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조선통신사와 윤손하, 그리고 유민

  • 입력 2007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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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처음으로 조선통신사를 보낸 지 400년이 되는 해다. 이곳저곳에서 기념행사 소식이 들려온다. 통신사 행렬 재현과 그들이 갔던 길을 걸어 보는 행사도 있다.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짚어 보는 학술회의와 관련 책출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럴 때마다 나오는 말이 ‘조선통신사는 한류의 원조’라는 표현이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릎을 쳤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류의 원조로 평가받는 조선통신사

최근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을 지낸 하사바 기요시(波佐場淸) 씨가 쓴 ‘코리아 한화(閑話)’라는 칼럼집을 읽다가 흥미로운 인물을 만났다. 교토 출생의 재일동포 2세 신기수(辛基秀).

칼럼에 따르면 일본인과 조선인의 경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그는 1970년경 고서 시장에서 두루마리 그림 하나와 만난다. 그림 속의 일본 민중은 동경의 눈빛으로 조선통신사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생각한다. ‘이거라면 일본인과 조선인의 벽을 허물 수 있겠다’고. 그는 일본 곳곳에 있는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내 1979년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이 영화는 일본에 독립영화 붐을 일으킨다. 조선통신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데는 그의 공헌이 컸다. 그는 한일 공동 월드컵 분위기로 들떠 있던 2002년 7월 병상에서 필담으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마음을 열고 진짜 교류를 시작했다. 마치 조선통신사가 다시 온 것 같다.” 3개월 뒤 그는 세상을 뜬다. 향년 71세.

신 씨에게 조선통신사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였다. 그는 조선통신사를 일생의 연구 테마로 삼았다. 칼럼은 그런 신 씨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 어느 일본 기자의 책도 소개한다. ‘신기수와 조선통신사의 시대-한류의 원점을 찾아서.’ ‘한류의 원점’이라는 부제가 눈길을 끈다.

조선통신사가 ‘한류의 원점’이나 ‘한류의 원조’라면 요즘 일본의 한류 붐은 한류의 부활, 한류 스타들은 조선통신사의 후예쯤 될까. 그 정점에 ‘겨울연가’의 ‘용사마(배용준)’와 ‘지우히메(최지우)’가 있다. 그러나 기자는 ‘한류’라는 말이 나올 때면 다른 연예인을 떠올린다. 윤손하와 유민이다.

윤손하는 2001년 NHK 드라마 ‘다시 한 번 키스’로 일본 연예계에 데뷔했다. 청순한 한국인 여가수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인의 일본 드라마 출연 1호. 그 후 ‘파이팅 걸’ ‘굿럭’ 등의 드라마와 CF 출연, 활발한 방송 활동으로 일본에서도 제대로 대접받는 연예인으로 성장했다.

윤손하의 대칭점에 있는 게 유민이다. 일본인인 그가 ‘8월의 크리스마스’에 반해 한국에서 연예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 자체가 당차다. 그도 윤손하와 같은 2001년에 드라마 ‘우리집’으로 한국에 얼굴을 알렸다. 일본인의 한국 드라마 출연 1호. 그도 이젠 스타가 됐다.

두 사람의 인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이방인’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윤손하가 대한해협을 건너가 몸으로 부딪치며 한류의 씨앗을 뿌리고, 유민이 후에키 유코(笛木優子)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한해협을 건너와 한류 확산에 기여한 점은 평가해야 한다. 그들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류 스타들도 못한 일이다.

문물과 인물이 조화된 한류라야 장수

그러나 조선통신사와 요즘의 한류 붐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보이는 게 마음에 걸린다. 조선통신사는 문물(文物)이 중심이었고, 인물(人物)은 다음이었다. 일본 민중은 통신사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간 ‘조선의 문물’에 동경의 눈길을 보냈다. 뭔가 배워서 간직하고 넘겨줄 게 있었다는 뜻이다. 400년이 흘렀는데도 일본에 숱한 조선통신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요즘은 어떤가. 한류의 콘텐츠가 아니라 한류 스타라는 인물만이 열광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문물과 인물이 뒤바뀐 것이다. 동경할 만한 문물이 수반되지 않는, 스타 중심의 한류라면 얼마 못 가 한류(寒流)가 될지 모른다. 벌써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만.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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