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택]‘깨어 있는 시민의 힘’

  • 입력 2009년 7월 20일 20시 31분


지난 주말 1만6000명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묘지를 다녀갔다. 평일에는 3000명 정도였다. 그곳에 간 사람들이 놓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주 작은 비석’의 바닥에 새겨진 글귀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아주 작은 비석’ 건립위원회가 노 전 대통령의 삶과 정신을 가장 함축적으로 웅변한다는 이유로 골랐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란 말은 그가 재임 중에 자주 한 말이다. 2007년에만도 최소한 네 차례나 비슷한 발언을 했을 정도다. 그의 말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을 연상시킨다. 혼미한 정국을 바라보며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노 전 대통령의 묘지를 찾아가고 지난해 촛불시위 때 거리에 나섰거나 청와대로 몰려간 사람들이 모두 ‘깨어 있는 시민’ ‘생각하는 백성’이라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 정도 수준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쉽게도 내겐 그들이 모두 진정으로 깨어 있는 시민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지난해 촛불시위 때 만난 사람들 가운데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영향이 컸다. 한 사람은 촛불집회 초기인 5월 3일 저녁 청계광장에서 만난 주부였다. 아기를 업은 그는 MBC PD수첩과 인터넷을 통해서 광우병에 심각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친구들에게 휴대전화로 “지금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집에 있느냐”면서 당장 나오라고 윽박지르다시피 했다.

또 다른 한 사람. 그는 인터넷 매체들이 ‘제2의 4·19’를 연상시키는 선동적 기사를 쏟아낸 5월 31일 밤 12시 무렵 청와대 입구 시위대 속에서 ‘이명박은 나와라’고 외치던 30대 남자였다. 그는 네댓 살 정도 되는 아들을 안고 있었다. 우연히 그의 뒤에 서 있다가 들은 부자(父子)의 대화는 충격적이었다. “이명박이 어딨어?”라는 아들의 질문에 아버지의 답변은 “도망갔어”였다. 아들이 “왜”라고 묻자 그는 “맞아 죽을까봐”라고 답했다. 다시 아들이 “대통령인데 왜 죽여”라고 물었다. “나쁜 짓 했으니까. 지는 안 먹는 미친 소를 국민 보고 먹으라고 하니까”라는 답변이 돌아갔다.

부자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그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모두 그 정도 수준의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인터넷과 방송의 거짓 정보와 정치적 선동에 넘어갈 정도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라는 암울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1950년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된 이래 지금은 중졸자의 거의 전부가 고교에 진학하고 다시 고졸자의 84%가 대학에 간다. 대통령이 누구나 대학에 간다고 걱정할 정도의 고학력 사회가 됐다. 이런 나라의 많은 시민이 내 기억 속의 두 사람과 같은 수준이라면 교육에 문제가 있어도 단단히 있는 것이다. 합리적 토론과 타협이 불가능한 정치의 영향이 가장 클지도 모른다.

스스로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조직한 온갖 단체들이 넘치도록 많은 사회가 왜 이 지경인지는 사회적 공론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깨어 있는 시민들이라면 여의도의 저 막장정치부터 끝낼 묘수를 찾아야 한다. 당장 오늘부터 국회 마당에서 촛불이라도 들어야 하나.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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