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소수자 배려 나선 대만… 도시 곳곳 성중립 화장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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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타이베이의 사회적 기업가 인큐베이팅 시설 ‘소셜 이노베이션 랩’에 설치된 ‘성별 평등 화장실’. 이 화장실은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이용할 수 있게 돼 있다.
대만 타이베이의 사회적 기업가 인큐베이팅 시설 ‘소셜 이노베이션 랩’에 설치된 ‘성별 평등 화장실’. 이 화장실은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이용할 수 있게 돼 있다.
4일 기자가 찾은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사회적 기업가 인큐베이팅 시설 ‘소셜 이노베이션 랩’에는 세 종류의 화장실이 있다. 남성, 여성, 그리고 ‘성별 평등’ 화장실이다. 성별 평등 화장실은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이용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에서 만들어졌다. 대만에선 101층의 고층빌딩 ‘타이베이101’ 같은 관광 명소뿐 아니라 일부 대학과 고교에서도 이런 성 중립 화장실을 볼 수 있다.

유엔 회원국이 아닌 대만은 지난해 유엔개발계획(UNDP) 공식에 따라 성불평등지수(GII)를 자체 계산한 결과 2015년 기준으로 0.058이 나왔다고 발표했다. 지수가 0에 가까울수록 남녀가 평등하다는 의미다. 같은 해 기준 한국(0.067), 싱가포르(0.067), 일본(0.118)보다 성불평등 정도가 낮았다는 것이다. UNDP가 14일 발표한 ‘2018 GII’에서 아시아 1위를 한 한국(0.063)보다 낮은 수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대만이 양성평등 수준을 빠르게 올릴 수 있었던 데에는 ‘3분의 1 성별 쿼터제’가 큰 역할을 했다. 대만 정부는 2005년부터 입법원(한국의 국회 격)과 정부 기관 등의 의사결정 과정에 여성을 3분의 1 이상 포함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1998년 19.1%였던 입법원 여성 의원 비율이 2018년 현재 38.1%까지 높아졌다. 한국의 여성 의원 비율이 17%, 일본 중의원 여성 비율이 10.1%인 점을 감안하면 높은 수치다. 덴마크(37.4%), 영국(32%·하원)보다도 높다. 대만은 지방의회(34.6%)와 감사기관인 감찰원(48.3%), 공무원 채용 기관인 고시원(42.1%) 등도 쿼터제를 충실히 지키고 있다.

2016년엔 차이잉원(蔡英文)이 첫 여성 총통으로 취임했다. 장완치(張琬琪) 대만여성센터 연구위원은 “차이 총통은 부모 등 가족의 후광을 입지 않은 아시아 최초의 여성 최고 지도자”라며 “성별 쿼터제 시행 후 가장 큰 변화는 ‘정치는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깨진 것”이라고 말했다.

대만은 아시아 국가 중 성소수자 이슈 논의가 활발한 편이다. 대만은 11월 있을 지방선거 때 동성혼 합법화와 관련한 국민투표를 함께 치를 예정이다. 판윈(范雲) 대만국립대 사회학과 교수는 “2004년 도입된 양성평등교육법의 영향으로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 동성혼 찬성 여론이 많아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대만의 여성단체 ‘어웨이크닝 파운데이션’이 중고교에 배포하는 교사 참고용 브로슈어에 담긴 동성결혼 관련 내용. 어웨이크닝 파운데이션 제공
대만의 여성단체 ‘어웨이크닝 파운데이션’이 중고교에 배포하는 교사 참고용 브로슈어에 담긴 동성결혼 관련 내용. 어웨이크닝 파운데이션 제공
대만의 양성평등교육법은 초중고교에서 매 학기 4시간의 양성평등 관련 수업을 필수로 가르치게 하고 있다. 수업 내용은 학교별로 다를 수 있지만 사회의 성차별과 성소수자 문제 등을 대부분 가르친다. 대만의 대표적인 여성 단체 ‘어웨이크닝 파운데이션’은 성폭력 대처 방안뿐 아니라 성소수자의 정의, 동성결혼 등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브로슈어를 중고교 교사들에게 교육 참고자료로 나눠주고 있다. 고교 재학 시절 양성평등 교육을 받았다는 20대 남성 짱웨이환(臧威環) 씨는 “대만이 가부장적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교육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이주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대만국립박물관은 2014년부터 ‘이주민 대사(大使)’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주여성들을 도슨트(작품 해설자) 자원봉사자로 활용해 이들의 모국어로 박물관 투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현재 10명의 이주여성이 도슨트로 활동 중이다.

