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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순간]핸드백 제조업체 시몬느 박은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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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순간]핸드백 제조업체 시몬느 박은관 회장

동아일보입력 2013-03-30 03:00수정 2013-03-30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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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운명 바꾼 사랑의 힘… 0914 핸드백 탄생시키다
여동미 작가는 시몬느의 가방을 여인의 형상으로 그려달라는 회사 측의 부탁에 ‘우렁각시처럼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해주는 핸드백이 되어 세계를 누볐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담아 그렸다. 핸드백에서 나오는 여인의 몸에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아내와 재회한 운명적인 날이자 그의 가방 브랜드 이름인 ‘0914’가 적혀 있다. 시몬느 제공
박은관(58)에게 1984년 9월 14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날의 날씨, 점심을 먹었던 장소, 메뉴 이름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다. 29세의 청년 박은관은 전날 꿈을 꿨다. 4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를 다시 만나는 꿈이었다.

동시통역사를 준비 중이던 여자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버렸다. 바쁜 일상에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애틋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나 보다. 아침부터 일이 손에 잡히질 않고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점심시간이 됐다. 그의 회사는 서울 을지로의 옛 미도파 건물(현 롯데 영플라자) 건너편에 있었다. 혼자 명동 거리로 나와 ‘금강 섞어찌개’에 가서 찌개와 밥 한 그릇을 먹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옛 생각이 끊이질 않아 그냥 회사를 ‘땡땡이’ 치기로 하고 산책에 나섰다. 걸을수록 여자친구 생각이 간절해 둘이 자주 갔던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경복궁 근처 ‘준(JUNE)’이었다.


오후 3시. 커피를 마시며 옛 상각에 잠겨 있는데 순간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처럼 꿈에 나온 여자친구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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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어제 당신이 나오는 꿈을 꿨어요. 하도 생생해서 여기에 한번 와본 건데….”

같은 날, 같은 꿈을 꾸고, 약속도 없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헤어진 연인이 기적처럼 재회한 것이다. 박은관이 1985년 신혼여행으로 떠난 이탈리아 로마의 트레비 분수 앞에서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9월 14일 때문에 생긴 믿음이 있어요. 보고 느끼는 것 외의 다른 현상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식스센스, 영감,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들 말입니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핸드백 속에 파묻혀 있다. 핸드백에는 아내와의 만남, 아버지와의 추억, 그의 30년 열정이 채워져 있다. 사진 속 백들이 2015년 9월 14일 본격적으로 론칭될 ‘0914’ 제품들이다. 의왕=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아내, 시몬느, 0914

박은관은 세계 유명 브랜드의 핸드백을 만들어 주는 제조자개발생산(ODM) 업체 ‘시몬느’의 회장이다. 버버리, 마크바이마크제이콥스, 마이클코어스, 토리버치, 코치 등 세계적인 고급 브랜드 20여 개의 핸드백이 대개 그의 손을 거친다.

글로벌 패션 디자이너들은 가방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싶을 때 제일 먼저 찾아야 할 회사로 한국의 시몬느를 꼽는다. 박은관의 회사는 소재 선택에서 디자인, 제조까지 모든 것을 한 번에 도와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업체 중 하나다. 시몬느의 지난해 가방 수출액은 5억3000만 달러(약 5800억 원)에 이른다.

시몬느는 아내의 애칭이다. 연애시절 그는 아내를 ‘시몬느’ 혹은 ‘시몽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에서 여자이름으로 많이 쓰이고, 독일어로는 지몬으로 발음되는 시몬느는 ‘당신’ 또는 ‘이상형’이라는 뜻이다. 패션 디자이너들에게는 언제나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다. 박은관의 뮤즈는 운명처럼 인생을 함께하게 된 그의 아내다.

그는 요즘 무대 뒤 ‘백 스테이지’에서 무대 밖으로 나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남의 핸드백을 디자인해주고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고급 가방으로 유명한 샤넬, 에르메스, 루이뷔통 등은 모두 창업자의 이름을 딴 브랜드다. 박은관은 자신의 뮤즈인 아내를 만난 ‘운명의 날’을 브랜드 이름에 달았다. 그래서 가방 브랜드 이름이 ‘0914’다. 언젠가 자신의 가방을 만든다면 이 이름을 달아줘야겠다고 생각해 왔다고 한다. 사랑을 이어주게 만들어준 날이기 때문이다.

