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40>근황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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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김남호(1961∼)

요즘은 자꾸 웃음이 나

달리던 타이어에 펑크가 났는데도 웃음이 나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면서도
보험회사 직원이 지금, 거기가
어디쯤이냐고 묻는데도 웃음이 나고

도대체 여기가 어디쯤이지?

웃음이 나고,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도
장례식장이 어디냐고
발인은 언제냐고 웃음이 나고

얌마, 너 왜 그래?

엄마가 치매라는데도 웃음이 나고
누구세요, 나를 못 알아보는데도 웃음이 나고
울고 싶은데도 웃음이 나고
여보, 나 이러다 미치는 거 아냐?

무서워 죽겠는데 웃음이 나고


집에 자기만의 공간이 있는 기혼남자가 몇이나 될까? 서민의 집에서는 아이들한테 방 하나씩 주고 나면 남는 방이 없다. 안방은 부부의 방이라지만, 사실 아내의 방이다. 시인 김정환은 한 수필에서 자기 방을 ‘문이 아주 많은 방’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했다. 아이 딸린 기혼남자의 방은 거실이나 마루인 것이다. 거기 한 귀퉁이에서 컴퓨터나 들여다보다 온 가족이 잠든 한밤에 ‘야동’이나 보는 게 큰 낙인 기혼남자가 적지 않을 테다. 그렇게 살다가 이 시의 화자처럼 친구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치매를 앓고, 아들딸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을 다니거나 대학을 나왔어도 결혼도 취직도 못하고 있는 오십대 초반이 된다.

화자의 스트레스와 울증이 깊다. 당최 웃을 일이 없구나. 가뜩이나 나이 든 생명체로서 원초적 불안과 우울에 빠지기 쉬운 오십대인데, 도처에 힘든 일이다. 뭐든지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돈 들어갈 데 천지인데, 여태 ‘돈 버는 기계’처럼 살았어도 힘이 모자란다. 자식들 미래는 전망이 안 보이고 자기 노후도 불안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은 펑펑 터지고! 신경이 나달나달해져서 감정 조절이 안 된다. 그래서 작은 사고가 생겨도 비명을 지르고 울고만 싶다. 하지만 나이 먹은 남자라서 울지도 못하고, 무섭고 불안해 죽겠는데 나이 먹은 남자라서 무섭다고도 못한다. 그저 픽픽 웃음이 나온다. 왜 우리나라 오십대 남자들은 유난히 외롭고 힘들까? 가령 다른 가족들한테 너무 희생하거나 양보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도 돈을 쓰고 살았다면 인생이 덜 허망하고 마음이 건강할 테다. 억울함은 만병의 근원.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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