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풍자했다고 안기부 불려가기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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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 등록 예고된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 김성환 화백

김성환 화백은 “나이가 드니 정치나 시사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든다”고 했다. 그 대신 인간과 자연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요즘 마당에 심어놓은 나무로 찾아오는 다양한 새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김성환 화백은 “나이가 드니 정치나 시사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든다”고 했다. 그 대신 인간과 자연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요즘 마당에 심어놓은 나무로 찾아오는 다양한 새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광복 후 몇몇 신문에 만화가 연재됐는데, 모두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어요. ‘왜 신문에 만화를 싣느냐’는 독자의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죠. 그런데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을 그리기 시작하니까 다른 신문도 따라하더라고요.”

만화를 하찮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 정권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 불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어렵게 낳은 ‘자식’이 문화재가 되기 때문인지 22일 경기 성남시 분당 자택에서 만난 김성환 화백(80)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각진 얼굴에 넉넉한 풍채, 깐깐하면서도 친근한 말투, 콧등에 얹은 안경까지 ‘고바우 영감’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1955년부터 1980년까지 본보에 연재된 ‘고바우 영감’은 한국 최장수 시사만화다. 이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로 옮겨가 2000년 9월까지 총 1만4139회가 연재됐다. 이 중 문화재청이 학술적 사료적 가치가 높다며 문화재로 등록하기로 한 작품은 김 화백이 소장한 원화 6496장과 본사가 소장한 4247장을 더해 총 1만743장이다.

▶본보 12월 21일자 A31면 참고…‘고바우 영감’ 원화 문화재 된다

김 화백은 본보 문화부 기자였던 이상노 시인의 청탁으로 1955년 2월 1일자부터 본보에 ‘고바우 영감’을 연재했다.

처음에는 한 컷 만평과 네 컷 만화인 ‘고바우 영감’을 함께 그렸다. 만평에선 시사적인 내용을, ‘고바우 영감’에선 소소한 일상을 다뤘다. 하지만 만평을 그만둔 뒤 ‘고바우 영감’에 시사적인 소재를 녹여 넣기 시작했더니 독자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신문 만화로는 처음으로 ‘허위 보도’라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의 제재를 받은 ‘대통령 관저의 변소 치우는 인부’ 에피소드는 두어 달 연구한 끝에 나온 작품이다. “그때 고작 450원 벌금형을 받았는데, 그 돈마저도 독자들이 동아일보사 현관 앞에 놓고 갔지요. 하지만 이 만화가 필화 사건으로 불거지면서 이승만 정권은 큰 타격을 받았죠. 나는 약하게 맞고 상대방을 1만 배쯤 맞게 하는 방법을 연구했는데 이 전략이 먹힌 겁니다.”

만화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고바우 영감’에 대한 검열도 독해졌다. 하루에 네 번이나 소재를 달리해가며 그린 적도 있었다. “고바우 영감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검열관은 이 모습이 구속을 당해 꼼짝 못하는 것을 상징한다며 트집을 잡더군요. 이런 상황이 1년여 계속되니 만화가 싱거워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자 독자들이 ‘고바우 영감’ 이상해졌다고 해요. 심지어 ‘김성환이 죽고 가짜가 앉아서 그린다’는 루머까지 돌았죠.”

김 화백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대학생일 무렵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어느 모임에서 만났는데 저를 빤히 쳐다보더군요. 아마 부모에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나 봐요. 아버지를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허허.”

신문의 시사만화 시대를 연 김 화백은 시사만화가 사라지는 추세를 안타까워했다. “신문에 시사만화가 없다는 건 중요한 무기 하나를 버린 것과 같아요. 민주화가 됐어도 우리 사회는 일상화된 억압이 남아있지요. 이를 비틀어 볼 수 있는 시사만화는 여전히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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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고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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