란 예상과 달리 당시 한국 수출 대기업들은 글로벌 특수를 맞았다. 지원금을 받았지만, 집 밖에 못 나가는 선진국 소비자들은 한국산 TV 등 가전제품을 사들였다. 사람을 피해 자연을 찾는 캠핑족에게 한국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불티나게 팔렸다. 2020년 ―0.7%로 떨어진 한국의 성장률이 2021년 4.6%, 2022년 2.7%로 반등한 이유다. 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그새 180도 달라졌다. 트럼프 관세 폭탄의 영향권에 든 한국산 자동차, 가전, 철강은 수출이 급감하는 중이다. 관세를 피해 살아남으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에 투자해 공장까지 세워야 한다. 한때 글로벌 선두에 섰던 한국의 2차전지 업체들은 중국에 시장을 대거 뺏겼고, 전기차 시장의 성장 둔화까지 겹쳐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다. 새 정부가 ‘인공지능(AI) 3대 강국’ 기치를 내걸고 100조 원을 투자한다지만, 수년 내에 한국에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출현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한은의 올해 성장률 전망은 0%대로 떨어졌고, 내년에도 2% 성장이 어려워 보인다. 주가는 기업의 수익성, 성장성을 반영해 움직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팬데믹이 닥치거나 글로벌 무역질서가 재편되는 것 같은 이례적 상황에선 현실 경제와 동떨어져 움직이기도 한다. 5년 전 실물경제와 괴리돼 폭등하는 미국 증시를 보면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칼럼에 이렇게 썼다. “투자자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주식시장은 경제가 아니다. 둘째, 주식시장은 경제가 아니다. 셋째, 주식시장은 경제가 아니다.” 내수가 침체된 지금 한국의 증시 호황은 소비를 끌어올리는 등 긍정적 효과가 크다. 부동산에 지나치게 쏠린 유동성을 증시로 분산시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의 생명력은 쇠락하는데, 주가만 계속 상승하는 건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미래 가치를 높일 투자, 인수합병(M&A)이 어려워질 것이라며 기업들이 반대하는 ‘상법 개정’을 정부와 여당은 강력히 밀어붙이고 있다. 이사회에 진출한 행동주의 펀드가 투자 대신 배당 확대를 요구하고, 경영권 분쟁을 일으킨다면 기업의 주가는 단기적으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배임 소송이 겁나 경영진이 투자를 주저하고, 새로운 성장동력 찾기를 멈추는 기업들로 가득 찬 증시가 언제까지 오를 수 있겠나. 지금 정부 여당은 ‘주가가 경제’란 믿음에 사로잡혀 눈앞의 주가 상승을 경제 정책의 목표로 삼고 있다. 주식시장은 경제의 여러 얼굴 중 하나일 뿐, 경제 그 자체가 아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계약금, 연봉, 스톡옵션, 장기 인센티브를 합해 최고 1억 달러(약 1360억 원)까지 줄 수 있다. 메타(옛 페이스북)에 와서 일해 달라.’ 최근 몇 달 새 인공지능(AI) 분야의 글로벌 최상급 인재 수백 명이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보낸 이런 취지의 이메일, 왓츠앱 메시지를 받았다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헤드헌터도 아니고, 저커버그 본인 명의로 보낸 이 제안을 ‘스미싱’(문자메시지를 이용한 사기)으로 오해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영입을 제안받은 이들은 저커버그가 개인적으로 축적한 최상급 인재목록, 이른바 ‘더 리스트’에 포함된 인물들이다. 엔지니어, 연구자들이 작성한 논문, 자료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저커버그가 직접 선정했다고 한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스탠퍼드대, 카네기멜런대 등 명문 공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오픈AI, 구글 등에서 경력을 쌓은 20, 30대가 다수다. ▷최소 수백억 원대 부자로 당장 만들어준다는 빅테크 CEO의 메시지를 받고 흥분 안 할 월급쟁이가 몇이나 될까. 