이곳에서 4년째 봉사활동 중인 인도네시아 출신 여성 린다 진디아와티 씨(42)는 “인도네시아어로 사람의 눈을 뜻하는 ‘마타’가 대만 토착어로도 같은 뜻이라고 설명하면 관광객들은 마치 고향 박물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고 말했다. 국립고궁박물관 등 대만 내 다른 박물관들도 이 프로그램 운영과 관련해 조언을 구할 예정이다.

대만이 양성평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한계도 있다. ‘3분의 1 성별 쿼터제’는 권고일 뿐 의무가 아니어서 기업 등 민간 부문에서는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성인 차이 총통이 이끄는 현 내각조차 여성 비율이 20%에 미치지 못한다.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사회여서 여전히 가정 내에 ‘가사와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이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다. 대만 교육기관에서 일하는 40대 여성 훙싱루(洪幸如) 씨는 “대만 월급 수준(약 3만 대만달러·약 109만 원)에 비해 베이비시터(약 2만 대만달러·약 73만 원) 등 육아 비용이 비싸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결국 여성이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만 정부는 ‘가족 친화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공 보육 시설을 확충하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관련 정책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만 내 이주여성 돕는 단체들 ▼

“처음엔 언어 때문에 고생했어요. 하지만 방문객들에게 모국의 문화와 연관 지어 설명할 수 있어 기쁩니다.”

5일 타이베이 대만국립박물관에서 만난 린다 친디아와티 씨(42)는 10년 전 대만에 온 인도네시아 출신 결혼이주여성이다. 4년째 그는 주말마다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 ‘케바야’를 입고 이곳을 찾는 인도네시아 관광객들에게 모국어로 박물관 소장 유물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박물관 교육을 통해 대만 역사와 문화를 배우면서 대만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만에는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이주 여성이 꾸준히 유입되고 있다. 결혼이주여성이거나 가정부, 간병인으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만 이민청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대만 내 동남아 출신 결혼이주여성은 약 16만 명, 여성 이주노동자는 25만 명가량이다. 이들을 위해 대만의 여러 단체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만국립박물관은 2014년부터 ‘이주민 대사(大使)’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이주여성들을 도슨트(작품 해설자) 자원봉사자로 활용해 이들의 모국어로 박물관 투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친디아와티 씨를 포함해 10명의 이주여성이 이곳에서 도슨트로 활동 중이다.

친디아와티 씨는 “인도네시아어로 사람의 눈을 뜻하는 ‘마타’가 대만 토착어에서도 같은 뜻이라고 설명해 주면 관광객들은 마치 고향 박물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국립고궁박물관 등 대만 내 다른 박물관들도 이 프로그램 운영과 관련해 자문을 구할 예정이다.

이주여성의 인권 보장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단체들도 있다. 대만 내 성매매·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비정부기구(NGO) ‘가든 오브 호프 파운데이션’은 2012년부터 인신매매나 성폭력 피해 이주여성을 돕고 있다. 피해 유형에 따라 법률적 지원을 하거나 쉼터를 제공한다. 지난해 여성 이주노동자 4276명이 이 단체의 도움을 받았다.

2000년대부터 여성 이주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주장해 온 대만의 대표적인 여성인권단체 ‘어웨이크닝 파운데이션’은 최근 가정부, 간병인 등 가정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친츠팡 어웨이크닝 파운데이션 소장은 “가정 내에서 근무하는 이주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며 “이로 인해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 심지어 성폭력에 노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타이베이=위은지 기자 wizi@donga.com
#성소수자 배려#대만#성중립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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