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유비의 ‘촉한’ 패망 원인을 찾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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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평전/장쭤야오 지음·남종진 옮김/656쪽·3만5000원·민음사

유비와 제갈량. 대여섯 살 때 TV 인형극을 보고 처음 알게 돼 만화와 소설을 통해 이미지 살 붙임을 완성한 두 인물이다. 나이 먹을수록 혼란스럽다. 유비는 정말 ‘덕망 높은 군주’였을까. 제갈량은 ‘불세출의 천재 전략가’가 맞을까. 계속 그렇게 기억해도 괜찮을까.

역사학 전공자인 저자는 사인 불명 변사체 두 구를 차분히 해부하듯 책을 써냈다. 날카로운 메스와 가는 핀셋을 들고 두 인물의 실체 위에 두툼하게 쌓여 굳은 가공의 이미지를 한 겹 한 겹 끈질기게 걷어낸다. 번역본 소제목인 ‘사람을 아껴 난세를 헤쳐 나간 불굴의 영웅’은 검시 결과에 어긋난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오랜 의문이 풀렸다. 그토록 폭넓게 사랑받은 인물들이 세운 나라가 왜 그리 쉽게 패망했을까? 답은 ‘자가당착에 의한 자멸’이었다.

사람은, 군중은, 사실을 믿지 않는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유비는 영리한 스타 연예인을 빼닮았다. 사람들이 원하는 영웅의 이상형을 본능처럼 꿰뚫었다. 그리고 ‘그 영웅의 전형은 유비’라는 믿음이 널리 퍼지도록 생활 습관과 태도를 가다듬었다. 스스로도 그 믿음에 도취됐다. 인터넷도 페이스북도 파파라치도 없던 시절, 한 번 흐름을 탄 ‘후덕한 영웅’의 소문은 히트 곡처럼 빠르게 번졌다.

일단 인기를 얻었으니 게임 끝이었다. 유비가 이룬 거의 유일한 인생역전 대성공은 익주 정복이다. 그 성취는 자기를 철석같이 믿고 초청한 원래 땅 주인을 속이고 쫓아내 얻은 것이다. 교활하기 짝 없는 행적에도 불구하고 군중은 ‘어쩔 수 없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냉정한 성과주의로 일관한 일중독 정치가 조조가 유비를 없애기 위해 애쓴 까닭을 넉넉히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얻어 천하를 얻겠다’는 허울의 가치관을 배신해 잠시 흥했던 유비는 죽음에 이르러 다시 그 가치관을 저버리며 망국의 씨앗을 뿌렸다. 제갈량에게 “아들을 맡기겠으나 그의 재능이 부족하면 직접 나라를 차지하라”는, 의심과 견제로 가득한 유언을 남긴 것. 그 뒤 제갈량이 보인 다분히 자학적인 행적은 상처 입은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저자는 수많은 백성의 마음을 얻은 촉한이 삼국 중 가장 먼저 패망한 것에 대해 “능력 있는 신하와 지략 뛰어난 장수를 길러 내는 일에 소홀했던 유비와 제갈량의 책임”이라고 썼다. 제갈량도 2인자 이엄의 사소한 잘못을 책잡아 내친 뒤 다시 발탁하지 않았다. “재능 있는 이들은 견제를 받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나라. 사람에 대한 믿음을 국시(國是)처럼 내세웠지만 결국 누구도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 나라. 망국은 당연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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