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서는 보성사판 2만1000부가 전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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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교수 인쇄-판본 검토 논문
3만5000부 인쇄설은 근거 없어… 신문관판은 광복 이후 제작 추정

1919년 3·1운동 직전 최남선이 세운 출판사 신문관에서 조판하고 천도교의 보성사에서 인쇄한 3·1독립선언서. 모두 2만1000부가 인쇄됐다고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설명했다. 동아일보DB
1919년 3·1운동 직전 최남선이 세운 출판사 신문관에서 조판하고 천도교의 보성사에서 인쇄한 3·1독립선언서. 모두 2만1000부가 인쇄됐다고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설명했다. 동아일보DB
현재 남아 있는 3·1독립선언서 원본(보성사판)에 민족대표 33인 명단 위치가 조금씩 다른 까닭은 막판까지 수정한 명단 부분만 연판(鉛版·활자를 짠 원판에 대고 지형(紙型)을 뜬 뒤 납 등의 금속을 녹여 부어서 뜬 인쇄판)을 새로 만들어 붙였기 때문이라는 연구가 나왔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 101주년을 앞두고 출간되는 학술지 ‘동아시아문화연구’ 80호에 싣는 논문 ‘3·1독립선언서 인쇄 과정과 판본의 검토’에서 이같이 밝혔다.

보성사판 3·1독립선언서는 33인 명단 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간 것과 아래로 내려간 것 등 세 가지 부류가 있다. 논문에 따르면 1919년 2월 27일 오후 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직원들은 사장 이종일의 지시에 따라 인쇄기 3대에 걸기 위해 연판 3개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3·1운동의 주도자 가운데 한 명인 오세창이 민족대표 성명을 변경해 달라고 전화로 요청했다. 이에 만들어놓은 연판 가운데 본문을 살리고, 명단 부분만 잘라낸 다음 연판 3개를 새로 만들어 본문에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인쇄기에 본문과 명단을 이어 고정하는 과정에서 명단이 어떤 것은 약간 올라가거나 내려갔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27일 밤 2만1000부가 인쇄됐고, 그 전에는 인쇄된 적이 없다”고 논문에 밝혔다. 독립선언서가 여러 차례에 걸쳐 모두 3만5000부 인쇄됐다는 설은 오늘날도 꽤 퍼져 있다. 이는 앞선 2월 20∼25일 선언서 1만여 부를 인쇄했다는 ‘묵암비망록’ 내용에 기인한 것이다. 이 비망록은 이종일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것이 2월 24일 밤이었고, 25∼27일 민족대표의 명단을 정했는데 그 전에 민족대표의 명단이 들어간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논문은 밝혔다. 논문은 또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돼 있는 독립선언서 2종 가운데 이른바 ‘신문관판’은 당시 인쇄된 게 아니라 이병헌이라는 인물이 적어도 광복 이후 뒤늦게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독립선언서#보성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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