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학교도, 병원도 못 가봤다… ‘있어도 없는 18년’ 유령 소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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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모 별거중 다른 남성 사이서 낳아… 부모가 호적 안 올려 집에서만 생활
작년 슈퍼서 물건값 계산 못하자, 주인이 “아동학대 의심” 경찰에 신고
검사 직권으로 2월 출생신고… 檢 “부모 처벌 원치않아 기소 고민”


세상에 태어났지만 아무도 존재를 몰랐다.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학교에 가본 적도 없다. 마치 ‘유령’ 같은 삶이었다. 은혜(가명·18) 양 이야기다.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20년 가까이 은혜는 세상에 없는 듯 살았다. 학교는 물론이고 병원조차 간 적이 없다.

○ ‘유령소녀’의 18년

은혜는 1999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는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은혜를 낳은 어머니 A 씨(45)와 아버지 B 씨(48)는 법적 부부가 아니었다. A 씨가 남편과 별거한 사이 B 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은혜를 출산했다. A 씨는 원래 남편과 이혼하지 못해 은혜의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다. B 씨도 마찬가지였다. 은혜의 친아버지가 A 씨 남편이 아닌 자신인 걸 입증하려면 복잡한 법적 절차가 필요했다. 적지 않은 비용도 들었다. B 씨는 결국 은혜의 출생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출생신고가 안 됐으니 당연히 은혜에게는 주민등록번호가 없다. 한 번도 예방접종을 받지 않았다. 유치원은 물론이고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아예 학교 문턱에 가본 적이 없다. 은혜는 거의 하루 종일 집 안에 머물렀다. 다행히 A 씨 부부는 은혜를 잘 먹이고 잘 키웠다. 다만 세상에 드러내놓지 않았을 뿐이다. A 씨 부부는 그게 어떤 죄인지 몰랐다. 부모가 읽고 쓰는 걸 가르친 게 전부였다. 또래 친구들이 대학 입시 준비를 할 나이지만 은혜는 간단한 덧셈이나 뺄셈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사회성을 키울 기회는 아예 없었다. 부모와 말하는 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은혜의 존재가 드러난 건 지난해 6월. 우연히 은혜가 근처 슈퍼마켓에 갔다. 주인은 멀쩡해 보이는 은혜가 거스름돈 계산을 하지 못하는 걸 보고 아동학대가 의심된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최근 경찰은 A 씨와 B 씨를 아동복지법 위반(방임) 혐의로 입건하고 대전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부장 이계한)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 폭력 없는 방임도 분명한 학대

지난달 15일 검사의 직권으로 은혜의 출생신고가 18년 만에 이뤄졌다. 그리고 은혜는 요즘 지역의 한 청소년복지센터에 다니고 있다. 기초 공부를 하면서 조만간 초등 졸업자격 검정고시에도 응할 예정이다. 종이접기와 바느질에도 소질을 보였다. 청소년복지센터 관계자는 “얼마 전에는 양말인형을 만들어서 선생님에게 선물하고 어머니에게도 주는 등 사회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은혜는 지금도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 관계자는 “아동학대 혐의는 명백하지만 은혜가 부모님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는 취지로 말했고 실제 기소 때 아이에게 악영향이 갈 수 있어 기소 여부를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은혜는 부모를 잘 따르고 특히 아버지를 향한 애착이 크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가 은혜의 삶에서 18년을 앗아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폭력 등 심각한 학대가 아니라도 이처럼 기본적인 양육의무를 외면한 방임에 대해 부모의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김형모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A 씨 부부의 행동은 유엔아동권리협약 가운데 자녀의 생존권을 침해한 것이고 교육적 방임도 했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아동학대 사례 중 방임은 2015년 3175건(중복 학대 포함)에 이른다.

황성호 hsh0330@donga.com·신규진 기자
#아동학대#범죄#유령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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