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선 “재벌가 유부남 딸 낳은 후 잔인하게 버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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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년 8월 18일 09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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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BS Drama ‘엄마의 소개팅’
사진=KBS Drama ‘엄마의 소개팅’
배우 김부선(59)은 그간 밝히지 않았던 굴곡진 인생사를 털어놨다.

김부선은 17일 페이스북을 통해 “누구나 로망은 있다”면서 미혼모의 삶을 살게 된 과정을 상세히 적었다.

김부선은 “가장 순수하고 피가 뜨거웠던 끼 많은 날라리 20대, 나는 외로웠다”며 “그러다 재벌가 남자를 만났고, 아이를 낳았고, 잔인하게 버림받았다. 유부남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임신 소식을 듣고 아이 아빠는 그랬었다. ‘아이 낳지 마라.’ ‘난 책임 못 진다.’ ‘정 낳겠다면 제주도 고향 가서 낳고, 뱃놈을 시키든 해녀를 시키든 하고, 난 책임이 없다.’ ‘책임 같은 거 묻지 마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았다”며 “아이 아빠는 그렇게 임신 2개월 때 날 떠났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숨어 지내다가 만삭을 앞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배신하고 그렇게 눈물로 미소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김부선은 배우 이미소(32)를 낳은 지 100일이 되는 날 재벌가 남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김부선은 “(아이 아빠가) 3일간만 할머니에게 아기 맡기고 친구들과 ‘사냥 여행하러 충무 가자’, ‘함께 가자’, ‘너도 애 낳고 그간 힘들었을 텐데 좀 쉬고, 얘기도 좀 하자’(고 했다)”며 “아기를 그에게 의심 없이 넘기고 그렇게 충무 여행을 갔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이 아빠는 ‘단둘이 얘기 좀 하자’며 지프차에 날 태워 더 깊은 산속으로 가더니 잠시 후 내리라 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더니 어렵게 말을 했다”며 “돈 받고 아기 보내고, 처녀처럼 내숭 떨고 살다가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라는 말을 했었다. 망연자실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내가 ‘씨받이냐’며 짐승처럼 울부짖고 소리치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는 주저 없이 사냥용 엽총 개머리판으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며 “나는 죽도록 맞았다. 간신히 도망쳤다. 눈물로 낳은 아기, 내 딸 미소와 나는 그렇게 4개월 만에 어처구니없이 생이별을 당했다”고 적었다.

김부선은 “지옥 같은 15개월이 지났다. 난 포기하지 않았다. 눈만 뜨면 성북동 딸 친가와 아이 아빠 집을 오가며 짐승처럼 그들 집 앞에서 ‘아기 달라’고, ‘내 아기 내놓으라’고, 울부짖고 신음하고 소리쳤다”며 “15개월 후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 드디어 내 아기를 보내준다며 그들은 항복했다”고 설명했다.

김부선은 종이 두 장에 서명한 뒤에야 이미소와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내용은 ▲위자료를 일절 요구하지 않을 것 ▲양육비를 일절 요구하지 않을 것 ▲아이 아빠를 다시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 5000만 원을 지급할 것 등이었다고 김부선은 설명했다.

끝으로 “미혼모의 삶. 나 홀로 아이 양육하고 교육하고 먹이고 입히고, 산다는 거 결코 녹록지 않았다. 연애는 사치였다”며 “내 딸과 날 물고 뜯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아, 너희들 중 죄 없는 사람만 돌을 던지라”고 했다.

정봉오 동아닷컴 기자 bong087@donga.com
김부선 페이스북 글
누구나 로망은 있다. 연예계 데뷔할 때 고향 선배는 내게 충고하길, 여배우로 살아가려면 고독을 운명처럼 여기고 고독을 벗 삼아야 한다고 했다. 즉. 연애 같은 거 꿈도 꾸지 말라는 거다. 돌이켜보면 선배 충고가 틀렸다. 여배우로 성공하려면 세상 무서운 것도 경험하고, 이놈저놈 만나 다양한 사랑도 해보고 깨지고 부딪치고 피 터지는 아픔도 겪어봐야 찐 연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충고 했어야 했다.

그 시대는 그랬었다. 가장 순수하고 피가 뜨거웠던 끼 많은 날라리 20대, 나는 외로웠다. 나는 선배 충고를 따랐고 지독히 고독했다. 그러다 재벌가 남자를 만났고, 아이를 낳았고, 잔인하게 버림받았다. 유부남이었다. 졸지에 미혼모가 된 것이다. 상상도 못한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본능에만 충실했다. 주연 배우에서 단역 배우로 순식간에 전락했다. 괜찮다, 감사했다, 이게 어디냐. 난 아이 굶기지 않고 살아내야 하는 미혼모였으니까. 임신 소식을 듣고 아이 아빠는 그랬었다. 아이 낳지 마라, 난 책임 못 진다. 정 낳겠다면 제주도 고향 가서 낳고, 뱃놈을 시키던 해녀를 시키던 하고, 난 책임이 없다. 책임 같은 거 묻지 마라. 청천병력 같았다. 그와 보낸 그 시간들, 그가 내게 말했던 달콤한 속삭임들과 내게 했던 말들이, 그 추억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섬 처녀 신인배우를 꼬셔내기 위한 거짓이었다니.

