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하태경 의원 식칼 협박이 ‘自作劇’이라는 극단 진영논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4일 03시 00분


새누리당 하태경 국회의원의 부산 사무실 출입문 앞에서 식칼이 발견됐다. 출입문에는 “시궁창 같은 더러운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민족의 존엄에 도전하는 하태경 네놈에게 천벌이 내릴 것이다”라는 협박문이 붙어 있었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같은 최고지도자를 가리킬 때 ‘최고 존엄’이라는 문구를 쓴다. 누군가가 하 의원의 김정은 비판과 북한인권 개선 활동을 위축시킬 목적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북한 간첩이나 북을 추종하는 종북주의자의 소행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학창 시절 운동권이었던 하 의원은 전향해 2005년 북한 민주화를 목표로 하는 ‘열린북한방송’을 설립했다. 북한인권법 제정과 탈북자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나섰다. 반북(反北) 활동에 앞장서온 하 의원은 올해 10월 해골 가면이 든 협박 소포를 받았다. 중국 선양에서 부친 것으로 보아 북한 소행으로 추정됐다. 북한 노동신문은 “반역당 패거리들에게 차려진 응당한 봉변”이라고 논평했다. 이런 식의 협박으로 북한인권 활동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고 오히려 북한의 다급함과 비열함만 드러내는 꼴이다.

하 의원을 위협한 범행과 별도로 이 사건에 대한 일부 누리꾼들의 반응도 우려스럽다. 사건을 알리는 한 인터넷 기사에 달린 1410개의 댓글 중 무려 80∼90%가 ‘관심 끌기용 자작극(自作劇)이 아니냐’며 하 의원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편 가르기에 익숙하며, 음모론이 횡행하고, 불신 풍조에 깊이 오염돼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졌을 때도 과학적인 증거를 무시하고 ‘대한민국의 자작극’이라며 북한에 동조하는 주장이 국내에서도 꽤 있었다. 이런 극단적인 진영논리는 꼭 종북 또는 친북좌파에 국한되지 않는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진보 진영이 계획적으로 상대 여성을 보냈다. 윤창중은 덫에 걸린 것”이라는 음모론이 나왔다.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극단적 시각으로 몰아가는 진영논리로 인해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하 의원 같은 사람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다. 음습한 곳에서 신뢰는 자라지 않는다. 이번 사건은 불신 풍토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당면 과제임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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