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님, 제 남편 억울함 풀어주세요” 44년전 그 약속 아직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5일 17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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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6월 6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현충일 추념식을 마친 뒤 승용차로 향하던 육영수 여사에게 아기를 등에 업은 한 여인이 다가왔다. 그는 “군에서 의문사한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국립묘지에 이장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여인의 손을 잡고 사연을 들은 육 여사는 “꼭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이 여인과 육 여사가 손을 잡고 있던 사진과 관련 기사는 다음 날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렸다. 앞서 이 여인은 같은 해 4월 15일 강원 춘천시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도 찾아와 육 여사에게 진정서를 전달했다. 이 내용 역시 다음 날 동아일보에 실렸다.

그로부터 44년이 흘렀지만 이 여인의 바람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여인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어머니의 약속을 대신 지켜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 둘째 임신 중 전해진 ‘날벼락’

이 여인은 춘천시 퇴계동에서 살고 있는 변진구 씨(76)다. 변 씨의 사연은 1969년 5월 30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변 씨는 이날 낮 12시 50분경 홍천 11사단 병기중대에서 근무하던 남편 임인식 준위(당시 33세)가 칼빈소총을 가슴에 맞고 숨졌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부대 측은 남편이 신체장애(심장병 및 고혈압)에 대해 가끔 불평 및 비판을 해 오던 중 위병소 내무반에서 총기로 심장을 쏴 자해 사망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세 살짜리 딸과 임신 5개월 된 자신을 두고 자살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더욱이 남편과 자신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자살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부대 측의 대응은 더욱 의심스러웠다. 사건 다음 날 공개된 남편의 시신은 새 군복을 입힌 채 태극기가 덮여 있었다. 아내인 자신조차 시신에 손을 못 대게 막았고 정신을 잃다시피 해 며칠 동안 군 의무대에 있는 사이 부대 측은 남편의 장례까지 치렀다. 부검도 안 한 터라 정말 가슴에 총을 맞고 숨졌는지 확인할 길조차 없었다. 남편의 소지품은 소각했다는 말만 들었을 뿐 돌려받지 못했다. 이후 1개월 넘게 홍천의 천주교 공원묘지 내 남편의 묘소에는 병사들이 보초까지 섰다고 한다.

● 권익위 결정과 딴판인 국방부 심사

사랑하는 남편을 허망하게 떠나보낸 뒤 변 씨의 힘든 싸움은 시작됐다. 자녀 양육과 생계를 위해 농협에 취직해 일을 하면서도 의문사 규명에 매달렸다. 그러나 해결할 길은 막막했다. 차선책으로 남편이 설령 자살을 했더라도 부대 내 문제로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 연관에 따른 자살이므로 순직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변 씨에 따르면 임 준위는 부대 전입 직후 부대 내 자산이 외부로 불법 반출되는 등 심각한 부정부패와 군용물 횡령 등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았고 이로 인해 관련 상급자들로부터 협박에 시달렸다는 것.

사업가로, 직장인으로 성장한 남매도 변 씨를 도왔다. 변 씨 가족은 임 준위의 순직 처리를 위해 국방부 등 각계각층을 상대로 민원을 제기했지만 허사였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국민권익위원회가 ‘망인의 사망 구분을 순직으로 결정해 달라는 유가족 주장은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면서 순직 권고 결정을 내렸지만 올 3월 국방부 중앙전공사망 심사위원회는 ‘공무상 상당 인과관계가 없다. 순직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 마지막 희망마저 물거품

변 씨는 군 복무 중 의문사하거나 가혹행위 등 부대 내 부조리로 인해 자살한 군인들을 순직 처리하는 내용의 ‘군인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데 한 가닥 희망을 걸기도 했다. 군의문사 유가족들과 함께 국회 국방위원장실을 1개월 넘게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며 법안 통과를 호소했다. 결국 지난달 29일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소급 적용은 어려울 것이라는 의원과 국방부 측의 말을 듣고 변 씨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 날은 변 씨 남편의 기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기에 안타까움은 더했다. 변 씨는 30일 집 인근 성당에서 추도미사를 하며 말라붙어 더 이상 나올 것 같지 않던 눈물을 또 쏟아냈다.

변 씨는 “억장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행정소송이나 심판이 남아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을 풀고 싶습니다”라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춘천=이인모기자 i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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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동아일보 6월 7일자 사회면에 실린 변진구 씨의 사진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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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구 씨가 4일 강원 춘천시 퇴계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남편과 관련된 사진과 상장 등 각종 자료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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