이에 대해 샘 올트먼 오픈AI CEO는 “메타의 1억 달러 보상은 미친 짓이다. 최고 인재는 돈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벌써 유능한 오픈AI 연구원 8명이 메타로 이직했다고 한다. 저커버그가 이런 ‘현금 공세’에 나선 이유는 자사 생성형 AI 모델인 ‘라마’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 오픈AI의 챗GPT, 구글의 제미나이에 비해 신통치 않고, 기존 개발 인력들이 창업 등을 위해 줄줄이 회사를 떠나서다. ▷미국 빅테크들이 ‘AI 두뇌사냥’에 쏟아붓는 돈과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요즘 AI 경쟁에서 밀린다는 비판을 받는 애플은 AI 검색기업 ‘퍼플렉시티’의 CEO 아라빈드 스리니바스를 영입하는 걸 목표로, 기업가치 140억 달러짜리 이 회사를 통째로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메타도 지난달 스타트업인 ‘스케일AI’를 인수한 뒤 이 회사 CEO 알렉산더 왕에게 메타의 ‘초지능 AI 연구팀’ 수장 자리를 맡겼다. 인수액 143억 달러가 실은 왕 CEO와 주변 인재를 유치하는 데 든 비용이란 평가가 나온다. ▷막대한 자본력의 미국 빅테크와 AI 인재 유치 경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는 중국 정도다. 세계 상위 20% AI 연구원 절반이 중국인이란 점, 정부와 대학의 과감한 지원을 바탕으로 중국은 ‘딥시크’ 등 경쟁력 있는 AI 기업을 키우고 있다. 반면 한국은 선진국 중 AI 인재 유출이 가장 심각한 나라 중 하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최근 AI 분야 국내외 ‘박사 후 연구원(포닥)’ 400명을 채용하기로 했는데, 연봉은 국내 포닥 평균의 1.8배인 9000만 원이다. AI 강국으로 가는 길이 멀고도 험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정치·사회적 혼돈이 6개월 만에 일단락됐다. 8년여 만에 세 번째 정부 출범이다. 정상적인 나라, 그것도 선진국 범주에 드는 국가라면 이전 정부의 경제 성적이 다음 정부를 선택하는 최우선 기준이 됐을 것이다. 유권자는 정권의 경제 공약과 이행 능력, 실제 결과를 보면서 더 좋은 리더를 가려낼 ‘선구안’을 키운다. 이번 대선에 대해 해외에선 한국인이 경제·안보 문제에 놀랄 만큼 무관심하다는 평가가 나왔다는데, 황폐화한 정치가 정권의 경제 성적을 매길 기회를 우리 국민에게서 빼앗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탄핵으로 임기가 조기 종료되면서 경제 성적 평가가 흐지부지됐다. 소득주도성장, 규제 일변도 부동산 정책으로 비판받은 문재인 정부는 임기 말 2년이 코로나 팬데믹과 겹쳐 어디까지 정부 잘못인지 가려내기 어렵게 됐다. 독선과 정쟁의 3년을 보내고 계엄을 선포하며 자멸한 윤석열 정부의 경제 평가도 무의미해졌다. 이런 악순환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오늘 출범하는 정부가 향후 직면할 경제 현안들의 리스트를 미리 점검할 필요가 있다. 새 정부의 첫 경제적 도전은 한미 통상 협상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다음 달 8일을 마감일로 정해 놨다. 일각에선 우리 사정을 설명해 기한을 늘리자고 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항상 꽁무니를 뺀다(TACO·Trump always chickens out)’는 치욕적 별명에 바짝 독이 오른 트럼프에게 어설프게 예외 인정을 요구하다간 협상도 못 해보고 ‘한국 관세율 OO%’라 적힌 일방적 통지서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대미 수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자동차·부품 25% 관세, 철강·알루미늄 50% 관세를 낮추는 게 관건이다. 다만 그 대가로 미국 측이 한국인에게 민감한 30개월 이상 소고기, 유전자변형생물체(LMO) 수입 등을 고집한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렇다고 일부 여론만을 의식해 무작정 버티다가 경쟁국 일본보다 불리한 조건을 받는다면 한국의 수출 경쟁력 타격은 불가피하다. 새 정부의 대외문제 해결 능력도 의심받게 된다. 7월 중 결정될 내년도 최저임금도 민감하다. 노동계는 2024년 2.5%, 올해 1.7% 등 낮게 정해진 윤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률에 불만이 많다. 