그는 0914에 어마어마한 시간과 재원, 정성을 쏟아 붓고 있다. 대외적으로 브랜드를 대대적으로 알리기로 결정한 날은 2015년 9월 14일이다. 0914의 서울 도산공원 플래그십스토어가 완공되는 날이다.

시몬느의 개발실에는 이미 당장 백화점에 단독매장을 내도 될 만큼 독특한 디자인의 완성품 수십 가지가 놓여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제품들을 지난해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세운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Bag Stage)’ 한쪽 코너에서만 조용히 진열해 팔고 있다.

다른 브랜드처럼 연예인 마케팅을 통해서 빨리 소비자들에게 알려 매출을 올릴 생각도 안 한다. 대신 디자이너들에게 1년에 하나를 만들어도 좋으니 세상에 없는 진짜 독창적인 디자인을 만들라고 한다.

“우리가 ODM 하고 있는데 어떻게 남의 것을 베끼겠어요. 요즘 디자이너들은 루이뷔통 (가방) 몸통에 클로에 핸들 붙이는 식으로 이리저리 각 브랜드의 디자인을 짜깁기해서 매출을 올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쉬워요. 그러나 우린 오리지널리티(독창성)가 DNA입니다.”

박은관은 핸드백의 오리지널리티를 위해 문화적인 토양을 가꾸는 데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지난해 개관할 때 뉴욕타임스와 파이낸셜타임스가 ‘서울에서 꼭 들러야 할 곳’으로 보도할 만큼 획기적인 공간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실크 백에서 19세기 초 영국의 나무 백, 1억 원짜리 에르메스 버킨 백 빈티지까지 핸드백의 역사와 미래를 한곳에 담은 박물관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도산공원 플래그십스토어 용지를 얻기 위해서는 7년 전부터 애를 썼다. 경매 낙찰을 위해 제일모직과 마지막까지 경쟁을 벌였다. 취득세까지 포함해 300억 원을 ‘베팅’한 끝에 그 땅을 얻었다. 매장 용지 확보와 박물관 준비 기간을 포함하면 본격적인 브랜드 론칭까지 7년이 걸리는 셈이다.

박은관이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은 1975년, 본격적으로 사귄 것은 1978년, 헤어진 해가 1980년, 다시 만난 날이 1984년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랑이 운명이 됐듯이 0914도 오랫동안 여성들과 함께할 가방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돌봐주고 싶은 것이다.

운명의 핸드백

박은관을 핸드백의 세계로 이끈 것은 1979년 연세대 독문과 사무실에 들어온 모집공고 한 장이었다.

“아버지가 원양어업을 크게 하셨는데, 오너 아들이라고 바로 임원이나 사장으로 가기는 싫었어요. 아버지께 ‘3년만 맨 땅에서 직장생활을 해보고 싶다’고 하고 취직자리를 알아봤죠. 그때 학교에 붙어 있던 핸드백 제조 수출업체 ‘청산’의 모집 공고를 보게 됐지요.”

이름 모를 중소기업. 그것도 여자들이 메는 가방을 만드는 회사. 아버지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기집들이나 들고 다니는 걸 사내가 왜 한다는 거냐”는 호통이 떨어졌다. 하지만 바다를 누비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왔던 박은관에게는 일도 하고, 돈도 벌고, 해외여행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1980년 4월 이탈리아 피렌체. 해외 출장을 온 박은관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남자들이 노란색, 초록색 같은 색깔 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출장비를 탈탈 털어 색깔바지 6벌, 티셔츠 11벌을 샀다.

“그날 너무 큰 문화 충격을 받았어요. 이런 색깔의 옷도 있구나 하면서…. 너무 놀랐고, 기쁘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더라고요.”

