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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의 핫 피플] ‘파란 리본’ 단 反트럼프 선봉장 린-마누엘 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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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의 핫 피플] ‘파란 리본’ 단 反트럼프 선봉장 린-마누엘 미란다

하정민 기자 입력 2017-03-02 17:03수정 2017-03-02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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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파란 리본을 한 채 나타난 미란다
세계의 관심이 쏠린 2월 26일 아카데미 시상식.

첫 번째 축하무대 공연자로 나선 사람은 가수 겸 배우 린-마누엘 미란다(Lin-Manuel Miranda·37)였다. 그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끈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의 주제곡 ‘How far I’ll go’를 폭발적 가창력으로 소화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머니와 같이 파란 리본을 달고 아카데미 레드카펫에 선 미란다
그가 노래할 때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은 순간은 시상식 전 레드카펫 행사였다. 어머니와 함께 아카데미를 찾은 그는 나란히 가슴에 파란 리본을 달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소송을 낸 시민단체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을 지지한다는 뜻에서다.


미란다가 공개 장소에서 트럼프에 날을 세운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5월 트럼프 대통령의 모교 펜실베이니아대 졸업식 연단에 섰다. 학생들을 향해 “(트럼프를 포함한) 정치인들이 반(反)이민에 관한 각종 수사를 늘어놓지만 미국 사회의 근간은 이민자들이 확립했다”고 주창해 열광적 환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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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펜실베이니아대 졸업식에서 연설하는 미란다)

푸에트로리코 이민자 후손인 미란다는 같은 카리브해 네비스섬 출신인 미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1757~1804)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해밀턴‘으로 “세계 뮤지컬계의 판도를 바꿨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뮤지컬계 스타가 왜 반 트럼프 진영의 선봉장이 됐을까.

○ 히스패닉계 뉴요커

미란다는 1980년 미국 뉴욕 워싱턴하이츠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푸에르토리코계인 아버지는 민주당 선거전략가, 흑백혼혈인 어머니는 심리학자다.

맨해튼 북서쪽에 위치한 워싱턴하이츠는 중남미계 밀집 구역이다. 영어를 한 마디도 쓰지 않고 스페인어만 써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워싱턴하이츠와 조부모의 거주지 푸에르토리코를 오가며 보낸 유년기는 미란다의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98년 아트 칼리지로 유명한 코네티컷 주 웨슬리안대에 입학한다. 한 해 뒤 불과 19세의 나이로 첫 희곡 ’인 더 하이츠(In the Heights)‘를 썼다.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 즉 워싱턴 하이츠에서 사는 라틴계 이민자와 유색인종의 애환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대학시절 몇 편의 희곡을 더 쓴 미란다는 2002년 졸업 후 뉴욕으로 돌아와 브로드웨이 진출을 준비한다. ’인 더 하이츠‘는 브로드웨이 입성의 전초전인 오프 브로드웨이(브로드웨이 대형 극장이 아닌 소규모 극장에서 소규모 관객을 상대로 한 실험적 연극) 무대에서 호평을 받는다. 2008년 3월 리처드 로저스 극장에서 브로드웨이 입성에 성공했다.


○ 인 더 하이츠


브로드웨이. 맨해튼 서쪽을 관통하는 큰 길인 브로드웨이와 42~50번 가가 만나는 지역을 말한다. 뉴암스테르담, 마제스틱 등 한 번에 1000~15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극장 20~30개가 ’오페라의 유령‘ ’라이언 킹‘ ’위키드‘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뮤지컬과 연극을 늘 공연한다.

뮤지컬 ‘인 더 하이츠’에서 공연하는 미란다
그가 원작, 작사, 작곡, 주연 1인 4역을 맡은 ’인 더 하이츠‘는 브로드웨이 기존 뮤지컬과 완전히 다른 음악과 안무를 선보였다. 성악과 발라드 대신 시종일관 랩, 힙합, 레게 등이 흘러나온다. 주인공이자 워싱턴 하이츠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우스나비 역을 연기한 미란다는 자신의 대부분 대사를 시종일관 속사포같은 랩으로 소화했다. 안무도 살사, 삼바, 탱고 등 정열적 라틴 댄스에서 차용한 동작이 대부분이었다.

