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事시즌 인사치레 전락한 蘭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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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9월의 주제는 ‘허례허식’]<173>의미 퇴색한 축하 화분

“저희가 챙겨야 할 기관의 인사이동 시기에는 난(蘭)값으로만 500만 원 이상 써요. 직급에 따라 다양하지만 보통 난 화분 하나에 10만 원 정도 듭니다. 무슨 난이 좋은 난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키우는지 솔직히 저도 모르고 받는 사람도 안다고 생각 안 합니다.”

한 공기업의 하청업체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김모 부장은 인사철마다 사장 명의로 난 화분을 보낸다. 대개는 ‘축 승진’이란 꼬리표를 달고 보내지만, 실제로는 수평이동인 ‘전보’에 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뭐 하는 자리로 갔는지도 모르는 ‘묻지 마’ 축하 난도 많다.

인사철이 되면 직장 곳곳에서 리본 띠를 두른 축하용 난 화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동안의 고마움을 표시하고 상대방이 직장에서 이룬 성취를 축하하기 위한 용도다. 하지만 업무상 필요에 의한 형식적 인사치레로 본래 의미가 퇴색돼 왔다는 지적이 많다.

A기업 본사는 역시 연말 인사철이 되면 승진 축하 난 배달로 쉴 새 없이 붐빈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수십 개씩 배달된 난 화분은 ‘처치 곤란’이 되기 일쑤다. 보낸 사람 이름이 적힌 리본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사무실 한 구석에 놓거나, 사내 직원들에게 나눠줘 버리는 게 보통이다.

난은 사군자(四君子)인 매란국죽(梅蘭菊竹)의 하나로 선비의 깨끗한 기풍을 상징하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고상한 선물로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하지만 너나없이 난을 선물함에 따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화분 속의 난이 동양란인지 서양란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고급 취미의 대상인 난이 상대방의 기호와 상관없이 그냥 떠안기는 선물이 된 때문이다.

받는 사람의 직위가 높을수록 난 가격도 뛰기 마련이어서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경우도 흔하다. 장만형 한국화훼협회 사무총장은 “지인의 경조사 때 꽃 선물을 하는 것은 오랜 미풍양속이었던 만큼 난 선물이 건전한 축하문화로 자리 잡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한은행 등은 난 대신에 쌀을 받은 뒤 이를 지역사회에 기부하는 운동을 하는 등 색다른 선물을 하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인사치레#난초#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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