문제는 2년 만에 30% 가까이 최저임금을 올린 문 정부 초기처럼 가파르게 올렸다간 550만 자영업자가 벼랑 끝에 내몰린다는 점이다. 대선 후보들이 약속한 대로 30조 원 넘는 ‘2차 추경’을 편성해 자영업자들의 빚을 탕감해주고, 현금을 꽂아줄 경우의 효과는 일시적이지만, 최저임금 부담은 영구적이다. ‘임금 삭감 없는 주 4.5일 근무제’까지 속도를 높인다면 자영업자·중소기업들의 불만은 폭증할 것이다. 정년 연장은 새 정부의 최대 노동 현안이다. 60세인 법적 정년을 임금 삭감 없이 5년 늘리자는 게 노동계 요구다. 더불어민주당은 한국노총과 ‘연내 65세 정년 연장 입법 추진’을 위한 정책 협약까지 맺었다. 대기업, 공기업의 중장년 근로자는 반색하겠지만 임금 부담이 커지는 기업들은 당장 청년고용을 줄일 것이다. 이 문제를 서투르게 다뤘다간 새 정부는 임기 내내 청년층과 중장년층의 세대 갈등 격화로 몸살을 앓을 가능성이 있다. 올 연말 국회에서 통과될 내년도 정부 예산은 과거 어느 때보다 글로벌 신용평가회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것이다. 문 정부, 윤 정부를 거치며 연 100조 원 재정적자가 ‘디폴트’가 된 상황에서 적자 폭이 계속 커진다면 신용평가회사들은 국가신용등급 강등을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정부는 더 비싼 이자로 빚을 내야 하고, 시장금리도 따라 올라 기업·가계의 이자 부담이 커진다. 재정적자를 이유로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신용등급을 가차 없이 낮춘 신용평가회사에 ‘우린 미국보다 채무비율이 낮다’는 변명은 먹히기 어렵다. 정부 5년의 종합성적은 성장률과 일자리로 매겨진다. 대선 후보들은 공히 잠재성장률 3% 회복을 약속했다. 대기업의 수출에 크게 좌우되는 한국의 성장률 제고는 대기업의 수익성, 미래 가치를 높인다는 말과 동의어나 다름없다. 작년 한국의 상위 10대 기업 평균 영업이익률은 13%로 미국 10대 기업 이익률 31%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관세전쟁과 경쟁국 중국의 약진으로 수익성은 더 낮아지고 있다. 개미투자자 의견을 들어가며 기업을 경영하라는 상법 개정, 원청 대기업 상대로 하청업체가 파업할 수 있게 하는 노란봉투법 등의 입법이 현실화한다면 기업의 투자는 위축되고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들 것이다. 이런 경제 현안에 새 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유권자 하나하나가 관심을 갖고, 결과를 정확히 기억해 둬야만 5년 뒤엔 더 현명하게 정부를 고를 수 있게 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가덕신공항은 반드시 계획대로, 제대로 개항할 수 있도록 하겠다.” 2030 부산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실패 직후인 재작년 12월 초 부산을 찾은 윤석열 전 대통령은 2029년 12월까지 신공항을 개항하겠다고 했다. 엑스포 유치 실패로 신공항 건설까지 무산될까 우려하는 부산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1년 반이 지난 이달 8일, 국토교통부는 현대건설 컨소시엄과 맺은 계약을 무효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신공항 공사가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현대건설은 최근 국토부가 입찰공고에서 내건 ‘공사 기간 7년’ 조건을 2년 초과한 9년짜리 기본설계 계획을 제출했다. 공사의 극심한 난도를 고려할 때 도저히 7년 만에 공사를 마칠 수 없다는 내용의 상세한 사유서도 첨부했다. 국토부의 보완 요구에도 현대건설은 불가 방침을 재확인했다. 4차례 유찰 끝에 떠안다시피 정부와 수의계약을 맺었던 국내 건설업계의 맏형이 사실상 공사를 포기한 셈이다. ▷건설업계에선 “충분히 예상된 일”이란 평가가 나온다. 가덕신공항 예정지의 절반 이상은 바다를 매립해 조성해야 한다. 서울 남산의 3배 규모 산봉우리를 발파해 나오는 2억 m³ 이상의 돌, 흙으로 바다를 메워야 한다. 1단계 공사에 9년이 걸린 인천공항에 비해 가덕도 앞바다는 수심이 훨씬 깊고, 지반도 점토질이어서 더 무르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땅을 다지지 못하면 육지와 매립지 사이에 ‘부등침하’(지반이 불균등하게 내려앉는 현상)가 발생할 수 있다. 