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의 휴먼정치]文포비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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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논설실장
박제균 논설실장
삼성 임원을 지내고 외국계 회사 임원으로 전직한 지인을 얼마 전에 만났다. 더불어민주당 국민경선에 선거인단으로 등록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놀라진 않았다. 보수 색채를 띤 사람들의 민주당 경선 참여 움직임은 이미 뉴스가 아니다. 친문(친문재인)계에선 ‘역선택으로 경선을 교란하려는 행위’라는 비판도 나오지만, 따지고 보면 역선택도 아니다. 경선에서 안희정을 찍고, 대선에서도 안희정을 찍겠다는 것이다. 지지율 1위의 대선 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보수층의 불안감은 생전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당의 문턱을 넘나들 정도로 심각하다.

탄핵 찬성해도 ‘태극기’ 참가

더 심한 경우도 있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강남 아파트에 사는 노부부는 자식에게 이민을 종용하고 있다. 자신들은 살 만치 살았지만, 손자손녀들은 어떻게 될지도 모를 불안한 대한민국에 살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이쯤 되면 ‘文포비아(phobia·공포증)’ 또는 ‘공문증(恐文症)’이라고 부를 만하다.

내가 아는 전직 대사와 언론인 선배, 중견기업 경영자와 대기업 임원 출신들이 적지 않게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다. 이들이 꼭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문재인 집권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집안에만 있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공통적으로 가장 불안하게 느끼는 것은 안보의 근간인 한미동맹이 깨질 수 있다는 점이다.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와 영어 구호가 난무하는 이유다.

이쯤 되면 문 전 대표가 직접 나서 불안감을 감싸줄 만도 하지만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친일독재 사이비보수 세력 청산’이나 ‘대청소’를 들먹이며 불안을 부추긴다. 민주당 내에선 그가 “친노가 문제지, 문재인은 괜찮다”는 평가를 듣던 지난 대선 때와 달라졌다는 말이 나온다. 1500만 표에 가까운 득표의 기억이 패권의식을 너무 키웠다는 관측이다.

이런 불안감의 반사이익은 안희정 충남지사가 챙긴다. 안 지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선한 의지’ 발언으로 집토끼들로부터 뭇매를 맞은 뒤 다시 기수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래도 갈 곳 없는 보수는 안희정의 ‘선한 의지’를 믿고 싶어 한다. ‘노무현의 적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발언을 했다면 진보 진영에선 벌써 매장됐을 것이다.

뿌리가 같은 문재인과 안희정은 어느 지점에서 다른 길을 걷게 됐을까. 노무현 정권 내내 대통령 곁을 지켰던 문재인은 노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토로한 ‘실패와 좌절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리라고 나는 본다. 그 실패는 노무현 정부 잘못이 아니라 ‘친일독재보수 세력’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억울해할 것이다. 반면 안희정은 대선자금 문제로 옥고를 치르는 등 노 정권 때 권력 주변에 가보지 못했다. 정권 핵심에서 한발 떨어져 나름대로 신산(辛酸)을 겪으며 새로운 길이 보였을 수 있다.

불안감 없애지 못한다면…

문재인이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집권하면 노 정권 실패의 한풀이를 할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집토끼를 확실히 잡으려는 경선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당 대선 후보가 돼서도 그런 불안감을 불식시키지 못하면 의외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지금은 경선만 통과하면 대통령 당선이 따 놓은 당상처럼 보이겠지만, 한 달에도 열두 번 바뀌는 게 한국정치다. 문 전 대표 측에선 미국 주류사회로부터 ‘트럼포비아(trumphobia)’ 소리를 들었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안도할지 모른다. 그러나 트럼프는 적어도 국가관이나 안보관을 의심 받은 적은 없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문재인#문포비아#공문증#안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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