박은관은 핸드백과 패션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이 개발한 디자인의 가방을 미국 뉴욕과 일본 도쿄의 여성들이 메고 다니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았다. 3년만 다니려던 회사였는데 어느새 7년이 흘러갔다. 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곧바로 대리를 달았고, 6개월 만에 과장, 1년 만에 차장, 또 1년 만에 부장이 됐다. 영업부장 직함을 달았을 때의 나이가 불과 29세였다. 그가 입사할 때 매출이 600만 달러(약 67억 원)였던 작은 회사는 7년 뒤 8000만 달러(약 89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1987년 그는 자기 회사 시몬느를 차렸다. 32세의 새신랑 청년에게 주변에서는 ‘봉제업이 사양길인데, 왜 막차를 타려 하느냐’고 말렸다. 하지만 핸드백을 운명으로 느낀 박은관은 곧 고급 핸드백이 전성기를 맞게 될 거란 믿음이 있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먼저 적장의 목을 베라.’ 박은관은 1등 브랜드를 고객으로 만들어야 다른 회사들도 자신을 찾을 거라 믿었다. 뉴욕 디자이너 도나 카란의 컬렉션 백을 하나 샀다. 명동 장인에게 부탁해 그것과 똑같은 가방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도나카란 본사는 박은관의 견본 백을 보고는 한마디로 뒤집어졌다. 가방의 품질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거절 의사를 밝혔다.

“우리 고객은 메이드 인 프랑스, 메이드 인 이탈리아 태그를 보고 기꺼이 비싼 가방을 사는 겁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통할까요?”

박은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앞으로 아시아는 가방의 생산기지가 될 거고, 더 지나면 소비시장이 될 텐데 아시아에 네트워크 기반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딱 100분의 1 물량만 줘보세요.”

도나카란 측은 또박또박 설득을 하는 낯선 동양인에게 속는 셈 치고 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그는 명동 장인을 더 모았다. 15명 정도가 모였다. 첫 주문을 받은 가방 240여 개의 품질이 만족할 만하자, 도나카란은 주문량을 두 배, 세 배로 늘렸다. 고급 패션 브랜드가 아시아에서 제품을 생산한 첫 사례였다. 박은관의 예상대로 ‘적장’이 넘어오니 다른 패션 브랜드들도 줄줄이 그에게 생산을 의뢰해 왔다. 유럽보다 싸지만 품질은 좋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시몬느는 단순 제조에서 디자인까지 해주는 ODM 회사로 성장했다.

아버지와 바다

“1967년 음력 4월 초사리, 파시(波市).

대연평과 소연평 사이, 3∼4마일 남짓한 섬 사이에 어선들이 가득 차 있다. 어림잡아 적어도 3000∼4000여 척의 어마어마한 덩어리다. 알이 가득 찬, 4월 초사리 조기 산란철을 보러….”

박은관은 중학교 1학년 때 본 파시의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배 수천 척이 떠 있는 바다, 어부들의 노동요, 조기에서 떨어지는 금 비늘, 대포로 쏘아올린 오색의 폭죽들…. 지금은 사라져버린 바다 위의 장, 파시의 장면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대학생이 되어서 그때의 기억을 꺼내 글로 남겼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짧으면 3주, 길면 6주 동안 배에서 살았다. 어군(魚群)을 만날 때 어부가 짓는 그 순수한 웃음을 지금도 생각한다. 아내와의 사랑이 담긴 핸드백 0914에는 아버지와 바다에 대한 기억도 담겨 있다. 브랜드 로고가 물고기다. 브랜드의 뿌리를 바다에서 찾은 것이다.

“아버지가 제게 알려 주신 건 두 가지예요. 바다와 정원입니다. 인천 북성동 아버지의 정원에는 대추나무, 목단나무, 벚꽃, 라일락이 가득했죠. 어느 날 아버지가 잘생긴 소나무를 보시며 ‘세월의 깊이는 돈으로 살 수 없단다. 아무리 큰 돈을 들여 오래된 나무를 정원에 심어 놓더라도 그 나무에서 향기가 나려면 돌에 이끼가 끼고, 나무가 뿌리를 내릴 만한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의 무게를 돈으로 사려는 만용을 부리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냥 막 태어난 것에 샤넬 넘버5 향수를 사서 뿌리기는 싫습니다. 0914가 나름의 향기를 내려면 20년 이상 걸릴 거예요. 저는 한국식의 전통 있는 핸드백 브랜드 탄생을 위한 마중물 역할이라도 하고 싶어요.”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의왕=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박은관#시몬느#0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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