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조지형]개헌 논의의 조건

  • 입력 2009년 7월 3일 02시 59분


영화 ‘타짜’의 흥행에도 불구하고 나는 화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화투가 왜색(倭色)이 짙은 놀이라기보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에서다. 그림과 숫자의 짝짓기에 약한 탓이기도 했지만 화투를 가르쳐 주던 분이 자신이 불리할 때마다 규칙을 바꿨다. 새로운 규칙을 따라가기조차 버거웠던 나는 게임에서 항상 질 수밖에 없었다. 권력은 규칙을 만들고 규칙은 권력을 강화하는 법이다.

세계 피겨계의 움직임이 걱정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다. 국제빙상연맹의 수행평가점수 개정은 ‘국민 여동생’ 김연아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심판의 주관적인 판단 범위가 넓어졌다. 심판의 수가 축소된다면 경기 결과는 더욱 주관성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세계 피겨계가 일본 기업의 후원에 크게 의존하고 일본인 심판이 잔뜩 포진한 상황에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해방정국의 권력을 장악했던 이승만은 내각제로 향하던 건국헌법에 제동을 걸며 새로운 규칙을 삽입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헌법규정을 바꿔버렸다. 대통령제가 아니면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겠다는 이승만의 협박에 제헌국회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규칙을 내세우며 박정희도 유신헌법을 통해 권력의 영구화를 꾀했고 전두환도 ‘80년의 봄’을 독재의 혹한으로 얼어붙게 했다.

국민 모두가 참여하고 성찰해야

1987년도 예외는 아니다. 6·29선언 직전까지만 해도 유신헌법의 독소조항인 국가원수 조항은 삭제 대상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모든 대권주자는 민주헌법의 성취에 백안시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국가원수 조항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게 활용할 권력도구였기 때문이다. 국가원수 조항은 입법·행정·사법 삼권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대통령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됐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대통령은 그런 방식으로 군림했다.

미완(未完)의 민주헌법인 1987년 헌법의 개정은 언젠가는 반드시 성취해야 할 시대적 필요성이다. 그러나 개헌논의에는 몇 가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우선 개헌논의의 개방성 문제다. 개헌은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개방적 방식으로 진행해야 하는 동시에 동서고금을 아울러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메커니즘도 함께 깊이 성찰해야 하는 중대 사안이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대부분의 대통령이 연임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 업적을 대개 첫 임기의 2년 혹은 3년째에 성취했다는 사실도 깊이 헤아려야 한다. 또 미국헌법이 제정된 1787년 이래로 1만여 건의 수정조항 요구가 제시되는 등 수많은 개헌논의를 끊임없이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헌논의가 국정혼란이나 국정중단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거울로 삼아야 한다. 헌법에 대한 끝없는 성찰과 논의야말로 국민으로 하여금 헌법을 더욱 사랑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헌법의 민주성을 제고해야 한다. 헌법은 주권자 국민을 위한 규칙이며 헌법의 근본목적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권력구조 개편에만 관심을 갖고 통치문제에만 신경 쓴다. 헌법이 단지 통치를 위한 문서라면 국민이 헌법을 수호하고 사랑하겠는가. 일본제국헌법의 권위주의적 구조를 모방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제1장)는 권리부분을 따로 분리하여 권리장전으로서 천명하고 헌법을 명실공히 국민을 위한 문서로 승화시켜야 한다.

핵심은 계속 존중할 수 있는 헌법

셋째, 권력에 대한 견제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미국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은 몽테스키외의 말을 인용하면서 삼권 중의 한 부서를 장악한 사람이 또 다른 정부 부서의 권력까지 장악할 때 자유는 위험에 처하고 독재는 고개를 든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입법권뿐만 아니라 예산권과 회계검사권을 장악한 우리 정치체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넘어서 독재와 거의 다름없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견제가 제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한 ‘대통령의 비극’은 계속된다. 대통령의 비극은 헌정구조로서의 독재와 헌정문화로서의 민주체제가 갈등하며 빚어내는 산물이다.

다가오는 제헌절을 맞아 이명박 대통령이 개헌구상을 밝히겠다고 한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국회가 개헌논의를 주도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누가 주도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권력구조 문제도 개헌논의의 중심일 수 없다. 핵심은 살아있는 현실과 역사 속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 헌법을 구상하느냐에 있다.

조지형 이화여대 교수·미국법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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