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지는 영국을 다시 일으켜세운 세기의 리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철의 여인’대처 前 영국총리 타계
마거릿 대처는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1979년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돼 11년간 영국을 통치한 ‘철(鐵)의 여인’이었다.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은 옛 소련이 붙여준 것이다.

대처는 가난한 식료품점 주인의 딸로 태어나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통해 최고의 권좌에 오른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정치인이다. 그는 1925년 영국 중부 시골마을 그랜섬에서 앨프리드 로버츠의 딸로 태어났다. 집안은 어려웠지만 유달리 총명했던 대처는 딸을 정치인으로 키우려 한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옥스퍼드대의 서머빌 칼리지를 졸업했고 1951년 귀족 출신의 데니스 대처와 결혼했다. 프러포즈를 하는 남편에게 “나는 찻잔이나 씻으면서 집에 있을 수는 없는 여자”라고 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53년 변호사가 된 대처는 1959년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75년 에드워드 히스를 물리치고 영국 최초의 여성 당수(보수당)로 뽑혔다. 이후 1979년 노동당의 캘러헌 내각이 의회에서 불신임 결의를 당하고 해산된 직후의 총선거에서 승리해 총리가 됐다.

대처 집권 이전인 1970년대 영국은 병(病)에 찌든 중환자였다. 당시 경제는 과도한 복지, 만성화된 파업, 높은 실업률, 무거운 세금, 겹겹이 쌓인 규제 등 이른바 ‘영국병’으로 신음했다.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인이 첫 여성 총리를 선택한 것도 경제난에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강성 노조의 반발에 굴하지 않고 국영 산업의 대대적인 민영화를 단행했다. 특히 ‘아서왕’으로 불린 아서 스카길이 이끄는 석탄노조와 1년여 대치 끝에 항복을 받아냈다. 또 제조업 대신 서비스업을 국가 성장 기반으로 삼아 만성적인 ‘영국병’을 치유했다. 감세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한 것은 물론이고 각종 금융규제를 과감히 제거함으로써 오늘날 런던을 세계 최고의 금융 도시로 만든 것도 그의 공이다. 이로 인해 이름에 ‘주의(-ism)’를 붙인 단어(‘대처리즘’)를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최초의 영국 정치인이 됐으며 대처리즘은 아직도 각국 언어 사전에 남아 있다.

대외적으로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해 무너져 가던 대영제국의 자존심도 다시 세웠다. 1990년대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노동당이면서도 대처의 정책을 광범위하게 계승해 ‘대처의 아들’로 불렸을 정도다. 대처가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를 만든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처의 애국주의와 강력한 리더십에 큰 영감을 받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처는 1983년, 1987년 실시된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해 3기를 연임함으로써 영국 사상 최장기 집권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여성성을 거부함으로써 여성 인권 향상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처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역사에서 단 한 명의 여성 각료도 없었던 유일한 정권이었다.

1990년 유럽 통합 반대 입장을 고수하다가 당 지도부의 반발을 사게 되어 자진 사임하였으며, 1991년 5월 정계를 은퇴하였다. 1992년 남작 작위(케스티븐의 대처 남작)를 받고 귀족회의인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2003년 남편이 사망한 뒤 은둔 생활을 해왔고 2008년에 딸에 의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사실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1986년 5월 한국을 방문했다.

하정민 기자·파리=이종훈 특파원 dew@donga.com
#영국#마거릿대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