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원 고문’… 박정희 엄단 지시로 정보부원 3명 실형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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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13>5·20 장례식

1964년 5월 20일 열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학생들이 관을 들고 시위대를 이끌고 있다. 이날 시위는 박정희 정권을 장례 치르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동아일보DB
1964년 5월 20일 열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학생들이 관을 들고 시위대를 이끌고 있다. 이날 시위는 박정희 정권을 장례 치르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동아일보DB
1964년 5월 20일 오후 1시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때 아닌 조사(弔辭)가 울려 퍼졌다. 4000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축(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쓰인 만장을 드리우고 결연하게 섰다. 곧이어 5·16을 맹비난하는 성토문이 낭독됐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총성과 함께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일군의 청년 장교들에게 장악되었다… 그로부터 3년, 무(無)비판의 뒷장막에서 온갖 화려한 계획과 공약 뒤에 도사리고,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의 모골이 송연한 공포정치와 수도방위사령부 등의 총칼의 보호를 받으면서 너무나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역사적 퇴보’를 이 나라 민족사에 강요하였다… 피로서 되찾은 한국을 일본 의존적 예속의 쇠사슬에 묶는 것이 근대화요, 자립이라고 거짓말하는 자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사 지내자! 영원히 잠들게 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64년 취임 후 내세웠던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장사 지내 5·16을 역사적 퇴보로 규정짓고 이를 부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조사는 더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단어들로 채워졌다. 성토문 낭독이 끝나자 송철원(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이 조사를 낭독했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시체여! 죽어서까지도 개악과 조어와 전언과 번의와 난동과 불안과 탄압의

명수요 천재요 거장이었다,

5월 16일만의 민족적 민주주의여! 백의민족이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의

이 새 하얀 수의를 감고 훌훌히 떠나가거라! 너의 고향 그곳으로 돌아가거라.

안개 속으로 가거라!

이제 안개가 걷히면 맑고 찬란한 아침이 오리니

일찍 죽어 복되었던 네 운명에 감사하리라!

그러나 시체여!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지금 거기서 네 옆 사람과 후딱 주고받은 그 입가의 웃음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대량 검거의 군호인가? 최루탄 발사의 신호인가? 그러나 시체여!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목 메이도록, 뜨거운 조국과 너의 최초의 악수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죽은 이의 입술 가에 변함없이 서리는 행복의 미소인 것을.

시체여!

이 조사를 쓴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김지하였다. 어떻게 그가 이것을 쓰게 되었을까. 송철원의 말이다.

“당시에도 김지하 문장 실력은 학교 내에 소문이 자자했다. 시위를 기획하면서 조사는 김지하더러 쓰게 하자고 다들 합의했다.”

이날 5·20시위는 김지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사실 그는 그전까지만 해도 학생운동권 내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미학과가 문리대로 편입되면서 문리대 학생들과 교류하긴 했지만 문화 쪽 감수성을 살려 시화전을 열고 연극을 하며 문화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그가 비록 익명이긴 해도 5·20시위를 통해 학생운동권에 정식으로 데뷔한 셈이 된 것이다.

5·20시위는 최루탄 대 투석(投石)의 대결이 계속되어 오후 7시가 지나서야 끝이 났다. 100여 명이 다치고 200여 명이 연행됐다. 언론은 ‘5·16 이후 민주 세력의 최대반격’으로 표현했다.

집회 주동자들에 대해 검거 열풍이 불어닥쳤다. 친구 집에 숨어 있다가 이튿날인 21일 새벽 붙잡힌 뒤 모진 고문을 당한 송철원은 당시를 어제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네 명의 괴한들이 대기 중인 검은색 지프차에 태우더니 전속력으로 새벽을 달렸다. 이들은 나를 중부경찰서 2층 정보계로 끌고 올라갔다가 퇴계로 대한항공 건물 앞에 대기 중이던 새나라 자동차에 있던 운전사 포함 5인조에게 인계했다… ‘남산’같이 여겨지는 곳에 차를 세우고는 창고 같은 곳으로 가서 깜깜한 방 벽에 기대놓고 주먹과 발길질로 때리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당하고 또 당했다. (그들이) 술 냄새를 풍기며 폭행과 고문을 하며 끈질기게 물었던 것은 ‘5·20 장례식’을 주도한 문리대 지도부의 행방이었다.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자 이들은 ‘네가 유관순이냐? 네깐 놈 파묻어 버리면 누가 알겠냐?’며 협박했다. 정말 나를 때려죽여 파묻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기절한 척했다. 그런데 담뱃불로 내 손을 지지는 것이 아닌가?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리자 ‘엄살 부린다. 우린 경찰과는 달라!’ 라며 또 때리고 지지고 했다. 나는 결국 시멘트 바닥에 실신했다. 이때 입은 화상은 지금도 오른손에 남아있다. 실신한 내 몸에 찬물을 끼얹어 잠시 정신이 들었지만 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이 없다… 깨어나니 병원 침대 위였다, 벽시계는 새벽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고문당할까 두려워 눈을 감고 있는데 ‘이 새끼 죽지는 않겠지’ 하며 자기들끼리 염려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가 들어와 주사를 놓아주며 ‘이제 눈을 뜨세요’ 하길래 나는 작은 목소리로 ‘학생입니다. 고문을 당했습니다’라며 집에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의사는 ‘우리는 정치를 모릅니다’며 병실을 나가버렸다. 그곳은 경찰병원이었다.”

송철원은 1964년 5월 22일 경찰병원에서 동대문경찰서로 이송되었다가 갑자기 석방된다. 구속영장이 기각됐기 때문이었다. 송철원뿐만 아니었다. ‘5·20데모’ 학생들에 대해 경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은 총 107건이었는데 13건만 영장이 발부됐다.

사법부의 ‘엄정한’ 법 집행에 군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5·20시위가 있던 다음 날인 21일 오후 4시 반에 황길수 대위가 육군 공수부대 13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서울형사지법 청사에 난입한 것. 이들은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가 누구냐” “담당 검사를 불러라”며 1시간 이상 행패를 부렸다. 이어 담당 판사인 양헌 판사 집으로까지 몰려가 “왜 영장을 기각했느냐”고 따졌다. 무장군인들의 항의에 다들 공포에 질렸다. 언론들은 이 사건을 ‘무장군인 법원 난입사건’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그러고 이틀 뒤엔 경찰에서 풀려난 송철원이 정보부에서 당한 고문 사실을 폭로해 버리자 정국은 또다시 발칵 뒤집힌다. 정부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신문과 방송은 연일 두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질타를 퍼부어 댔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서 ‘엄격 조치’ 지시를 내린다. 5월 29일 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사표를 제출하지만 반려된다.

5월 30일 저녁엔 ‘송철원 군 린치사건’의 범인이라는 중앙정보부원 세 명이 자진 출두해 구속 수감된다. 이들은 1심에서 징역 6개월,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현역 중앙정보부원이 피의자를 고문한 이유로 구속되어 실형이 확정된 것은 1961년 6월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송철원#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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