나중에 활주로 일부가 내려앉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공사업체는 감당 못 할 책임을 져야 한다. ▷가덕신공항은 ‘정치로 시작돼 정치 때문에 꼬인’ 국책사업이다. 노무현 정부 때 동남권 신공항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됐지만 이명박 정부가 백지화했고, 박근혜 정부는 해외 공항 전문 엔지니어링 업체의 연구용역을 받아 김해공항 확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앞서 가덕신공항에 무게를 실었고, 야당이 동조해 가덕신공항 특별법이 제정됐다. 엑스포를 의식한 윤 정부는 2035년이던 개항 시점을 5년 넘게 앞당겼다. ▷현대건설은 이미 46년 전에 ‘20세기 최대 역사(役事)’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항을 건설한 업체다. 세계 1, 2위 마천루인 ‘부르즈 할리파’, ‘메르데카118’도 한국 기업이 세웠다. 불가능에 가깝다는 세계적 난공사를 도맡아 해결해 온 우리 건설업체들이 10조5000억 원짜리 국내 공사를 못 하겠다며 두 손, 두 발 다 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설계 단계에서 차질이 빚어지면서 2029년 개항은 이미 어려워졌다. ‘안전한 공항’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현실적인 스케줄을 다시 짜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관세는 외국에 대한 세금 인상(tax hike)이고, 미국인에겐 세금 감면(tax cut)이에요. 당신이 제 경제 지식을 테스트하려고 하는 건 모욕이라고 생각해요.” 3월 미국 백악관 브리핑에서 캐럴라인 레빗 대변인이 AP통신 기자를 향해 속사포처럼 쏟아낸 말이다. “관세 내본 적 있나. 관세는 외국이 아닌 우리(미국 소비자)가 내는 거다”란 질문에 레빗이 발끈한 이 장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의 ‘남다른’ 경제 상식을 입증하는 ‘밈’이 됐다. 레빗의 말이 다 틀린 건 아니다. 물건이 비싸 안 팔릴 것 같으면 외국 수출업체는 자기 마진을 줄여 관세 부담을 떠안기도 한다. 관세를 걷어 식당, 카페 종업원 팁에 붙는 소득세를 깎아준다고 트럼프가 공약한 만큼 일부 미국인에겐 세금 감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관세는 미국 수입업자가 낸다. 수출업체, 수입업자가 이익을 줄여 감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관세는 고스란히 가격에 전가돼 미국 소비자 부담이 된다. 트럼프에게 ‘관세는 다른 나라가 내는 세금’이란 믿음을 심은 건 ‘무역전쟁의 설계자’로 불리는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이다. “모든 나라가 미국에 물건을 팔고 싶어 하기 때문에, 미국은 관세를 부과해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런 주장을 철석처럼 믿는 트럼프에게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상품가격 옆에 관세 인상으로 높아진 비용을 표시하려던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창업주에게 분노한 트럼프가 전화를 걸어 계획을 철회시킨 이유다. 트럼프에게 관세는 재정적자, 무역적자를 줄이고, 외국 투자를 끌어들여 미국 제조업을 되살려주고, 중국의 굴기를 꺾어줄 만병통치약이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의 정책기조를 ‘관주성(관세 주도 성장)’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오류가 있는 믿음에 기초한 트럼프의 관주성이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거다. 복잡다단한 국가 과제를 하나의 열쇠로 풀려 한다는 점에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트럼프 못지않다. 그의 만능열쇠는 정부 재정이다. 이 후보의 대표 성장 공약은 인공지능(AI) 산업에 대한 정부 주도의 100조 원 투자다. 평년보다 떨어진 쌀 등 농산물 가격은 정부가 예산에서 메워주겠다고 한다. 만 8세 미만에게 주던 아동수당을 18세 미만까지 대폭 늘리는 공약도 있다. 임금 삭감 없이 ‘주 4.5일 근무제’를 도입하는 기업도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한다. 