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아직도 생생한 서애 유성룡의 증언

  • 입력 2007년 5월 15일 19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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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592∼1598)의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그 속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서거 400주년을 맞는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의 현장을 지켰던 인물이다.

국보 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을 포함해 그가 남긴 기록들은 ‘7년 전쟁’ 동안 이 땅에 온갖 기막힌 일들이 벌어졌음을 증언한다. 오늘날 역사를 읽는 사람들은 임금이었던 선조의 처신에 실망하고 백성들의 반응에 충격을 받는다.

무능한 지도자에게 돌 던진 민심

선조는 왜군이 서울로 북상한다는 소식에 안절부절못하다가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간다. 왕이 떠나면서 졸지에 왜군 앞에 무방비로 내던져진 백성들은 임금이 탄 수레에 돌을 던지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압록강 아래 의주까지 피신한 선조는 아예 명나라에 몸을 의탁할 생각이었다.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유성룡은 “대가(大駕·임금이 탄 수레)가 동토(東土·우리 땅)를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다”라며 반대했다.

선조가 조선 땅에 남은 것은 주변의 만류 때문이 아니었다. 명나라는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오면 한 건물 안에 유폐시키려 했다. 그 소식에 명나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이다. 조선은 왕을 떠받드는 절대왕권 국가였다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지도자는 믿기 어렵고 민심은 항상 바뀐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유성룡은 “국가의 위급이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만의 하나라도 희망을 걸 것은 민심뿐이다. 만약 민심이 흩어진다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고 호소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차가웠다. 그는 “병사를 소집하면 모이지 않을 뿐 아니라 모이더라도 군사로 뽑히기를 모면하려는 이들로 가득했다”고 기록했다.

조선 장수들은 군사들이 전장에 나가지 않는다며 부하의 목을 베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군사를 아끼지 않는 장수 아래에 병사가 모일 리 없었다. 유성룡은 “전투를 그르친 장수들을 조정에서는 문책도 안 했다”고 개탄했다. 조선은 이전까지 100년 이상 평온에 빠져 국방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조선은 명나라의 구원병만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명나라는 겉으론 조선에 대한 의리를 내세웠지만 자기 나라 국익을 위한 출병이었다. 왜군이 조선을 지나 명나라 땅에 들어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며 나라를 두세 개로 쪼개 중국의 울타리가 되게 해야 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의 반을 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했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터가 됐고 철저하게 이해타산으로 움직이는 외교 현실 앞에 떨었다.

리더십, 국방, 외교의 측면에서 우리는 오늘날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유성룡은 “환란이 다시 없도록 조심하자”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징비록을 남겼으나 같은 일은 반복되고 있다. 나라를 이끌어 나가겠다는 사람들은 진정한 지도자의 면모를 보이기보다는, 국민은 안중에 없고 권력 다툼과 자기 안위에 매달려 있다. 군 기강과 국방 의지는 흐트러져 있고 여전한 병역비리 속에서 젊은이들은 군대에 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외교정책은 명분과 자주에 치우쳐 물밑의 실리를 놓치고 있다.

400년 전과 닮은 국가현실

유성룡은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전란 속에서 나라와 국토를 보전하는 공로를 세웠다. 그의 서거일(6월 20일)을 앞두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그의 유품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회가 29일부터 열린다. 그가 남긴 기록과 체취를 접하며 반성해야 할 공인(公人)들이 우리 주변엔 너무도 많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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