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혈통 ‘공주’와 애증의 50년… 끝내 비극으로 막내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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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장성택 처형 / 김경희와의 ‘사랑과 전쟁’]


김정은 체제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으로 꼽혔던 장성택이 처형되면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은 처참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김경희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백두혈통’ 가문의 공주와 ‘곁가지’ 장성택은 50년을 불같은 사랑과 증오로 보냈다.

○ 불같은 사랑

1967년 어느 날, 강원도 원산의 원산경제대 정문에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들이닥쳤다. 정문 경비원은 한눈에 차를 알아봤다.

“수상(김일성) 동지가 왔다.”

대학에 비상이 걸려 간부들이 뛰어나왔지만 이 차에서 내린 사람은 수상이 아닌 새파란 젊은 여성이었다. 김경희였다. 그는 남성 기숙사에 주저 없이 들어갔다. 김일성대 경제학부에서 사귄 연인 장성택이 이 대학에 강제로 전학 오자 아버지의 차를 몰고 찾아온 것이다. 당시는 평양∼원산 고속도로도 없을 때였다. 말(馬)도 쉬고 간다는 마식령의 아흔아홉 굽이를 넘어가 장성택의 빨래까지 해주고 가던 ‘공주’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북한 대학에서 회자된다.

장성택과 김경희의 인연은 1964년 김일성대 경제학부에서 입학해 둘이 같은 반이 되면서 시작됐다. 장성택은 김경희의 앞자리를 배정받았다. 19세 김경희는 손풍금을 잘 치고, 말솜씨가 좋은 호방하고 훤칠한 미남에게 끌렸다. 앞에 앉은 장성택의 귀를 풀대로 간질이던 김경희의 장난은 점점 불같은 사랑으로 변했다.

둘이 사귄다는 얘기가 어느덧 김일성의 귀에 들어갔다.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에겐 당을 맡기고, 사위에겐 군을 맡길 생각이었다. 장성택의 집안은 너무나 미천했다. 김일성은 화를 냈다. 장성택의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함북 길주 명천 농민쟁의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광복 후 제일 먼저 함경도 토착 공산주의자들부터 숙청했을 정도로 함경도 출신을 싫어한 김일성에게 장성택의 집안 배경은 마이너스였다. 형의 뜻을 안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장성택을 대학 3학년 때 원산으로 보냈다.

하지만 김경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외모나 성격이 어머니 김정숙을 쏙 빼닮은 김경희는 독한 면이 있었다. 오빠인 김정일도 김경희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김정일이 동생을 편들고 나섰다. “신분이 안 좋으면 좋은 신분으로 만들어주면 되는데 저러다 차 사고라도 나면 어쩌냐”며 김정일이 간청하자 김일성도 결국 물러섰다.

1969년 김경희는 장성택의 누이 장계순과 함께 러시아 유학을 떠났다. 장계순은 올해 장성택의 숙청을 계기로 소환된 쿠바대사 전영진의 부인이다. 유학에서 돌아온 김경희는 1972년 장성택과 결혼한다. 둘 사이엔 딸 장금송도 태어났다.

○ 냉전과 외도

그렇지만 둘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기를 편들어준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성택은 조직지도부 외교부담당 과장으로 있던 1970년대 중반 ‘피로회복관’이란 관저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충성의 자금 마련이란 명목으로 북한 외교관들이 마약 밀매를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김정일이 장남 김정남을 외부에 공개하기 꺼리자 그를 스위스로 보내고, 이철(이수용)을 발탁해 김정남을 돌보게 한 인물도 장성택이다. 이철은 2010년까지 30년 넘게 스위스에서 대사를 지내며 김정남은 물론이고 김정은과 그의 형제들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돈과 배경을 업은 장성택의 배포는 점점 커졌다. 급기야 측근들과 여인들을 불러 호화 파티를 벌이다가 1978년 김정일에게 적발됐다. 매제가 자신을 흉내 낸 파티를 연 사실을 안 김정일은 격노해 그를 강선제강소 작업반장으로 보냈다.

남편에게 실망한 김경희가 술에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쯤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2년 뒤 1980년 복권한 장성택은 노동당 청년사업부 1부부장(1985년), 부장(1989년)으로 승진했지만 김경희와의 관계는 회복하지 못했다.

