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한국경제의 바람구멍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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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산업부장
천광암 산업부장
세계 1위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이 자리 잡은 울산 전하·미포만 일대를 지난주 둘러봤다. 이곳의 항공사진을 보면 힘차게 날아오르기 위해 양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의 모습이 연상된다. 포효하는 호랑이를 닮은 듯도 한데, 풍수의 문외한이 보더라도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된다. 이곳은 뒤로 염포산, 봉대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앞으로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다. 향토풍수학자들은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형세의 명당이어서 부와 명예가 한꺼번에 모이는 땅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이 천하의 명당도 ‘바람구멍’이 뚫리면 좋은 기운이 쇠하게 된다고 한다. 현대중공업이 지난해 3조 원이 넘는 적자를 내면서 현지에서는 이 바람구멍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나온다. 일부 향토풍수학자는 바람구멍의 실체로 개통을 5개월 앞둔 염포산터널을 꼽는다. 하지만 진정한 바람구멍은 땅과 땅 사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름 아닌 현대중공업 노사관계 이야기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7개월여에 걸친 협상 끝에 지난해 말 임금 및 단체협약에 대한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러나 이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돼, 현대중공업의 노사관계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표류상태에 빠져들었다.

근로자들의 정서에도 일면 공감은 간다. 조선업의 작업환경은 힘들기로 유명하다. 한여름에는 뜨겁게 달궈진 무쇠 덩어리 안에서 한 말도 넘는 땀을 흘려야 하고, 겨울에는 겨울대로 거센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한다. 그런데도 쾌적한 실내에서 편하게 일하는 현대자동차 등 인근 대기업의 근로자들보다 연봉이 적으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의 경쟁상대는 현대차 근로자들이 아니다. 이미 수주 물량 면에서 한국을 앞지른 중국 조선업체의 근로자들이다. 종전에는 해양플랜트 등 첨단 분야에서의 기술적인 우위로 간신히 경쟁력을 유지했지만 지금은 기록적인 저유가로 석유 관련 선박과 설비 발주의 씨가 말라 더 힘겨운 경쟁을 해야 한다. 더구나 한중 간의 기술격차는 무서운 속도로 좁혀지고 있다. 그 결과가 3조 원이 넘는 적자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생사의 기로에서 노사 간 내부갈등으로 시간을 허송한다는 것은 공멸을 뜻한다.

비단 현대중공업만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 전반이 비슷하다. 지난 40여 년간 ‘국제시장 세대’들이 뼈 빠지게 일한 덕분에 한국경제는 세계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성취를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고도성장을 견인한 주력산업들이 한꺼번에 비틀거리는 등 한국경제의 기반에 금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런데도 모두가 노(勞)와 사(使), 갑과 을로 편을 갈라 힘겨루기를 하느라 중국 쇼크, 엔화 약세, 역오일쇼크 등 동시다발적인 초대형 악재에 속수무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정치권과 정부는 반기업 정서와 관료주의의 포로가 돼 짐이 된 지 오래다.

지속성장이냐, 일본식 장기침체냐의 기로에 선 한국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설비투자도, 연구개발도, 신시장개척도 아니다. 노와 사, 정과 노, 사와 정, 정규직과 비정규직, 갑과 을 사이에 뚫린 바람구멍을 막는 것이 이런 것들보다 훨씬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돌로 성을 쌓은 자는 망하고, 사람으로 성을 쌓은 자는 흥(興)한다’고 한다. 인화(人和)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양보와 배려로 우리 사회 구성원 사이에 생긴 간극을 메우는 것이 위기를 넘는 첫걸음이다.

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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