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줄지않는데 “휴가 써라”… 연차수당은 먼나라 얘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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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돌려주세요]<2>‘그림의 떡’ 휴가

서울의 한 공공기관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을 ‘가정의 날’로 지정해 직원들의 정시 퇴근을 유도하고 있다. 이날에는 오후 6시 반 이후 컴퓨터를 켜서는 안 되고, 사무실 불도 모두 꺼야 한다. 가급적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일찍 퇴근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쉴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만약 ‘가정의 날’ 방침을 어기고 야근을 한 사실이 적발되면 해당 부서의 책임자는 인사상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기관에 재직 중인 김모 씨(33)는 올해 들어 ‘가정의 날’을 지켜본 날이 거의 없다. 야근을 하지 않으면 연초에 폭증하는 업무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김 씨 부서 직원들은 야근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해 수요일과 금요일 밤마다 청사 구석의 한 창고 사무실로 노트북을 들고가 일을 한다. 김 씨는 “업무량이 줄지 않는 상황에서 일찍 퇴근하라는 것은 집에서 일을 하라는 것과 똑같다”고 푸념했다.

○ 그림의 떡, 근로자 복지제도

한국의 근로기준법은 근로자들의 재충전을 위해 연차휴가나 출산휴가는 물론 생리휴가와 병가 등 다양한 휴가제도를 보장하고 있다. 법으로 보장된 휴가를 쓰지 못했을 경우에는 수당 등으로 이를 보전하고, 법으로 정해진 시간 이상 근로를 할 경우에도 수당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또 개별 사업장마다 ‘가정의 날’이나 휴직제도 등과 같은 다양한 복지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연장 근로를 당연시하며 휴가 사용을 불편해하는 한국 특유의 근로 문화가 만연한 현실에서 이런 제도를 모두 써먹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모 씨(29·여)는 지난해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성대결절에 걸려 병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병원 측이 “결혼 휴가까지 썼으면서 병가까지 쓰면 곤란하다. 당장 대체인력을 구하기도 힘들다”며 병가 사용을 거부했다. 이 씨는 하는 수 없이 계속 출근했고,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까지 증세가 악화돼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이 씨는 고민 끝에 결국 사직서를 냈다. 그는 “아플 때마다 병원 눈치를 보며 병가를 내는 것보다는 아예 사직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며 “나는 간호사 자격증이 있기 때문에 몸이 회복되면 다른 병원에서 일을 할 수 있지만 일반 직장인이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정말 대책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일수록 근로자들의 복지제도는 ‘그림의 떡’이다. 제조업체 생산직 부서에서 일하는 이모 씨(50)는 입사 이후 휴가를 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소위 ‘빨간 날’로 불리는 공휴일에만 쉴 뿐 토요일에도 매일 근무한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1년 근무일수 가운데 80%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는 15일간의 연차 유급휴가가 주어지고, 3년 이상 근로할 경우 2년마다 하루씩 휴가를 더 줘야 하지만 이 회사에서는 유명무실이다.

그는 “회사의 재무구조가 비교적 탄탄한 편인데도 인력이 부족해 휴가는 꿈도 꾸지 못한다”며 “월급이 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4일 연휴였던 지난 설에도 이틀만 쉬고 이틀은 근무했다. 이렇게 휴일에 근무했다고 해서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법정휴가를 쓰지 않았을 때 지급되는 수당도 당연히 없다. 그는 “연가보상비, 초과근무수당 등은 대기업에만 해당되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 많이 일하지만 떨어지는 생산성

공무원 역시 휴가를 못 쓰거나 법적으로 정한 근로시간을 초과해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 업무량이 많은 정부 중앙부처로 갈수록 상황은 심각하다. 중앙부처에서 일하는 B 서기관은 거의 매일 야근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요일도 대부분 출근한다. 업무가 너무 많아 일찍 퇴근하거나 휴일에 쉬었다가는 제때 보고서를 제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B 서기관은 “장관이 일요일에 주요 간부회의를 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월요일 회의 자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일요일이라고 맘대로 쉬기는 어렵다”며 “불안하게 쉬느니 차라리 출근해서 쉬자는 생각을 할 때가 더 많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 본부에 있을 때는 참고 견디고 대신 지방근무 때 재충전을 하자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한국 근로자들의 열악한 근로 여건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로도 입증된다. 한국은 OECD가 지난해 조사해 발표한 일·생활 균형지수에서 5.4점(10점 만점)을 얻어 34개 회원국 가운데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지난해 통계청 조사에서도 연차휴가를 모두 썼다고 응답한 근로자의 비율은 22%에 불과했고, 온라인 여행사 익스피디아가 24개국 직장인 853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한국 근로자들의 유급휴가 일수는 연간 평균 10일로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2011년 기준 한국의 취업자 1명당 노동생산성은 6만2000달러로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23위에 그치고 있다. 많이 일하면서도 생산성은 떨어지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근로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남보다 더 많이 일을 하고,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야 인정을 받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불안감과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근로문화가 가장 큰 문제”라며 “근무 몰입도를 높이기 위한 유인책들이 생활의 균형을 깨뜨리고 일중독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성열 ryu@donga.com·김수연 기자
#휴가#연차수당#근로자 복지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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