미국 사회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지만 앵글로색슨계 백인에게 밀려 늘 2등 시민으로 사는 유색인종의 삶. 주인공 ’우스나비‘의 이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민 1세대인 부모가 미 군함에 적힌 ’US Navy(미 해군)‘ 단어를 그대로 읊은 이름이 바로 우스나비다. 하지만 그를 포함한 라틴계 젊은이들은 팍팍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꿈과 희망을 노래한다.

관객과 평단은 신선함과 재기발랄함이 넘치는 이 뮤지컬에 열광했다. 초연 3개월 만인 2008년 6월 ’연극계의 아카데미‘로 불리는 토니 상에서 최우수작품, 작곡, 안무, 편곡 등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미란다는 뮤지컬계의 혜성으로 떠올랐고 ’인 더 하이츠‘는 한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 세계 각국으로 수출됐다.


○ ’해밀턴‘의 대성공


뮤지컬 ‘해밀턴’ 속 미란다
미란다는 두 번째 작품 ’해밀턴‘에서 더 큰 도전과 파격을 시도한다. 미 10달러 지폐의 주인공이자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해밀턴의 정적 애런 버 등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 그는 역사 속 백인 역할을 모두 유색인종 배우들에게 맡겼다. 일부는 동성애자 혹은 에이즈 보균자였다. 백인 중심의 미국 역사와 기존 관습에 정면 도전하겠다는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해밀턴‘은 대히트였다. 2015년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의 티켓 수입만 3000만 달러(약 350억 원), 미란다가 주연한 마지막 공연의 암표 값은 무려 2만 달러(약 2320만 원)에 달했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암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를 정도였다.

’해밀턴‘은 2016년 토니 상 시상식에서 전체 16개 부문 중 최우수작품, 감독, 음악, 남자 주연배우, 의상, 조명디자인 등 11개를 휩쓸었다. ’해밀턴‘은 올해 11월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무대에도 데뷔한다.

이 작품은 공연 외적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2016년 11월 19일 이를 보러 뉴욕에 온 마이크 펜스 당시 부통령 당선자는 주연 배우들과 관객의 빗발치는 야유에 직면했다. 애런 버 역을 맡은 배우 브랜던 빅터 딕슨은 펜스에게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다양성과 시민들의 권리를 훼손할까 두렵다”며 돌직구를 날렸다.

(펜스 부통령 사건을 보도하는 미 언론)

○ 컬러 블라인드 오디션의 유행과 반(反) 트럼프

해밀턴의 성공은 브로드웨이의 새 유행을 불러왔다. ’컬러 블라인드(color-blind) 오디션‘ 즉, 배우를 뽑을 때 피부색과 인종을 보지 않는 방식이다. 이제 ’오페라의 유령‘과 ’신데렐라‘에서 흑인 배우가 유령과 신데렐라 역할을 맡아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미국 대중문화계에서 차지하는 미란다의 위상 또한 남다르다. 2016년 말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 중 ’개척자(pioneers)‘를 대표하는 인물로 뽑았다.

미란다는 히스패닉계 이민자의 울분과 소외라는 고전 콘텐츠를 랩과 힙합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접목해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뒀다. 그의 대성공 뒤에는 이런 재능있는 젊은 예술가를 알아보고 그에게 성원을 아끼지 않는 관객과 평단이 있다. 또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권력자에게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이것이 용납되는 사회 전통도 존재한다.

과연 한국에서는 미란다와 같은 예술가가 탄생할 수 있을까. ’블랙리스트‘ 사태로 얼룩진 한국 문화계의 현실이 새삼 씁쓸하게 다가온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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