하나같이 막대한 세금이 투입돼야 할 공약들인데, 나랏빚을 통제하기 위한 재정준칙, 정부지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 같은 말은 쏙 빠졌다. 이 후보의 정책 공약을 관통하는 기조는 ‘재주성(재정 주도 성장)’이다. 이 후보 재정 집착의 연원을 따라가 보면 경기도지사 시절인 2020년 말 경기도 산하 경기연구원이 내놓은 보고서가 등장한다. 보고서는 문재인 정부 ‘코로나 1차 긴급 재난지원금’의 승수효과를 1.85로 분석했다. 4인 가족에게 100만 원을 줬더니 돈이 돌고 돌아 185만 원의 효과가 났다는 거다. 당시 경기연구원장이 지금 이 후보의 ‘경제 브레인’으로 불리는 이한주 민주연구원장이다. 당시 동일한 주제를 놓고 국책연구소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승수효과를 0.26∼0.36으로 낮게 평가했다. 100만 원 중 최대 36만 원만 쓰고, 나머지는 국민 통장에 쌓였다는 분석이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당시 소비심리에 영향을 미친 다른 경기부양책, 금융시장 상황 등 변수를 모두 고려한 KDI의 분석에 동의한다. 반면 이 후보는 1.85에 대한 믿음을 지켜온 것 같다. 틈만 나면 전 국민에게 25만 원씩 나눠주자고 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 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전례 없는 재정 확대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AI, 반도체 등 국가의 미래를 위해 나랏빚을 내서라도 정부가 투자할 곳이 적지 않다. 하지만 고령 영세농이 논농사를 계속 짓게 지원하고, 업무시간을 줄인 기업에 지원금을 주는 게 얼마나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고, 성장에 기여할 수 있겠나. 6·3 조기 대선을 27일 앞두고 이 후보는 나 홀로 전국을 돌며 유세하는 중이다. 후보 단일화 논의조차 끝내지 못한 보수 후보들의 대선 공약이 뭔지 아는 국민은 거의 없다. 양당의 공약 경쟁이 없어지니 공약의 타당성과 현실성,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한 검증도 실종됐다. 최저임금을 올려주면 경제가 성장한다던 문 정부의 ‘소주성(소득주도 성장)’, 관세가 단박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거란 트럼프의 ‘관주성’처럼 일반 경제 상식에 비춰 볼 때 성공하기 어려운 ‘재주성’ 실험이 이 땅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큰 진전(big progress)이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메시지를 올렸다. 고위급 무역협상을 위해 백악관을 찾은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과 집무실에서 찍은 사진도 함께였다. 회담 전엔 “일본이 협상하러 온다. 나도 재무, 상무장관과 함께 회의에 참석한다”고 예고까지 했다. 도쿄에서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협상 당일 장관급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트럼프의 일방 통보, 당장은 피하고 싶었던 방위비 문제 거론, 첫 만남부터 큰 성과라도 나온 양 과장하는 그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해 긴급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관세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지금 트럼프에겐 ‘전리품’이 절실하다. 이달 초 세계를 상대로 상호관세 포문을 열었다가 90일 미루고, 중국에만 145% 초고율 관세를 물리며 화력을 집중하는 중이다. 그런데 중국은 희토류 수출 금지 등의 조치로 맞서며 요지부동이다. 하루 전 유럽연합(EU)과의 무역협상도 성과 없이 끝났다. 트럼프의 돌발 행동에 압박을 느꼈을 이시바 총리마저 “여전히 입장 차이가 있다. 이번 협상은 다음 단계를 위한 초석”이라고 한다. 이젠 트럼프 쪽이 오히려 안달복달이다. ▷다음 주 한미 무역협상을 시작하는 우리 정부로선 이런 장면을 미리 본 게 그나마 다행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협상단을 트럼프가 직접 만나겠다고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수십 개국과 동시협상을 벌이는 미국은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나라에 관세를 더 많이 깎아 주겠다’며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부추기고 있다. 