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세계가 유관순과 3·1운동을 기억한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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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1일(현지 시간) 정오 3·1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열린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 앞 다그 함마르셸드 광장은 100년 전 천안 아우내 장터로 돌아간 듯했다. 아침 일찍부터 뉴욕 전역에서 모여든 400여 명의 교민들은 태극기를 움켜쥐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영하의 추위를 녹인 교민들의 뜨거운 함성은 100년 전 선조들의 나라 잃은 울분, 6·25전쟁과 지긋지긋했던 가난, 고달팠던 이민 생활의 한(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 절절했다.

이날 오후 맨해튼 파크가의 뉴욕한국문화원에선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도 열렸다. 전시장을 찾은 교민들은 빛바랜 흑백 독립운동 사진 속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한인 입양인과 2, 3세대는 “3·1운동을 너무 늦게 알았다”며 자책했다. 문화원 측은 “미국 학교의 견학 신청이 많아 주말에도 전시관을 당분간 열 계획”이라고 했다.

유관순 열사와 3·1운동이 미국 사회에서 주목을 받는 건 단순히 ‘100주년’이란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레이스 멩(뉴욕), 앤디 김(뉴저지) 등 민주당 하원의원들은 지난달 28일 공동 발의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결의안’에서 “3·1운동은 1918년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민족자결, 인권, 비폭력 원칙들은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비롯해 1919년 전 세계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3·1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희생정신이 세계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민족자결, 자유와 인권 등 인류 보편의 가치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3·1정신에 대한 미국 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뉴욕 주의회는 올해 3월 1일을 ‘3·1운동의 날’로 지정했다. 론 김 뉴욕 주의회 하원의원 등 젊은 한인 정치인 및 친한파 의원들의 노력, 교민 응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뉴저지와 버지니아 주의회에서도 비슷한 결의안이 잇따랐다. 뉴욕주 나소카운티는 지난달 ‘유관순상’도 제정했다.

3·1운동의 의미를 ‘반일(反日)’과 ‘친일(親日) 잔재 청산’의 한국적 프레임으로만 접근했다면 다문화 미국 사회에서 이런 결의안이 채택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을 적으로 돌리기만 하면 양심적 일본인들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고통을 나누고 전쟁 범죄와 인권 유린을 막기 위한 ‘연대의 끈’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일본 혐한 단체와 보수우익 세력은 이 틈을 비집고 한일 간의 틈을 벌리고 긴장을 고조시키려 들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는 홀로코스트 뮤지엄이 세계 도처에 있고,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세계 어린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일은 쉽지 않다. 과거사를 정치에 악용하려는 일본 보수 정치인들이 진실로 두려워하는 건 한국인만의 ‘반일 감정’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3·1만세 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정신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100년 전 민족 대표 33인은 기미독립선언문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또 “지금 할 일은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낡은 생각과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고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선조들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3·1운동 100주년#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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