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부형권]정치인 예우 없는 美 9·11 추모식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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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 14주년 추모식에서 서서 추모식을 지켜보는 정치인들.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왼쪽), 마이클 블룸버그와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오른쪽부터). 국립9·11메모리얼박물관 제공
9·11테러 14주년 추모식에서 서서 추모식을 지켜보는 정치인들.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왼쪽), 마이클 블룸버그와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오른쪽부터). 국립9·11메모리얼박물관 제공
부형권 특파원
부형권 특파원
‘추모식이 진행되는 동안 정해진 취재구역에서 임의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곧바로 퇴장당할 수 있습니다.’

11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그라운드제로에서 열린 9·11테러 14주년 추모식을 주관한 ‘국립9·11메모리얼박물관’ 측은 사전에 기자들에게 e메일로 이 같은 취재지침을 고지했다. 이날 오전 6시 15분경 행사장에 도착하니 e메일을 보냈던 박물관 커뮤니케이션 담당 앤서니 기드 국장이 나와 있었다. 정해진 취재구역은 추모식 무대에서 50m가량 떨어진 가로 10m, 세로 5m, 높이 1m 크기의 취재 연단. 그 주위엔 폴리스 라인(출입통제선)처럼 줄이 쳐져 있었다.

행사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북쪽 타워가 테러 공격을 받은 오전 8시 46분에 맞춰 묵념의 시간을 가진 후 유가족이 2명씩 짝을 이뤄 희생자 2983명의 이름을 차례대로 호명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3시간 반의 추모식 동안 기자들은 취재구역으로 찾아온 유가족만 인터뷰할 수 있었다. 사진기자들이 취재구역을 벗어나 촬영하려면 박물관 직원과 동행해야만 했다. 엄격한 취재 제한에 대해 기드 국장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선 이런 취재 통제를 당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기자)

“추모식은 9·11 유가족을 위한 행사다. 그들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애도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해야 한다.”(국장)

“정치인들이 많이 왔다. 그들의 추모사 낭독 순서도 있나.”(기자)

“그런 건 없다. 호명 행사가 끝나면 추모식도 끝난다.”(국장)

행사에는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 빌 더블라지오 뉴욕 시장, 척 슈머·크리스틴 길리브랜드 뉴욕 연방 상원의원, 마이클 블룸버그·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 등 스타급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러나 이들을 소개하는 방송도, 이들이 무대에 등장하는 이벤트도 전혀 없었다. 정치인들은 무대에서 30m가량 떨어진 한쪽 구석에 나란히 서 있었다. 이들을 위해 마련된 의자조차 없었다. 더블라지오 시장은 추모식이 끝날 때까지 4시간 넘게 서 있었다. 이날 의자에 앉아 행사를 지켜보고 행사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참석자는 가슴에 파란 리본을 단 유가족뿐이었다. 좌석과 음료 제공 등 모든 편의도 그들에게만 집중됐다.

이날 추모식에서 유가족을 위한 행사라는 원칙은 언론뿐만 아니라 유명 정치인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하니 취재구역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6시간 넘게 갇혀 있었던 답답함과 피곤함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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