트럼프의 거친 기세에 휘말리면 엉뚱한 실수를 할 수 있다. ▷트럼프의 공격적인 태도에는 대선에서 트럼프 편에 섰던 빅테크, 월스트리트의 거물들마저 부정적 태도로 속속 돌아서는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월가의 황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 관세정책이 미국의 국가 신뢰도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퇴임 후 침묵하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도 “그들은 확실히 뭔가를 망가뜨리고 있다. 총부터 먼저 쏘고 나중에 조준한다”며 설익은 정책들을 꼬집었다. ▷한국엔 중국을 압박하는 미국의 추가 조치들까지 부담이다. 중국 인공지능(AI) 모델 딥시크에 쓰이는 엔비디아 칩의 대중 수출이 막혀 이 칩에 들어가는 한국산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도 타격을 받게 됐다. 이래저래 힘든 상황이지만 한국은 조급함을 달래고 상대 패부터 확인해야 한다. 협상 테이블에선 언제나 성질 급한 쪽이 더 많은 걸 내주게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이 3년을 못 채우고 파면되면서 그의 경제개혁 정책도 먼지처럼 흩어지게 됐다. 유일하게 성사된 국민연금 모수(母數)개혁도 탄핵소추 기간에 여야 합의로 이뤄졌다. 국가 개조를 위한 깊은 철학도, 치밀한 실행 전략도 없이 개혁 과제에 발을 들였고,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벽에 부딪칠 때마다 움찔하며 물러선 게 다다. 미완(未完)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윤 정부 경제개혁의 성적표다. 민간 주도, 건전 재정, 세제 정상화, 부동산 규제 완화 등 윤 정부의 우파 정책과 날을 세우며 대결해온 더불어민주당의 정책 기조는 그사이 심하게 왼쪽으로 ‘오버런’했다. 윤 전 대통령 등이 거부권을 행사할 때마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 식으로 더 센 법안을 재차, 삼차 밀어붙이다가 그렇게 됐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171석 다수 의석의 힘으로 추진한 법안 중에는 같은 당이 집권했던 문재인 정부도 부작용이 우려돼 섣불리 시도하지 못한 것들이 태반이다. 지난주 헌법재판소의 8 대 0 탄핵 결정으로 대통령이 물러나고, 국민의힘은 여당 지위를 상실했지만 극한 대결 구도 속에서 굳은살이 박인 민주당의 정책 기조는 고스란히 남았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이 그렇고, 불법 파업 노조원에 대해 회사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이 그렇다.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한 재건축 규제 완화, 첨단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주 52시간제 예외 인정에 반대하는 것도 여전하다. 6·3 대선의 민주당 후보로 가장 유력하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대선주자들을 압도하는 이 대표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잠시 ‘우클릭’ 조짐을 보일 때 기본소득을 포함한 ‘기본 시리즈’까지 포기할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무한 반복해온 ‘빚을 내서라도 전 국민에게 돈을 풀자’는 고정 레퍼토리도 그대로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돈 풀기 요구에 번번이 태클을 걸어온 기획재정부를 공중 분해할 거란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 환경은 정부·여당 공격용으로 특화된 민주당, 이 대표의 정책들이 내포한 위험성을 더 키우거나, 사실상 실행이 불가능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민주당이 행정, 입법을 동시에 장악할 경우 걸림돌이 사라질 상법 개정이 대표적이다. 