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재락]울산 지자체 행사장서 사라진 ‘한 말씀’

  • 입력 2007년 5월 1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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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7시 울산 장생포 해양공원.

한국 최초의 포경(捕鯨)기지였던 장생포를 알리기 위해 울산 남구청 주최로 열린 이날 축제의 개막식에서는 흔히 볼 수 있던 모습이 사라졌다.

올해 13회째인 이날 축제에 박맹우 시장과 국회의원 등 대부분의 지역 출신 단체장과 정치인이 참석했지만 이들의 축사는 한마디도 없었다. 민간인 신분인 축제집행위원장의 개회 선언에 이어 추진위원장의 대회사만 있었다.

김두겸 남구청장이 참석 귀빈들을 소개해 주는 것으로 ‘예우’를 대신했다. “축사할 사람이 너무 많아 자칫하면 참석한 관광객들의 반발을 부를 수 있을 것 같아 생략했다”는 남구청은 “앞으로도 단체장과 정치인 축사는 가급적 없앨 것”이라고 밝혔다.

울산 울주군은 지난달부터 군 단위의 주민 체육행사에서 개회식을 하지 않고 있다. “여러 경기장에 흩어져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단체장과 정치인의 축사 위주로 진행되는 개회식에 참석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울주군은 설명했다.

이런 ‘행사 주인 찾아 주기’는 시상식에서도 이어진다. 울산시는 수상자가 관중석을 등지고 서던 시상식장에서의 수상자 위치를 다음 달부터 바꾸기로 했다. “수상자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관중이 볼 수 있도록 배려하자”는 박맹우 시장의 제안에 따른 것.

지난달 29일 부산 모 구청장기 축구대회의 개회식에서는 내빈 소개가 길어진 데 반발한 축구연합회 회원들이 축구를 포기하고 자리를 떠 대회가 취소됐다. 행사의 주인공이 ‘운동장’이 아닌 ‘단상’이라는 관(官) 위주의 고착화된 관행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민선 출범 이후 자치단체마다 “주민을 최우선시하는 행정”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은 일이 주위에 많다. 그중 하나가 각종 행사 때마다 언제 끝날지 모르게 이어지는 단체장과 정치인들의 ‘한 말씀’이다. 참석자들을 가장 지루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정작 본행사는 맥이 빠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관료주의와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 가운데 하나인 단체장과 정치인들의 축사는 이제 “사전 선거운동의 한 방편”이라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자치단체는 물론 중앙 정부와 기업들도 각종 행사에서 ‘주객’이 전도된 일은 없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때가 됐다 . 울산에서

정재락 사회부 ra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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