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40>

  • 입력 2009년 7월 20일 14시 01분


하얀 거짓말! 모를수록 약이 되는 이야기들! 돌이킬 수 없는 역사로 남는 삶들!

볼테르가 사라의 검은 손가락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가 다시 물었다.

"정말 꼭 알고 싶어요?"

"알고 싶어!"

"답을 안 하면, 절 미워할 건가요?"

어리석은 물음이었다. 볼테르가 피식 웃자 사라도 따라 웃었다. 한두 가지 비밀을 감췄다고, 오해하고 질투하고 헤어질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러기엔 둘 다 너무 많은 실패를 맛보고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볼테르는 글라슈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사라는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88퍼센트가 기계몸으로 바뀌었다.

"답을 해도 절 더 사랑해주진 않겠지만, 알겠어요, 가르쳐 드릴게요."

사라가 사자머리를 좌우로 힘껏 흔들었다. 기억이 머리카락 끝에 송알송알 달린 것처럼.

"암벽에서 떨어졌을 때, 특히 왼쪽이 엉망이었죠. 왼쪽 콩팥과 폐를 심하게 다쳐 떼어냈고요. 왼쪽 눈도 인공 수정체로 바꿔야 했습니다. 왼팔과 왼 다리도 기계팔과 기계다리를 달았고요. 56퍼센트가 기계몸이었죠. 처음 기계몸을 천연몸에 잇고 나면, 신체의 불균형도 문제지만 극심한 우울증이 찾아들죠. 도무지 자신이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거예요. 사이보그로 살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이런 생각도 들고. 정신적 충격은 고스란히 남은 부위들, 그러니까 오른쪽 천연몸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답니다. 병원에서는 병명을 꼭 집어내진 못했지만, 반 년 안에 천연몸의 장기들도 나빠지고, 기계몸 비율도 70퍼센트를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하더군요. 그때 그 병원 간호사 중 한 사람이 은밀히 권했답니다. 장기들이 병들기 전에 차라리 먼저 떼어내라고. 그럼 충분한 값을 받게 해주겠다고."

"천연 장기 밀거래를 했단 말이야?"

"그땐 자포자기 심정이었어요. 병원비도 모자랐고……. 몇 몇 장기를 넘기고 받은 돈은 병원비를 다 내고도 꽤 많이 남았지요. 헌데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이니 제 통장에 넣어 두진 못했고요. 친구에게 부탁해서 맡겼답니다. 그 친구도 만일을 대비해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형사에게 그 돈을 부탁했대요."

"변주민 선수 얘기야?"

"맞아요. 변 선수가 죽고 나서 저는 곧 그 형사를 찾아갔어요. 그리고 돈을 돌려받았답니다."

"그랬군. 그래서 변 선수가 살해된 후 보안청 형사들이 사라를 못 살게 괴롭힌 거군. 한데 그 형산 참 양심적인 사람이었나 봐? 변 선수가 죽었다면 그 돈을 사라에게 주지 않고 떼먹어도 그만인 거 아냐?"

사라가 눈을 흘겼다.

"세상에 온통 악인만 가득 차 있다고 보세요? 악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훨씬 많답니다. 이제 절 미워하지 않을 거죠?"

볼테르가 그녀의 입술을 찾아서 비비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사라는 엉덩이를 밀어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그가 허리를 들려고 하자, 손톱으로 할퀴며 쓰러뜨렸다. 볼테르의 가슴에 생채기가 생겼고 붉은 피가 실금을 흐르는 물처럼 비쳤다. 사라가 긴 혀로 그 피를 핥으며 엉덩이를 돌렸다. <바디 바자르> 최고의 무희 서사라의 블랙 댄스였다.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고통도 뜨거웠고 쾌락도 뜨거웠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몸은 어느 것이 고통이고 어느 것이 쾌락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격한 몸짓과 탁한 신음은 춤을 지우고 한 바탕 격투로 옮겨가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사라는 볼테르와 연이어 두 번 사랑을 나누었다. 원한다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품었을 것이다.

배틀원 결승전을 준비하느라 지친 탓일까.

두 번째 사랑을 마친 후 사라가 꼭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자, 볼테르는 곧 잠이 들었다. 사라는 그 자세 그대로 한 시간 남짓 볼테르의 체온을 느꼈다. 이윽고 사라는 소리 없이 일어나서 볼테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금방 다녀올게. 내 사랑!"

사라는 고양이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납작한 경주용 자동차가 어둠을 가르며 달려와서 섰다. 뒷좌석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운적석은 텅 비었다. 사이버 비서가 친절하게 물었다.

"출발할까요?"

"그래! 서둘러 줘."

자동차는 사람 하나 없는 새벽 거리를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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