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겨울풍경’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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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풍경’
박남준(1957∼)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 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랫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빨래 말라간다
삶도 때론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며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집 저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이 익어간다
늙은 사내 혼자 앉아 산골에서 호박죽 끓인다
문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소리 나 여기 바람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겨울나무를 촬영한 이명호 씨의 사진작품.
겨울나무를 촬영한 이명호 씨의 사진작품.
컬링도 프리스타일 스키도 참 신기하다. 빗자루 같은 막대로 얼음 바닥을 문지르거나 스키를 타고 장애물을 넘어 공중곡예를 하는 모습이 해리포터 시리즈의 ‘퀴디치 게임’처럼 생경한 듯 색다른 재미를 준다. 소치 올림픽 중계를 통해 우리 선수들의 활약상을 챙겨 보면서 낯선 종목의 매력과 접하고 있다. 스포츠와 더불어 러시아의 겨울을 간접 체험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작년과 달리 올해 한국을 찾은 동장군(冬將軍)의 기세는 예년만 못한 것 같다. 서울에선 눈 보기가 힘들었는데 동해안 지역은 눈 폭탄에 시달리는 등 지역별 편차도 컸다.

소한 대한에 입춘도 지났고 겨울은 조금씩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 아쉬움을 박남준 시인의 ‘겨울풍경’으로 달래본다. 소박한 일상을 통해 겨울의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성찰을 버무린 작품이다. 바깥 날씨로부터 차단된 삶을 살아온 젊은층은 예외로 하고, 중장년 세대라면 마당 빨랫줄에 걸어놓은 옷이 꽁꽁 얼어붙었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빨래도 얼었다 녹는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어찌 인생살이에 담금질의 시간이 빠질 수 있겠는가. 시의 풍경 위에 사진가 이명호 씨의 작품을 겹쳐본다. 거대한 캔버스를 배경으로 척추를 곧추세운 겨울나무 한 그루가 의연히 서 있다. 나무의 초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자신을 치장한 잎을 모두 떨구고 오직 본질만 드러냈기 때문이리라.

돌풍을 불러온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성공에는 주제가 ‘렛 잇 고(let it go)’도 한몫했다. 주인공 엘사 공주는 자신의 비밀과 약점을 더는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으로 이 곡을 부른다. 생의 고비를 만날 때면 순리를 따르라는 비틀스의 명곡 ‘렛 잇 비’처럼 삶의 지혜를 일깨우는 노래다. 이 계절의 유통기한도 얼마 남지 않은 2월, ‘세상에 뼈 없는 것들 어디 있으랴’는 시 구절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자투리만 남은 겨울과도 작별해야겠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겨울풍경#박남준#소치 겨울올림픽#겨울왕국#렛 잇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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