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돌아오지 않는 아들

  • 입력 2009년 7월 24일 03시 00분


안학수 하사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1967년 납북되었다. 호찌민 시 인근에서 베트콩에게 납치되어 북한에 인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한국군 장병 한 사람당 당시로서는 거액인 3000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베트콩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1975년 탈북을 시도하던 안 하사는 체포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공개 총살된다.

지난 43년 동안 국방부 공식 병적기록부에는 안 하사가 ‘탈영 및 월북자’로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축적된 증언과 자료에 근거해 국방부는 지난달 그를 ‘국군포로 추정자’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추후 유해가 송환되면 안 하사는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중천을 떠돌던 안 하사의 원혼(원魂)이 쉴 계기는 마련되었지만 가족이 겪은 고통은 그대로 남았다.

그나마 안 하사는 ‘다행’인 경우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에서 실종된 파월 장병들이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한 국내 신문이 1992년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잊혀졌다. 6·25전쟁 때 포로가 된 국군 병사가 50년 만에 북한을 탈출해 연락해 와도 무성의하기 짝이 없었던 한국 정부의 대응을 돌이켜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2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납북된 국군포로 가운데 아직 수백 명이 북한에 생존해 있지만 한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이들은 거의 완벽히 망각된 존재인 것이다.

‘월북자’로 몰린 안 하사의 원혼

역사의 희생양으로 여기기에는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다.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나라의 부름을 받아 총을 든 우리의 자식들이 사지(死地)에 던져졌는데 정작 이들의 운명을 국가가 외면한다면 나라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국민 모두가 병역의무를 져야 하는 우리 상황에서 이 질문의 울림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정치철학적으로 보면 국가의 뼈대가 곧 군대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정치의 본질이 무정부 상태라는 걸 감안하면 국가가 존속하기 위한 최소조건은 무력에 의한 국가 방위에 있는 것이다. 이는 무력 숭배나 군대 만능주의를 부추기는 발언이 아니라 민주국가에도 정확히 적용되는 진실이다. 예컨대 고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번영을 가져온 일차 요인도 군사력이었다. 모든 아테네 시민은 18세부터 60세까지 병역의무를 졌고 비상시기에 언제든지 소집되어 국가를 위해 싸워야 했다. 시민교육의 큰 부분이 달리기와 창던지기 등의 체력 단련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점에서 민주국가 아테네도 군국주의 국가 스파르타와 큰 차이가 없었다. 강건한 신체를 지녔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전투 중에 보인 담대함은 전성기 아테네 시민의 일반적 모습이었다.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용어가 민중의 지배를 뜻하지만 이때 데모스는 민중이 소속된 행정구역임과 동시에 군대의 편제를 의미했다.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는 강력한 무력 위에서 비로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제국 번영의 초석도 시민군의 충성심에서 비롯되었으며 ‘황제(emperor)’라는 말 자체가 ‘최고사령관(imperator)’에서 나왔다. 군복무가 공직의 필수 요건이었으므로 귀족과 장군일수록 최전선에서 싸웠으며 그 결과 적잖은 황제들이 종군 중 사망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군복무는 시민적 명예였고 국가는 전사자와 전상자(戰傷者)를 극진히 예우했다. 애국심에 불타던 시민군의 자리를 용병이 메웠을 때 로마의 쇠퇴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력이 받쳐 줄 때 조선왕조도 번성했다. 그러나 지배계층의 군역이 면제되고 ‘아랫것’들만 국방의 의무를 지는 나라가 튼튼히 지속될 리 없다. 외적 앞에 한없이 무력했던 지배층이 백성에게 무한히 가혹했던 것도 조선이라는 국가의 본질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누구보다 먼저 수도를 버린 채 도망을 갔고 압록강 넘어 대륙으로의 망명을 명나라에 구걸한다. 그런 임금은 정세가 안정되자마자 의병장들을 고문해 죽이고 충무공을 숙청한다.

국군포로 절규에 응답해야

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시민에게 안심하라고 거짓 방송을 남긴 뒤 맨 먼저 남쪽으로 도피했음에도 수복 후에는 정부가 잔류 시민을 부역 용의자로 탄압했던 것과 겹치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현대 한국사회 상류층 자제의 병역 면제율이 평균적 시민에 비해 월등히 높은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삶의 황금시절을 나라에 바친 젊은이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군복무 중 적의 포로가 되어 신음하거나 생명을 잃고 다친 청년들의 아픔이 망각되는 곳에 제대로 된 나라가 설 수는 없다.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엮음)의 절규에 대한민국은 언제 응답할 것인가.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pjyoon5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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