아이 아빠는 그렇게 임신 2개월 때 날 떠났다. 그렇게 끝났다. 숨어 지내다 만삭을 앞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종일 구토와 설사를 했고,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가장 사랑하는 내 언니는 달리는 트럭 속으로 날 잡고 울면서 뛰어 들어갔다. 같이 죽자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배신하고 그렇게 눈물로 미소를 낳았다.

백일이 되는 날 연락 두절된 미소아빠는1년 만에 고향으로 아기백일을 축하한다는 축전을 보내왔다. 미소 아빠를 만나고 싶었다. 옛말에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닮아도 너무 닮았다. 쌍둥이처럼. 가족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미소가 4개월이 됐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그 아이를 내 눈 앞에서 어이없이 뺏겼다. 친부가 아기를 보고 싶어 하니 3일간만 할머니에게 아기 맡기고 친구들과 사냥 여행하러 충무가자, 함께 가자, 너도 애 낳고 그간 힘들었을 텐데 좀 쉬고 얘기도 좀 하자며 그를 사랑했고 또 믿었기에 고마운 마음까지 생겼었다. 아기를 그에게 의심 없이 넘기고 그렇게 충무여행을 갔다. 하룻밤이 지나고, 그의 일행들은 사냥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산속에서 밥 짓고 술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아이 아빠는 단둘이 얘기 좀 하자며 지프차에 날 태워 더 깊은 산속으로 가더니 잠시 후 내리라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더니 어렵게 말을 했다.

“부선아 너는 처녀고 나는 유부남이잖아. 난 이혼만은 죽어도 못해준다. 아내가 있고 아들이 둘이다. 그들을 버릴 수 없다. 미안하다. 너가 이 아이 행복을 위해서 아기의 미래를 위해서 아기를 잊고 살아라. 넌 새 출발해라. 결혼도 하고 잘 지내려면 돈이 필요할거다. 엄마가 목돈 준다더라.”

그렇게 돈 받고, 아기 보내고, 처녀처럼 내숭떨고 살다가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라는 말을 했었다. 망연자실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기 아빠에게 피 흘리는 짐승처럼 소리치고 대들었다. 무슨 소리냐. 너 미치지 않았냐. 당장 아기 내놔라. 고향집 당장 내려간다. 내가 씨받이냐며 짐승처럼 울부짖고 소리치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는 주저 없이 사냥용 엽총 개머리판으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 퍽하고 쓰러진 내게 총부리를 내 얼굴에 갖다 댔다. 쏴 죽여 버린다고, 따르라고, 어미 자격 없다고, 감히 누구에게 소리 지르냐며 얼굴 형태를 알 수 없게 총으로 맞았고, 쓰러진 내게 분이 안 풀렸는지 남자의 손과 등산화 신은 발로 나는 죽도록 맞았다. 간신히 도망쳤다.

눈물로 낳은 아기. 내 딸 미소와 나는 그렇게 4개월 만에 어처구니없이 생이별을 당했다. 지옥 같은 15개월이 지났다. 난 포기하지 않았다. 눈만 뜨면 성북동 딸 친가와 아이아빠 집을 오가며 짐승처럼 그들 집 앞에서 아기 달라고, 내 아기 내놓으라고, 울부짖고 신음하고 소리쳤다.1 5개월 후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 드디어 내아기를 보내준다며 그들은 항복했다. 변호사 사무실로 나오라 했다. 아기는 지하주차장에 있다며 아기 만나기 전 반드시 서명을 해야 한다면서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읽어봤고 즉시 서명했다.

그 내용은 1, 위자료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 2, 양육비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 3, 아이 아빠를 다시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 내가 오천만원을 지급한다 등등이었다. 난 주저 없이 서명했다. 그게 1990년 봄이었다.

그런 세월이 벌써 30년째다. 그런 지독한 세월을 나쁜 짓 안하고 단역하고, 노동하며 딸과 죄인처럼 숨어살았다. 재벌가 아이 아빠는 단돈 1원도 지원하지 않았다. 내용증명 각서에 서명 했다는 법적 근거로 그 후 아이 아빠는 미국으로 부부여행 떠났고, 거기서 또다시 낯선 여인과 눈이 맞아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했고, 딸을 또 낳았다. 충격이 연속이었다.

미혼모의 삶. 나홀로 아이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산다는 거 결코 녹녹치 않았다. 연애는 사치였다. 미소를 대학까지 보낸 후 내 삶은 책임과 긴장에서 조금 풀렸다. 딸과 조카 나 셋이 살다가 조카애가 독립을 했고 근처에 아파트를 마련하여 나갔다. 미소도 함께 따라갔다.

내 딸과 날 물고 뜯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아, 너희들 중 죄 없는 사람만 돌을 던지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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