최근 미국 정부는 한국에 25%의 상호관세를 물리면서 그 이유로 외국 기업인에 대한 한국의 과도한 형사처벌 관행을 ‘비관세 장벽’의 사례로 꼽았다. 이사회 결정이 마음에 안 드는 주주가 마음껏 배임죄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는 상법 개정은 국내에 진출한 외국 기업에도 적용된다. 다른 선진국에 없는 ‘갈라파고스 입법’이란 점에서 미국 정부가 문제 삼는 비관세 장벽의 조건에 부합한다. 민주당 주도로 만들어졌고, 안전관리 소홀로 사망사건이 발생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등에게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 벌금’을 물리는 중대재해처벌법에 외국 기업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이 날로 격화하는 글로벌 관세전쟁은 향후 몇 년간 한국 경제의 엔진인 수출기업을 위축시키고, 그로 인해 세수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2023, 24년 2년간 한국의 세수는 이미 90조 원 펑크였다. 국민 1인당 100만 원씩 나눠주는 데 연간 50조∼60조 원이 필요한 기본소득을 실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앞뒤 가리지 않고 강행한다면 재정적자 확대 우려로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된 중국이나 프랑스, 무리한 복지 지출 탓에 화폐가치가 폭락 중인 인도네시아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트럼프 정부가 초래하는 글로벌 경제위기는 정쟁의 부산물로 생겨난 정책들을 민주당과 이 대표가 바로잡고, 지지층을 설득하기에 좋은 기회다. 향후 수년간 한국의 대미 수출 기업들은 고관세를 물면서 이익 축소를 감수하거나, 한국을 떠나 미국 땅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 ‘초부자 감세’란 민주당의 주장에 따라 법인세율을 낮춰주지 않아도, 많은 기업들이 버는 게 없어 세금을 제대로 못 내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선 나랏빚을 내서 복지를 늘리고 싶은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국가 경쟁력을 유지하고 미래 세대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기업을 지원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 대표가 극단적 정책을 선호하는 강성 지지층을 끌어안아야 할 가장 큰 이유였던 사법 리스크도 선거법 재판 2심 무죄 판결로 상당 부분 희석됐다. 민주당은 여당이 사라진 한국 정치판에서 명실상부한 최대 권력이다. 대선에서 승리해 실제 추진하더라도 국가 경제에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 책임감 있는 정책, 공약을 내걸고 유권자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미국의 관세 폭탄을 조금이라도 비켜가기 위해, 자국 안보에 도움 될 말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각국 정상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앞에 ‘깜짝 선물’을 펼쳐놓고 있다. 옛날 중국, 로마 황제에게 주변국들이 진상품 갖다 바치는 모습을 연상케 해 ‘조공 외교의 부활’이란 푸념이 나온다. 그래도 지도자 개인의 자존심보다 훨씬 중요한 게 국가 전체의 이익이다. 지난달 초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1조 달러(약 1460조 원) 대미 투자’와 도금한 사무라이 투구로 트럼프를 웃게 만들면서 일본산 제품의 관세 면제를 요청했다. 뜯어보면 2023년까지 일본의 대미 누적투자액 8000억 달러에 2000억 달러를 추가한다는 것이어서 숫자가 과대 포장됐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트릴리언(trillion·1조)’이란 단어를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란 의미로 즐겨 쓰는 트럼프의 언어 습관까지 신중히 고려한 노력이 보인다. 중국의 안보위협이 최대 현안인 대만에선 ‘호국신산(護國神山·나라를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불리는 파운드리 기업 TSMC가 정부 대신 나섰다. 