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훈]지겨운 ‘국민타령’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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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얼마 전 반가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다 보니 얼굴이 보고 싶었다. 소주나 한잔하자고 했다. 근데 웬걸. 술고래라던 그 녀석이 술을 사양하는 게 아닌가. 40대 중반을 넘겨 몸이 많이 상하는 경우를 자주 봐 왔다. 혹시 녀석도?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녀석은 실실 웃음만 흘렸다. 이유를 추궁하자 실토했다. “요즘 한약 먹고 있어서 그래.”

피로감이 부쩍 심해지고 식은땀이 많이 났다고 했다. 한의원에 갔더니 몸이 허해서 그렇다며 보약을 권했다. 단,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더란다.

한 달 치 보약 값으로 30만 원을 조금 넘게 줬다고 한다. 한의사는 3개월은 먹는 게 좋다고 했다. 그러면 100만 원이 들어가는 셈. 거금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술을 끊어야 한다는 게 술고래 친구의 변명이었다. 이래서 “보약 때문이 아니라 술을 끊었으니 몸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오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나도 한약을 먹으면서 ‘왜 이렇게 비싸?’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 비싼 곳은 탕약이 보름치에 20만∼30만 원에 이른다. 서민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액수다. 가뜩이나 경제도 어려운 마당에….

현재 일반 침을 맞을 때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는다. 나머지 한방 진료는 대부분 비보험 영역이다. 한의원 문턱이 높게 느껴지는 이유다. 여러 한약재를 섞어 처방한 첩약 또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첩약에 대해 10월부터 부분적으로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시범사업을 벌인다고 한다. 3년간 매년 2000억 원을 투자한다. 물론 치료 목적의 첩약에 한해서다. 몸이 허하다며 먹는 보약은 적용 대상이 아니다.

10월 시행까지는 한 달이 남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떤 질병을 대상으로 할지, 환자 연령대는 어떻게 할지 등 세부사항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시범사업 자체가 취소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내막을 들여다보니 헛웃음만 난다. △대한한의사협회 내부 갈등 △한의사-약사 갈등 △복지부 무관심이 뒤죽박죽 얽혀 있었다.

지난해 한의사협회가 첩약의 건강보험 적용을 복지부에 요청하면서 관련 논의가 시작됐다. 복지부가 긍정 검토했고,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가 2013년 10월 시행키로 의결했다. 후속 조치로 올해 초 구체적 사업 내용을 정하는 회의가 3회 정도 열렸다.

한의사협회 집행부가 4월 바뀌었다. 새 집행부는 시범사업의 설계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대 중증 질환이 중심이 돼야 하며 한방 건강보험이 지속될 만한 구조로 사업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결정에 이전 집행부 세력이 반발했다.

협회는 아직까지도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새 집행부와 이전 집행부의 알력은 여전히 심하다. 한약 조제 자격을 갖춘 약사에게 첩약을 허용키로 한 조항도 협회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약사가 한의사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것이다. 협회는 다음 달 8일 한의사 전체 총회(사원총회)를 열어 최종안을 결정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최종안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시범사업에 불참한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복지부는 어째 느긋하다. 협회가 최종안을 갖고 오면 그때 가서 보자는 것 같다. 10월에 시행하지 못해 국민이 피해를 본다면 협회에 1차 책임이 있다는 반응이다.

양쪽 모두 ‘국민을 위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속내를 보면 ‘국민을 담보로’가 타당한 표현 같다. 안일하게 정책을 짠 복지부나, 내홍(內訌)으로 갈피를 못 잡는 한의사협회나 다를 바 없다. ‘국민타령’이 지겹다. 사태 해결을 위해 당장 나서지 않으려면 그 누구도 국민을 입에 담지 마라.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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