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20대 혼밥-30대 회식 스트레스…‘乙의 소화불량’ 급증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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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안되는 대한민국]저소득층 환자 5년새 17% 증가

박모 씨(31·여)는 올해 초 회계사무소에 취업한 뒤부터 소화제를 달고 산다. 식사를 7분 만에 마치고 숟가락을 내려놓는 팀장과 매일 점심을 함께 먹다가 기능성 소화불량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간혹 식사 중간에 넌지시 업무 실수를 지적하는 상사 탓에 낮 12시가 다가오면 누군가 가슴을 움켜쥐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박 씨는 “심할 땐 밥이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 않아 몰래 화장실로 달려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박 씨처럼 스트레스로 인한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환자가 전체 인구 10명 중 1명꼴로 나타났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지난해 △기능성 소화불량 △스트레스성 위염 △역류성 식도염 등 소화기내과 전문의들이 꼽은 대표적인 스트레스성 소화기 질환 3건으로 병·의원을 찾은 환자가 528만 명이었다고 27일 밝혔다. 10년 전(274만 명)부터 환자가 꾸준히 늘었지만 전체 인구 대비 환자 수가 10%를 넘은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환자 수를 소득 수준과 대조한 결과 특히 저소득층 환자의 증가세가 고소득층보다 배 이상 가팔랐다. 건강보험료 기준 소득 상위 20% 환자는 최근 5년간 7.8% 늘었지만 소득 하위 20% 빈곤층에선 17.5% 증가했다. 스트레스성 소화불량이 특정 계층의 문제는 아니지만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더 심해지는 ‘을(乙)의 질환’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각 연령층마다 ‘식사’가 스트레스로 연결되는 과정을 분석해 봤다.

○ 20대 ‘혼밥’과 스마트폰의 잘못된 만남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소화불량이 나타나는 이유는 식도, 위, 대장의 긴장도가 높아지고 소화 효소와 위액 등이 필요한 만큼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신진대사가 떨어지고 소화기가 노화할수록 심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최근 5년 새 청장년층 중에서 환자가 가장 크게 증가한 것은 20대였다. 30대 환자는 2.5%, 40∼50대 환자는 8.8% 오르는 데 그쳤지만 20대 환자는 12.5% 늘어났다.

이는 20대의 취업 및 결혼 준비 스트레스가 심해진 데다 혼자 급하게 끼니를 때우는 ‘혼밥(혼자 먹는 밥)’ 습관이 늘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혼자 밥을 먹더라도 원하는 메뉴와 시간을 골라 여유롭게 먹으면 원치 않는 사람과 함께 먹을 때보다 스트레스가 덜할 수 있지만, 문제는 비자발적인 혼밥이다. 지난해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63.5%는 같이 먹을 사람을 찾기 어렵거나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혼밥을 택했다. 스스로 혼밥을 택했다는 응답은 28.1%에 불과했다.

혼밥 중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습관은 소화불량의 주범이다.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씹지 않고 넘길 뿐 아니라 뇌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과식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는 올해 처음으로 ‘100세 건강을 위한 10대 수칙’을 발표하며 “식사 시 스마트폰 사용을 자제하라”는 내용을 넣었다.

○ 회식-육아 스트레스 시달리는 3040

지난해 남성 소화불량 환자는 20대 16만 명, 30대 26만 명, 40대 41만 명 등으로 가파르게 증가하다가 50대(45만 명)에서 정점을 찍었다. 이전 연령대 대비 환자 수가 30, 40대에 가장 크게 증가하는 이유는 본격적인 회사 생활이 시작되고 원치 않는 식사와 술자리가 늘면서 밥 먹는 일 자체가 곧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마케팅 업체 직원 유모 씨(35)는 “고객업체의 접대 자리, 성격이 까다로운 상사와의 식사 후에는 항상 속이 쓰렸는데, 알고 보니 위액이 식도로 넘어오는 역류성 식도염이었다”고 말했다.

여성 환자는 육아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 시간이 주된 발병 원인이다. 시민단체 활동가 윤모 씨(35)는 지난해 초 아이를 낳은 뒤 식사 시간이 들쭉날쭉해졌다. 퇴근 후 급하게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온 후 끼니를 챙겨주다 보면 정작 자신은 저녁식사를 거르기 일쑤다. 아이가 자는 틈에 배를 채우기 위해 싱크대에 찬밥과 밑반찬을 차리고 선 채 밥을 먹은 적도 많다.

윤 씨와 같은 30, 40대 여성 환자는 지난해 89만 명으로 같은 연령대의 남성(67만 명)보다 33.4% 더 많았다. 박수경 강북삼성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여성에게 육아의 책임이 몰리면서 업무와 병행하는 데 따른 스트레스가 크고, 식사 시간이 불규칙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우울증과 함께 오는 5060 소화불량

보습학원 원장 겸 강사 임모 씨(52)는 학원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배가 아프고 설사가 멈추지 않아 강단에 서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내과에서는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불면증까지 나타난 탓에 방문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항우울제 처방을 받은 후에야 소화불량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50대 소화불량 환자는 111만 명, 60대는 91만 명으로 모든 연령대 중 1, 2위였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에 정년퇴직이나 이직을 앞두고 겪는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악화하는 과정에서 소화불량 증세가 나타나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우울과 불안에 따른 호르몬의 불균형이 소화기능에 영향을 미쳐 만성적 소화불량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인구 10만 명당 우울증 환자는 2015년 기준으로 40대가 1010명이었지만 50대에 1430명, 60대 2298명 등으로 급증했다.

이처럼 우울증 환자들은 본인의 스트레스를 자각하지 못하다가 소화불량으로 처음 병원을 찾는 사례가 잦다. 보건복지부가 가정의학과, 내과 등 동네의원에서 우울증 선별검사를 실시하게 하는 까닭이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스트레스로 인한 소화불량이 의심되면 심리 상담과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병행하며 적은 양의 항우울제를 처방받기를 권한다”며 “스트레스에 지친 몸이 보내는 신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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