조 바이든 정부 때 발표된 대미 투자액 650억 달러와 별도로 100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해 미국에 반도체 공장 5곳을 더 짓기로 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여러분은 트럼프 대통령의 힘을 보고 있다”며 추켜올렸고, 트럼프는 “(중국의 대만 침공은) 재앙적 사건이 될 것”이란 말로 화끈하게 보답했다. 우크라이나를 빼고 미국과 직거래 종전 협상에 나선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전쟁으로 일부 파괴된 러시아·독일 간 액화천연가스(LNG)관 노르트스트림 사업권을 선물로 꺼내들었다. 미국이 사업권을 챙기는 대신 유럽연합(EU)에 다시 가스를 팔겠다는 거다. 선물은 꺼내지도 못하고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말다툼을 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자국 희토류 자원을 미국에 넘기는 광물협정에 반강제적으로 서명해야 했다. 별난 선물도 등장했다. 엘살바도르의 부켈레 대통령은 미국에서 체포된 불법 이민자, 범죄자를 악명 높은 자국 교도소에 수용해 트럼프의 골칫거리를 없애주겠다고 제안했다. 한국도 뭐든 카드를 내놓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임박했다. 12일부터 미국은 철강·알루미늄·자동차 부품에 대해 25% 관세를 물린다. 다음 달 2일부터는 환율정책·보조금 등 ‘비관세 장벽’까지 고려한 국가별 맞춤형 상호관세가 예고돼 있다. 최근 의회 연설에서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평균 관세는 미국의 4배”, “반도체지원법은 폐기돼야 한다”는 등 사실과 다르고, 한국 기업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비상계엄·탄핵 사태 때문에 참고 있던 한국행 청구서를 날리기 시작한 거다. 돈을 쓸어 담고 있는 대만 반도체 기업의 막대한 투자, 우크라이나의 광물자원, 러시아 LNG관 사업권 같은 카드가 한국에는 없다. 정부, 경제계에선 조선업 협력, 미국산 천연가스 구매 확대, 한미 원전협력 등을 거론한다. 하나하나 떼어보면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조합하면 트럼프를 놀라게 할 ‘히든카드’로 키울 여지가 적지 않다. 최근 들어본 제일 ‘신박한’ 카드는 중국과의 군함 수 경쟁에서 뒤처져 해군력 확충에 비상이 걸린 미국에 우리 돈을 들여 군함을 매년 몇 척씩 만들어주자는 아이디어다. 이 정도면 방위비 지출 축소, 중국과 해양패권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는 트럼프가 “내가 돈 한 푼 안 들이고, 미국 해군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었다”며 흥분할 만한 일 아닌가. 한국은 이지스 구축함을 척당 1조 원의 ‘저렴한’ 가격에 건조할 수 있는 자유진영의 유일한 나라다. 경제·안보를 위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지출이라면 미국과 안보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면서, 우리 조선업계에 돈을 투입해 경제에도 보탬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이런 제안이 제대로 먹힌다면 최근 트럼프가 한국과 일본의 참여를 슬쩍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린 사업성이 불투명한 알래스카 천연가스 개발사업 등을 적당히 피할 핑곗거리도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카드를 들고 협상 테이블에 나갈 대표 선수다. 한국은 몇 달 뒤 백악관을 방문해 ‘타짜 트럼프’와 마주 앉을 플레이어가 누군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태다. 아무리 그럴듯한 협상안이 있어도 결국 어떤 카드를 쓸지 선택하고, 대신에 반드시 얻어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을 정하고, 협상 결과가 불러올 정치·사회적 파장까지 책임지는 건 대통령이다. 절대 패배해선 안 되지만 이기더라도 이긴 걸 내색하면 안 되는, 나라의 미래가 걸린 최고 난도의 정치·경제·외교·안보 ‘멀티 게임’이 한국 지도자의 앞에 놓여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