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 사고도 구제… 음주운전 부추기는 ‘권익위의 면죄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교통사고 사망자 2000명 줄이자/시즌2]<4> 도로교통법 무시 감경처분 남발

지난해 4월 대구에서 A 씨가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됐다.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01%로 면허취소 대상. A 씨는 경찰에서 “알코올 성분이 든 구강청정제를 사용한 탓”이라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경찰은 음주운전에 허위 진술까지 한 A 씨의 면허를 취소했다.

그로부터 5개월 후 A 씨의 면허는 ‘좀비’처럼 살아났다. 국민권익위원회 중앙행정심판위원회(행정심판위)가 A 씨를 구제해 준 것이다. “운전면허 취득 후 10년 이상 무사고 운전”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음주운전 감경 기준을 규정한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 없는 내용이다. 게다가 ‘주요 사실을 허위로 주장하거나 허위 자료를 제출할 경우 행정심판을 기각하도록 한다’는 권익위 자체 업무처리요령에도 상반된 것이다.

이른바 ‘생계형 음주운전자’ 구제를 위한 운전면허 행정심판 제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제도가 음주운전에 엄격해지는 최근 정부 정책 및 사회 분위기를 정면으로 거스르기 때문이다. 특히 권익위가 형평성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자체 행정심판 업무처리요령까지 만들어 음주운전자를 구제해 온 사실도 감사원 감사를 통해 확인됐다.

○ 1건 심사 시간은 고작 10초

본보는 최근 감사원이 발표한 권익위 감사 결과의 세부 자료를 입수해 분석했다. 감사 자료에 따르면 행정심판위는 지난해 청구된 운전면허 행정심판 2만56건 중 3459건을 인용했다. 인용률은 17.2%. 2011년부터 지금까지 연평균 인용률은 18.1%에 달한다. 행정심판을 청구하면 10명 중 2명 가까이 구제된 셈이다.

권익위는 행정심판이 청구되면 우선 자체 업무처리요령에 따라 검토 의견서를 작성한다. 이는 권익위가 자체적으로 만든 판단 기준이다. 예를 들어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서는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 이상이면 면허를 취소하고, 0.12%를 넘으면 어떤 경우에도 행정처분 감경이 불가하다. 하지만 권익위는 자체 업무처리요령에 따라 0.129%까지 구제했다. 이 때문에 0.12%를 넘은 46건이 구제 혜택을 받았다. 권익위는 지난해 8월에야 기준을 0.12%로 고쳤다.

하지만 권익위가 자체 기준조차 제대로 적용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감사원이 2015년 1, 2월과 이듬해 1, 2, 9월에 이뤄진 행정심판 인용(일부 인용 포함) 사례 1741건을 전수 조사한 결과 18건이 업무처리요령과 어긋난 판단이었다. 지난해 5월 16일 혈중 알코올 농도 0.112% 상태로 고속도로에서 탱크로리를 몰다 11t 화물차를 들이받은 B 씨는 기준대로라면 구제 대상이 아니지만 행정심판을 통해 면허 취소를 피했다. 감사원은 “탱크로리 차량에 일반 차량 기준을 잘못 적용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 2, 9월 열린 12차례의 행정심판 소위원회에서 직접 서면과 구술로 검토한 ‘주요 안건’은 150건(2.3%)에 그쳤다. 한 번 열릴 때마다 정밀 심사한 건 평균 12건 정도인 셈이다. ‘기타 안건’으로 분류된 나머지 1047건은 6명으로 구성된 권익위 행정심판국의 검토 의견을 사실상 그대로 인정했다. 회당 평균 525건을 처리하는 행정심판 소위원회는 보통 오전 10시 30분부터 1시간 30분가량 열린다. 1건의 심사 시간이 10.2초에 불과한 셈이다. 감사원은 “사전 자료 검토 시간과 심리 시간이 부족해 실질적 심리가 없었다”고 봤다.

○ 잇따른 지적에도 권익위는 요지부동

권익위는 “행정심판위가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을 따를 필요는 없다”며 자신들의 독립성을 주장한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은 경찰 행정의 단순한 사무처리기준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같은 정부기관이 동일한 사건을 다루면서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건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감사원도 “권익위 역시 정부조직법에 따른 행정기관”이라며 “행정심판 소위원회가 상이한 기준을 마련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지나치게 높은 인용률을 지적했다. 민 의원은 “음주운전 구제 결정이 남발되는 경향이 있어 자의적으로 행사되지 않도록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권익위는 감사원 감사 결과를 다룬 언론 보도를 대상으로 “권익위가 자의적으로 판단했다는 지적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업무처리요령 비공개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에 감사원 관계자는 “권익위가 감사를 수용할 수 없다면 정식으로 재심의를 요청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상옥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8일 “행정심판 구제 기준은 음주운전 근절을 위한 정부 정책의 통일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월권 행위로 볼 수 있다”며 “권익위는 자체 업무처리요령을 공개해 행정심판을 더욱 투명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음주운전#권익위#만취 사고#교통사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