고독하고 쓸쓸한 김경희의 마음을 달래준 것은 음악이었다. 김경희는 1980년대 북한에서 유명했던 바이올리니스트 김성호의 애절한 연주에 빠져들었다. 둘은 점차 연인으로 발전했고, 김경희가 그를 음악가정교사로 임명해 옆에 두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 증오로 변한 사랑

장성택이 김경희의 외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의 유명한 ‘심화조’ 숙청사건을 지휘했던 장성택은 제일 먼저 김성호부터 제거했다. 유학 중에 반체제 조직에 가담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했다. 김성호가 사라지자 김경희는 이 짓을 할 사람은 장성택밖에 없다며 오빠에게 달려가 애원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 사건 이후 김경희와 장성택은 별거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일성의 사망 직후 김경희와 김정일의 사이도 급속히 악화됐다고 북한 권력 핵심층 출신 탈북자들이 말하고 있다. 김일성 사망 추모 기간에 김경희가 김정일을 향해 마구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한 기자가 이를 친구에게 말했다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일도 있다. 당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회의가 열릴 때 모든 참석자가 김정일을 향해 만세를 부를 때 김경희는 혼자 앉아 있다가 자신을 둘러싼 김정일 경호원들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고 퇴장하는 장면도 노동당 지도부에 목격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 조직지도부가 그녀를 가택연금하자 자살을 시도해 봉화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얘기도 나왔다. 김성호는 처형되기 전 친구들과 만나 “김경희가 술만 먹으면 ‘장성택이나 오빠는 똑같은 놈들이야,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들이야’라고 몰아붙였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부터 김경희는 술을 마시고 사람들 앞에서 장성택에게 “야, 너도 마셔”라고 하는 등 대놓고 망신을 주는 일이 잦아졌다는 증언도 나온다. 사랑을 잃은 장성택의 여성 편력도 더 심해졌다. 한 북한 고위급 탈북자는 “장성택이 머무르던 초대소엔 포르노 영상물과 잡지가 가득했다”고 전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딸 장금송은 사귀던 남성과의 결혼을 부모가 반대하자 2006년 프랑스에서 자살했다. 딸까지 죽은 뒤 김경희와 장성택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이번 장성택 제거는 김경희의 ‘복수극’이라는 관측이 일각에서 나올 정도다.

○ 불우한 부마의 가족

김일성의 사위, 김정일의 매제, 김정은의 고모부였던 장성택의 행로에 따라 그의 형제도 줄을 탔다. 장성택 처형에 따라 앞으로 그의 집안 식구들도 모두 처형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장성택에겐 두 형과 두 누나가 있었다. 큰형 장성우는 동생 덕에 군단장과 당 민방위부장을 거쳐 군 차수까지 올랐다가 2009년 사망했다. 그의 둘째 아들이 최근 소환된 말레이시아대사 장용철이다. 둘째 형인 장성길도 인민무력부 사적관장(중장)을 지내다가 2006년 사망했다. 장성길에겐 아들이 둘이 있었지만 모두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씨의 형제 중 가장 불우한 인물은 최근 쿠바에서 소환된 누나 장계순이다. 김경희와 함께 모스크바 유학을 한 경험 때문인지 김경희와 장계순은 시누이와 올케 관계였음에도 매우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희는 밤에 장계순의 집을 자주 찾아 자녀 결혼은 자기가 맡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계순의 딸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외아들 황경모와 결혼했다가 시아버지의 망명으로 남편이 수용소에 끌려가는 바람에 강제 이혼을 당하고 졸지에 청상과부가 됐다. 전영진 쿠바대사는 장계순의 둘째 남편이다. 가수 출신인 장계순은 인민예술가인 지휘자 신경학과 결혼해 두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동생이 김경희와 결혼하면서 수령의 집안에 적대 계급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지주 집안 출신인 남편과 강제 이혼을 당했다. 장계순은 결국 남편과 사위, 동생까지 잃고 자신의 운명도 백두혈통의 처분에 맡기는 신세가 됐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장성택 처형#북한#김경희#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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